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성스러운 도에테
도에테 가문은 예로부터 그 신비한 은발로 유명했다. 어떤 피와 섞여도 투명하고 빛나는 머리칼 색은 흐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관 몇을 배출하며 떵떵거렸던 것도 몇 대 전의 일이었다.
비비아나는 침대 위에서 끙끙 앓고 있었다. 온몸이 절절 끓었다. 뭔가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몸 안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는데, 그것을 해소할 길을 찾지 못해 용트림을 쳤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몸을 뒤척였다.
뭔가 시원한 것이 필요했다. 매끄럽고 축축한 것.
“하…. 아으….”
열에 들떠 예민한 몸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친 원피스에 젖꼭지가 스치자 찌릿한 통증이 몰려와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쓰라린 젖꼭지를 달래러 간 손이 가슴에 붙어버렸다.
“하읏….”
작은 손은 아픈 곳을 문지르다가 천천히 동그란 살덩이를 움켜쥐었다.
“흣…!”
뭉개질 만큼 몰캉한 것을 부드럽게 주무르자 젖꼭지에서 짜르르 전류가 흘렀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몸 안으로 퍼져 자궁을 은밀하게 흔들었다. 저릿한 감각에 밑이 가려웠다.
“가려워…. 긁고 싶어….”
비비아나의 손이 꿈틀꿈틀 가랑이 사이로 향했다.
이성을 갖추고 있다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생동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제 몸에 손을 올려 본 적이 없었다. 혼자서 몸을 씻을 때도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재빠르게 몇 번 씻어 내고 만 곳이었다.
“하응….”
그 습한 곳에 손가락이 닿았다.
비비아나는 놀라운 느낌에 눈을 떴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작은 손끝이 갈라진 틈을 세로로 길게 쓸었다.
“하응!”
둥글게 말고 있는 허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젖은 속옷을 슬쩍 옆으로 젖히고 손가락을 밀어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아가씨.”
“흣!”
비비아나는 어깨를 떨며 사타구니에서 얼른 손을 뺐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쭉 펴고 이불을 덮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더러운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살진 소로 변해 푸줏간으로 잡혀간 어떤 이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힘이 없는 와중에도 짧은 기도를 올렸다.
“드, 들어와!”
도에테 가문의 계집종이 종종종 들어와 그녀의 머리맡 탁상 옆에 약과 물을 내려놓았다.
“아가씨….”
비비아나는 푸석푸석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뜨거운 이마를 짚었다.
“오늘은…, 오늘은 넘어가면 안 될까? 정말 너무 몸이 안 좋아서 그래. 열도 있고, 기침도 하고….”
“죄송합니다, 아가씨. 백작님께서 하루도 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소라면 한숨을 쉬고 따라 일어났을 그녀이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생리에 감기가 겹치면서 당장이라도 뜨거운 침대 속으로 파고들고 싶을 만큼 아팠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거칠거칠했고 뺨은 열로 인해 붉었다.
“이렇게 아픈데도?”
“죄송합니다, 아가씨.”
비비아나의 시녀는 그녀의 눈동자도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
비비아나 도에테는 별 볼 일 없는 도에테 가문에서 무려 몇백 년 만에 은발에 은안을 타고났다. 대대로 은발에 은안을 타고 난 이들이 대신관 직을 맡곤 했으니 그 기대가 얼마나 컸으랴.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도에테 백작의 설계대로 살았다. 비비아나를 카로테 대신관으로 만들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콜록, 콜록!”
비비아나는 기침을 하며 어지러운 이마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열이 올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뭔가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일상은 똑같았다. 새벽 네 시에 기상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아침 기도를 두 시간 동안 드렸다. 물론 그 내용은 전부 도에테 가문의 도약에 관한 것이었다. 새벽 여섯 시, 아침을 먹는다. 도에테 백작은 그녀에게 한 번도 기름 냄새가 나는 것을 허락해 준 적이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파 흰죽을 조금이라도 더 청하면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맞았다. 아무것도 욕망하는 것이 없어야 진정한 신의 사자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침 일곱 시부터 따분한 경전을 읽고 필사를 하며 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가끔 경전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외는 시험을 보곤 했는데, 한 자라도 틀리면 아주 곤욕을 치렀다. 그때는 정말 몇 날 며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저녁 여덟 시, 얼음물에 두 시간 동안 알몸을 담그는 고행이 끝나면 드디어, 드디어 비비아나의 일과가 모두 끝이 났다.
