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일의 비밀
사실 하일은 처음부터 천재라 불릴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
첫 번째 삶에서의 그는 카제프와 엇비슷할 정도로 조금 더 똑똑한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후작 부부가 감탄해 마지않는 명석한 두뇌의 천재까지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안녕.”
티아가 ‘정말’ 처음 저택에 온 날.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넬 때도 하일은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카일이야 원체 장난기가 넘치고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니, 또래 아이가 저택에 오자 신기함과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곤 했지만 하일은 아니었다.
카일보다 정적인 편에 속하는 그는 굳이 제 시간을 할애해 가며 그녀와 논다든가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카일 도련님은 벌써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신다며?”
“가만 보면 카일 도련님이 제일 후작 각하를 쏙 빼닮으셨잖아. 그럴 만도 하지.”
“하일 도련님은 같은 쌍둥이인데도 왜…….”
“쉿, 누가 들을라.”
하일도 처음부터 검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쌍둥이인 카일과 명백하게 차이 나는 실력.
카일은 타고났고, 하일은 타고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현실이 그랬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아무렇지 않게 목검을 휘둘렀던 카일과 달리 하일은 가까스로 목검 한 번 들어 올려 버겁게 휘두르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두 손으로 들어야만 가능했다. 비교가 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학문적인 부분에서는 하일이 더 뛰어나다지만, 그마저도 천재적인 정도는 아니었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사교계의 귀족들이건, 또래 영식들이건, 저택 사용인들이건. 다들 둘을 비교하기 바빴다.
그들은 마치 즐거운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쌍둥이인 카일과 하일을 놓고 입맛에 맞게 조잘거리곤 했으니까.
티아가 저택에 온 지 얼마나 됐을 무렵일까.
후작 부인이 티아를 위해 또래 영애들을 불러다 작은 티파티를 열어 준 날이었다. 하일은 마침 후작의 심부름으로 티파티가 열린 정원을 지나가고 있었고, 덕분에 원치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카일 영식이 더 좋아요.”
“저두요! 저희끼리 인기투표라도 할 때면 항상 카일 영식이 압도적으로 이긴답니다.”
꺄르륵, 꺄르륵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내용은 역시나 이번에도 저와 카일에 대한 내용이었다. 하일은 작게 한숨을 뱉었다. 굳이 이렇게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보다 카일을 더 좋아한다는 걸.
“하일 영식은 뭐랄까……, 남자답지 못해요.”
“맞아요! 분명 커서도 카일 영식이 훨씬 멋있어질 거예요.”
어린 영애들은 서슴없이 카일과 하일을 비교하며 누가 더 제 이상형인지 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하일은 뛰어난 기사가 될 재능이 보이는 카일을 이길 수 없었다. 끊임없이 평가받는 말들이 더 이상 듣고 있기 불쾌해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이었다.
“무례해요.”
정원에 앙칼진 목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졌다.
“카일도 하일도 모두 제 가족이에요.”
티아였다. 잔뜩 토라진 듯한 목소리는 울음기를 머금고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마요. 하일이 들으면 상처받을 거예요. 저는 기분 나빠요. 제 앞에서 그런 이야기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더불어 뒤에서도요.”
의외의 말에 힐끔 뒤돌아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보자, 티아는 한껏 볼을 부풀린 채 화를 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정원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어색한 침묵과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티아가 아닌, 티파티의 손님으로 찾아왔던 영애들이었다.
“양녀라더니 생각하는 것도 어쩜 평민 같네.”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은 자신들의 말에 반박한 평민 출신 양녀에게 관대하게 굴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그녀들의 조롱이 티아를 향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누가 평민 출신 아니랄까 봐, 분위기 파악 못하고…….”
쿡쿡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티아를 향했다. 그러자 티아 또한 당황한 건지 더 이상 그녀들에게 반박하지 못했다.
