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온정리의 7월엔 더운 바람이 불었다.
오늘은 비가 오려는지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습하고 끈적거렸다.
“지음아, 미안하다.”
“.......”
지음이 짜증 나는 건 그녀 앞에 곧 울 것처럼 서 있는 양어머니 이민자 때문이 아니라 날씨 탓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숨을 쉴 것 같았다.
민자는 지음에게서 건네받은 흰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그 안엔 지음이 한 달간 일한 돈의 절반이 들어있었고, 민자는 그 돈을 민자의 남편이자 지음의 양아버지인 장재진의 병원비로 쓰게 될 테지.
지음은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고통스러워서 눈썹을 찡그렸다.
“넌 여전히 그렇게 말이 없구나. 뭐...... 그래도 아버진데. 그렇게 병원에 누워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네 책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니.”
아버지, 내 책임.
지음은 민자가 차례로 내뱉은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어서.
민자와 재진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뻔뻔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저 바쁜데. 안 가세요?”
일을 하는 중에 민자의 연락을 받고 나온 참이었다. 지음은 이젠 낡아서 오래 잡으면 쇳내가 나는 자전거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응? 아, 가야지. 그래, 갈게. 이건...... 잘 쓸게. 고맙고, 미안하다.......”
민자가 머쓱한 얼굴로 봉투를 들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잘 쓰겠다는 말은 다음 달에도 병원비를 부탁한다는 소리였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지음은 가슴속에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오르자, 민자가 뒷모습을 보이기도 전에 자전거를 휙 돌리고 페달을 밟았다.
온정마을에서 읍내로 가는 길에 있는 다리를 막 건너는데 여름비가 쏟아졌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듯 비추는데도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난처한 얼굴을 하던 지음은 이내 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차라리 잘 됐어. 쏟아지는 비가 아니었다면 속에서 천불이 올라 미쳐버렸을지도 모르지.
3년 전 비가 왔던 그 날처럼, 지음은 비를 다 맞은 채 미역국을 사 들고 내달렸다.
***
몸이 불편하신 아주머니 대신 지음은 심부름 값을 받고 심부름을 해 주곤 했다.
아주머니 집에 도착했을 땐 비는 그쳤고, 지음은 홀딱 젖어 있었다.
“아휴, 이렇게 다 젖어서 어떻게 해? 세상에, 감기 들겠어.”
“상관없어요.”
몸이 힘들어야 머리 복잡한 생각도 덜 하고 마음이 덜 아플 테니까.
“여기, 3만 원. 비까지 맞고 와서 좀 더 넣었어. 들어와서 물 좀 닦고 가지?”
“괜찮아요. 얼른 들어가세요, 국 식어요.”
들어오라는 아주머니를 간신히 들여보내고 자전거를 돌리는데, 작은 시골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고급 세단이 그녀의 자전거를 막아섰다.
지음은 그 차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차에서 내린 정후가 흠뻑 젖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지음아, 오랜만이다. 3년 만인가?”
“.......”
“비 맞았구나? ......이렇게 보니 정말 닮았다.”
그가 지음을 보며 감탄하듯 혼잣말을 했다.
“누굴요?”
“응? 아냐, 아무것도.”
닦으라는 듯 지음에게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고 걸었다.
정후는 머쓱했는지 손수건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차를 세워둔 채로 그녀를 따라 걸었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온정마을이야 내 손바닥 안이지.”
정후는 온정리 온정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동네가 좁다 보니 없는 가족이나 양부모보다 나은 사이가 됐다. 이를테면 동네 오빠 같은. 그가 서울로 올라간 이후에야 그조차도 아니게 되었지만.
그러다 3년 전, 정후가 그의 할아버지가 운영하고 지음이 가끔 일을 봐주는 펜션에 찾아왔었다, 어떤 남자와 함께.
그 남자가 떠오르자 지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후와 가벼운 안부를 묻는 사이에 그들은 마을의 유일한 슈퍼에 도착했다.
슈퍼 주인이 일이 있어서 가게를 비우는 날이면, 오늘처럼 그녀가 가게를 봐주곤 했다.
무슨 일이든 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야 오늘처럼 민자의 얼굴을 길게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안 그러면 민자는 지음의 팔에 매달려 듣고 싶지 않은 재진에 대한 얘기를 하루 종일이라도 떠들어댈 테니까.
그녀가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우자, 지음 대신 가게를 봐주고 있던 친구 동희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이제 왔어? 어......? 형!”
정후와 눈이 마주치자 동희가 먼저 그를 알아보고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다.
“정후 형, 안녕하세요.”
“어, 동희구나. 오랜만이다.”
“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일이 좀 있어서. 너흰 아직도 그렇게 붙어 다니는구나?”
“네, 그렇죠, 뭐.”
둘이 인사를 하거나 말거나 지음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계산대에 앉았다.
잠시 어색하게 서로를 보며 웃던 정후와 동희가 지음의 곁으로 다가갔다.
“지음아, 우리 얘기 좀 할까?”
“하세요.”
“따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정후의 말에 지음이 보고 있던 영수증을 놓고 동희를 슬쩍 올려다봤다. 그는 상황 파악이 어려운지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지음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얘 앞에선 해도 돼요, 그냥 하세요.”
그녀와 동희를 번갈아 보던 정후가 포기한 채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지음아, 너...... 일 하나 해 볼래?”
“지금도 하고 있어요.”
심드렁한 그녀의 목소리에 다급해진 정후가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렸다.
“너 돈, 필요하잖아.”
“돈이야 다 필요하죠.”