“그래, 네가 무슨 힘이 있겠니. 내가 미적거리면 너만 곤란해질 뿐이지….”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비비아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몸이 비틀거리자 얼른 달려온 시녀가 마른 등과 팔을 붙들었는데, 펄펄 끓어오르는 열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너, 너무 뜨거우….”
“괜찮으니 어서 가자. 차라리 빨리 해치우고 끝내고 싶어.”
비비아나는 시녀의 몸을 털어 내고 겨우 발걸음을 타박타박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날 얼음이 언 계곡에 몸을 담갔다간 감기로 앓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잠시 구겨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의 아버지인 도에테 백작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고행하다 죽으면 외려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며 손뼉을 칠지도 몰랐다.
비비아나는 잠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시녀가 얼른 튀어나와 몇 개의 열쇠로 잠금을 풀었다. 비비아나가 스물이 되고 나서부터, 그녀를 둘러싼 감시는 한층 더 촘촘해졌다. 우선 그녀의 주위에는 일곱 살 난 사내아이조차도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별채 주변에는 오로지 여자만 오갈 수 있었고 하루 온종일 감시가 붙었다. 그녀가 알몸으로 고행을 하는 순간조차도.
비비아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백작에게 불려가 남녀의 교합이 얼마나 삿되고 부정한 일인지, 쾌락에 타락한 몸이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한지 적힌 교본을 읽고 또 읽어야 했다. 사실 그 시간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긴 했다. 백작의 집무실은 따듯하게 훈기가 돌았으니까…. 가끔 일부러 느리게 외며 시간을 질질 끈 적도 많았다.
비비아나는 멍한 정신으로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차라리 물속에서 기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기절한 그녀를 건져 내어 닦고 다시 침대 안으로 밀어 넣어 줄 테니까.
그녀는 제 인생이 너무 버거웠다. 힘들고 고되었다. 보람도 욕망도 없는, 실로 지루하고 억지스러운 삶이었다.
“아, 아가씨!”
“으, 으응?”
누군가 바삐 달리며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비비아나가 천천히 멈춰 서서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본채에서 그녀를 모시러 오곤 하던 시녀가 뛰어오고 있었다. 먼 곳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어지러웠다. 비비아나는 다시 한번 휘청였다.
“아, 아가씨….”
그이는 더운 숨을 흘리며 그녀의 앞에서 몇 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설명하기 벅차다고 느꼈는지 대뜸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질질 잡아끌기 시작했다.
힘 한 자락도 실을 힘이 없던 비비아나는 우악스러운 힘에 주르르 끌려가고 말았다.
“고행을….”
“어서, 어서 본가로 납시라는 백작님 말씀입니다. 지금 큰일이 났어요, 아가씨.”
“큰일?”
비비아나는 열로 뻑뻑한 눈동자를 매만지며 느릿하게 물었고, 그이는 속이 터진다는 듯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이….”
“왜, 또 도박이라도 했어?”
“아가씨!”
그이는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붙이고 눈깔을 치켜떴다. 조용히 하라는 것이다. 감히 그 도에테 가문에서 노름이나 일삼는 난봉꾼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면 안 되니까.
비비아나는 헛헛하게 웃음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오라비는 상종 못 할 난봉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여기저기 주먹을 휘두르고 다녔고, 제 누이를 팔아 사기 행각을 벌였다. 노름판에 뛰어든 것은 이미 여러 차례였고, 그럴 때마다 그 뒷수습을 하고 빚을 감당해야 했던 것은 모두 비비아나 도에테였다.
그러니까 그는 비비아나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는 얼마인데?”
