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도주와 포획 (6/13)

6장. 도주와 포획

비비아나 도에테는 도망치고 있었다.

도에테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도 감수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모두 자기기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니, 도에테를 벗어날 때였다면 망설임 없이 목을 매달고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빈홀프 공작가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는 살고 싶었다.

비비아나 도에테는 살고 싶었다.

“헉…, 헉!”

오늘은 바로 100번째 밤이 되는 날이었다.

잠들어 있는 자신의 몸을 칭칭 감싸고 똬리를 틀던 거대한 뱀, 그 거대한 뱀을 보고 난 뒤 나흘이 흘렀다.

검고 거대한 뱀…. 몸통은 장정을 두셋 합친 것만큼 굵었고 길이는 끝이 없을 정도로 길었다. 그 차갑고 매끄러운 몸을 비비며 비비아나의 작은 몸을 둘둘 말고 커다란 대가리를 마구 비벼 대었다.

그 뱀 비늘을 새하얀 살갗에 부대끼며 검은 혀로 부드러운 목이며 젖을 쓰다듬고….

“아, 안 돼….”

정신없이 발을 옮기던 그녀의 발에 작은 돌부리가 걸렸다. 비비아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거꾸러졌다. 어둠이 묻어 연한 잿빛을 띠는 눈동자가 눈앞의 블랙 우드 숲을 향했다.

고지가 바로 앞이었다.

비비아나는 자꾸만 푹푹 앞으로 꺾이는 무릎을 겨우 세우고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타닥타닥, 그녀가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 외에는 바람 한 자락 불지 않는 깊은 밤이었다.

“어, 어서…. 어서….”

99번째 밤이 지나고 블랙 우드 숲의 호수에 몸을 담그는 사흘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저주받은 빈홀프 공작가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단 하나뿐이었다.

비비아나가 움직이는 발걸음마다 지켜보는 눈동자가 따랐다. 그녀의 곁을 하루 온종일 맴도는 이들만 수십이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블랙 우드 숲에 올 때만큼은.

“하, 드디어…!”

비비아나는 겨우 블랙 우드 숲에 발을 들여놓고 부들부들 떨리는 무릎을 움켜쥔 채 헉헉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른 등이 들썩이고, 심장을 두드리는 긴장감에 구역질이 치솟는 듯 그녀는 몇 번 욱욱거렸다.

“하….”

비비아나는 겨우 진정된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위를 훑었다.

온종일 사용인들이 따라다니는 그녀의 일상에서, 단 한 번,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바로 이곳.

‘바, 밖에서 벗은 몸으로 어떻게….’

‘그곳은 아가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디서 훔쳐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곳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물론 저희에게 그렇습니다만…. 그곳은 생명을 잉태하고 어린 것들을 기르는 아주 중요한 곳이지요. 그렇기에 공작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만약 겁도 없이 발을 내디딘다면….’

비비아나는 갑자기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집사의 음성을 떠올리며 자신의 마른 팔뚝을 쓰다듬었다.

‘와그작와그작 물어 뜯겨 죽을 겁니다. 뼛조각 하나도 못 남기고…. 남김없이 씹어 먹힐 겁니다. 공작님께서는 공명정대하지만, 용서가 없으신 분이시니까요. 특히 금기를 어겼을 때는….’

비비아나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던 집사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점점 깊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은 낮에 보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낮에는 마치 햇살을 전부 끌어와 이곳에 모아둔 양 따듯하고 빛이 넘쳤는데, 지금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오로로로-

“꺅!”

비비아나는 머리 바로 위에서 갑자기 날개를 펴고 퍼덕이며 날아가는 커다란 올빼미의 날갯짓에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스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것을 불안한 눈동자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머뭇머뭇 걸음을 옮겼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약간의 침착을 되찾은 그녀가 유심히 어둠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쯤 자신의 부재가 들통났을 것이다. 발가벗고 검은 너울을 쓴 채 항상 그녀를 데리러 오는 시녀를 기다릴 시간이었으니, 그이가 가장 먼저 비비아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겠지.

하지만 블랙 우드 숲으로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으니….

‘드디어 그날이지?’

‘각하께서 드디어 …를 얻게 되시다니….’

