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94)

#6화.

희라가 강진에게 가기 두어 시간 전.

희라는 미림과 가을에 열릴 특별 전시회에 관련된 희의를 하고 있었다.

“기획서는?”

“여기요. 근데 실장님, 이번에 미노 화백이 전시회 일정을 조정해 보자고...... 조정해 달라고 하시던데요.”

미림의 말에 기획안을 보고 있던 희라가 고갤 들었다.

“뭐? 또? 하, 벌써 몇 번째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그러니까요....... 작품 그거, 매번 예전에 그렸던 거로 돌려막을 거면서.”

희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달력과 일정표를 비교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서? 언제로 하겠대?”

“그걸...... 말을 안 해줘요.”

“무슨 말이야?”

“뭐 정확한 날짜는 얘기 안 하고 다시 일정 잡자고만 하니까. 돈 때문일까요?”

“한번 만나봐야겠네. 오라고 해.”

“......바쁘대요.”

예술가랍시고 날짜 옮기는 일이야 흔했지만 미노 화백은 그런 일이 너무 잦아서 골치가 아팠다.

희라가 인상을 쓰다가 한숨을 쉬었다.

“난 파리 미술관 일 때문에 정신이 없으니 미림 씨가 맡아서 조율해 봐.”

“으, 실장님. 전 하반기 일정 보고서도 끝내야 해요. 살려줘요.”

“하...... 정광도 씨는 오늘도 안 나왔어?”

갑자기 그만둬 버린 전시기획팀 소속 직원 탓에 많은 일이 두 사람에게 떠맡겨진 상태였다.

“네. 벌써 일주일째예요. 이런 일은 사실 광도 씨가 하던 거였는데. 실장님, 우리 직원 하나 뽑음 안 돼요? 기획팀 신설하고 나서 일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많아요.”

“.......”

미림이 앓는 소릴 하며 울상을 지었다.

“보조할 일도 많고...... 우리가 허드렛일까지 다 도맡아 해야 하잖아요. 뭐 정직원 아니면 계약직이라도 좀 안 되나? 알바라도.”

“그래야겠다. 내가 오늘 대표님께 건의해 볼게.”

“휴, 다행이다. 일정 보고서는 정리되는 대로 가져올게요. 미노 화백은 어쩌죠?”

“일단...... 기간 남았으니 좀 더 두고 보자.”

“네, 알겠습니다.”

미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희라가 그녈 불러 세웠다.

“......미림아.”

“응, 언니.”

이름을 부른다는 건 회사 일이 아니라는 얘기. 미림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희라를 돌아봤다.

“오늘, 같이...... 점심 할래?”

“좋지! 안 그래도 내가 이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 집 알아놨어.”

“그래, 그럼. 나가자. 시간도 다 됐는데.”

“그래!”

희라가 일어나자, 미림이 얼른 그녀의 팔에 팔짱을 꼈다.

미림은 희라가 강진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림은 그런 희라를 질투하고 있었다. 언제나 당당해 보이고, 자신감 있는 희라. 지우 그룹과 아무 관계도 아니면서 미림의 위에 앉아 있는 듯한 그녀를.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서로 속마음을 숨긴 채로 두 여자는 신나게 식당으로 향했다.

희라는 미림의 앞에 앉아 그녀의 낯빛을 살폈다. 평소엔 저를 친한 언니로 따르는 미림과 밥 한번 먹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벌써 몇 년 동안 강진에게 다가서려고 애를 써봐도 진전이라곤 없이, 그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했고. 답답했다.

그래서 이제라도 미림과 친한 척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아무래도 강진의 주변에서 희라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도 미림뿐인 듯해서.

“요새...... 잘 지내지?”

“응? 새삼. 나야 잘 지내지. 언니 파스타 맛있다. 언니도 좀 먹어봐.”

“아니...... 흠, 강진...... 씨 말이야.”

희라의 말에 미림이 멈칫했다.

희라가 미림을 딱 그렇게 여기고 있는데 미림이라고 마음이 다를 리 없었다.

어차피 둘은 같은 회사 직원이고 어려서부터 봐 왔지만, 겉으로 친한...... 서로가 필요할 때만 찾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만나는 이유는 하나,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림이 얼른 표정을 고쳐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 강진 오빠? 우리 강진 오빠야 잘 지내지 뭐. 엊그제도 집에 와서 밥 먹고 갔어. 근데 오빠는 갑자기 왜?”

“아니 뭐...... 흠. 선 얘기가 나오기에.”

“선? 아...... 응, 그러더라.”

미림은 금방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보기에도 잘난 차강진을 희라에게는 주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담담한 척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아서 시큰둥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할아버지가 선보라고 난리 셔.”

“그래?”

“어. 근데 또 오빠는...... 하.”

“강진 씨가 왜?”

미림의 짜증이 훅 올라오자, 희라가 다급히 물었다.

“......여자가 있다나, 뭐라나.”

“뭐......라고? 강진 씨한테 여자가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희라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

미림과 그런 말을 나누고 파스타 집에서 나온 희라는 그길로 초밥을 사서 강진에게 향했다.