그녀는 목이 아파 결리는 흰 목줄기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얼마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삼천만 페르나를 갚은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새….”
“저는 어서 아가씨를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비비아나는 벌써부터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본관의 현관을 넘으며 머리를 짚었다. 골이 찢어질 것 같은데 저 커다란 고함을 견뎌야 한다니 곤욕이 따로 없었다. 고행을 피할 수 있어서 좋아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비, 비비아나!”
비비아나가 들어서자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는데 마치 비비아나가 이 상황의 타개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미 제 딸을 팔아먹은 전적이 여러 번이기에.
“백작 부인, 오랜만….”
“자랑스러운 도에테의 희망!”
술에 취한 듯 불콰한 얼굴로 오라비가 다가왔다. 그는 자신과 다르게 볼품없이 말라서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비비아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악!”
비비아나의 몸이 휘청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뜨거운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는 오라비마저도 말이다.
“이번에도 이년을 팔아 밑천 마련하면 될 것 아닙니까! 도에테 집안의 마지막 희망이잖습니까, 예? 돈 나오는 화수분! 도에테를 먹여 살리는 장래의 대신관!”
“네놈이!”
벼락같은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비아나는 마치 제가 혼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백작의 노성이 그녀의 종아리나 등에 피가 날 때까지 회초리를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네놈이 지금 그걸 다 망쳐 놨어! 누가 코르티잔을 옆에 끼고 노름하러 돌아다니는 오라비를 가진 이를 대신관으로 뽑는다더냐! 후보자뿐만 아니라 그 집안까지 중요하다고 내가 누누이, 누누이 말했는데!”
도에테 백작은 시뻘건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도에테 영식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겨 비비아나를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내팽개쳤다.
“꺄악!”
그녀는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철퍼덕 쓰러졌다. 속이 메슥거렸다. 당장이라도 이 차가운 바닥 위에 쓰러질 것 같았다.
“내가 왜! 내가 왜 이년 때문에 내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우리 모두 잘살 수 있는 길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비비아나가 대신관이 되고 나면…. 너는 성기사 자리 하나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그걸 왜, 왜 몰라!”
오라비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발밑에 쓰러져 힘없이 색색거리고 있는 여동생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됐고. 난 모르겠으니 빨리 저년 팔아 내 빚이나 정리해 줘요.”
“너무 커….”
도에테 백작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액이 너무 크단 말이다, 로하넬! 저번에 삼천만 페르나 처리하며 뒷수습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이, 이억 페르나라니….”
그는 어지러운 듯 눈을 감으며 잠시 뒷목을 잡았다.
“그 정도 금액은 혼담을 제외하면 불가능해! 그러면 이때까지 비비아나에게 들인 공은 다 무엇이 되는데! 비비아나는 대신관 후보 박탈이다!”
아아.
흐릿한 정신으로 그 요란한 공방을 가만히 듣고 있던 비비아나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렇담 그녀는 팔려 간다 해도 좋았다. 이억 페르나에 어디론가 팔려 가도 좋았다. 어떤 끔찍한 곳이라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죽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떡할 건데! 아들내미 죽일 거야? 당장이라도 돈 마련해 오지 않으면 사지를 찢어서 죽인다는데!”
비비아나의 오라비, 로하넬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날 죽일 거냐고!”
정적이 흘렀다.
“어쩔 수 없겠네요.”
희미하고 고요한 목소리가 그들을 스쳤다.
비비아나는 가만히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비친 자신의 미소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관은 포기하세요, 백작님. 세보 강에 영식의 변사체가 떠오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어차피 이번에도 팔아넘길 생각이셨잖아요. 그렇다면 비싸게 팔아넘기세요. 제가 대신관이 되지 못하더라도 백작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을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끝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물론….”
비비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은안이 차례로 백작과 백작 부인, 그리고 백작 영식을 훑었다.
“그 돈,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요.”
“뭐, 뭐야!”
로하넬이 그녀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
비비아나는 입 안에 도는 찌릿한 피 맛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머리가 뒤흔들리며 잠시 생각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차가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아, 쉬고 싶어….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는 영영 눈을 뜨지 않았으면.
