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비를 맞아서인지, 체기가 있어서인지. 지음은 정신을 잃고 나서도 한동안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는데 자신이 강진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쓰고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 지음은 눈을 뜨자마자 강진의 그런 모습을 보았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까지는 벽을 짚으며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깨어났어? 어떻게 된 거야?”
“.......”
그건 지음이 강진에게 묻고픈 말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지음은 제 몸 위에 덮어둔 담요를 걷으며 몸을 슬쩍 일으켜 창밖을 보았다. 비는 그쳐 있었다.
“......어디 가요?”
“병원.”
“병원......이요?”
강진의 말에 지음이 그를 돌아봤다.
병원엔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지음은 꽉 다문 입술과 굳은 턱선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와 만나서 살게 된 건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가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일 때의 표정은 알 수 있었으니까.
“지금 당신 얼굴이 어떤 줄 알아?”
“.......”
그것도 지음이 하고픈 말이었다, 지금 당신 얼굴이 어떤 줄 아냐고.
“회사에서 쓰러진 건 기억나?”
“네.......”
강진이 지음을 슬쩍 보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지음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쓰다듬었다.
저 앞으로 높게 올라간 흰 건물이 보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돌아가는 건 어려워 보였다.
“그냥 좀...... 체한 거예요. 병원까지 갈 필요 없이 약만 먹어도 되는데.......”
“직원들이랑 먹는다고 안 했어? 직원이라고는 당신까지 겨우 셋인데. 어디 가서 뭘 먹었기에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쓰러지기까지 한 거야?”
“그냥...... 레스토랑에 갔다가.......”
말을 잇던 지음이 멈칫했다. 정신이 들고 나니 레스토랑에서 자신이 한 짓이 떠올랐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에둘러 말할 수도 있었고 참았다가 강진과 의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음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무시하려고 작정을 한 사람들 앞에서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걸 제 입으로 먼저 말해버렸다.
괜히 말이 돌 수도 있고 아무래도 강진이 알아야 할 거라는 생각에 지음은 숨을 골랐다.
“저기...... 할 말이 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차가 멈춰 섰다. 어느새 병원 앞이었다.
강진은 벨트를 풀고 문을 열며 말했다.
“일단 병원부터 가.”
“.......”
***
체해서 조금 힘들었을 뿐인데 수액까지 맞고 나서야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랬음에도 강진은 잔뜩 찌푸린 얼굴을 펴지 않았다.
“입원하라니까.”
“괜찮아요.”
이런 거로 입원이라니.......
지음은 별거 아닌 걸로 병실을 차지하고 있는 건 어쩐지 미안했다. 그래서 입원하라는 강진의 뜻을 기어이 꺾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어느새 젖었던 옷도 말라 있었다.
부드럽게 출발한 강진의 차는 회사를 스쳐지나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지음이 옆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회사 건물을 돌아보다가 물었다.
“어디...... 가요? 회사는.......”
“오늘 회사 생각은 접어둬. 집에 가서 쉬도록 해.”
“하지만...... 아직 퇴근 시간도 많이 남았고, 실장님께 외근하고 보고도 없이 나왔어요.”
“알아.”
지음이 작은 사이드미러에서 회사가 사라지는 걸 보고 강진을 향해 돌아앉았다.
“회사로 가야 해요.”
“내 회사야. 대표는 나라고. 굳이 지금, 그 몸을 하고 가지 않아도 돼.”
“.......”
결국 강진의 뜻대로 지음은 얼마 후 집 앞에 도착했다.
지음이 내리자 강진 역시 그녀를 따라 내렸다.
강진이 지음의 곁에서 걸으며 재킷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 따뜻한 느낌에 혼자 가도 된다는 말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아까...... 비에 젖었던데. 왜 비를 맞고 다녀? 어디 다녀왔어?”
“그냥 일한 거예요.”
“비를 맞으면서까지 할 일이 대체 뭔데?”
“직장...... 잡아주신 건 고마운데요, 이제 그것도 제 일이니까....... 일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당하게 대꾸하고 걷는 지음을 보다가 강진이 그녀의 팔을 붙들어 세웠다.
“좋아, 다 좋은데.......”
“.......”
지음의 맑은 눈동자가 강진을 올려다봤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맑은 눈.
‘내 마음은 이렇게 복잡하고 갈피를 잡을 수도 없는데...... 이 여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던 강진이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
“그렇게 다른 데서 비 맞고 다니고, 밥 먹고 체해서 아프고...... 그러지 마.”
말을 마친 강진이 그녀를 붙든 손에 힘을 탁 놓았다.
그의 짙고 깊은 눈매를 보며 지음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 속이 간질간질하고 손끝이 저릿했다. 처음 느껴보는 묘한 기분에 가만히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떨궜다.
강진의 크고 따뜻한 손이 슥 올라와 그녀의 머리를 흩뜨리듯 건드렸다.
“.......”