조용조용 수다를 떨고 있던 하녀들 뒤로 공작의 마차가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것을 분명 확인했다. 저녁 늦게 출발했으니 적어도 아직까지는 돌아오지 않았겠지. 물론 내일 아침까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몇 시간만 늦어도 관계없었다.

비비아나는 이미 공작 성의 사유지를 넘어갈 수 있는 담장의 부서진 개구멍을 발견했으니까. 방향을 찾기가 조금 어려웠으나 그럭저럭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에 익은 나무를 발견하고 새겨 둔 흠집을 찾고 있을 때였다.

어서, 어서 서둘러 도망가야 했다. 그 끔찍한 괴물에게 몸을 농락당하는 것은 그쯤 하면 됐다. 100번째 밤에는 흉흉한 기세를 자랑하는 성기 두 개가 구멍을 무참히 찢고 들어오리라는 것을 비비아나는 예감했으니까. 그녀는 잡아먹히기 직전이었다.

“그것을 보셨나 봅니다, 아가씨.”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가 스쳤다.

“꺄아아악!”

비비아나는 너무도 놀라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입을 우악스럽게 틀어막았다.

“비비아나 도에테가 여기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쳐 알리실 생각이십니까?”

“으, 으읍….”

비비아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손을 떼도 조용히 하실 겁니까?”

그녀는 정신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좋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도, 비비아나는 자신의 귓가를 스치는 숨결이 차갑고 축축하다고 생각하며 숨을 죽였다.

남자는 천천히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뗐다.

“누, 누구야.”

비비아나는 얼른 몇 발자국 앞으로 뛰어나가 휙 뒤돌아보았다.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입을 막고 있던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블랙 우드 숲의 짙은 어둠이 그대로 묻어난 은빛 눈동자는 빈홀프의 것처럼 어두웠다. 그것이 어둠을 헤치고 어깨를 으쓱이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비아나의 바로 뒤에서 다소 큰 덩치의 노파가 한 명 나타났다.

“다, 당신은…!”

“아, 아가씨. 길 좀 여쭈어도 될까요?”

노파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덜덜 떨리는 손을 비비아나에게 내밀었지만, 한 발자국 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킥킥 웃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전신을 덜덜 떨며 키들거렸다.

“누, 누구…!”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아가씨.”

다시 커다란 남자로 변한 그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가씨께서는 제가 드린 앵두를 먹고 ‘그것’의 실체를 봐 버렸고, 이렇게 도망 중이라는 것이 중요하지요.”

신원이 매우 불분명하고 수상쩍기 짝이 없는 남자는 왠지 비비아나에게서 심한 악취라도 나는 것처럼 코를 부여잡고 몇 발자국 슬쩍 떨어지려 했다.

비비아나의 동그란 눈동자에 의문이 담기자 남자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린내가…, 이거 원. 얼마나 치덕치덕 발라 놨는지, 하여튼 욕심만 많은 새끼라니까.”

비비아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피해 달아날 구석을 찾느라 불안한 눈동자로 어두운 숲속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도 모르게 작은 어깨가 뒤로 빠졌던 모양이다. 마치 나 도망갈 생각이요 소리치기도 하듯 말이다.

그는 그것을 보고 손뼉을 짝 쳤다.

“흣!”

비비아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도망가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가씨.”

“다, 당신을 어떻게 믿….”

“사실 그 말은 맞습니다. 당신을 죽이는 게 차라리 저에게는 이득이라서요.”

비비아나가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짙은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제 원한 갚자고 다른 목숨을 상하게 하는 것도 안 될 일이지요. 아가씨는 살아 계십시오.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건, 클로비스, 그 새끼 하나뿐이니까.”

“크, 클로비스…?”

비비아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가, 기억 저편에서 빈홀프 공작의 이름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워낙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라 이름을 떠올릴 일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빈홀프 공작님?”

남자는 고동빛이 도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얼굴을 찌푸렸다.

“예, 맞습니다.”

“나, 나는 그분을 뵌 적이….”

그는 고개를 저으며 까드득 이를 갈았다.

“제 아내를 잡아먹은 천 년 묵은 뱀 새끼. 보셨지 않습니까, 아가씨.”

“서, 설마…?”

그러자 그이는 아래위로 눈동자를 쭉 찢으며 씩 웃었다.

비비아나는 그 소름 끼치는 동공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빈홀프 공작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그녀를 강타했다. 빈홀프 공작가에 사는 사람은 비비아나 빈홀프, 그녀 단 하나뿐이었다.

