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94)

#4화.

집 안으로 들어가자 강진이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일전에 정후에게 받았던 건 임시 키니까 그건 정후 주고. 이걸 사용해.”

지음이 자신에게서 카드를 받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거실을 지나쳐 집 구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화장실과 주방, 서재, 수많은 방, 옥상 테라스로 오르는 계단까지. 강진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집을 설명하며 앞서 걸었다.

지음은 단단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 걷다가 물었다.

“전...... 어디서 생활하나요?”

지음의 말에 그는 손잡이가 다른 곳과 달리 양쪽으로 달린 방 앞에 멈춰서더니, 문을 열었다.

드레스 룸이 두 개나 달린 큰 방이었다. 방 한쪽에 놓인 침대가 얼마나 큰지.......

하지만 침대는 하나였다.

“이곳이야, 당신과 내가 함께할 방.”

“침대가.......”

지음의 말에 강진이 느릿하게 그녈 돌아보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잘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

“반해서 동거까지 하는데 각방을 쓸 순 없잖아? 같은 방에서 침대를 따로 두고 자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지음이 꿀꺽 침을 삼켰다.

“왜, 문제 있어?”

“......아뇨.”

강진은 센 척하는 눈앞의 작고 어린 여자를 보며 묘한 감정이 일었다.

처음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랐고, 당황스러웠고. 지금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고 저 예쁜 입술을 입 안에 넣고 맛보고 싶었다. 가슴 깊은 곳에선 이렇게 화가 치미는데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따라와.”

그가 간신히 욕망을 누르고 몸을 돌렸다.

안방에서 건너편으로 마주하고 있는 방으로 걸어간 강진이 문을 열었다.

그를 따라 들어가니 침실보다 작았지만 넓고 깨끗한 방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드레스 룸도 있었고, 가방과 액세서리 따위도 보관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그녀가 입을 만한 옷들과 가방, 신발, 액세서리로 가득했다.

연한 하늘색의 침대에는 하늘하늘한 흰색의 캐노피도 있었다. 책상 위엔 TV에서나 보던 핑크빛의 노트북이 있었다.

“.......”

방 안 여기저기 놓여 있는 것들은 지음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고, 갖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 할 만큼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꿈인가 싶었다.

지음이 큰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방을 둘러보는데,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 정후가 필요한 거 위주로 꾸며놓긴 했는데.”

“.......”

강진이 캐노피를 툭툭 치며 인상을 썼다.

“이런 건 대체 왜....... 암튼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해.”

“그럴게요.”

“이곳이 당신 방이야. 원할 땐 이곳에 있어도 좋아.”

“......네.”

“대신 내가 원할 땐.......”

강진이 지음을 돌아봤다.

그녀의 눈동자, 사슴처럼 까맣고 맑은 눈동자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매번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짓는 여자에게 욕정을 품는 것도 우스웠다.

‘차강진, 정신 차려. 이 여자는...... 그녀가 아니야. 정후 자식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가 지음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거실로 나갔다.

“내가 출근하면 여기서 뭘 하든 자유야. 뭘 배워도 좋고, 쉬어도 괜찮아.”

“갇혀 있어야 하나요?”

“......?”

언제나 그녀는 예상외의 답변을 내놓곤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은 공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지?”

“.......”

“연락만 되면 돼. 내 번호, 저장해 두고. 되도록 외워둬.”

“네. 저기...... 여기 수영장이 있던데.......”

“수영?”

의외라는 듯 강진이 그녀를 돌아봤다.

민망한 듯 지음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배우고 싶어서요.”

“정후에게 말해서 회원으로 등록해 두지.”

“고마워요.”

“적당한 사람 구해서 기사 붙여줄 테니.......”

“필요 없어요, 그런 거.”

“익숙해지도록 해, 그런 것도.”

단호한 강진의 말에 지음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중에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럼.”

강진이 거실로 향하자, 그녀가 따라 나갔다. 그가 지음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연보라색의 휴대전화가 들어있었다. 미적 감각이 없는 지음이 보기에도 예뻤다.

“예......뻐요. 고마워요.”

“거기에 나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어. 가족, 일, 과거와 현재.......”

물론 그녀에 대한 얘기는 제외하고.

“.......”

“천천히 알아둬. 퇴근 후엔 당신이 내게, 당신에 대해 알려주는 거로 하지.”

지음은 강진의 말에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나에 대해.......’

나에 대해 알려줄 말이 있을까.

한지음, 스물넷. 쫓기듯 도망 나와 온정리에서 잡초처럼 흔들리며 살았다는 거. 가족도 친척도 없는 외톨이.

은행 빚보다도 무서운 양부모의 빚, 병원비, 스물넷이 되도록 집도 절도 없이 정후의 옥탑방에서 얹혀살고 있다는 얘기.

동네에서 아무 일이나 일손이 필요할 때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돈을 받고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는 거.

그런 걸 말해야 한다는 건가. 그런 구질구질하고 밑바닥 인생 같은걸?

「저 같은 애한테 십억을 줘요?」

「응. 1년 동안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고 생각해. 이를테면 1년 연봉인 셈이지. 꽤 조건이 까다롭긴 하거든.」

「무슨 일인데요?」

「그냥...... 누구랑 같이 살아주면 돼, 1년만.」

그 말을 하는 정후의 얼굴이 미안해 보였다.

