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 시각, 미림은 이란의 심부름으로 반찬을 싸 들고 강진의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물론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해 주신 거지만 본가에 왔을 때 강진이 잘 먹는 것들로 몇 가지 챙겨왔다.
비도 오고 다 늦은 저녁에 굳이 오지 않아도 됐지만, 미림이 우겨서 온 길이었다.
“아, 괜히...... 온다고 했나?”
비는 어느샌가 이슬비로 바뀌어 있었지만, 집 안에서 기다리기엔 카드키도 없었고 강진은 아까부터 연락도 되지 않았다.
미림은 혹시 집으로 들어가는 강진을 놓치기라도 할까 싶어 차에서 내려 아파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비는 정말이지 귀찮게도 내렸다. 우산을 쓰기도 뭣하고 안 쓰자니 다 젖을 거 같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회사에선 분명 일찍 나갔는데.”
미림은 무료한 마음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결국 우산을 쓰고 정원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커뮤 동이라도 등록해주지.”
미림이 빗속에서도 번쩍이는 ‘프리미엄 홀’ 글씨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거주하지 않는 미림은 이용할 수가 없었다. 강진이 등록만 해 주면 가능하겠지만 그래 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한참 걷던 미림이 정원 깊숙이 터널처럼 만들어진 산책로를 보고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뭐야, 이런 곳도 있어? 와...... 진짜 여기로 이사 오면 좀 좋아? 엄마는 맨날 할아버지랑 사는 게 뭐가 좋다고.”
구시렁거리던 미림이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저 멀리 앞에 웬 남녀가 붙어 있었다.
“뭐야...... 누가 여기서....... 응?”
들어서려던 미림이 멈칫했다.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군지 확인한 미림은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
강진의 입맞춤이 더욱 거세졌다.
강진은 지음의 위아래 입술을 물고 빨고, 혀를 휘감아 돌렸다.
그녀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던 강진의 오른손이 서서히 내려가더니, 그녀의 뽀얀 목덜미를, 작고 둥근 어깨를...... 잘록한 허리를 더듬어 내려왔다.
그 손길에 당황했는지 지음의 몸이 살짝 굳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유리로 된 벽에 쿵 부딪쳤지만, 강진은 지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으음.......”
입술이 아릿하고 숨이 찼지만, 지음은 그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지음은 차디찬 손으로 그의 옷을 부여잡았다.
지음의 허벅지를 훑던 강진의 손이 다리 안쪽으로 향했다.
“흣!”
놀란 지음이 눈을 번쩍 뜨고 신음을 흘렸다.
“......하아.”
강진이 그녀에게 붙이고 있던 입술을 간신히 떼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지음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곱게 입은 속치마를 젖히고 그 안에 자그맣게 자리 잡은 속옷 위를 은근한 손길로 문질렀다.
“으음.......”
그녀의 신음을 음악처럼 들으며 강진은 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점점 지음의 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가 강진의 팔을 붙잡았다.
마른 몸을 유리 벽에 붙이고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크게 쉬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그녀의 샘이 속옷 안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꽃잎이 이리저리 뭉개지자, 강진이 고개를 숙인 채로 간신히 말했다.
“올라......가자.”
“.......”
지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지음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집 안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비는 언젠가부터 그쳐 있었고, 강진이 긴 다리로 빠르게 걸었다.
그를 쫓아가기 위해 지음은 거의 뛰다시피 했다.
띠리릭.
집 안으로 들어와서야 강진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강진의 뒷모습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떠는데, 그가 몸을 돌렸다.
“.......”
그 바람에 지음이 거실 복판에 멈춰 섰다.
강진이 지음을 잡아먹을 듯 보고 있다가 다가와 입술을 붙였다.
이번엔...... 깃털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키스였다.
화끈거리는 입술을 살살 핥다가 스르르 벌어지는 입 안으로 들어와 고른 치열을 찬찬히 건드렸다.
‘아......, 숨이...... 차!’
이제 막 키스를 시작했는데 가슴이 간질거리고 몸이 뜨거워졌다.
“으음.......”
지음은 눈을 감은 채로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두르고 몸을 밀착시켰다.
강진이 잠시 멈칫하더니 지음을 번쩍 들어 안아 소파에 앉혔다.
양팔로 그녀를 가둔 채 천천히 키스를 시작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이마부터 콧등, 입술과 목으로 서서히 내려왔다.
그가 지음의 허리에 매달린 리본을 툭 풀어버리고, 신경 써서 입은 원피스를 위로 벗겨 뒤로 던졌다.
“.......”
강진이 곱게 챙겨 입은 속옷을 빤히 보고 있자, 지음이 팔로 가슴을 가리고 다리를 끌어모았다.
“......두려워?”
내려다보는 강진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지음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두려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 깊은 곳에선 그를, 차강진을 원하고 있었다.
셔츠를 뚫고 나올 것 같은 단단한 가슴과 그 안에 숨겨진 초콜릿 모양의 복근. 그녀의 여린 다리를 휘어 감았던 탄탄한 허벅지까지.......
“하아, 아니......에요.”
고개를 젓는 것으론 부족했을까.
그가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자 지음이 말을 보탰다.
“그래.......”
강진의 몸이 지음의 위로 겹쳐졌다.
강진과 지음의 숨결이 마구 뒤엉켜 넓은 거실을 가득 채울 때까지 강진은 멈추지 않았다.
***
그들이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는 동안, 미림은 비를 쫄딱 맞은 채 집으로 향했다. 어떻게 운전을 하고 돌아갔는지 몰랐다.