“이런…. 아가씨를 겁먹게 하고 싶진 않은데 기력이 별로 없습니다. 블랙 우드 숲에 숨어들어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거든요. 워낙 강한 놈이라서…. 어쩌시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물으며 손을 내밀었다. 붉은 혀가 뱀의 혀처럼 날름거렸다. 두 뺨에 짙은 갈색 비늘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비비아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사실 아가씨께 선택권은 없습니다. 도망가든가 여기서 죽든가. 내 아내의 한을 갚고 그 새끼를 죽이든가, 나도 죽든가. 그 둘 중 하나밖에….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손을 잡으세요, 아가씨. 눈 깜짝할 새에 빈홀프를 벗어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비비아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이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비비아나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조물조물하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꽉 끌어안기까지 했다.

“꺄악!”

“이런…. 아가씨 태양을 섬기던 몸이었습니까?”

비비아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남자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 커다랗게 웃었다. 눈꼬리에 흐른 눈물 한 방울까지 닦아 내면서.

“카로테를 섬기던 여자라…. 없어서 못 먹는 성찬이군요. 그 새끼가 왜 그렇게 꽁꽁 싸맸는지 이해가 갑니다. 이렇게 뜨겁다니…. 천 년을 얼음장 속에서 살아온 그 새끼가 왜 그렇게 환장을 했는지 알겠습니다. 기분이 좋네요.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었나 봅니다. 그 빌어먹을 새끼에서 당신을 뺏으면 얼마나 괴로울까…. 다시 평생을 그 추운 곳에서 살아야 할 텐데….”

남자는 희열에 가득 차서 몸을 떨었고, 비비아나는 불안하다는 듯 공작 성을 뒤돌아보았다.

“어서 갑시다! 슬슬 움직이는 것 같으니….”

남자는 그녀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비비아나의 작은 몸을 안아 들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숲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밑에서 부스러지고 부러지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소리, 몸이 공기를 헤치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비비아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한 채 남자의 품에 고개를 처박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순간 남자가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욕설을 흘렸다.

“제기랄….”

“왜, 왜 그….”

“쫓아오고 있습니다. 어서 블랙 우드 숲을 벗어나야 해요. 그래야 제가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그의 얼굴은 눈과 입을 제외하고 대부분 짙은 갈색 비늘로 덮여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눈을 감았다. 사람의 모양을 한 악마였다.

이것을 또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아가씨, 조금 더 세게 잡으십시오. 전력으로 도망가야 하니.”

“으, 응….”

비비아나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옷깃을 움켜쥐자마자, 남자는 펄쩍 뛰어올랐다. 희미한 향을 흘리며 순식간에 모습을 탈바꿈했다.

“흑!”

거대한 뱀의 등에 바짝 엎드려 비비아나가 흐느꼈다.

짙은 갈색에 검은 점을 가진 거대한 비단뱀이 꼬리를 짜르르 흔들며 그녀가 자신의 등 뒤에 잘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긴 혀를 날름거리며 꼬리로 땅바닥을 툭툭 내리쳤다.

그때마다 비비아나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어, 어디로 가…, 꺄윽!”

비단구렁이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아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비비아나는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의 속도에 뜨거운 뺨을 비늘에 대고 몸을 웅크렸다. 눈을 꼭 감고 이를 악물며, 눈을 뜨면 이 모든 악몽이 끝나 있기만을 바라면서….

얼마나 달렸을까.

아름답게 조경되어 있든 나무와 관목이 서서히 끝났다. 블랙 우드 호수는 이미 진작 지났다. 그들은 더 깊이, 더 깊숙이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발견해 둔 개구멍이 있는 쪽과 매우 가까웠다.

비비아나는 쉭쉭 지나치는 바람을 느끼면서 숨소리마저 죽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비비.’

매끄러운 비늘 사이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매달려 있던 비비아나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매끄러운 눈 한 쌍이 반짝이고 있었다.

“흐, 흐윽!”

공포에 질린 신음 소리를 듣고 비단구렁이는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그들의 뒤에 무엇이 붙었는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지 알기라도 하듯이.

‘비비, 왜…. 왜 떠난 거지?’

“아, 아니야….”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딱 하루만…, 딱 하루만 지나면 당신 앞에 다가갈 수 있었는데!’