***
그 이후로 수많은 이들이 도에테 가문의 현관을 닳도록 지나다녔다. 도에테의 성녀, 비비아나 도에테가 혼인 시장에 급매로 나왔다는 소문이 쫙 깔렸기 때문이다. 다들 쉬쉬하지만 모두들 알았다.
강력한 성녀 후보이던 그녀가 후보직까지 내려놓고 결혼 시장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이유 말이다. 그 집안 장남에게 하자가 있다는 건 제국민이라면 다 알았다.
고결하고 신비로운 비비아나 도에테,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욕심 많은 아비, 비비아나를 낳은 일이 인생 최선이었던 어미, 그리고 둘째가라면 서러운 난봉꾼 오라비….
모두 쯧쯧쯧 혀를 찼다.
“뭐, 오천만 페르나?”
도에테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삿대질했다.
“오, 오천만 페르나라니! 지금 비비아나를 뭐로 보는 건가? 자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우리 비비아나가 유력 대신관 후보였다는 것쯤은 알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제국에 비비아나를 능가할 미모가 있다면 나와 보라 하게!”
마치 상품을 전시하듯이 어디 후작 가문의 심부름꾼 앞에 비비아나를 앉혀 놓고, 말을 빙빙 돌리며 값을 올리던 그가 결국 천박한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비비아나를 곁눈질하며 연신 침을 튀겼다.
“그, 그 비비아나 도에테일세! 그런데 오천만 페르나라니! 오천만 페르나라니…. 어디 팔아먹을 데가 없어서….”
“아버지.”
비비아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도에테 백작이 더 천박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말을 끊어 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를 속으로 비웃으며 그녀가 벙찐 심부름꾼과 눈을 맞추었다.
“음, 벨페 후작가의 청혼서는 잘 받았다고 전해 주시게. 아무래도 오천만 페르나가 부족하신 듯하니 값을 올려 다시 오시면 만나 주실 듯한데…. 어찌하시겠나?”
비비아나는 대신관 후보자로 있을 때 감히 입에 담아 보지도 못한 속물적인 말을 지껄이며 뻔뻔하게 웃었다. 마음 한편에서 뭔가 통쾌함이 올라왔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고 소파에 앉아서 씨근덕거리고 있는 도에테 백작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썩 꺼져!”
도에테 백작은 이미 비비아나를 팔아먹기로 한 그 순간부터 장차 미래의 대신관 부친이라는 감투는 벗어던지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가장 비싼 값에 비비아나를 팔아넘겨야 하니까 말이다.
“어디 널 고작, 고작 오천만 페르….”
“다음!”
비비아나는 도에테 백작의 말을 끊으며 소리를 높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혼인이 결정되고 나면 발붙일 일도 없는 집안이다. 몇 달 잠깐 불편할 수는 있겠으나, 대신관이 되려는 것도 아니니 매질을 당할 일도 없으리라.
비싼 상품에 흠집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 말이다.
“백작님, 아가씨. 빈홀프 공작가에서 오셨습니다.”
“비, 빈홀프?”
도에테 백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신관 밥 좀 먹었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 알았다. 저주받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진 빈홀프 공작가 말이다. 때때로 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몇몇 있었지만, 흑발에 흑안을 가진 가문은 빈홀프가 유일했다.
검은 것이라니…. 불길하고 찝찝하게.
도에테 백작은 괜히 비비아나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로하넬을 살리려면 어떻게든 비비아나를 비싼 값에 팔아 치워야 하니까…. 그것이 저주받은 빈홀프 공작가든 뭐든.
“드, 들이게.”
잠시 몇 마디 음성이 오가더니 선명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건장한 사내가 점잖은 남색 슈트를 입고 들어섰다.
“저가 까마귀인 줄 아는 게로구만….”
도에테 백작은 물건 팔러 온 사람답지 않게 배짱을 부렸고, 부디 좋은 인상을 남기고 팔려 가야 하는 비비아나가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부드럽게 일어나 백작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그이는 비비아나에게 인사치레로 손을 내밀면서도 그녀가 잡아 주리라고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내민 손이 영 대충이었다.
