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야제
가문의 상황은 개판이나 다름없었다. 횡령과 탈세 혐의로 수시로 황궁에 들락거리는 아버지, 그리고 물어내야 하는 수많은 추징금. 사실상 대외적으로 노출되지만 않았을 뿐, 후작저의 재무제표는 이미 망가지고 있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전부 빼돌려 둔 거구나…….’
새삼 하일의 준비성에 감탄이 흘렀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황실에서는 매년 가을에 주최하는 사냥제를 조금 앞당겨 열겠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전례 없는 일이었으나, 크게 문제되는 일도 아니었기에 다들 별다른 불만 없이 명을 따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벌써 사냥제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카제프가 웃으며 다가왔다.
“저택 분위기가 영 뒤숭숭하여 이번 사냥제에서는 크게 눈에 띄는 행동은 않을 예정이란다.”
“오라버니……!”
사냥제답게 승마복 비슷한 옷을 챙겨 입은 그가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러니 티아 너도 너무 무리 말고. 적당히 산책이나 다녀온다 생각하렴.”
확실히 그동안은 사냥제가 열리면 카일이나 카제프가 모두의 이목을 끌며 곧잘 우승하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분위기에 사냥제까지 우승했다간, 정말 황실에게 그대로 미운 털 박힐지도 몰랐다.
“네, 걱정 마세요. 어차피 저는 사냥도 안 좋아하는 걸요.”
“그래, 그랬었지.”
그런 우리 둘 사이로 카일이 빈정거리며 끼어들었다.
“사냥을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겠지.”
“……뭐?”
“그 비리비리한 손으로 사냥은 무슨 얼어 죽을 사냥. 걸리적거리지 말고 얌전히 구석에 처박혀 있기나 해. 쓸데없이 사고 치지 말고.”
카일이 신랄하게 내게 비난의 말을 쏟아 냈다. 그러자 내가 반박하기도 전에 카제프가 호통쳤다.
“카일-.”
카일은 다소 반항적인 시선으로 카제프를 바라봤다.
“너 적당히 해.”
카제프의 경고에도 그는 눈 하나 꿈쩍 않았다. 오히려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째려볼 뿐이었다.
“형님이야말로 적당히 해. 저깟 마녀한테 홀려서 헤롱대지 말고.”
결국 이번에도 카일과는 마차를 따로 타고 이동했다.
황궁 사냥터에 도착하기 무섭게 카일이 다가와 한 번 더 빈정거렸다.
“왜, 이번에는 오면서 다리 벌리진 않았나 봐?”
상대할 가치도 없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았다. 그러자 카일 또한 흥미가 떨어진 건지 시큰둥하게 나를 바라보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라버니 말마따나 대충 산책이나 한다고 생각해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작에 앞서 미리 냉수를 잔뜩 들이켰다. 그러자 머지않아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으으…….”
날도 더운데 실실 천천히 걸어야지.
나는 성의 없이 터덜터덜 걸으며 숲으로 발을 놀렸다. 저 멀리 카일과 카제프 또한 숲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들은 동쪽 숲, 남자들은 서쪽 숲이었다. 나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 느긋하게 걸어 들어갔다.
대부분의 영애들 또한 나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당연했다. 이 더운 날씨에 진심으로 땀 흘리며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고 싶은 영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디 적당한 그늘 찾아서 앉아 있다 오자…….’
* * *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탓일까. 숲의 초입에 있는 그늘들은 먼저 바삐 걸어갔던 영애들이 독차지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털썩털썩 앉을 수도 없었기에 나는 생각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 저기서 쉬면 되겠다!’
마침 거대한 나무 그늘 아래 널찍하니 앉기 좋은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앉아서 한두 시간 정도 대충 시간만 때우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직 여름인 탓에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해가 쨍쨍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나는 살포시 바위 위에 앉아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부채를 꺼내 팔랑거렸다.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휴, 더워 죽는 줄 알았네.’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곳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맑은 숲의 공기를 느꼈다.
얼마나 그렇게 늘어져 있었을까.
“꺄아아악-!”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사냥 대회에서 비명 소리는 벌레를 본 영애들의 입에서 곧잘 터져 나오곤 했기에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디서 또 커다란 벌레를 마주쳤나 보네. 아니면 나무 위에서 송충이라도 떨어졌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눈을 붙이려 했다.
“꺄아아악-!”
“사, 사람 살려-!”
그런데 한 번 더 귀를 찢는 비명이 들려왔다. 단순히 벌레를 마주친 거라고 하기엔 어딘지 이상한 비명.
“도, 도망쳐요-! 얼른요-!”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또다시 들려왔다. 순간 나는 바보처럼 그 자리에 벙 찐 듯이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큰 사냥감이라도 나타난 건가 싶어서, 호들갑 떨지 않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근처를 살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이걸 인기척이라고 해야 할까.
인간의 기척이 아니다. 그렇다고 짐승이냐 묻는다면 그것 또한 확답할 수 없었다. 어딘지 질척한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이질적인 기척.
본능이 외쳤다. 도망치라고. 그러나 다리가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일 초가 일 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부시럭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낯선 생물체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한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짐승도 사람도 아닌 그것은 마물이었다. 그마저도 상태가 좋지 않은, 일반적인 마물이 아닌 무언가 돌연변이 같은 마물.
마물? 마물이 어째서 황궁 사냥터에……. 믿겨지지 않았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마물이 황궁을 돌아다닌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오러……, 오러를 사용해야만…….’
눈을 질끈 감고 마물에게 오러를 사용하려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오러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려 카일의 오러이니 저런 마물 따위 한순간에 없앨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오러의 기운이 마물에게 흡수되기 전까지는.
“……!”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마물에게 공격이 들어갔을 텐데?
마물은 카일의 오러를 맞고도 굉장히 멀쩡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화를 돋우기만 한 건지 묘하게 성나 보이는 모양새로 내게 빠르게 달려올 뿐이었다.
‘결계, 결계라도……!’
붉은 결계가 내 주변을 둥글게 에웠다. 그러나 마물이 알 수 없는 촉수를 찌르고 들어오자, 결계는 형편없이 녹아내려 갔다.
‘말도 안 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오러가……, 카일의 힘이 무력화 된다고……? 그게 가능해?
그러다 문득 과거에 이자키엘이 오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황실 마법사들을 닦달해 오랜 세월 마법을 연구해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황궁 내에 마물이라니. 그것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그렇다면 설마…….
‘오러 무력화 마법에 사용한 실험체?’
지금 드는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가능성은 농후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궁 뒷산에 마물이 나타난다는 것도, 심지어 그 마물에게 오러의 힘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
쉽게 믿을 수 없는 나머지 한 번 더 오러의 힘을 사용했다. 그러나 역시나 마물은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을 흡수하기만 할 뿐 그 어떠한 타격도 없어 보였다.
‘도망……, 도망쳐야 해.’
오러가 안 통한다면 정말 위험해……!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당장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던 다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는 그 길로 곧장 뒤돌아 내달렸다. 방향조차 확인할 틈도 없이 그저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죽기 싫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어.’
하일이 어떻게 돌린 시간인데, 살 거야. 살아야 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자 뒤로 마물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브작, 사브작 나뭇잎들을 뭉개며 다가오는 기척이 소름 돋았다. 공포스러운 나머지 나는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살려 달라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벌어진 잇새로는 거친 숨만 토해질 뿐이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마물의 속도가 느린 탓에 간격이 점차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선 숲을 빠져나가야만…….’
나가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자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까지 들려왔다. 분명 동쪽 숲엔 토끼 따위밖에 없을 텐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 틈에 서쪽 숲까지 온 모양이었다.
“사, 사람 살려……!”
뱉어지지 않는 소리를 억지로 뱉기 위해 소리쳤으나, 목소리가 영 미미했다.
“아……!”
꽤 오래 달린 탓일까. 하필 다리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종아리가 쓸려 따가웠다. 일어나야 하는데 도통 일어나지지 않았다.
‘무서워.’
살려줘,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
그러나 내 바람을 처참히 짓밟기라도 하듯, 어느새 다가온 마물은 다시금 촉수를 내게 찔러 넣으려 하고 있었다. 시커먼 덩어리가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낯선 영식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곧장 마물의 촉수를 쳐 내며 나를 보호했다.
“마물이 어째서 이런 곳에……!”
영식들 또한 제법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빠르게 검을 고쳐 잡고 마물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들을 보며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자 영식들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부축하며 자신들의 뒤로 숨겨 주었다.
“저 정도 하급 마물은 저희 선에서 무리 없이 처리 가능합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잠시 이곳에…….”
“꺄악-!”
영식이 말을 모두 마치기도 전에 마물의 촉수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이상했다. 마물은 제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보다 나를 공격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로, 촉수들은 당장 지금만 해도 다른 영식들은 공격조차 하지 않은 채 나를 노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이 제 촉수를 자르고 베어 내도 마찬가지였다. 마물은 오롯이 나만을 목표물로 삼고 있었다.
‘대체 왜……?’
게다가 재생 능력이 뛰어난 탓에 아무리 베고 죽여도 도통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숲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끊임없이 제 촉수가 썰려 나가자 더욱 분노한 마물은 한 번에 대여섯 개의 촉수를 뽑아냈다. 나를 지키고 있는 영식들은 그 많은 촉수를 막아내기에는 무리였다. 애당초 그들은 실력자도 아니었다.
“영애!”
촉수 중 두 개가 내게 가까이 다가온 순간. 출처 모를 거센 바람과 동시에 마물의 촉수가 썰려 나갔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바보처럼 잘려 나간 촉수 조각을 보다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뭐, 뭐지……?’
당황하여 주변을 살피자 멀리서 다가오는 카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일……!”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카일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런 내 뒤로 촉수 몇 개가 다시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비켜.”
카일이 곧장 나를 밀쳐 내며 한 번 더 촉수들을 베어 냈다. 우왕좌왕하던 영식들과 달리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검술이었다.
“빌어먹을 마물이 여기는 왜 있어?”
그가 중얼거리다 나를 째려봤다.
“마녀, 설마 네가 소환한 거냐?”
“그럴 리가!”
내가 소환했으면 저거에 위협받고 있겠냐!
억울하다는 듯 반박하자 카일이 의심의 눈길을 거두어 갔다.
“쯧.”
작게 혀를 한 번 찬 카일은 검을 고쳐 들고 천천히 허공을 베어 냈다. 그러자 붉은 검기와 동시에 매서운 바람이 마물을 향해 날아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징그럽게 꾸물거리던 마물은 순식간에 조각나듯 베어졌다. 카일의 검은 마물에게 닿지도 않았는데, 고작 검짓만으로도 가볍게 산산조각 냈다.
처음 보는 카일의 모습에 나는 순간 바보처럼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자 카일이 묘하게 가늘어진 눈매로 나를 훑었다.
“네가 여기에는 왜 있는 거지?”
“나도 몰라. 그저 마물을 피해 도망쳤을 뿐이야. 도망치다 보니 서쪽 숲까지 온 거 같고…….”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다 듣지도 않은 채, 조각난 마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마물의 시체를 살피는 듯했다.
“마법이 걸려 있어.”
“……마법?”
“오러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만 공격하게 되어 있는 마법.”
순간 그 말을 듣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황실에서…….’
오러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 황실은 분명 카일을 노린 거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카일의 오러는 내게 있으니 마물은 동쪽 숲의 나를 찾아온 것일 테고…….
‘그래서 마물이 끝까지 나만 노렸던 건가.’