“그건 그렇지, 근데 아주...... 돈을 아주 많이 주는 일이야. 딱 1년만 하면 되고.”
더 해도 좋지만.
정후는 끝말은 삼키고 지음을 보았다.
그는 온정리에서 쭉 살진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지음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돈이 필요해서 악착같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의 할아버지 집 옥탑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3년 전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펜션에 강진을 데려왔을 때, 그를 보살피는 대가로 지음에게 돈을 더 얹어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얼마나 주는데요?”
“1년에 십억.”
“시, 십억......!”
어마어마한 금액에 동희가 화들짝 놀라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지음이 고개를 들어 그런 동희를 보다가 정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십억, 이요?”
“그래.”
“......사람은 못 죽여요.”
지음의 대답을 듣고 정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그런 대답을 할 줄이야.
“그런 일 아냐.”
“근데 저 같은 애한테 십억을 줘요?”
“응. 너라서 적격일 거 같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지음을 보며 정후가 씩 웃었다.
***
정후가 지음을 찾아간 그 시간, 강진은 오랜만에 삼성동 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식탁에는 강진의 할아버지이자 지우 그룹의 수장인 차동구와, 강진의 고모 차이란, 차이란의 아들인 박동기와 딸 미림도 함께 있었다.
“얼굴 보기 힘들다, 자주 좀 오렴.”
이란이 강진의 앞에 국을 내려놓고 맘에도 없는 말을 건넸다.
이란은 지우 그룹 예술재단 대표이사 자리를 동기에게 주기 위해 강진을 살피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정작 그녀의 아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엄만. 요새 강진 오빠가 얼마나 바쁜데 그래요. 전시회도 많고, 하반기에 준비할 것도 있고. 파리 쪽 박물관이랑 미술관과 협약 건도 그렇고. 그치, 오빠?”
미림이 강진의 옆에 붙어 앉아 애정 섞인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강진은 이란과 미림이 뭐라 하든 눈썹 한 올 꿈쩍하지 않았다.
이란이 눈치도 없는 미림을 살짝 노려보았다.
“바쁘기야 뭐 매번 바쁘지. 다 바쁘지, 여기서 안 바쁜 사람 있나, 어디? 할아버지도 바쁘시지.”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너 내년이면 해외 장기 출장 가기로 해 뒀는데, 그 전에 결혼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나도 이제 얼마나 살지 알 수 없고.”
차동구 회장이 이란의 말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그 말에 평온하던 강진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안 그래도 제가 알아보고 있어요, 아버지.”
이란이 얼른 끼어들어 대답했다.
그녀는 차동구가 얼마나 강진을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강진의 형인 민준과 형수가 죽고 나서 더욱 강진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란은 더 불안했다. 상황이 이대로 흘렀다간 지우 그룹이 통째로 강진에게 떨어질 게 뻔했다.
“로아 그룹 김건국 회장님 손녀딸, 희라 아시죠?”
“누구? 희라 언니?”
미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끼어들자, 이란이 그녀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가만있으라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이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던 동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김 회장한테 손녀가 있었나?”
“네, 그럼요. 김희라라고 나이도 아마 강진이랑 같을 건데? 유학까지 다녀온 인재인데, 지금 우리 아트갤러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아버지도 한 번 보셨을걸요? 작년에 컨벤션 센터에서 파티했을 때 와서 인사했는데.”
“으음. 김 회장 손녀가 우리 지우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이야?”
“네. 당당하게 이력서 내고 들어온걸요?”
“근데 그쪽에서도 결혼 얘기가 있어?”
“자리 한번 마련할게요, 제가. 한번 믿어보세요.”
“그래라, 그리 해 봐. 같은 일하는 사람이면 이해심도 있을 거고.”
“그럼요.”
동구가 제 말에 관심을 보이자 이란이 신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희라가 우리 미림이랑도 친한데, 그렇지?”
“희라 언니는 강진 오빠랑 정후 오빠 친구잖아, 엄마. 친구끼리 무슨 결혼이야.......”
“친구....... 얘는,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그리고 친구 사이로 지내왔으면 서로에 대해 더 잘 알 텐데 잘된 일이지.”
이란과 미림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던 동구가 강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진은 제 결혼 얘기가 오가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넌 왜 말이 없어? 지금 우리가 다른 놈 결혼 얘기하는 거야? 이제 나도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데. 죽더라도 네 녀석 결혼하는 건 꼭 보고 죽어야겠다.”
그때 강진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찾았습니다. 7시까지 집으로 보내겠습니다.]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강진이 입을 열었다.
“김 박사님 말로는 좋아지고 있다고 하니 그런 말씀 마세요.”
“뭐야?”
“그리고 저한테 여자 갖다 붙이는 건 잠시 미뤄두시죠, 고모님.”
“뭐라고?”
강진이 이란을 보며 말하자, 이란이 인상을 썼다.
“미루긴 뭘 미뤄! 너도 이제 서른셋인데 정착할 때 됐다. 고모 말대로 적당한 혼처 알아보고 결혼하도록 해.”
동구가 테이블을 가볍게 치며 소리를 높였다. 작년부터 일주일에 두 번은 병원엘 가야 했고, 김 박사가 거의 집에 상주하다시피 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졌으니 초조한 마음이 들 만도 했다.
“여자 있습니다, 저.”
“......뭐?”
그의 말에 모두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때까지 없는 듯 있는 듯 앉아 있던 동기까지도.
특히 미림과 이란의 얼굴은 쓴 약이라도 씹은 것처럼 변했다.
‘으음.’ 신음을 뱉는 동구의 얼굴에만 미미하게 화색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