“비비아나 도에테예요.”
그녀가 작고 흰 손을 내밀자 그이는 비비아나의 투명한 눈동자를 힐끔거리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기 전에 몇 번 움찔거렸는데, 마치 정말로 잡기 전에 알아서 피하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좀 웃겼다.
비비아나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움켜쥐었다.
“아….”
빈홀프 공작가의 심부름꾼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비아나는 대충 마주 잡은 손을 흔들고 떼어 냈다.
그이는 비비아나의 손이 떠난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몇 번 손가락을 문질렀다.
“뭐 하나, 앉지 않고.”
도에테 백작의 불퉁한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빈홀프 공작가라니…. 우리 비비아나는 대신관이 되려고 했던 사람이야.”
대신관 후보직이었을 뿐 대신관으로 취임한 것도 아닌데, 백작은 마치 그녀가 평생을 대신관으로 태어나 살아온 것처럼 유세를 부려 댔다.
비비아나는 낯이 뜨거웠으나 커다란 찻잔으로 붉어진 뺨을 가리며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현재까지 최고 금액은 일억 이천만 페르나였다. 로하넬이 빚진 금액만 이억 페르나에 달했으니, 고작 그것에 비비아나를 팔아넘기려고 할 리가 없었다. 보통 결혼 시장에서 오가는 금액이 삼천만 페르나 미만이었으니 사실 오천만 페르나도 많이 쳐준 셈이었다.
“지금도 보시게. 비비아나에게 혼담을 넣으려고 현관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아침에는 더 많았어. 모두 마음에 안 들어 쫓아냈지만.”
그저 마지막 가문이 제시하는 지참금까지 모두 들어보고 싶었을 뿐이겠지만.
일억 이천만 페르나는 제시한 어디 자작님은 직접 와서 비비아나의 손을 잡고 한참을 쓰다듬다 돌아갔다. 처음에는 오천만 페르나를 불렀다가 그녀를 보고 칠천이 되었고, 턱도 없다는 말에 일억 페르나가 되었다. 그리고 키스 한번 받아들이라는 도에테 백작의 말에 일억 이천만까지 몸을 불렸다.
“비비아나의 조건은 이혼 불가능한 혼인이어야 한다는 것일세. 그것은 우리 도에테 가문의 내력이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 혼인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 고귀한 가문이지요.”
그저 돌아온 딸년을 받아 줄 아량이 없었을 뿐이다.
비비아나도 사양이지만.
“그렇네. 도에테 가문은 이때까지 고결한 긍지를 지켜온 가문일세. 비록 속세의 삶을 동경하는 비비아나의 선택을 존중하여 혼인서를 펼쳐 보긴 하네만….”
비비아나는 코웃음을 치켜 아닌 척 차를 들이켰다.
심부름꾼의 매끄러운 검은 눈동자는 햇살에 끌리는 꽃처럼 자꾸만 비비아나를 향했다. 그 시선이 제법 뜨거워, 비비아나는 설마 이 자리에서 저이가 자신에게 반한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에테의 가치를 가장 잘 알아주는 가문과 이 아이를 혼인시킬 참이야. 물론 비비아나의 자존심에도 그것이 옳고.”
비비아나는 이제 이따위 천박한 말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되었다.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다가 또 자신을 훔쳐보고 있던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비비아나가 싱긋 웃자 그이는 얼른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려 도망갔다.
“일억 이천만 페르나.”
그녀가 툭 던졌다.
도에테 백작이 그녀를 찢어 죽일 듯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그 이상으로 부르세요, 부디.”
“후…. 딸아이가 이렇게 말하니 터놓고 말하겠네. 지금 이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금액이 일억 이천만 페르나라네. 하지만 나는 그것도 마땅치 않아. 고작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대신관 후보였던 아이야. 음전하고, 조용하고, 남자라고는 모르고….”
도에테 백작이 이마를 문질렀다.
