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별
가족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마친 카일은 단정한 기사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정말 출정하는구나…….’
연회용 제복이 아닌, 전투용 제복을 입은 그를 보고 있자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확실히 카일은 멋있었다. 여자라면 그에게 눈길 한 번 건네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나와 질펀하게 침대를 뒹군 것치고, 그에게선 조금의 피곤함도 보이지 않았다.
카일은 부모님이 보시는 앞에서도 눈 하나 꿈쩍 않고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제국의 문화이자 간단한 인사치레였기에 문제될 건 없었으나, 새벽 내내 몸을 섞으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가 떠올라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전처럼 단순한 인사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괜스레 부모님께 몹쓸 짓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누나, 다녀올게.”
카일의 눈길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 나왔다. 막상 그가 정말 떠난다고 생각하니 나 또한 아쉬웠다. 나는 한참 머뭇거리다 품 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냈다.
“……이거, 가져가.”
그러고는 카일의 검 손잡이에 묶어 주었다. 그러자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이게 뭐야?”
“내가 직접 만든 건 아니지만 제일 좋아하는 손수건이야…….”
“뭡니까, 누이. 저놈만 주시는 겁니까?”
나와 카일 사이로 대뜸 하일이 끼어들었다. 답지 않게 목소리에 옅은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더니 하일도 품에서 웬 물약을 건넸다.
“무식한 놈, 이것도 가져가라.”
“뭐냐?”
“엘릭서. 마탑에서 일 년에 세 개만 생산할 수 있는 거야.”
“오-, 웬일이야, 네가 이런 착한 짓도 하고?”
엘릭서라는 말에 놀란 건 카일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릭서. 원작에서 몇 번 언급되어 알고 있었다. 엘릭서는 숨이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는 물약이었다. 재료 문제도 문제였고 황실에서의 제재 때문에 일 년에 세 개밖에 만들지 못하는 물약.
부모님도 언제 그런 걸 구했냐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카제프는 오묘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는 잠시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카제프였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옙, 형님도 그동안 몸조심하십시오-.”
카일이 장난스럽게 말을 높이며 쿡쿡 웃었다. 그럼에도 카제프의 표정은 영 떨떠름했다. 그는 나와 카일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노골적인 카제프의 시선에 카일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할 말이 떠올랐는지 카일이 그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형님, 남자가 그렇게 샘 많으면 예쁨받기 힘들어요.”
무슨 말을 한 건지 내게까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카제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아……, 카일 너…….”
“쉿, 쉿.”
둘은 한참 더 무어라 투닥거리는 것 같았다. 멍하니 카일을 보던 나는 가슴에 달린 주렁주렁한 훈장들이 화려하다 싶으면서도 자칫 그의 어깨를 짓누르진 않을지, 문득 걱정스러웠다.
“카일…….”
내가 아쉽다는 듯,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그러자 카일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사납게 째진 눈매와 달리 퍽 다정한 시선이었다.
“조심……, 해서 다녀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카일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응, 걱정 마. 누나, 나 소드 마스터인거 알고 이렇게 죽을상 된 거지?”
그는 여전히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심장이 쿵, 쿵, 날뛰었다.
헤어지기 싫다. 보내기 싫다.
왜지. 단순히 잘생겨서? 속궁합이 잘 맞아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럼에도 마땅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카일이 북부에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치지 않고 몸조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
‘가족이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남동생 군대 보내는 마음과는 절대 달랐으니까.
‘으아, 내가 이렇게 얼빠였다니.’
장난스레 웃고 있는 카일의 얼굴을 본 순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 카일…….”
입술을 달싹이며 눈치를 살피다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카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너 좋아해. 그……, 동생으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내 눈에 너 가족 아니야.”
적어도 그가 떠나기 전에 이 정도 말은 해 주고 싶었다. 괜히 ‘네가 다녀오면 해 줄 말이 있어!’ 따위의 사망 플래그는 꽂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빠르게 카일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후다닥 멀어졌다. 그러자 카일이 바보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카일은 한참 동안 입을 벙긋거리다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미친……, 누나 방금 그 말…….”
그는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 후작 부부와 카제프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재빠르게 입을 닫았다.
“얼른 다녀올게. 기다려. 방금 그 말 책임져야 된다. 알지?”
나는 알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자 카일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카일이 아쉬움 가득 묻은 발걸음으로 말에 올라탔다. 우리를 향해 몇 번 손을 흔들더니 이내 저를 쏙 빼닮은 흑마의 고삐를 잡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려 소드 마스터의 출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화려하게 출정식을 열기 마련이었으나, 그럴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가서 일을 해치우고 오겠다는 카일의 의지로 간소하게 가족들과 인사만 치른 후 북부로 가게 됐다고 한다.
카일답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괜스레 기분이 묘했다.
사실 아직까진 현실감이 없었다. 카일이 떠났다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저택에 돌아가면 언제나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처음이었다. 이 세계에 온 후로 가까운 사람과 오래 헤어지게 된 건.
* * *
카일이 떠났다고 해서 내 일상에 크게 변화가 찾아오진 않았다.
하일은 여전히 내게 다정했고, 밤이 되면 곧잘 나를 찾아왔으며, 오라버니와는 그날 후로 서먹해졌다.
황실 테라스에서 그렇게 관계를 가졌으니 서먹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리라. 내가 불편하기도 불편했고, 오라버니도 불편했는지 굳이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카일이 떠난 지 벌써 한 달은 훌쩍 지난 것 같은데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잇새로는 절로 한숨이 흘렀다.
“누이, 무슨 생각 하십니까.”
“응? 아, 아니 아무 생각도…….”
내가 말을 흐리자 하일이 나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카일이 없어 서운하십니까.”
“무슨 그런 말을……, 아니야 하일. 나는 너도 좋아.”
“압니다, 그런데 누이께서는 유독…….”
유독?
하일이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 말았다.
“아닙니다.”
“뭔데?”
“아무것도요.”
한차례 관계를 나눈 탓에 조금은 누그러든 목소리로 하일이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확실히 기분이 묘했다. 카일 없이 하일과만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게, 어색하고 낯설었다. 이래서야 마치 다정한 연인과 관계라도 나누는 기분이다. 셋이 몸을 섞을 땐,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단둘이어서 더 생소한 듯했다.
“제 품에서는 다른 생각 하지 마요. 저만 생각해 주세요, 누이.”
