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슈아가 4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카일은 슈아를 품에 안고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었고, 슈아는 그를 쏙 빼닮은 적안을 빛내며 동화책에 그려진 그림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아빠, 아빠, 셋째 아빠.”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슈아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카일을 불렀다.
“아빠는 눈사람 본 적 있어여?”
그랬다. 슈아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책 모퉁이에 그려진 작은 눈사람 그림이었다.
1년 내내 기온이 따뜻한 수도에서 나고 자란 슈아는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뭐 슈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제국민들이 이러할 것이다.
겨울이 있는 북부는 마물이 끊이질 않는 데다가 비옥하지 않아서, 거주하긴커녕 휴양지로조차 쓰이지 않았다.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눈을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했다.
그래서인지 슈아는 책에서만 볼 수 있는 눈사람이 신기한 눈치였다.
“눈사람?”
“네!”
슈아가 동화책에 그려진 눈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눈이야 본 적 있지만…….’
눈사람은 한 번도 못 봤는데.
카일이 난감해하며 대답을 고민했다.
그가 하사받은 영지 또한 북부이기도 하고, 그전에도 마물 토벌로 몇 차례 출전한 적 있었으니 눈이야 질리도록 봤다. 하지만 거기서 태평하게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슈아도 눈사람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렇게 고민하는 카일의 곁에서 슈아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북대륙 사람들은 매일매일 눈을 본대요. 눈으로 흙장난도 한댔어요.”
“음…… 하지만 슈아, 눈은 엄청 차가운걸? 눈으로 장난치고 놀면 감기 걸릴지도 몰라.”
“그래도요…….”
슈아가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이며 꼼지락거렸다.
“슈아두 눈 보구 싶은데…….”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뽀얀 뺨이 귀여웠다. 카일은 뾰로통한 슈아의 얼굴을 보며 사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 정말 누구 딸인데 이렇게 귀여운 거지.’
하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곤란한 건 곤란한 거였다. 눈이라니. 그거 하나 보여 주자고 슈아를 위험한 북부에 데려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전보다 더 마물이 늘었다던데……. 게다가 누나가 허락해 줄 리도 없어.’
카일이 꽤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곁에서 눈치를 살피던 슈아가 카일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며 칭얼거리듯 말했다.
“아빠, 아빠…… 슈아랑 엄마랑 첫째 아빠랑 둘째 아빠랑 다 같이 눈 보러 가면 안 돼요?”
아무래도 슈아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마지못한 카일이 북부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아빠도 슈아랑 같이 눈 보러 가고 싶은데…… 북부에는 무서운 마물들이 엄청 많이 살아서 슈아가 가는 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그렇다고 슈아의 고집이 꺾이진 않았다. 오히려 슈아는 서운하다는 듯 뺨을 잔뜩 부풀리며 어리광부렸다.
“하지만…… 하지만 저번에 아빠가 세상에서 제에에에일루 세다구 했잖아요.”
“그, 그건……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런데 마물이 아빠보다 센 거예요……? 그럼 셋째 아빠가 슈아한테 거짓말한 거예요……? 엄마가 거짓말은 나쁜 거랬는데…… 슈아는 거짓말하면 혼나는데…….”
점점 시무룩해지는 슈아의 표정을 본 카일이 당황하여 외쳤다.
“아,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슈아. 아빠가 마물보다 훠어얼씬 세!”
“그럼…… 세긴 세지만 슈아를 지켜 줄 만큼 세진 않은 거예여……?”
슈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카일을 흘긋거렸다. 그 시선에 카일은 미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제가 누구던가. 성년식도 치르기 전에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오른 카일 아르젠트 아니던가! 그런데 고작 일개 마물들 앞에서 슈아 하나 못 지키랴? 웬만한 시골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지키래도 지킬 수 있었다.
“무슨 소리야, 슈아! 아빠는 그깟 마물들 백 마리가 몰려와도 한 번에 없애 버릴 수 있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시무룩하던 슈아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그럼 셋째 아빠가 엄청 엄청 세니까 슈아도 눈사람 만들러 북부 갈 수 있는 거네요?”
슈아는 뽀얀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기대감 어린 눈으로 카일을 올려다봤다. 티아를 쏙 빼닮아 동글동글한 눈매가 퍽 사랑스러웠다.
“와아아! 신난다! 눈사람!”
카일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슈아는 오두방정을 떨며 당장 내일 북부로 출발하는 사람처럼 기뻐했다.
당황한 카일은 그제야 슈아의 꾀에 당했다는 생각을 하며 끙 앓는 신음을 흘렸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하일을 쏙 빼닮은 덕인지 슈아 또한 또래 아이들보다 배움이 훨씬 빠르고 똑똑한 편이었다.
‘이런…….’
카일은 도저히 신나 하는 슈아에게 안 된다는 말을 뱉을 수 없었다.
‘형님도 계시고 하니 슈아 하나 지키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카일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카일의 뺨에 슈아가 일부러 쪽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셋째 아빠 최고! 헤헤 슈아는 셋째 아빠가 제에에일루 조아요!”
그러고는 제 목덜미를 와락 감싸 안으며 폭 안겨 오는 작은 체온에 카일의 고민은 순식간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래! 가자 북부! 까짓것 아빠가 옆에서 지켜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