“남녀가 뒤섞여 돌아다니면서 결혼 전부터 몸을 더럽히는 요즘 것들과는 결이 다른 아이지.”
“얼마를 부르실 건가요?”
비비아나는 제 아비라는 작자를 조금 더 내버려 두었다가는 어떤 소리를 나불댈지 두려워 또다시 끼어들었다.
“비비아나, 아비가 말하고 있는데….”
“일억 이천만 페르나 말씀입니까?”
“빈홀프 공작가에서 감당하기에 너무 큰 금액인가?”
그렇다면 더 이상 이렇게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는 듯, 도에테 백작이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지금부터 제 뒤의 심부름꾼을 전부 다 물려 주신다는 전제하에, 저는 일억 이천만 페르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도에테 백작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비아나와 눈을 마주하려 했으나, 그녀는 고집스럽게 눈길을 피하며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주받았다고 해도 좋고, 악마라고 해도 좋다. 이 집안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아버지, 선택을 하셔야죠.”
“아, 아아…. 거기서부터 시, 시작이라는 말은….”
까마귀 새끼라고 비웃던 도에테 백작의 음성이 절로 공손해졌다.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툭 튀어나온 배를 내밀고 앉아 있던 그가 재빨리 엉덩이를 당기고 몸을 그이 쪽으로 기울였다.
“네, 이제부터 모든 혼담을 물리고 저와 이야기하는 대가로 일억 이천만 페르나를 즉시 지급하겠습니다.”
“지참금은 따로인 건가?”
“물론입니다.”
그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마자, 도에테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문을 닫아걸어! 백작 가문이라도 좋고 공작 가문이라고 해도 좋다. 모두, 물리게! 돈도 없는 것들이 후작이고 공작은 무슨….”
그러자 그이는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당당하게 일억 이천만 페르나를 기입했다. 그의 손가락이 단정하게 움직이는 것을 도에테 백작이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빈홀프의 심부름꾼은 곧 방금 작성한 수표를 도에테 백작 앞에 내밀었다.
“이, 이걸 받는다고 해서 비비아나를 빈홀프에 무조건 보내겠다는 것은 아니야.”
“물론입니다.”
도에테 백작은 그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얼른 그 종이를 움켜쥐었다. 누가 뺏어 갈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 놓고서 큼큼 헛기침을 하며 안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어 두는 것이 퍽 극적이었다.
비비아나는 그 꼴을 힐끔거리며 비스듬하게 웃었다가 또 검은 눈동자와 마주하고 말았다. 어쩐지 자꾸만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저희 쪽에서 아가씨께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아니, 아니.”
백작이 손사래를 쳤다.
“빈홀프 쪽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네. 비비아나는 참을성이 있고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을 할 줄 아는 아이니까. 내가 궁금한 건 지참금이야.”
일억 이천만 페르나 수표를 만지더니 몸이 잔뜩 달았나 보다.
비비아나는 체통도 체면도 내려놓고 ‘돈, 돈’하는 성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소파를 응시했다. 소파 가죽이 많이 닳았네…. 저게 생각해 보면 아주 어릴 적부터 있었던 건데….
전혀 관계없는 생각을 하며 치욕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외면해 보겠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였다.
“그래도 조건을 들어보시는 게….”
“그건 비비아나가 알아서 할 걸세. 비비아나에게 요구하는 걸 테니. 아닌가?”
“네, 맞습니다. 하지만….”
“어서!”
도에테 백작이 고함쳤다.
“어서 지참금을 이야기하란 말이야! 지금 네 말대로 아침부터 기다리던 후작 가문도 공작 가문도 물렸어! 내가 지금 네놈과 마주 앉아 있다고 해서 네놈이 정말로 사람 새끼가 된 줄 알아!”
“아버지.”
현실로부터 조금이라도 도망가려는 자신의 노력을 와장창 박살 내는 시끄러운 고함 소리에 비비아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치들을 모두 물린 건 이이가 일억 이천만 페르나를 걸었기 때문이고, 물론 이이가 이야기하려는 조건은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조건을 내뱉는 대가로 일억 이천만 페르나를 썼는데….”