귀신같이 다른 생각 하는 걸 눈치 챈 하일이 자상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뱉는 그가 적응될 법도 한데, 아직도 낯설었다. 게다가 가끔씩 마주치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죄책감도 상당했다.
기껏 거둬 준 양녀가 이러고 있는 걸 알면, 그들이 얼마나 분노할지…….
문득 만약 우리 사이를 부모님께 들킨다면 하일과 카일은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 궁금했다.
“하일, 하일.”
“네, 누이.”
그를 부르자, 다정한 손길이 세심히도 내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있잖아, 만약 부모님께 우리 이러는 거 들키면 어떡해?”
“음, 글쎄요.”
이런 질문을 한 내가 귀엽다는 듯, 하일이 옅게 웃었다.
“누이께서는 저희가 어떡했으면 좋겠습니까?”
“……잘 모르겠어.”
정확하게는 나를 외면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일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지 알 거 같다는 듯 쿡쿡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희가 누이를 버릴 것 같습니까?”
확신에 찬 하일의 목소리와 달리 나는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안 그럴 것 같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알다가도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속마음을 굳이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이곳에 빙의한 후로 실연의 아픔을 겪은 적 없긴 하지만, 한국에서 살 적엔 구애인들에게 꽤 여러 번 배신감을 느꼈다. 나 없인 못 산다며 죽네 사네 하던 남자도 매몰차게 나를 버렸고, 평생 나만 사랑하겠다던 남자도 사랑이 식어 나를 홀로 남겨 두었다.
사실상 이 관계의 을은 나였다.
카일과 하일이 지금 당장은 내 사랑에, 내가 주는 애정에 아쉬운 것처럼 행동해도 그들은 진짜 아르젠트의 피가 섞여 있었고, 나는 평민 출신 양녀에 불과했으니까.
그들의 사랑이 식으면 내가 어떤 식으로 비참하게 버려질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걸 어쩌겠어.’
이런 걸 생각하려면 관계 전에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며 하일의 품을 파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가 기분 좋은 손길로 등을 토닥였다. 품에 안기자 이제는 익숙해진 민트 향이 숨결을 따라 들어왔다.
묘하게 안도감을 주는 향이었다.
* * *
이 주가 지나고 나서야 북부로 간 카일에게서 첫 편지가 도착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집사나 하녀장을 통해 공식적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전서구를 통해 은밀하게 편지를 보냈다는 점이었다.
사랑하는 티아에게.
누나,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지금 막 북부에 도착했어. 도착하자마자 누나한테 보내 주려고 편지 쓴다. 나 없다고 밥도 안 먹고 우는 건 아니지? 밥 많이 먹고, 잘 뛰어 놀고 있어. 그래야 다녀와서 내가 마음껏 누나 잡아먹지. 안 그래?
카일다운 말에 나도 모르게 쿡쿡,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내가 준 오러는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안 들키는 게 좋을 거 같아. 어차피 봐도 오러인지 모르는 놈들이 태반이겠지만……, 하여튼 하일이나 카제프 형님은 괜찮지만, 다른 귀족들은 좀 조심해 줘.
나 없다고 다른 남자랑 놀지 말고 놀 거면 하일이랑 형님이랑만 놀아. 안 그러면 카일 삐짐.
이제 막 도착했는데 벌써 보고 싶다. 당장 편지 보내고 싶은데, 내 전서구가 아직 준비가 안 됐대서 한 주는 지나고서야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보고 싶다. 누나, 정말로 사랑해. 내 걱정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사랑해, 얼른 다녀올게.
추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황태자가 누나한테 접근하면 하일에게 꼭 말해. 알겠지?
애정이 듬뿍 담긴 편지에 기분 좋게 읽다가, 마지막 추신에서 의아해졌다.
‘황태자가 접근하면 하일에게 말하라니. 왜지?’
황태자는 원래 나와 이어져야 했을 남자 주인공이었기에 그를 조심하라는 듯한 카일의 추신이 조금 이상했다. 1인칭 소설이어서 황태자의 속내를 전부 알 수는 없었으나, 원작의 황태자는 소설 속 티아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추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황태자가 원작과는 다르게 뒤에서 은밀히 내게 관심을 보였나?’
그리고 그 사실을 카일이 알게 된 거고? 그래서 질투하는 건가?
흐음, 어렵네.
내가 편지를 다 읽자 전서구는 어서 답장을 쓰라는 듯 부리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런 전서구의 행동이 귀여워 작게 웃다가 이내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깃털 펜에 잉크를 톡톡 묻혀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내 동생, 카일에게.
아, 동생이라는 문구는 조금 그런가. 그렇고 그런 거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내 동생이라니.
“으, 이건 좀 이상하다.”
편지지를 꾸깃꾸깃 구겨서 냅다 치워 버렸다. 그리고 다시 새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카일에게.
이건 너무 무뚝뚝하지……?
좋아하는 카일에게.
윽, 이건 무슨 연애편지 같잖아.
‘좋아하는’이라고 적은 부분을 쫙쫙 밑줄 긋고 그 옆에 작게 다시 글씨를 적었다.
친애하는 카일에게.
그래, 친구 사이에도 보통 이렇게 보내곤 하니까 이게 좋겠어.
흡족하게 편지지를 보다 이어 답장을 써 내려 갔다.
안녕, 카일. 잘 지내? 네가 보낸 편지 잘 읽었어.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밥도 잘 먹고 디저트도 잔뜩 먹으면서 지내고 있어. 너무 걱정 마.
나야말로 네가 걱정이다. 카일, 네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조금 이기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강하다는 이유로 다른 병사들을 구하거나 돕다가 무슨 일 생길까 걱정돼. 제발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 줘.
아, 어머니께서 최근에 동양의 삼을 달여 주셨어. 요즘은 삼 먹으면서 몸보신 하고 있어. 아마 네가 오면 음……, 밤새 너랑 놀아도 괜찮을……, 걸? 음……, 아마도……, 아마도……. 어디까지나 아마도야.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체력이 늘었는지 궁금하면 하루빨리 무사히 돌아와.
나도 네가 좋아. 알지, 카일? 물론 하일도 좋지만……, 하여튼 난 너희가 좋아. 네가 없으니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 할 일도 없고.
보고 싶다. 좋아해, 카일. 또 편지 써 줘. 기다릴게.
추신. 황태자는 왜? 무슨 일 있어?
세상에! 이게 남동생과 주고받는 편지라니. 역시 오글거리고 이상해.
