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정후의 차가 부드럽게 섰다.
“다 왔다. 오느라 고생했어.”
정후의 말에도 지음은 별말 없이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봤다.
둥글게 벽이 올라가 있고 불빛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한 그곳은, 마치 견고한 성과도 같아 보였다.
건물 자체는 높지 않았지만 빛이 새어 나오는 창도, 건물 외벽을 이루는 벽돌도 지음의 동네에선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이리로 가면 돼.”
정후와 함께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단지가 둥글게 둘러 지어져 있고, 그 안으로 단지의 건물들과 다르게 생긴 건물이 높이 올라가 있었다.
‘프리이엄 홀’이라는 글씨는 눈이 시릴 정도의 흰색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평소에 기가 죽지 않는 지음이었지만 그녀를 둘러싼 건물을 보고 살짝 위축이 됐다. 또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누군진 몰라도 이런 집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정말 십억이라는 돈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돈이면 재진의 병원비를 다 갚아버리고 지긋지긋한 연을 끊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프리미엄 홀을 등지고 건물로 오르는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선 정후가 버튼을 눌렀다.
“9층으로 올라가면 돼.”
정후의 말에 그제야 지음이 그를 돌아봤다.
“같이...... 안 가요?”
낯설었다, 이런 공간.
지음이 지내던 동네에서 가장 좋은 집이라고 해 봤자, 돌담으로 쌓아 올린 벽으로 두른 이층집이 다였고, 그나마도 다른 집들은 담조차 없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으니까.
정후는 그녀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럽게 웃었다.
“선보는 자리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끼면 서로 불편해.”
“.......”
그가 서류 봉투와 골드 색의 카드키를 내밀었다. 카드키엔 VIP 방문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듯 박혀 있었다.
“이건 계약서고 이건 키. 열고 들어가면 돼. 다 얘기해 놨으니까 걱정 말고.”
“네.”
“9층이야. 우리가 했던 얘기, 기억하지?”
“네. 아, 몇...... 호예요?”
“여긴 한 층에 한 세대야.”
그녀가 정후의 명함까지 받아들자,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지음을 보았다.
“......왜요?”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누굴 좀 닮은 거 같아서.”
“내가요?”
“응. 암튼 난 간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고.”
정후가 인사를 하고 돌아가자, 손에 들린 명함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휴대전화도 없어서 쓸 일이 있겠나 싶었지만, 명함을 가방 안쪽에 넣어 두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 2층, 3층....... 9층을 향해 올라가는 내내 지음은 이상하게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재미없던 지음은 뭘 봐도 별로 놀라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 집은 놀랄 만했다.
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진짜 놀랄 일은 따로 있다는 걸 몰랐다.
정후는 조건에 대해선 일러주면서도 이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정후가 상사로 모시는 사람이라고만 했을 뿐.
9층에 도착하자 정후의 말처럼 호수도 쓰여있지 않은 커다란 문이 하나 나왔다.
팔을 벌리고 재야 할 정도로 큰 현관문에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손잡이 옆으로 달린 패드에 카드키를 대니 띠리릭 소리가 났다.
‘대가만...... 생각해.’
1년에 십억이었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아마 다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 짓을 다시 한다 해도 모을 수 없는 돈.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엔 아무도 없었고, 생각보다 너무 넓었다. 거실이 온정마을 마을회관만큼은 되는 듯했다.
여기저기 닫혀 있는 문만 해도 여러 개라 자칫했다간 길이라도 잃을 지경이었다.
거실 구석에, 통으로 된 유리창 옆으로 보니 회오리처럼 둥글게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그렇게 지음이 깨끗하고 어마어마한 집에 자그마한 티끌처럼 어색하게 서 있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좀 늦었군.”
“......!”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돌아본 지음의 시야에 들어온 건, 어두운 푸른색 슈트 차림의 그였다.
3년 전 여름, 그녀의 첫 남자.
긴 복도를 통해 거실로 들어선 남자, 강진도 지음을 알아봤는지 멈칫했다.
지음을 보며 그의 훤한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지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래도 정후가 잘못 얘기한 거 같다, 돌아가라.’
표정이 어두워지고 눈썹을 찡그리는 게 꼭......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강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별말 없이 소파로 향했다.
“......앉지.”
지음은 그의 말에 따라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주방에서 나온 강진이 그녀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는 긴 다리를 지음의 반대쪽으로 꼬아 앉아 커피를 마셨다.
지음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마셔.”
“.......”
그의 말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고소한 듯한 향기와 달리 맛은 쓰기만 했다.
그가 지음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커피 싫어 하나 보지?”
“좋지도 싫지도 않아요.”
이런 고급 커피는 안 마셔봐서.
쓴 커피 대신 뒷말을 삼킨 그녀가 커피잔을 유리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여길 왜 온 거지? 내게 일부러 접근했던 건가?”
“......네?”
적대감.
강진의 목소리엔 이유 모를 적의가 가득 차 있었다.
지음이 고개를 들어 강진을 보았다.
그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지음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
그녀를 노려보듯 보던 강진은 괴로운 듯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썼다.
“정후에게 설명은...... 들었겠지? 들었겠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
지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 계약에 대해 썩 내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 얼른 말을 덧붙였다.
“1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그 후엔 이혼한다. 결혼 기간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아무에게도 계약 결혼이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완벽하게 쇼윈도 부부를 해내고 이혼을 하면 위자료로 십억을 제공한다. 다 들었어요.”