그녀가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부디 조건이 너무 많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두 가지입니다.”
비비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발설하지 말 것. 둘째, 도망가지 말 것.”
꽤 으스스한 조건이었다. 첫 번째 조건은 기실 별다른 것도 없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다른 그 어떤 혼인 계약서에서도 흔한 말이었다. 부부 사이의 일을 다른 곳으로 퍼 나르지 않을 것, 가문의 비밀을 유출하지 않을 것….
하지만 두 번째 조건과 만나니 그렇게 음산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이야기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라….”
비비아나는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경쾌하게 두드리며 씩 웃었다. 여차하면 목숨을 끊을 생각인 그녀이기에 딱히 어려운 것도 없었다. 만약 다시 도망쳐 돌아와야 하는 곳이 이곳이라면, 차라리 그곳에서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나으리라.
“그 두 가지는 내가 너무 익숙한 일인걸…. 이때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비비아나가 이죽거렸다.
“비비아나…!”
“그러니 그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네가 재가를 받아온 금액을 이야기해 보게. 백작님 숨넘어가시겠으니.”
도에테 백작의 커다란 손이 덜덜 떨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뺨을 갈기고 싶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런 폭력이 두렵지 않았다. 조만간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필요한 자금이 이억 페르나라고 들었습니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그래서요?”
도에테 백작이 그렇게 숨기려고 했던 추문을 빈홀프에서는 벌써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비비아나의 목소리가 다소 날카로웠다.
“이억 페르나입니다.”
이번에는 먼저 준비해 왔던 것인지, 그이가 지갑에서 일억 페르나 수표 두 개를 꺼내어 자신의 앞에 얹어 두었다. 지금까지 삼억 이천만 페르나….
도에테 백작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대신관 후보로 계셨으면 오 년 안에는 대신관이 되셨을 테고, 혹시 운이 좋지 않아 대신관은 되지 못하더라도 최고 신관이 되셨을 귀하신 몸 아닙니까. 그런 분을 모셔 가는데 백작님을 서운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이는 또 다른 수표 하나를 이억 페르나 위에 얹었다.
또 다른 일억 페르나쯤 되는 줄 알고 쳐다보지도 않고 미소를 짓고 있던 비비아나를 대신해서 도에테 백작이 탄성을 터뜨렸다.
“오, 오십억 페르나….”
당장이라도 저 얄팍한 종이 쪼가리를 채어 가고 싶다는 듯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이 벌겠다.
“어떠십니까, 백작님?”
도에테 백작은 이미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혼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결혼식은 내년 혹은 내후년이지만 당장이라도 빈홀프 공작가에 들어오시길 원합니다. 물론 공작 부인으로 족보에 이름을 올리시고 당당하게 입성하시게 될 겁니다.”
“아아, 감히 도에테를 희롱하고 버릴 생각은 아니니 걱정 마라?”
“아가씨….”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심부름꾼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절부절못했다. 비비아나가 혹시라도 제 말을 오해하고 곡해할까 봐 무척이나 전전긍긍하는 태도였다.
심부름꾼의 태도는 그 집안이 비비아나에 대해 취할 자세를 대변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이의 하는 양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공작에게 맞고 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용인에게는 공작 부인 취급을 받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당장이라 함은….”
비비아나가 희망을 품고 눈을 반짝였다.
“저희는 이미 공작님의 인장을 찍은 결혼 계약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이라도 아가씨께서 도장을 찍으신다고 하면, 당장 공작저로 모셔 갈 계획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앞에 놓인 수표 세 장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도에테 백작은 거의 온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이 돈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습니다.”
“음?”
보는 사람이 낯 뜨거워질 정도로 한 곳만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던 도에테 백작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결혼하시게 되면 더 이상 비비아나 아가씨의 혈육임을 주장할 수 없으실 겁니다. 이 가문과의 연은 모두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인데….”