당장 찢어 버리고 새로 쓸까 고민했다. 그러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건지, 전서구가 다가와 부리로 콕콕 편지를 건드렸다. 어서 빨리 제 발목에 묶으라는 압박 같았다.
“으으, 창피한데…….”
얼음물을 꿀꺽꿀꺽 마셔 화끈거리는 얼굴을 달래고, 편지지를 꼭꼭 접어 전서구의 발목에 묶었다. 그러자 전서구가 요란스런 날갯짓을 하며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내 편지가 새를 통해 카일에게 닿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어느새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진 새를 보다 이내 창문을 닫았다.
* * *
카일이 떠나고 무료함에 모처럼 사교 모임을 주최하기로 마음먹었다. 양녀인 탓에 비교적 친한 영애들이 없었는데, 그래도 아르젠트의 이름은 막강했다.
내가 가든파티 초대장을 돌리면 열 명 중 일곱 명은 긍정의 대답을 보내 왔으니까.
“어서 와요, 사비에르 백작 영애.”
“아르젠트 후작 영애. 후작저의 가든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무척 감사하답니다.”
“아니에요, 모처럼의 사교 모임인데, 참석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죠.”
저택으로 참석자들의 마차가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참석자는 모두 수도에서 한가락 한다는 백작, 후작 영애들이었다. 이 정도면 평민 출신 양녀가 연 가든파티치고 성공적이었다.
후작저의 장미 정원에 앉아 화려한 삼단 트레이에 포만감이 적은 봄 다즐링을 홀짝이면, 대부분 내 또래 영애들은 기분 좋게 파티를 즐기곤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사람들을 만나 왁자지껄하게 어울려 노니 카일이 떠난 후 심심했던 마음이 조금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희 오라버니께서는…….”
“어머, 그래도 부럽네요. 저희는 자매라 맨날 목걸이 가지고 싸워요.”
영애들은 또래 여자아이들이 할 법한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휑했던 정원이 모처럼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한창 평화로운 가든파티가 이어지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들으셨어요? 황태자비 후보로 메리드 자작 영애가 간택되었다면서요.”
한 영애가 언급한 황태자비 후보라는 대화 내용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누, 누구……, 누가 황태자비 후보라고요……?”
원작에는 언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전혀 엉뚱한 영애가 황태자비 후보로 간택되었다는 소리가 나왔기 때문에.
‘아니, 말도 안 돼. 아무리 이번 탄신 연회 때 나와 황태자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지만…….’
그럼 원작은? 정말 원작은 이대로 끝나는 거야?
물론 나도 황태자비가 될 생각은 없었다. 될 거란 기대도 않았고. 하지만 최소한 황태자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분명 내 외모가 황태자의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했으니까…….’
놀란 나머지 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리자 영애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내가 황태자비로 간택되고 싶어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르젠트 영애, 괜찮으세요?”
“세상에, 영애께서도 많이 놀라셨죠? 저희도 놀랐어요. 게다가 그……, 메리드 자작 영애…….”
“사생아잖아요. 메리드 자작 사생아.”
“어머, 저도 알아요. 엄마가 코르티잔이라면서요.”
“세상에, 망측해라. 그런 여자가 황태자비 후보로 오를 수 있는 건가요?”
“이건 말도 안 돼요, 아르젠트 영애께서 놀라실 만도 해요.”
영애들은 연신 부채를 팔랑거리며 입을 가리고, 은밀한 뒷얘기를 나누었다. 메리드 자작 영애가 황태자의 애를 가졌다더라, 황태자가 메리드 자작 영애에게 푹 빠졌다더라 따위의 이야기들.
양녀 앞에서 사생아인 메리드 자작 영애를 깎아내리는 꼴이라니. 우스웠으나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고작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어쩌다 황태자비 후보로 간택된 거래요?”
“황태자 전하의 이상형이라던데요?”
뭐? 내가 아니라 메리드 자작 영애가 이상형이라고……?
‘원작에선 티아의 얼굴이 이상형이라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놓고……?’
머리가 아찔했다. 뭔가 이상했다. 원작의 티아와 내 행동이 달랐으니,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황태자의 이상형까지 변질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게다가 메리드 자작 영애와 이 몸은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물론 둘 다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닮은 부분은 전혀 없어.’
이상한 불안감에 심장이 뛰었다.
“하긴 메리드 자작 영애가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는데…….”
“그래도 이상형이라기엔 조금 흔한 얼굴 아닌가요?”
“맞아요, 뭔가 좀 인위적인 느낌이 들긴 하더라고요.”
솔직히 여태까지는 막연히 원작은 원작대로 흘러가겠거니, 싶었다. 내가 뭘 하든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으면 큰 사건의 줄기는 원작을 따라 움직였으니까.
예를 들면 원작에서 진짜 ‘티아’가 저녁으로 딱딱한 빵을 먹은 날, 내가 저녁을 거르더라도 큰 줄기는 원작대로 흘러갔다. 그랬기에 후작저에 입양된 후로도 별 생각 없이 방에서 자위를 한 것이기도 했다. 자위 정도야 원작에 문제를 끼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물론 자위하다 들킨 건 꽤 큰 문제였지만…….
그래도 하일과 카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달하지 않았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왜……? 어디서부터 틀어진 거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알고 있던 큰 줄기가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카일이 북부 출정을 나간 것부터 이상해.’
뭐가 문제였을까. 내가 자위 한 거? 자위하다 들킨 거? 아니면 탄신 연회 때 모조 성기 꽂고 간 거?
혼란에 생각이 점점 깊어졌다. 영애들은 무어라 계속해서 메리드 영애에 대해 조잘거렸고, 나는 멍하니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누이.”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속살거렸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단정한 차림의 하일이 한 팔을 뒤로 숨긴 채 서 있었다.
“하, 하일……?”
“누이께서 가든파티를 주최하셨다 하여 와 보았습니다.”
하일이 보기 좋은 미소를 띠며 자연스레 내게 다가왔다. 갑작스레 나타난 하일을 보며 영애들은 꺄악, 하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하나뿐인 제 누이의 파티에 와 주신 아름다운 레이디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답지 않게 살가운 멘트까지 날리며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인사치레로 가볍게 뺨에 입을 맞췄다.
“보잘것없지만, 참석해 주신 영애들께 손수 드리는 선물입니다.”
하일이 턱짓하자 뒤에 서있던 시종이 예쁘게 포장된 작은 선물 상자를 모든 영애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어머, 이게 뭘까요.”