티파티 대화 주제는 순식간에 카일과 하일에서 티아의 조롱으로 변질됐다.
그러나 하일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방금까지 저를 흉보던 영애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는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다.
그날 후로도 티아와 이렇다 할 접점은 없었다. 한 집에 살면서도 마주칠 때라고는 밥을 먹을 때, 혹은 드문드문 카일과 정원을 뛰어놀 때 어쩌다 마주치는 경우가 전부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날 티파티에서 티아가 하일의 편을 든 탓에 또래 영애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한다.
하일은 내심 그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거슬림이 그녀와 제 사이를 이어 줄 법한 돌다리까지 되어 주지는 못했다.
‘그래 봤자 누이도 카일이랑만 노는 거 보면…….’
티는 안 내더라도 역시 나보다 카일이 더 좋은 거겠지.
어린아이답게 사고의 흐름이 유치했다.
티아가 먼저 살갑게 다가올 때마다 뚱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일 땐 언제고, 하일은 내심 카일과만 노는 티아가 섭섭했다. 둘 사이는 여전히 그렇게 데면데면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카일과 하일의 여덟 번째 생일이 된 날이었을까.
그날의 저택은 두 사람의 생일 파티로 분주했다. 생일 주인공이 두 명이었으니, 저택으로 들어오는 선물도 두 배였다. 사용인들도 후작 부부도 모두 바삐 움직였고 비교적 한가한 이들은 생일 주인공이 아닌 티아와 주인공이래도 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카일, 하일뿐이었다.
“카일, 하일 생일 축하해!”
티아가 조그마한 상자를 들고 파티 준비로 바쁜 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카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살갑게 그녀에게 다가가 치대며 말했다.
“누나, 선물 있어? 선물 줘! 선물!”
“카일, 너 선물 많이 받았잖아.”
“그래도 누나가 주는 선물도 받을 거란 말이야! 선물 줘, 선물! 설마 없는 거 아니지? 응?”
어찌나 칭얼거리는지 티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지못해 상자 중 하나를 건넸다. 그러자 카일은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서 곧장 선물을 풀어 버렸다.
생일 선물은 카일에게 딱 맞는 검술용 장갑이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바로 장갑을 손에 욱여넣었다. 카일의 선물을 본 하일 또한 기웃거리며 어색하게 티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자 티아가 웃으며 그에게도 상자를 건넸다.
선물은 카일과 똑같은 검술용 장갑이었다.
하일은 눈에 띄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검술을 잘 하지도 못할뿐더러 좋아하지도 않았으니까.
게다가 카일의 재능 두각이 검술 쪽으로 워낙 뚜렷한 탓에,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선물들 또한 모두 검술과 관련된 물품들이었다. 아마 선물을 보낸 이들은 쌍둥이니 같은 물건을 보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여 하일에게도 동일한 선물을 보냈겠지만, 하일은 그 사실이 영 달갑지 않았었다.
‘누이도 역시 카일에게 맞춰 사셨구나…….’
그의 입이 묘하게 뾰로통 튀어나왔다. 하일은 성의 없이 고맙다는 말을 뱉고는 손에 껴 보지도 않고 책상 서랍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책이나 펜이 갖고 싶었는데…….’
하일은 알 수 있었다.
후작 부부도 다른 귀족들도 카제프도 티아도. 그 누구도 저를 생각해서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없다는 걸.
생일 파티의 주인공은 둘이었지만, 하일은 카일이 진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 * *
역시나 생일 파티가 시작된 후로도 하일은 뒷전이었다. 모두 당연하다는 듯 카일에게 먼저 축하의 말을 건넸고 그다음으로 하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굳이 먼저 태어나 형인 쪽을 꼽자면 하일인데도 그러했다.
기분은 최악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는 파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홀로 제 방에 돌아왔다.
‘어차피 다들 카일한테만 관심 있을 테니 나 같은 건 없어도 모를 거야.’