역시 황실은 카일을 견제하고 있어. 소드 마스터에 오러를 보유한 거로도 모자라 마검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견제하지 않을 이유가 없긴 해. 하지만 과거보다 한참 빨라. 과거에는 적어도 내가 황후가 된 후에나 견제를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마른세수하며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카일은 검을 집어넣고 나 못지않게 놀란 주변 영식들을 챙겼다.
영식들은 카일의 검술을 찬양했고, 카일은 익숙하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그들의 칭찬을 들었다.
‘하일에게 곧장 알려야 해.’
이미 마법 실험이 이만큼이나 진행되었다고.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다리를 두들겼다.
그 순간일까.
카일에 의해 산산조각 났던 마물의 시체들이 순식간에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의 착각이었던 걸까.
“……!”
놀란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고작 하급 마물 주제에 이정도의 재생력과 이 정도의 공격성이라니.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마물의 시커먼 파편들이 날카로운 모양을 띄며 점점 가까워졌기 때문에.
“아……!”
그것들에게 찔릴 거라는 공포가 전신을 엄습한 순간.
“누나-!”
단말마 같은 카일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살을 찢는 고통이 엄습할 거라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함에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온몸으로 나를 가로 막고 있는 카일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의 등은 마물의 파편들이 꽂혀 엉망이었다.
“카, 카일……!”
카일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렀다. 그는 괴로운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하, 씨발…….”
“괘, 괜찮아?”
“누나는.”
“……어?”
“누나는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카일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내 몸 위로 쓰러졌다. 그의 등에 꽂혀 있던 마물의 파편들은 마지막 힘을 쏟아 낸 것이었는지 검은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카일의 등은 피투성이였다. 고슴도치처럼 등으로 모든 파편을 받아 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처참한 모습에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괜찮냐는 말만 얼간이처럼 뱉고 또 뱉었다. 그러자 머지않아 하일과 카제프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카일과 내 모습을 보고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가가 물기로 축축했다. 눈물은 뺨을 타고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 하일, 흑, 오라버니……, 의원, 어서 빨리……, 의원을 불러야…….”
“누이, 이게 지금 무슨…….”
“카일이, 흑, 다쳤어……, 빨리, 의원, 의원 좀 불러 줘. 흐윽, 흡, 빨리…….”
당황한 나머지 입만 벙긋거리던 카제프가 곧장 외쳤다.
“여기 부상자가 있다! 의원을 대기시켜라!”
그러고는 곧장 카일을 등에 둘러멨다. 형제들 중 가장 체격이 큰 탓에 버거울 만도 했으나 그는 힘든 내색 않고 숲의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카일, 흑, 제발 조금만 더 버텨 줘…….”
카일의 잇새로 흐르는 숨소리가 영 좋지 못했다. 물론 무려 소드 마스터인 그가 이 정도로 죽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걱정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카제프를 쫓아 빠르게 뛰었다. 그러자 다행히 얼마 달리지 않아 숲의 출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이 다쳤어요! 의원을 불러 주세……!”
나는 비명을 지르듯, 인파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집중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카일을 보며 누군가는 허겁지겁 황궁의를 찾아 헤맸고, 황제 또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 경이 부상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세상에, 카일 경께서…….”
사냥제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가 불러온 황궁의는 곧장 카일의 상태를 살폈고, 황제는 놀라 입을 벙긋거리더니, 이자키엘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카일, 카일…….”
내가 훌쩍이며 그의 몸에 손을 대려 하자 의원이 말렸다.
“괜찮습니다. 영애, 너무 걱정 마십시오.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독 때문에 정신을 잃으셨을 뿐입니다.”
“네……? 독이요?”
“목숨을 위협할 만큼 큰 독은 아닙니다. 기껏해야 하급 마물의 독 정도이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의원이 무어라 더 중얼거렸으나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고통에 찬 카일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이…….”
하일이 조심스럽게 나를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 카제프 또한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 내며 카일을 살폈다.
“그나저나 황궁 내부에 마물이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란 말인가.”
카제프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 볼 것도 없이 이런 마물을 만들어 낸 범인은 황실이 틀림없다.
고작 하급 마물이 황궁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마물이 들어와 숲에 자리 잡고 있을 확률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게다가 마물들이 사는 곳은 수도가 아닌 북부나 남부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수도와 인근 지역들은 모두 주거 지역 따위로 개발된 지 오래이기 때문에, 마물들이 살 수 없었다. 수도 한복판에서 마물을 마주쳐도 믿기지 않을 판국에 황궁 내부에서 마물을 마주치다니.
이대로 가다간 조만간 오러를 무력화시키는 하급 마물이 아닌, 상급 마물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뭐든지 과거보다 빠른 느낌이야…….’
걱정스러운 마음에 힐끔, 하일을 살폈다. 지금 상황에서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건 하일뿐이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댈 상대도 하일뿐이었다.
‘하일은 나보다 똑똑하니까……, 분명 이 사건도 황태자 짓임을 예상하고 있겠지. 모를 리가 없어.’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그의 표정은 그다지 조급해보이거나, 걱정에 차 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하일을 불렀다.
“저기 하일……”
그러자 하일이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예, 누이.”
“이거……, 분명 황태자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이자 하일이 조심스럽게 내 입을 막았다.
“쉿,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
“여긴 듣는 귀가 많으니까요.”
역시 그는 전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하일의 태도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여유로워 보였다. 이대로 카일의 오러를 무력화 시키는 마법이 성공한다면, 과거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도 있을 텐데, 그것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무슨 대책이라도 세운 걸까……?’
은근슬쩍 흘겨본 이자키엘은 난리가 난 와중에 홀로 어딘지 즐거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은근히 이죽이는 입꼬리가 얄밉기 그지없다.
‘재수 없어.’
엉망이 된 카일과 이자키엘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이자키엘은 어느새 황족의 자리에서 내려와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이런, 이게 무슨 소란이란 말인가.”
그 목소리에는 걱정이라고는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인 카일 경이 이리 되다니. 그새 검술 실력이 상당히 녹슨 모양이야.”
카일이 멀쩡히 두 눈 뜨고 있을 땐 그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말조차 뱉지 못하는 주제에, 쓰러져 있으니 겁도 없이 말을 씨불이는 게 같잖았다. 나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과거의 나는 저런 게 뭐가 좋다고 좋아해서는…….’
카제프와 하일 또한 오만방자한 이자키엘의 태도에 그를 적의를 숨기지 않고 무뚝뚝한 얼굴로 성의 없이 최소한의 예의만 차릴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을까.
황실 시종으로 보이던 한 사내가 순식간에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자키엘을 향해.
그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이자키엘은 쓰러진 카일에게 온 정신을 쏟고 있던 탓에, 낯선 이의 기척을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사건은 한 귀족 영애의 비명과 함께 시작됐다.
“꺄아아아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라 고개를 든 순간. 쓰러진 카일을 구경하던 이자키엘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놀란 나머지 내 입에서는 비명조차 뱉어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이자키엘의 가슴팍은 단도치고 꽤 길이감 있는 검에 관통되어 꿰뚫린 채였다.
“커흑-!”
황족 시해죄였다. 재판이고 뭐고 더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이 가능한.
이자키엘에게 검을 찔러 넣은 사내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세 번 더 난도질했다. 그는 무언가 악에 받친 사람처럼 악의를 가득 담아 이자키엘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 공격마저 머지않아 멈춰졌다. 근처에 있던 황실 근위병들이 놀라 곧장 사내의 목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 이자키엘에게 단도를 찔러 넣던 이는 힘없이 쓰러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온 바닥이 피투성이였다. 이자키엘과 괴한의 피가 뒤엉켜 흩뿌려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기도, 누군가는 말없이 그대로 굳어 버리기도 했다. 시야가 온통 이자키엘의 피와 괴한의 피로 붉었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방금까지만 해도 우리를 보며 이죽이던 자가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자키엘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어안이 벙벙했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얼마나 더 멍하니 넋 놓고 있었을까. 귓가에 타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아아아악-! 아, 안 돼-!”
앙칼지고 가냘픈 목소리. 놀라 정신을 차리자 황태자비가 체통머리도 잊고 허겁지겁 황족의 자리에서 뛰쳐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이자키엘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여, 몇몇 귀족들이 안타까움 섞인 탄식을 흘렸다.
얼마나 놀랐을까. 황태자이자 제 약혼자였던 그가 한순간에 이렇게 됐으니…….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이자키엘이 아니었다. 아젤라의 눈은 명확하게 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괴한을 보는 시선이 묘하게 애틋했다. 그건 단순히 내 착각일까.
“아, 아아……!”
둘의 사체 앞에 주저앉은 아젤라가 짐승의 절규와도 비슷한 비명을 내질렀다. 자리한 귀족들은 모두 그녀가 황태자를 잃어 오열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나 느껴지는 이질감.
내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황태자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지 않다.
그녀를 울게 만든 건, 괴한의 죽음.
‘대체 왜……?’
사냥제는 순식간에 엉망으로 치달았다. 황제도, 황후도, 황태자비도. 모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나는 바보처럼 멍하니 돌아가는 상황을 보기만 했다.
사람들의 비명이 낭자한 와중에, 하일은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지금 이 상황과 맞지 않는 표정이었다. 타인들은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
그 변화를 알아챈 나는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런 그에게 아젤라의 증오 어린 시선이 꽂혔다.
“아르젠트 영식-!”
그녀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하일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무심하게 아젤라를 바라봤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하일과 눈이 마주치자 아젤라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뱉었다. 아젤라의 말에 몇몇 귀족들의 시선이 하일에게로 꽂혔다. 그러나 정작 하일은 태연했다. 어딘지 권태로워 보이기도 한 여유로움이었다.
‘무슨 짓이냐니……?’
대체 무슨 상황이지? 어째서 아젤라가 하일을 탓하는 거야?
바보처럼 두리번거리며 하일을 보자, 그는 물끄러미 아젤라를 보다 실없이 웃으며 여상스러운 태도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비 전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하일은 아젤라를 향해 마치 정신 차리라는 듯, 나긋나긋한 말투로 그녀를 채근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정부가 황태자를 살해한 괴한이라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이, 이……!”
하일과 아주 가까이에 있던 내 귓가에도 희미하게 그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하일의 들은 순간, 나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저 괴한이 아젤라의 정부라고……?’
아젤라는 실핏줄이 잔뜩 터진 눈으로 하일을 째려봤다. 말조차 제대로 뱉지 못하며 피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째서, 어째서 제르벨이……!”
제르벨. 그게 괴한의 이름인 듯했다.
단순히 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아젤라는 정말 괴한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혼절할 것만 같은 아젤라와 달리 하일은 그저 얄궂은 미소만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제르벨에게 무슨 협박을 한 거야.”
“협박이라뇨.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그저 비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 때문에 원치 않는 약혼으로 괴로워하신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말을 속삭이던 하일의 눈매가 야살스레 휘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딘지 음습하고 저열한 목소리였다. 하일이 한 글자, 한 글자 말을 뱉어 낼 때마다 아젤라의 표정에는 절망이 서렸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당신의 정부가 이런 짓을 할 줄은 저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시치미 떼는 어린아이처럼 하일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들썩였다. 한참을 끅끅거리며 울던 아젤라가 슬픔과 분노를 억지로 눌러 삼키며 하일에게 물었다.
“누가…….”
“…….”
“누가 제르벨을 황궁에……, 출입할 수 있게…….”
마치 둘의 관계를 보고 있자니, 하일이 비련의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처럼 보였다. 괴로움에 사무치는 아젤라를 보며 하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물론 제가 도왔지요. 비 전하를 괴롭게 만든 황태자 전하를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다 간곡히 부탁하여 출입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할 줄이야…….”