“세상에, 아르젠트 영식께서는 너무 다정하세요, 제 남동생은 제 드레스 자락이나 잡고 뛰어 노는데 말이죠. 호호호.”
영애들이 선물에 대한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하일이 온화한 목소리로 영애들에게 말했다.
“괜찮으니 지금 풀어 보셔도 됩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잘것없다 선물을 낮춰 말했지만, 단순히 인사치레로 떠는 겸손일 뿐이라는 걸,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려 아르젠트 후작 영식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안에 뭐가 들어 있든 준 사람이 하일 아르젠트인 이상, 결코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가볍게 참석한 가든파티에서 하일이 직접 준비한 선물을 받다니. 영애들은 감동받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일과 카일은 내 또래 영애들에게서 꽤 유명 인사였으니까.
잘생긴 얼굴과 후작 영식이라는 신분.
황태자를 제외하면 또래 영애들이 가장 원하는 신랑감 1위를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둘 다 후계자가 아니어서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선물을 풀어 본 영애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자신들이 받은 선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곤 했다.
“세상에 까르띠아 머리 장식이네요.”
제국에서 가장 값비싸기로 유명한 하이 주얼리 브랜드였다.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영애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는 것도 잊은 채, 노골적으로 선물을 살피기 바빴다.
“저, 저희는 그저 아르젠트 영애의 가든파티에 참석했을 뿐인데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그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러자 하일이 나긋하게 말했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누이의 가장 가까운 친우분들께 고작 까르띠아 머리 장식을 선물해드린 게 오히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일은 내가 그들과 가까운 친우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가까운 친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의 벽안이 순하게 접히며 다정한 남동생처럼 웃어 보였다. 하일의 손이 은근히 내 팔뚝을 쓸어 내렸다. 그러나 이곳에 자리한 영애들은 서로 각자의 머리 장식을 살피느라 제 누이의 팔을 더듬는 하일의 음험한 손길을 눈치채지 못했다.
힐끔 보니 머리 장식도 서로서로 겹치지 않는 디자인으로 고른 모양이었다. 새삼 역시 하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멍하니 선물 받은 영애들을 바라보자, 하일이 내게 속삭였다.
“이건 제가 누이를 위해 고른 선물입니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음에도, 그의 말에 영애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하일은 내 곁에 무릎 꿇더니, 프로포즈라도 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내 왼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뒤로 숨겨 두었던 팔에서 화려한 푸른 장미 꽃다발을 건네며, 내 손목에 푸른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수놓인 팔찌를 손수 채워 주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번에 경매에 나온 물건 아닌가요? 동양에서만 나는 블루 다이아몬드라고……!”
한 영애가 타이밍 좋게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그 영애를 선두로 다른 영애들 또한 숙덕거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 하일.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과하다니요, 고작 블루 다이아몬드 따위가 감히 누이께 견줄 만하겠습니까.”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원래도 다정했지만 오늘은 다정을 넘어서 느끼한 수준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모양새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가늘게 접혔다.
“저도 어머니께 들어서 알아요. 저 팔찌,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팔찌랬어요.”
“어쩜, 역시 아르젠트 후작가예요. 선물의 수준도 남달라요.”
영애들은 입이 마르도록 내 팔찌에 대해 조잘거렸다. 그리고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일은 오러가 없는 왼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었다. 푸른 다이아몬드가 오른 손목에 있는 붉은 오러와 대조됐다.
“예쁩니다. 누이 눈동자와 무척 잘 어울려요.”
하일이 내 볼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영애들은 호들갑을 떨며 우리 사이를 감탄했고, 제 할 일을 모두 마친 하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감히 숙녀분들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죄송스럽네요.”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맞아요, 후후. 다른 영식도 아니고 아르젠트 영식이신데요, 뭘.”
화사한 미소를 띤 하일은 예법대로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다음에 또 저희 저택에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 * *
가든파티가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하일의 방으로 향했다.
“하일!”
“누이, 파티는 모두 끝나셨습니까?”
“응, 끝났어. 그나저나 너 그 머리 장식이랑 팔찌는…….”
하일이 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저가 선물한 팔찌가 있는 왼손을 잡아 올리고는 다정하게 입술을 지분거렸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응……?”
“제가 누이께 예쁨받고 싶어 아양 좀 떤 것인데……, 누이께서는 만족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그, 그게 아니라…….”
어머니가 혹여 의심하시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시면 어떡해. 남매 사이에 선물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게다가 참석자들한테 돌린 까르띠아 머리 장식도 그렇고…….
입 밖으로 뱉어져야 할 말들이 뱉어지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으나, 입 안만 맴돌 뿐이었다. 내가 고민하는 것을 눈치챈 하일이 양 뺨을 쥐고 진득하게 입을 맞춰 왔다. 뜨거운 혀가 내 입 안을 휘저으며 들어왔고, 서로의 타액이 뒤섞이며 질척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오늘 부모님께서는 별장을 매입하러 남부에 내려가셨습니다.”
“……아, 알아.”
“형님께서는 후계자 모임에 나가셨습니다.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들어오실 겁니다.”
“…….”
“제 방 주변의 사용인을 모두 물렸습니다. 누이께서 파티가 끝나자마자 찾아오실 것 같아서.”
와, 영악해.
내 속마음을 읽은 건지 하일은 어깨를 들썩이며 무해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누이만 보면 자제력이 사라져 발정하니 저는 짐승인가 봅니다.”
그가 목 끝까지 잠겨 있던 셔츠 단추를 툭, 툭 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흠칫, 뒷걸음질 쳤다.
“잠깐, 잠깐만 하일.”
그는 잠깐이라는 말에도 눈 하나 꿈쩍 않고 기어코 셔츠를 벗어 던졌다. 흉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 위에 조각처럼 빚어진 복근.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기사인 카일과 달리 얇은 몸 선이 보기 좋았다.
하일이 기어코 바지 버클까지 풀며 내게 바짝 다가왔다. 뒤는 소파였고 앞은 하일이었다. 결국 난 소파에 주저앉아 하일의 팔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앉아서 얘기 좀 해. 응?”
“얘기야 몸을 섞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흣, 하일…….”
자연스레 나를 덮치듯 소파에 앉은 하일이 드레스를 풀며 내 젖가슴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유두를 비틀었다.
“서, 선물, 선물이 너무 과했어. 응? 어머니께서 아시면…….”
우리 사이를 의심하실 수도 있는데…….
하일의 입술에 뭉개져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농염하고도 달콤한 키스에 몸은 솔직하게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아흐……, 내가 안 괜찮……, 아.”
