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자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손목에는 검은색 봉투를 끼고 자전거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흰색의 헐렁한 티셔츠가 몸에 붙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마른 듯 보이는 몸에 둥근 가슴, 옷 밖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손목과 발목.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시선을 끌었다.
거기다 ......그녀와 닮았다는 것도 한몫했겠지. 처음엔 그녀가...... 돌아온 줄 알았으니까.
질끈 묶은 머리카락 몇 올은 비바람에 삐져나와 창백해 보이는 하얀 얼굴에 붙어 있었다.
“.......”
강진의 인내심이 조금만 더 얕았더라면 손을 들어 여자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줬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여자에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냉혈한 차강진이, 이제 와 저 여자가 뭐라고.......
그러면서도 강진은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앳된 얼굴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자꾸 강진에게 그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후.”
주먹을 쥔 손이 떨리자 강진이 숨을 참았다 내뱉었다.
천하의 차강진이...... 긴장을 다 하다니.
‘저 여자는...... 그녀가 아니야.’
그가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다가 여자에게 손짓을 했다.
지음은 눈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펜션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있다가, 그의 손짓에 자전거에서 내려 다가갔다.
그는 키가 아주 커서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올려다봐야 했다.
비는 그쳤지만, 이미 읍내에서 펜션으로 오는 길에 옷이 흠뻑 젖었다.
지음은 그의 눈빛이 제게 닿자 몸을 부르르 떨고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누가 그녈 본다고 해도 무심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지음은 정후가 말한 손님이 이 남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꾸 몸이 떨렸다.
“......뭐지?”
“미역국이요.”
강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가 내민 봉투를 보았다.
“미역......국?”
“정후 오빠한테 들었어요. 오늘이 그쪽 생일이라고. 잘...... 챙겨주라고.”
“......들어와. 생일인데 혼자 밥을 먹을 순 없잖아.”
“.......”
그 뒤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지음은 비에 젖어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강진은 그냥 서 있는 것 자체가 화보 같은 남자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음이 그의 손짓에 이런 결심까지 한 건 인생에 다시 없을 일탈이긴 했다.
이번엔 지음은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본 그는 생각보다 더 근사했다. 잿빛에 가까운 회색 눈동자, 반듯한 이마와 우뚝 솟은 콧날, 날렵한 턱선까지.
지금까지 지음이 봐 왔던 남자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음이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그가 흰색 셔츠의 단추를 툭툭 풀었다.
넓은 어깨와 가슴이, 빚어놓은 듯한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다. ......보기에 좋았다.
“겁먹은 거 같은데?”
강진이 천천히 다가와 긴 손가락으로 지음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순간이지만 입술에 그의 온기가 전해졌다.
“겁나지 않아요.”
“그래?”
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남자에 관심도 없었고, 앞으로 결혼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제 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을 정도의 외모라면 이런 일탈도 한 번쯤 괜찮지 않을까.
‘죽어도 남자 따윈...... 모를 테니까.’
어쩌면 지음이 안길 남자는 이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아무리 세상에 관심이 없다고는 해도 남자의 품에 안겨보지 못한 채 죽는 건...... 어쩐지 억울할 것도 같았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지음의 얼굴을 큰 손으로 감싸듯 잡았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입술 가까이 다가와 두툼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예쁜 입술이군.”
“.......”
지음은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새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앉은 이목구비 하며,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붉은빛이 도는 촉촉한 입술이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지만.
그녀를 힐끔거리는 자들은 있었어도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하는데, 그가 슬며시 벌어지는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뜨거웠다.
지음이 남자의 와이셔츠를 꽉 붙잡았다.
벌어지는 잇새로 말캉한 혀가 들어오더니 혀와 치아를 건드리고는 빠져나갔다.
입술은 금방 떨어졌다.
“하아, 하.......”
아쉬움에 지음이 숨을 몰아쉬는데, 그가 한껏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몇 살이지? 너무...... 어려 보이는데.”
“스물.......”
하나라고 하면 너무 어릴 것 같고.
“......다섯.”
거짓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만날 일 없을 테니.
“스물다섯? 동안이군. ......이름이 뭐지?”
“한......지음.”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남자는 안도하는 듯한 눈빛이 되었다.
그가 따뜻한 손으로 지음의 작은 몸을 당겨 안고 쓰다듬었다.
어느새 젖은 지음의 옷은 그의 손길에 못 이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목덜미로 강진의 뜨거운 숨결이 쏟아졌다.
“읏......!”
생소한 감각 때문에 지음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씻......어야 하는데요....... 하아.......”
강진은 그녀의 보드라운 어깨에 입술을 붙이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욕망에 꽉 잠긴 듯한 목소리.
여자에게서 여름의 비 냄새가 났다.
싱그러운 풀냄새, 비를 담은 바람 냄새.......
그게 지음의 달콤한 향기와 섞여 그를 자극했다.
지음은 강진의 마음이 어떠한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살갗에 닿는 그의 숨결, 손길이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으니까.
눈을 깜빡거렸어도 보이는 건 없었다. 숨이 차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번쩍, 누가 플래시라도 터트린 것처럼 눈앞이 하얗게 반짝이는 순간 그가 지음을 끌어당겼다.
말랑한 지음의 몸에 닿는 그의 몸이 단단했다. 뺨에 닿는 가슴이 그랬고, 배에 닿는 그의 복부 아래 물건이...... 지음의 다리를 가둬두는 그 허벅지가 그랬다.
지음이 생경한 감각에 어쩔 줄 몰라 몸을 뒤트는데도 남자의 품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어깨에 줄곧 붙이고 있던 그의 입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음의 쇄골로, 가슴이 시작되는 보드라운 언덕으로.......
“아......!”
미칠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살결이었다. 그런 속살을 강진이 뜨거운 입술로 헤집고 있었다.
그를 밀어내려던 지음은 팔에 힘이 풀려 간신히 그의 옷자락 끝을 붙잡을 뿐이었다.
아이스크림을 핥듯 가슴을 핥던 그의 혀가 가슴 끝에 탐스럽게 매달린, 앵두 같은 젖꼭지를 톡 건드렸다.
“읏.......”
순간 전신으로 퍼지는 전율에 지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게 도화선이 된 걸까. 강진이 가슴을 삼키듯 물고 마른 듯한 지음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는 푹신한 침대 위에 지음을 내려놓고 순식간에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지음은 가슴을 다 드러낸 채로 누워 숨을 할딱거렸다.
“지금이라도...... 싫으면 얘기해. 강제로 안는 취미 따윈 없으니까.”
남자의 눈에 욕망이 일렁였다. 싫다면 거부하라고 했지만, 지음의 몸을 가둔 그의 팔과 다리는 단단해서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지음을 욕심내는 듯한 눈빛. 그 짙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옭아맸다.
지음은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락이 떨어지자 강진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꼭 그 역시...... 떨고 있는 것처럼.
“.......”
지음이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열릴 것 같지 않던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지음의 손을 꽉 잡아 내렸다. 형형한 빛이 지음을 녹여버릴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아......!”
“......그 얼굴.......”
“.......”
마음에 안...... 들어.
강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마지막 말을 삼킨 그가 지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으응.......”
지음은 허리를 들썩이며 그의 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방 안이 뜨거워질 정도로, 그래서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군지 다 잊을 정도로 격하고도 급한 몸짓이었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다신 없을 몸 맞춤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