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랑하는 방식
- 2권 -
곽두팔
Contents
4. 하일 아르젠트(2)
5. 하일의 비밀
6. 리우 하
7. 전야제
8. 평범한 일상
9. 카제프의 선물
10. 카제프의 취향
11.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
4. 하일 아르젠트 (2)
뭐? 지금 저거 날 보고 한 말이야?
나는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족들 또한 카일의 반응에 할 말을 잃고 다들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카일, 너 지금 무슨 장난을 치는 거야.”
하일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위협하듯 물었다. 그러자 카일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장난이라니, 나야말로 묻고 싶어.”
카일의 붉은 눈동자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아까부터 어디 듣도 보도 못한 계집이 우리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카일!”
듣다 못한 카제프가 카일의 말을 끊고 버럭 소리쳤다. 평소 온화한 편에 속했던 그가 소리치자 카일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뭐?”
“티아한테 왜 말을 그 따위로 해.”
“……티아?”
카제프의 말에 카일은 미간을 좁혔다. 카일의 반응만 두고 보면 마치 나에 대해 생소해 하는 것 같다.
“티아더러 계집이라니. 너……, 정신이 어떻게 돼 버린 거냐.”
카제프가 위협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카일이 진위를 알 수 없는 조소를 흘렸다.
“아니……, 형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티아가 누군데? 설마 저거?”
그가 말하는 ‘저거’가 나라는 걸 인지한 순간 바닥이 아득하게 꺼지는 듯했다.
장난치지 말라든가, 누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든가……, 무언가 따지는 말들을 뱉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보는 카일의 시선이 낯설었다.
무심하고 차가운 눈빛. 싸늘하게 식은 입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내가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도 카일은 저런 표정을 보이지 않았었다.
주먹이 절로 세게 쥐여졌다. 장난치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의 본능적인 감이란 게 있지 않는가. 그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카일은 변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초라하게 서 있자, 하일이 다가와 나를 달랬다. 하일은 카일이 장난치는 것 같다며 애써 내 기분을 돋워 주려 했다.
“누이, 잠시 들어가서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하일의 큼직한 손이 내 손을 깍지 끼워 잡았다. 평소의 카일이었으면 제 손도 잡아 달라며 곁에서 칭얼거렸을 텐데, 오늘의 카일은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
카일과 부모님 그리고 오라버니의 말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버티다 못한 나는 결국 그들을 뒤로한 채 하일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 * *
혼자 방에 남은 나는 멍하니 천장 위의 샹들리에를 보며 생각했다.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일이지……?’
카일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걸까.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힘없이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러자 문득 손목에 있는 카일의 오러가 눈에 들어왔다.
‘오러…….’
붉은 루비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오러를 매만지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낯선 카일의 모습 때문일까.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를 향해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개심. 그리고 마치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듯한 태도.
‘갑자기 왜 그렇게 변한 거지……?’
그건 단순히 나에 대한 호감이 사라졌다든가, 나와의 관계가 권태로워져서 보인 태도가 아니었다.
아까는 하도 정신없어 바보처럼 눈만 끔뻑였는데, 방으로 돌아와 찬찬히 되짚으니 그제야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걸 알아차렸다. 카일은 마치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짜증 나…….’
속이 울렁거렸다. 사실 아직도 카일이 변했다는 게 와닿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 싶었다며 안아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
왜 갑자기 카일이 변한 거야.
나는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침대 시트를 세게 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토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유쾌하지 않다. 우울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북부 가지 말라고 말릴걸.
뒤늦은 후회만 남을 뿐이었다.
* * *
“누이.”
“으웅…….”
피곤했는지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귓가에 들려온 하일의 목소리에 어렴풋이 눈이 떠졌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조금…….”
하일이 다정히 뺨을 매만지며 내 머리를 정돈했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그에게 뺨을 비비며 작게 웃었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응? 뭔데?”
졸음이 가득 묻은 눈을 억지로 띄워 그를 올려다봤다. 하일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일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아…….”
짧은 탄식을 흘리자 하일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누이와의 기억이 마치 누군가 도려 낸 것처럼 깔끔히 지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제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건 마검의 효과 때문인 것 같고요.”
마검이 언급되자 아까 카일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새카만 검이 떠올랐다.
“조금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마검을 발견한 것 자체가 워낙 기적적인 일어난 일이라……, 빠르게 알아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괜찮아. 그래도 고마워, 하일. 신경 써 줘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일은 속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 이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누이.”
“……응.”
“사랑해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속삭임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상하게 그날따라 출처 모를 편지가 떠올랐다.
하일을 믿지 마.
온통 복잡한 것투성이였다. 나는 물끄러미 하일을 올려다보다 이내 피곤하다는 듯 이불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그러자 하일은 한숨 더 자라는 말과 함께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카일이 돌아오고 며칠이 흘렀을까.
그는 여전했다. 여전히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여전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으며,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숄을 두르고 나왔는데도, 살짝 쌀쌀했다. 그럼에도 잠이 오지 않아 우울함에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싶었다. 정원을 거닐자 사박사박 밟히는 잔디가 기분 좋았다.
‘카일 보고 싶었는데…….’
마검 때문에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니. 그래도 어디 다친 곳 없이 돌아와서 다행인 건가.
나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괜스레 짜증이 치밀어 앞에 놓인 돌멩이만 걷어찼다.
‘누나, 나랑 산책가자.’
‘누나, 미안해. 많이 아팠어?’
살갑게 굴던 카일이 떠올라 괜히 기분만 울적해졌다.
‘만약 이대로 영영 기억을 되찾지 못하면 어쩌지……?’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금방 돌아오겠지. 소설 같은데서 보면 금방 돌아오잖아. 그러니까 분명 카일도…….
나무가 가지 뻗듯 뻗어 나가던 생각을 억지로 멈췄다.
이건 소설이 아니야. 소설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현실이야. 어쩌면 카일은 정말 영영 이대로……, 나를 잊을지도 몰라.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통증이 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카일에 대한 생각이 분산되는 게 나았다.
상념을 떨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이 시간에 누구지……?’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기에, 의아한 나머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카…….”
나는 반가운 나머지 카일이 변했다는 것도 깜빡하고 바보처럼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다 적개심 가득했던 카일의 시선이 떠올라 곧 바로 말을 멈췄다. 지금의 카일이라면 예전에 그를 부르듯 친근하게 불렀다간 당장 검이라도 겨눌지 몰랐다.
‘에휴, 됐다. 됐어.’
지금 카일은 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괜히 먼저 불러서 인사할 필요도 없지. 괜히 불똥만 튈라.
힐끔, 그의 눈치를 살피다 살며시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카일이 우악스럽게 내 손목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단말마 같은 비명이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내 손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너 뭐야.”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카일이 위협적으로 송곳니를 드러냈다.
“윽…….”
붙잡힌 손목은 어찌나 세게 잡혔는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아픈 나머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뿌리쳐지지 않았다.
카일의 적안이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조금의 애정도 없는, 오히려 적대감이 가득 담긴 시선.
서러운 나머지 울컥하는 감정이 속에서 복받쳤다.
‘나 좋다고 쫓아다닐 땐 언제고…….’
짜증 나, 진짜.
입술을 짓씹으며 울음을 삼켰다. 지금의 카일 앞에서 약한 모습 같은 거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기억 돌아오기만 해 봐, 어디 쉽게 용서해 주나.’
그렇게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더니 고작 마검 하나로 이렇게 변한 게 우스웠다. 나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카일을 째려봤다. 그러자 카일이 한 번 더 물었다.
“너, 뭐냐고.”
“뭐가.”
일부러 성의 없이 짧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가 매섭게 나를 쏘아봤다.
“네 손목에 오러.”
“아윽…….”
“이게 왜 네깟 계집한테 있어.”
카일의 눈이 섬뜩한 이채를 띄며 번뜩였다. 단순한 적대감을 넘어 살기가 고스란히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
“이게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
화를 참지 못한 듯, 카일이 버럭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 한 자, 한 자에 분노가 눌러 담겨 있었다. 원치 않았음에도 공포심 탓에 눈물이 맺혔다. 고압적으로 뿜어내는 카일의 흉흉한 기운은 내가 홀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네가 준 거잖아.’
목소리가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살기 탓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카일이 손을 놓는다면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아프고 무서웠다. 그런 와중에도 한때 사랑을 속살거리던 그가 겹쳐 보여 가슴 한 편이 지끈거렸다.
“그래, 뭔가 이상하다 했어.”
카일은 홀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씨발, 하루아침에 오러도 없어졌지,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뭐에 홀린 것마냥 북부로 왔지…….”
그가 거칠게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이죽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너 마녀냐?”
카일의 말에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하, 뭐?”
마녀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기억을 잃은 거로도 모자라 이젠 사람을 마녀로 모는 건가?
황당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카일은 내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제 할 말만 뱉을 뿐이다.
“오러도 앗아 가고 사람을 홀려 북부로 보내고……, 우리 가문에 한 자리 꿰차고 싶었나 보지?”
카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혔다. 절로 미간이 좁아들었다. 억지로 눌러 삼키고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아 내고 카일을 째려봤다.
“……카일, 너 후회할 거야.”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카일이 이를 으득 갈며 작게 읊조렸다.
“듣도 보도 못한 네깟 년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름 아니니까.”
제대로 정돈하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칼과 성의 없이 챙겨 입은 와이셔츠. 내 앞에 있는 건 누가 봐도 카일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카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카일 같지 않았다. 그가 뱉어 대는 미운 말들이 야속했다. 억지로 빳빳이 들고 있던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이런 재회를 바란 게 아닌데…….’
나는 마른세수하며 울음을 삼켰다. 그런데 그 순간일까. 스릉, 하는 서늘한 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정원에 울려 퍼졌다. 놀란 나머지 고개를 번쩍 들자 어둠 그 자체나 다름없는 새카만 마검이 검집에서 나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네가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몰라도.”
타는 듯이 붉은 눈동자는 내게 검을 겨누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여 주지.”
기억을 잃은 거로도 모자라 나한테 검까지 겨눈다고? 충격에 나는 그대로 우뚝 굳어 버렸다. 지금의 카일은 정말 당장에라도 나를 죽일 기세였다.
‘아, 진짜 최악이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일을 마주하고 있기 괴로웠다. 내가 울거나 말거나,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카일은 눈 하나 꿈쩍 않고 마검을 휘두르려 했다.
참다못한 나는 서러움에 버럭 소리쳤다.
“술수?”
눈물 탓에 시야가 흐릿했다. 그럼에도 지금의 카일이 너무 야속해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술수라니, 말 똑바로 해.”
내가 말을 뱉음과 동시에 손목의 오러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마치 예전의 카일처럼 따뜻하게 내 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일이 미간을 구기며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는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네가 먼저 나 좋아한다며.”
그래 놓고 어떻게 이렇게 쉽게 나를 잊을 수 있냐고 떽떽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카일의 눈은 여전히 경멸과 적대감으로 가득했다.
“그래 놓고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잊어?”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서러움을 가득 담고 그를 마주했다.
예전의 카일이었으면 곧장 눈물을 닦아 주고 울지 말라 달랬을 텐데, 지금의 카일은 내 눈물을 보고 눈 하나 꿈쩍 않는다.
“너 진짜 후회할 거야.”
울음 탓에 잠긴 목소리가 안쓰럽게 갈라졌다. 카일은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 생각했는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녀 주제에 유언이 길어.”
새카만 검이 내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가 검을 빼든 순간까지도 ‘혹시’라는 일말의 기대가 남아 있었는데…….
현실은 현실이었다.
만화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기억을 되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검을 휘두르는 카일은 시리도록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조금의 죄책감도, 고민도 없어 보였다. 인간이 한낱 개미 밟듯 그 정도로 아무 감흥조차 없어 보였다.
‘죽기 싫어…….’
진짜 나한테 마검을 휘두른다고?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내 몸을 감싸고 돌던 붉은 기운이 보호막을 만들어 내며 매섭게 마검을 쳐 냈다. 큰 굉음과 함께 기이한 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나머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살폈다.
“큭…….”
카일이 휘둘렀던 검을 놓칠 정도로, 보호막은 단단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몸을 감싼 보호막을 더듬거렸다. 보호막은 마치 깨지지 않는 유리처럼 단단했다.
‘내 오러야. 누가 누나한테 나쁜 짓 하려고 하면 바로 지켜 줄 거야.’
‘나 없는 동안 누나한테 무슨 일 있으면 안 되니까.’
문득 그가 처음 내게 오러를 줬던 날이 떠올랐다. 내 걱정을 하며 다정히 웃어 보이던 과거의 카일이 떠올라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멍청한 카일. 바보 카일.
나쁜 짓 하려는 그 누가 자기라는 건 알고 있을까. 너 없는 동안 무슨 일 생기는 게 아니라, 네가 돌아오고 무슨 일 생기는 건 알고 있을까.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튕겨진 마검을 주워 든 카일은 짜증스럽다는 듯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챙-
큰 마찰음과 함께 마검이 보호막을 깨트리려 들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오러의 주인이 주인인 만큼 아무리 카일이래도 쉽게 보호막을 깨지 못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지금의 그는 내게 오러를 모두 준 탓에 예전보다 약한 상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카일은 제가 방어막을 깨지 못한다는 거에 적잖이 충격 받은 눈치였다. 잠시 미간을 구기더니 이내 점점 격하게 보호막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검과 보호막이 맞부딪치며 듣기 싫은 소리가 끊임없이 귓가를 때렸다. 그러나 카일이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보호막은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씨발-!”
참다못한 그가 신경질 적으로 온 힘을 다해 보호막을 내리쳤다. 당연하게도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다.
혹여 보호막이 깨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카일이 저 정도로 성을 내며 부수려 드는데도 금 하나 가지 않는 거 보면 보통 단단한 게 아닌 듯하다.
옅은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의 카일은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안도.
“……나쁜 새끼.”
그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웅얼거렸다. 카일은 씩씩 열을 내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마주친 듯한 그의 표정이 우스웠다.
카일이 한 번 더 검을 들어 올린 순간일까.
“카일-!”
누군가가 카일을 불렀다. 그와 내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난생처음 보는 표정의 하일이 서 있었다. 언제나 여유롭게 웃어 보이던 하일의 얼굴이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카일을 밀쳐 냈다. 그러고는 곧장 내게 손을 뻗었다. 보호막은 하일을 적으로 인식하지 않은 건지 무리 없이 통과하게 해 주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하일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워 주며 제 품에 가뒀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 한 건지 알아-!”
하일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카일에게 윽박질렀다. 이런 그의 모습은 저택에 온 후로 처음이었다.
“하, 너까지 머리가 어떻게 돌아 버린 건가?”
“돌아 버린 건 너겠지.”
“하일, 저건 마녀야. 정신 차려.”
마녀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나오자 하일이 인상을 구겼다.
“마녀? 하……, 카일. 너 후회하기 전에 그 검 내려놓고 물러서.”
그가 경고하듯 카일에게 말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네가 감히 누이께 무슨 짓을 하려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누이?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카일이 이를 으득 갈며 위협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일과 달리 카일은 보호막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우스웠다. 과거의 그가 나를 지키기 위해 줬던 오러가 미래의 그로부터 나를 지켜 주는 꼴이라니. 본인도 제 오러가 자신을 막는다는 게 우스웠는지 비아냥대며 말했다.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어.”
카일이 보호막을 짚었다. 그의 손이 보호막에 닿자 낯선 스파크가 튀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마녀.”
“…….”
“오러를 어떻게 앗아 갔는지는 몰라도……, 내 오러가 너를 얼마나 지켜 줄 거라 생각해?”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내려다봤다. 한때 사랑을 속삭이며 다정히 웃어 보이던 얼굴에 이제는 거부감만 그득 남아 있었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너야말로 기억 되찾으면 어쩌려고 그래?”
“뭐?”
“언제는 나 좋다고 똥강아지 새끼마냥 쫓아다니더니, 지가 기억 잃어 놓고…….”
말을 잇다 말고 복받친 울음에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잇새로 울음이 새나왔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하일이 곧바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끌어안았다.
“누이,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응?”
“흑, 아흑…….”
시원한 하일의 민트 향이 코끝에 아른거렸다.
“들어가요, 카일은 나중에 제가 제대로 대화 나눠 볼 테니…….”
“짜증 나, 흑, 진짜 짜증 나…….”
“예, 맞습니다. 카일 저놈이 문제예요.”
카일은 부둥켜안고 저를 탓하는 둘을 바라봤다.
“지랄 났네, 지랄 났어.”
그러더니 고개를 비뚜름히 젖히고 까딱거렸다. 모양새가 꽤 불량했다.
“어이, 마녀.”
“하윽…….”
“뒤지기 싫으면 오러 내놓고 얌전히 꺼져.”
훌쩍이던 나는 눈물을 닦고 하일의 품에 안겨 카일을 쏘아봤다. 그러고는 곧장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너나 꺼져, 바보 같은 놈아! 이럴 거면 다시 북부로 가 버려! 평생 오지 마!”
내심 보호막을 믿고 카일에게 마음껏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하일이 잘했다며 살포시 웃었다.
“하, 아니 저게 미쳤나 지금……!”
카일이 다시금 마검을 쥐었다. 나는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하일까지 보호막 안에 꼭 들여 놓고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덩그러니 남은 카일만 신경질적으로 둘이 사라진 자리를 째려볼 뿐이었다.
* * *
“마검……, 마검이라…….”
황태자 이자키엘이 미간을 꾹꾹 짓누르며 중얼거렸다.
‘거슬리는군…….’
알타르를 한순간에 멸망시킨 카시아스의 검.
애당초 카일은 대륙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러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마검까지 쥐여지다니. 자칫, 카일이 카시아스처럼 마음먹고 제국이라도 멸하려 든다면? 대제국 알타르조차 한순간에 멸망시킨 검이다. 어쩌면 지금의 제국 따위 우습다는 듯 한 순간에 쓸어 버릴 수도 있을 법했다.
직접 전장에서 날뛰는 그를 마주한 적이 없으니, 얼마나 강한지 실감하지는 못했으나 소드 마스터, 오러, 마검. 세 가지 중 그 무엇 하나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카일뿐만 아니라 카제프와 하일 또한 여타 귀족 영식들에 비해 여러 분야에서 상당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자키엘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그럴까 봐 그 양녀 계집을 황비로 올리려 했던 건데…….’