비비아나의 곁에서 빈홀프 공작가를 조금씩 더 빼먹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되면 굳이 그녀를 대신관으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불가합니다.”
하지만 빈홀프의 심부름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사용인을 포함하여 모든 편지와 연통, 그리고 방문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도에테 가문은 절대로 공작가를 방문하실 수도, 공작 부인이 되신 아가씨를 만나실 수도 없으실 겁니다. 밖에서 혹시 만나시더라도 공작 부인으로서 예우를 해 주셔야 합니다.”
쉬운 말로 완전히 인연을 끊으란 소리였다.
“비비아나, 어떻게 부녀간의 정을 칼로 베어 내듯 잘라 낸단 말이냐!”
“몸값 올리기는 그만두세요.”
비비아나는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몸값 올리기는 이쯤 하면 됐잖아요. 오십이억 페르나에 뭘 더 올리고 싶으신 거예요.”
“내가 네게 들인 공을 생각하면….”
“그래서 오십억 페르나를 따로 챙기시잖아요. 대신관이 돼도 그 돈 해 먹기 어려워요. 백작님. 그렇게 해 드릴 생각도 없고. 인생이 장밋빛이 아니랍니다.”
벌컥 화를 낼 줄 알았던 백작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턱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속으로 더하고 빼고, 뭔가를 셈했다.
“알겠네.”
“그렇다면….”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고? 꺼내 보게.”
“이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백작님께서는 이제 아가씨는 만나실 수 없으실 겁니다. 더는 비비아나 도에테가 아니게 될 테니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이의 질문은 도에테 백작을 향하고 있었으나 만질만질한 검은 눈동자는 비비아나를 향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도 괜찮겠냐는 듯 말이다.
비비아나는 슬며시 웃었다.
아아, 뭐든지. 도에테를 버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그 무엇이라도 감수할 수 있으니까. 정말, 그 무엇이라도.
“돈은 준비해 왔겠지?”
도에테 백작의 목소리에 그이의 눈동자가 다시 그쪽을 향했다.
“물론입니다.”
“그럼 됐네. 이 아이는 걱정하지 말게. 내가 보증함세. 남자라고는 손끝도 스친 적 없는 처녀야. 첫날 이 아이의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거라고 공작님께 전해 주시게.”
그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 묵묵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이 도에테 백작에게는 얌전한 순종으로 비쳤을 테지만, 비비아나에게는 역겨운 대답을 피하려는 무언의 의지처럼 느껴져 울적함을 가셔 주었다.
그는 가져온 서류 가방을 열어 서류를 꺼냈다.
백작은 신이 난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찾아 안주머니를 뒤졌다. 오십억 페르나라니!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었다. 그 누가, 그 어떤 가문에 시집을 보내도 이보다 더 대단한 금액은 받기가 힘들 것이다. 오십억 페르나라니…. 오십억 페르나….
가만히 있어도 절로 입꼬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자, 사인했네. 도에테 인장도 찍었어.”
빈홀프 공작의 서명은 꽤나 단정했다. 필체에서 느껴지는 힘과 단정함이 남달랐다.
제가 그래 봤자지. 백작은 속으로 그것을 비웃으며 심부름꾼을 향해 슥 내밀었다. 질이 좋은 양피지를 꾹 누르고 있는 손가락은 떼어 내지 않는다. 마치 아직 받을 것을 덜 받았다는 것처럼.
“자, 여기 있네. 그것은….”
“아, 여기 있습니다.”
그이의 앞에 놓여 있던 수표를 도에테 백작의 앞으로 스르르 밀어 주자마자, 그는 계약서에서 손을 떼고 허겁지겁 그것을 들어 앞뒤를 살폈다.
“하하! 틀림없는 제국 발행 수표구먼! 좋아, 당장 데려가게! 빈홀프 공작가 일 처리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들어! 좋아!”
비비아나는 치밀어 오르는 희열을 감추며 몸을 떨었다.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두 손을 맞잡고 꾹 움켜쥐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문 하나 열린 곳 없건만, 목덜미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느낌이었다.
아아, 드디어…! 드디어 탈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