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지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음으로서는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적개심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정후의 말에 따르면 서로 필요에 의한 계약이고 그 역시 지음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서 대등한 관계라고 했다.
지음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차라리 속 시원히 말해주면 좋을 텐데.
상념에 빠져있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스토랑에서 언제든, 뭐든 먹을 수 있다고. 한식, 중식, 일식, 뭐든 다. 그것도 싫으면 집에 오시는 아주머니께 먹고 싶은 거 말하면 돼. 못 들었어?”
“들었어요.”
강진이 걸음을 멈추고 그녈 돌아봤다.
너무 빠른 걸음에 따라오기 힘들었을까. 그녀의 볼이 살짝 상기돼 있었다.
강진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지음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음을 만나고 난 후 그의 표정은 매번...... 찡그리거나 화가 나 있거나 답답한 듯 보였다.
“근데 여기서 뭐 해?”
“.......”
지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동희를 보러 왔다가 배가 고팠다고, 매번 먹었던 거라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든 거라고.
그는 그녀의 답을 잠시 기다리다가 돌아서서 걸었다.
지음이 얼른 그를 따라갔다.
그가 지음을 데리고 간 곳은 아침에 정후와 들렀던 식당이었다.
잠시 후 지음은 음식을 시킨 강진과 마주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따뜻하고 고소한 수프도 있었고.
“장 봐두라고 할 테니...... 앞으론 편의점 음식 먹지 마.”
“편의점 음식도 괜찮아요. 맛도 있고.”
“.......”
말을 꺼내던 지음은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럴게요, 되도록.”
강진이 뭔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망설이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지음은 그의 입이 다시 열리길 기다렸다.
생각이 정리된 걸까.
그가 지음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먹어, 배고프겠다.”
말을 마친 강진이 스테이크를 썰었다.
지음은 그를 따라 포크를 들고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 번지는 풍미가 기가 막혔다. 그녀의 앞에 비현실적일 만큼 멋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 차강진 만큼이나.......
강진을 보던 지음이 고개를 숙였다.
1년간 그에게 고용된 계약관계일 뿐인데, 자꾸...... 그에게 흔들리는 제 마음이 한없이 낯설었다.
누군가를 보아도 한번 스치듯 보는 게 다였는데, 차강진은...... 자꾸 보고 싶었다. 시선을 한번 두면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 낯선 마음이 두려워 지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강진은, 고용주일 뿐이야. 1년 후 내게 십억을 건네줄.......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한지음.’
“......나?”
그런 생각을 하느라 미처 강진의 목소릴 듣지 못했다.
“이봐, 한지음 씨.”
“......네?”
강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딴생각하느라 못 들었어요. 뭐라고...... 했어요?”
자신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기에 말도 못 듣고 있나, 이 여자는.
“무슨 딴생각?”
“......아무것도. 뭐라고 했어요?”
강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다가 말을 이었다.
“일을 하고 싶다고?”
“아, 그거....... 네, 그랬어요. 안 되나요?”
“그 안 되냐는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
강진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지음이 또다시 입술을 꽉 무는 게 보였다.
“그...... 하아, 입술도 자꾸 물지 말고. 상처 나잖아.”
그의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에 지음이 물었던 입술을 놓고 두 손을 맞잡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음을 싫어하고 있었다.
돈 때문에 이런 일까지 하는 여자가 좋을 리는 없겠지.
지음은 괜히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계약이 불발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됐다.
강진이 숨을 고르고 다시 물었다.
“아무튼 일을...... 하고 싶다고.”
“네.”
“.......”
“집에만 있는 것도 무료하고 뭔가...... 해보고 싶어서요.”
지음의 대답에 강진은 별말 없었지만 그게 더 불안했을까. 지음은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을 이어 붙였다.
강진은 그렇게까지 돈이 필요하냐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어차피 서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갈 테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라면 몰라도 그렇게 묻고 싶진 않았다.
안 그래도 돈으로 얽힌 계약관계를 하겠다는 여자에게.
“그래. 지우 아트갤러리 전시기획팀에 막내 직원이 필요한데, 해보는 게 어때? 뭐 어려울 건 없어. 어차피 사무 보조를 구하는 일이니까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을 거야.”
“그쪽...... 회사에서요?”
“......그쪽?”
지음의 말에 강진이 얼굴을 확 구겼다.
“아.......”
지음이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그것까진 정후에게 듣지 못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불렀던 사람도 손에 꼽았다. 기껏 동희야, 정후 오빠, 아주머니, 아저씨...... 정도가 다였으니까.
“잊었나 본데 우린...... 연인이야. 곧 결혼도 할 거고.”
“안 잊었어요.”
“이름으로 불러, 결혼 전까진.”
“......네.”
강진은 저를 ‘그쪽’으로 부른 여자는 지음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음식을 먹었다.
***
「다녀......오세요.」
강진은 사무실에서 아침에 그를 배웅했던 지음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에게 배웅을 받는다는 게.
강진이 지음에게 전화를 하며 맨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 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놓고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걸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가슴 한구석이 뜨끔해지는 찰나, 지음의 차분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네.
“퇴근하고 집으로 갈 테니까...... 예쁘게 입고 나와. 갈 데가 있어.”
-네, 그럴게요.
짧은 전화를 끊은 강진이 포장까지 되어 있는 상자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밖으로 나갔는데 희라가 그를 보고 다가왔다.