“......가자.”
강진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쉬고 있어.”
“......네.”
지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두고 돌아서던 강진이 멈칫했다. 지음의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는데 강진이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거실에 덩그러니 서 있는 지음의 모습 위로 은주가 겹쳐 보였다.
“.......”
눈을 천천히 깜빡이자, 지음의 모습이 또렷해지며 은주의 환영이 흐릿해졌다.
왜...... 이러는 걸까.
강진은 당혹스러움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지음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서서 집 밖으로 나와서야 지음의 모습도 은주도...... 흐릿해졌다.
강진이 주먹을 꽉 쥔 채로 심호흡을 했다.
***
한편, 이란은 미림과의 통화 이후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어제 말했던 그 여자 있잖아.」
「......강진 오빠 집에 갔을 때 봤다고 했던 여자! 오빠랑 키스했다는......! 지금 그 여자 우리 화사에 와 있어!」
이란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항상 통화를 녹음하는 버릇이 있었기에 녹음된 미림의 말을 몇 번이고 돌려 들었다. 그래도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차강진이, 지금까지 여자를 거들떠보지 않던 강진이가 집 근처에서 키스를 했다고? 거기다 회사 직원으로 들였다고? 말도 안 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하고 있는 미림을 닦달할 수 없어서 혼자 속을 끓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방에서 서성이던 이란은 미림의 소리가 들리자마자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박미림!”
미림이 미처 신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이란이 그녀의 팔을 꽉 붙들고 이끌었다.
“아, 엄마, 왜 그래?”
“......이리 나와봐, 글쎄!”
미림은 벗던 신을 도로 신고 이란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거실 창으로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멀어지자 그제야 이란은 미림을 놓아주었다.
“말해봐, 이제.”
“아우, 아파라. 뭘?”
미림이 팔을 문지르며 이란을 올려다봤다.
“아까 전화로 말했던 거 말이야. 강진이가 누구랑 뭘...... 어쨌다고? 그 여자애가 회사로 들어온 게 확실해?”
“어, 엄마. 그렇다니까? 내가 봤던 여자가 맞아. 세상에...... 아무리 계약직이라도 그렇지 이력서도 안 받고.”
미림은 강진이 데려온 지음이 얼마나 엄청난 이력을 가진 사람인지 시시콜콜 읊었다. 학벌이 어떻고 집안이 어떻고...... 미림의 말을 끊지 않고 듣던 이란이 점점 인상을 썼다.
공과 사 구분 확실하고, 매사 빈틈없는 강진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력서도 없이 입사를 시켰다니. 이란은 분명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잘못 본 거 아니고? 그 여자가, 어젯밤에 본 여자가 맞아?”
“그렇다니까. 엄마 그거 물어보려고 나 계속 기다린 거예요?”
“내가 한번...... 만나봐야겠어.”
“엄마가? 엄마가 왜?”
이란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미림이 툴툴거렸다. 이란까지 뭐 대단한 일인 양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니 안 그래도 미운 지음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아직 뭐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엄마가 왜 우리 회사 일까지 신경 써?”
“확실해지고 나면 더 큰일이지. 그 전에...... 내가 걜 한번 봐야겠다.”
미림의 입이 쭉 나오는 걸 보면서 이란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
강진이 돌아가고 난 후, 지음은 천천히 샤워를 하고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잠이 들었다.
얼마 만인지 몰랐다. 그녀를 괴롭히는 악몽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잔 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나서 지음은 천천히 눈을 떴다.
“.......”
다행히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컨디션은 괜찮았다. 체기도 씻은 듯 사라졌고 몸이 가뿐했다.
지음이 천천히 일어나 거실로 나갔는데, 강진이 상의를 탈의한 채로 바지만 입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에선 물이 떨어졌다.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치며 지음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
잘 다녀왔냐고 말하면 될걸.......
지음이 타이밍을 놓쳐 입술만 달싹거리고 서 있는데, 주방에서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밥 차려놨어요. 아이고, 아가씨 일어났네요. 아프다고 하더니 얼굴이 핼쑥하네.”
“......괜찮아요.”
아주머니의 말에 간신히 지음이 입술을 열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몇 가지 차리긴 했어요. 되도록 소화 잘되는 국으로 했으니 먹어봐요. 사장님, 저는 이제 그만 가볼게요.”
“네, 멀리 안 나갑니다.”
아주머니가 강진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가는 걸 보며 지음 역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아주머니가 사라지자 강진이 지음을 돌아봤다.
“몸은 어때?”
“괜찮아요.”
“체한 건 다 나았어?”
꼬르륵. 지음의 대답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녀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지는데 강진이 부드럽게 말했다.
“몸은 정직하네. 금방 옷 입고 나올게.”
“......네.”
그가 뭐라 말할 것처럼 지음을 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벗은 몸, 너른 등이 보기에 좋았다.
지음은 강진이 방으로 들어가는 내내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