영악하게 제 누이는 빼내고 아무 힘없는 메리드 자작 영애를 들이민 하일이 떠올랐다.
티아를 빼내는 대신 카일이 북부로 향한 것이었으나 그 북부에서마저 마검이라는 소득이 있었으니 결국 아르젠트 후작가는 이득만 잔뜩 본 셈이었다. 이자키엘이 짜증스레 서류를 팽개쳤다.
“나날이 아르젠트의 세력이 커지는구나.”
그가 작게 중얼거리자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보좌관이 곧바로 고개 숙여 비위를 맞췄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들어 후작 가문에 맞지 않는 권세를 누리려 듭니다.”
“흐음……, 이를 어찌해야 할까.”
확실한 건 저가 평탄하게 황위를 물려받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바마마를 알현하러 가야겠구나.”
* * *
정신없는 와중에, 황실에서는 또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이번에도 발신자는 불명확했다.
“아가씨, 또 황실 시종이 편지를 가져왔어요.”
“누구 명을 받고 왔는지 물었니?”
“네, 그런데 밝힐 수 없다는 대답만 앵무새처럼 하더라고요…….”
하녀가 시무룩하게 말하며 편지를 건넸다. 저번과 같은 편지 봉투에 편지지였다.
“아가씨, 만약 불쾌한 내용이 있으면 마님께 말씀드려 발신인을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나는 서랍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 들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불쾌한 내용은 아니었어. 그냥 좀……, 의아해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하녀를 내보내고 나이프로 고급스런 봉투를 뜯었다. 요즘 통 잡생각이 늘어 그런 걸까. 나이프를 사용하던 중, 실수로 손끝을 살짝 스쳤다.
“앗…….”
날카로운 페이퍼 나이프는 아차, 한 순간 빠르게 여린 살을 베고 지나갔다. 베인 살 틈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처음 예법을 배울 때나 할 법한 실수에 나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요즘 정말 정신이 없긴 없었나 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연고를 찾으려 서랍을 뒤적였다. 그런데 손목의 오러에서 붉은 빛이 다시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빛은 꽤 방대하게 흐르더니 마법처럼 한순간에 상처 난 손끝으로 흡수됐다.
몇 번 눈을 깜박이니 베인 상처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우와……, 오러는 이런 기능도 있구나.’
신기한 나머지 요리조리 손끝을 살피다 괜스레 카일이 떠올라 마음만 뒤숭숭해졌다.
‘나쁜 놈.’
기억 돌아오면 두고 봐. 나도 똑같이 굴 거야. 울적해지는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예법이고 뭐고 팽개치고 편지 봉투를 북북 찢었다. 편지의 내용은 저번과 달리 노골적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평온과 행복을 위해 희생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어쭙잖은 말장난은 없었다. 아무 주어 없는 짧은 한 문장.
‘내 평온과 행복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당한다고……?’
이게 무슨 헛소리야. 물끄러미 편지를 보다 혹여 뒷장에 다른 내용이 있나 싶어 뒤까지 살폈다. 그러나 더 이상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하일을 믿지 마, 에 이은 두 번째 편지였다.
이번에도 찝찝하긴 매한가지였다.
‘대체 누가 무슨 의도를 담고…….’
이번에도 타인에게 내용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곧장 편지를 태워 버렸다. 고급스런 편지지가 모조리 타들어 간 순간이었다.
노크도 없이 방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말이 열린 거지 부서진 건 아닌가 싶었다. 예의 없는 행동에 곧장 시선을 문가로 돌리자 그곳엔 카일이 서 있었다.
‘쟤는 또 왜…….’
카일은 어딘지 험악하게 굳은 얼굴로 쿵쿵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야, 마녀!”
“…….”
“너, 경고하는데 내 오러 멋대로 쓰지 마.”
“……뭐?”
내가 언제 자기 오러를 썼다고……, 아, 설마 방금 상처 치료된 것 때문에 그런가……?
오러를 사용하는 것도 알 수 있다니. 조금 놀라웠다.
‘내가 쓴 게 아니라 오러가 멋대로 치료한 건데…….’
말대꾸하고 싶었으나,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냥 입 다무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카일은 잔뜩 성난 채 들어 오길래, 괜히 승질이라도 부리러 온 건가 싶었는데 의외로 얌전했다. 아마도 제 오러가 만든 보호막 때문에 내게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거겠지.
카일이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성의 없이 뒤로 넘어간 머리는 조각 같은 그의 이마를 시원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귀여워 보이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 봐.’
에휴, 한숨을 뱉으며 카일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러자 카일은 뭐가 또 문제인지 죽일 듯 나를 쏘아보며 책상 위를 기웃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양새였다. 어딘지 수상한 시선에 내가 심통하게 물었다.
“뭐, 용건 있어?”
그러자 그가 시치미 뚝 떼며 말했다.
“없는데?”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로 향해 있었다. 뭘 그렇게 보나 싶었는데, 보아하니 내 노트를 보고 있는 듯하다. 카일은 한참 동안 내 노트를 훑더니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인사도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안엔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뭐야, 왜 저래?’
그가 사라진 곳엔 익숙한 체향만이 남아 있었다. 물끄러미 손목의 오러를 매만지다 이내 카일에 대한 상념을 지웠다.
* * *
카일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보고는 미간을 잔뜩 구겼다. 상자에는 그와 함께 북부에 있던 부사관이 남긴 메세지가 적혀 있었다.
사령관님 책상을 정리하던 중, 깜빡하신 것 같은 편지들이 있어 보내드립니다.
‘내가 깜빡하고 편지를 놓고 왔다고?’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놓고 온 게 있을 리가 없다. 카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아해하며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상자를 연 순간. 카일의 표정은 잔뜩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절대 쓰지도, 받지도 않을 법한 낯간지러운 색감의 편지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경악하며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편지지에서는 특유의 여인 향수 냄새가 풍겼다. 발신인이 여자인 모양이었다.
‘내가 여자랑 편지를 주고받았을 리가…….’
말도 안 돼.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상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편지 내용은 더 말도 안 됐다.
친애하는 카일에게.
카일, 북부는 좀 어때? 이제 적응했어? 혹시 어디 다치지는 않았지? 네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다칠까 봐 늘 걱정돼. 답장은 잘 받았어. 향수 뿌리는 거 귀찮아하더니, 편지지에는 향수 뿌렸더라? 바보, 귀여워. 보고 싶다.
연인 사이에나 오갈 법한 내용의 편지. 카일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황당한 내용에 편지 봉투를 살폈다. 발신인은 카네스티아 아르젠트였다.
그 마녀.
‘답장을 잘 받았다고……?’
그럼 내가 이 마녀한테 편지를 써서 보냈다는 말이야?
차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편지 내용에 상자를 더 뒤졌다. 그러자 그녀에게 보내려다 만 듯한 쓰다 만 편지가 한 장 눈에 띄었다. 카일은 곧장 그것을 집어 들었다.
누나, 요즘 수도도 날이 쌀쌀하다던데 감기 조심해. 여기 있는 녀석 중 한 놈 약혼녀는 독감에 걸려서 많이 고생하고 있나 봐. 누나도 혹시 그럴까 봐 걱정된다.
아, 진짜 여기서 못생긴 마물들이나 보고 있으려니 짜증 나 죽겠어. 누나 안고 자고 싶다. 보고 싶어, 누나.
나 없다고 신나서 다른 새끼들 만나는 건 아니지? 그럼 진짜 화날 거 같은데. 외로워도 형님 그리고 하일이랑만 놀아. 안 그러면 나 진짜 삐질 거야.
아, 잠시만. 또 마물이 습격했나 봐. 편지는 잠시 다녀와서 이어 쓸게.
사랑해, 누나.
카일은 멍하니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런 낯간지러운 편지 따위 작성한 기억은 추호도 없는데, 저가 쓴 것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싶은데, 이건 분명 자신의 필체였다.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카일은 상당히 특이한 글씨체를 갖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반듯하게 글을 써 버릇하는 일반적인 귀족 영식들과 달리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를 사용하는 편이었다.
전문 필체 위조가가 아니라면 어쭙잖은 사람들은 따라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진짜 내가 쓴 거라고……?’
이딴 낯간지러운 편지를? 내가? 그 마녀한테?
이것도 마녀의 술수 중 하나일까, 저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울면서 저를 째려보던 조그마한 그 마녀의 눈동자가 시야에 아른거렸다. 거슬렸다.
“하.”
대체 이게 무슨…….
‘정말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카일은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세게 구겼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상자에 편지를 때려 넣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있는 것 같은 기분.
‘처음 누나 만난 순간부터 가족으로 안 봤어. 나도, 하일 그놈도.’
‘나 누나가 정말 좋단 말이야.’
‘누나는 흥분하면 꼭 그렇게 야하게 나 부르더라.’
머리가 웅웅 울렸다. 분명 언젠가 그녀와 저 사이에 나눈 것 같은 대화들이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찾아왔다. 그러나 두통 끝에 남은 건, 티아를 향한 적대감뿐이다.
‘짜증 나는 계집.’
뭔데 자꾸 거슬리게…….
제 오러만 아니었어도, 진즉 죽여 없앴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오러가 그딴 계집한테 있단 말인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한참 동안 이어진 두통과 현기증에 발아래가 아득히 꺼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벽에 세워 둔 마검이 저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검을 손에 쥐면 이 알 수 없는 감정 동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카일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마검을 쥐었다. 그러자 마검의 검은 기운이 카일의 몸을 휩싸고 돌았다. 처음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것 같더니, 점점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카일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검과 알 수 없는 공명을 나눴다.
검은 기운이 점점 그의 체내에 흡수됐다. 그러자 편지 따위를 보며 울렁거리던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카일은 티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혀를 찼다.
뭐 하는 마녀인지는 몰라도, 하일까지 홀린 정도면 보통이 아닐 것이었다. 영악하기 짝이 없는 제 쌍둥이가 홀리다 못해 마녀를 그리 감싸고도는 꼴이라니.
마검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절대로, 절대로 그녀를 가만 둬선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정신을 잠식했다.
* * *
시간은 어느덧 한밤중이었다.
카일은 잠이 오지 않는지 연신 침대를 뒤척였다. 그러다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무슨 변덕인 건지 정원으로 가던 중 문득 티아의 방문이 눈에 밟혔다. 카일은 한동안 복도에 서서 물끄러미 그녀의 방을 바라봤다.
새벽 두 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티아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세상모르고 잠든 티아가 눈에 들어왔다. 카일은 잠시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혹여 그녀가 깰까 봐 일부러 기척도 죽였다. 꽤 깊게 잠이 든 건지, 새근새근 일정한 숨소리가 고르게도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한참 티아를 바라보다 이내 그녀의 책상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고는 마치 무언가 찾을 게 있다는 듯, 책상 위와 서랍 그리고 책꽂이를 등 책상 주변을 꽤 세밀하게 살폈다. 그러다 원하는 걸 찾아내고는 표정을 밝혔다.
‘……찾았다.’
카일의 손에 들린 건, 편지 보관함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발신인이 ‘카일 아르젠트’라고 되어 있는, 제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들을 모아 둔 보관함.
그녀는 마치 카일의 편지가 아주 귀중한 보물이라도 된다는 듯 고급스러운 금 상자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덕분에 눈에 띄기도 무척 잘 띄었으니, 고마울 노릇이다.
‘그나저나 정말 내가 편지를 주고받은 건가……. 저 마녀와……?’
믿을 수 없었다. 저가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니…….
카일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편지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었다.
“하……, 빌어먹을.”
마른세수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답답하기 그지없다.
사랑하는 티아에게.
누나,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지금 막 북부에 도착했어. 도착하자마자 누나한테 보내 주려고 편지 쓴다. 나 없다고 밥도 안 먹고 우는 건 아니지?
카일은 제 손에 들린 편지를 읽다 말고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여자한테 이딴 편지를 보냈다고?’
단순히 그 대상이 마녀로 의심되는 티아여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카일은 이십 년 인생 단 한 번도, 이성과 쓰잘데기 없는 편지를 주고받는다든가 이런 낯간지러운 사랑 놀음 따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상대가 티아든 아니든.
명백하게 애정이 가득 담긴 내용 그리고…….
내가 준 오러는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안 들키는 게 좋을 거 같아.
오러를 줬다는 내용까지. 자신의 필체로 아주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카일은 아무리 편지를 읽고 또 읽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분명 필체는 제 필체가 맞는데 내용은 전혀 저가 썼을 법한 내용이 아니다. 한참 편지를 읽던 그는 결국 누군가 자신의 필체를 위조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 대조라도 해 봐야겠다며 바지주머니 깊숙이 편지를 욱여넣었다.
남이 곱게 보관해 둔 편지를 몰래 챙기면서도 죄책감은 없었다. 필체가 자신의 필체이니, 기억에는 없지만 저가 써 줬던 것을 다시금 가져갈 뿐이라며 헛기침했다.
“으응…….”
그러던 중 잠에 취해 뒤척이던 티아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렀다. 잠버릇이 나쁜 편인지, 속살이 비칠 듯 말 듯 한 하얀 실크 슬립이 한껏 말려 올라가 허벅지를 거의 내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일은 저도 모르게 아래가 묵직해졌다. 원치 않는 욕정에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짜증으로 가득한 그의 기분과 달리 아래는 욕망에 충실하게 더욱 부풀어 올랐다.
이성은 마녀를 보며 좆을 세우는 제 아래를 이해하지 못했고, 몸은 저 가느다란 다리를 벌리고 당장에라도 좆을 찔러 넣고 싶어 했다.
“카일…….”
멍하니 티아를 바라보는데 그녀의 입에서 대뜸 제 이름이 새어 나왔다. 놀란 카일이 몸을 흠칫 굳혔다. 혹시 잠에서 깬 건 아닌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카일, 카일 멋대로 제 이름을 읊었다. 그러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카일의 눈동자에 흉흉한 적의가 맴돌았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티아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자 티아의 손목에 박힌 오러가 카일을 견제하듯 결계를 쳐 냈다. 마치 이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듯이.
우스웠다. 제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계집을 지키고 있는 꼴이라니. 그가 속으로 혀를 차며 잠든 그녀를 가까이서 살폈다.
뽀얀 피부와 새초롬한 입술. 허리께까지 찰랑이는 결 좋은 백금발.
‘누가 마녀 아니랄까 봐…….’
예쁘기는 더럽게 예뻤다. 그래서 그런지 심장이 멋대로 쿵쾅거렸다.
‘하여튼 거슬리는 계집.’
오러만 아니었다면 당장 모가지를 비틀었을 텐데.
카일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 순간일까. 감겨 있던 티아의 속눈썹이 나폴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
당황한 그가 몸을 확 뒤로 내뺐다. 그러자 호수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가 카일을 향했다. 잠에서 방금 막 깬 탓인지 눈가에는 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카일?”
살짝 잠긴 목소리로 그녀가 작게 웅얼거렸다.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입술이 오물거렸다.
“카일…….”
“…….”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잠에 취해 비몽사몽 한 듯했다. 카일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자 그와 마주하고 있던 눈매가 보기 좋게 접혀 들어갔다.
“카이일…….”
티아가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대뜸 카일을 향해 두 팔을 뻗는 게 아니던가. 그녀는 순식간에 카일의 목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를 밀어내려던 것도 잠시.
‘오러가……, 나를 밀어내지 않았어.’
왜지?
이번에는 결계가 발동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손도 대지 말라는 듯, 티아를 에우고 있던 결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카일은 미간을 구기고 생각에 잠겼다.
‘단순히 저 마녀가 먼저 몸을 부대껴 와서?’
아니면 마녀를 향한 살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오러가 나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아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카일…….”
아까부터 쉴 새 없이 저를 부르는 티아가 영 거슬렸다. 그래서 카일은 성의 없이 그녀의 부름에 대답했다.
“……왜.”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보고……, 싶었어…….”
“…….”
“완전.”
조그마한 목소리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티아는 카일을 꼭 끌어안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푸흐흐, 푸흐흐,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뭐가 좋은데.”
카일은 제 목을 끌어안고 좋다고 키득거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티아는 제 질문에 으음,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에 잠긴 듯했다.
“네가 무사히 돌아온 거랑……, 꿈속 카일은 예전 카일이랑 그대로인 거…….”
아무래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마녀가 나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 건가.’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결계가 없는 지금이라면…….’
카일은 미련 없이 곧장 티아의 목에 손을 댔다. 그가 목을 붙잡았는데도 여전히 오러는 반응이 없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주면 티아는 죽는다. 바보 같은 그녀는 카일이 제 목을 쥐고 있는데도 실없이 웃기만 한다.
‘힘을 주면…….’
아주 조금, 아주 조금만 줘도 죽는데…….
이상하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답답함에 카일이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왜?
이해 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주려고 해도 손은 벌벌 떨리기만 할 뿐, 제대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지도 못했다.
“씨발…….”
죽여, 그냥. 좀, 죽이라고.
살인을 해 본 적 없는 것도 아니면서, 검짓 하나로 수십 수백 명의 숨통을 끊어 간 적도 허다하면서. 이깟 계집 목숨 하나 못 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티아는 여전히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만 있었다.
“카일…….”
“…….”
“좋아해.”
제 할 말만 뱉은 그녀는 방실방실 웃다, 다시금 졸음이 몰려오는지 꾸벅꾸벅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멋대로 쿵쿵 뛰었고, 아래는 뻐근해졌다. 어느새 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카일은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지 않았다.
다만 믿을 수 없었다.
“……젠장.”
대체 저와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지.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는 결국 티아의 목을 조르지 못했다. 한참 머뭇거리던 손은 다시금 제자리로 거두어졌다. 작게 오물거리는 발간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입 맞추고 싶다.’
저도 모르게 든 생각이었다. 카일은 저가 생각하고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감정인 건지. 분명 자신은 그녀를 싫어해야만 하는데…….
‘싫어해야만 한다고?’
무엇 때문에?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악의를 심어 둔 것 같은 기분.
‘입 맞춰 볼까……?’
그럼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마치 동화 속 공주님과 왕자님 이야기처럼.