팩을 붙이고 거실로 나오던 이란이 얼빠진 듯 보이는 미림을 보고 멈칫했다.
비가 오는데도 가겠다고 굳이 반찬을 싸 들고 가더니 몸은 홀딱 젖어 있고 들고 간 반찬통은 그대로 가져왔다.
이란이 얼굴을 확 구기고 미림에게 다가섰다.
“너 왜 그래? 비는 왜 다 맞았어? 차 가지고 간 거 아니었어?”
“.......”
“얘가 얘가....... 너 왜 이러냐니까? 강진이 못 만났어? 아니 못 만났어도 그래. 왜 비는 다 맞고 와?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 있어?”
이란이 얼굴에 붙인 진득한 팩을 확 잡아채고 미림의 양팔을 잡았다.
“엄마.......”
“어, 말해봐.”
“......강진...... 오빠가 어떤...... 여자랑 집 앞에서 키스를.......”
“뭐?”
미림이 더듬거리며 헛소리를 내뱉자 이란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바람에 차동구 회장이 거실로 나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소리를 질러?”
“네? 아, 아니에요, 아버지. 미림이가 잠깐 비를 맞고 들어와서....... 너, 따라 들어와.”
“쯧쯧.”
이란은 혹여나 차동구의 귀에 이상한 말이 들어가기라도 할까봐 얼른 미림의 손목을 움켜쥐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 아파, 엄마!”
미림이 이란의 손을 뿌리치고 손목을 비볐다.
방으로 들어오자 이란이 방문을 빼꼼 열고 차동구의 동선을 확인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이란이 문을 닫아걸고 미림을 보았다.
“무슨 말인지 다시 똑바로 말해봐.”
나직한 목소리로 묻자 미림이 짜증을 냈다.
“뭘?”
“강진이 말이야, 대체 무슨 말이냐고? 너...... 강진이 만났어?”
“......못 만났어.”
“못 만났다니?”
“갔는데 연락도 안 받고 없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뭐 좀 기다리려고 집 주위 좀 돌고 있는데...... 강진 오빠가 어떤 여자랑.......”
“어떤 여자랑?”
“......키스를.......”
“뭐?”
“여자랑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
“뭐라고? 너, 확실해? 확실히 본 거 맞아?”
미림의 말에 이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후, 깜짝이야. 엄마 왜 소리를 질러?”
“비도 오고 어두워서 잘못 본 거 아냐?”
“.......”
“잘 생각해 봐. 어두운데 어떻게 봤어? 다른 사람들인데 착각한 거 아니냐고.”
이란이 계속 다그치자 미림이 인상을 쓰고 그 장면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미림이 강진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그 키에 다부진 몸매, 멀리 봐서도 눈부신 외모...... 강진이 맞았다.
미림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강진 오빠 맞아. 내가 오빠를 못 알아볼 리 없어.”
“근데 대체 강진이 누구랑 키스를 하고 있다는 거야?”
이란이 눈을 흘겼다.
그녀의 말에 미림이 손뼉을 짝 쳤다.
“어, 맞다! 내가 너무...... 놀라서 잊었는데....... 엄마, 혹시.......”
“혹시 뭐?”
“......은주...... 언니 말이야.”
“은주가 왜?”
“은주 언니...... 살아있어?”
미림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이란이 한숨을 쉬었다.
“대체 너는...... 비 맞고 뭘 본 거야? 헛소리를 다 하고...... 진짜로 열 있는 거 아냐?”
이란이 미림의 이마에 손을 댔다.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대체 무슨 소린데?”
“너무 닮아서.......”
“뭐라고?”
“응? 아냐, 아무것도.”
미림은 얼른 고개를 젓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확실한 거 아니니까.’
다시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란의 앞에서 미림은 인상을 썼다.
강진인 건 알겠는데 그의 앞에 있던 여자, 강진보다 한참 작아서 품에 쏙 안겨 있는 여자.......
‘대체 누굴......까? 분명 은주 언니랑 닮은 거 같았는데....... 엄마 말처럼 비도 오고 너무 어두워서 잘못 본 걸까.’
***
주말이 지나고 지음은 강진과 함께 출근길에 올랐다.
경직이 되어 있었는지 강진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네.”
차가 출발하자 지음이 심호흡을 했다.
슈퍼 아르바이트, 펜션 청소, 식당 서빙 등....... 그런 자잘한 일만 하고 살았지 큰 회사에 취직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기획팀에 사무보조가 필요해. 원래 하던 사람이 말없이 관두는 바람에 대신 들어가는 거니까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내가...... 다녀도 되는 거예요?”
“그래. 모르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정후에게 말해도 되고. 얘기해 둘 테니.”
“......네.”
지음이 무릎에 올려둔 두 손을 꼭 잡았다.
“아니면...... 나한테 말해도 돼.”
“.......”
부드러우면서도 나직한 강진의 목소리에 지음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운전을 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는 게...... 어쩐지 좋아질 것 같았다.
긴 속눈썹이라든가 그 아래로 우뚝하게 솟은 콧날이라든가, 뜨거운 숨결을 감추고 있는 부드러운 입술이라든가.......
지음은 순간 비 오는 금요일 밤의 데이트, 그 지독했던 키스와 섹스를 떠올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얼마나 이 남자를 원했는지...... 땀에 다 젖은 채 그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걱정할 거 없어.”
“.......”
그는 지음이 회사를 나가는 것 때문에 걱정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신과의 키스 때문이다, 말할 수 없었던 지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