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94)

#8화.

지음이 강진의 차에 올랐다.

강진은 그녀가 차에 올라 벨트를 맬 때까지 지음을 찬찬히 새기듯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쁘네.”

“고......마워요.”

얼굴이 발그레 뜨거워져서 고개를 숙이는데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괜히 더운 것 같아 손부채질을 하니 그가 에어컨 바람을 조금 세게 틀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예요?”

“밥 먹으러.”

“아.......”

힐끗 강진이 그녀를 보는 게 느껴지자, 지음은 짧게 올라간 치마를 손으로 잡아 내렸다.

“왜, 불편해?”

“네? ......아뇨. 그냥 좀...... 어색해서요.”

“뭐가.”

강진의 덤덤한 목소리에 지음이 치마를 잡은 손을 뗐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데 저 혼자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원래 지음은 다른 사람들 시선, 말,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는 타입이 아니었다. 이런 모습은 지음 스스로도 놀라웠다.

“치마...... 처음 입어봐서 그랬나봐요. 너무 짧은 것도 같고.......”

“괜찮아. 예뻐.”

“.......”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아무 말 없이 호텔로 향했다.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본 저녁 풍경은 아름다웠다.

온정리 온정마을과 달리 크고 작은 불빛도 많았고, 자동차 불빛은 반짝이며 움직이기까지 했다. 근사한 곳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음식도 부드럽고 맛있었다.

“음식은 입에 맞아?”

“네.”

“앞으론 나랑 자주 이런 시간 가질거야. 퇴근 후엔 같이 밥도 먹고. 익숙해지는 게 좋겠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그의 말처럼 지음은 알게 모르게 계속 긴장하고 있었는지 등이 뻐근해서 숨을 후 내쉬었다.

그러겠다고 대답하려는데 그가 테이블 위로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앙증맞은 꽃이 한 송이 달려있는 포장지를 보며 지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

“.......”

지음은 선물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생소해서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선물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선물을 받는 게 이토록 기분 좋은 일이구나.

지음이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선물 상자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풀어봐.”

“......네.”

간신히 대답을 하고 아까운 마음에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강진은 느릿하게 움직이는 지음의 손놀림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얹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포장지 안엔 보석함이 들어 있었다. 열어 보니 반짝이는 별과 달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반지가 보였다.

“이......건?”

“......마음에 들어?”

묻는 강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는 듯해서 지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슬퍼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 예뻐요.”

“한번 해 볼래?”

강진이 작고 차가운 지음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꼭 그녀의 손가락에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강진은 그녀의 목에 목걸이도 마저 채워주었다.

뽀얀 뒷 목덜미에 입술을 맞출 뻔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았다.

그녀에게...... 참 잘 어울렸다.

“하....... 잘...... 어울린다.”

자리에 앉은 강진이 차마 지음을 보지도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거 처음 해봐요.”

지음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목걸이를 걸어주는 순간부터 어쩐지 후회가 됐다.

마치 은주를......, 은주가 하고 있는 걸 보는 것 같아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은주가 죽기 전날까지도 하고 있던 것과 같은 목걸이에 반지.

그것과 같은 걸 사 두었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제 와 은주와 똑같이 생긴 저 여자에게 선물로 건넨 것도.......

심지어 미치도록 잘 어울렸다. 은주를 다시 보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강진은 고개를 들어 지음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걸 처음 해봤다는 여자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

“고마워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지음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걸어봤지만, 강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음은 고맙다는 말 다음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몰라 당황한 채 앉아 있었다.

선물을 줄 때까지만 해도, 심지어 직접 해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데...... 왜 그가 이토록 흔들리는 건지.

그가 뭔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들고 입을 열기에 기대해 봤지만.

“......가지.”

그는 가자는 말과 함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음 역시 어색하게 그를 따라 일어나야 했다.

올 때와 달리 별말도 없이 레스토랑 밖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지음은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걸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게 꼭 자신인 것만 같아서 초조했다.

차에 올라 출발하면서도 올 때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운전에만 열중했다.

지음은 그에게서 뭔가 설명을 기대하기는 포기하고 창밖을 보았다. 집을 떠날 때만 해도 흐리던 하늘이 금세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차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 일정하게 울리는 차 엔진소리, 와이퍼가 움직이는 소리 말고는 차 안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음은 손가락으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만 살폈다. 단지 안, 정원으로 조성된 곳이 나왔다.

시트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지음이 몸을 일으켰다.

“어......?”

그녀의 목소리에 강진이 지음을 돌아봤다.

지음이 어딘가에 시선을 던지고 눈을 떼지 못했다.

“저기는 뭐예요?”

“뭐가 있어?”

강진은 그녀가 보고 있는 쪽을 슬쩍 보다가 멈칫했다.

“저기...... 터널처럼 되어 있는데.......”

지음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그곳은 예전에 형수 은주가 형 민준과 함께 강진의 집에 왔을 때 함께 걸었던 곳이었다.