하일이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달리 그는 조금도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예상한 사람처럼, 일부러 제르벨에게 그런 말을 흘린 사람처럼. 원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되었다는 아주 상쾌한 표정으로 산뜻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젤라는 차오르는 울음을 꺽꺽거리며 눌러 삼켰다. 보는 눈이 많아 한 때 사랑했던 이의 시체조차 어루만질 수 없었다. 그저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하일을 한없이 째려볼 뿐이었다.
머지않아 괴한의 시체는 황궁 근위병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무려 황족을 시해했으니 장례는커녕, 시체조차 온전히 보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디 들짐승들에게 던져 주러 가져간 거겠지.
한참 혼절할 듯 울부짖던 아젤라가 하일을 보며 읊조렸다.
“악마 같은 새끼.”
그 말에 하일은 무해해 보이는 웃음을 그린 채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글쎄요.”
수많은 유혈이 낭자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이 가득한 곳에서 하일만 외딴 섬처럼 고고하게 빛이 났다.
“비 전하께서는 그 남자가 보인 감정이 사랑이라 생각하십니까.”
“뭐……?”
“그가 전하를 폐위시키기 위해 저잣거리 술집에서 험담이나 음담패설을 하던 건 아시는지요.”
“말 함부로 하지 마.”
“뭐 전하께서 조금만 조사해 보시면 쉽게 알게 될 일이니까요.”
고저 없는 목소리가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런 사내와 평생을 약조했다간, 자칫 화를 입는 건 전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일은 한동안 아젤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홀로 남은 그녀는 한참 동안 목 놓아 울었다. 그마저도 주변 시선을 의식하여, 이자키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 * *
“하일.”
“…….”
“하일!”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티아가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사건을 빠르게 마무리 짓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하일은 그녀를 마주한 순간 입가에 환한 미소를 그렸다.
“부르셨습니까, 누이.”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티아의 허리춤을 그러안았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티아는 보는 눈이 적은 곳으로 재빨리 그를 붙잡고 이동했다. 하일은 순순히 그녀가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 주었다.
인적 드문 곳으로 자리를 피한 티아가 곧장 물었다.
“……네 짓이야?”
“음……, 이번 황태자 피습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그리고……, 메리드 자작 영애가 황태자비가 되었던 것 까지.”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하일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 와 티아에게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예, 맞습니다. 전부 제가 계획한 일입니다.”
그러자 티아의 표정이 무너졌다. 어딘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왜…….”
“……?”
“왜 그런 거야?”
황태자가 죽었으니 마땅히 기뻐해야 하건만, 그녀는 한껏 떨떠름하다는 듯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누이께서 어떤 것을 묻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괴한.”
“…….”
“황태자비 전하의 정부였다며.”
그제야 티아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하일이 아, 하고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 탄식에 별다른 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다.
“그 둘……, 분명 사랑하는 사이 같았어.”
마음 여린 나의 누이. 고작 그런 것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셨다니.
티아답다는 생각을 하며 하일이 살포시 웃었다.
“아무리 우리 복수가 중요하다지만……, 그런 식으로 비열하게 남의 손을 탈 필요는 없잖아.”
그녀의 말에 문득 과거 메리드 자작 영애의 최후가 떠올랐다.
‘그녀가 살해당한 시기가 누이와 형제들이 모두 떠난 후던가…….’
홀로 살아남아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들었던 소식이니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티아라 한들 아젤라의 마지막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티아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하일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보며 하일이 작게 웃었다.
순진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저가 곧 과거의 아젤라와 그 사내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해 준다면, 곧장 안도의 한숨을 내쉬리라.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 티아에게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일은 지체 없이 과거 아젤라의 최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애당초 그 사내의 병적인 집착이 아니었다면 실행할 수 없는 계획이었으니…….’
세상에 누가 고작 전 연인이 괴로워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의 황태자를 피습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일은 아젤라를 폐위시키기 위해 곧잘 유언비어를 퍼트리던 제르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짧게 혀를 찼다.
‘평민이랑 몸 섞은 계집이 황태자비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년은 아주 천박한 년이라고! 내가 자지 몇 번 쑤시면 꼼짝도 못하던 년이야!’
하일 스스로 또한 좋은 사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이를 폄하할 생각은 꿈에도 않았다.
예상대로 티아는 하일이 차근차근 과거에 있었던 아젤라와 제르벨에 대해 이야기 해 주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경청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맹목적으로 어미를 믿는 아기 새 같기도 해서, 하일로 하여금 묘한 희열을 느끼게 해 주었다.
꽤 오랫동안 하일의 이야기를 듣던 티아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다행이야.”
“뭐가 말입니까?”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제 허리춤을 그러안고 가슴팍에 뺨을 부비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하일은 실없이 웃으며 티아의 등을 토닥였다.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일은 만약 제르벨이 과거에 아젤라에게 그런 끔찍한 행위를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과 달리 그가 좋은 사내라 하더라도, 그를 이용하지 않을 생각은 없다.
제게 가장 중요한 건 티아의 안위였으니까.
티아를 살릴 수 있다면, 과거와 같은 일을 번복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 좋은 척하며 모두에게 곧잘 웃어 주고 다정히 굴지만, 결국 그 모든 것도 티아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아 미움받지 않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저와 달리 티아의 선과 악은 뚜렷했다.
범법 행위, 악행 따위를 저지른 이는 그녀에게 있어 악이었고 티아는 악한 이들에게 자비 없었다.
그녀에게 미움받지 않으면서 마음껏 부릴 수 있는 패 ‘제르벨’은 가히 하일의 입맛이 동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먹잇감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충격에 흠뻑 젖은 얼굴로 저를 바라봤으면서, 제 말 몇 마디에 안도의 한숨을 뱉는 그녀가 단순하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누이.”
“응, 하일…….”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 것이면 어쩌려고 그리 쉽게 믿으십니까.”
말마따나 ‘과거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 제르벨은 살인자다. 아젤라를 끔찍하게 죽인 쓰레기다.’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할 증거 따위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별다른 의심 없이 저를 믿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신기해서, 그래서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물었다. 그 물음에 티아는 잠시 고민에 잠긴 듯했다. 뱉을 말을 고르는 건지 입술이 몇 번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음…….”
하일은 천천히 대답하라는 듯 느릿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가족이니까.”
고민의 시간이 무색하게 간단명료한 대답에 하일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응.”
티아가 보기 좋을 정도로 환히 웃었다. 때마침 쏟아지는 햇살과 잘 어우러지는 미소였다.
“내가 너희를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어.”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만데.
살짝 발갛게 상기된 뺨과 내려깔린 눈매가 하일의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멍하니 티아를 보던 하일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바짝 줬다. 조그마한 티아가 하일의 품에 폭 갇히듯 안겼다. 그녀 또한 세게 꽉 안는 감각이 싫지 않았는지 쿡쿡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누이.”
“응.”
“사랑해요.”
부드럽게 속삭여지는 달콤한 말에 티아가 눈을 감았다.
“나도, 나도 사랑해. 하일.”
하일은 사랑스럽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눈에 새기고 또 새겼다.
내색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미 많이 흐려진 시야로는 예전처럼 티아의 모습이 담기지 않았다. 과거와 틀어질 대로 틀어져 버렸으니, 이젠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미소였다.
“누이.”
“응.”
“한 번만 더 웃어 주실 수 있습니까?”
하일이 눈가를 비비며 흐릿해진 시야를 잡으려 애썼다. 그러자 그의 노력을 알아 주기라도 한 건지, 잠시나마 시력이 다시금 돌아왔다.
똑 닮은 푸른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봤다. 티아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며 어여쁜 미소를 그렸다.
하일은 아마 마지막이 될 티아의 환한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아주 오랫동안.
* * *
나라 분위기는 순식간에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귀족들은 모두 검은 옷만 입어야 했고, 평민들 또한 무채색 옷들로 황태자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추수감사절이니 뭐니 하는 행사들도 모조리 취소되었다. 종종 열리던 귀족들의 티파티나 연회 초대장도 당분간은 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황태자가 죽었으니, 황태자비였던 아젤라가 폐위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식 혼인도 치르기 전이었기에 일처리는 무척 빨랐다.
아, 그리고 카일은 큰 무리 없이 회복 중에 있는데 문제라면…….
“어이, 마녀. 언제까지 쳐다볼 거야? 구경났어?”
아직도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분명 마물로부터 나를 지켜 줄 땐, 누나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찬바람이 쌩쌩 분다.
카일이 내게 버릇없이 굴자 곁에 있던 카제프가 단호하게 그를 야단쳤다.
“카일, 내 분명 티아에게 그리 말하지 말라 했을 텐데.”
명백한 경고에 카일은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한 번 찼다. 그러고는 이내 나와 눈도 마주치기 싫었는지,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모습에 기분만 괜히 언짢아졌다. 여태 걱정해 준 게 무색해진 기분이다.
‘그나저나 요즘 하일은 통 보기 힘드네…….’
일이 많이 바쁜 건가, 싶었으나 그런 것치곤 정말 이상했다. 벌써 며칠째 밥도 전부 방에서 해결하고 있었으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
“응, 티아.”
“하일에게 다녀와 봐야겠어요.”
하일이 언급되자 카제프의 표정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찾아갔었는데 문을 열어 주지 않더구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요?”
“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했어.”
“흐음…….”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오라버니가 자상히 웃으며 나를 토닥였다.
“그래도 티아 너라면 하일이 열어 줄지도 모르지.”
“그럼 제가 다녀와 볼게요.”
“그래, 카일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힐끔, 카일을 살폈다. 카일은 피곤했는지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저렇게 곤히 자는 것만 보면 천사가 따로 없는데…….’
입만 열면 재앙의 주둥아리나 다름없는 그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일의 방에서 나온 나는 그대로 하일에게 향했다. 예상대로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거대한 나무문은 아무리 문고리를 쥐고 돌려 봐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일.”
방문을 두들기며 그의 이름을 불러 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하일, 안에 있어?”
혹시 방에 없는 건가 싶어, 지나가는 하녀 아이 한 명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러나 사용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날 후로 하일은 방에서 나온 적이 없다고. 단 한 번도. 그 말은 즉, 지금도 방 안에 있다는 말이었다.
“하일,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응?”
“…….”
“무슨 일 있어?”
문제의 원흉이던 황태자도 사라졌겠다, 마음이 가벼워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유독 찝찝했다.
뭐지, 이 기분. 왜 이렇게 뭔가 떨떠름하지.
순간 출처 모를 불안감이 내 몸을 덮쳐 왔다. 그러니까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당장 하일을 봐야할 것만 같은 그런 감.
“하일.”
“…….”
“하일……!”
나도 모르게 하일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조급해졌다. 방문을 두들기는 손의 움직임도 점점 거세졌다.
“하일, 문 좀 열어 봐!”
손이 부서질 정도로 단단한 나무문을 쾅쾅 내려쳤다. 어찌나 세게 내려쳤는지 욱신거리는 게 멍 들 것 같다.
“문 안 열어? 그럼 나 네가 열 때까지 방문 두들길 거야.”
오기가 생긴 나머지 아픔도 꾹 참고 두들기는 세기를 더욱 높였다.
“하일!”
손에 느껴지는 통증이 생생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일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쉬지 않고 쾅쾅 두들겼을까. 방 안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쿠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방 안에 있었어.’
안에 있는데 대체 왜 문을 안 열지……?
“하일, 제발……! 잠깐 얘기 좀 하자.”
