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회사에 도착한 강진은 문화센터 임원 회의가 있어서 그곳으로 향했고, 지음은 정후와 남았다.
강진의 뒷모습을 보다가 정후가 지음에게 말했다.
“우리도 갈까?”
“네.”
지음이 강진을 한번 돌아보고 정후의 옆에서 걸었다.
정후가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지음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입으니까 보기 좋다. 얼굴도 좀 밝아진 거 같고. 지낼 만은 해?”
“네.”
“다행이네. 저쪽은 문화센터. 아까 봤지? 이곳으로 오면 아트갤러리야. 여긴 사무실.”
정후가 지음에게 큼지막한 회사 건물들을 소개했다.
지음이 사무실로 들어서는 건물 옆에 크고 반듯하게 올라간 아트갤러리 건물을 올려다봤다.
“미술관......이에요?”
“응. 문화센터도 이곳도, 일정표는 직원 메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니까 원하면 언제든 봐도 돼. 강진이나 나한테 물어봐도 되고.”
지음이 정후를 따라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에 취직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나도 널 여기에 입사시킬 거라곤 생각 못 했어.”
“......강...... 아, 대표님이 그런 거예요?”
“응. 뭐 전시기획팀에서 보조하던 사람이 무단으로 관두기도 했고. 시기가 딱 맞은 거지.”
“사무보조라는데...... 무슨 일 하는 거예요?”
“어, 별거 없어. 섭외한 화백들, 작가들 스케줄 관리하고 기획실장, 직원이 하는 일 도우면 돼.”
“네.......”
“참...... 기획실장은, 알지? 김희라.”
김희라. 지음은 정후가 건넸던 서류에서 본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을 짝사랑하고 있음.’
아래 진하게 쓰인 문구가 더 뇌리에 각인됐지만.
기획팀으로 들어가니 희라가 정후를 보고 일어섰다.
“뭐야? 박 비서가 여긴 어쩐 일이야?”
“기획팀 사무보조 직원 필요하대서 데려왔습니다.”
정후가 희라를 향해 싱글벙글 웃으며 장난을 치듯 말했다.
그가 희라를 대하는 분위기가 묘해서 지음이 정후를 슬쩍 올려다봤다.
희라가 정후 옆에 서 있는 지음을 보고 다가왔다.
“아, 사무보조? 벌써 구한 거예요?”
“......안녕하세요, 한지음입니다.”
“네, 반가워요. 난 기획실장 김희라예요. 우리 하반기에 일정이 많아서 바쁜데 직원 하나가 말도 없이 그냥 나갔어요.”
“.......”
“별로 어려울 건 없으니까 잘 해봐요. 나가지 말고.”
“네.”
희라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들으면 기분이 나쁠 만큼 살짝 높았지만, 지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희라와 간단히 얘길 나누는 사이 나갔던 미림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 미림 씨. 이리 와요. 광도 씨 대신 일할 직원이 왔네?”
“그래요? 다행이다. 나 진짜 힘들었거든요.”
그녀가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다가오다가 지음을 보고 멈칫했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미림이 제 입을 틀어막고 지음과 정후를 번갈아 보았다.
“미림 씨, 왜 그래? 뭐 못 볼 거라도 봤어?”
희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미림을 다그쳤다.
“.......”
정후는 그녀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 알 것 같았다.
지음이 은주와...... 누가 봐도 기가 막히게 닮았으니 놀라기도 했겠지.
하지만 은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니 미림이 뭘 어쩌겠나 싶었다.
“왜 그러냐고. 미림 씨?”
“어? 아, 아니...... 그냥 내가 아는 사람이랑 좀 많이...... 닮아서요. 보조 일 할 직원이라고요?”
“그래. 닮은 사람 있을 수도 있지, 뭘 그걸로 그렇게 놀라고 그래?”
“......그러게요. 이름이 뭐예요?”
미림은 은주와 닮기도 했지만, 강진과 키스를 한 여자가 제 눈앞에 이렇게 빨리 나타나자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한지음입니다.”
“.......”
대놓고 강진과 키스한 여자가 당신이냐, 물을 수 없어서 미림은 제 옷자락만 움켜쥐었다.
***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음은 희라와 미림이 복사해서 만들라고 지시한 서류를 정리하느라 아까부터 복사기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림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눈으로는 계속 지음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손에 쥔 만년필로는 책상 위에 놓아둔 A4 용지에 낙서 중이었다.
흰 종이 가득 한은주와 한지음 이름을 써놓고 죽죽 줄을 긋고 별표를 했다.
‘한은주, 한지음. 너무...... 닮았는데. 아니, 닮은 사람이야 있을 수 있다고 쳐. 대체 뭐야, 강진 오빠랑 저 여자 대체...... 뭔데? 내가 잘못 봤을까? 아냐,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금방 회사에 입사를.......’
아무리 생각해도 지음이 맞는 것 같았다.
미림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얼른 복도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일하다 말고 웬 전화야?
“엄마.......”
-무슨 얘긴데 이렇게 뜸을 들여?
“내가 어제 말했던 그...... 여자 있잖아.”
미림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뭐라고? 안 들려.
“아휴...... 어제 내가 말했던 여자! 강진 오빠 집에 갔을 때 봤다고 했던 여자 말이야. 오빠랑 키스했다는 여자!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엄마, 놀라지 마? 지금 그 여자 우리 회사에 와 있다? 우리 팀 사무보조 알바생으로 와 있어!”