카일은 애써 저가 그녀에게 입 맞추는 이유를 찾았다. 절대 마녀 따위가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무언가 찜찜해서 잊고 있는 게 있는 것만 같아서 시험 삼아 해 보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잠든 티아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카일이 천천히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녀와 얼굴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 날뛰어 댔다. 어쩐 일인지 오러 또한 카일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티아의 뺨을 매만졌다. 카일이 먼저 그녀에게 손을 대는 순간까지도, 오러는 잠잠했다. 카일은 살며시 고개를 꺾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아주 가볍게 입술이 잠시 맞닿았다 떨어졌다.
무척 짧은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시뻘게져 있었다.
‘젠장.’
카일은 바보처럼 제 입술을 더듬거렸다. 마치 방금 맞닿은 온기를 다시금 느끼고 싶다는 듯, 아쉬움에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렸다. 그러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낸 건지, 또다시 티아에게 입술을 부볐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카일의 가슴께를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깨기 전에 멈춰야 하는데…….
알면서도 카일은 멈추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입술을 물고 할짝이다, 성에 차지 않았는지 슬며시 잇새를 벌리고 입 안까지 혀를 들이밀었다.
“우응…….”
불편했는지 티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제 입 안을 휘젓는 게 영 거슬린다는 듯 티아가 얼굴을 마구 도리질했다. 그러자 카일이 그녀의 양 뺨을 쥐고, 고개를 가로젓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으…….”
붙잡힌 티아는 미간을 구겼다. 그러다 숨이 찼는지 헥헥대는 소리와 함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잠에서 깬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곧게 눈을 감고 제게 입 맞추는 카일이었다.
티아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을 크게 떴다. 아까처럼 비몽사몽하게 깬 게 아니었다. 이미 확실하게 잠기운을 떨쳐 낸 후였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잠에서 깨지 않으려야 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멋대로 제게 침범해 안을 휘저어 대는 탓에, 도통 잠을 잘 수 없었다.
놀란 티아가 곧장 카일을 밀어냈다. 그러나 카일은 순순히 입술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 카일!”
티아가 버둥거리며 그를 불렀으나, 정작 그는 미동도 없었다. 감겼던 카일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강렬한 적안이 출처 모를 흥분감에 이채를 띠고 있었다. 느른하게 토해지는 그의 숨결이 위험했다. 마치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시선이 음욕으로 가득했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놀란 그녀의 허벅지에 잔뜩 부푼 앞섶이 비벼졌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티아가 카일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츠리며 뒤로 설설 기었다. 그러나 그에게 붙잡히는 건 당연지사였다.
“너 뭐야.”
저가 하고 싶은 말이 카일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티아가 인상을 구겼다.
“뭔데 자꾸…….”
거슬려. 카일은 뒷말을 내뱉지 않았다. 대신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이번엔 단순히 입만 맞추는 게 아니었다. 꽤 다급한 손짓으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슬립을 벗겨 내려갔다. 그녀가 몸을 비틀며 저항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저, 저리 가!”
“싫다면?”
“그럼 오러로……, 오러로 밀어낼 거야.”
티아가 벌벌 떨며 제 손목을 내보였다. 확실히 그녀가 겁에 질리기 시작하자 오러는 다시금 결계를 치려는 듯 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삐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엉망으로 벗겨진 슬립 탓에 어느새 티아의 몸은 속살을 전부 내보이고 있었다. 카일은 그런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훑었다.
“밀어내 봐.”
“……뭐?”
“나도 궁금하네.”
“…….”
“내가 이길지 내 오러가 이길지.”
저열하게 웃어 보인 그는 곧장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제 앞섶을 풀었다. 흥분하여 잔뜩 일어선 핏대가 복근 바로 아래까지 우둘투둘하게 돋아나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카일의 맨몸인지, 당황한 티아가 어버버 입을 벙긋거렸다.
“왜, 안 밀어내고 뭐 해?”
“너, 너…….”
“결계라도 쳐 봐, 응?”
건조한 그의 목소리에 티아의 얼굴만 점점 울상이 되어 갔다. 그러나 뱉었던 말과 달리 정작 티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격하게 저항하지도, 오러로 그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당장에라도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 난 듯한 카일을 마주하고 있자니, 예전의 그가 떠올라서. 그녀는 바보처럼 눈가에 눈물만 그렁그렁 채울 뿐이었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한 번 위아래로 움직이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카일은 심장이 지끈거리는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도대체가…….’
티아가 울든 말든, 그는 잔뜩 부푼 제 귀두를 그녀의 갈라진 살 틈으로 밀어 넣었다. 탁한 액을 흘리던 성기가 질구와 음핵 사이를 왕복하며 움직였다.
“흡, 흐…….”
티아는 카일이 멋대로 저를 안으려는 순간까지도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울음 섞인 신음만 조용히 토할 뿐이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카일의 신경을 거슬렸다.
이렇게 질질 짤 거면 싫다고 악을 쓰면서 저를 밀어내든가.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카, 흑, 카일…….”
그녀가 끅끅 울음을 눌러 삼키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 나, 흑, 나 너 미워.”
그 말에 카일의 한 쪽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흑…….”
“나도 너 안 좋아해, 마녀.”
카일이 무심하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일말의 애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말에 티아의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너만 나 싫어하는 줄 알아?”
“나, 나는…….”
울음 탓에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러나 티아는 더듬거리면서도 꾸역꾸역 말을 뱉었다.
“너, 흑, 너 싫다고 한 적 없어.”
“하…….”
“그냥……, 그냥, 밉다고……, 흑, 밉다고 그런 건데…….”
안 좋아해, 싫어해.
이딴 말을 듣고자 말한 게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한순간에 변해 버린 그가 미워서, 그래서 투정부린 것뿐인데 돌아오는 말은 매섭기 그지없다.
결국 참다못한 티아는 입 밖으로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방 안은 티아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서럽다는 듯 엉엉 울어 대는 그녀가 짜증났는지, 카일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뽀얀 뺨을 타고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때면 속이 울렁거렸다. 당장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질질 짜는 꼴 보기 싫으니까 그 입 닥쳐.”
험한 말과 달리 손짓은 퍽 다정했다. 카일은 저도 모르는 사이 마치 그녀를 달래듯, 물기 가득한 눈가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아차 싶어 재빨리 손을 떼어 냈다.
“망할…….”
그가 손을 떼어 내자 티아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너……, 흑, 정말 후회할 거야.”
“…….”
그녀는 멋대로 카일의 손을 붙잡고 제 뺨에 문댔다. 그러고는 축축이 젖은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 시선에 카일은 아래만 더욱 바짝 올라설 뿐이다.
티아와 가만히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심장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자꾸만 날뛰어서, 그는 짜증 난다는 듯 한껏 부푼 성기를 곧장 티아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풀어지지 않았던 뻑뻑한 질구를 억지로 벌려 젖히고 큼직한 귀두가 단번에 끝까지 밀고 들어갔다.
“아윽…….”
그녀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흘렀다. 그럼에도 카일은 개의치 않아 하며 찔러 넣었던 좆을 빼냈다. 그러고는 다시금 안쪽으로 쑤셔 박았다.
“흡, 아, 아으…….”
많이 괴로운지,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이불을 움켜쥐고 발발 떨었다. 묵직한 것은 티아를 배려하지 않고 왕복하길 반복했다. 꼭 다물려 있던 음순은 카일에 의해 한껏 벌어졌다. 그 사이로 검붉은 것이 자비 없이 들락거렸다.
무식하게 허리를 쳐올리는 탓에 퍽, 퍽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꽤 격했다. 카일은 성의 없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유두를 비틀며 빼냈던 것을 뿌리까지 찔러 넣었다.
“하윽, 으…….”
티아의 신음을 듣던 카일이 인상을 구겼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골반을 붙잡고 허릿짓에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아프면 끙끙 앓지 말고 오러로 밀어내면 될 것을, 대체 무슨 의도로 미련하게 버텨 가며 저를 받아 내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카일은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 더욱 거칠게 굴었다.
흥분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우악스러운 손길로 젖가슴을 주물렀고, 하얗고 보드라운 엉덩이는 일부러 힘을 담아 후려쳤다.
“흡…….”
그러자 조그마한 여체가 파르르 떨며 숨을 들이마셨다. 한껏 긴장한 듯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마치 나무토막처럼 빳빳했다.
‘짜증 나.’
못되게 굴며 일부러 세게 때리고 구멍을 난잡하게 쑤셔 대도, 티아는 그저 묵묵히 버틸 뿐이었다. 더욱 짜증이 치민 카일이 무식하게 그녀를 돌려 눕혔다.
“카, 카일……!”
제 얼굴이 베개에 처박힌 후에야 그녀가 저항다운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흡족해서, 카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오러 안 쓰고 뭐 해, 응? 쓴다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매섭게 떨어졌다. 카일은 티아의 허리를 붙잡고 다시금 거칠게 좆을 찔러 넣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은 움찔움찔 떨어 대며 카일의 것을 삼켰다. 두툼한 손이 엉덩이를 후려칠 때면 찌릿한 통증과 함께 절로 울음이 토해졌다.
“하윽, 흡……, 흐…….”
큼직한 손이 티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러자 베개에 묻혀 있던 얼굴이 억지로 들렸다.
“아으, 흑…….”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침으로 엉망이었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카일에게 붙잡혀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항할 생각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아, 아파……, 흑, 아파…….”
아프면서 왜 오러를 안 써.
카일이 답답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괜히 화풀이하듯 애꿎은 티아의 엉덩이만 때려 댈 뿐이다. 얼마나 맞은 건지 하얬던 살점이 발갛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왜 무식하게 버티고 있냐고.
티아가 발발 떨며 카일을 향해 고개 돌렸다.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훌쩍이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불쌍한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 그가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울음을 참듯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간간히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흑, 아파……, 흑, 그, 그만…….”
버거웠는지 그녀가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 모습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씨발, 그럼 오러를 쓰라고-!”
카일이 윽박지르듯 버럭 소리쳤다. 그는 멋대로 티아를 범하던 제 행동을 멈추고 말했다.
“왜 모지리처럼 버팅기고 있는 건데-!”
그가 거칠게 숨을 토하며 성을 냈다. 티아는 울먹이며 말없이 카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맴돌았다. 방 안에는 훌쩍이는 티아의 울음소리와 씩씩거리는 카일의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왜, 흑, 왜냐니…….”
그 침묵을 깬 건 티아였다.
“카일, 너잖아…….”
그녀의 말에 애써 유지하고 있던 카일의 표정이 잔뜩 망가졌다.
“내, 내가, 흑, 너, 얼마나…….”
조그마한 손이 파르르 떨며 카일의 뺨을 매만졌다.
“보, 보고, 흑, 보고 싶었는데…….”
“웃기지 마.”
“흡…….”
“그딴 사탕발림으로 꼬드겨 이번엔 무슨 짓을 하려고.”
저를 바라보는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카일이 입 안 여린 살을 짓씹어 가며 낯선 감정을 억눌렀다. 티아는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출 줄 몰랐다.
“흑, 흐윽…….”
“…….”
“조, 흑, 좋아해…….”
“씨발…….”
“좋아, 흑, 좋아하니까…….”
카일이 스스로의 머리칼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리며 짜증 난다는 듯 욕을 지껄였다. 제게 사랑 고백이나 하는 마녀를 보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심사가 뒤틀렸다.
이 이상 그녀를 마주하고 있다가는 저가 이상해질 것만 같아서 카일은 곧장 옷을 챙겨 입었다. 등 뒤로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는 애써 울음을 외면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지끈거리고 울렁거렸다. 누군가 가슴을 세게 쥐고 흔드는 것만 같다. 세게 발을 구르며 저택 정원까지 빠져나온 카일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허공에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마녀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고, 마녀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답답했다. 대체 하루아침에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심장이 쿵, 쿵, 날뛰었다.
달빛 아래 한참 홀로 서있던 그는 불현듯 마검이 떠올랐다.
‘마검…….’
마검을 쥐어야 해. 그럼 이 복잡함이 가라앉을 거야.
아무런 근거도 없었으나, 카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허겁지겁 방으로 돌아가 마검을 손에 쥐자 폭풍이 휘몰아치던 머릿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졌다.
마검. 분명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일 텐데……. 카일은 이상하게 제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 * *
카일은 그날 후로도 몇 번 더 나를 찾아왔다. 기억을 잃고 꽤 혼란스러운 건지 어떨 땐 무작정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떨 땐 말을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부모님은 카일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사용인들의 입단속을 시켰다. 혼란스럽긴 그들도 매한가지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제 아들이 북부에 다녀온 후로, 십사 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누나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는데.
“요즘 황태자의 움직임이 영 심상찮습니다.”
“들었다. 확실히……, 수상하더군. 그래, 그 메리드 자작 영애는 별다른 말 없고?”
“없습니다. 그쪽은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흐음…….”
“제까짓 게 발버둥 쳐 봤자 별수 있겠습니까.”
카제프의 집무실에서 하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내게 사랑을 속살거리던 목소리와 사뭇 달랐다. 호기심에 나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말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그나저나 같잖은 장난을 치고 있더군요.”
“누가 말이지?”
“누구겠습니까.”
둘은 무어라 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통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게다가 주변을 의식한 건지,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이제는 거의 희미하게 들릴 듯 말 듯 했다.
‘그런데 하일이 왜 오라버니 집무실에 있지?’
둘이 집무실에서 나눌 대화는 없을 텐데…….
호기심에 몸을 더 가까이 하려는 순간이었다. 놀랄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문이 확 열렸다.
“헉.”
당황한 나머지 입에선 요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을 연 사람은 하일이었다. 그 또한 내가 서 있을 줄 몰랐다는 듯,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이?”
“아, 안녕. 하일…….”
둘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탓에 괜스레 양심이 쿡쿡 찔렸다. 나는 어색하게 그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여기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하일은 방금까지만 해도 카제프와 무언가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내게는 방긋거리며 살가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형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아, 어……, 응. 오라버니 보러 왔어…….”
아니라고 하면 더 이상할 거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카제프에게 용건이 있는 척했다.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들은 카제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왔다.
“티아!”
“오라버니……!”
나는 어색하게 그를 반기는 척 살며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하일의 눈매가 묘하게 가늘어졌다.
“여긴 어쩐 일로 왔느냐.”
그가 다정히 눈매를 휘며,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저를 보러 왔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는 광대까지 올라가 있었다. 언제나 엄격 근엄하기 그지없던 카제프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그답지 않은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그냥요, 생각나서 왔어요.”
생각나서 왔다는 말이 그렇게 좋을까. 카제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카제프가 원래 이렇게 투명했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탓에 속내가 훤히 보이는 듯했다. 원래 내가 알던 카제프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래도 몸을 섞은 사이라고 예전보다 한결 부드럽게 구는 모양이다. 불과 몇 달 전의 카제프는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라도 된 모양새다.
‘완전 낯설어.’
발갛게 상기된 뺨은 사춘기 소년 같기도 하다.
‘이왕 온 김에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갈까?’
내가 잠시 고민하자 카제프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잽싸게 설렁줄을 당겼다.
“티아,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려무나.”
“으음, 네! 좋아요.”
하일은 물끄러미 나와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우리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자연스럽게 카제프의 집무실 소파에 앉자 그도 곁에 다가와 앉았다.
“요즘 카일 때문에 많이 속상하지?”
“아…….”
이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살짝 표정을 구기자 카제프가 아차 싶었는지 곧장 화제를 돌렸다.
“미안하다, 내가 예민한 이야기를 꺼냈구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요즘 별일은 없고?”
문득 황실에서 온 편지가 떠올랐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음……, 없어요.”
“정말?”
“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카제프가 살짝 쓰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날따라 카제프는 내게 말을 많이 걸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루하지 않도록 곧잘 이런저런 시답잖은 말들을 늘어놨다. 일부러 내 기분을 신경 써서 밝은 이야기만 꺼내는 듯했다.
‘오라버니……, 날 신경 써 주고 있구나.’
고마운 마음에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확실히 카제프는 변태인 것만 빼면……, 카일이나 하일에 비해 정상적이었다.
‘다만 변태인 게 꽤 크지.’
나중에 장가 가면 어쩌려고……. 맞는 걸 좋아하는 영애로 알아봐야 하나.
“커흡…….”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차를 마시던 카제프가 갑작스럽게 헛기침을 뱉었다.
“……?”
“크흠, 큼…….”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괘, 괜찮다. 괜찮고말고…….”
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내 눈을 피했다. 나는 하녀가 가져다 준 쿠키를 깨작거리며 집어 먹었다. 우리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티아…….”
카제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나는……, 그…….”
“……?”
“다른 여인과 혼인할 생각이 없다.”
“……네?”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래?
그는 한껏 풀 죽은 모양새로 나와 눈을 맞췄다.
“티아 너는……, 내가 다른 여인과 혼인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냐?”
카제프의 목소리가 점점 개미처럼 작아졌다. 질문하면서도 어딘지 의기소침해 보였다. 나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끔뻑이자 그가 한 번 더 상처받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다른 여인과 혼인하고 싶지 않아.”
“어……, 왜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혼인을 해야 후계도 이을 수 있고, 부모님도 마음 편히 은퇴하실 텐데…….
“티아, 네가 좋으니까.”
그런 내 귓가에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네?”
“네가……, 좋으니까…….”
들고 있던 찻잔을 그대로 떨어트릴 뻔했다. 내 눈은 놀란 토끼처럼 크게 뜨여 있었다.
“……너와 혼인하고 싶어.”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잠깐만요, 오라버니. 혼인이라니! 우리가 법적으로 남매인 건 알고 하는 말인가요? 물론 전에도 나더러 사랑한다든가 평생 곁에 있어 달라든가 좋아한다 따위의 말들을 하긴 했었지만…….
‘단순히 섹스에 심취해서 했던 말 아니었어?’
설마 그게 진심이었다고?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뭐 그런 거야? 오, 세상에. 주여! 대체 왜? 이해가 안 가. 어째서 카제프가 나랑 혼인을…….
“설마 저랑 한 거 때문에 그래요? 책임감 때문에? 여동생이랑 할 거 다 해 놓고 다른 여인을 만날 수 없어, 뭐 그런 죄책감? 저, 저는 정말 괜찮아요. 제가 생각보다 개방적인 사람이라 저도 즐겼고 뭐 네, 뭐,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 말에 카제프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나는…….”
그가 허탈하다는 듯 마른세수했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인과 유희로 몸을 섞을 만큼 가벼운 사내가 아니야.”