당장 하일과 얼굴을 마주해야만 이 불안감이 해소될 것 같았다.
이건 대체 어디서 오는 불안감일까.
문을 내려치던 손이 팅팅 부어올랐다. 뼈까지 울릴 정도로 두들긴 탓에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두들겼을까. 처음엔 노크였던 게 더 이상 노크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변질되어 둔탁한 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발로 방문을 걷어차기도 하고, 열어 보라며 머리로 쿵쿵 받기도 했다.
그런 내 절박함을 알아 준 걸까.
“……누이.”
“하일!”
그토록 기다렸던 하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문 좀 열어 봐. 응?”
“…….”
“어서!”
답답한 나머지 다시금 방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하일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만……, 그만 두들기세요. 그러다 누이 손이 다칩니다.”
“하지만 네가 안 열어 주잖아.”
“열게요. 열 테니까 잠시만요.”
하일은 열겠다고 말한 후에도 한참을 열지 않았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우당탕, 우당탕 생소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누가 들으면 대청소라도 하는 줄 알 법했다.
얼마나 더 방문 앞에 서 있었을까.
열어 주겠다고 말하고부터 족히 오 분은 지난 후에야 방문이 열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하일?”
“……예, 누이.”
문을 연 하일은 나를 똑바로 마주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이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뭐가 그리 곤란한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는 것 하며, 엉뚱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것 하며…….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바다처럼 푸르고 깊던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초점이 없었다.
‘말도 안 돼……, 설마.’
나는 일부러 아무런 말도 않은 채 가만히 하일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일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그러다 긴 침묵이 당황스러웠는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누이?”
그의 눈이 나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바로 앞에 서 있는데……, 왜? 정말 앞이 안 보인다고? 이렇게 갑자기?
“하일……, 너…….”
내가 입을 열자 그제야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너……, 상태가 왜 그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러나 하일은 태연하게 웃어 보이며 대꾸했다.
“예? 제 상태가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어떻긴 뭐가 어때-!”
나도 모르게 버럭 큰 소리가 나갔다. 그러자 하일이 당황한 듯 몸을 움찔 떨었다. 확실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탓에 온갖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선 듯했다.
나는 혹여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이 우리의 대화 내용을 들을까 봐, 허겁지겁 하일의 방 안으로 향했다. 그러고 문을 잠갔다.
내가 그를 잡아채 다시금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하일은 바보처럼 어버버거릴 뿐이었다. 쭈뼛거리며 멀뚱히 서 있는 하일은 확실히 낯설었다.
제 딴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티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지만, 티가 안 날 리 없다.
“……하일.”
목소리가 절로 낮게 깔렸다. 그러자 하일이 마른침을 삼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한참 그의 행동을 살피다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하일의 눈앞에 흔들었다. 앞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반응을 내보일 법도 한데, 하일은 미동조차 없었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어.’
혹시, 아주 혹시나 가지고 있던 기대가 한 번에 부서졌다.
하일이 내게 장난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일시적인 현상은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었는데.
절로 손이 세게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고 하일을 바라봤다. 하일은 여전히 내가 아닌 허공을 보고 있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모습이다. 이런 하일의 모습은.
언제나 맑고 총명하던 눈이 흐리멍덩하게 빛을 잃었다. 늘 여유롭고 오만해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는 불안이, 잔뜩 짓씹힌 입술에는 초조함이, 세게 쥐여진 주먹에는 차마 내색하지 못한 여러 가지 감정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왜 그렇게 된 거야.”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울음이 멋대로 목 끝까지 차오른 탓에, 말을 뱉을 때마다 무언가가 가슴에 얹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아침에 그가 시력을 잃을 만한 이유.
사실 어쩌면 난 문이 열린 순간, 하일을 마주쳤을 때 이미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다 알고 있으면서 그 이유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외면하고 모른 체했는데…….
“하일.”
“…….”
“회귀의 대가가……, 네 눈이야?”
내 물음에 그의 고개가 떨궈졌다. 사실상 긍정이나 다름없는 회피.
아니길 바랐는데. 이것만큼은 아니길 바랐는데…….
그래, 애당초 회귀라는 어마어마한 마법을 시전하면서 아무런 대가가 없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고작 보물의 힘만으로 회귀 같은 거 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설마, 설마 하일이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으니까.
“왜……, 왜 그랬어, 왜…….”
억지로 눌러 삼키고 있던 눈물이 기어코 뺨을 타고 흘렀다. 초점 없이 뿌연 그의 벽안을 마주하니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왜! 왜 그랬어, 왜-! 왜-!”
악을 쓰며 하일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는지 평소보다 예민하게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이 다시 한번 나를 무너트렸다.
이런 걸 바란 적 없는데, 네가 이렇게 되길 바란 게 아니었는데.
“하일……, 하일…….”
“……죄송합니다.”
“이건 아니야. 응? 이건 아니라고…….”
나는 곧장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같은 말만 계속해서 반복했다.
“제발, 제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해 줘. 제발…….”
“……죄송합니다.”
“하일…….”
“누이께서 죄책감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일의 말에 바닥이 완전히 꺼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꼈다.
“제가 선택한 일입니다.”
“…….”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시력이 아닌 수명을 바쳐야 한대도요.”
“싫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시력이 아닌 수명을 바칠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이 감동적이기는커녕, 끔찍하게만 들려왔다.
“싫어……, 내가 싫어. 제발 그러지 마.”
초점 없는 하일의 눈동자가 지독히도 아프게 나를 찔러 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이런 상황을 바란 적 없었는데…….
하일의 손이 어설프게 내 등을 찾아 더듬거렸다. 그러다 이내 나를 세게 제 품 안으로 가두듯 끌어안았다.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누이의 행복입니다.”
“네가 그 꼴로 있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어.”
울음기 가득한 내 목소리와 달리 하일은 퍽 태연하게 대꾸했다.
“제가 죽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슬퍼하십니까?”
그러나 알 수 있었다. 하일 또한 지금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애써 내 앞에서 티내지 않으려 한다는 걸.
“하일…….”
“그래도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누이께서 저를 이렇게 걱정해 주시니…….”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능청떠는 그가 미워서, 나는 하일의 양 뺨을 쥐고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못 보잖아. 그런데도 넌 괜찮냐고…….”
내 물음에 하일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지금 가장 괜찮지 않은 건 하일일 텐데……, 알면서도 답답해서 자꾸만 그를 채근하는 말만 뱉는다. 가까이서 하일의 얼굴을 살피자 속이 울렁거렸다. 단정한 콧대와 시원하게 째진 눈매. 늘 보기 좋은 미소를 그리던 입가.
전부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다.
나는 손으로 천천히 하일의 눈가를 지분거렸다. 그러자 하일은 손길을 느끼려는 듯 몸에 긴장을 풀고 오롯이 내게 집중했다.
“누이.”
“……응.”
“저는 그저 누이를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
뜨나 감으나 안 보이긴 매한가지일 텐데, 하일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과거에 그렇게 누이와 형제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버텼던 세월은 지금 돌이켜봐도 버거울 만큼 괴롭고 끔찍했습니다.”
부드러운 중저음이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 나긋나긋하게 속살거렸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자결을 고민했습니다.”
자결이라는 말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그가 느꼈을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비참함. 그것들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잔인했던 시간들이 전부 꿈만 같습니다. 다시금 어릴 적으로 돌아가 누이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함께해 올 수 있던 것만으로도 저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
“그러니까 슬퍼 마세요.”
제가 홀로 견뎌 냈던 시간들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하일이 뒷말을 작게 읊조리며 살풋 웃어 보였다.
“저는 누이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무어라 말을 뱉고 싶었으나, 울음을 참느라 목이 메였다.
“하일…….”
“네, 누이.”
“사랑해, 정말……,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을 뱉으면서도 속에서 무언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냥 하일의 얼굴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만 봐도 가슴께가 찌르르 울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기만 한 게 너무 미안해서, 무언가 해 주고 싶은데 나도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데 돌려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고 답답하고 속상했다.
나는 누군가를 이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너는…….”
“…….”
“너는 대체 왜 날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하는 거야?”
내 물음에 하일은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사랑하니까요.”
“이해가 잘 안 가.”
“어떤 부분이요?”
“이렇게 희생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처음엔 단순히 몸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과거를 떠올리고 우리가 함께 해 온 시간들을 되짚었을 땐 그것이 사랑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건 별개였다.
“글쎄요, 사랑하는 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합니까.”
하일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속삭였다.
“과거에 누이께서 제게 생일 선물로 깃털 펜을 선물해 주셨던 거, 기억하시는지요.”
사실 기억이 가물했지만, 하일의 말을 듣자 떠올랐다.
“오페라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
“그냥 누이와의 그런 작고 소중한 추억들이 하나둘 제 안에 쌓였을 뿐입니다.”
항상 특별한 나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첫 번째 삶에선 정말 어린아이들처럼 다투기도 했고 그러다 화해도 했고 서운함에 눈물 흘린 적도 있었다. 그다지 특별하지도, 그다지 화려하지도,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았던 평범한 나날들은 차곡차곡 쌓이고 쌓였고, 그 결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하일은 보이지 않는 눈을 보기 좋게 휘며 웃었다.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니, 정신 차렸을 땐 누이께서 제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나도…….”
“…….”
“나한테도 하일 너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그 말에 하일은 기꺼운 웃음을 그렸다.
“……사랑해. 정말 내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
하일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사랑해 줘서 고마워.”
* * *
‘누이, 그런데 아직……, 다른 가족들에게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하일을 만나고 왔음에도 여전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건지, 다른 이들에게 제 눈 상태에 대해 알리기를 꺼려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당장 가족들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사용인들 그리고 사교계에까지 소문이 퍼질 생각을 하면…….
‘아, 상상만 해도 머리 아파.’
온갖 곳에서 수군거릴 게 틀림없다. 분명 그 과정에서 하일은 상처받게 될 것이었고.
복잡한 마음으로 복도를 거닐 무렵일까. 문득 카일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들어가서 상태라도 살필까…….’
아직 마물의 독에 중독된 상태였기에, 카일은 침대 신세였다. 나는 높고 큼직한 문을 두어 번 노크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슬그머니 방문을 열자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힐끔, 침대 쪽을 살피니 카일은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귀신같이 기척을 알아챌 그가 이렇게 둔해지다니. 확실히 부상자는 부상자구나 싶어 기분이 오묘했다.
‘뭐 멀쩡해 보이니 이만 갈까…….’
괜히 깨워 봤자 싫은 소리만 들을 게 뻔했기에, 살금살금 방에서 나오려 했다. 그러다 문득 카일이 벽에 세워 둔 마검이 눈에 들어왔다.
‘마검…….’
카일의 기억을 앗아 간 원흉.
나도 모르게 뾰쪽한 시선으로 마검을 째려봤다. 카일을 변하게 만든 주범이니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괜스레 방을 나서면서 벽에 놓인 마검을 발로 툭 걷어찼다. 그러자 마검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데 그 순간일까.
「주인님……?」
낯선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놀란 나머지 몸을 바짝 굳히고는 곧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지? 방 안에 아무도 없는데……?
「주인님! 접니다. 저예요, 당신의 유일한 검! 케벨입니다!」
주인님이라니? 누가? 내가? 아니 잠깐만. 유일한 검이라니. 지금 설마 이거……, 마검이 말하는 거야?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쓰러진 마검을 바라봤다. 그러자 의문의 목소리는 더욱 기뻐하며 입을 놀렸다.