왠지 시무룩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일이 미운 건 아니었다. 부럽긴 부러웠으나 그게 시샘이나 질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둘은 쌍둥이였고, 일반적인 형제와는 무언가 다른 깊은 유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속상해.’
하일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아무리 하일이래도 어릴 때는 평범한 8살에 불과했으니, 이런 식으로 홀대받는 것에 예민할 나이였다.
얼마나 그렇게 혼자 울고 있었을까.
똑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놀란 하일이 화들짝 침대에서 일어나며 허겁지겁 눈물을 훔쳤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두어 번 가다듬고 울음기를 없앤 채 말했다.
“누, 누구세요.”
“하일, 나야.”
티아였다. 하일은 누군가가 저를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곧장 문을 열었다.
“누, 누이께서 제 방엔 왜 오셨어요.”
하일이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티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하일의 눈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혹시 울었어?”
“네? 제, 제가 왜 웁니까! 저는 고작 생일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울지 않습니다!”
“흐음……, 역시 생일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구나?”
“윽…….”
정곡을 찔린 그가 슬그머니 티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티아가 키득거리며 하일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하일, 있잖아…….”
“……?”
“이거 카일한테는 비밀인데…….”
그녀가 말꼬리를 늘리며 슬그머니 하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네 선물은 두 개야.”
“……!”
놀란 하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티아가 배시시 웃으며 뒤에 숨겨 두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일이 갖고 싶어 했던 깃털 펜이었다.
“누이……, 이, 이건……?”
“네 생일 선물!”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에 그는 바보처럼 눈만 끔뻑였다.
“어째서 저만 두 개를…….”
“응? 아, 사실 처음부터 주고 싶었던 건 이거였는데 이게 더 비싼 거거든. 카일이 알면 삐칠 거 같아서……, 헤헤, 그래서 똑같은 거 준 척하고 하일 네 건 따로 준비했어!”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언젠가 하일이 스스로 용돈을 모아 새로운 깃털 펜을 사고 싶다고 후작 부인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 물론 가격은 얼마 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후작 부인은 무언가를 위해 돈을 모으고 저축한다는 하일이 기특하여 일부러 그가 직접 구입할 수 있게끔 적당량의 용돈을 쥐여 주며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꼬박꼬박 저축하는 하일이 기특했는지 티아에게 곧잘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래서 티아는 알고 있었다. 하일이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하일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에 들린 깃털 펜을 만지작거렸다.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아주 조심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와…….”
“어때? 마음에 들어?”
“네,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요!”
하일이 환하게 웃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 티아도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고작 백 골드도 하지 않는 그 깃털 펜은 하일이 받은 생일 선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해 생일, 하일을 생각해서 선물을 준 사람은 티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일은 그 깃털 펜을 20살이 되는 그때까지도 고이고이 모셔 두고 사용하곤 했다.
“누이는…….”
“응?”
“누이는 뭐 갖고 싶으신 것 없습니까?”
그 질문에 그녀가 잠시 고민했다.
“음…….”
하일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티아를 바라봤다.
“딱히 없는 거 같아.”
“그래도요!”
받았으니 받은 만큼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었다. 집요한 하일의 눈빛에 티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굳이 꼽자면…….”
“꼽자면?”
“하일, 너랑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거……?”
그녀가 민망하다는 듯 뺨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나는 하일 너랑도 같이 놀고 싶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하일이 바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항상 책만 읽잖아. 그럼 심심하지 않아?”
“아, 그, 그게…….”
“사실 예전에 거리에서 살 적에 친구들이랑 하던 놀이가 있거든! 그런데 둘이서는 못하는 놀이라서……, 음, 셋이서 하고 싶어!”
멍하니 그녀를 보던 하일은 이내 나이에 맞는 순수한 웃음을 푸흡, 터트렸다.
“그래요, 누이께서 하고 싶으시다면.”
“정말? 무르기 없기다?”
