#13화.
아주머니가 차려준 밥을 다 먹고 일어서려는데 강진이 뭔가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
“약이야.”
“약......이요?”
지음이 종이봉투에 든 약을 꺼내 보았다.
“챙겨 먹어. 나았다고는 해도 하루 이틀은 조심하는 게 좋으니.”
“.......”
지음은 고개를 떨구고 그가 사다 준 약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손끝에서 미끈한 비닐의 감촉이 느껴졌다.
“근데 왜...... 내가 사 준.......”
“네?”
강진이 머뭇거렸다.
왜 목걸이와 반지는 하고 다니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그가 입을 다물었다. 해도 걱정 안 해도 걱정,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지음에게 준 거니 그녀가 어떻게 사용하든.......
지음이 그를 올려다봤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아냐, 약 챙겨 먹어.”
그가 먼저 일어서는 걸 보고 지음은 다시 약봉지를 보았다.
지음이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 그녀에게 약을 사다 준 적은 없었다.
약이 필요한 순간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지음은 혼자일 때가 많았다.
지음이 약봉지를 꽉 쥐었다. 잊고 싶고 덮고 싶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이리 안 와? 이년이!」
「아......!」
재진의 두툼한 손바닥이 지음의 얼굴을 세차게 갈기자, 작고 여린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날아가듯 넘어졌다. 그녀의 나이 겨우 아홉이었다.
흙바닥에 쓸린 손바닥이 따끔거렸지만, 지음은 그보다 그 후에도 끝나지 않을 폭력이 두려웠다.
일어나는 척하던 지음이 나뒹굴고 있는 신발을 주워 신으며 재빠르게 대문 밖으로 도망쳤다.
「거기 안 서? 지금 나가면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
가고 싶지 않았다. 술만 마시면 아무 죄도 없는 지음을 개 패듯 패는 양아버지라는 작자가 있는 집으로는. 하지만 그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신발도 한쪽밖에 신지 못한 채로 도망치듯 향한 곳은 여덟 살까지 지내던 보육원이었다.
「하아, 하.......」
그 남자의 앞에선 울지도 않았고, 소리도 지르지 않았지만...... 아프고 두려웠다.
지음은 밀려드는 서러움을 꾹 참고 절뚝거리며 보육원 앞에 서서 멍하게 있었다.
처음으로 약이 간절히 필요했던 때였고, 그녀의 곁에 아무도 없었던 때.
그런데 지금은 겨우 체한 게 다이고 다 나았는데도 약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니.......
울컥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지음은 약봉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을 툭, 이제야 흘리고 말았다.
“아 참, 물어볼 게 있는데.......”
거실로 나가려던 강진이 주방으로 다시 들어섰다.
지음은 등 뒤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손등으로 얼른 눈물을 닦았다.
“......무슨 얘기요?”
강진이 그녀의 부산스러움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의 어깨를 슬쩍 짚으며 앞으로 와 물었다. 아까와 달리 지음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이상했다.
“왜 그래?”
“네? 뭐가......요?”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강진 씨 할 말은 뭐였어요?”
지음이 아무렇지 않은 척 강진을 올려다봤다.
“.......”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녀의 벌게진 눈을 보던 강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음이 애원이라도 하듯 강진의 옷깃을 잡고 슬쩍 흔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는 거니까 그냥 좀...... 넘어가 주세요.”
제발.
그녀의 간절함을 읽은 걸까. 강진이 후, 짧은 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진 씨 할 말은 뭐예요?”
“아까 병원 가기 전에 할 얘기 있다고 했는데 못 들었어. 무슨 얘기였어?”
“아.......”
맞다.
지음이 옷자락을 놓고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말하지 않았다가 강진이 곤란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지음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아까 직원들하고 레스토랑에 다녀왔어요.”
“그래, 그러고 나서 체하고 정신을 잃고. 병원까지 다녀왔지.”
강진이 지음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지음은 차마 그와 시선을 마주 보고 말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아서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제 학력과 집안에 대해 물어봐서.......”
“.......”
강진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희라와 미림이 지음에게 뭐라고 말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지음이 아팠던 것도 이제 이해가 갔다.
분명 희라와 미림의 성격대로라면 지음의 집안, 학력으로 무안을 주고 식사 예절 운운하며 제대로 밥을 먹을 수도 없게 했겠지.
지음을 데려다만 놨지, 누구라고 제대로 소개도 하지 못한 강진의 잘못이었다.
“고등학교 중퇴에, 보육원에서 지냈다는 걸...... 얘기했어요. 미안해요, 미리...... 강진 씨와 의논했어야 했어요.”
화가 나서 앞뒤 안 가리고 그렇게 다 말했어도 안 됐고.
지음은 마지막 말을 삼키고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잠시 조용히 지음의 얘기를 듣던 강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신경 쓸 거 없어.”
머리 위로 내려앉는 목소리가 따뜻해서...... 지음이 고개를 들었다.
강진의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이 지음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
“신경 쓰지 마. 그런 쓸데없는 걸 신경 쓰니까 아프잖아.”