교양이고 예법이고 뭐고, 놀란 나머지 입이 떡, 벌어져 버렸다.
아니 이게 지금 무슨…….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테라스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말도 안 돼. 우리 그냥 파트너 아니었어?
“당장 티아 너도 나를 좋아해 달라는 건 아니지만…….”
“……그, 그럼요?”
아니 물론 나도 카제프가 싫은 건 아닌데……, 그래도 혼인은 좀……, 아니지 않나? 카일도 있고 하일도 있고 게다가 우린 남매고…….
총체적 난국이다.
“그냥……, 혹여 내가 다른 여인과 혼인할 거라 오해할까 봐…….”
“…….”
어느새 그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생각이 없다고……, 미리 말을 해 두는 것뿐이니 부담 갖지 말거라.”
이미 부담인데요. 엄청.
나는 바보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저가 말하고도 초조했는지, 카제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흔들렸다.
“……미안하다.”
“…….”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가 깊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여하튼……, 혼인 생각은 없다는 말이야.”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카제프가 작게 무어라 구시렁거렸다.
“……맞는 걸 좋아하는 영애 따위 알아보지 않아도 돼.”
워낙 목소리가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묘하게 내게 섭섭한 눈치였다.
“그, 그러시구나…….”
“…….”
“…….”
방 안은 순식간에 싸한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나는 어색한 나머지 괜스레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물론 갑작스럽긴 했지만 나 또한 카제프가 싫은 건 아니었다.
‘뭐 애당초 저 얼굴에 저 능력인데…….’
싫어할 여자가 드물지 않을까. 아니, 여자가 뭐야. 남자도 꼬실 거 같은데…….
힐끔 카제프를 살피자 얼굴빛이 어두웠다. 그는 어딘지 떨떠름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는 관심 없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어딘지 한껏 풀 죽은 얼굴이었다. 비 쫄딱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
한껏 우울이 묻은 표정이었음에도, 세계관 최고 미남답게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라도 나는 것 같았다. 나는 홀린 듯이 카제프를 바라봤다. 그러자 카제프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나와 시선을 맞췄다.
“티아.”
“네.”
그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이전에도……, 절대 가볍게 분위기에 심취해서 네게 사랑한다든가……, 따위의 말을 뱉었던 게 아니야.”
“…….”
“가벼워 보였다면 미안해.”
아까부터 계속 미안해하는 게 하찮기도, 귀엽기도 해서 입 안 여린 살을 씹어 가며 웃음을 참았다.
“아니에요, 저한테 미안해하실 게 뭐가 있으세요. 저는 괜찮아요.”
“…….”
“…….”
또다, 또. 또 침묵!
어색한 와중에 꼼지락거리는 그의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미남답게 입술마저 그린 듯이 완벽했다. 그 또한 지금 이 상황이 편하지 않은 지 연신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댔다.
‘키스하고 싶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카제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키스할래?”
“네, 네?”
뭐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놀란 나머지 몸을 흠칫 굳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제프는 살짝 내려 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제 얼굴을 가까이했다.
“해도 돼.”
“…….”
“키스 하고 싶으면 해.”
그는 진심인 건지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꽤 긴장한 눈치였다. 당황한 내가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자 카제프가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아……, 혹시 하기 싫어……?”
“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해 줘.”
얄쌍하게 째진 눈매가 긴장으로 옅게 떨렸다. 혹여 내가 거절할까 봐 걱정하는 듯하다. 조각 같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는 카제프라니.
‘이건……, 위험하잖아.’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우물거리는 그의 입술이 탐스러웠다.
그래, 한 번만. 딱 한 번만 하자.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카제프의 입에 가볍게 입술을 문댔다. 그러자 말캉한 촉감과 함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짧게 쪽, 소리를 내며 맞닿았던 입술을 떼어 냈다. 키스라기엔 민망한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티아…….”
짧았던 입맞춤이 카제프의 흥분을 부추기기라도 한 건지, 그가 흥분에 찬 숨결을 토하며 내 양 뺨을 쥐었다. 그러고는 곧장 다시 한번 입술을 부볐다.
“으우…….”
그는 꽤 조급하게 내 잇새를 열고 제 혀를 들이밀었다. 뜨겁고 부드러운 게 입 안을 휘저어 댔다. 질척이는 소리와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오라……, 버니…….”
숨이 찬 나머지 할딱이며 그를 불렀다. 그러자 카제프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자, 잠시만요…….”
어설프게 그를 밀어내자 카제프가 눈썹을 씰룩였다.
“왜?”
“저는 이러려고 온 게…….”
어딘지 끈적해진 분위기는 아슬아슬했다. 게다가 문도 잠기지 않았다. 카제프와 이러고 있다가 혹여 다른 사용인들이라도 들어오면…….
나를 바라보던 카제프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잠시. 달칵이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가 집무실 문을 잠근 것이었다.
“이러면 되나?”
하찮고 자상하던 목소리와 달리 낮게 깔린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설마 또…….’
아씨, 눈 돌아갔네.
카제프가 싫은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대낮부터 온 가족이 다 있는 집에서 이런 짓을 한다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나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어디 가.”
그러자 그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와 나를 붙잡았다.
“나 보러 왔다며.”
“그, 그건 그런데…….”
“왜 벌써 가.”
그거야 그쪽이 헤까닥 돌기 직전이니까요.
아슬아슬해 보이는 카제프의 상태에 입 안이 버썩 말랐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려 하자 귀신같이 눈치챈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빨고 싶어.”
뭐, 뭐를요.
돌아올 대답이 무서워서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카제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쿡쿡거리며 웃었다.
“여기.”
그러더니 손으로 정확하게 내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노골적인 카제프의 행동에 나는 손만 쥐락펴락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은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그, 날도 너무 밝고……, 부모님도 계시고……, 카일, 하일도…….”
엉거주춤하게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다음에……, 밤에…….”
“내가 빠는 것도 안 돼?”
“……네?”
“네 입에 좆 물리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러자 카제프가 내 뺨을 만지작거리며 구시렁거렸다.
“언제는 발정 나서 박아 달라 조르더니, 이제는 카일도 있고 하일도 있으니 나 같은 건 필요 없다 이건가? 응?”
묘하게 심술부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 게 아니라…….”
씻지도 못했고, 너무 환한 대낮이고, 이럴 생각으로 온 것도 아니었고, 속옷도…… 뭐 입었는지 모르겠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카제프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제, 제가 해 드릴게요.”
한 번 하고 나면 잠잠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급하게 그의 앞섶을 풀려 했다. 그러자 카제프가 헛웃음을 흘리며 내 손을 저지했다.
“필요 없어.”
“하지만…….”
그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중얼거렸다.
“난 빨리는 것 보다 빠는 걸 좋아해서.”
듣기 좋은 중저음이 부드럽게도 귓가에 속살거렸다. 그러나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안에 담긴 말은 전혀 부드럽지 못했다. 카제프의 손이 치맛자락을 올리고 속옷을 끌어 내렸다.
“앗…….”
“쉬이, 착하지.”
그에 의해 속옷은 단번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카제프가 얄궂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집무실 소파에 앉혔다.
“벌려.”
나는 싫다는 뜻으로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당장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방 안은 환해도 너무 환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벌리라니. 아무리 나라지만 쉽지 않았다. 상상만 해도 수치스러운 상황에 눈을 질끈 감고 더욱 다리를 오므렸다.
“시, 싫어요…….”
싫다는 말에 카제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저가 싫냐는 듯한 물음을 담고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였기에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오라버니가 싫은 게 아니라…….”
“…….”
“……지금은 너무 밝아요.”
내 말에 카제프는 묘하게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내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큼직한 손이 의도를 명백히 담고 다리를 더듬거렸다. 은근한 손짓에 입에서는 옅은 신음이 흘렀다.
“흣…….”
그러자 카제프가 힘을 주고는 억지로 내 다리를 벌렸다.
“아……! 오라버니, 자, 잠시만……!”
애달픈 외침에도 카제프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저 무심한 듯한 시선이 다리 사이로 꽂힐 뿐이었다.
다리가 벌어진 탓에 꼭 다물려 있던 살도 서서히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조그마한 살점이 빳빳이 부푼 채 모습을 드러냈다. 구멍에서 흐른 애액으로 음부는 번들거리고 있었다.
불을 밝히지 않아도 환한 대낮이니, 속살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제프에게 보이고 있을 것이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네 양 옆을 차지할 수 없다면…….”
카제프가 내 음부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무어라 읊조렸다.
“흣…….”
“밑에서 보지라도 빨게 해 줘. 티아야…….”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가 양손으로 음순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속절없이 노출 된 음핵을 혀끝으로 짓누르며 핥아 올렸다.
“하윽……!”
아래에서 찌릿하게 타고 올라오는 쾌감에 나도 모르게 카제프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러자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더욱 빠르게 아래를 핥아 댔다.
“흐으, 응, 읏…….”
입술로 봉긋 솟은 살점을 빨아들이고 뭉개고 비벼 대며 혀끝은 연신 질구와 음핵 사이를 왕복했다. 절로 발끝이 곱아들고 시야가 점멸했다.
“아……, 흡, 오라버니이…….”
끙끙 앓는 신음을 흘리며 버둥거리자 그가 살짝 음핵을 깨물었다. 순간 허리가 들썩이며 구멍에선 애액이 왈칵 흘러내렸다.
“가, 간지러……, 흣.”
귀족 영식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언제나 고고하고 완벽했던 카제프가 한껏 욕망에 잠식된 얼굴로 여동생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음부를 빨아 댄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장면이었다.
맑고 푸른 카제프의 눈에는 나를 향한 정염이 가득 차 있었다.
“하으…….”
혀끝이 빙글빙글 돌며 음핵을 괴롭혔다. 집요한 행동에 나는 발발 떨며 그의 머리칼만 쥐어뜯을 뿐이었다. 질척이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게걸스럽게 아래를 빨아 대던 카제프가 손끝으로 질구를 더듬거렸다. 그러더니 머지않아 구멍을 비집고 손가락 하나가 찔러 들어왔다.
“읏……!”
아래가 녹아 버릴 것만 같은 쾌감에 눈물이 찔끔 흘렀다. 그러자 카제프가 야살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오롯이 내 여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 그게……, 흡, 무슨…….”
“이 구멍에 들락거리는 좆이 내 좆 하나였으면 좋겠다는 말이야.”
그가 혀를 차며 난잡하게 내벽을 쑤셔 댔다. 체격 차이 탓에 손가락도 꽤 두꺼웠다. 찔꺽이는 소리와 함께 카제프의 손이 안을 마구 휘저어 댔다.
“흐읏, 흐, 사, 살살…….”
최근에 카일이 꽤 거칠게 삽입한 탓에 아래가 따가웠다.
“아윽…….”
입에서는 고통 섞인 신음이 흘렀다. 그러자 카제프가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아, 아파요…….”
정말 아래가 아팠다. 물론 좋기도 좋았지만 통증이 조금 더 컸다. 내가 엉거주춤하게 카제프의 손을 밀어내자 그가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고작 손가락 하나에 아파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카제프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프다고……?”
그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제프가 곧장 손을 빼냈다. 투명한 애액이 실처럼 늘어지다 끊어졌다. 그는 한껏 인상을 구기고 입술을 짓씹었다.
“왜……?”
어째서 아픈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확실히 고작 손가락 하나에 아파하는 건 이상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카제프와 눈이 마주하자 머릿속엔 절로 카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카제프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굳었다.
“설마 카일이…….”
“…….”
내가 시선을 피하자 카제프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흉흉한 눈으로 말없이 내 속옷을 다시금 입혀 줄 뿐이었다.
“오라버니…….”
“…….”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 그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봤다.
“내가 안 괜찮다면?”
“……네?”
내 옷매무시를 정돈해 준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인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어디론가 향했다.
‘……설마!’
나는 그가 향하는 곳이 카일의 방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
헐레벌떡 그를 쫓아가 말리려 했다. 그러나 카제프는 완강했다. 그는 기어코 카일의 방으로 향했다.
* * *
방문 앞에 선 카제프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쾅, 하는 굉음과 동시에 거대한 나무문이 덜렁거렸다.
“어라, 형님?”
태평하게 침대에 누워 있던 카일은 갑작스러운 소동에 상체를 일으켰다.
“어쩐 일이야?”
카제프를 향해 살갑게 말을 건넸다가 뒤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곧장 표정을 구긴다.
“저 떨거지까지 데리…….”
카일이 말을 모두 마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카제프의 주먹이 곧장 카일의 얼굴로 향했다. 당황하여 주춤하던 카일은 능숙하게 주먹을 피해 냈다. 그러고는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물었다.
“형, 지금 갑자기 뭐 하자는 거야?”
7살짜리 애들도 아니고 설마 싸우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카일이 뒷말을 삼켰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난데없이 제 방에 찾아온 카제프의 의중을 살피려는 듯했다.
“너, 티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카제프의 목소리가 적의로 서늘했다. 그가 나를 언급하자 카일이 표정을 한껏 구겼다.
“하, 저 마녀가 이번엔 형님을 홀렸나 보지?”
이전과 달리 카일은 순순히 카제프에게 맞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 말릴 필요가 있어 보여서, 나는 급하게 카제프를 말렸다.
“오라버니! 그러지 마세요!”
그러자 카제프가 안 그래도 굳었던 인상을 더욱 굳혔다. 저를 왜 말리냐는 듯 원망 섞인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왜, 카일이 다칠까 봐 걱정돼서?”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걱정되는 건 오라버니 쪽인데…….
이해할 수 없다. 카제프 스스로도 저가 카일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째서 답지 않은 오기를 부리는 건지…….
되려 오라버니가 걱정된다는 말 따위를 했다간, 괜히 그의 자존심만 상할 것 같아서 나는 말을 잇지 않았다. 카제프는 내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금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카일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다짜고짜 찾아와 때리는 사람한테 맞아 줄 생각 없어. 그게 아무리 형님이래도.”
그러거나 말거나 카제프는 고민 없이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카일이 예상했다는 듯, 혀를 차며 손쉽게 주먹을 막아 냈다.
“하지만 형님과 주먹다짐 하며 싸울 생각도 없으니…….”
그의 시선이 서서히 내게로 향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적안이 올곧게 나를 응시했다.
“오늘에야말로 원흉을 없애야겠군.”
그가 말하는 원흉이 나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언제는 사랑한다더니, 이제는 나더러 원흉이라 책망한다.
나는 무어라 반박할 의지도, 기운도 없었다. 지금의 카일을 마주하고 있자니 온몸의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여러모로 최악이다. 진짜.
카일은 정말로 나를 없애겠다는 건지 곧장 근처에 놓여 있던 마검을 집어 들었다. 뭐 기적처럼 기억을 되찾거나 정신을 차릴 거라고는 기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틀렸다.
마검을 집어들 걸 예상했던 나와 달리, 카제프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하여 소리쳤다.
“카일, 너 지금……, 미친 거냐?”
위협적인 카일의 기세에 카제프가 곧장 나를 제 뒤로 숨겼다.
이 상황. 기시감이 든다. 이미 한 번 겪은 적 있던 상황과 굉장히 흡사했다.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문득 이대로 예전의 카일은 영영 볼 수 없는 건가. 따위의 걱정이 들었다. 불쾌함에 속이 울렁거렸다.
‘뭐가 됐든 짜증 나…….’
고개가 절로 떨궈졌다. 왜인지 내가 죄인이 된 것만 같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나만 부정당하고 있는 꼴이라니.
“정신 차려-! 네 누이, 티아 아르젠트다!”
카제프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카일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씨발, 우리한테 누이 같은 게 어디 있어. 그런 거 없었다고.”
“카일-!”
“다들 마녀한테 속아 넘어간 모양인데…….”
말을 잇던 그가 비뚜름히 고개를 젖혔다. 카일은 제법 삐딱한 자세로 나를 훑었다.
“난 안 속아.”
“너야말로 그 빌어먹을 마검인지 뭔지 주운 후로…….”
“비켜.”
카일은 카제프의 말을 끊어 냈다. 그러자 불쾌했는지 카제프가 답지 않게 욕설을 읊조렸다.
“이 새끼가…….”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이 쥔 마검은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내게 겨눠졌다.
“형님까지 벨 생각 없으니까.”
“적당히 해, 카일.”
“형님이야말로 적당히 감싸고돌아.”
카일이 위협적으로 카제프를 밀어냈다. 근력의 차이인 건지, 체격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카제프가 주춤하며 밀려났다. 그 순간이었다. 카일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내게 검을 휘둘렀다.
“아……!”
나를 죽이려는 카일과 나를 지키려는 카일의 오러.
내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자, 카일의 오러는 기다렸다는 듯 기운을 내뿜으며 나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오러보다 카제프의 외침이 더 빨랐다.
“티아-!”
내 오러 결계의 존재를 모르는 카제프는 온 힘을 다해 카일을 말렸다.
“티아! 당장 자리를 피해-! 어머니께 가거라!”
카일이 어머니 앞에서조차 내게 이렇게 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건지, 카제프가 다급히 외쳤다.
“어서!”
카일은 저를 말리는 카제프를 팽개치고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티아-!”
정신없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현기증이 몰려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내게 검을 휘두르는 카일의 손짓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서, 그게 그렇게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카일…….”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와 달리 카일은 여전히 서늘하기만 하다.
“티아-! 안 돼-!”
카일의 검이 내게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내 들려올 보호막과 마검의 마찰음을 기다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이쯤 됐으면, 카일이 휘두른 마검과 보호막이 맞부딪혀 큰 굉음을 내야 할 텐데…….
의아함에 힐끔 한쪽 눈을 뜨자,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건 당연하게 나를 지켜 줄 거라 생각했던 붉은 오러가 아닌 난생처음 보는 웬 푸른 기운이었다.
‘이게……, 뭐야……?’
이건 카일의 오러가 아니야. 내 힘도 아니고……. 대체 이건……, 뭐지……?
푸른 기운은 마치 카일의 오러와 비슷한 힘이었다.
‘하지만 서대륙에 오러가 있는 사람은 카일뿐일 텐데……?’
따뜻한 카일의 힘과 달리 내 몸을 감싼 푸른 기운은 살짝 서늘했다. 이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힘이었다. 심지어 원작에서조차 언급된 적 없는 낯선 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건 카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카일의 마검 끝은 푸른 기운에 의해 붙잡혀 있었다.