“네, 정말로요.”
그렇게 시작된 작은 감정은 무려 십삼 년이란 세월을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크기를 부풀려 나갔다.
언제나 그녀에게 좋은 것만 입혀 주고, 먹여 주고, 보여 주고 싶었으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길 바랐다. 제 마음보다 티아의 행복이 더 소중해서, 그래서 하일은 단 한 번도 제 마음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첫 번째 삶에서는 그랬다.
그래서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티아가 다른 사내에게 가는 걸 보며 속은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졌으나, 웨딩드레스를 입고 해맑게 웃는 얼굴이 너무나 어여뻐서, 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뒤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키는 게 전부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은 그저 그녀를 불행하게 할 추악한 것에 불과하지 않다는 걸, 하일은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건 카일도, 카제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티아가 황후가 됨과 동시에 시작된 황실의 이상할 만큼의 과한 견제. 동양에 나가 있던 하일조차 다시금 귀국할 정도로 뒤숭숭한 가문의 상태. 뭔가 잘못됨을 느끼기도 전에 들려온 건 카일의 반역 소식이었다.
반역이라니. 티아가 황궁에 있는데, 반역이라니.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티아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황실의 개가 된 카일이 반역을?
그제야 하일은 알아차렸다.
황태자, 아니 이제 황제가 된 이자키엘은 티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티아는 언제든지 황실을 집어 삼킬 만큼 거대해진 아르젠트를 함락시키기 위한 볼모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카제프까지 반역의 주동자로 황궁에 붙잡힌 상태였다.
이건 철저하게 준비된 모함이었다. 황제는 황실 소속 마법사들을 통해 카일의 오러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마법까지 개발해 둔 지 오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카일도 카제프도 속수무책으로 붙잡혔다.
설마 티아를 인질삼아 아르젠트를 없애려 할 거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형제들도 티아도 껌뻑 속아 넘어갈 만큼 이자키엘은 공적인 자리에서 티아에게 지극정성이었으니까.
가문이고 뭐고 티아와 형제들부터 살려야 했다.
그래서 하일은 귀국하자마자 형제들과 티아를 빼내 곧장 동양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던 탓일까. 그마저도 황실에 꼬리를 밟혔고 이자키엘은 생각보다 더 최악인 자였다.
카일에게서 빼앗은 오러로 형제들을 제압한 후, 단순히 유희라는 이유로 아주 천천히 티아의 살점 하나하나를 베어 냈다. 과다출혈로 그녀가 정신이라도 잃을 것 같을 때면 지혈까지 해 가며 형제들 앞에서 일부러 그녀가 고통에 울부짖는 모습을 보여 줬다.
화를 참지 못한 카일이 이자키엘에게 달려들었으나, 이자키엘의 몸에는 카일에게서 앗아 온 그의 오러가 있었다.
저열하게도 최면 마법을 통해, 카일이 자신에게 스스로 오러를 내주도록 만들어 빼앗은 것이었다.
아무리 카일이라 한들, 철저하게 그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 온 황실 마법사들과 제 오러를 빼앗아 간 이자키엘을 이기지는 못했다. 가장 먼저 카일의 숨이 끊어졌고, 그다음은 카제프였다. 카제프가 그간 숨겨 왔던 마법을 사용해 뜻하지 않게 시간을 끈 덕분에, 가까스로 하일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도망만 쳤을 뿐.
티아도 카제프도 구하지 못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하일은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런 하일을 안쓰럽게 생각한 동양의 귀족이 ‘그 물건’에 대해 알려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리우 하, 내 자네에게만 은밀하게 알려 주는 걸세.’
‘왕실의 보물이라 불리는 물건인데, 큰 대가를 치르는 대신 단 한 번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하네. 물론 그게 정말인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듣기로는 선왕의 무덤에 숨겨져 있다는데…….’