「저 가짜 놈이 감히 주인님 행세를 하며 주인님 기운을 잔뜩 묻히고 멋대로 저를 휘둘러 대는데 어찌나 기운이 비슷한지. 깜빡 속아 저 가짜가 주인님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잠시 얼빠진 얼굴로 마검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다시 한번 톡, 건드렸다.
「주인님?」
“저, 저기…….”
「예?」
“지금 저한테 말 거신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자 방 안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조잘거리던 목소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뭐야, 설마 내가 헛것이라도 들었나?’
한 번 더 마검을 툭툭 건드렸으나 여전히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세상에 어쩜 좋아……, 나 정말 헛소리 들었나 봐. 그럼 그렇지. 검이 말을 하긴 어떻게 말을 해.
요즘 몸이 허했던 걸까. 나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자 다시 한번 또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주인님이 아니잖아……?」
“네, 네……?”
「대체 정체가 뭐지?」
아까까지만 해도 살갑게 굴던 마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니 그전에, 정말 이거 마검이 말하는 거라고?
「이상하군. 이상해. 분명 주인님의 오러가 느껴지는데……, 주인님이 아니야.」
오러라는 말에 나는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다 내 손목에 박힌 카일의 오러를 바라봤다.
“오러요? 오러라면 카일의 오러가 제게 있는데…….”
내가 말을 모두 끝마치기도 전에 마검에서 시커먼 빛이 뿜어져 나왔다.
“꺄악-!”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라 입에서는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놀란 것도 잠시.
슬그머니 실눈을 뜨자, 벽에 기대어져 있던 마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고, 웬 조그마한 새끼 늑대가 나타나 있었다.
‘늑대……?’
뜬금없는 상황이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늑대가 카일의 마검이라는 걸.
“인간! 네 오러를 보여라!”
늑대는 귀여운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오만한 말투로 내게 명령을 내렸다.
말투가 어딘지 얄미워서, 순순히 말을 들어 주고 싶지는 않았으나 혹시 내가 그의 장단에 잘 맞춰 준다면 카일을 다시금 예전처럼 돌려주지 않을까 싶어 곧장 소매를 걷어 늑대 앞에 오러를 내보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검 아니 늑대가 쪼르르 달려와 오러를 살폈다.
‘세상에……, 마검이 말을 하는 데다가 늑대로 변할 수도 있다니.’
확실히 평범한 검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주인님의 오러가 어째서 이런 인간에게…….”
이런 인간이라니. 묘하게 나를 비꼬는 듯한 말투에 눈썹이 절로 씰룩였다.
“정말 주인님 오러잖아……?”
그나저나 아까부터 주인님이라니. 그럼 카일이 마검의 주인이라고? 아니, 원래도 주인인 건 맞았는데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야?
“그럼 저놈……, 아, 아니 저분이 주인님의 환생이 맞았던 건가……?”
늑대는 한참 동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무어라 구시렁거렸다. 나는 장식품처럼 멀뚱히 앉아 늑대가 하는 행각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군. 오러를 다른 인간에게 넘겨준 탓에 나를 다루지 못하신 거야.”
그러다 슬그머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
그러자 늑대가 매서운 눈으로 나를 휙 돌아봤다. 그러나 털이 북슬북슬한 탓에 무섭긴커녕 귀엽기만 했다.
“뭐냐, 이 가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구, 궁금해서요.”
아니 내가 왜 존댓말을 하고 있지? 저 괘씸한 마검이 뭐라고……!
그러나 속마음과 달리 뱉어지는 말은 영 공손하기 짝이 없다. 그가 카일의 기억을 앗아 갔다는 것 때문일까. 이유는 나도 명확히 모르겠다.
“그러는 나야말로 묻고 싶다. 대체 주인님의 오러가 왜 네깟 인간에게……!”
마검이 말을 모두 마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앞에서 알짱대던 털뭉치가 순식간에 벽으로 내던져졌다.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잔뜩 화난 얼굴로 으르렁거리는 카일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 조심해, 케벨. 죽여 버리기 전에.”
“컥, 커흑…….”
“누가 누구더러 네깟 인간이라는 거야.”
카일……?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엔 방금 막 잠에서 깬 듯한 카일이 있었다.
아니……, 카일이 맞나?
무언가 이상했다. 마치 내가 알던 카일이 아닌 것처럼.
‘단순히 마검 때문에 기억을 잃어서라기엔……, 풍겨지는 분위기가 낯설어.’
온몸으로 풍기는 위압감이라든가 시리도록 차가운 저 고압적인 시선이라든가……, 저건 절대 내가 아는 카일이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잃고 난 후에도.
나는 한참 입을 벙긋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 누구세요……?”
내 물음에 카일의 시선이 서서히 나를 향했다. 번뜩이는 그의 적안과 마주한 순간 생전 처음 느끼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혔다. 그는 한동안 나를 훑어보더니 언제 흉흉한 기운을 내뿜었냐는 듯, 살포시 웃어 보였다.
“누나.”
카일이 기억을 잃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으나 분위기가 달랐다. 생소했다. 분명 날 더러 ‘누나’라고 불렀는데……, 왜 이렇게 낯선 걸까.
내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카일을 째려보자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무해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이번 생은 우리 소원대로 됐네?”
“……뭐?”
이번 생은 우리 소원대로 되다니? 무슨 소리야?
“이야, 형님이 정말 성공했잖아?”
카일은 계속해서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형님이 성공하다니. 카제프를 말하는 건가? 그런데 카제프가 성공하다니? 뭐를?
“카일, 지금 무슨 말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 부름에 카일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미안해, 누나. 기억이 왔다 갔다 하나 봐. 머리 아파.”
잠시 끙, 앓는 소리를 흘리더니 이내 다시금 살벌한 눈빛으로 마검을 째려봤다.
“케벨, 너 우리 누나한테 한 번만 더 그 따위로 굴면 그땐 진짜 네 털 모조리 밀어 버린다.”
“주인님! 주인님의 오러가 대체 왜 이 여……, 자가 아니라 이분께……!”
케벨이라 불린 마검은 내게 오러가 있는 걸 믿을 수 없었는지, 다시 한번 카일에게 물었다. 그러나 카일은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끄럽다는 듯 손을 이리저리 휘휘 흔들더니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네가 자꾸 곁에서 시답잖은 기운 풍기니까 기억 교란 오잖아.”
“그, 그건 현재 주인님의 힘이 부족하셔서……, 아! 이럴 게 아니라 지난번에 봉인해 두셨던 힘이요. 지금 바로 전달해드릴 테니…….”
“지금은 필요 없어. 머리 아파. 일단 쉬어야겠다.”
카일이 대뜸 나를 끌어안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순식간에 그에게 안긴 꼴이 된 나는 눈을 멀뚱이며 카일을 올려다봤다.
“카, 카일……?”
“누나.”
그러자 카일이 나를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미안해.”
“어……?”
“오러 없는 상태로 마검을 쥐어서 그런지……, 기억이 이상해졌어.”
확실히 그래 보였다. 나를 잊은 것도 그렇고, 지금 카일의 모습도 그렇고…….
카일은 연신 앓는 소리를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카일……, 괜찮아?”
그러자 케벨이 잽싸게 카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인님!”
“넌 좀 꺼져 봐! 너 때문에 자꾸…….”
말을 잇던 카일은 순간적인 두통에 이를 으득 갈았다.
“아윽…….”
“카일!”
괴로워 보이는 모습에 놀라 허겁지겁 카일의 이마를 매만졌다. 열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래, 머리 아파? 많이?”
카일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식은땀과 함께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거친 숨이 뱉어졌다. 고르지 못한 호흡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절로 불편해졌다.
“누나…….”
카일이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나를 불렀다. 그 모습이 퍽 안쓰러워서, 그가 그간 내게 못되게 군 것도 잊고 곧장 대답했다.
“응, 나 여기 있어. 왜 그래, 괜찮아?”
“하일…….”
방금까지만 해도 힘없이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있더니, 카일은 힘겨워 보이는 모양새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케벨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케벨은 조그마한 새끼 늑대에서 다시금 마검으로 형태를 바꿨다.
“하일 그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하일한테 가야 돼.”
카일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마검을 쥐고 곧장 하일에게 향했다. 그 기세가 흉흉해서 혹여 해라도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나는 곧장 카일을 쫓아 방에서 뛰어나갔다.
“카일! 왜 그러는데!”
그러나 카일은 멈추지 않았다. 하일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몇 번 하더니, 반응이 없자 곧장 문을 부숴 버렸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동시에 문짝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하일은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카일이 욕을 짓씹으며 하일을 불렀다.
“하일.”
낮게 깔린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앞도 못 보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설마 기억 교란 탓에 나를 잊은 것처럼 하일이라도 잊은 건가 싶다. 카일이 하일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워서 말리기 위해 카일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하일의 멱살을 틀어쥐는 게 더 빨랐다. 난데없이 멱살이 잡힌 하일은 우스꽝스럽게 버둥거렸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평소보다 배로 놀랐을 게 틀림없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하일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말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일은 그제야 제 멱살을 쥔 이가 카일이라는 걸 인지한 듯했다. 하일의 초점 없는 푸른 눈동자가 흐리멍덩하게 카일을 향했다. 그 모습에 카일은 작게 욕을 읊조렸다.
“빌어먹을.”
당황으로 물들었던 하일의 표정이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카일이 왜 제게 화를 내는지 알아차린 듯 빈정거리며 말했다.
“싸게 먹힌 거 아닌가?”
“……뭐?”
“시간 한 번 돌리고 내 눈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이런 미친……!”
카일의 주먹이 세게 쥐어졌다. 당장에라도 하일에게 날아갈 것 같던 주먹은 다행히 화를 억누른 건지 부들부들 떨다 서서히 펴졌다. 방법이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카일은 원망할 곳이 필요했는지, 속상하다는 듯 소리쳤다.
“너는 좀! 애가 왜 매사에 혼자 전부 책임지려고 하는 건데!”
카일이 거칠게 하일을 벽으로 몰아세웠다. 카일에게 붙잡힌 하일은 이도저도 못한 채 미간만 구길 뿐이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한껏 성난 카일의 숨소리가 꽤 거칠었다. 그러나 그런 그와 달리 하일은 평온하기만 하다.
카일은 힘겹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이미 엎질러진 물에 대해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완전히 잃은 거야?”
흥분을 많이 죽인 건지, 목소리가 조금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 물음에 하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빌어먹을…….”
쾅, 소리가 나도록 벽을 내리 친 카일은 곧장 마검을 불렀다.
“케벨.”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검이 늑대의 모양으로 돌아갔다.
“네, 주인님!”
“너 내가 봉인해 둔 힘 가지고 있지.”
봉인해 둔 힘……?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나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거 전부 얘한테 넘겨.”
“주인님! 하지만 그건 주인님께서 알타르를 멸하시면서 쌓아 두신……!”
뭐? 카일이 알타르를 멸했다고?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믿을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이었으나, 내게 호기심을 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카일은 단호하게 한 번 더 케벨에게 말했다.
“케벨,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 힘, 전부 하일에게 넘겨.”
“하, 하지만……, 힘을 넘겨 봤자 평범한 인간입니다. 아무리 주인님의 형제라 한들, 저자는 사용도 못할 거라고요! 과거 주인님의 명성과 힘이 모두 휴지 조각이 되고 말 거예요!”
“……상관없어.”
케벨과 카일의 대화는 어딘지 이상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나는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일 또한 이상함을 느낀 건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카일, 이게 무슨 소리야? 곁에 우리 말고 누가 또 있어?”