1년에 십억이라는 엄청난 보수의 일을 제안하면서 왜 그랬을까.

「저라도 괜찮대요? 배운 것도 없고, ......사람한테 관심도 없는데.」

「그래서 너여야 해. 사람한테 관심은 없지만, 돈은 간절한 사람. 그래서 반드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십억이라는 돈을 떠올리며 지음은 고갤 끄덕였다.

그 이후에 상대가 강진이라는 걸 알았지만, 다시 그 순간이 돌아와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간절했으니까.

지음은 정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강진을 보았다.

십억을 주는 일인데...... 창피한 인생 좀 들여다보면 어때서.

“네, 그럴게요.”

강진은 지음의 마른 몸을 보다가 말했다.

“씻고 와. 밥 먹으러 가지.”

강진의 말에 지음이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주방을 돌아봤다.

“집에서 안 먹고요?”

“집에서 밥 잘 안 먹어.”

“.......”

아깝다, 저런 넓고 깨끗한 주방.

지음의 시선을 눈치챘을까. 강진이 말을 덧붙였다.

“음식 만드는 거...... 원하면 해도 좋아. 편할 대로.”

“.......”

“내일은 정후가 올 거야. 와서 내가 다 하지 못했던 얘기도 해 줄 거고. 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하겠지만.”

“한 달 후엔...... 어떻게 되나요?”

지음의 말에 강진이 그녀를 보았다.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거지.”

“.......”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래서 강진의 속을 더욱 뒤집어 놓는 그녀였지만 사실은 걱정도 되겠지.

어떤 사정이 있어서 이런 일을 하겠다고 했는지 몰라도 그녀의 나이 이제 스물넷.

그래서 강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지음에게 뭐든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1년의 계약 이후 대가로 주겠다는 돈 말고 뭐라도, 그녀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게 뭐든.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잔상......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 물었다, 지음의 진심을 알고 싶어서.

“혹시 하고 싶었던 결혼식이라든가...... 입고 싶은 드레스가 있나?”

순간 하얀 웨딩드레스가 미치게도 잘 어울렸던 누군가가 떠오르자 강진이 인상을 썼다.

그의 질문에 지음 역시 당황한 듯 보였다.

강진은 숨을 길게 내뱉고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말해봐. 하늘의 별을 따 달라거나 하는 것만 아니면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시답잖은 농담에도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러면, 그런 건...... 안 하고 싶어요.”

“.......”

사실이었다.

지음은 제 인생에서 결혼이라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으니까. 결혼을 하지 않을 텐데 하고 싶은 결혼식이나 입고 싶은 드레스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강진은 허탈한 듯 김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뭔가 기대를 했던 걸까.

지음은 그의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워 보여 하마터면 하겠다고 할 뻔했다.

“나중에 정말...... 하고 싶은 사람과 하는 게 좋겠지, 당신에게도.”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지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좋겠어요.”

그와는 돈과 계약으로 얽힌 사이이니 마음을 보여주는 일 따윈 사치일 뿐이다.

진심이 되어봤자 십억이라는 돈이 날아갈 수 있었고, 그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둘이서 끝낼 순 없고. 가족끼리 조촐하게 식사 정도는 할 거야. 그렇게 알아둬.”

“네.”

“혹시 당신 쪽에서도 부를 사람이 있나?”

“......아뇨.”

강진이 멈칫했다.

지음은 그의 그런 반응을 보면서도 가족이 없다는 게 슬프지 않았다.

물론 언니를...... 찾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지금의 지음으로선 무리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없어서 슬펐던 건 어린 시절 이미 겪고 지나간 일이었다. 그런 거로 슬퍼하고 있기엔 지음의 생활이 너무도 고단했다.

“신혼여행은?”

“그것도 안...... 가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강진이 잠시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불쌍하고 안됐다, 했더라면 견디기 힘들었을 테지만 그는 그냥...... 바라만 보았다.

그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어떤 감정도 담아내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들었으니까.

잠시 텀을 두었다가 강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지우 문화재단 대표이사, 차강진]

지음은 소리가 나지 않게 그의 직책과 이름을 읊조렸다.

“1번에 저장해 뒀을 테지만 번호는 되도록 외우고.”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카드 하나를 건넸다.

‘새카만...... 카드?’

VIP카드였다, 무광의 블랙카드.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신용카드.

잡다한 장식 없이 실같이 얇게 두른 테두리만 광택이 도는 카드였다.

체크카드는커녕 그 흔한 마트 회원 카드 따위조차 없는 지음은 카드의 무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시선을 잡아끄는 차강진처럼 아름다운 카드에 홀린 듯 눈길을 두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렀다.

“......당신 거야. 제한 없으니까 마음대로 쓰면 돼.”

지음은 마치 그 말이 ‘차강진도 당신 거야.’라고 들린 것 같아서 묘한 느낌에 그를 올려다봤다.

꼭...... 동화 속에 나오는 마녀에게 홀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짙고 어둡고...... 차갑게 가라앉은 강진의 눈빛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