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순식간에 갈색의 곱슬머리가 그녀의 어깨와 등으로 흘러 내렸다.
지음의 놀란 표정을 보며 강진이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작은 머리를 잡았다.
다른 손으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지음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몸을 돌려세웠다.
“읏......!”
지음이 그의 몸에 붙었다 떨어지며 창에 기대섰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고 물러날 수 없는 상태.
등에 유리창의 찬 기운이 느껴지는데, 강진이 그녀의 얼굴에 숨결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이 다가갔다.
“.......”
강진은 놀라서 스르르 벌어진 지음의 아랫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이런 거로 놀라면 안 되지. 더한 짓도 해야 하는데. 계약 결혼......이라도 난 제대로 부부 생활을 할 생각이거든. 자신 없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둬도 좋아. 정말 할 수 있겠어?”
나지막하게 깔리는 강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지음은 그의 적대심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지만,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고갤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어요.”
“그럼 입술, 벌려봐.”
그의 말에 지음은 침을 꼴깍 삼키고 입술을 벌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술이 붙였다 떨어질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온몸의 감각 세포가 깨어나는 듯했다.
강진은 키스할 듯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말했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한지음...... 씨.”
“.......”
강진의 뜨거운 숨결이 지음의 숨결에 섞이기 시작했다.
부끄럽고도 묘한 기분에 얼굴이 붉어지는 찰나, 그가 지음에게서 멀어지며 등을 보였다.
떨려서 다리가 휘청했다.
지음이 가슴에 손을 대고 숨을 후 몰아쉬며 비틀거리자, 몸과 창문이 부딪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 바람에 강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음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다리에 힘을 주어 섰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런 것쯤은 언제든지 버틸 수 있는 것처럼.
거짓말로 시작한 인연이었고,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음에겐.
***
지음이 강진과 동거를 하겠다고 덜컥 결정하게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오늘은 그녀가 온정리 시골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오는 날이지만, 강진은 지우 문화재단 대표이사실에서 정신없이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파리 루브앙 미술관과 협약을 맺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고, 성사되면 가을에 미술 전시회를 열 예정이었다.
교류 후 처음 열리는 전시회인 만큼 프랑스 쪽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삐.
-대표님, 기획실장님 오셨습니다.
정후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리자 희라가 들어왔다.
“대표님, 전시기획팀에서 정리한 가을과 겨울 일정 시안입니다.”
서류를 보느라 희라를 보지도 않는 강진이었지만, 그녀는 방으로 들어설 때부터 상기되어 있었다.
몸매가 다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강진 앞에 선 희라가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잠시만.”
“네.”
강진은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서류를 집어 들고 소파로 가 앉자 희라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소파에 앉기엔 다소 짧은 치마라 뽀얀 허벅지가 다 드러났지만, 희라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오히려 강진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강진은 희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는 그의 반응에 초조해진 걸까, 희라가 몸을 그에게 바짝 붙이며 입을 열었다.
“저기...... 강진아.”
서류를 넘기던 강진의 손이 멈칫했다.
“집에서 말이야.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얘기를 꺼내시더라고.”
“그래서?”
“어? 아...... 언제든 시간 한번 맞춰서.......”
희라가 설레는 마음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갈수록 강진의 얼굴은 점점 싸늘해졌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강진이 그녀의 말을 잘라 들어갔다.
“일정 임시 안은 이대로 하고. 파리 쪽에서 연락 오면 특별 전시 일정은 따로 잡아야 하니 바로 보고하도록 해요.”
“.......”
결혼 얘기를 꺼내 보려던 희라는 그의 말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희라의 나이 서른셋. 요즘이야 늦은 나이는 아니라고는 해도 그녀는 강진을 제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게 설령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하지만 매번 이런 식이었다.
자존심 다 내려놓고 먼저 말을 꺼내봤자, 그는 아예 대답도 하지 않거나 이렇게 일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차라리 따로 시간을 빼서 얘길 했더라면 좀 더 나았을까. 괜히 성급하게 업무 중에 얘길 꺼낸 건 아닐까.
희라는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꾸 후회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생각에 빠져 희라가 말이 없자, 강진이 그녀를 보았다.
“실장님?”
“네?”
강진이 얼굴을 찌푸린 채로 서류를 테이블 위에 탁탁 쳤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그녀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고 난 강진은 몸을 일으켜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한 번 실수로라도 희라를 돌아보지 않았다.
입술이 아플 정도로 꽉 물고 나가려던 희라가 문손잡이를 붙든 채 그를 돌아봤다.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갈가리 찢긴 자존심 때문에 마음이 너덜거렸지만...... 사랑하면 약자가 되는 법이지.
희라는 심호흡을 하고 방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강진아.”
스치듯 본 그의 책상 위엔 [IO호텔 VIP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저기...... 오늘 저녁이나 같이할래? 어, 둘이 좀 그러면, 뭐 그럴 것도 없지만...... 정후랑 같이해도 좋고.”