“꺄아악!”

비비아나의 바로 옆에서 나뭇가지가 터져 나갔다. 검은 숲은 마치 누군가의 의지로 움직이기라도 하듯 천천히 문을 닫았다. 커다란 나무 수백, 아니 수천 그루가 몸을 덜덜 떨면서 나뭇가지를 넓게 펼쳤다.

그들을 그물 안에 가두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결국 갈 데가 없어진 비단뱀이 스르르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커다란 몸이 펄떡였다.

“악!”

비비아나는 그의 몸에서 굴러떨어져 차가운 흙바닥에 엉덩이를 찍었다. 생기를 잃고 바짝 마른 나뭇잎을 움켜쥐며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비단구렁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칫…. 역시 역부족이었나.”

비비아나는 어둠을 헤치고 달려오는 거대한 뱀의 형상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물을 가르듯 부드럽게 기어 온 그것이 천천히 멈춰 섰다. 갈색 비늘을 감추지도 못한 구렁이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그의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비비아나 도에테에게 원망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클로비스.”

검은 눈동자가 다시 눈앞의 사내를 향했다.

검은 뱀은 압도적이었다. 거대한 산을 마주한 것처럼 커다랗고 웅장했다. 체구가 주는 위압감도 말할 것 없었지만, 그것이 흘리고 있는 기운은 미물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대하고 대단했다. 그가 내뿜는 기세에 초목이 덜덜 떨었다.

“쿨럭!”

검은 뱀의 기운에 맞서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제 몸을 보살피지 않고 복수에 미쳐 블랙 우드로 숨어들어 오면서 기력이 많이 상한 상태였고, 천 년의 삶을 살고 마지막 하루를 남겨 둔 뱀의 기운은 이제 신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은 남자가 욕설을 내뱉었다. 도주에 실패한 그는 빠르게 노선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제 뒤에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물리고 있는 비비아나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목을 콱 움켜쥐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꺄, 꺄…!”

비비아나는 비명도 다 내뱉지 못하고 자신의 목을 움켜쥔 차가운 손을 세게 잡았다. 허공에 뜬 발을 동동거렸으나 땅은 닿지 않았다. 그녀는 겨우 희미한 숨을 내쉬며 헐떡였다.

“어디서 늙은 시체 비린내가 난다 했더니….”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던 곳에는 헌앙한 미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로, 로비…?”

그는 매끄러운 구슬 같은 검은 눈동자로 제 여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우악스러운 손과 붉은 얼굴로 콜록거리고 있는 비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다 늙은 뱀 새끼가 구덩이에서 가만히 자다 뒤질 것이지…. 감히, 감히 어딜….”

“네놈에게 내 아내의 목숨값을 받아 내지 않고는 죽을 수 없지.”

검은 눈동자가 의문을 품고 세로로 길게 찢어진 짙은 노란색 눈동자를 향했다.

그 무심한 시선에 발끈했는지, 그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 비비아나의 숨통을 죄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크, 클로비스 네놈이 목을 부러뜨려 죽인 내 아내 말이다! 붉은 비단구렁이!”

“아, 아아….”

클로비스 빈홀프는 미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는 죽어 가는 이의 시선도 단번에 잡아끌 만큼 야살스러웠다. 색기가 줄줄 흘렀다.

“감히 나의 권역인 이 블랙 우드에 몰래 기어들어 와서 이제 갓 태어난 어린 것을 몇이나 잡아먹은 더러운 배신자 말인가?”

“배, 배신자라고 하지 마!”

“다른 구역을 침범하는 걸로도 모자라 새끼 뱀을 잡아먹고서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어디 먹을 것이 없어 이제 막 비늘이 마른 어린 것을…. 새끼를 잃고 울부짖었던 나의 백성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군. 그이들에게 나는 맹세했다. 감히 잔악하게 일족의 아이들을 잡아 죽이고 그 시체를 뜯어 먹은 배신자를 가장 처절하고 잔인하게 죽여주겠다고.”

클로비스의 음성은 냉혹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은 일말의 자비였다. 네 죄는 아니었으므로. 그런데 감히 나의 권역에 숨어들어 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것을 꾀어내? 그것도…, 그것도 감히 나의 반려를?”

검은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클로비스는 입을 다물고 한 손을 내밀었다.

“비비.”