입술, 목, 어깨, 가슴.
하일의 입이 능숙하게 물 흐르듯 가슴에 도착했다. 얄궂게 휜 눈매가 나를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그의 혀는 봉긋 솟아오른 유두를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가, 간지러…….”
하일의 입으로 젖가슴이 먹혀 들어갔다. 따뜻한 입 안에서 가슴이 빨리며 혀가 예민한 유두 주변을 간지럽혔다. 유두를 건들 듯 말 듯 한 태도에 애가 달아 하일의 머리칼에 손을 밀어 넣었다.
“하일, 하이일…….”
깔끔하게 정돈 되었던 머리가 내 손 아래 흐트러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헤집다 말고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자 카일과 똑같아진 모습에 놀라 잠시 멈칫했다.
새삼 둘이 정말 쌍둥이가 맞긴 맞구나 싶다.
카일보다 좀 더 하얗고, 몸 선이 얇을 뿐, 얼굴만 놓고 보면 둘은 쏙 빼닮아 있었다. 평소엔 워낙 성격이 달라 체감하지 못했지만…….
“누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눈치챈 하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제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앞머리를 다시금 정돈했다.
“저는 카일이 아닙니다.”
묘하게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하긴, 제게서 카일을 찾고 있으니 하일의 기분이 좋지 않을 만도 했다. 나는 미안함을 담아 살짝 눈매를 죽였다.
“응, 미안해. 그냥 신기해서…….”
하일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노골적인지라 묘하게 민망했다.
어색한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신기하십니까.”
“응.”
하일은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스스로 제 앞머리를 카일처럼 거칠게 뒤로 넘겼다. 보기 좋게 정돈된 눈썹과 단정한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그러더니 답지 않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누나.”
“……응?”
그의 입에서 나온 낯선 부름에 나도 모르게 눈이 크게 뜨였다. 누나라니. 하일은 항상 나를 누이라고 불렀지,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카일 흉내를 내며 장난이라도 치려는 걸까. 하일이 카일처럼 보기 좋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 지금 누나 보면서 섰는데.”
말투를 바꿨음에도 하일은 하일이었다.
매사에 다급하고 절제력이 부족한 카일에게선 풍겨질 수 없는 하일 특유의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느긋하고 여유로운 포식자 같은 분위기.
“내 좆 빨아 주면 안 돼?”
또다. 저 천진난만한 미소. 아, 정말 그건 반칙이잖아.
“하일……,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닙니다, 정말로 누이를 보며 발정했으니.”
그가 지퍼를 내리고 성난 제 물건을 꺼내 보였다. 검붉은 성기가 바지에서 퉁겨지듯 나왔다. 환한 대낮부터 마주한 노골적인 남동생의 성기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그, 저기…….”
하일은 내 젖가슴을 할짝이다, 나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소파에 눕듯 앉아 있던 나는 순식간에 하일의 품 위로 올라가 있었다.
“누이, 얼른요.”
그가 턱짓하며 제 성기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일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는 나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너 정말…….”
하일의 손이 내 음부로 향했다. 그의 손은 갈라진 살 틈을 비집고 푹 젖은 질구 주변을 더듬거렸다. 그러다 손끝에 애액을 가득 묻히더니 피식 웃었다.
“저만 짐승인 건 아니었나 봅니다. 누이께서도 남동생을 보며 이리 젖으셨으니.”
내게서 흘러나온 액으로 번들거리는 하일의 손을 마주하자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아졌다. 그러자 하일이 한 번 더 내게 물었다.
“혹시 입에 자지 무는 게 싫으십니까?”
답지 않게 천박한 단어를 입에 담아 가며 물었다. ‘자지’를 내뱉는 것 치고 그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부드럽기만 하다.
조각 같은 얼굴과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내뱉는 말이 자지 빨아 달라는 말이라니.
하지만 거절하기엔 내 몸도 이미 묘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엉거주춤하게 하일의 배 위에 올라 타 있던 나는 얼굴을 그의 성기 방향으로 돌렸다. 힐끔, 눈치를 살피자 그가 어서 하라는 듯 싱긋 웃었다.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기둥을 잡고 귀두를 할짝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 이상 팽창할 것 같지 않던 성기가 한 번 더 부풀어 올랐다. 울퉁불퉁한 핏대와 귀두 끝에 맺힌 액마저 탐스러워 보였다. 내가 입을 벌려 하일의 것을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은밀한 부위에 물컹한 무언가가 닿았다.
“아흣……!”
놀라 뒤를 돌아보자 하일도 내 음부에 입술을 문대고 있었다. 그의 혀가 야한 소리를 내며 다물린 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흥분하여 발딱 선 음핵이 하일의 혀끝에 집요하게 농락당하기 시작했다.
“흡, 흐아……, 읏, 하일…….”
하일은 며칠 굶은 맹수처럼 게걸스레 내 음부를 빨아들였다. 여린 점막끼리 맞부딪히고 말캉한 입술이 음핵을 뭉개트리며 짙은 쾌락을 선사했다. 그러다 장난이라도 치는 건지, 이빨로 살점을 살짝 깨물 때면, 멋대로 허리가 들썩였다.
“아, 아으…….”
두 손으로 꼭 쥔 하일의 성기가 한층 더 부풀며 꺼떡였다. 그것을 어설프게 손에 쥐고 쓰다듬으며 가까스로 귀두에 입술을 비볐다. 그러자 하일은 잘했다며 칭찬이라도 하듯 음핵을 핥으며 질구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흣, 흐아…….”
삽입과 애무가 동시에 이루어지자 내 몸은 멋대로 내벽을 수축하며 남동생의 손가락을 먹어치우기 바빴다.
“하, 하일, 흐응, 흐…….”
아찔한 쾌감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덜덜 떨려 오는 허벅지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질펀하게 내 구멍을 탐하던 하일이 손가락을 빼냈다. 안쪽을 헤집던 손이 내벽을 살살 긁으며 빠져나가자, 아쉬움에 작은 탄식 섞인 비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일이 나를 다시금 돌아 눕혔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휩쓸렸다.
쾌락에 잠겨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내 입술 위로 하일의 입술이 포개졌다.
“우응…….”
짙은 신음과 동시에 하일은 천천히 제 성기를 내 질구에 비벼 댔다. 그리고 아주 느릿하게 귀두부터 밀어 넣었다. 좁은 내벽에 하일의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두툼한 귀두가 질구를 꿰뚫고, 곧이어 단단한 기둥이 빨려들 듯 내 안으로 쑤셔 박혔다.
