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94)

#5화.

콴 호텔의 카페 안에서는 ‘연’이라는 사교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소위 내로라하는 재벌 그룹 사모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었다.

별로 할 일도 없고, 돈은 많고 남아도는 시간을 혼자 쓰기 무료한, 그런 이들끼리 모여 수다도 떨고 돈과 시간도 쓰자는 취지.

그곳에 차이란이 끼게 된 건 순전히 그녀의 친정인 지우 그룹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입지가 튼튼하기 때문이었다.

“아 참, 차 여사. 요즘도 중매 서고 그러나?”

목이 휠 정도로 무거운 진주 목걸이를 만지며 구동 그룹의 윤 여사가 물었다.

커피를 마시던 이란이 얼른 차를 내려놓고 웃었다.

“네, 그럼요. 왜요, 윤 여사님? 자제분은 이미 결혼하셨잖아요?”

“우리 애들이야 진즉에 했지. 듣다 보니 요새 로아 그룹 손녀랑 그 집 조카랑 무슨 얘기가 오가는 거 같던데. 아니야?”

“아, 우리...... 강진이요?”

이란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웃는 낯을 유지했다.

‘어휴, 여편네들 소문도 빠르기도 하지.’

“조카 나이가 몇이지?”

“강진이가 올해 서른셋이에요.”

“어, 그래? 벌써? 그러면 뭐 말 나올 때도 됐네. 할 때 됐잖아? 요새 결혼이 늦어졌다고는 해도 또 너무 혼자 있으면 보기 그렇더라고.”

윤 여사는 나이도 그렇고 연 모임의 초창기 회원이었기에 입김이 대단했다.

그녀의 눈 밖에 나면 모임에서 자리를 빼야 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말을 얹었다.

“맞아요. 할 때가 됐네요.”

“그럼 차 여사 조카가 로아 그룹 손녀랑 결혼이라도 하면 로아 쪽 후계자가 되는 거야, 아니면 지우 쪽 후계자가 되는 거야?”

윤 여사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뭘 벌써 그런 얘기를 다 해? 젊은 사람들 만나서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그런가요. 차 여사, 미안.”

“네, 뭐.......”

하지만 덕분에 이란은 눈이 번쩍 뜨이고 머리가 시원해졌다.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강진이 결혼하도록 애써보겠다 했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로아 그룹 회장 김건국에게 남은 자제라고는 김희라뿐이었다.

그녀의 사윗감에게 로아 그룹을 물려주게 될 테니, 강진이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지우 그룹의 차기 후계자는 강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강진이가 몸이 두 개로 쪼개지지 않는 한 힘들겠지. 강진이 로아로 가게 된다면 지우 그룹은 자연히 동기에게 주어지게 될 텐데.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이란은 기쁜 마음에 얼굴이 환해졌다.

‘무조건...... 강진이를 희라와 짝지어 보내야겠어!’

그녀는 그리 굳은 다짐을 하며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 마셨다.

***

강진이 마련해 준 침실 건너편에 누웠지만, 지음은 밤새 잠을 쉬이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강진은 출근하고 집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강진이 말한 대로 정후가 지음을 찾아왔다.

지음은 그와 함께 단지 중앙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다른 동과 다르게 생긴 건물, 뭐가 있기에 저리 큰 건물이 별도로 있는 건가 싶었던.

“여긴 입주민용 커뮤니티 동이야.”

“.......”

설명을 들어도 감이 오질 않았다.

그는 덧붙이는 말 없이 1층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사람은 거의 없어서 한적하게 자릴 잡고 앉아 얘길 할 수 있었다.

“여긴 입주민 등록이 되어 있으면 무료니까 언제든 와서 먹어도 돼. 이를테면 호텔 조식 같은 거라고 생각해.”

지음은 호텔 조식이 어떤 건지 몰랐지만, 무료라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공짜라고요?”

정후가 회원 카드를 건넸다.

“응. 이미 등록은 해뒀어.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입구에서 카드만 찍으면 되니까 가지고 있어.”

“네.”

정후가 지음을 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정후는 수수하고 꾸밈없는 지음이 동생으로 예쁘기도 하고, 한창 멋 부릴 나이에 이러고 지내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거기다...... 누군가를 쏙 빼닮은 것도 정후가 그녀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나중에 강진에게 한 대 얻어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이번 기회에 지음이 힘든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 만큼 돈도 벌고, 즐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지음과 강진은 서로 갈 길이 다른 사람들이니 1년간 잘 지내다가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거. 그러다 혹시...... 강진의 마음이 흔들려서 예상치 못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그게 정후가 원하는 바였다.

“앞으론 내가 사다 둔 옷으로 입고 다녀. 혹시 마음에 안 들면 원하는 거 사서 입어도 되니까.”

“네?”

“아, 음, 그렇게 다니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강진이도 좀 곤란해지거든.”

“.......”

그의 말에 지음이 제 옷을 훑어보았다. 헐렁한 티셔츠에 빛바랜 청바지.

“기분 나빠지라고 한 말은 아니고....... 물론 깔끔하고 좋아, 좋은데...... 알잖아. 이런 사람들은 우리랑 다르다는 거.”

“......네, 그럴게요.”

“그래.”

정후가 화제를 돌리려고 얼른 두툼한 서류를 건넸다.