비비아나를 약간 비켜 서 있던 클로비스가 그녀를 향해 완전히 몸을 틀었다. 덕분에 그녀는 희미한 달빛 사이로 남자의 숨겨진 이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흐윽…!”

그녀가 볼 수 없었던 왼쪽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와 그녀의 사이를 빛이 지날 때마다 조리개처럼 확장되었다가 줄어들며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오른쪽 눈 밑의 야한 눈물점은 여전한데, 왼쪽 귀밑과 목, 그리고 뺨에 검은 비늘이 약간 번져 있었다. 비비아나의 꿈속에 나와 그녀를 연신 물고 빨고 휘젓던 남자는 바로 클로비스 빈홀프, 검은 뱀의 왕이었다.

“아아….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비.”

클로비스, 그녀의 로비는 상처받은 듯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비비아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의 모양은 각기 달랐지만, 두 눈동자에는 공통적으로 배신감과 충격, 혼란이 서려 있었다.

“오늘 하루만, 딱 오늘 하루만 잘 넘어갔다면 이런 모습은 안 보여 줘도 됐을 텐데…. 왜, 대체 왜 그랬지?”

로비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가슴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젖은 음성으로 비비아나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는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가슴을 꾹꾹 문질렀다.

“심장이…, 심장이 너무 아파, 비비. 당신이 날 떠나니까. 당신이 날 버리고 도망가니까….”

검은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너무 아픈데.”

클로비스의 붉은 미소는 짜르르 심금을 울렸다. 비비의 날 선 경계가 한껏 사라질 만큼 야릇하고 뇌쇄적이었다. 마치 한순간에 가해자는 비비아나요 피해자는 클로비스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로비를 달래기 위해 말을 고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고개를 저었다.

“이리 와요, 비비.”

커다란 비단구렁이가 비비아나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뵈지도 않는 걸까? 당장이라도 가는 목을 꺾어 버릴 것 같은 구렁이 따위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걸까.

“손만 뻗어요, 비비아나. 그러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제, 제기랄! 클로비스 네놈의 반려를 내 손으로…, 읍!”

클로비스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검지로 입술을 꾹 눌렀다. 비비아나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감히 끼어들지 말라는 듯. 정말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비단구렁이는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닫았다.

어마어마한 기세가 그의 몸을 꽝꽝 얽매고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무형의 기세를 물리력처럼 휘두를 수 있다니! 이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능력만 있으면 백 리 밖에 떨어진 이의 목을 부서뜨릴 수도 있을 테니까.

비단구렁이는 뱀의 왕이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와그작 부러뜨릴 수 있었음을. 클로비스가 처음부터 그를 터뜨려 죽이지 않은 것은 다만 이 작고 연약한 인간 여자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작전임을 깨달았다.

왕의 손에 아내가 목이 뜯겨 죽은 지 벌써 사백 년, 온종일 이를 갈며 기력을 모으고 또 모았다. 비겁한 줄 알면서도 이길 자신이 없어 1000살이 되는 왕이 가장 약해지는 날, 바로 성체가 되는 날을 노렸다.

뱀으로 태어나서 가장 연약한 날, 바로 알에서 태어나는 날과 비늘을 벗는 날이었다. 마지막 비늘을 벗고 성체가 되는 바로 그날. 가장 연약한 날을 노려 접근했건만…!

“비비, 제발…. 날 선택해.”

구렁이는 제 온몸을 억누르고 마음대로 조종하려 하는 왕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얼굴이 터질 정도로 힘을 주고 버텼으나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질 뿐 미동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왕의 마리오네뜨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말하지 못한 것, 사과할게.”

왕은 가식적인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당신이…, 당신이 날 싫어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로비는 견디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커다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내 실체를 알면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할지. 지금처럼 날 역겹다는 눈으로 바라보리라는 것 이미 알고 있었어.”

“아, 아으….”

구렁이의 손에 목을 졸린 채 비비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뱀을 싫어하니까.”

로비는 모든 기력을 다했다는 듯 손을 툭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 또 다른 눈물방울이 두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은 한 점 티끌도 묻지 않은 깨끗하고 고결한 사람이지만, 나는…. 나는 음습하고 더러워서 가까이만 가도 당신은 질겁하고 도망가겠지!”

“아, 아니…, 흣!”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었어!”