“대체 무슨……!”
저를 제외한 다른 이가 오러 비슷한 힘을 사용할 줄 몰랐는지, 카일은 표정을 굳히고 어버버, 어버버 바보처럼 허둥댔다. 카일이 이도저도 못하는 틈을 타 카제프는 곧장 내게 다가왔다.
“티아, 티아야, 티아. 괜찮니? 응?”
그의 목소리가 파리하게 떨렸다. 괜찮냐고 물어보면서도 눈동자가 다급하게 내 몸 곳곳을 훑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한들, 카일이 이렇게까지 적의를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걸까. 카제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티아야.”
오히려 나보다 오라버니가 더 안 괜찮아 보이는데…….
나는 엉거주춤하게 카제프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단단한 팔뚝이 나를 더욱 제 품 안에 가뒀다. 그제야 푸른 기운의 주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힘의 주인은 카제프였다.
카제프의 품 안에 안겨 있자 살짝 서늘한 기운과 함께 나를 지킨 푸른 기운이 그의 몸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카제프의 오러라기에는 쉽게 믿겨지지 않았다. 오러는 소드 마스터 경지에 다다른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으니까.
카제프의 검술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소드 마스터까지는 아니다. 서대륙에 소드 마스터는 카일이 유일했다.
“형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카일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붙잡힌 제 마검을 빼내려 하며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오러만 있었어도, 이까짓 거 당장 빼낼 수 있는데…….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현재 오러가 없는 평범한 소드 마스터에 불과한 카일은 푸른 기운에 붙잡힌 마검을 빼내지도 못한 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티아,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카제프가 내 몸 곳곳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푸른 기운 덕분에 카일은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덕분에 조금 놀라기만 했을 뿐, 다친 곳은커녕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카제프가 걱정스러웠다. 그런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건지 카제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라버니…….”
카제프가 엉망이 된 내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며 정돈했다.
그의 몸을 감싼 푸른 기운 때문일까. 내게 닿는 카제프의 손끝마저 평소보다 유독 차가웠다. 결국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이거……, 이거 뭐예요? 설마 오러……?”
그러자 카제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대체…….’
나를 달래던 카제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카일에게 다가갔다. 카일은 가까워지는 카제프를 보며 이죽였다.
“하……, 형님. 언제부터 이런 힘을 숨겨 뒀어?”
카일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비아냥댔다. 그는 실없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카제프를 향해 말했다.
“꿈에도 몰랐네. 형님께서 마법사일 줄은.”
카일의 말에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카제프가……, 마법사라고?’
카일의 말에 카제프는 부정도 긍정도 않았다. 사실상 긍정이나 다름없는 침묵이었다.
마법사라면 세상에 몇 남지 않은 존재였다. 그마저도 타고난 마력과 전문 교육을 받아야만 제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 카제프는 마법을 위한 전문 교육 따위 받은 적 없다.
믿을 수 없었다.
마법사는 그 수가 워낙 적어 황궁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마법사 명단까지 있을 정도였다. 만약 카제프가 정말 마법사라면, 원작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카일도 여태 모르던 눈치야.’
그렇다면 숨긴 건가? 마법사라는 걸? 어째서?
그러나 카제프는 우리의 호기심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제 마력을 갈무리하지 않고 내뿜으며 카일을 위협할 뿐이었다.
“한 번만 더 티아에게 검을 겨눈다면…….”
“…….”
“그때는 더 이상 너를 내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하.”
카일이 후, 하고 숨을 뱉었다. 그러자 그의 앞머리가 팔랑 흔들렸다.
“마녀에게 홀린 주제에…….”
“너야말로, 고작 마검에 휘둘려 티아를 잊을 줄은 몰랐다.”
“헛소리.”
“약속해. 더 이상 티아에게 이런 식으로 굴지 않겠다고.”
카제프의 말에 카일은 진절머린 난다는 듯 욕을 짓씹었다.
“형님, 너무한 거 아니야? 지금 근본 모를 년이 나보다 중요해?”
공격적인 카일의 말에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카제프가 마력을 내뿜었다.
“윽……!”
푸른 기운은 순식간에 카일의 팔 다리를 결박시켰고, 카제프는 온 힘을 다해 결박된 카일을 후려쳤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카일의 얼굴이 돌아갔다. 평소의 그였다면 쉽게 피하고도 남을 주먹질이었으나, 저를 결박시킨 마력 탓에 피할 수도 없었다.
입술이 터지면서 피가 살짝 흘렀다. 카일이 퉤,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 냈다.
“입 조심해.”
“…….”
“아무리 마검 때문이라 한들, 네가 이 이상 티아에게 위협적으로 구는 거 봐줄 생각 없다.”
카제프는 한 번 더 주먹을 쥐고 카일의 얼굴을 향해 내질렀다. 다시 한번 거북한 마찰음이 방안에 울렸다.
“큭…….”
카일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렀다. 방금까지 내게 적대감을 보이며 검을 겨누던 놈인데, 그런 와중에도 피 흘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걱정스러웠다.
‘나 너무 바보 같아…….’
속상하다는 듯 마른세수 하자 카제프가 입을 열었다.
“티아에게 상처 주지 마.”
“…….”
“어떤 식으로든.”
카일은 이 상황이 언짢았는지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나도 카일, 너와 진심으로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말을 마친 카제프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부축하듯 감싸 안았다.
“지키기로 약속했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가 아리송한 말을 카일에게 던졌다.
“……두 번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게슴츠레한 눈으로 카일을 훑던 카제프는 이내 내 허리를 끌어안고 조심히 방을 빠져나왔다.
* * *
“티아, 괜찮니?”
카일의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카제프는 허겁지겁 나를 살폈다.
“내가, 내가 미안해.”
“아니에요! 오라버니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카일이 그렇게까지 적대적으로 굴 줄은 몰랐다.”
카제프가 다시 한번 나를 제 품 안에 가뒀다. 그러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었다.
“많이……, 놀랐지.”
오히려 놀란 건 나보다 카제프인 것 같은데, 그는 애써 티 내지 않으며 나를 달래기 위해 열심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괜히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웃어 보이며 태연한 척 말했다. 그러자 카제프가 인상을 구겼다.
우리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맴돌았다.
나를 끌어안은 카제프의 손에 힘이 더욱 바짝 들어간다. 그러더니 그가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웅얼거렸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
“티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니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상히도 귓가에 내려앉았다.
“언제든지 힘든 일이 있으면……, 털어 놔. 응? 혼자 앓지 말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제프가 싱긋 웃었다.
걱정 받는 기분. 좋다…….
그의 허리춤을 더욱 끌어안으며 가슴팍에 뺨을 부볐다. 그러자 큼직한 손이 나를 토닥이는 게 느껴진다.
“지켜 줄게.”
“…….”
“카일이……, 저렇게 됐어도 내가 지켜 줄게.”
“감사해요.”
카제프의 입술이 가볍게 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는 속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우울한 분위기가 싫어서 괜스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오라버니. 마법사셨다니, 전혀 몰랐어요.”
“…….”
“왜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
내가 푸흐흐 웃으며 가볍게 말하자 카제프가 옅은 미소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위험하니까.”
“네?”
위험하다니? 왜? 마법사인 걸 밝히면 황실에서 막대한 지원금을 받으며 지금보다 더 승승장구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카제프는 끝끝내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은 모르게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말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하물며 부모님께도.
* * *
이자키엘은 거만하게 앉아 시종이 건넨 서류를 훑었다. 그가 짜증에 찬 손길로 책상을 툭, 툭 두들겼다.
“그래서 그것들이 뭐 단체로 붙어먹기라도 한다는 건가.”
이자키엘이 고개를 비뚜름히 젖히며 말했다. 그러자 서류를 가져온 시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눈치를 살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곧 명확한 증거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곧? 그게 언제지?”
“…….”
그의 눈이 매섭게 시종에게 꽂혔다. 그러자 시종은 숨을 헉 들이마시며 죄송하다는 말만 읊조렸다.
“확실한 정보 맞나?”
“……거의 확실합니다.”
“근거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시종이 아주 은밀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심어 둔 하녀의 말로는, 아르젠트 영애의 침실에 영식들의 출입이 잦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자키엘이 실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겨우 그 정도로 내게 거의 확실하다 말한 건가?”
“아, 아닙니다! 그리고 새벽에 신음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시종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카일 아르젠트가 북부에 간 사이, 남은 형제들의 침실 출입이 잦았고, 밤에는 신음 소리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확실한 정보입니다.”
“흐음…….”
“그리고 가만 생각해 보면 그간 사교계에서도 양녀 하나를 유난스럽게 감싸고돌던 게 영 미심쩍습니다.”
확실히 시종의 말대로 형제들은 알게 모르게 티아를 많이 챙기곤 했다. 언젠가 카일 앞에서 티아에 관한 성적 농담을 던졌다가 얼굴이 완전 박살 난 영식도 있었다. 일반적인 남매 사이에서 보일 반응이라기에는 상당히 과한 편이었다.
이자키엘이 무심하게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느른한 한숨을 뱉었다.
“확실한 정보라고 하니, 내 직접 사람을 하나 붙여 주지.”
그의 말에 시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태자가 붙여 주는 사람이라면 어쭙잖은 자객이나 용병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일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은신 하나는 꽤 뛰어난 녀석이다. 그 잘난 카일 아르젠트도 쉽게 기척을 느끼지 못할 게야.”
안 그래도 기척에 예민한 카일 탓에 뒷조사가 영 쉽지 않던 차였다. 그런데 그런 카일조차 쉽게 기척을 느끼지 못할 실력자를 붙여 주겠다니. 단번에 시종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빠른 시일 내에 만족하실 만한 정보를 전달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자키엘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래, 빠른 시일 내에 가져오는 게 좋을 거다.”
건조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시종을 향했다. 시종은 마른침을 삼키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전하!”
* * *
‘폐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라버니께서 반역이라니요!’
‘황후,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건가. 본디 황법대로라면 그대까지 처벌받아야 마땅하거늘. 내 자비를 베풀어 그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오라버니도, 카일도 단 한 번도 황실에 해가 되는 일은 한 적이…….’
‘쯧, 누가 출신 모를 계집 아니랄까 봐…….’
뭐지……, 이건 꿈인가? 황후? 황후라니. 내가? 이상하다, 난 황태자비도 되지 못했는데…….
‘누이,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전부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누이께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끼니 잘 챙겨 드시고, 당분간 폐하의 눈에 띄지 마시고…….’
‘카일은? 오라버니는? 제발, 제발 솔직하게 말해 줘. 지금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지금 이게 전부 무슨 대화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
‘정말……, 오라버니께서 정말 반역을 일으키시려 한 거야?’
반역이라니. 말도 안 돼. 카제프가?
‘하일……, 제발 말 좀 해 줘. 나, 나 더 이상 궁에 있고 싶지 않아. 제발…….’
‘누이, 조금만 기다리시면 저희가…….’
‘이자키엘은 매일 나더러 출신 모를 천박한 년이라고 화를 내. 내가 카일과 오라버니에 대해 물으면 뺨이라도 때릴 기세야. 무서워. 옛날 같지 않아. 돌아가고 싶어.’
‘…….’
‘우리 다 같이 도망치자. 응? 타국으로 가서 쥐 죽은 듯이 숨어 살자.’
분명 내 목소리가 맞는데……, 대체 언제 이런 대화를 나눈 거지……?
“……이.”
머리가 지끈거려. 꿈인가? 꿈인데 이렇게 어지러울 수가 있나?
“……누이.”
하일? 하일이야? 하일. 반역이라니 지금 이게 전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누이!”
“허억……!”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드는 게 느껴졌다. 순간 눈이 번쩍 뜨이며 익숙한 침대 캐노피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한동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익숙한 중저음이 한 번 더 나를 불렀다.
“누이, 괜찮으십니까?”
“하일……?”
잇새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망함에 헛기침을 두어 번 했더니 목이 따끔거렸다.
“열이 많이 납니다.”
“열……?”
그러고 보니 머리가 어지러워. 열 때문이었던 건가?
온몸은 방망이질 당한 것처럼 욱신거렸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분명 자기 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요즘 감기가 유행이라더니, 나까지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하일한테 옮으면 안 되는데…….’
졸음이 묻은 눈가를 비비며 주변을 살피자 하일뿐만 아니라 카제프도 시야에 들어왔다.
“어……, 오라버니?”
“티아, 괜찮니?”
그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내 이마의 물수건을 갈아 주었다. 하녀들이나 할 법한 시중을 후계자인 카제프가 들다니. 당황한 나머지 나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카제프는 완강했다.
“열이 심하구나.”
정신이 몽롱한 탓에 살짝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자 카제프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며 내 뺨을 더듬거렸다. 그의 마나 때문인지, 맞닿은 손이 차가웠다.
‘시원하다…….’
그런데 방금 그 꿈은 뭐였지……? 정말 그냥 단순히 꿈일 뿐인 건가……?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어.
‘마치 그날의 감정이 곧 바로 복받쳐 올라올 것처럼…….’
힐끔 하일을 바라보자 그가 조심스럽게 내 손바닥을 주물거렸다.
“하일…….”
“네, 누이. 부르셨습니까.”
“나 이상한 꿈 꿨어.”
문득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털어놓고만 싶어졌다. 그래서 아픈 와중에도 연신 입을 놀렸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숨을 헐떡이시길래, 좋지 못한 꿈을 꾸신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악몽……. 이것도 악몽인 건가? 카제프와 카일이 반역자로 몰린 꿈. 그래, 악몽 맞네.
내가 실없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일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해 보라는 듯 내게 시선을 던졌다.
“무슨 꿈을 꾸셨길래 그러십니까.”
카제프도 호기심이 동한 건지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카일과 오라버니가 반역자로 몰린 꿈.”
이렇게 말하고 보니 개꿈 같네. 뒷말을 삼키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나 개꿈으로 치부하고 웃는 나와 달리 하일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 그리고 내가 무려 황후였어.”
“…….”
“그래서 카일이랑 오라버니는 결백하다고 막, 황제한테 말하는데 황제가 나더러 출신 모를 천박한 계집이라고 했나?”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하일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카제프 또한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완전 황당한 꿈이지?”
민망한 나머지 헤헤, 웃으며 말을 마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일도 카제프도 아무런 대답 없이 서로 당황스럽다는 듯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뭐야, 이 분위기…….’
왜 이래? 어색함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하일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 외에…….”
“응?”
“외에 다른 내용은 없었습니까?”
답지 않게 하일의 목소리에 긴장이 잔뜩 묻어 나왔다.
“어……, 응. 없었어. 왜?”
낯선 모습에 내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하일은 잠시 제 미간을 문질렀다. 카제프 또한 얼굴에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방 안에는 이상한 공기가 흘렀다.
한참의 침묵 끝에야 하일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이.”
“응?”
뭐야, 그 반응.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꿈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 티아야. 꿈은 꿈일 뿐이니까…….”
“몸이 허하셨던 모양입니다. 이리 감기도 걸리시고, 헛꿈까지 꾸시니 말입니다.”
하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굳어졌던 표정을 지우고 산뜻한 미소를 그렸다.
“당분간 몸에 좋다는 것들을 달여 드려야겠습니다.”
“그거 좋구나. 삼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야.”
카제프까지 맞장구치며 빠르게 화제를 전환시켰다. 어딘지 작위적인 대화에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둘은 마치 내가 더 이상 꿈을 떠올리길 바라지 않는다는 듯, 분주히 곁에서 내 수발을 들었다.
해열제를 먹자 다시금 잠이 몰려왔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 * *
환절기인 탓일까. 감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영 몸이 나아지질 않았다.
“콜록, 콜록…….”
내가 골골대는 탓에, 카제프와 하일은 밤낮 가리지 않고 나를 간호하기 바빴다.
“아, 죽겠다…….”
“약은 드셨습니까?”
“응, 먹었어. 요즘 감기 독하네…….”
멍한 상태로 이불에 몸을 파묻은 채 중얼거리자 하일이 걱정을 거두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안 그래도 수도에 독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해서 그런가 봐…….”
곁에 앉아 하일이 건네는 과일을 받아먹던 나는 몰려오는 졸음에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이.”
“으응…….”
“혹시……, 그날 후로 비슷한 꿈을 또 꾸시진 않으셨는지요.”
꿈? 되물으려다가 그가 말하는 게 이전의 터무니없던 반역과 관련된 꿈이라는 걸 깨닫고 실없이 웃었다.
“응, 꾼 적 없어. 그때 그 반역 꿈 말하는 거지?”
“예, 아무래도 찜찜한 꿈이니……, 혹시 누이께서 기분 상해하실까 봐 걱정됐습니다.”
하일이 퍽 다정한 손길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꾸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하일.”
“누이와 관련된 일인데 신경 쓰는 게 당연합니다.”
조곤조곤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니 기분 좋았다.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속살거리던 하일이 한숨 자라는 듯 나를 토닥였다. 그의 손길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머지않아 잠에 들 수 있었다.
‘누이.’
응? 하일?
‘선택하세요. 마지막……, 입니다.’
뭐야, 갑자기?
당황한 나머지 뭐가 마지막이냐는 거냐며 묻고 싶었으나, 말이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 저희는…….’
‘…….’
‘누이께서 황궁에 남아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타국에 자리 잡은 후 모시러 올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요. 애당초 황제의 목적은 저희기도 하고 괜히 함께 도망치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이게 다 무슨 말이야? 황제의 목적이라니?
‘싫어. 절대 싫어. 황궁에 남지 않을 거야. 너희와 함께 갈 거야.’
의지와 달리 내 입은 멋대로 하일에게 대답했다. 멋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전에 한 번 꿨던 꿈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비슷한 게 아니라 상황이 이어지는 것 같기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황궁에 남으신다면 조금 더 안전하게…….’
‘싫어,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도 데려가 달라고! 왜 자꾸 나를 혼자 두고 가려는 거야?’
‘……위험할까 봐 그렇습니다. 곧장 황실에서 추적할 겁니다. 그러다 붙잡히기라도 하면 그땐 누이께서도 처형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어……. 상관없다구…….’
울먹이며 읊조리는 목소리가 처연했다. 하일은 한참 동안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그럼 오늘 밤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감겼던 눈이 떠졌다. 그러자 역시나 또 시야에 들어오는 건 익숙한 침대 캐노피와 천장이다.