자결할 거라면, 뭐든지 해 보고 죽으라고. 하다못해 이자키엘에게 너 죽고 나 죽자는 심보로 복수라도 하고 가라고. 그 말에 하일은 미친 사람처럼 동양 희나라 선왕들의 보물을 찾아 헤맸다.
자그마치 이십 년을 그곳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보물을 찾아냈을 때, 보물에 잠들어 있는 무언가가 하일의 앞에 나타났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일은 저가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환각이든 아니든, 보물의 존재를 불러내는 데 성공했으니 그가 사라지기 전에 어서 원하는 바를 말해야 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삼십 년 정도의 시간을 되돌려야만 합니다.”
하일이 허겁지겁 시간을 돌려 달라 말했다. 그러자 보물의 낯선 존재는 묘한 기운을 풍기며 그를 훑었다.
「죽은 네 누이 때문인 게냐.」
보물의 존재는 곧 바로 하일의 속마음을 간파해 냈다. 그가 제 속을 알아차렸다는 데에 놀란 것도 잠시. 뒤늦게 시간을 돌릴 만큼의 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면 제 사정을 모르는 게 오히려 우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습니다. 누이와 가족들을 살리고 싶습니다.”
「뭐 네 형제들은 그렇다 쳐도, 누이는 지금 환생하여 새로운 삶에 만족하는 것 같은데…….」
환생. 보물의 존재가 환생을 언급하자 하일의 표정이 은근히 어두워졌다.
‘환생……, 하셨구나.’
두 번째 삶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녀가 환생하여 새로운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끔찍했던 마지막 순간을 잊고 행복한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저가 억겁 같았던 고통의 시간을 보낸 동안 그녀는 행복했을 걸 생각하니 아주 조금, 정말 아주아주 조금 밉기도 했다.
여하튼 싱숭생숭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그녀를 다시 네 곁으로 돌려 두고 싶은 게냐.」
그 물음에 하일은 잠시 고민했다. 여태까지는 당연히 시간을 돌릴 거라 다짐해 왔는데, 막상 티아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선뜻 돌려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 행동이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이제야 겨우 행복하게 살고 있는 티아를 고작 제 욕심 때문에 다시금 끔찍했던 과거로 끌어와 번복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서.
하지만 티아가 보고 싶었다.
만약 제 바람대로 시간이 돌아간다면, 이번에는 기필코 그녀가 황태자에게 가도록 두지 않을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고민하던 하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누이께서 선택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엇을.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예.”
「가능은 하다만……, 기껏 나를 찾아 놓고 그리해도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누이께서 원한다면 그때 시간을 돌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보물의 존재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고는 하일에게 대가를 말할 것을 명했다.
「그리하면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하일은 고민했다. 어떤 것을 대가로 내놓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명? 아니면 영혼? 신체의 일부?
그러자 그가 고민하는 걸 눈치챈 건지, 보물의 존재가 말했다.
「눈.」
“…….”
「너의 시야를 내게 바치거라.」
크게는 수명을 삼십여 년 떼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했는데, 생각보다 적은 대가였다. 하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빛이 그의 몸을 감싸고돌며 웅장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 누이 또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벌써 환생한 티아에게 물어보기라도 한 건지, 보물의 존재가 말했다. 그 말에 하일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누이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어.
그러나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큰 줄기가 바뀔 때마다 대가를 지불하는 속도 또한 빨라질 것이다.」
대가에 대한 말이 흘러나왔다.
「살아야 할 이가 죽고, 죽어야 할 이가 산다면 네 시야가 온전히 내게 올 것이니.」
“누이는……, 누이께서는 과거를 기억하시는 겁니까?”
하일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보물의 존재는 명확한 대답을 내리지 않았다.
「글쎄…….」
“…….”
「확실한 건 네 누이도 과거를 선택했다는 것뿐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땐 6살의 어린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후작 부인이 길거리에서 티아를 데려왔던 그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