클로비스가 비비아나를 향해 절규했다.

“비록 이런 역겨운 뱀으로 태어났어도, 당신처럼 고결한 여자에게 사랑받고 싶었어. 모두 나를 더럽다 욕해도, 당신은, 당신만은…. 사랑해, 비비아나. 사랑해….”

길게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단단한 턱에 맺혔다가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와 붉은 입술.

비비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붉은 입술. 자신의 온몸을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바닥. 그리고 젖은 자국을 남기던 서늘한 혀….

모든 것이 클로비스 빈홀프였다. 자신을 씹어 먹으리라 생각했던 거대한 뱀은 그녀의 로비였다.

비비아나의 전신을 쓰다듬으며 아름답다, 사랑스럽다고 말해 주었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던 단정하고 예쁜 입술. 빛이 나는 듯 반들반들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로비….

그랬다. 그는 바로 비비아나의 로비였다.

그것을 깨달은 비비아나가 힘겹게 손을 내밀었다.

“로, 로비….”

“비, 비비아나?”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비비아나는 그를 향해 일그러진 미소를 보내며 내뻗은 손을 까딱였다.

“으….”

목을 죄어 오는 손아귀의 힘이 점점 대단해지고 있었다. 숨이 모자라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그때, 그녀의 목을 쥐고 있던 비단구렁이가 클로비스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모두 왕의 뜻대로. 구렁이의 의지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비비아나는 차가운 땅에 떨어져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콜록콜록 숨을 급하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마른 나뭇잎을 움켜쥐고 차가운 흙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달아오른 이마에 냉기가 닿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죽어!”

비비아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거대한 구렁이로 변한 남자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클로비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클로비스는 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것처럼 굵고 뾰족한 이빨 앞에 무방비하게 서 있었다.

“크, 클로비스….”

그는 듣지 못했는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커다란 이빨에 스스로 목을 내미는 꼴이었다. 거대한 이빨이 그의 어깨를 와그작 물어뜯었을 때, 비비아나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클로비스!”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다, 다치지 말아요!”

그는 슬픈 눈동자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떠난 삶을 사느니…. 그냥 죽겠어.”

그리곤 마치 삶에 대한 모든 미련을 내려놓은 것처럼 커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어깨를 무참하게 박살 내고 안으로 파고드는 섬뜩한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 말이다.

“아, 안 돼! 크, 클로비스!”

비비아나가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떠, 떠나지 않을게요!”

그녀는 힘이 풀린 무릎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면서 덜덜 떨리는 다리로 새끼 사슴처럼 휘청휘청 달렸다. 비비아나는 절박하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구렁이는 클로비스를 돌돌 말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거대한 몸으로 죄어 터뜨려 버릴 것처럼.

“다, 다시는! 다시는 떠나지 않을게요, 로비!”

순간, 거대한 몸뚱이에 감겨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요망하고 사특한 뱀의 왕, 클로비스 빈홀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처연하고 미려한 미소를 지으면서.

“비비….”

그가 입술을 핥았다.

“내 곁에 있어 줄 건가?”

“응, 응. 내가, 내가 당신의 곁에 있을게요, 로비!”

“영원히.”

“네, 영원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짓던 로비가 별안간 고개를 저었다. 다시 눈을 감아버리자 그녀는 애가 타서 죽을 것만 같았다.

“또다시 날 떠난다면 난 너무 아플 거야. 이런 고통을 거듭 겪고 싶지는 않아. 차라리 지금….”

비비아나는 로비가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저, 절대로!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야! 당신 곁에 언제나, 평생 함께할게요!”

비단구렁이의 움직임이 멎었다.

뱀의 왕이 씩 웃었다.

“내가 뱀이라도.”

“당신이 그 무엇이라고 해도.”

“내 곁에서 평생….”

비비아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신 곁에서 평생….”

순간, 감히 왕의 몸을 감싸고 있던 늙은 비단구렁이의 몸통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끼에에에-

자신의 의지라고는 하나도 없이 왕에게 이용당하기만 한 구렁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두었다. 비비아나의 발치에 커다란 살덩어리가 툭툭 떨어졌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비비.”

아까까지 죽음을 결심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클로비스가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이빨에 찢겨 처참할 정도로 끔찍한 상처를 어깨에 매달고서도 그녀가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로, 로비…!”

비비아나가 얼른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