“대표님, 아니 강진아.”
“.......”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네?”
강진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그와 희라를 보며 다가오는 정후의 모습이 보였다.
희라는 강진의 빠른 걸음에 맞춰 종종거리며 걸었다.
“저기, 강진아. 앗!”
“.......”
발목이 부러질 것 같은 힐을 신은 채 앞을 보지 않고 강진에게 시선을 두고 걸으니 넘어질 수밖에.
희라가 우습게도 제 다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찰나 강진이 그녀의 팔을 붙들어 세웠다.
그러는 바람에 멈춰서서 희라를 보았다. 희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 저기...... 비가 올 것 같은데 오늘 좀 바래다줄래?”
그를 향해 다가서던 정후는, 강진이 희라를 붙들자 저쪽에서 멈춰 서 있었다.
강진은 정후를 보지 않은 채로 희라에게서 손을 떼고 말했다.
“안 되겠는데. 선약 있어.”
“어? 누......구?”
“?”
희라의 물음에도 강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누구랑 약속이 있는데? 강진아?”
희라가 애처롭게도 그를 불렀지만 강진은 대꾸도 없이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아, 진짜......!”
삐끗해서 발목이 아프지만 않았어도 달려가 그를 한 번 더 잡아보는 건데.
희라는 벌써 욱신거리는 오른쪽 발목을 원망스럽게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까지 한쪽에 서서 희라를 보고 있던 정후가 천천히 다가섰다.
“......제가 모셔다드리죠, 실장님.”
“......?”
발목이 부었는지 살펴보던 희라가 들리는 정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는 약속 없습니다. 비도 올 거 같고. ......제가 바래다 드리겠다고요.”
“뭐야, 웬 존댓말이야, 업무 시간도 다 끝났는데. 아, 아파라.......”
“.......”
희라는 내밀어진 정후의 팔을 거절하지 않고, 그에게 기대며 발목을 내려다봤다.
그런 그녀를 가만 보고 있던 정후가 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
“......헛물켜지 마.”
“뭐?”
“네가 아무리 강진이 앞에서 여자인 척해도 안 통해.”
정곡을 찌른 말에 희라가 인상을 쓰고 정후를 보았다.
“뭐라는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왜 몰라. 강진이는 ......네가 발가벗고 달려들어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텐데.”
“......!”
자존심이 상했는지 희라의 눈시울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심각해지려는 찰나, 정후가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웃었다.
“......그러니까 그냥 좀...... 놀다가 나한테나 와.”
“......지랄이야, 증말. 아후, 놔. 갈 거야.”
희라는 정후에게 눈을 흘기고 그의 팔을 뿌리쳤다.
그녀가 뒷모습을 보이자 정후의 얼굴에 피었던 미소가 사라졌다.
어쩐지...... 입이 썼다.
***
편의점으로 나가려던 지음은 걸려온 전화에 멈칫했다.
“네.”
상대는 강진이었다.
-집이야?
“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도 듣기에 좋았다.
-퇴근하고 집으로 갈 테니까...... 예쁘게 입고 나와. 갈 데가 있어.
“네, 그럴게요.”
전화를 끊고 지음은 거실 한쪽에 있는 전면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제 모습을.
서둘러 샤워를 하고 나온 지음은 가운만 걸친 채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 와서 처음 살펴볼 때 말고는 들어가 보지 않은 곳.
속옷부터 스카프까지, 없는 게 없었다.
“예쁘게.......”
예쁘게 입는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지음이 잠시 고민하다가 속옷 서랍에서 앙증맞게 접혀있는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한 벌 꺼내 입었다.
그리고 흰 바탕에 푸른색 계열의 꽃이 그려진 원피스를 집었다.
허리에 리본 밴딩이 있는 스모크 원피스인데 시원한 재질인데다가 소매와 치마 끝단은 짙은 네이비 배색으로 둘러, 보기에도 시원했다.
허벅지를 가볍게 가린 길이에 가슴과 엉덩이 라인을 풍성하게 잡아준, 여성스러우면서도 귀여운 원피스였다.
지음은 난생처음으로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보았다.
그렇게 입고 편의점으로 가니, 동희가 기절초풍할 듯 놀라며 입을 떡 벌렸다.
“어.......”
벌린 입에서 침이 흐를 지경이었다.
지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많이 이상해?”
강진을 보기 전에 동희에게 먼저 보여준 건 이렇게 입고 다녀도 괜찮을지 묻기 위해서였는데.
그의 반응을 보자니 안 물어도 될 뻔했다.
지금이라도 청바지에 티셔츠로 갈아입어야 하나 생각하는데 동희의 대답이 들렸다.
“아냐. 진짜...... 예뻐.”
“뭐?”
“......너 아닌 거 같아, 지음아. 진짜 예쁘다.”
“.......”
예쁘다는 얘기가 왜 이렇게 어색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네.
지음은 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생수 한 병을 골랐다.
강진의 카드로 결제를 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집 앞이야.
전화를 끊은 지음이 아직도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동희를 보며 인상을 썼다.
“......입 좀 닫아. 나, 간다.”
“어? 어, 그래. 자, 잘 가, 지음아.”
“.......”
동희가 헤벌쭉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음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다.
저쪽에 강진의 차가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심장 소리가 자꾸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