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94)

#11화.

희라와 미림은 경멸의 눈길로 그녀를 보며 한마디씩 얹었다.

“학벌도 없고 집안도 그렇고. 대체 뭘 보고 지음 씨를 들인 거래, 대표님은?”

“그러니까요. 아무리 계약직이라고 해도 너무 격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누가 아니래? 요새 대표님 너무 바쁘셔서 그런가 너무 신경을 안 썼다.”

그런 말은 보통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할 말 아니었나. 요즘 뒷담화는 대놓고 하는 거로 바뀐 걸까.

무시하는 말을 듣는 지음의 마음이라고 편할 순 없었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고 속상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사회는 정글이었다. 그녀가 약하고 어리숙하고 아픈 티를 내면 언제든 지음을 물어뜯기 위해 사방에서 맹수가 몰려드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래서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피가 흘러도 슥 닦아버리면 그만인 척. 그렇게 해야 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물을게, 지음 씨. 내가...... 내가 너무 황당해서 그래. 학교를 어딜 나왔다고?”

지음은 저를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눈을 번뜩이는 희라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등학교 중ㅤㅌㅚㅂ니다.”

“세상에.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미림아, 너도 들었지? 고등학교를 안 나왔대.”

희라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미림이가 맞장구를 쳤다.

“언니, 그렇대. 진짜 강진 오빠 제정신 아닌가 봐. 아무리 우리가 아무나 도와줄 사람 필요하다고 했어도...... 어디 청소 아줌마보다 못한 애를.......”

“.......”

차라리 건물 청소를 하겠다고 했으면 좀 나았을까. 그랬다면 마음은 편했을 텐데.

지음은 포크로 음식을 찍어 입 안으로 마구 집어넣다가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아서 힘없이 팔을 내렸다.

저도 모르게 입 안으로 욱여넣은 음식을 씹지도 않은 채 꿀떡 삼켰다.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좁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지음의 표정은 점점 덤덤해졌다. 상처를 받으면서 생긴 일종의 가시 같은 거였다.

“정말 부모님도 안 계셔? 어디 뭐 중소기업 사생아라서 말하기 어렵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고?”

지음은 사람의 혀가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족을 떠올릴 때면 아물지 않은 상처가 건드려져서 아프고 쓰렸다.

지음의 나이 이제 스물넷. 산전수전 겪은 독종이라도 아직 어리고도 여렸다.

희라와 미림은 기막혀하면서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지음을 보고 있었다. 무시와 경멸을 동시에 담은 채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지음이 심호흡을 했다. 이런 일은 피할수록 부풀려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지음이 아무렇지 않아야 다른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입양이 됐지만 안타깝게도 두 분 다 경제적 능력은 없어서요. 중소기업 사생아도...... 아니네요, 제가.”

가슴이 답답했다. 좀 전에 넘어가다 걸린 고기 때문인지, 그녀를 앞에 두고 듣기 싫은 말을 듣게 하고 하기 싫은 말을 하게 한 두 여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몇 마디 더 건네던 희라가 다리를 꼬아 앉았다.

“오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네. 먼저 가봐. 우린 커피 좀 마시고 들어갈게. 아, 지음 씨도 같이 마시러 갈래?”

“글쎄. 지음 씨 취향인 원두가 있으려나.......”

“그러려나....... 뭐......, 가서 우유라도 마시든가.”

희라와 미림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커피, 안 마셔봐서 잘 모르겠네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가 봐.”

끼이익.

지음이 몸을 일으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몸을 돌려 발을 내디뎠는데 명치 끝이 아파왔다. 반도 먹지 못한 음식이 얹히기라도 한 걸까.

지음은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치며 힘없이 레스토랑에서 걸어 나왔다.

***

오후 시간은 지음에게 더욱 힘들었다.

기껏해야 복사를 하고, 회의 자료를 만드는 게 다였지만 손발을 움직이고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어지러웠다. 몇 번이나 숨을 골랐지만 체기가 가시지 않았다.

지음은 미노 화백과 약속한 시간이 되자 몸을 일으켜 희라에게 다가갔다.

“......미노 화백을 만나러 가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돼서 가봐도 될까요?”

“어, 그래. 다녀와. 회사 차 끌고 갈래?”

“실장님도 참, 면허가 있겠어요?”

희라의 말에 미림이 끼어들었다.

“지음 씨, 면허도 없어?”

“......버스 타고 가면 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지음은 서둘러 회사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좀 살 것 같았다. 그 안에선 희라와 미림의 시선이 끈질기게 저를 따라다녔으니까.

그의 집은 외진 곳에 있었다. 지음은 버스에 올라 덜컹거리는 길을 따라서 미노 화백의 집으로 향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버스 안에서 몇 번이고 구토감이 일었지만, 쇳내가 나는 손잡이를 꽉 잡으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느새 미노 화백 집 앞에 선 지음은 끝도 없이 올라간 담을 올려다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쾅쾅쾅.