하일은 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안았다. 욕구를 풀기 위해 삽입하는 게 아닌 마치 정말 사랑하는 여인을 안는 것처럼. 아끼는 풍선이 터질까 애지중지 하는 어린아이처럼.
애당초 그가 늘 뱉어 대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 믿는 게 아니었다. 다만, 단순히 자극적인 행위에 유희에 휩쓸린 한순간의 불장난으로 치부했을 뿐.
그는 천천히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고, 세심하게 몸을 쓰다듬었다. 하일의 눈은 꿀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달콤함에 젖어 음욕 아닌 애정으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랑받는 듯한 기분에 가슴이 살랑살랑 간지러웠다.
카일은 제 사랑을 알아 달라 떼쓰는 어린아이 같았다면, 하일은 말없이 제 사랑을 내보이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
“누이.”
“응, 하일.”
“사랑해요.”
살짝 풀린 눈매가 야살스럽다. 하일은 나른한 맹수 같은 표정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평소 봐 오던 하일 같지 않아,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사실 하일은 어딘지 쎄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쿡쿡 웃으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나도……, 좋아해.”
사랑한다 말하려다 좋아한다는 말로 바꿨다. 하일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와 동시에 하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흣, 흐으…….”
깊은 곳까지 푹, 들어가 있던 성기가 안쪽을 헤집으며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그러다 다시금 내벽을 사정없이 찌르고 들어가며 나를 깊은 쾌락으로 몰고 갔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마치 내 몸을 맛보려는 듯이, 사정하는 게 목적이 아닌 사람처럼, 목, 어깨, 팔뚝, 가슴, 배, 허리. 온몸을 어루만져 주며 달콤하게도 나를 안았다.
그런 하일을 보는 내 기분은 어딘지 이상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구는지도 의아했고.
그의 성기가 앞뒤로 왕복할 때마다 잔뜩 흥분한 몸은 할딱이며 거친 숨을 뱉어 댔다. 따뜻한 하일의 품에 안겨 있자, 오롯이 그에게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온몸이 하일을 원했고, 하일만 생각했다.
하얀 몸뚱이 위에는 그가 남긴 붉은 꽃잎들이 색스럽게도 피어올랐다. 하일의 입술이 여린 살점을 빨아들이며 자국을 남길 때면, 찌릿한 고통에 몸이 굳어졌으나, 달래듯 음핵을 살살 문질러 주면 그새 또 교성을 내지르며 녹아들 듯 부드러이 그를 끌어안았다.
마치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도, 마음도.
“하일, 하일…….”
이대로라면 분위기에 취해 그에게 사랑을 속삭일 것만 같았다.
하일은 제 성기를 뿌리 끝까지 처박은 채, 멍하니 나를 내려다봤다. 시선은 음욕에 가득 차 진득하다기보다, 첫사랑에 빠진 풋소년 같았다.
낯선 모습에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하일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다른 영애들 틈에 있는 누이를 봤더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왜?”
“모르겠어요, 누이가 사교 활동을 하는 걸 보니 이상해요. 기분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가 힘없이 내 몸 위로 기대며 쓰러졌다. 하일의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흐트러졌다.
“그냥, 누이께서 평범한 다른 영애들처럼 티타임을 갖는 걸 보니…….”
“…….”
“이번에도 저희를 떠나실 것 같아 무서웠습니다.”
이번에도?
말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답지 않게 어리광 부리는 하일 탓에 ‘이번에도’가 무슨 뜻인지 묻지 못했다. 하일은 풀 죽은 고양이처럼 한껏 시무룩한 모양새로 내게 뺨을 부벼 왔다.
“내가 떠나다니……,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나는 작게 키득이며 대답했다. 카일도 아니고 하일이 이런 아이 같은 말을 하다니. 조금 의외였다.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하일이 싫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의 양 뺨을 쥐고 가볍게 입을 맞추자 하일이 더욱 시무룩하게 눈매를 죽였다.
“……가지 마세요.”
“내가 어딜 간다고 그래.”
“어디든, 평생 저희와 함께할 거라고 약조해 주세요. 누이.”
단단한 두 팔이 내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하일의 심장은 쿵, 쿵 뛰는 소리가 들릴 만큼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확답을 줄 수 없었다. 애당초 그들과의 관계는 단순히 쾌락 중심의 관계 아니던가.
‘사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해도 법적으로 가족이니까…….’
그들이 미남이고, 내 취향이라는 것과 별개로 우리는 숨겨야 하는 관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소설 속이다.
이미 원작이 틀어지긴 했지만, 결말까지 바뀔지는 모를 노릇이다. 내가 지금 이들과 이런 관계를 갖는다 한들, 정말 원작과 달리 황태자와 결혼하지 않고 다른 흐름대로 갈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더 심한 경우에는 내일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몇 년째 돌아가지지 않고 있긴 하지만…….
그 순간일까. 한창 고민에 잠긴 내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이,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하일?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잘못했다니? 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 누이…….’
멋대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하일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울고 있는 건지 물기가 가득 차 있었다. 늘 그에게서 풍겨지던 특유의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일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 문제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소리, 지금 눈앞의 하일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기억 저편 속에서 멋대로 끄집어내진 것 같은…….’
드문드문 끊긴 목소리는 옅은 두통과 함께 울려 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살짝 미간을 구기며 관자놀이를 짓누르자 하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말간 벽안에 나를 향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와 눈을 마주했다.
‘……누나, 행복했어?’
또 이상한 소리가…….
한 번 더 울려 온 목소리에 미간이 좁혀졌다.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 또한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불행해. 죽고 싶을 만큼.’
카일. 카일 아르젠트.
‘그래도 나는 다시 누나를 사랑하겠지. 이번 생도, 다음 생에도, 그 다다음 생에도. 계속 끝없이.’
왜? 왜 그렇게 슬픈 목소리야? 불행하다니? 카일, 네가 어째서?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다. 심장은 어느새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였다.
확실한 건, 나는 빙의 후 그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누이, 표정이 안 좋아요.”
“…….”
“괜찮으십니까?”
나는 작게 괜찮다는 말을 읊조렸다. 그러자 하일이 다정히 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애정과 걱정이 잔뜩 묻어 나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가 살짝 눈매를 휘어 웃었다.
사랑에 빠진 하일의 눈빛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관계였다.
하일의 눈은 여전히 내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일, 나는…….”