‘또 비슷한 꿈…….’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곁에서 잠든 하일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나를 챙기다 잠에 든 건지 이마에 놓인 물수건이 아직 차가웠다. 멍하니 그를 보다 나도 모르게 잠든 하일의 머리칼로 손을 뻗었다. 결 좋은 흑발이 손 틈 사이사이로 파고들며 나를 간지럽혔다.
‘잘 자네…….’
단정한 머리칼과 긴 속눈썹. 그리고 반듯한 콧대까지. 새삼 곱상하니 인물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뺨을 쿡쿡 찌르자 말랑한 볼살이 보기 좋게 파여 들어갔다.
‘보통 남자들은 그 나이쯤 되면 얼굴에 기름도 끼고 피부도 안 좋아지던데…….’
하일에게는 마치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수염 자국 하나 없이 뽀송한 피부가 신기해서 몇 번 주물거렸더니 그의 미간이 좁아든다.
“으으, 누이……?”
인기척에 예민한 카일과 달리 하일은 이제야 내 손길을 느낀 건지 눈가를 비비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깨셨습니까……?”
방금 막 일어난 탓에 푹 잠긴 목소리가 은근히 색스러웠다.
“응, 또 이상한 꿈 꿔서.”
꿈 이야기를 뱉자, 졸려 보이던 하일의 눈에 또렷한 초점이 생겼다. 그는 마치 무슨 꿈을 꿨는지 말해 달라는 듯 나를 바라봤고 나는 별다른 의구심 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타국으로 도망치려는 꿈이었어.”
내 말에 하일의 표정에 미세한 실금이 그어졌다.
“우리가 반역자로 몰려서 도망가는 거 같더라고. 이번에도 완전 헛꿈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반역이라니. 개꿈도 이런 개꿈이 없다. 하지만 이전의 꿈과 이어지는 듯한 내용. 그건 확실히 신기했다. 하일은 별다른 대답 없이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민망해진 나머지 힐끔 그를 살피자 어딘지 어두운 얼굴로 한껏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응?”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하일이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며 내 뺨을 매만졌다.
“……누이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순간 나는 그의 말에서 의구심을 느꼈다.
‘지난 일이라니?’
바보처럼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봤다. 하일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의 손끝이 어설프게 침대 시트를 매만지다 서서히 내 손으로 다가왔다. 머지않아 따뜻한 온기로 가득한 손이 깍지 끼우며 나를 붙잡았다.
나와 하일의 손이 뒤엉켰다. 그는 어딘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띤 채, 나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누이.”
“……응.”
“저희에게는 누이밖에 없습니다.”
“…….”
“예나 지금이나요.”
아까부터 묘하게 흘러가는 대화에 호기심이 동해 입이 근질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호기심은 기어코 입 밖으로 뱉어졌다.
“아까부터 말이 조금 이상해, 하일.”
하일은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그저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맞잡은 손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냥…….”
“…….”
“그냥 누이가 좋다는 말입니다.”
그는 실없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쪽쪽거리며 맞잡은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기분 좋은 숨소리를 뱉었다.
“한숨 더 주무세요. 아직 새벽입니다.”
“응……, 하일 너도 네 방에 가서 편하게 자.”
“아닙니다. 혹시 또 열이 오를지 모르니…….”
“아냐, 나 이제 거의 나았는걸?”
“그래도 안 됩니다.”
하일이 건네는 미지근한 물을 마시자 다시금 몸이 노곤해졌다. 걱정이 가득 담긴 시선을 마지막으로 다시금 잠에 빠졌다.
* * *
“형님.”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그곳엔 하일이 서 있었다. 카제프는 고개를 까딱이며 들어오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누이께서 또 그 꿈을 꾸신 것 같습니다.”
꿈이 언급되자 카제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리고 낯빛이 어두운 건 하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꿈이라면…….”
입술을 달싹이던 카제프가 작게 읊조렸다.
“회귀 전을 말하는 건가.”
그러자 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꿈으로 치부하기엔 과거와 너무 비슷합니다.”
“…….”
카제프의 손끝이 톡, 톡, 책상을 두들겼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우리 중 과거를 기억하는 건 하일 너뿐이니까.”
처음에는 영 못미더워하던 카제프도 모든 사건의 흐름이 하일의 말대로 흘러가는 걸 보며,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근래 들어 티아가 꾸는 꿈들만 해도 일전에 하일에게 들었던 과거와 내용이 너무나 흡사했다.
황후가 된 티아. 반역자로 몰린 저와 카일. 그리고 함께 타국으로 도망치는 것까지.
‘우연의 일치라고 넘겨짚기에는 확실히 이상하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카제프가 하일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차라리 티아에게 전부 털어놓는 건…….”
“안 됩니다.”
카제프의 말에 하일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곧장 말을 잘라 냈다.
“대가 없는 회귀는 없습니다.”
“…….”
“만약 누이께서 회귀 사실에 대해 알아차리시고 정보를 찾기 시작하신다면 대가에 대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하일이 무덤덤하게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런 그와 달리 카제프는 어딘지 떨떠름해 보였다.
그들 중 유일하게 하일만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
대가를 지불하고 회귀를 시전해 낸 이가 ‘하일 아르젠트’ 그였기에.
‘대체 무엇을 대가로 지불했길래…….’
하일은 카제프와 카일에게 전생에 대해 곧잘 털어놓고 계획을 공유하면서도 절대로 저가 바친 대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와 반쪽이나 다름없는 카일조차 하일이 무엇을 대가로 바쳤는지 모른다고 한다.
하일은 이상하리만큼 그 누구도 저가 대가로 바친 것을 모르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럴 때 카일이라도 빨리 기억을 되찾으면 좋을 텐데.’
쯧, 카제프가 혀를 차며 티아를 향해 검을 겨누던 카일을 떠올렸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자꾸만 과거의 꿈을 꾸는 티아도, 티아의 존재를 까무룩 잊어버린 카일도.
물끄러미 하일을 보던 카제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일.”
“예.”
“굳이 꼭 황태자를…….”
말을 잇던 그는 서늘하게 식은 하일의 눈을 보고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니다. 실언했다.”
“…….”
“그래, 아무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하일은 가만히 서서 매서운 눈으로 카제프를 바라봤다. 언제나 유하기 그지없던 푸른 눈동자가 살의로 가득했다.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서늘하게 깔린 목소리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토해 냈다. 그런 하일의 모습에 미안하다 말하려던 카제프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침묵하는 쪽을 선택했다.
“저희가 보는 앞에서 누이의 살점 하나하나를 베어 죽이던 이자키엘을 말입니다.”
그 말에 카제프의 인상이 곧장 구겨졌다.
“차라리 죽여 달라 울부짖던 누이의 울음이 아직도 제 귓가에 박혀 있습니다. 제가 그런 황태자를 곱게 살아가도록 둘 것 같습니까.”
“……미안하다.”
저 같아도 그런 과거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면, 이자키엘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카제프가 한 번 더 사과했다.
“실언했다. 미안해, 하일.”
“……아닙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자와 기억하는 자의 차이는 크다. 여러모로.
“그럼 앞으로 어쩔 생각인 거냐.”
“…….”
“황위라도 앗아 오려고?”
그 물음에 하일은 가만히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황위……, 황위라…….”
문득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황위. 황위를 빼앗아 저들 중 누군가가 황제가 된다면, 그리하여 티아를 다시금 황궁으로 향하게 만든다면…….
‘누이가 좋아하실까.’
아니, 좋아하실 리가 없어. 누이께서는 과거에도…….
‘미칠 거 같아. 여기 사람들은 미친 게 틀림없어. 다들 마치 영혼 없는 인형들 같아. 딱딱하고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고…….’
‘그래도 황제 폐하와 함께 제국을 천하에 두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지루할 줄 알았더라면 황궁에 오지 않았을 거야.’
그래, 옛날에도 곧잘 우리를 불러다 투덜대시곤 했었지.
하일이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며 저도 모르게 실없이 웃었다. 한참 지나도록 딱딱한 황궁 예법을 몸에 익히지 못해 곧잘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랬던 그녀를 떠올리니 다시금 황궁에 들어가라 하기도 못할 짓이구나 싶다.
“황위에는 관심 없습니다.”
“흐음…….”
“제가 노리는 건 오롯이 이자키엘. 그자뿐이니까요.”
어느새 여유를 찾은 하일이 평소와 같은 웃음을 그렸다. 능글맞은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린 게 속을 알 수 없어 보이게 만든다.
“똑같이 해 줄 겁니다.”
그가 아끼는 것들을 빼앗아 똑같이, 두 눈 앞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사랑하는 이들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일의 표정을 본 카제프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이 그렇다면…….”
누군가 이자키엘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갈가리 찢겨 죽어야 할 자들은 무슨 죄냐 묻는다면, 하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것이다.
‘아르젠트의 사랑을 받은 죄다.’
이자키엘의 사랑을 받은 죄라고.
* * *
근래 들어 자꾸만 이상한 꿈을 꾼다. 단순히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내용이 무척 구체적이었다.
‘카일! 그동안 어디 가 있었어. 얼굴은 왜 이렇게 야위었고. 응?’
‘쉬이, 누나야. 나는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우선 황궁부터 빠져나가자.’
상처투성이의 카일과 한껏 야윈 모습의 카제프.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꿈인데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반역으로 오해받았다더니, 심문이라도 받은 걸까…….’
꿈속의 나는 그들을 따라 허겁지겁 궁을 빠져나갔다. 하일이 미리 손을 써 둔 건지 빠져 나가는 건 꽤 수월했다.
한참 궁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향하던 중, 하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일, 네 오러는 돌아왔어?’
‘아니, 포기해야 할 거 같아.’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카일이 오러를 포기해야 한다니?
‘빌어먹을 황궁 마법사 놈들이 기어코 최면 마법에 성공했어.’
‘그럼 지금 네 오러는…….’
‘황제에게 있어.’
‘뭐……? 이자키엘에게?’
‘응, 괜찮아. 그깟 오러 없어도 되니 우선 국경부터 넘자.’
국경을 넘는다고? 반역자로 오해받았더니 정말이구나. 이젠 제국에서 살 수 없는 정도가 된 건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안 돼.
혼란스러운 나와 달리 꿈속의 나는 제법 태연하게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누나, 괜찮아? 업어 줄까?’
‘아니야. 나 혼자 걸을 수 있어.’
‘힘들면 말해. 곧 준비해 둔 말이 나오니까…….’
카일의 말대로 조금 더 달리자 나무에 묶인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마차가 아니라서 불편할 수 있어.’
‘됐어, 뭐 그런 거로 미안해해. 지금 그런 거 따질 상황이니?’
나는 실없이 웃으며 카일과 같은 말에 올라탔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게 생생했다. 푸르릉, 소리를 내는 말도, 내 허리를 꽉 감싸 안은 카일의 팔도, 귓가에 속삭여지는 낮은 중저음도.
‘고삐 꽉 잡아. 내가 안고 있을 거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놓치면 안 돼.’
‘응.’
나를 제 품 안에 꽉 욱여넣은 카일은 출발하기 전에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응? 뭐야, 갑자기.’
카일과 이 정도의 스킨십이야 별거 아닌 축에 속해 익숙한 나와 달리 꿈속의 나는 꽤 당황한 눈치였다.
‘그냥.’
‘그냥?’
‘그냥 누나 사랑한다고.’
‘뭐야, 뜬금없이. 누가 보면 네가 나 좋아하는 줄 알겠다.’
카일은 태연하게 웃어 보이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얌전하던 말이 울음소리를 뱉어 내며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좋아하지.’
‘응?’
‘하나뿐인 누나잖아.’
귀를 가르는 바람 소리와 멀미 날 정도로 흔들리는 몸. 그리고 익숙한 카일의 부드러운 목소리.
‘난 또 뭐라고.’
꿈속의 나는 묘하게 뺨을 한 번 붉혔다가 웃으며 말했다.
‘왜, 누나는 나 안 좋아해?’
‘무슨 소리야. 당연히 좋아하지.’
고삐 쥔 손에 힘을 더욱 바짝 주며 말했다.
‘카일, 너는 내 동생이잖아.’
“허억……!”
순간적으로 눈이 확 떠졌다. 꿈에서 깸을 인지함과 동시에 갈증이 몰려왔다. 나는 곧장 곁에 놓인 찬물을 들이켰다.
‘또 그 꿈…….’
대체 꿈은 내게 무얼 보여 주고 싶은 걸까.
그냥 단순한 꿈? 하지만 단순히 꿈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상세하다.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아니야, 하지만 원작에 이런 내용은 없었어.’
아니, 정말 없었나? 만약……, 황후가 된 원작의 결말 그 이후의 모습이라면?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마냥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걸까?’
초조함이 몸을 엄습했다. 나는 멍하니 손을 쥐락펴락하며 생각했다.
‘하일에게 말해야겠어.’
* *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란이냐!”
아르젠트 후작이 버럭 소리치며 멋대로 현관을 비집고 들어온 이들에게 외쳤다. 그러자 그들 중 가장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자가 나와 황제의 인장이 찍힌 공문을 내보였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탈세 관련하여 불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탈세? 하, 이게 갑자기 무슨 무례한……!”
“아르젠트 후작저뿐만 아니라 제국의 모든 귀족에게 행하는 것이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이 협조지 그들은 막무가내로 저택을 헤집기 시작했다. 당황한 아르젠트 후작은 멍하니 그들의 행각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귀족에게 탈세 조사를 한다고? 이렇게 불시에? 아무리 황제라 한들 대체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아버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방에 있던 하일 또한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나왔다. 그건 카제프도 마찬가지였다.
“불시 검문이라는구나.”
“……예?”
“탈세 조사를 하려는 모양이야. 전 귀족들에게 실시한다고 했어.”
그 말에 하일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전 귀족들에게 탈세 조사를 한다고……?’
황실에서? 말도 안 돼. 과거에는 이런 짓 따위 하지 않았었는데…….
귀족들이 암암리에 장부를 조작하고 세금을 빼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아르젠트 후작가는 그 정도가 덜한 편이었지만, 다른 귀족들은 탈세를 아주 당연한 귀족의 권리라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걸 조사하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식으로 조사한다면 잡혀 나갈 귀족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자신이 과거와 다르게 행동했듯, 황태자 또한 과거와 달라졌다. 하일은 그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애당초 전과 달리 누이를 황태자비로 보내지 않았으니.’
달라질 만도 하지.
혀를 한 번 차고는 분주하게 저택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등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순간일까. 하일이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또렷하던 시야가 일순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였다. 당황한 그는 재빠르게 눈을 비볐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시야가 돌아왔다.
“젠장…….”
하일은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군.’
마른세수하며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하일은 한시가 급한 와중에, 기억을 잃고 헛짓거리 하고 있는 카일이 떠올라 답답했다.
확실히 카일이 기억을 잃게 되는 건 변수였다. 과거에는 없던 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뇌까지 근육으로 된 무식한 놈아.
* * *
갑작스러운 불시 검문으로 뒤숭숭한 요즘. 때에 맞지 않게 황태자의 약혼식이 잡혔다.
‘왜 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약혼하는 거지?’
원작에서는 거의 완결 부근에 다다라서야 약혼했었기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몸에 딱 붙는 드레스를 입고 머리까지 틀어 올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카일과 하일이 에스코트 해 줬을 법했으나 카일이 그렇게 된 탓에 오늘은 카제프와 하일이 나를 에스코트했다.
“티아.”
“아, 오라버니!”
오랜만에 보는 카제프의 연회복 차림에 나도 모르게 잠시 넋 놓고 감탄사를 흘렸다.
‘어우, 잘생긴 것 봐.’
카일과 하일을 보며 눈이 높아진 편에 속하는 나조차 감탄할 외모였다.
‘살면서 카제프보다 잘생긴 남자를 볼 일이 있을까?’
없겠지. 저 얼굴보다 잘생긴 얼굴이 존재할 리 없어. 존재할 수조차 없고.
그러다 문득 그와 몸을 섞었던 게 떠올라 멋대로 얼굴이 붉어졌다.
‘최근에 오라버니랑은 별로 못했던 거 같은데 조만간 한 번 하자고 해 볼까…….’
“커흡, 큽…….”
난데없는 소리에 힐끔 고개를 돌리자 카제프가 새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답지 않은 모습에 그에게 얼굴을 바짝 붙이며 물었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그러자 카제프가 슬그머니 나를 피했다.
“괘, 괜찮다. 괜찮으니 이상한 생각 그만 하고 우선 마차로…….”
“네?”
“아, 아니, 우선 마차로 가자꾸나.”
허둥거리던 그는 슬그머니 내 손을 붙잡고는 로비로 향했다. 그러자 하일이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부모님은?”
“카일과 함께 먼저 출발하셨습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괜히 예전 황실 연회 때, 카일, 하일과 마차에서 한창 그렇고 그런 짓을 했던 게 떠올랐다.
‘어휴, 지금 생각해도…….’
그 빌어먹을 모조 성기. 하일이 넣어 둔 모조 성기 때문에 카제프 앞에서 혼자 막 그런 짓을 한 걸 떠올리면 정말 수치심에 혀라도 콱 깨물고 싶어진다.
슬그머니 하일의 눈치를 살피자 다행히 오늘은 저번과 같은 짓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카제프는 왜인지 하일을 죽일 듯이 째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카제프의 시선에 의구심을 느낀 하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카제프가 혀를 차며 말했다.
“고약한 놈.”
“……예?”
난데없는 비난에 하일이 억울하다는 듯 되물었다.
“티아를 좀 소중히 생각하라는 말이다.”
“갑자기요?”
못마땅하게 그를 훑던 카제프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티아,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네, 없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웃으며 대답하자 카제프도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다행이구나. 혹시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말해.”
그가 조심스럽게 뺨을 매만지며 내게 입 맞췄다. 하일도 보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러운 나머지 몸을 화들짝 떨며 밀어냈다.
“오, 오라버니……, 하일도 있는데…….”
힐끔 하일의 눈치를 살피자 하일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상관없습니다.”
“응……?”
“저희는 형제 아닙니까.”
그는 의외로 관대하게 웃어 보였다.
“뭐 조금 질투 나기는 하지만…….”
그러더니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댔다.