하일은 앞이 보이지 않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자 카일이 한숨을 토하며 대답했다.
“마검.”
“……뭐?”
“곁에 마검이 있다.”
마검과 대화를 하다니. 앞이 보이는 나조차 믿기 어려웠는데, 보이지 않는 하일은 얼마나 더 당황스러울까. 하일이 입을 벙긋거리며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를 보이자, 카일이 말을 덧붙였다.
“하일, 잘 들어. 마검 때문에 기억 교란이 왔어. 그래서 지금은 원래의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전생의 나와 회귀 전의 내 기억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야.”
“……뭐?”
“어디까지나 마검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생긴 교란이니, 이 또한 언제 사라질지 몰라.”
카일이 조심스럽게 케벨을 들어 하일에게 안겨 주었다. 하일은 난데없이 안겨진 털뭉치에 놀란듯 몸을 움찔 떨었다.
“마검에 대해 조사해 봤으면 알겠지만, 오백 년 전 마지막 마검의 주인으로 기록에 남은 과거 알타르를 멸망시킨 멸망자 ‘카시아스’, 그건 전생의 나야.”
카일의 말에 놀란 건 비단 하일뿐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숨을 헉 들이마시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거짓말. 그 카시아스가 카일이라고?
하일은 갑작스럽게 쏟아진 말을 모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카일, 이게 지금 전부 다 무슨…….”
“길게 말할 시간 없어. 내게 카시아스였을 적 기억이 남아 있을 때 해야 해.”
어벙하게 눈을 끔뻑이는 하일에게 케벨이 못마땅해 하며 눈을 흘겼다.
“전생의 나는 죽기 전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을 마검에 봉인해 뒀어. 다음 생의 내가 마검을 찾아낸다면 그 힘을 물려주기 위해.”
“주인님, 정말 이자에게 드리려는 겁니까?”
케벨이 한 번 더 카일에게 물었다. 그러자 카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잠깐만……, 그럼 내게 온 네 힘은 어떻게 되는데?”
“잃어버린 시야를 되돌리는 데 사용할 거다.”
“그 후에는?”
“그 후에도 힘이 남아 있다면 그건 네 것이 되겠지.”
단순히 힘이라는 정도로 함축시켜 말하고 있지만 하일은 알고 있었다.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북부 알타르 대제국을 한 순간에 멸망시킨 멸망자 카시아스의 힘이다. 이건 결코 일반적인 힘이 아니었다. 고작 눈 하나 고치고자 사용할 만한 힘도 아니었고.
나 또한 하일 못지않게 당황스러웠다. 카일이 기억을 잃은 후, 나도 마검에 대해 조사했었기에 카시아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그가 알타르를 멸망시킨 이유.
‘제 누이가 마녀라는 오명을 쓰고 돌팔매질을 당하다 화형당해서.’
카시아스는 그 이유 하나로 민간인들까지 모조리 남김없이 죽여 없앴다. 사실상 지금 북부 대륙을 사람 하나 살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려 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당황한 나와 하일과 달리 카일은 침착했다.
“케벨, 시작해.”
“카일! 잠시만 나는 괜찮아, 괜찮으니까 우선 이 힘은 네가……!”
“쓸데없는 투정 받아줄 시간 없어. 입 다물고 받아.”
“…….”
“네 눈깔 하나 때문에 우리 누나 죽을상 돼서 울고 다니는 꼴 보기 싫으니까.”
카일이 말을 바치기 무섭게 케벨의 몸에서 붉은 기운들이 방대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아주 천천히 하일의 몸으로 흘러들어 갔다.
기이한 장면이었다. 어찌나 힘이 방대한지, 한 공간에 있는 나조차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였다. 누군가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두 다리로 제대로 서 있기조차 버거웠다. 벌벌 떨리던 두 다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 크흑……, 카일…….”
그 힘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하는 하일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일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흘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일이 숨을 헐떡이며 침을 질질 흘렸다. 그러다 바닥에 털썩 엎드리고는 개처럼 벌벌 떨었다.
“이런……, 큭, 미친…….”
힘을 주입하는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방대하게 나온 기운은 아주 느릿하게 하일에게 흘러들어갔다. 한순간에 욱여넣었다가 자칫 몸이 버티지 못할 걸 염려하는 듯했다.
“커흑…….”
“……조금만 참아.”
카일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살짝 어두운 얼굴로 하일을 내려다봤다. 하일이 얼마나 더 고통에 몸부림쳤을까.
그는 결국 카시아스의 힘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 *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카제프가 쓰러진 하일을 보며 혀를 찼다. 하일이 쓰러지고 머지않아 카일 또한 쓰러졌다. 나 혼자 둘을 침대로 옮기기엔 역부족이어서 결국 카제프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그게 조금 일이 있어서요.”
“아니야, 티아.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란다.”
내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카제프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보나 마나 저것들이 사고 쳤겠지.”
“그건 그런데…….”
“이리 온.”
카제프는 둘을 침대에 옮긴 뒤, 나를 곧장 제 품에 가뒀다.
“많이 놀랐겠구나.”
“아…….”
힘을 모두 옮긴 케벨은 안 그래도 작던 외형이 조금 더 작아졌다. 이제는 완전히 갓 태어난 아기 늑대 같았다.
“그나저나 저 새끼 늑대는 또 뭐고?”
“그게……, 얘기하자면 조금 길어요.”
잠시 머뭇거리며 카제프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들은 것과 본 것 전부.
놀랄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카제프는 의외로 덤덤했다. 그는 차분하게 큰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내 이야기를 모두 끝까지 들었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하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어.”
카제프가 착잡하다는 듯 마른세수했다.
“하일이 우리에게 먼저 털어놓았거든. 과거에 대해.”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하일이 그들에게 과거에 대해 털어놓다니. 내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하자 카제프가 실없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가 없는 회귀란 없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 다만 그게 시력일 줄은 몰랐지만.”
“…….”
“네게 절대 말하지 않고 꽁꽁 숨기려 들길래 뭔가 있기는 있구나, 생각하고 있었어.”
문득 잠든 하일의 얼굴을 보자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누이, 한 번만 더 웃어 주실 수 있습니까?’
이제야 하일이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건지 이해가 되어 속이 쓰렸다.
‘그래도 카시아스의 힘이라면……, 돌아올 수 있는 걸까?’
하일, 무척 괴로워 보였어. 실제로 나조차 한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굉장히 고통스러웠는데……, 그 힘을 받아 냈을 하일은…….
그런 방대한 힘이 마검에 봉인되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힘의 주인이 전생의 카일이라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카일은 예나 지금이나 강했구나.’
회귀야 그렇다 쳐도 전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하긴, 나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한국에서 환생했던 거니까.’
문득 떠오른 한국에서의 삶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곳의 가족들도 그곳의 친구들도 모두 중요하지만, 그래도 역시 내게 더 중요한 건 이쪽 세상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이젠 한국이 잘 기억나지 않기도 하고.
‘그럼 오라버니도 카일도 죽고 한국에서 환생했던 걸까…….’
작은 호기심이었다. 이제는 불필요해진.
카제프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어 갔다.
“티아.”
“네, 오라버니…….”
너는 회귀 전도, 다음 생도 모두 기억하고 있구나. 카제프가 말을 삼키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너무 걱정 말거라.”
“…….”
“하일은……, 꽤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어.”
“뭐를요?”
“뭐든지. 너를 위한 거라면 전부.”
카제프가 슬그머니 내 손을 맞잡았다. 큼직한 손 안에 쏙 들어가 갇힌 모양새가 우스웠다.
“이젠 우리를 위협할 황태자도 없으니……, 한시름 놓아도 돼.”
퍽 자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에 묘한 안도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카제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다 이룰 수 있게 해 줄게.”
“……감사해요.”
“그러니 우리를 떠나지만 말아 줘.”
그는 마치 내가 사라질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회귀 전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가족들을 버려.
“저는…….”
아직 제대로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카제프는 마치 이미 긍정의 대답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다 나는 잠시 입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을 뱉을지 고민했다.
사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라버니야 불안할 수 있지만, 회귀 전을 모두 기억하게 된 나로서는 형제들 없는 삶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안 떠나요.”
큼직한 카제프의 손을 꼭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제 집인 걸요.”
“티아…….”
“우리는 가족이구요.”
살풋 웃으며 그와 눈을 마주하자 카제프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맞아, 가족이지.”
문득 회귀 전, 마지막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 발악하다 죽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에 절어 갈가리 찢겨 죽는 와중에도 카제프는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에 젖어 울고 있었다.
“지켜 주셔서 감사해요. 오라버니.”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미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사랑해요.”
“……나도, 나도 사랑해. 티아.”
* * *
나는 서재에서 과거 알타르 대제국에 대한 책을 뒤적였다.
알타르 대제국과 카시아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대부분 알타르에 대한 책이라면 카시아스에 대한 이야기도 꼭 함께 붙어 있었으니까.
내가 모르는 카일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카시아스를 분노케 한 누이의 존재에 대한 기대. 그 두 가지로 연신 책을 뒤적였다.
사실 이런 말 하긴 민망하지만, 난 이미 화형당한 누이의 존재가 내 전생이라고 거의 확정 짓고 있었다.
‘아닐 수도 있나……?’
아니면 괜히 엄청 민망할 거 같은데.
찾아낸 책을 펼치자 그 안에는 내가 모르는 전생의 카일 아니, 카시아스에 대한 이야기들이 줄줄 적혀 있었다. 용맹하기로 소문난, 대륙에서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알타르의 모든 기사가 덤벼들어도 카시아스 한 명에 비할 바가 못됐다는 내용.
‘이렇게만 보면 전혀 모르겠는데…….’
기분이 미묘했다. 이게 카일의 전생이라니.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뒤로 카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아.”
“아……, 오라버니!”
“깨어났다. 카일도 하일도.”
그 말에 나는 곧장 보던 책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요?”
책을 정리할 틈도 없이, 깨어났다는 말에 헐레벌떡 그들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내려놓은 책의 뒷장에는, 미처 보지 못한 몇 줄의 내용이 짤막하게 담겨 있었다.
운명과 자신의 존재를 맞바꾼 비운의 대마법사, 케제르.
점점 잊혀져 가는 그를 잊지 않기 위해 남기는 케제르의 일대기.
* * *
“멋대로 이걸 주면 어떡하냐고-!”
“그럼 장님 되는 걸 나더러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기껏 돌려 놨더니……!”
둘 다 깨어났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방 근처로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요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눈 뜨자마자 싸우기라도 하는 건지 높아진 언성이 영 불안했다.
“카일, 하일!”
다급하게 그들을 부르며 들어가자 서로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카일과 하일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자마자 뭐 하는 거야!”
몸으로 싸우면 언제나 지는 건 하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놀란 나머지 카일을 떼어 내며 하일을 감쌌다. 그러자 카일이 눈에 띄게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나, 같이 싸운 건데 왜 나만…….”
“그거야 하일이 한참 약하니까 그렇지!”
카일을 째려보며 냉큼 말했다. 그러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일?”
“응?”
“너……, 전부 기억 나?”
일시적으로 잠시 기억을 되찾았던 거 아니었어?
그러자 곁에 있던 케벨이 잽싸게 튀어나오며 대신 대답했다.
“제게 있던 주인님의 힘이 전부 빠져나가면서 기억 교란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애당초 힘을 제어하지 못해 교란을 겪었던 거니까요.”
그 말에 놀라 곧바로 카일을 바라보자, 카일이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누나, 있잖아. 내가…….”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건지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러나 순간 내게 검을 휘두르려던 카일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
카일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흘렀다.