“작가님, 지우 아트갤러리에서 나왔습니다! 아까 전화 드린 한지음이에요! 계세요?”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두드려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약 십여 분. 결국 지음은 집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몰려오고, 그러고 나서 얼마 안 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가늘게 시작한 빗방울이 점점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앗......!”

지음은 작은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비를 막아보려 하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버스정류장이 있던 도로변까지는 한참 걸어야 했고, 집 주변에 비를 피할 만한 곳은 없었다. 건물도 없었고, 커다란 나무도 없다.

대문과 높은 담장 안으로 몇 그루의 나무가 있었지만, 워낙 담이 높고 두툼해서 나뭇잎을 지음에게까지 넘겨줄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지음은 이미 젖어버린 거, 그대로 비를 맞고 서서 화백을 기다리기로 했다.

얇은 옷은 점점 젖어들고 추위에 몸이 떨렸지만, 이번에 그를 놓치면 또 얼마나 이런 시간을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

시간은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집 앞에서 한 시간을 꼬박 비를 맞던 지음이 다시금 휴대전화를 꺼내 미노 화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자, 작가님! 저 지우 아트갤러리.......”

-아, 예예. 알아요. 왜요?

왜요...... 라니. 이런 높은 담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오늘 세 시에 찾아뵙기로 했었는데 연락이 안 돼서요. 지금 집 앞입니다.”

-오늘? 아...... 그랬지 참. 어쩌죠? 내가 지금 중요한 볼일을 보고 있는데. 다음에 봅시다.

미노 화백의 말을 듣던 지음이 전화가 끊어진 휴대전화를 든 손을 툭 떨어뜨렸다.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지음은 물에 빠진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었다.

속은 점점 아팠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지음은 그런 것보다 결국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그것 하나도 못 하니?」

「저런 애한테 뭘 기대 하겠어요.」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무시하던 두 쌍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지음을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지만, 희라와 미림은 같은 사무실을 공유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아예 눈과 귀를 닫을 수만도 없었다.

지음은 흔들리는 버스에 흠뻑 젖은 몸을 내뱉기고 회사로 돌아왔다.

간신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향하는데, 체증이 심해져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가 비를 맞아 시퍼렇게 질린 손을 뻗어 벽을 짚고 걸었다.

“하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초점이 흐려지고 명치가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잠시 서서 숨을 고르다가 다시 발을 내딛는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

사무실에 있던 강진은 회의실로 향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잠시 고민하다 직원들과 점심을 먹겠다고 먼저 말을 한 지음이 기특해서, 기획팀으로 슬쩍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왜 지음을 회사에 데려왔는진 모르겠다. 아무리 기획팀 계약직이 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그녀를 채용한 건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냥...... 제 곁에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대표님, 회의 안 들어가십니까?”

어느새 정후가 회의 자료를 들고 강진 곁으로 다가왔다.

“......기획팀 들렀다가 갈게.”

“아- 한지음 씨 보시려고요? 네, 알겠습니다.”

“.......”

강진은 싱글벙글 장난기 가득한 정후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별말 없이 기획팀으로 가는데, 저쪽에서 누가 벽을 짚고 힘겹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지음?’

멈칫하던 강진이 지음이라는 걸 확인하자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섰다.

“한지음!”

“.......”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걷던 그녀가 고개를 드는가 싶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강진은 달려가 지음이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안아 들었다.

“한지음? 어떻게 된 거야....... 정신 차려봐.”

“.......”

푹 젖은 옷, 안아 든 팔이 뜨끈할 정도로 불덩이 같은 몸. 지음은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강진의 품에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강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다 젖어서 온 거야....... 박 비서, 지금 밖에 비 오나?”

“예? 예, 아까부터 내리기는 했는데....... 지금은 그쳤어요.”

“.......”

강진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래도록 그를 지켜본 정후는 지금 강진이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선 대표님, 제가 병원에 데리고 가겠.......”

“내가 가.”

“예?”

“내가 간다고.”

말을 마친 강진이 지음을 안아 들고 일어났다. 얼마나 말랐는지 안아 든 그녀의 몸이 종이 인형처럼 가벼웠다.

“대표님, 그럼 회의는.......”

프랑스 쪽과 협약 관련된 중요한 회의였다, 강진이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물론 사람이 먼저이긴 하지만, 그래서 정후가 병원에 가겠다고 한 게 아닌가.

정후 역시 지음이 걱정은 되었다. 그렇지만 우선 정후가 병원에 데려가고 강진은 회의 참석 후 와도 될 거 같은데.......

하지만 강진은 이미 지음을 번쩍 안아 들고 회사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회의 취소하고 날짜 다시 잡아줘.”

“......아, 예. 알겠습니다.”

정후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 향하는 강진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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