“미림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
이란에게 악을 쓰던 미림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얼른 몸을 돌렸다.
그녀의 앞엔 곧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희라가 서 있었다.
미림이 얼른 전화를 끊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 그...... 그게.......”
“말해, 제대로. 지금 네가 한 말이...... 무슨 말이냐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희라와 달리 미림은 점점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고 있었다.
희라가 비틀거리며 다가오자, 미림이 울상이 되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언니...... 사실은.......”
***
미림과 희라가 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지음은 제게 맡겨진 일을 하나씩 하고 있었다.
보조를 하는 것뿐이라 그런 건지 첫날이라 그런지, 강진이나 정후의 말처럼 어렵진 않았다.
그녀는 희라와 미림과 동떨어져 좁고 후미진 곳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상 앞에 앉아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앞에 놓인 메모지엔 미노 화백의 전화번호가 놓여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지우 아트갤러리 전시기획팀 한지음입니다. 미노 화백님 맞으신가요?”
-......그런데요?
‘그런데요’라니.......
듣기로는 그의 전시회가 코앞이라 조율할 사항이 많은데도 연락도 받지 않고 바쁘다고만 한다던데.
지음이 연필로 전시회라고 끄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 전시회 일정 때문에 연락 드렸습니다. 미팅 날짜를 몇 번 잡았는데.......”
-아, 바빠요.
지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라먹고 들어왔다.
“아...... 그럼 제가 좀 찾아봬도 될까요? 시간은 오래 뺏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미노 화백의 집 주소를 확인하는데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진이었다.
액정에 그의 이름이 깜빡거리는 걸 보며 미노 화백과 약속을 잡았다.
“......네, 3시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그 시간에 들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겨우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 액정을 확인했다.
[밥은 먹었나? 잠깐 일이 있어서 나가는데...... 가기 전에 같이 밥 먹자]
지음은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러겠다고 답을 적으려 했다.
그때 미림이 다가와 그녀의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
“지음 씨, 밥 안 먹어요? 점심시간인데.”
“아...... 네, 먹어야죠.”
미림이 뒤쪽에 서 있는 희라를 슬쩍 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같이 나갈래요?”
“네?”
“오늘 첫날이잖아요. 뭐 분위기도 익힐 겸. 우리도 뭐 둘이 나가서 먹으려고 했거든. 같이...... 가죠?”
뒤에 서 있던 희라가 다가서며 말을 붙였다.
아침에 반갑게 인사하던 모습과 달리 희라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건 기분 탓일까.
지음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요, 나와.”
미림이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하고 희라와 함께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음은 어쩐지 묘한 분위기에 동물적인 직감이 그녀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강진과 같이 밥 먹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정후에게 들었다시피 희라는 강진을 짝사랑 중이었고 미림은 그의 사촌 여동생이었으니까.
지음은 휴대전화에 적고 있던 글자를 마구 지우고 다시 채워 넣은 후 그녀들을 따라나섰다.
[오늘은 직원들이랑 먹을게요.]
***
지음이 희라, 미림과 함께 나간 곳은 길 건너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자더니 꽤 비싸 보이고 분위기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점심이라 레스토랑은 한적해, 창가 쪽으로 자리를 하고 앉았다.
“지음 씨, 이런 곳...... 좋아하나? 그냥 우리가 평소에 다니는 곳인데. 괜찮지?”
“......네, 괜찮아요.”
지음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미림이 말했지만, 그녀는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매니저가 그녀의 앞에 포크와 나이프를 죽 늘어놓았다.
포크가 하나만 있으면 되지 뭐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희라와 미림이 합심한 듯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근데 지음 씨, 내가 이력서를 못 받아봐서 그러는데. 학교는 어디 나왔어?”
“부모님은 뭘 하시고?”
그러면 그렇지.
지음은 희라와 미림이 이런 곳까지 그녀를 데려와 밥을 먹이면서 할 얘기라는 게 낙하산으로 들어온 그녀를 염탐하려는 속셈이라는 걸 알아챘다.
“온정 중학교 나왔습니다.”
“......뭐......?”
“캑캑!”
그녀의 대답이 황당했는지 미림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고등학교도 안...... 나왔단 말이야?”
“중퇴했어요, 사정이 있어서.”
“어머 어머 어머.”
희라는 기가 막힌지 손부채질을 했다.
“졸업도 안 했어? 근데 어떻게 회사엘 들어왔지?”
“......운이 좋았네요.”
지음은 놀라 기절할 것처럼 그녀를 보고 있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앞에 놓인 물을 천천히 마셨다.
“......가족은?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없습니다.”
“......!”
“두 분 다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지음은 언니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직 찾지도 못했고 소식도 알지 못했으니까.
미림과 희라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강진을 위해서라면 그냥 웃으며 부드럽게 넘겼어야 하는 건데.......
지음은 저를 캐내려는 듯한 말에 너무 격한 반응을 한 건 아닌가, 슬며시 걱정이 됐다.
그녀가 앞에 놓인 여러 개의 포크를 보다가 중간 크기의 포크를 집어들었다.
희라와 미림은 둘이 눈짓을 하며 기막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음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방인. 그녀는 마치 이방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