“누나, 미안해…….”
그러고는 곧 바로 내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카일의 사과를 냉큼 받아 줄 수 있을 만큼 태연하지 못했다. 카일이 불편한 나머지 은근슬쩍 그를 피하고 하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하일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일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어……!’
그렇다면 앞이 보이는 건가?
“누이…….”
하일이 환히 웃으며 나를 그러안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초점 없이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말간 이채가 돌았다. 나는 곧장 하일의 뺨을 매만지며 물었다.
“정말 돌아온 거야……?”
“예, 그런 거 같습니다.”
“잘 보여?”
“네, 아주 잘 보여요.”
쿡쿡 소리 내어 웃은 하일이 가볍게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도 모르게 와락 하일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작게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걱정 했어……, 정말 많이.”
“그건 조금 기분 좋은데요? 누이께서 제 걱정해 주시는 건 언제나 행복합니다.”
“바보야,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부둥켜안고 있는 게 영 못마땅했던 걸까. 카제프 또한 은근슬쩍 나와 하일을 떼어 두며 끼어들었다.
“티아에게 전부 들었다.”
그러나 하일이 슬며시 카제프를 올려다봤다.
“말하기 곤란했던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내게 귀띔 정도는 해 줄 수 있었지 않느냐.”
카제프는 묘하게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하일이 머쓱하게 웃었다.
“네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이해해. 아마 나였더라도 너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고통을 혼자 감싸 안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카제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격한 긍정을 표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
퍽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말에는 하일을 향한 걱정과 애착이 가득 담겨 있었다.
* * *
“……누나.”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몸이 우뚝 멈췄다. 굳이 뒤 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지 않아도 카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껏 풀 죽은 목소리는 평소 짓궂던 그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역시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입술이 절로 세게 깨물어졌다.
나도 머리로는 안다. 카일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그랬다는 걸 분명 이성으로는 아는데…….
‘그래도 시간이 필요해.’
아무리 나란들 이리저리 바뀌는 카일에게 마냥 좋다고 맞춰 줄 수는 없는 노릇인걸.
“누나, 잠시만 나랑 얘기 조금만…….”
카일이 살며시 내 옷자락을 잡았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쳐 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카일 또한 당황한 듯 쳐 내진 손을 어색하게 바라보다 애써 미소를 그렸다.
“아……, 내가 너무 멋대로 붙잡았지. 많이 놀랐겠다. 미안해…….”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눈동자엔 본능적인 공포가 서렸다. 그러자 카일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런 카일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나?”
내 물음에 카일의 입술이 살짝 움찔거렸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전부.”
“그럼……, 내가 왜 이러는지도 알겠네?”
카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
“미안한데, 혼자 있고 싶어.”
나는 복도에 카일을 덩그러니 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카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지은 죄가 있으니 이도 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는 듯했다.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와 동시에 내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후우.”
예상은 했지만, 역시 카일을 상대하는 게 아직은 버겁다. 문에 등을 기대자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 결국 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분이 이상해…….”
분명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아해야 하는데…….
내게 검을 휘두르던 카일의 모습에서 남아 버린 공포 그리고 은근한 짜증과 심술이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하일을 위해 힘을 내어 준 것도 카일이고, 만약 그 마검이 없었더라면 하일의 눈을 되돌릴 수 없었을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내가 느낀 속상함은? 공포는? 그건 누가 알아주지?
아……, 모르겠다.
일단 조금 쉬고 싶어.
* * *
며칠이 지났을까. 카일은 의외로 별다른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내 주변을 배회하기만 했다.
내가 어디 외출이라도 하면 몰래 따라붙어 주변을 살핀다든가,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나오길 기다린다든가…….
뭐 그래 놓고 막상 나오면 놀라 허둥거리다가 몸을 숨긴다. 그 모습이 퍽 하찮고 귀여웠지만, 그것과 별개로 예전처럼 그를 대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내가 불편해할 걸 고려한 건지, 카일 또한 먼저 말을 붙이거나 다가오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모양새가 버림받은 강아지라도 되어 보여서, 측은했지만 나도 무어라 딱히 말을 붙이지 않았다. 오며 가며 하일이 쌤통이라며 혀를 차는 소리만 종종 들릴 뿐이었다.
“쯧쯧, 그러게 후회할 짓 말라니까.”
“꺼져, 사람 속 긁으러 왔냐?”
“속 긁으러 오긴, 누이 보러 왔지.”
하일이 은근슬쩍 카일에게 비웃음을 흘려 주고는 방문을 두들겼다.
“누이, 안에 계십니까?”
“응, 들어와.”
카일과 달리 빠른 허락이 떨어졌다. 방 안으로 향하는 하일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카일은 힘없이 한숨을 토했다.
“아, 빌어먹을 나새끼…….”
그러다 스스로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일은 그런 카일을 보며 한마디 툭 거들었다.
“진짜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전부 자업자득이라며 혀를 차고는, 방 안으로 향했다. 카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누나한테 검을 들이밀어.’
아무리 기억을 잃었더래도 그렇지, 진짜 미친놈 쓰레기 새끼.
몇 번 혼자 벽에 머리를 박던 카일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돌겠네.”
“그러게 내 후회할 거라 하지 않았더냐.”
그러자 하일에 이어 어느새 나타난 카제프마저 카일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카일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처연하게 중얼거렸다.
“형님……, 그냥 저 좀 거하게 패고 정신 차리게 해 주시지…….”
“네가 어디 맞아 줄 위인이더냐. 주먹질 좀 했다고 이를 으득으득 갈던 게.”
못난 놈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은 카제프도 티아의 방으로 향했다. 결국 들어가지 못한 건 카일뿐이었다.
* * *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원래 두 분 다 준비 중이셨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과거보다 빨라도 너무 빨라.
하일과 카제프가 들어와 건넨 말은 부모님의 은퇴 선언이었다. 듣자하니 이미 은퇴 날짜까지 잡으신 모양이었다.
“뭐 과거와는 많은 게 바뀌었으니까요.”
전부터 별장이니 뭐니 매입하러 다닐 때 예상했지만, 그래도 막상 두 분의 은퇴라니 기분이 묘했다.
“으음……, 그렇구나.”
“정확한 일정은 저녁에 말씀해 주신다고 합니다.”
은퇴라……, 그럼 이제 오라버니가 물려받으시는 건가? 힐끔, 카제프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자 카제프는 대답 대신 싱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모처럼 가족끼리 함께하는 저녁 식사였다. 카일이 그렇게 되고 난 후, 나를 극도로 거부하던 카일 탓에 가족들과 다 함께 밥 먹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부모님께는 마검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어 잃었던 기억이 되돌아왔다고 둘러댄 모양이었다. 두 분도 혼란스러워 보이셨지만, 멀쩡해진 카일을 보며 이내 납득하신 듯했다.
‘가만 보면 이 집도 참 대단해.’
하나는 마검 주인에 하나는 마법사에 하나는 천재라니. 나만 평범하네.
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힐끔 하일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하일도 회귀 전에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항상 카일에게 밀려 토라지기 일쑤였지.’
하일을 보며 쿡쿡 웃자 하일이 왜 웃냐는 듯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니, 그냥.”
하일은 바보처럼 눈을 끔벅였다.
“대견해서.”
내 말에 그가 환히 웃었다. 기분 좋은지 눈매를 휘어 가며 쿡쿡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다이닝 룸은 모처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금슬 좋으신 부모님의 도란도란 대화 소리와 달그락 거리는 식기 소리 그리고 테이블 위를 오가는 웃음소리가 평화로웠다.
‘하일이 지키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지켜 준 것들.
미리 오라버니와 하일에게 들었던 대로, 부모님의 은퇴 일정이 나왔다. 내년 봄에 카제프 오라버니에게 작위를 물려줄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장 우려했던 나나 형제들의 혼인 문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별 말씀 없으셨다.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어머니가 따로 나를 부르셨다.
혹시 귀족 중 혼인하고 싶은 이가 있냐고. 그 물음에 형제들이 떠올랐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말하셨다.
“그럼 혼인하지 말거라.”
“……네?”
“혼인하고 싶은 이가 없으면, 혼인하지 마.”
귀부인의 정석이나 다름없던 어머니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자 말을 어머니께서 말을 이으셨다.
“결혼은……, 불리하니까.”
무언가 뜻이 많이 함축된 말이었다. 그녀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사내들의 전유물이 되지 않길 바라.”
귀족 출신 영애들도 혼인하면 남편의 물건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사회에서, 양녀인 내 취급은 안 봐도 뻔했다. 물론 이미 서류상으로 하일과 혼인된 상태였지만, 차마 어머니께 그 사실을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동양에 신고된 서류니까…….’
우리가 작정하고 숨기면 평생 숨길 수도 있어.
내심 양녀에 불과한 내게 이런 것까지 신경 써 주고 있던 어머니께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무거운 죄책감이 들었다.
‘……죄송해요.’
우리 넷의 관계를 알게 되면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카제프가 그럴 아이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원치 않는 혼인을 시키려 한다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털어놓으렴.”
그가 후작위를 물려받게 되면서, 대외적으로 내 보호자는 부모님이 아니라 오라버니가 된 셈이었다.
‘어차피 혼인 상태라 다른 누구와 하지도 못하겠지만…….’
걱정해 주는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들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정말 고마우신 분…….’
* * *
“누나…….”
“…….”
“아직도 화 많이 났어……?”
카일과 데면데면한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의 보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불안했는지, 카일이 방에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고 말했다.
이상하게 얼굴을 마주하면 불편했다. 아무리 나라 한들 날 진심으로 죽이려 하던 카일은 충격적이었으니까.
나를 붙잡는 카일의 모습이 퍽 안쓰러워서, 나는 매몰차게 무시하려던 마음을 죽이고 잠시 멈춰 섰다.
“카일.”
“……응.”
“네가 네 의지로 그러지 않았다는 건 분명 나도 알아. 그런데 역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지 못하겠어.”
카일이 변명할 여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직도 잊히지 않아. 망설임 없이 내게 검을 겨누고 죽이려 하던 모습.”
“……미안해. 면목 없어.”
“응, 그래서 난 아직 너와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불편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그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이었다.
“누나…….”
카일이 한 번 더 나를 붙잡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대로 시간만 흐르게 두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는 대뜸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카일과 내 체격 차이에서 나오는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카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와 내 간격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비켜 달라 말하려했다. 그러나 카일이 더 빨랐다.
카일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카일?”
당황한 나머지 그를 부르자 카일은 내 부름에 대답하는 것 대신 바닥에 제 머리를 박았다.
“진심으로 미안해.”
어찌나 세게 들이받은 건지,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카일의 이마에서 옅은 피가 흘렀다. 보기 불쾌한 장면에 미간을 구기고 손수건을 꺼냈다.
“너 뭐 하는 짓이야.”
“……사과하려고.”
“사과가 아니라 나한테 죄책감 주려는 건 아니고?”
물론 카일이 그렇게 약지 못했다는 건 안다. 알지만 지금 그의 행동이 불편해서 나도 모르게 모난 말이 튀어 나갔다.
“아니, 아니야! 나는 절대 그러려던 게…….”
“……너 이마에서 피나.”
“상관없어, 누나가 마음 고생한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누가 이런 식으로 사과받고 싶댔어?”
“하지만…….”
“이기적으로 굴지 마.”
그의 말을 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매몰차게 무릎 꿇은 카일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누나…….”
“…….”
“잠시만, 잠시만…….”
어지간히 급했는지 카일이 일어나지도 않은 채 기어와 내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소드 마스터를 바닥에 굴려 먹고 있다니.