“휴대전화에도 같은 정보 미리 넣어두긴 했지만, 이것도 수시로 꺼내서 봐.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언제든 전화하고. 번호는 3번에 저장해 뒀어.”

“.......”

이미 강진의 번호와 정후의 번호는 외워뒀다. 어차피 이 세상에 외울 번호라고는 강진과 정후, 동희의 번호밖엔 없었다.

“그리고 이건 수영장 회원 카드. 필요하다고 했다며?”

“......네.”

“등록해 뒀으니까 언제든 이용하면 돼. 이따 나가면서 어딘지 알려줄게.”

수영장 운운했던 건 동희를 편히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구태여 그런 말까진 하지 않았다.

정작 지음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데 어째선지 정후가 더 신이 난 것처럼 들떠 보였다.

그가 들고 왔던 작은 종이가방을 지음의 앞으로 내밀었다.

“뭐예요?”

“수영복. 수영장 다니려면 필요하잖아.”

“아.......”

“근데 사이즈는 다 어떻게 알았대?”

“네?”

자기가 사 와놓고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냐니. 지음이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정후를 올려다봤다.

“강진이 말야. 예전부터 눈썰미 좋고 날카로운 줄은 알았지만, 대단해. 수영복에 속옷 사이즈까지. 강진이가 그러던데? 네 사이즈 그 정도 될 거라고. 그러고 보니 옷은 잘 맞아?”

“......네.”

강진이 정후에게 자신과 한 번 잔 사이다, 말을 하고 다닐 사람 같진 않았지만 괜히 찔려서 정후와 눈빛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괜히 그날의 일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지음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물었다.

“저기...... 혹시 일을 좀...... 해도 될까요?”

“응? 무슨 일?”

“그냥 뭐...... 알바 같은 거라도요.”

“왜? 무료해서 그래?”

“아뇨. 그냥...... 돈이 좀 필요해서요.”

물론 1년의 결혼 기간 후에 이혼을 하면 십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생기겠지만, 그 전에 돈이 필요했다.

징글징글한 악연 때문에라도.

이런 좋은 집에 살고 있는 걸 알기라도 한다면 민자는 당장 강진을 찾아가기라도 할 게 뻔했다.

“아...... 그럼 내가 좀 알아봐 줄게.”

“내가 알아봐도 돼요.”

“아냐, 내가 낫지. 며칠만 기다려봐.”

어느 정도 얘기가 마무리되자 정후가 물었다.

“난 가봐야 하는데, 같이 일어설래?”

“전...... 조금 더 있다가 갈게요. 음식이 맛있어서 더 먹고 싶어요.”

“......하나도 손도 안 대놓고?”

“.......”

정곡을 찌른 말에 지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후가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겠지.

“그래, 그럼. 천천히 먹어. 수영장은 어쩌지?”

“혼자 찾을 수 있어요.”

그렇게 정후를 보내고, 지음은 잠시 앉아 있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레스토랑으로 와.]

***

얼마 지나지 않아 동희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지음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는 지음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시켜놓은 음식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와, 나 이거 먹어도 돼?”

지음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 난 동희가 음식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며 눈을 찌푸리던 지음이 입을 열었다.

“너...... 운전할 줄 알아?”

“운전? 차? 응, 면허 땄잖아. 왜?”

“......아냐, 일단 먹어.”

동희가 다시 스테이크를 찍어 먹는 걸 보고 지음은 정후가 건네고 간 자료를 넘겨보았다.

그러다 ‘김희라’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 아래 진하게 쓰여있는 글씨 때문에.

[특이사항 : 강진을 짝사랑하고 있음.]

‘짝......사랑.’

사실 지음과 강진은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음은 제 고운 눈썹이 일그러지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

강진은 점심 먹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일에 파묻혀 있었다.

정후가 들어왔지만, 고개도 들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정후가 문을 똑똑 다시 한번 두드렸다.

“대표님, 점심 안 드십니까?”

“박 비서 먼저 먹어.”

“넵. 바빠도 끼니는 챙겨 드십쇼.”

나가려던 정후가 도로 몸을 돌려 강진에게 말했다.

“저기, 대표님.......”

“......?”

“지음이가 일자리가 좀 필요한 거 같다는데.”

“뭐?”

밥 먹자는 말에도 쳐다보지 않던 강진이 그제야 펜을 놓고 정후를 보았다.

“일자리라니? 무슨 말이야?”

“아...... 뭐.......”

지음의 사정을 시시콜콜 강진에게 말할 수 없었던 정후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시골에서 활동적으로 일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크고 낯선 집에 혼자 남아 있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게 말해? 일하고 싶다고? 언제?”

“네? 아...... 아까 레스토랑에서 아침 먹이고 회원 카드랑 대표님 정보 전해주고 왔거든요. 그때 나온 얘깁니다.”

“.......”

강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 보이자 정후가 얼른 말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강진이 뭐라 대답하려는데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어?”

정후가 문을 열자 희라가 싱긋 웃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

순간 강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는 걸 보고 정후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저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가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하자, 희라는 살짝 인사를 하곤 손에 든 종이가방을 들고 강진에게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강진은 ‘한지음’ 그 여자를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내 강진이 정후에게 손짓을 했다.

“박 비서, 잠시 기다려.”

그의 말에 나가려던 정후도, 다가서던 희라도 얼굴이 굳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