그러자 하일이 곧장 입을 맞추며 내 말을 막았다. 마치 내게서 나올 말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걸 눈치챈 것처럼.
“차라리 대답하지 마세요.”
하일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불안에 가득 찬 목소리가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히 내게 속살거렸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저희를 사랑하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하일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제발 곁에만 남아 주세요. 누이.”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하일이 이런 말을 뱉는 건지. 그저 그의 목소리에 속상함과 불안감이 가득 차 있어서, 안쓰러운 마음에 하일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 * *
관계를 마치자, 하일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는 언제 미리 물을 받아 둔 건지 따뜻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아주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나를 욕조에 담갔다.
“아……, 좋다.”
“좋으십니까?”
“응, 따뜻하고 나른해.”
노곤노곤하게 풀어진 나를 보며 하일이 쿡쿡 웃었다.
“입욕제도 풀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해도 괜찮은데…….”
“제가 해 드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하일은 한참 동안 입욕제를 고르더니 푸른 은하수 같은 병을 하나 들고 왔다. 욕조에 풀자 반짝이는 마법 효과와 동시에 물색이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와, 예뻐…….”
내가 웃자 하일도 따라 웃었다. 마치 엄마를 따라하는 어린아이처럼.
하일은 한참 동안 신기해하는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이, 같이 씻어도 됩니까?”
“흐응……,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일을 쳐다보자 그가 태연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고는 내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옷을 벗더니, 자연스럽게 내가 있는 욕조에 따라 들어왔다.
“이거 봐,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몸부터 들이미는 거.”
“혹시 같이 씻기 싫으신 겁니까?”
“그건 아닌데…….”
괜히 또 씻다 말고 좆부터 세울까 봐 그러지.
내가 뒷말을 삼키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내 속을 읽은 건지 하일이 싱긋 웃으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힐끔 올려다본 하일의 눈동자는, 연푸른 토파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멍하니 하일을 보고 있자 그가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참 동안 내 손목에 박힌 카일의 오러를 쓸어 내렸다.
생소한 감각이었다. 누군가가 오러를 만진다는 건.
하일은 한참 동안 오러를 만지더니 이내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삼십 분만, 딱 삼십 분만 안고 있다 씻고 나가요. 누이.”
“응.”
기분 좋았다. 찰랑이는 따뜻한 물도, 부드러운 하일의 맨살도 전부 기분 좋아서 원작이고 뭐고 이런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하일이 내 가든파티에 잠시 얼굴을 비춰 선물을 돌렸다는 소식이 사교계에 널리 퍼졌다. 덕분에 썰렁하던 내 책상 위는 여기저기서 보내 온 파티 초대장으로 가득해졌다.
‘하긴,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향한 애정을 과시했으니…….’
혼인을 앞둔 영애들이라면 내게 잘 보여 하일의 약혼녀 자리를 꿰차려 들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초대장을 살피다 이내 힘없이 책상 위로 늘어졌다.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황태자는 메리드 자작 영애와 혼인을 추진하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원작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사라진 셈이다.
“후우…….”
기지개를 켜자 마침 누군가가 창문을 툭툭 두들겼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카일의 전서구였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곧장 창문을 열고 편지를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전서구에게 물을 건넸다. 전서구를 통해 주고 받는 편지인 탓에 종이가 꾸깃꾸깃했지만, 그래도 카일의 편지라니. 기분이 좋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었다.
하나뿐인 나의 티아에게.
누나, 답장 잘 받았어. 그나저나 밥도 잘 먹고 디저트도 잘 먹는다니. 왠지 조금 섭섭한데? 이거 나 없다고 오히려 더 잘 사는 거 아니야?
농담이고, 걱정했는데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그거 알아? 편지지에서 누나 향기가 나서 편지 쓰는 누나 모습 상상하면서 혼자 해 버렸어. 이런 말 적으면 누나 얼굴 빨개져서 오두방정 떨겠지? 하지만 꼴리는 걸 어떡해.
누나는 나 안 보고 싶어? 나는 누나 생각만 해도 미칠 거 같다. 보고 싶어. 단순히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누나 안고 있고 싶어. 누나한테 나는 냄새 맡으면서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좋을 거 같아.
아- 짜증나. 이래서 북부 같은 거 오기 싫었는데…….
티아야. 나 진짜 너 보고 싶어. 여기서 어떻게 혼자 반년을 더 버티지? 아무리 생각해도 누나 없이 반년은 절대 무리인 거 같아. 최대한 빨리 끝내 버려야겠어.
누나는 하일 있으니까 외롭지도 않겠다? 나한텐 누나밖에 없는데…….
투정 가득한 카일의 편지를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북부에 간 게 어지간히도 싫었던 모양이다. 하긴, 좋을 리가 없지.
‘그런데 왜 간 거지……?’
괜히 아무 이유 없이 갔을 리 없는데, 도통 말을 안 해 주니 알 길이 없다.
카일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고작 스무 살짜리 남자애에 불과한데, 그 어린 나이에 북부에서 고생하고 있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삼 달여 먹고 있다고 했지? 나중에 나 돌아가면 얼마나 체력 늘었는지 확인해도 돼? 물론 밤에.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말에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누가 볼까 걱정스러워 후다닥 편지를 가렸다. 그러자 물을 다 마신 전서구가 깃털을 정리하며 꾸룩꾸룩 소리를 냈다.
‘전서구도 귀하다고 들었는데…….’
카일이 굳이 그 귀한 전서구를 통해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식적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다가 누가 읽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내가 부재중인 사이 부모님이 확인해 보실 수도 있고, 집사나 하녀장이 보게 될 가능성 또한 아주 없지는 않았다.
문득 편지지에서 느껴지는 카일의 향수 냄새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바보, 향수 같은 거 귀찮다더니…….’
배시시 웃으며 편지지에 코를 대고 살짝 킁킁댔다. 확실히 카일의 향수 냄새였다.
옅은 라임과 밤부가 섞인 향.
언젠가 내가 선물했던 향수였다. 내가 선물한 향수이자, 카일이 유일하게 사용하는 향수.
하일과 달리 카일은 향수를 잘 뿌리지 않는 편이었다. 중요한 연회를 갈 때만 뿌리곤 했는데, 그마저도 귀찮다고 툴툴거리곤 했다. 그런 그가 굳이 잘 사용하지도 않는, 더욱이 전장이나 다름없는 북부에서 향수를 꺼내 편지지에 뿌렸을 생각 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고 배길 수 없다.