“나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니?”
“…….”
“나도 몰라. 나도 혼란스럽다고.”
“……미안.”
붙잡힌 치맛자락을 쳐 내고는 애써 등 돌렸다.
“……그래도 서 있는 것 보단 덜 무섭네.”
“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도망치듯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그런 말을 남겼던 게 문제일까.그날 후로 카일이 두 발로 서 있는 모습은 볼 수 없게 됐다.
‘아니……, 아니 쟤가 왜 저래!’
누가 보면 어쩌려고!
내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일은 내가 나오기 무섭게 반갑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헐레벌떡 개새끼처럼 네 발로 기어왔다.
“카, 카일, 너 지금 대체…….”
“응?”
“누가 보면 어쩌려고!”
“하지만 두 발로 서 있으면 무섭다며.”
“아니, 아니……, 그건 그런데…….”
“개처럼 기어 다니면 안 무서운 거 아니야?”
공손하게 발아래 무릎 꿇은 카일이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양새가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이러려던 게 아닌데…….’
카일이 올망졸망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곁에 있던 케벨이 아기 늑대의 모습으로 튀어나와서는 쫑알거렸다.
“주인님! 이게 무슨 굴욕이란 말입니까!”
“입 닥쳐, 케벨. 너 때문이니까.”
“네에? 저 때문이라니요! 그건 주인님께서 주인님이 봉인해 둔 힘을 못 이기시고…….”
“그 털, 전부 밀어 버려?”
케벨은 복슬복슬한 털에 애착이라도 있는 건지, 밀어 버린다는 말이 나오자 몸을 흠칫 굳히며 다시금 얌전히 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건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검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기어 다니는 카일의 모습이 적잖은 충격이었는지, 연신 구시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케벨의 말을 무시하고는 꼬리라도 흔드는 개새끼처럼 내 뒤를 쫄쫄 쫓아다녔다.
“너…….”
“응?”
“하……, 아니, 아니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거야?”
“장난 아니야, 진심이야. 나는 그저 누나가 겁먹을까 봐…….”
여전히 쌀쌀맞은 반응에 카일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혹시…….”
“…….”
“……내가 이제 싫어진 거야?”
그는 한참 우물쭈물하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울상으로 물었다.
싫냐고? 그럴 리가. 싫었으면 진즉 상종도 안 했겠지. 평생 카일과 마주치지 않을 방법을 찾아 영영 떠났을 테고.
‘오히려 너를 좋아하니까 실망과 배신감에 속상한 건데…….’
이를 악물자 나도 모르게 주먹이 세게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놀란 카일이 허겁지겁 내 손을 펴냈다.
“그러다 다쳐…….”
“…….”
“내가 미안해. 정말……, 진심으로 잘못했어.”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던 카일은 다시 한번 내 발 밑에 머리를 조아리고는 빌었다.
“……나 때릴래?”
“…….”
“정말 시키는 거 다 할 수 있어. 뭐든지 말만 해. 응?”
카일이 조심스럽게 내 발목을 매만졌다.
“……버리지만 말아 주라.”
그러다 속상했는지 한껏 잠긴 목소리로 무어라 읊조렸다.
“화 안 풀리면 용서 안 해 줘도 돼.”
“…….”
“용서 안 해 줘도 되고, 예전처럼 사이좋게 안 지내도 좋으니까…….”
끝이 살짝 갈라져 탁한 중저음이 무겁게 내 귓가에 울렸다.
“제발……, 나 버리지만 말아 주라. 응?”
나는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저 가만히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런 내 모습이 카일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모양이었다.
“누나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미안해. 쉽게 용서하기 어려운 것도 알아.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나 누나가 원하면 평생 개처럼 기어 다닐 수 있으니까, 제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초조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가며 말했다.
“이러다가 누나가 나만 버리고 형이랑 하일이랑 떠나 버릴 거 같아서 무서워.”
“…….”
“말 잘 들을게.”
“…….”
“못마땅하면 마당에 묶어 놓고 진짜 개새끼처럼 키워도 돼. 짖으라면 짖고 맞으라면 맞을게.”
한참 내 앞에 머리 박고 있던 카일의 몸이 옅게 떨렸다. 카일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건지,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말을 뱉지 못했다.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다, 이내 자리를 뜨려는 순간일까.
“아……, 미치겠다.”
짧은 침묵 끝에 흘러나온 카일의 목소리는 어딘지 평소와 달랐다.
“왜 이러지. 미안해, 동정표 사려고 이러는 건 아닌데…….”
카일은 내 발목을 만지작거리다 주먹을 쥐락펴락 하며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로저었다.
“누나…….”
“…….”
“누나, 티아 누나…….”
평소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는 묘하게 잠겨 있었다. 떨궈진 고개는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고정해 둔 채였다.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
“나 정말 명치가 너무 아파서……, 누나가 나 버릴까 봐…….”
카일이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벌벌 떨었다. 한때 듬직했던 어깨가 오늘따라 초라하게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면서도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네가 하루아침에 변했을 때 난 어땠을 거 같아?”
아직도 내게 매몰차게 굴던 카일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결국 네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말이 모나게만 뱉어진다. 사실은 탓할 사람이 필요했던 걸까. 네가 마검을 찾은 것도, 마검에 휩쓸린 것도 전부 나를 위해서, 내게 오러를 줬기 때문인데……, 내가 이기적인 걸까. 내가 속이 좁고 못돼서 너한테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나도 속상하고 마음고생 했는데…….’
그럼 나는 냉큼 용서해 줘야 해?
“모르겠어……. 답이 없는 거 같아.”
나도 모르게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카일은 내 말을 부정적으로 이해한 건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누나, 누나…….”
그가 푹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자, 잠깐만, 나, 나, 안 보챌게. 용서해 달라고 안 보챌 테니까……, 안 버린다고, 안 버린다고 약속만……, 해 주면 안 될까?”
카일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덜덜 떨렸다.
“마검은, 마검은 전생에 내가 쓰던 검이 맞긴 한데……, 내가 이걸 그러려고 찾은 건 아니었고, 나는, 그냥 그, 북부가 너무 싫어서, 누나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래서 마검에 힘이 있대서 그거 찾아서 빨리 수도로 돌아오고 싶어서…….”
두서없는 말이 한껏 늘어졌다. 말에는 어찌나 불안감이 가득 배여 있는지, 언제나 오만하기 그지없던 카일이 한 말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낯선 모습에 놀라 그를 바라보자 카일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채, 당장 죽을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 기억, 되찾았을 때……, 너무 놀라서……, 놀라서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말 사이사이에 억지로 눌러 삼켜진 울음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카일의 물기 가득한 적안과 눈을 마주한 순간, 그제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기억을 모두 되찾았을 때, 카일도 충격 받았을 텐데. 나한테 저가 스스로 검을 겨눴다는 사실에 괴로웠을 텐데…….
‘그건 조금도 생각 못했어.’
카일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저가 저지른 기억을 되짚어 볼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한참 눈물을 뚝뚝 흘리던 카일은 이내 내 앞에서 보여 주고 싶었던 얼굴이 아니었는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계속해서 잘못했다는 말만 읊조렸다.
속상했다. 그가 밉다가도 막상 우는 걸 보니까 내 속까지 같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어…….’
나는 곧장 주저앉아 카일과 눈높이를 맞췄다.
“카일…….”
“응……, 응, 누나.”
카일이 훌쩍거리며 숙인 고개를 들 줄 몰랐다. 덩치도 큰 녀석이 울음을 토하며 몸을 들썩였다. 그 모습에 결국 나는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다.
“……이리 와.”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그러자 슬며시 고개 든 카일이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콧물로 엉망 된 얼굴이 안쓰럽기도, 귀엽기도 했다. 내가 어서 이리 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자 카일은 이내 허겁지겁 내 품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오랜만에 맡는 익숙한 체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누나, 누나, 누나…….”
“응, 카일.”
“누나, 누나야……, 티아 누나.”
“응, 나 여기 있어.”
카일이 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나를 꽉 끌어안고는 엉엉 울었다. 이렇게 우는 카일은 회귀 전에도 이번 생에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카일의 등을 토닥이며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며 더욱 나를 세게 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말없이 내게 안긴 카일을 달랠 뿐이었다.
* * *
“다 울었어?”
퉁퉁 부은 눈을 한 카일이 눈가에 스푼을 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으이구, 울보.”
“하지만……, 무서웠단 말이야.”
내 침대에 앉아 평소보다 위축된 모습으로 쭈그리고 있는 카일은 어딘지 측은해 보였다. 안 그래도 시커멓고 덩치 좋은 놈이 저러고 있으니 효과가 배로 있는 거 같다.
“어디 눈 봐 봐.”
살짝 스푼을 떼어 내자 여전히 부은 카일의 눈이 보였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갔다.
“풉…….”
그러자 카일은 내가 웃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워하며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아, 어떡해. 눈 완전 부어서 웃겨.”
“저, 정말……?”
“응, 거울 보여 줄까?”
내가 쿡쿡거리며 말하자 카일 또한 잠시 머뭇거리다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아니, 안 보여 줘도 돼.”
스푼을 내려놓은 카일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배시시 웃으며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그러안았다.
“누나 있잖아…….”
살짝 물기 어린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에 속살거렸다.
“……나 안 버릴 거야?”
카일은 여전히 불안감 가득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그 모습에 나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내가 너를 왜 버려.”
“하지만…….”
“그냥 나도 조금 속상했던 거지, 만약 네가 정말 보기 싫었으면 진즉 집 나갔어.”
“그래도……, 화 많이 났었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한순간에 변한 네가 미워서. 아무리 마검 때문이라 해도 나를 잊은 게 원망스러워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내게 검을 겨누던 게 충격적이어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차곡차곡 쌓인 속상함과 서러움들이었다.
하지만 만약 카일이 정말 싫어졌으면 내가 그에게 화나고 속상하다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내보였을까?
아니, 정답은 절대 아니야. 이미 틀어진 관계인데 뭐 하러 쓸데없이 감정 낭비를 하겠어.
‘네가 내 외로움, 속상함, 서러움을 알아주길 바란 투정…….’
손으로 카일의 눈가를 지분거리며 살풋 웃었다.
“보고 싶었어, 카일.”
그러자 카일도 수줍게 웃으며 화답했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누나.”
발갛게 부어오른 그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카일이 내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뽀뽀 또 해 줘.”
애교 부리듯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한 번 더 그의 눈가에 입 맞췄다.
“말고.”
“응?”
“입에.”
얄궂게 웃으며 살짝 입술을 내민 게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푸흐흐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카일의 양 뺨을 쥐었다.
“바보.”
그러고는 그의 입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 맞췄다.
“사랑해, 카일.”
“나도 많이 사랑해, 누나.”
내가 살포시 입을 떼자 카일은 은근슬쩍 제 손으로 내 뒷목을 받치며 다시금 입술을 부볐다.
방금보다 길어진 입맞춤에 살짝 눈을 감자 카일이 속삭였다.
“키스해도 돼?”
“음……, 아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살짝 벌어진 잇새로 뜨겁고 말캉한 것이 밀고 들어왔다.
“으응…….”
그러고는 머지않아 잡아먹을 듯 내 입술을 탐하며 몸을 바짝 붙여 왔다.
“누나, 사랑해. 정말로.”
낮은 목소리가 묘한 정염을 담고 그르렁거렸다. 익숙한 카일의 사랑 고백에 나는 살짝 눈매를 휘며 웃어 보였다.
“나도 사랑해, 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