“그거야 저도 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하일은 정말 괜찮다는 듯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날 황궁 테라스 이후로 형님과도 꾸준히 몸을 섞고 계셨던 거……, 저희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노골적인 질문에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나는 슬쩍 하일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 그래도…….”
이상하게 하일 앞에서 카일과 입 맞추는 건 괜찮은데, 카제프와 입 맞추는 건 영 낯설다.
그들과는 함께 몸을 섞은 적이 있어 그런 걸까.
그런 내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건지 카제프가 은근히 허벅지를 더듬거리며 속삭였다.
“그렇게 정 민망하다면 카일, 하일과 했던 것처럼 나와 하일과도 하면 되겠구나.”
“네, 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카제프가 더욱 몸을 붙여 왔다.
“흐음……, 옷이랑 머리가 망가지면 안 되니…….”
내가 놀랄 틈도 없이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카제프는 가뿐하게 나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오, 오라버니?”
그러자 하일이 말했다.
“마부에게 잠시 돌아가라 말해야겠군요.”
* * *
카제프에게 붙잡힌 다리는 한껏 벌어져 다물지도 못했다. 갑작스레 나를 들어앉힌 카제프는 뒤에서 끌어안은 채 내 음부를 고스란히 하일에게 내보였다.
풍성하고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트임 있는 머메이드 드레스인 덕분에 치맛단을 조금 끌어 올리니 무리 없이 은밀한 곳이 드러났다.
“하으…….”
벌어진 다리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하일이 머리를 처박았다. 그러고는 다물린 살을 벌려 젖히고 그 안에 숨은 살점을 집요하게 찾아내 괴롭혔다.
“하윽……, 읏, 아……!”
그의 손이 거칠게 음핵을 짓눌렀다. 흥분하여 도톰하게 부풀어 있던 살점이 가차 없이 그의 손에 뭉개졌다. 그러자 시야가 점멸할 듯한 쾌락이 몸을 지배했다.
“흣, 으응…….”
카제프가 쪽쪽거리며 내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는 게 느껴졌다.
“이리 하면 앞으로는 하일의 앞에서 나와 입 맞춰도 불편하지 않겠지.”
“흡, 아……, 오, 오라버니…….”
하일이 아래를 짓뭉개며 문지를 때마다 멋대로 허리가 움찔거렸다. 덕분에 카제프에게 붙잡힌 다리도 허공에서 발발거리며 떨려 왔다.
“다, 다리, 흑, 다리, 놔, 놔주세…… 흣.”
“다리를 벌려야 좆을 넣을 수 있지 않느냐.”
그가 얄궂게 웃으며 속삭였다.
“오랜만에 오라비 좆도 먹어야지.”
한껏 벌어진 음순 사이를 마음껏 괴롭히던 하일이 조심스럽게 손끝에 애액을 듬뿍 묻혀 구멍 안으로 삽입하기 시작했다.
“흐으……, 읏.”
질구가 움찔거리며 하일의 손을 받아 냈다. 하일의 손이 내벽을 살살 문지르며 왕복하기 시작했다.
“아, 아으……!”
그러자 카제프가 잠시 내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제 바지 버클을 푸는 듯했다. 몇 번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두껍고 딱딱한 것이 내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그게 무엇인지 모를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 오라버니! 정말 하려고요?”
하일 앞에서 카제프와 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당황한 나머지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자 카제프가 잠시 나를 들어 올렸다. 묵직한 귀두가 천천히 질구에 맞춰졌다. 당장에라도 삽입할 것처럼 비벼 오는 그의 것에 나도 모르게 옅은 신음이 흘렀다.
“흣…….”
쾌감에 상체가 휘청이다 앞에 있는 하일에게로 넘어갔다. 하일은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누이.”
“하으…….”
“제 것도 박아 드릴 테니까요.”
하일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카제프의 것이 단번에 구멍을 꿰뚫고 처박혔다.
“흡……!”
놀란 나머지 숨을 헉 들이마시며 하일의 허리춤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가 토닥이며 나를 달랬다. 울퉁불퉁한 성기가 내벽을 짓뭉개며 뿌리까지 들어왔다. 아래에 닿는 까슬한 음모가 간지러웠다.
“흐으, 으…….”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숨을 헐떡이자 카제프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기다렸다. 내 숨이 잔잔해지자 카제프가 하일에게 안겨 있던 나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카제프에게 등을 기댄 꼴이 된 나는 다시금 다리를 붙잡혔다. 카제프가 내 허벅지를 붙잡고 한껏 벌렸다. 그러자 그와 내가 교접하고 있는 음부가 하일에게 고스란히 내보여졌다.
“오, 오라버니……!”
민망함에 버둥거렸으나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찔러 넣은 성기를 움직이며 움찔거리는 질구의 모습을 더욱 보기 좋게 만들 뿐이었다.
뽀얀 살 틈으로 검붉은 좆이 두어 번 들락거렸다. 그러자 구멍은 질척한 애액을 흘려 대며 한껏 벌어진 채 성기를 물고 움찔거렸다.
“흣, 보, 보지, 보지 마……!”
하일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그곳에 꽂혔다. 민망함에 손으로 가리려 하자 예상했다는 듯 그가 저지했다.
“보기 좋은데 왜 가립니까, 누이.”
“하윽, 흣, 시, 싫어…….”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으나 하일은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제 앞섶도 풀 뿐이었다. 빳빳하게 선 하일의 것이 눈앞에 꺼떡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내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흐읍, 으, 으응……!”
하일이 무얼 하려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잔뜩 흥분한 카제프가 거칠게 구멍을 헤집으며 안쪽을 푹, 푹, 찌르고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젖은 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얼마나 카제프에게 안겨 있었을까. 하일의 것이 음순을 벌리고 그 속에 자리한 살점을 쿡쿡 눌러 댔다.
“흐응……, 아, 아으…….”
난잡하게 구멍을 쑤셔 대는 카제프와 동시에 하일 또한 아래를 괴롭히기 시작하자 몸에 힘이 쭉쭉 빠지며 시야가 점멸할 것만 같았다. 단단한 귀두가 탁한 애액을 흘리며 위아래로 음핵을 비벼 댔다. 그러자 아찔한 쾌감에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하윽, 아……!”
그 순간일까. 한껏 음핵을 괴롭히던 하일이 천천히 제 것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이미 카제프가 삽입하고 있는 질구에 귀두를 비볐다.
“하, 하일……?”
놀란 나머지 허둥거리며 엉덩이를 내빼려 했다. 그러나 카제프가 허벅지를 붙잡고 있는 탓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자, 잠까……, 아, 아흑……!”
내가 말을 마칠 틈도 없이 하일의 것은 카제프로 꽉 차 있는 구멍을 벌리고 들어왔다. 힘겹게 좆을 물고 있던 질구에 또 다른 좆이 비집고 처박혔다.
“아으, 아, 아흑……, 하, 하일, 하일……, 흑, 자, 잠깐, 잠깐, 흡, 아……!”
숨이 턱 막히는 이물감에 말조차 제대로 뱉어지지 않았다. 하일이 그런 나를 달래며 기어코 제 것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쉬이, 힘 빼요. 누이.”
잔뜩 긴장하여 굳은 몸을 토닥이며 그가 속삭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긴장이 풀어지지 않자, 손으로 음핵을 한 번 쓸어 올렸다.
“하읏……!”
그러자 그의 의도대로 몸이 파르르 떨리며 쾌락에 흐늘거렸다. 풀어진 때를 놓치지 않고 좆을 찔러 넣었던 하일이 천천히 빼내다 다시금 쳐올렸다. 그가 왕복하기 시작하자 카제프 또한 경쟁하듯 제 것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으, 아……!”
그들은 기어코 자신들의 것을 내 안에 가득 욱여넣고는 마음껏 쑤셔 박았다. 퍽, 퍽, 쳐올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은 음탕한 액을 줄줄 흘려 댔다.
카제프가 찔러 넣을 때면 하일이 빠져나갔고, 하일이 쳐올릴 때면 카제프가 빠져나갔다.
그러다 박자가 맞아 두 개의 좆이 동시에 내벽을 푹, 찌르고 오면 원치 않았음에도 교성이 입 밖으로 터져 나갔다.
“아으응……!”
그 소리가 기폭제가 된 건지, 둘은 움직임에 더욱 속도를 가했다. 찌걱거리며 질구가 난잡하게 쑤셔졌다. 발간 속살이 애처롭게도 형제들에 의해 유린당했다. 구멍이 성기로 꽉 찬 탓에 그들의 핏대 하나하나 생경하게 느껴졌다.
“흡, 흐아, 응…….”
둘 틈에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낀 채 내 몸은 힘없이 흔들렸다. 뒤에는 카제프가 앞에는 하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좆 두 개도 좋다고 잘 먹는구나.”
카제프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하일 또한 속삭였다.
“이번엔 모조 성기 대신 저희 씨물을 가득 물고 계시는 건 어떻습니까.”
“하윽, 으, 시, 싫어…….”
아릿하게 쾌감을 느끼는 지점이 쉴 새 없이 찔러졌다. 뭉툭한 귀두들이 사정없이 내벽을 긁어 댔다. 발끝이 절로 곱아들고 온몸이 녹진해진다.
“카일, 그놈이라면 눈치챌 수도 있겠습니다. 누이의 구멍에 누구 좆이 들락거렸는지요. 예민한 놈이니 곧바로 알아차리겠죠.”
하일이 한껏 빼냈던 자신의 것을 깊숙이 찔러 넣으며 말했다.
“혹시 압니까. 질투심에 잊었던 기억을 되찾을지…….”
내 다리를 벌리고 있던 카제프가 천천히 손을 옮겼다. 큼직한 손이 은근히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음부로 향했다.
“흣, 아, 아으, 자, 잠시……, 만요……!”
계속해서 움직이는 성기들만으로도 버거웠는데, 카제프는 기어코 음핵을 찾아내 꼬집었다.
“아, 아, 아흑……!”
물밖에 꺼내진 물고기처럼 순간적으로 몸이 팔딱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제프의 손끝이 조그마한 살점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하으, 으응, 오, 오라버니이……, 흣…….”
아래를 꽉 채운 이물감과 쾌락이 온몸을 엄습했다. 바보가 된 것처럼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저 힘없이 그들에게 안겨 할딱일 뿐이었다.
두툼한 성기가 깊은 곳을 푹, 찌르고 들어오자 쾌락을 못 이긴 나는 하일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찌꺽이는 소리가 아래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구멍은 질척한 액을 줄줄 흘리며 난잡하게 쑤셔지는 성기를 받아 내기 바빴다.
그러다 순간 내벽을 잔뜩 쑤셔 대던 것들이 더욱 팽창하며 부푸는 게 느껴졌다.
두 개의 성기들이 서로 경쟁하듯 왕복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내가 느끼는 지점을 사정없이 괴롭혔다.
“흡, 흐으, 읏…….”
울퉁불퉁한 핏대와 툭 불거진 귀두가 황홀했다. 각기 다른 속도로 거칠게 밀고 들어오니, 내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기어코 절정을 못 이긴 내 몸은 한껏 활처럼 휘어지며 카제프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내가 힘없이 쓰러지자, 아래를 몇 번 들락거리던 좆들 또한 일순 팽팽해지더니 구멍 안에 뜨거운 액을 뱉어 내는 게 느껴졌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 안에 파정하며 내 몸 곳곳에 입술을 부볐다.
어느새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한껏 안에 싸지른 하일이 살포시 웃으며 제 것을 빼냈다. 그러자 탁한 그들의 액이 구멍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카제프 또한 제 것을 빼며 손으로 흐르는 애액을 다시금 찔러 넣었다.
“잘 물고 있어야지, 티아야.”
“흣…….”
“그래야 어쭙잖은 놈들이 네게 안 찝쩍거리지.”
“맞습니다. 마음 같아선 제 좆물을 그득 묻혀 누이가 누구의 사람인지 모르는 이가 없게 만들고 싶습니다.”
하일 또한 그 말에 맞장구치며 쿡쿡 웃었다. 아직도 쾌락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나와 달리 둘은 꽤 멀끔한 모습이었다.
카제프가 세심한 손길로 내 옷매무시를 정돈해 주었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내 다리에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체가 마비라도 된 것처럼 발발 떨렸다. 그런 나를 부축하며 둘이 웃었다.
“도착했습니다, 누이.”
“들어가자꾸나.”
방금까지 누이에게 좆을 박던 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해사한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관계의 여운에 잘게 몸을 떨던 나는 힘겹게 그들의 손을 잡았다.
* * *
연회장에 들어가기 무섭게 카일의 시선이 꽂혔다. 그는 적의를 가득 담은 얼굴로 나를 훑다 이내 가까이 다가왔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내가 내빼는 속도보다 카일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너…….”
그는 내 손을 잡아채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훑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르면 일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감각이 예민해진다고 하던가. 카일은 마치 내가 방금까지 형제들과 몸을 섞다 온 걸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무어라 말을 뱉고 싶은 건지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신경질적으로 나를 팽개치고는 다시금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왜 저래…….’
약혼식은 간결하게 진행됐다. 연회 자체가 화려하다 보니 식을 오래 끌지 않는 듯했다.
원작과 달리 결국 황태자비가 되는 건, 내가 아닌 메리드 자작 영애였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가 탐나거나 질투가 나는 건 아니다. 새삼 원작의 큰 줄기가 아예 틀어져 버린 게 신기할 뿐.
소문에 의하면 황태자가 메리드 영애에게 푹 빠져 지극정성이라던데, 이상하게 그런 것치고는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그다지 기쁘지 않아 보였다.
얼마나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황제의 축사와 함께 식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보는데, 순간 메리드 영애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내 착각인 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그녀는 노골적으로 나를 응시했다.
‘뭐지……?’
평소 나와 안면도 없던 그녀가 어째서 공적인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나를 보는 건가 의아할 때쯤, 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연회장에 가득 울렸다.
인사치레로 축하 인사를 건네기 위해 메리드 자작 영애, 아니 황태자비에게 다가간 순간.
“반가워요, 카네스티아 아르젠트 영애.”
평소에는 거의 들을 일 없던 내 본명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젤라 메리드예요. 아, 이제는 아젤라 폰 에를렌두르인가요.”
그녀가 살포시 웃으며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잠시 바보처럼 머뭇거렸다.
“제, 제국의 작은 태양, 아젤라 폰 에를렌두르 전하를 뵙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웃으며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어딘지 묘했다. 마치 내 모습을 하나하나 샅샅이 훑는 것처럼…….
한참 나를 보던 그녀가 부채를 펼치고는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내게 가까이 몸을 붙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편지는 잘 받으셨나요.”
“……예?”
“영애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편지라니? 지금 이게 무슨…….
그러다 문득 황궁에서 날아온 출처 불명의 편지가 떠올랐다.
‘설마……!’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를 마주하자 아젤라가 싱긋 웃었다.
“영애는 영애의 형제들을 얼마나 믿으시는지요.”
“…….”
“아무래도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일반적인 남매보다는 사이가 소원할 수밖에 없지요.”
그녀는 마치, 내가 양녀임을 강조하듯 말했다.
“저는 전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꺼내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애써 무던한 척 대답했다. 그러자 아젤라는 예상했다는 듯 부채를 팔랑거렸다. 주변 시선이 하나둘씩 우리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젤라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구두를 신어 다리가 조금 아프네요. 저는 잠시 쉬어야겠습니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한 채,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치 저를 따라오라는 것만 같다.
‘갑자기 뭐야.’
나와 아젤라가 엮일 만한 접점은 하나도 없는데…….
제 할 말만 뱉은 아젤라는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나는 한참 동안 멀어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졌을 때쯤, 그녀를 뒤쫓았다.
* * *
“어머, 왔네요.”
“…….”
내가 테라스 커튼을 치며 들어오자 아젤라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리 아프지 않아요? 앉아요, 영애.”
나는 미심쩍다는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내며 그녀 맞은편의 아웃도어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아젤라가 기다렸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
“하일 경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
“하긴 뭐, 내가 못 미더울 만도 하지.”
내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하자 아젤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클립으로 보기 좋게 집힌 두툼한 서류 뭉치였다.
“이게 뭐죠?”
“보면 알 거예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었다. 서류는 전부 나와 관련된 서류들이었다.
가령, 내 앞으로 된 재산이라든가 국경을 넘기 위한 공문 같은 것들.
“이게 무슨……?”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서류에 의하면 내 앞으로 있던 재산이 모두 처분되어 있었다. 게다가 은행에 보관 중이던 현금들 또한 전부 인출된 상태였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내게 선물해 주셨던 인근의 별장도 진즉 팔려 내 손을 떠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내용에 문서를 몇 장 더 뒤로 넘기자, 누군가가 대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위임장이 나타났다.
내용은 가관이었다.
내가 하일 아르젠트에게 모든 금융 업무를 위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뭐죠?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놀란 나머지 곧장 아젤라에게 되묻자 그녀는 그저 묘한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아제라가 작게 혀를 차며 나를 향해 동정의 시선을 담은 채 읊조렸다.
“하일 아르젠트를 믿냐고요.”
“거짓말.”
나는 받은 서류를 다시 아젤라에게 돌려주었다.
“이 서류가 진짜 서류인지 어떻게 알죠?”
“그거야 영애께서 내일 당장 은행만 가도 판가름 날 텐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판가름 날 걸 어째서 하일이…….”
“서류, 끝까지 읽어 봐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금 문서를 마구 넘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타국어로 적힌 혼인 신고서 사본이 눈에 들어왔다. 제국어가 아닌 탓에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었으나, 틀림없이 혼인 신고서가 맞았다.
“혼인 신고서……?”
그리고 그곳에는 카네스티아 아르젠트.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돼, 거짓말……!”
하지만 단순히 위조라기엔 내 지문과 아르젠트 후작의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는 말조차 뱉지 못하고 바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살폈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정말 내 혼인 신고서가 맞았다. 혼인 상대는 동양인인 듯했다. 이름이 낯설었다.
리우 하.
서류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인지 사고가 따라가지 못했다.
“황실에선, 황실에선 뭐 한 거죠? 이게 만약 진짜 서류라면 황실 선에서 확인했을 거 아니에요!”
“외국인과의 혼인은 황실에서 일일이 확인할 수 없어요. 이번처럼 작정하고 숨기고자 한다면 숨길 수 있…….”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테라스 커튼을 거칠게 젖히고 들어왔다. 난데없는 불청객에 놀란 아젤라가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하일이 서 있었다.