단지 내 정원과 산책로로 만들어 둔 곳이었다.

비가 오면 걷기가 불편하니 별도로 만들어 둔 산책로였다.

유리로 돔 터널을 만들어 정원을 가로지르도록 해 두어, 그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으로는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계절 내내 볼 수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도 밤하늘의 별도 고스란히 올려다볼 수 있었다.

오늘처럼 비가 오면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는 것도, 눈이 내리면 쌓이는 눈도 운치있게 볼 수 있었다.

강진이 그곳으로 차를 돌렸다.

「이런 곳이 있었어?」

「나도 여긴 처음 와 봐요. 도련님은 좋으시겠어요. 도심 속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놀랍네요. 도련님은 와 보셨.......」

「......안 와봤습니다, 저도.」

당시에 강진은 형수 은주의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아, 그랬군요. 다음엔...... 도련님 아내 되실 분하고 넷이서 같이 한 번 와 봐요.」

「그럴 일 없습니다.」

「.......」

나중에 형에게 들었다, 자신이 은주를 미워하는 것 같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만 단 한 번도 강진이 형수 은주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형이 그녀를 데려왔을 때 놀라기는 했어도, 형수로 보고 싶어 하지 않은 적은 있었어도......, 단연코 미워한 적은 없었다.

내가 먼저였는데, 그 여자를 본 건. 왜 형의 옆에 서 있는 걸 보고 있어야 하나, 괴로운 적은 있었어도.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역겨워한 적은 있었어도...... 결코 그녀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후.......”

떠오르는 은주 생각에 그가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

“왜...... 그래요?”

“.......”

강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지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보는 게 더...... 괴로워졌다.

처음에 지음을 보고 은주가 살아 돌아온 줄 착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둘은 닮아 있었다.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둥글둥글한 인상의 은주와는 달랐지만, 지음의 봉긋한 이마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콧날의 곡선, 입술 라인까지...... 스치듯 보면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강진은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덤덤한 척 지음을 보았다.

“......잠깐 내릴래?”

“네?”

“걸을 수 있거든, 저 안.”

“정말요?”

“......그래.”

지음의 얼굴에 환하게 빛이 돌았다.

쏟아지던 장대비가 어느덧 이슬비로 바뀌어 있었지만, 강진과 지음은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채 산책로까지 뛰었다.

“하아, 하.......”

“.......”

옷에 내려앉은 이슬비를 손으로 툭툭 털고 강진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지음 역시 그를 따라 들어갔다.

토닥토닥, 빗소리가 들리고 다른 소리는 전부 차단된 듯 고요했다.

산책로 양옆으로는 빗물을 머금은 초록한 나무와 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둥글게 박힌 조명은 별빛을 대신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이곳.”

“.......”

강진은 저와 만나 처음으로 환하게 말하고 웃는 지음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비를 맞는 것도, 정원을 보는 것도, 산책을 하는 것도 모두 처음인 사람처럼 굴었다.

두리번거리며 걷던 지음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강진을 돌아봤다.

“비밀의 정원 같아요.”

“......!”

그녀의 말에 강진이 멈춰 섰다.

「이곳, 비밀의 정원 같아요! 도련님, 저 여기 자주 오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내 것도 아닌데. 맘대로 하십쇼.」

은주의 목소리가 지음의 목소리와 오버랩이 됐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지음의 상기된 얼굴에 겹쳐 보였다.

순간 숨이 턱 막혀서 강진은 ‘끄응.......’ 신음성을 흘리며 제 가슴을 움켜잡았다.

“......왜 그래요?”

그가 무릎을 짚으며 휘청거리자, 지음이 다가왔다.

“거기 서! ......다가오지......마.”

강진은 손을 내뻗으며 소릴 쳤다.

“.......”

걱정스러운 마음에 강진에게 다가가려던 지음이 멈칫했다.

“하아...... 하....... 대체 왜...... 나타나서.......”

강진이 몸을 숙인 채 괴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지음은 숨도 쉴 수 없었다. 뭔가 저를 원망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지음이 큰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며 입술을 꽉 물었다.

사람과 깊게 관계 맺고 살아가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지음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바짝 긴장한 채로 서 있는데, 강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그의 눈빛, 더욱 짙어진 잿빛의 눈동자가 지음을 옭아매듯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지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으읍......!”

순간 벌어지는 지음의 입술로 강진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보드라운 그녀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고 우악스럽게 혀를 밀어 넣어 지음의 입 안을 헤집었다.

그간에 그와 했던 몇 번의 키스와는 다른 느낌.

꼭...... 벌을 주는 것처럼.

혀를 얽고 뽑을 듯 강하게 빨던 강진이 그녀의 입술을 잘근거렸다.

“......읍!”

그런데 왜...... 이런 키스에 심장이 뛰는 걸까.......

지음이 그린 듯 고운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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