여자가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물으려던 희라는 언제나처럼 서늘하고 무심한 강진을 보고 그 말을 꿀떡 삼켰다.

“무슨 일입니까?”

강진의 차가운 말에 당황하던 희라가 억지로 얼굴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 오늘도 바쁜 거 같은데.”

그러고는 강진에게 다가가 테이블 위에 초밥이 든 종이가방을 올려놓았다.

강진은 그녀가 사 온 초밥 팩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물었다.

“김 실장님이 언제부터 내 점심을 챙겼습니까?”

“네? 아......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겸사겸사.”

강진이 말하라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대자, 희라가 입을 열었다.

“......기획팀 직원이 지난주부터 무단이탈을 하는 바람에 일에 차질이 생겨서요. 직원을 한 명 들였음 좋겠습니다. 뭐 계약직이라도 좋고 알바생이라도 좋아요.”

“알았습니다. 알아보죠.”

말이 끝났는데도 희라가 쭈뼛거리고 있자, 강진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더 할 말이 남았습니까?”

“......아닙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희라가 나가는 걸 지켜보던 정후가 강진에게 다가왔다.

“뭐 할 말이 있나 본데, 희라가.”

“.......”

정후가 말을 놓고 친구의 위치에서 물었다.

보통 회사에 있을 땐 일 얘기가 아니더라도 반말을 하지 않았지만, 정후는 희라에 관한 일에만 친구로 말하곤 했다.

강진은 정후가 희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래서...... 어디 있지?”

“......뭐? 누구...... 아, 지음이요? 그거야 뭐.......”

일이 많아 밥 시간도 뒤로 미루려고 하던 강진이 몸을 일으켰다.

“어...... 왜요? 가 보시려고요?”

“응.”

“지금요?”

강진은 정후가 뭐라 덧붙일 새도 없이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휑 나간 자리엔 강진의 묵직한 향기만 남아 있었다.

***

강진은 지음에게로 향하며 전화를 해 봤지만 신호음만 길게 갈 뿐, 지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인상을 쓰고 갓길에 차를 아무렇게나 댔다.

혹시 번호를 잘못 누른 건 아닌가, 다시 전화를 해 봤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잠깐 샤워를 할 수도 있고, 수영장에 갔을 수도 있고. 경우의 수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하, 되게...... 신경 쓰이네.”

강진은 휴대전화를 보조석에 던져두고 속도를 높였다.

단지에 도착하자, 긴 다리로 성큼성큼 집으로 올라가 살폈지만, 집에도 없었다.

“전화도 안 받고 대체 어딜.......”

그러다 강지은 결혼식 드레스도, 신혼여행도 필요 없다는 그녀가 수영을 배우겠다고 했던 걸 떠올리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집을 사고 오래 살면서도 자신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곳. 하지만 그곳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수화음이 울리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강진은 울컥 치미는 화를 꾹 눌러 참고 물었다.

“......어디야?”

-편의점이요.

너머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차분해서 더 열이 올랐다.

“편의점?”

-네.

“금방...... 가지.”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강진은 편의점으로 향했다.

살다 살다 차강진이 편의점에를 다 가다니.

***

“.......”

편의점 안에서 지음이 끊긴 전화기를 들고 서 있자, 동희가 다가왔다.

“왜?”

“......그 사람.”

“그 사람? 아, 차...... 차강진 그 사람? 왜? 이리로 오겠대?”

“응.”

지음의 말에 동희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손님이 오자, 동희는 얼른 계산대로 돌아갔다.

동희의 얼빠진 모습은 생활이었기에 지음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삼각김밥과 라면을 집어 들었다.

딸랑 소리가 나고, 동희의 떨리는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어서 오......세요.”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가 지음의 옆에서 멈췄다.

“여기서 뭐 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묵직하고 울림이 있는, 깊은 목소리.

지음이 돌아보니 강진이 인상을 쓰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음은 주머니에서 보란 듯이 그가 건넸던 카드를 꺼내 보였다.

“밥 먹으려고요. 안 되나요?”

“하.......”

강진이 한숨을 토해냈다.

어쨌거나 그녀를 만났다는 안도의 한숨, 제 전화를 받지 않고 여기 이러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언짢음.

이 여자는 왜 매번 안 되냐고 묻는 걸까. 이까짓게 뭐라고. 왜 매번 이런 일로 날 선 대답을 하는지도 궁금했고.

“돼. 되는데.......”

강진은 그녀의 손에 들린 라면과 컵밥을 뺏어 내려놓고 지음의 손을 잡았다. 손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가 한 번 돌아볼 정도였다.

강진은 지음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뭐든 해 주고 싶었다. 그에게 주어진 1년이라는 시간에 뭐든.......

이런 라면 따위가 아니라 좋은 밥을 먹이고 싶고, 이런 낡은 옷 대신 좋은 옷을 입히고 싶고.

왜인진 모르겠다, 그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곁에 두고 좀 알아볼 생각이었다.

강진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그가 지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동희가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히 가세요.”

강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동희를 보다가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지음은 그를 따라 뛰듯 걸었다.

“정후한테 얘기 못 들었어?”

“.......”

어쩐지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지음은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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