“근래 무슨 짓을 하시든 너그러이 봐드렸더니, 제가 많이 우스워지셨나 봅니다. 비 전하.”
평소 내게 사랑을 속살거리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저음이 매섭게 그녀를 향했다.
‘하일……?’
하일은 성큼성큼 테라스로 들어와 내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앗았다. 그러고는 곧장 찢어발겼다.
“아니면 당신 정부의 목숨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건가.”
그의 입에서 ‘정부’가 언급되자 아젤라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하일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저열하게 웃었다.
“설마 풀어 줬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셨습니까.”
“영식!”
“내 풀어 줄 리가 없지. 이렇게 뒤로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 모르는데.”
하일은 아젤라를 향해 서슴없이 살의를 내비쳤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전하께서 이리 제게 실망감을 안겨 주셨으니, 전하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자는 전하를 대신하여 제 화를 받아야겠지요.”
둘은 안면이 있는 건지, 서슴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 사이에 낀 나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눈만 끔뻑였다.
“하일……?”
내가 그를 부르자 하일이 평소처럼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누이, 이리 오세요.”
“…….”
“무슨 말을 들으셨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신경 쓸 필요 없다니. 내 재산들이 모두 팔려 나가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혼인한 상태가 됐는데?
경악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하일을 바라봤다. 그러자 하일이 한 번 더 나를 재촉했다.
“어서요.”
“……하일.”
“네, 누이.”
그는 나와 달리 태연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오히려 내 화를 부추겼다.
“정말 네 짓이야?”
하일은 태연한 척 가만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부정도 긍정도 나오지 않았다.
“전부 설명해.”
“…….”
“어째서 내가 이름도 모르는 타국 남자와 혼인 상태인 건지, 설명해.”
물끄러미 나를 보던 하일의 시선은 서서히 아젤라에게로 돌아갔다. 마치 그녀에게 경고하듯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것만 같다.
“설명하라고.”
나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다시금 말을 뱉었다. 그러자 하일이 잠시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본 게 전부 진실이야?”
아니라고 해. 제발.
그러나 내 기대를 깨부수듯, 하일의 입에서는 사죄의 말이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바닥이 아득하게 꺼지는 기분이다. 이대로 땅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은 기분이 온몸을 잠식했다. 머리가 멍했다.
정말, 정말 하일이 내 재산을 모두 빼돌리고 나를 혼인시켰다고? 얼굴도 모르는 타국 남자랑?
“하지만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누이께 폐 끼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흐른다. 설마 뭐 그런 건가? 사랑해서 그랬어. 널 지키기 위해 그랬어. 이따위 말로 제 행동을 정당화 하는 그런…….
“미쳤어. 미친 새끼. 미친놈.”
손이 덜덜 떨렸다. 온몸의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런 내게 하일이 손을 뻗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날 위한 짓이랍시고 정당화하지 마.”
“…….”
“너……, 선 넘었어.”
그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악질이 일 것 같아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내달렸다.
내 재산을 빼돌린 거야 그렇다 쳐. 아니, 이것도 엄청 심각한 일인데 결혼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상대적으로 큰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아.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결혼했다니.
한참을 내달리다 연회장 구석에 다다라서야 힘없이 마른세수했다. 그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졌다.
* * *
하일은 티아가 빠져나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다시금 아젤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전하.”
“…….”
“비 전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손을 꼼지락거리며 하일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습니까.”
서늘한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그녀를 향했다.
“이런 식으로 제 명을 독촉할 줄은 몰랐는데…….”
저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아젤라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먼저…….”
“…….”
“먼저 저열하게 굴었잖아.”
저열이라는 말이 나오자 하일이 옅은 실소를 흘렸다.
저더러 저열하다 말하는 것에는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이 선하다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아젤라의 말마따나 자신은 티아를 위해서라면 한없이 다정해질 수도, 한없이 저열해질 수도 있었다.
쿡쿡거리며 웃던 하일이 작게 읊조렸다.
“딱하게 생각합니다. 당신도, 당신의 정부도.”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에 아젤라가 입술을 짓씹었다. 당장 하일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얼굴로 그를 째려봤다.
‘그냥 치워 버릴까.’
그는 잠시 아젤라를 보며 고민했다.
황태자비고 뭐고 그냥 전부 몰살시켜 버릴까.
지금 기분으로는 자작가를 통째로 없애 버려도 영 시원찮을 것만 같다. 하일은 입 안 여린 살을 깨물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안 돼. 아직은 허울뿐인 자리인들, 누이를 대신하여 앉혀 두어야 한다.’
누이가 황태자비가 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는 차단해야 해.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심호흡을 하며 힘겹게 냉정함을 유지했다.
“……유쾌하지 않습니다.”
하일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정에 휩쓸려 당신 가문이고 뭐고 모조리 없애 버릴 것만 같으니까요.”
진심이었다. 굳이 이런 식으로 제 발목을 붙잡는 아젤라가 아니더라도 할 일은 태산이었다. 여유 부릴 만큼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사고 치지 마세요, 전하.”
명백한 경고.
아젤라의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둘 사이엔 미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하일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아르젠트 영애가 불쌍해요.”
“하…….”
“사랑으로 포장하기엔 당신 행동 전부 미친 짓이야.”
그녀의 말에 하일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단정한 흑발이 고스란히 뒤로 넘어가며 보기 좋게 이마를 드러냈다.
“네가 뭘 알아.”
하일은 눈 하나 꿈쩍 않고 아젤라를 하대했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껄떡대지 마. 내 인내심도 한계니까.”
“쓰레기 새끼.”
“인형은 인형답게 시키는 짓만 해. 쓸데없이 신경 긁지 말고.”
혼인이 성사되더라도 황태자에게 보탤 힘이 없는 미약한 가문과 약점을 붙잡아 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패. 그 역할로 아젤라 메리드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귀찮게 구는군.’
하일의 말에 아젤라는 꽤 큰 상처를 받은 건지 울음소리를 억누르며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녀를 뒤로하고 하일은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건 기억이 흐릿하지만, 적어도 회귀 전 아젤라의 마지막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잊기 어려운 죽음이었으니까.
과거의 그녀는 고작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의처증에 시달리던 남편에 의해 토막 살인 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남편은 지금의 평민 정부다.
* * *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현기증이 이는 기분이다. 몸이 멋대로 휘청거렸다. 굽까지 높으니 더욱 걷기 버거웠다.
“하…….”
인파를 피해 비틀거리며 쉴 공간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일까.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부축했다.
“아르젠트 영애. 괜찮으십니까?”
낯선 목소리와 낯선 손길.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자 그곳엔 안면 없는 영식들 몇 명이 나를 에우고 서 있었다.
“아……,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영애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하여…….”
그들은 내가 겁에 질린 듯하자 곧바로 손을 떼어 냈다. 그 순간일까. 익숙한 체향이 뒤에서 나를 확 잡아당겼다. 당황하여 몸이 휘청이자 그는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받쳐 안았다.
“어디 갔나 했더니…….”
짜증 섞인 중저음이 권태롭게 흘러나왔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카일이 서 있었다.
“왜, 형님이랑 하일로는 부족한가 보지?”
“……뭐?”
“이런 데서 시답잖은 피라미 새끼들이랑 끼 부리는 거 보면…….”
카일이 혀를 차며 그들에게 비키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사내들은 허겁지겁 자리를 비켰다. 순식간에 복도에는 나와 카일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런 적 없어.”
나는 허리에 감싸진 카일의 손을 쳐 냈다. 그가 나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은 덕분일까. 결계가 발동하지 않았다. 그러다 묘하게 적의가 담긴 카일의 시선을 의식하자 오러가 옅은 빛을 띠며 결계를 만들어 내려 했다.
안 그래도 하일의 일로 머리가 가득 차 버거웠는데, 눈앞의 카일까지 마주하니 더욱 힘들었다. 지금은 도저히 그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카일이 다시금 나를 불렀다.
“어디 가.”
“……네가 무슨 상관이야.”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빈 테라스를 찾아 배회했다. 그러다 가까스로 빈 곳을 찾아 들어가려 하자 카일 또한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왔다.
“뭐야, 너.”
화들짝 놀라 묻자 그는 태연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왜 따라 들어와.”
“숨어서 무슨 음습한 짓을 하나 궁금해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불편하니까 나가 줘.”
“싫다면?”
“하…….”
무어라 반박의 말을 뱉으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시답잖게 카일과 말씨름할 기력도 없었다.
내가 아무런 대꾸를 않자 카일이 한 쪽 눈썹을 이죽였다. 저를 무시한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뭔 상관이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아웃도어 소파에 몸을 뉘였다. 곁에 카일이 있든 말든 힘없이 늘어져 쿠션에 몸을 묻었다. 일부러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눈을 감자, 그가 헛웃음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녀, 팔자 좋다?”
“…….”
나는 자는 체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카일 또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감긴 시야로도 그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왜 저래, 부담스럽게.’
얼마나 더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까. 부시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일순 내 드레스 자락이 확 끌어 올려졌다.
놀란 나머지 곧장 눈을 뜨자 카일이 무덤덤한 얼굴로 내 치마 속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잤어?”
“뭐?”
“형이랑 하일이랑 잤냐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 말에 카일이 잠시 멈칫했다. 그 또한 저가 왜 이런 말을 뱉는지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그러게.”
“…….”
“내가 무슨 상관이지.”
“비, 비켜…….”
오러를 사용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평소보다 묘하게 유순해진 카일의 얼굴에 차마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검이 없어.’
황궁 연회장이니 당연한 건가.
카일은 하지 말라는 내 저항에도 기어코 다리를 벌려 젖혔다. 비쩍 마른 허벅지는 그의 손에 의해 활짝 벌어졌다.
“하, 하지 말라니까!”
그는 내 의견을 가볍게 묵살하고는 속옷을 젖혔다. 그러자 하일과 카제프가 잔뜩 싸질러 놓은 정액이 살짝 흘러나왔다.
“하일!”
“……씨발, 많이도 싸 놨네.”
그가 푹 젖은 질구에 제 손가락을 찔러 넣으며 중얼거렸다.
“흣…….”
“왜 그 둘이 답지 않게 너 같은 걸 감싸고도나 했더니…….”
굵직한 손이 내벽을 헤집으며 안을 질척하게 채우고 있던 것들을 빼냈다. 그럴 때마다 찌걱이는 소리와 함께 탁한 애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남동생이랑 오라비 좆물 물고 그새 또 다른 사내새끼들이랑 시시덕거리고 있었어?”
갑작스럽게 삽입을 당한 구멍은 성의 없이 쑤셔지는 와중에도, 움찔거리며 카일을 반겼다. 그러자 그가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짜증 나는 계집.”
한참 안쪽을 긁어 대던 카일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곧장 제 앞섶을 풀었다.
순식간에 앞섶 틈으로 팔뚝만 한 것이 튀어나왔다. 놀라 내가 눈을 크게 뜨며 카일을 밀어내자 그가 더욱 내게 몸을 붙였다.
“너 지금 뭐 하려……, 아, 아으, 읍……!”
그러더니 제 체구로 나를 찍어 누르듯 짓누른 채 곧장 성기를 찔러 넣었다. 난데없는 삽입에 놀라 시야가 번뜩이며 허리가 휘청였다. 그러나 옴짝달싹 할 수 없이 깔린 탓에 나는 버둥거리는 것 외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으, 아으…….”
앞에서 정사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준비되지 않은 행위에 입 밖으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윽……, 아……, 카, 카일…….”
카일은 내 의사를 무시하고 찔러 넣었던 좆을 천천히 빼냈다. 그러고는 내가 잠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금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묵직한 것이 사정없이 아래를 헤집는 게 생생했다. 울퉁불퉁 기둥에 돋은 핏대까지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빳빳하게 선 성기가 구멍을 꽉 채우고 있었다.
힘겹게 벌어진 질구가 움찔 떨며 카일의 것을 받아 냈다. 뽀얀 살 틈으로 검붉은 성기가 자비 없이 들락거렸다. 툭 불거진 귀두가 안쪽을 가차 없이 찌르고 들어왔다.
“아, 아흣, 아……!”
끙끙 앓는 소리와 함께 아래를 꿰뚫듯 왕복하는 움직임이 거칠어서 카일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이미 다른 형제들의 정액으로 가득한 내벽은 찔꺽이는 음란한 소리를 자아냈다. 카일의 좆이 빠져나갈 때마다 질척한 액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싸 안으며 매달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카일의 품이 썩 나쁘지 않아서 허겁지겁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흣, 흐으……, 카, 카일……, 카일…….”
힘겹게 이름을 읊조리며 그를 불렀으나, 카일의 시선은 여전히 매서웠다. 애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목적을 알 수 없는 성행위만 이어 갈 뿐이었다.
“내 이름 부르지 마.”
그가 거세게 허리를 쳐올리며 중얼거렸다.
“……듣기 거북하니까.”
카일은 몇 번 더 신경질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온몸이 카일에게 짓눌려 빈틈없이 그로 채워졌다. 그 기분이 싫지 않아서, 과거의 카일이 떠올라서 눈물이 삐죽 새어 나왔다.
“흡, 흐으……, 시, 싫어.”
“……뭐?”
“부를, 흣, 거야…….”
“하…….”
“카일, 흐으, 카이일…….”
흥분감에 말꼬리가 살짝 늘어졌다. 그러자 카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짜증 나.”
“하으, 읏…….”
“형이랑 하일 그 새끼한테 다리 벌리고 다니는 거 좆같다고.”
그가 내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읊조렸다.
“둘이랑 뒹굴 만큼 남자가 궁해?”
“흣……!”
“그럼 차라리 나한테 와서 앵겨.”
난데없이 질투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카일은 진심인 건지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다른 새끼들한테 가지 말고.”
“너……, 질투해……?”
“헛소리.”
그가 단칼에 말을 잘라 냈다.
“내 오러 들고 다른 새끼 좆 받는 게 기분 더러울 뿐이야.”
대체 오러랑 다른 사람과 몸 섞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으나 내벽을 푹푹 찔러 넣는 두꺼운 성기 탓에 반박의 말이 뱉어지지 않았다. 입에서는 그저 젖은 신음만 흐를 뿐이었다.
“하으…….”
카일의 손이 내 뺨을 매만지며 부드럽게 입 맞췄다. 잇새를 가르고 혀가 천천히 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위고 아래고 타액이 섞이는 질척한 소리로 가득했다.
검붉은 좆이 얼마나 더 들락거렸을까. 내가 절정감에 몸을 굳힌 순간 카일 또한 옅은 신음을 흘리며 내 안에 파정하는 게 느껴졌다.
“흐…….”
그가 내 눈가를 지분거리며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답지 않게 다정한 행동이었다.
“누나…….”
“으응…….”
절정의 여운에 나른하게 취하던 것도 잠시.
‘방금 누나라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 또한 당황한 건지 바보처럼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카, 카일?”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건가 싶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카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
“너 방금 나더러 누나라고…….”
“내가 언제!”
“뭐? 방금 분명 그랬잖아.”
“안 그랬어.”
그가 놀란 표정으로 다급하게 소리치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너 같은 누나 둔 적 없어.”
부정하는 목소리와 달리 내 옷매무시를 다듬어 주는 손길은 날을 세우고 매섭게 굴던 근래의 카일과 달랐다.
“마검…….”
물끄러미 나를 보던 카일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검이 필요해.”
“뭐?”
“너만 보면 기분이 역겨워서, 마검을 쥐고 싶어져.”
카일의 눈동자는 무언가에 세뇌되기라도 한 것처럼 초점이 없어 보였다.
“슬슬 돌아가야겠어.”
고저 없는 목소리가 테라스에 울려 퍼졌다. 순간 영혼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카일의 모습에 낯선 이질감이 들어 몸이 굳었다.
“카일……?”
내 부름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참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다가, 마차로 돌아갈 뿐이었다.
* * *
“빌어먹을, 황궁 놈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카제프가 주먹을 세게 쥐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하일이 애써 그를 진정시키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황태자의 약혼식이 끝나자마자 들려온 소식은 아르젠트 후작가의 대규모 탈세와 횡령 소식이었다. 정말 난데없는 일이었다.
물론 아르젠트 또한 아주 청렴하다 할 수 없었으나, 다른 여타 귀족들에 비하면 깨끗하다 못해 횡령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불시 검문에서 문제가 생긴 건 오롯이 아르젠트 후작가뿐이었다.
버젓이 횡령을 일삼는 다른 귀족들은 그 누구도 문제되지 않았다. 이건 황실에서 노골적으로 아르젠트를 향한 선전 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일 또한 욕을 삼키며 마른세수했다.
‘빠르다. 뭐든지 과거보다 빨라.’
그가 제 손에 들린 문서를 넘기며 나직이 한숨을 토했다. 그러자 카제프가 물었다.
“그래, 티아의 혼인 처리는 잘 되었고?”
“예, 혹여 황태자가 메리드 자작 영애와 파혼하더라도 누이를 넘기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아버지께서는 괜찮으실지…….”
“괜찮으실 거다. 아무리 황실이라 한들, 선 넘는 행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 아직까지는.”
횡령 혐의로 인해 후작은 황궁으로 불려간 참이었다. 덕분에 저택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아마 이번 일로 귀족들 또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것이다.
황실과 아르젠트 후작가의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한참 서류를 보던 하일은 시야가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처음엔 흐릿해지는 정도더니 이내 몇 초 더 흐르지 않아 온통 어둠으로 뒤덮였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놀랄 법도 한데 그는 꽤 태연했다. 카제프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눈을 두어 번 비볐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웠던 시야가 멀끔히 돌아왔다.
‘큰 줄기가 바뀔 때마다 대가를 지불하는 속도 또한 빨라질 것이다.’
하일은 입술을 짓씹으며 서류를 쥔 손에 힘을 바짝 줬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초조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땐 정말 떠날 생각이었다.
가문도 재산도 모두 버리고 오롯이 티아의 안위만을 생각한 채. 이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가끔은 복수고 뭐고 처음부터 떠날 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누이가 버티지 못하겠지.’
나라도 가문도 모두 버린 방랑자의 삶이라니. 그런 삶을 티아에게 쥐여 주고 싶지 않았다. 티아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하일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