“.......”
찻길을 건널 땐 초록 불에 건너야 한다, 그런 당연한 얘길 하는 것처럼 여자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겠다고?”
“네. 안 되나요?”
지음은 아무 감정 없이 담담히 물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에 흔들리는 건 강진인 듯 보였다. 화라도 낼 듯 짙은 눈썹을 꿈틀하다가 그는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그 웃음이 얼마나 서늘한지 지음은 제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 될 건 없지.”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지음은 정후에게서 받은 서류 봉투와 함께 제 신분증을 그에게 건넸다.
십억이라는 거액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하는데 신분은 확인해야겠지.
그가 봉투에서 계약서를 빼서 테이블 위에 놓고 신분증을 보았다.
그의 손이 떨리는 것 같이 보이는 건 착각이었을까.
“한......지음. 한지음? 이게...... 당신 이름인가?”
“......네.”
지음은 아주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곧 떨쳐버리고 입술을 꽉 물었다. 어차피 그 역시 잊었을 것이다.
“99년생이면, 스물......넷?”
“.......”
강진이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 어쩐지....... 3년이 지난 거로 알고 있는데 그때보다 더 어려졌군?”
그 역시 3년 전의 여름, 비 오던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 되나요?”
지음은 십억이 걸려 있는 1년의 계약이 어그러지기라도 할까 봐 불안했다.
십억이라는 돈을 몰랐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정후의 제안으로 그 돈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갖고 싶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의 모습도 그녀의 불안감을 가중하는 데 한몫을 했다.
“돈 때문인가? 이런 제안을...... 그 나이에 하겠다고 하는 거.”
강진은 그녀의 신분증을 꼭 쥐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지음을 보았는데, 마치 그의 눈빛은 ‘이 신분증이 네 것이 맞아?’ 묻는 것 같기도 했다.
“네. 그만한 돈을 준다는데, 안 하는 게 이상하죠. 이혼하면 위자료로 십억, 주시는 거 확실하죠?”
높낮이도 없는 지음의 말에 강진이 그제야 신분증을 내려놓고 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까부터...... 두통이 이는 모양이었다.
“그래. 완벽한 쇼윈도 부부를 연기하는 게 조건인데...... 가능하겠어?”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지만, 알려주시면 할 수 있어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랑에...... 빠지지도 않겠다?”
“......네.”
강진의 목소리가 떨리게 들리는 건 착각이겠지.
오히려 지음 쪽이 좀 더 담담했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조건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그러겠다는 여자에게...... 강진은 자꾸 화가 났다. 되려 그녀를 건드리고도 싶었다.
강진이 인상을 쓰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당신, 나...... 몰라?”
그의 말에 지음은 숨을 한 번 골랐다.
“3년 전에.......”
“그거 말고.”
“.......”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지음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자, 강진은 계약서를 찢을 듯 거칠게 사인을 하고 그녀 앞에 내밀었다.
지음이 하얀 손가락을 뻗어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그가 해 둔 멋들어진 사인을 보다가 그 옆에 ‘한지음’ 정자로 이름을 적었다. 사인 같은 건 해 본 적 없었으니까.
강진은 그녀가 마지막 글자를 쓰는 걸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결혼하면 이 집에서...... 살게 될 거야. 청소나 빨래 등 살림을 해 주시는 아주머니는 이틀에 한 번 오실 테니 집안일은 신경 쓸 거 없어.”
“네.”
지음이 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걸 기다렸다가 강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넓은 등을 보며 지음 역시 따라 일어났다.
강진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통창으로 다가가서 지음을 돌아봤다.
여자가 제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집은 이곳으로 당신이 들어오면 차차 둘러보기로 하고. 정후에게 들었겠지만 결혼 전엔 동거를 해야 할 텐데. 그것도 상관없나?”
“네.”
물론 몇 번 보고 몸을 한 번 섞은 남자이긴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자와 1년을 함께 살아야 하고 이혼까지 해야 한다는데, 지음이라고 고민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민을 해 봐도 결론은 하나. 그 돈이라면 지음은 1년간 강진이 아니라, 그 누구와도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음은 키가 커서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강진을 슬쩍 보았다.
그가 지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지음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밖을 보고 있는 강진의 넓은 어깨, 떡 벌어진 등을 보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보았다.
어느새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와 밤을 보냈던 날처럼.
“비가 오는군, 그때처럼.”
“.......”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해 지음이 당황하는데, 그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비가 내리는 저녁, 짙은 잿빛으로 변해버린 하늘처럼 강진의 눈빛 역시 어두운 회색빛을 발했다.
그가 짐승을 닮은 눈빛으로 한동안 지음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에게 다가서자, 지음이 순간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도망가면 안 되지, 우린 첫눈에 반해서 결혼할 사이인데. 안 그래?”
“.......”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의 눈빛에 분노가 스쳤다.
강진의 말에 지음은 굳은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휘청일 것 같이 생긴 여자였지만, 강진이 예쁘다고 했던 입술은 고집스럽게 닫혀 있었다.
잠시 그녀를 보던 강진이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봐.”
그녀가 천천히 강진에게 다가서자, 그는 그녀의 속도에 맞춰 뒤로 물러났다.
헐렁한 티셔츠에 어두운색의 청바지를 입은 지음이 그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그녀가 가까워지자, 강진이 뒤로 질끈 묶은 지음의 머리끈을 툭 풀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