‘귀찮아. 그거 꼭 뿌려야 해?’
‘향수? 몰라, 어디 서랍에 넣어 두긴 했어.’
향수 같은 건 귀찮다고 투덜대던 카일이 떠올라 괜스레 더 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북부 출정 끝나면, 누나랑 단둘이 휴양차 남부라도 가고 싶어.
여기 있으니까 진짜 누나 생각밖에 안 나. 아, 괜히 왔나. 조금 후회된다. 그래도 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긴 한데…….
그리고 내 몸 걱정은 하지 마. 누나는 아직도 나를 너무 어린애로만 보는데, 내가 다치는 일은 정말 드물어.
누나, 나 소드 마스터야. 알지? 가끔 보면 누나는 내가 누구인지 잊는 거 같아. 바보.
아, 그리고 황태자는 그냥, 좀 위험한 놈이라 그래. 근데 아마 약혼도 진행하고 있으니, 누나한테 딱히 접근은 안 할걸.
여하튼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하일한테 말하고, 다른 남자랑 놀지 말고.
아아- 진짜 북부 싫다. 음식도 맛없고, 춥고, 못생긴 마물이나 잡아야 하고.
아, 그리고 북부에 몇백 년 동안 봉인 된 마검이 있다던데, 온 김에 그거나 한 번 찾아볼까 봐.
그럼 잘 지내고 있어. 또 편지할게.
사랑해, 내 티아.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편지 마지막 구절을 보며 쿡쿡, 웃었다. 투정부리는 카일이 귀엽기도, 보고 싶기도 했다. 멍하니 그가 쓴 편지를 다시 곱씹어 보던 중, 조울증이라도 온 것처럼 갑자기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확실히 위험한 관계였다. 누구 하나 마음이 뜬다면 깨질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 깨진 관계의 파편이 주변에까지 튀어 지저분하게 끝날 수밖에 없겠지.
사실상 작두 위에 아슬아슬하게 셋이 함께 올라탄 것이나 다름없다.
나라고 그들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 관계의 엔딩이 해피엔딩이 아닐 것만 같아 두려울 뿐. 누군가가 이건 행복할 수 없는 관계라고 더럽다며 손가락질할까 무서웠다.
그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관계의 끝이 파멸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상처받고 싶지도 않고, 상처 주고 싶지도 않다.
어느새 목을 축인 전서구가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억지로 펜을 들고 써지지 않는 편지를 써내려 갔다.
어딘지 울적했다.
* * *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종종 영애들과 티타임을 가졌고, 전서구를 통해 카일의 소식을 전해 들었으며,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
나는 그날 가든파티에 나타났던 하일 덕분에 금방 사교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나름 또래 친구라고 할 법한 영애들도 생겼다.
겉으로만 본다면 평범한 귀족 아가씨의 삶이었다.
밤마다 동생과 몸을 섞는다는 것을 빼면.
물론 매일같이 그런 짓을 한 건 아니었다. 어떤 날은 별다른 진득한 스킨십 없이 가만히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격하다 못해 몸이 부서질 만큼 그가 나를 탐할 때도 있었다.
낮에 하일은 무얼 하는지 몰라도 꽤 바빠 보였다. 듣자 하니 황궁도 종종 들락거린다는 것 같은데…….
밤새 하일에게 시달린 탓에 모처럼 늦잠을 잔 날이었다.
“아우웅…….”
찌뿌둥해.
하일이 얼마나 제 흔적을 남겨 놨는지, 하얀 몸이 울긋불긋하게 얼룩져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외부로 노출될 일 없는 속살에만 흔적을 새겼다는 점이다.
‘카일이면 모를까, 하일이 이런 건 꼼꼼하니까.’
허벅지 안쪽 깊숙이 새겨진 그의 잇자국을 보고 있자니 하일과 보낸 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스레 민망함에 하녀의 도움 없이 홀로 옷을 갈아입고는 방을 나섰다.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밤새 하일과 뒹굴어 댔으니, 배고플 만도 했다. 나는 활기차게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며, 먼저 아침을 먹고 있을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
그러나 다섯 명이 앉아 복작복작했던 평소와 달리, 오늘 다이닝 룸에는 카제프만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침이에요.”
덕분에 활기찼던 아침 인사는 개미처럼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날 황궁 테라스에서 관계를 가진 후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 카제프였다.
부모님은 최근 외출이 잦으시니 그렇다 쳐도…….
‘하일은 어디 간 거지……?’
예상치 못하게 카제프와 단둘이 남겨진 상황에 몸이 어색하게 굳었다. 식탁으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런 나와 달리 정작 카제프는 태연해 보였다.
그냥 음식을 방으로 올려 달라고 할까 고민했으나, 그러자니 너무 노골적으로 피하는 것 같아서 나는 마지못해 그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카제프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티아.”
언제나처럼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부름에 몸이 흠칫 떨렸다. 내가 긴장한 것을 눈치챈 건지, 카제프의 표정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미안하다.”
대뜸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테라스에서 섹스한 거? 근데 그건 내가 먼저 하자고 했었는데? 아니면 조금 과격하게 섹스한 거? 에이, 그 정도야 카일도 늘상 그 정도는 했었는데…….
음, 그럼 뭐지? 설마 엉덩이 때린 거? 아, 그래. 그건 좀 얼얼하긴 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많이 아프진 않았으니까…….”
아침부터 카제프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민망했다. 애꿎은 커트러리만 만지작거리며 음식이 내와지길 기다렸다. 다이닝 룸엔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우리 둘 사이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나도 그저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킬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주방 하녀가 따끈한 오믈렛과 베이컨을 내왔다. 그러나 이 상황이 불편한 나머지 음식이 입 안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포크로 샐러드만 깨작거리며 어서 빨리 카제프가 남은 음식을 모두 먹고 자리를 비키길 기도했다.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시무룩해졌다.
“……많이 불편하지?”
네, 엄청요.
“아, 아뇨, 괜찮아요.”
애써 속마음을 숨기며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제프는 속상하다는 듯 눈을 내려 깔았다.
“얼른 먹고 비켜 줄게.”
낮게 깔린 저음이 미련을 가득 담고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아무 대답도 않았다.
열 살 터울의 오라비와 양녀가 단둘이 밥을 먹는다는 건 확실히 불편한 상황이다. 게다가 자위하는 모습을 들키고 섹스까지 한 사이면 더더욱. 편하려야 편할 수가 없다.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억누르며 삼켜지지 않는 샐러드를 깨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