“하지만.......”
“고생했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해.”
“.......”
푸스스. 그가 손을 흔들자, 머리 위에서 머리카락이 눌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잠이 올 것처럼 느른해져서 지음이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는데, 어쩐지 그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
똑똑.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정후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숙였다. 강진은 그가 들어오는 데도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말했다.
“오늘 전시기획팀과 점심 약속 잡아둬.”
“아, 네. 어디로...... 아, 가까운 곳으로 알아서 잡아두겠습니다.”
“아니.”
“......?”
정후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강진이 고개를 들었다.
“OO레스토랑으로. 풀코스 예약.”
그곳은 희라와 미림이 지음을 데려갔던 곳이었다.
가서 무슨 얘길 어떻게 했기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사람을 몰아붙인 건지. 다신 그러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강진에겐 그럴 의무가 있었다, 비록 서류상으로만 남편이 되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니 강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 네, 알겠습니다.”
“한 가지 더. 한지음 씨는 나랑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나머지 직원은 박 비서가 책임지고.”
“네. 알겠습니다.”
정후가 나가자 강진은 도로 서류에 파묻혀 일을 했다.
***
점심시간은 금방 왔다.
희라와 미림은 미리 정후와 함께 예약해 둔 레스토랑 자리에 앉아 있었다. 통유리창으로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한적하고 조용한 자리였다.
강진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 기대되는지 희라와 미림의 얼굴엔 화사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여기 음식 진짜 맛있잖아.”
“와 봤어?”
미림의 말에 정후가 물었다.
“어, 희라 언니랑 와 봤지. 근데 진짜 강진 오빠가 사 준대? 웬일이야?”
“우리 요새 너무 고생하니까 안쓰러웠나 보지.”
희라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근데 언니, 지음 씨는 쏙 빼놓고 우리끼리만?”
“걔야 뭐 이제 입사했는데 고생이랄 게 있어?”
“하긴, 그건 그렇다.”
정후는 희라와 미림의 대화를 들으며 작게 한숨을 쉬고 물을 마셨다. 오늘 점심시간이 그리 편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지금이라도 그냥 따로 먹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잠시 뒤, 강진이 들어섰다.
그냥 존재 자체가 화보인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슈트를 입고 레스토랑 안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빛이 나는 듯했다.
희라와 미림이 그를 보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을 흔들었다.
“대표님! 여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
환해지는 희라의 얼굴을 보며 정후가 쓴웃음을 삼켰다.
강진이 자리로 다가서자 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진에게 손짓을 하는데, 그의 뒤로 누군가가 따라오는 게 보이자 멈칫했다.
강진이 제가 앉을 자리 옆의 의자를 빼자, 그의 뒤에 있던 지음이 몸을 드러냈다.
“......!”
희라와 미림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강진은 지음이 앉는 걸 보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다들 앉지? 서 있을 건가?”
“아...... 아니에요.”
엉거주춤 놀란 듯 서 있던 희라와 미림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묘하고도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이 상황이 불편한 정후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숨 막혀 쓰러지는 사람이 꽤 됐을 것이다.
지음은 내심 떨렸지만 그래도 지난 번과 달리 곁에 강진이 있어서 든든했다.
강진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식사 자리를 만든 건 기획팀 실장님과 미림 씨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입니다.”
“.......”
그의 말에 희라와 미림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직원이 필요하다는 말에 한지음 씨를 추천했는데, 정식으로 소개를 하지 않아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소개요?”
고작해야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 대표가 무슨 소개까지 하냐, 희라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강진은 가볍게 무시하고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한지음 씨는 곧 나와 결혼할 사람입니다.”
“......!”
희라와 미림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이번엔 지음 역시도 당황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개였으니까.
정후는 마치 올 게 왔구나, 하는 듯 으음 신음을 내뱉었다.
이곳에서 당황하지 않은 건 강진 혼자인 듯 보였다. 지음이 그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태연하게 물을 마시고 희라와 미림을 둘러봤다.
“기획팀에 사람이 필요했고, 지음 씨는 일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내가 추천한 겁니다. 당분간일 테니 그동안 잘 부탁합니다.”
“대......표님, 결혼......이라니요?”
강진을 보며 묻는 희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와인 잔을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뭐 그 얘긴 차차 하도록 하고. 일단 지음 씨가 회사에 입사한 이상 실장님과 미림 씨는 알아야 할 거 같아서 이렇게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야 서로 실수를, 안 하지. 안 그렇습니까, 실장님, 미림 씨?”
“......!”
마지막 말을 잇는 강진의 눈빛이 섬뜩하리만치 번뜩였다. 말에 뼈가 있었다. 그 뼈에 희라와 미림은 푹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이건 경고였다, 지음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강진은 희라와 미림이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자, 씩 웃었다.
“자, 이제 드시죠.”
“.......”
강진은 지음을 한 번 돌아보고는 그녀가 집어 든 것과 같은 종류의 포크를 들었다. 나머지 포크는 옆으로 밀어둔 채 음식을 먹었다.
희라와 미림이 서로를 마주하고 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