“선약 있어.”
“무슨......? 혹시 할아버지랑 저녁 약속.......”
“김희라 실장님. 내가 그런 것도 하나하나 다 보고를 해야 합니까?”
“.......”
“나가보세요, 김 실장님.”
강진의 시선이 도로 서류로 향했다.
희라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싸늘하기가 한겨울 칼바람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다.
화도 나고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 와중에 가장 화가 나는 건 차강진을 놓아버릴 수 없는 제 마음.
“하...... 그래도 한 달 후 IO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엔...... 나랑 가게 될 거야.”
희라는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초대장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했다.
파트너 동반 초대장이지만 강진의 곁엔 여자라곤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내.
그 생각을 위안 삼아 희라가 숨을 후 내쉬며 허리를 곧게 펴고 걸었다.
또각또각, 외로운 발소리가 멀어졌다.
***
지음의 옆으로 동희는 낡은 여행 가방을 든 채 그녀를 쫓아가고 있었다.
버스의 짐칸에 가방을 넣고 동희가 지음 옆에 앉았다.
“너 정말 이거...... 할 거야?”
“응.”
“1년이야. 1년 동안...... 이름이랑 얼굴만 아는 남자랑 같이 살겠다고? 아무리 돈이 좋아도 이건 좀.......”
이름이랑 얼굴만 아는 남자. 동희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아.”
지음은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을 지우려고 손가락으로 입김을 불어 넣은 창을 비볐다.
“지음아....... 네가 힘든 거 아는데.......”
“동희야. 그냥 돈 아니야. 십억이야. 너 십억이라는 돈 본 적 있어?”
“......아니.”
“우리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돈 구경도 못 해. 그러니까 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지음이 눈을 감았다.
동희는 더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지음은 버스에서 내려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강진과 함께 할 집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내내 가방을 들고 동희가 따라오자, 지음이 그를 돌아봤다.
“넌 왜 따라와, 여기까지?”
“나 저기, 단지 내에 있는 편의점에 취직했어.”
“뭐? 언제?”
“너 서울 오던 날, 나도 따라왔거든.”
“.......”
실없이 웃으며 말하는 동희를 보고 지음은 별말 없이 몸을 돌려 단지 쪽으로 걸어갔다.
동희가 지음과 함께 다니는 건 어려서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치부,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동희는 그간 다 봐 왔으니.
그래서인지 동희는 지음에게 나름의 동지애를 느끼는 듯 보였다.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같은 마을에서 부모 형제 없이 서로를 의지해서이기도 했고. 오지랖 넓은 동희의 성격도 한몫했을 거다.
침묵이 허락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묻지도 않은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잠은 거기 숙직실에서 자도 된대. 그거 알아? 편의점이 온정슈퍼랑은 비교도 안 되게 커. 숙직실에 매트랑 이불도 다 있고. 씻는 건 수영장에 달린 목욕실에서 해도 된대. 와- 무슨 아파트에 수영장도 있어? 서울 아파트는 원래 이런가?”
“.......”
떠드는 그의 말에도 지음은 대답하지 않았다.
동희처럼 지음 역시 처음이라 잘 모르기도 했고, 강진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알게 모르게 그녀를 긴장하게 했다.
어느새 단지 앞에 도착하자, 동희가 그녀를 불렀다.
“지음아.”
“응.”
그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지음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바보 같아.
지음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으응. 아냐, 아무것도. 내 번호 알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가.”
“응, 갈게.”
동희가 그녀의 가방을 앞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뭘 해 줄 수나 있고?
지음이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가느다란 손목으로 가방을 들어 올리는데, 검은색 차가 그녀의 앞에 와서 섰다.
“.......”
차의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고 나타난 건 조각 같은 강진의 얼굴이었다.
“타.”
지음이 가방을 뒤에 던져놓고 차에 올랐다.
벨트 소리가 딸깍 들리자, 차가 스르륵 움직여 지하로 향했다.
“휴대전화 번호가...... 없던데, 계약서에.”
“.......”
그의 말에 지음이 입술을 꽉 물었다.
“왜 말이 없지?”
“그...... 휴대전화가 없어요.”
강진은 잠시 멍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겠지, 요즘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 걱정이 되어서였을까. 지음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별로 필요하지 않아서요.”
다행히 강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갤 끄덕였다.
“준비해주지.”
“.......”
“그리고 지금부터 한 달 뒤에 결혼식이야.”
“네.”
“나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아둬. 나 역시...... 당신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
그의 말에 지음이 강진의 옆모습을 보았다.
어쩐지 그의 마지막 말이 쓸쓸하게 들려서 가슴이 시렸다.
지음이 찌릿한 가슴을 어쩌질 못해 옷을 움켜잡는데 그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지음은 그가 예쁘다고 했던 입술을 꽉 물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