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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블랙 우드 숲 (2/13)

2장. 블랙 우드 숲

비비아나 도에테, 성스러운 도에테 가문의 인형이라 불리는 여자는 제 무릎에 조그만 두 손을 가지런히 얹고 그린 듯 정갈하게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은색 눈동자가 이따금 이리로 저리로 움직였으나 초점이 없고 어딘지 멍했다.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눈동자에는 다소 뜨끈한 열기가 스며 있었다. 비비아나는 이 거대한 가문에 몸을 의탁하고 난 뒤부터 계속되는 ‘그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예뻐. 온몸이 하얀데 젖꼭지는 새빨갛게 익었잖아, 비비.’

제 손을 꽉 쥐고 있던 비비의 손등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맞잡은 손에 힘을 꼭 주며 부드러운 살갗을 쓰다듬었다. 손등에 솟는 굵은 소름을 지워 내려는 것처럼.

‘하…, 이렇게 뜨거운 몸이라니. 나를 위한 제물답군. 다리를 벌려 봐, 비비. 당신이 줄줄 흘리고 있는 뜨거운 것을 몽땅 빨아먹고 싶으니까.’

순간 가만히 앉아 있던 비비의 자궁 속 깊은 곳이 찌릿찌릿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서 스치는 바람에도 절로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절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겨우 바르게 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려고 했으나 도무지 허리와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울어. 그렇게 희미하고 가늘게…. 목을 콱 물어뜯고 싶게.’

차갑고 서늘한 손바닥이 자신의 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라 버렸다. 축축한 입술이 목을 쓸고 젖꼭지를 삼켜 세차게 빨아 대는 젖은 소리도….

‘당신 가랑이 사이에서 향기가 나. 내 좆이 발딱 서는 향기…. 당장이라도 네 몸을 찢고 쑤셔 박고 싶어.’

비비아나의 긴 속눈썹이 팔랑였다.

‘이 판판한 배에 씨를 가득 쏟고 싶어, 비비아나. 당신이 내 알을 배면…. 이 배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면….’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밝은 빛이 그녀의 눈꺼풀을 뚫고 새어 들어오는 통에 눈을 감아도 어쩐지 눈이 부신 기분이었다.

“하….”

비비의 아름다운 입술을 뚫고 뜨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가씨,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비비아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제야 자신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용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둡고 음습한 상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밝은 현실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아, 아니야.”

비비아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윤기가 흐르는 은발이 스르르 동그란 어깨를 쓰다듬고 흘러내렸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머리칼은 절로 손을 대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다. 은으로 실을 자은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빛이 흘렀다. 은발에 은안, 카로테 신전 벽화 속 여신보다 더 고귀하고 고결해 보인다.

“차가 알맞게 식었습니다. 어서 드시고 블랙 우드 호수로 향하실 시간입니다.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시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시정하여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비비아나는 발그레한 뺨을 간지는 머리칼을 앙증맞은 귀 뒤편으로 넘기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송할 만큼 거나한 대접에 불편한 곳이 있을 리가. 그녀는 후루룩 차를 들이켜고 찻잔을 소서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어서 가. 나 때문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말이야.”

빈홀프 공작가는 아무것도 아닌 비비아나를 제 주인처럼 받들어 모셨다. 그녀의 몸에 닿는 것, 그녀가 먹는 것 하나하나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깨끗하고 정결한 것, 흠 없이 완전한 것으로만 만들어 비비아나에게 입히고 먹였다.

도에테 가문에서도 받지 못한 융숭한 대접이었다. 한 제국의 황녀에게도 이렇게 하지는 않으리라. 이 모든 것이 ‘계약’ 때문이니,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 ‘계약’이 무려 얼마인지 잘 아는 비비아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열심히, 부지런히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비비아나는 습관적으로 손사래를 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얼른 해치우고 싶어.”

비비아나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이가 슬쩍 공작가의 집사를 곁눈질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에게서 떨어져 문가에 시립하고 있던 집사가 단정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비비아나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아뢰었다.

“아가씨, 저희가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비비아나는 이제 울고 싶었다. 빈홀프 공작가는 자신이 약간만 인상을 찡그려도 항상 이 모양이었다. 어디가 불편한 곳은 없는지, 혹시 용서를 구해도 되는지, 무릎을 꿇을지, 바닥에 바짝 엎드릴지 물었다.

빈홀프 공작가는 그런 곳이었다.

“아니, 아니야. 나는 그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많이 고되셨을 겁니다. 오늘은 블랙 우드 숲을 한 바퀴 돌아보시고 호수로 향하시는 건 어떨까요?”

비비아나는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이야? 그래도 되는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백발의 노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슈트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한 번 시각을 확인하더니 비비아나의 은안을 직시하며 당부했다.

“블랙 우드 숲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보여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열두 시부터 호수에 몸을 담그실 테니 한 시간 정도 일찍 가서 산책이라도 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개인 시간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던 비비아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무조건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물론이야. 충분해.”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실까요. 지금 출발하면 딱 알맞게 돌아보시고 호수에 도착하실 겁니다.”

집사는 검은 눈을 빛내며 단정히 한쪽 팔을 내밀었고 비비아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였다. 이상하게 주름 없이 매끈한 주먹에 손을 얹자, 집사는 잠시 몸을 움찔 떨었다. 분명 그녀의 손 아래 있는 주먹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자 숨을 참은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문제라도….”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가씨께서는…. 참 따듯하십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비비아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안내를 따랐다. 빈홀프 공작가가 워낙 넓은 곳이라 안내를 받는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는 집사를 따라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저번 밤에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저, 저번 밤?”

비비아나는 파드드 놀라 어깨를 떨었다.

“예, 아가씨.”

갑자기 어젯밤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로 등장하자 비비아나는 기겁하며 낯뜨거운 기억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파르르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한 일이라면…?”

“글쎄요. 저야 알 수 없지요. 하지만 분명 뭔가 다른 것이 있으실 텐데….”

비비아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 다른 것이라니.….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 그럼 나는 이만 다녀올게.”

비비아나의 어색한 목소리에도 집사는 넓은 마음으로 속아 넘어가 주었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정화를 위해 블랙 우드 숲으로 떠나는 그녀에게 안전 귀환을 다시 한번 당부했다.

“아가씨, 절대로 이상한 것 근처에 가시면 안 됩니다.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시기라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못해서 이상한 것에 손을 댔다가는 몇 시간 동안 물에 몸을 담근 것이 모두 다 허사가 됩니다, 아가씨.”

“응, 명심할게.”

“절대 아무것에나 손대지 마십시오.”

비비아나는 자신만 믿으라는 것처럼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공작저는 다소 습하고 서늘한 곳에 있습니다. 뱀들이 딱 나오기 좋은 곳이지요.”

“배, 뱀?”

비비아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아주 뱀을 질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겁내실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아무도 아가씨를 해치지 않을 테니까요.”

비비아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 집사가 어떻게 알아?”

그가 씩 웃었다.

“모두, 모두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사는 다소 상처받은 검은 눈동자로 비비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이 언젠가 보았던 검은 물뱀의 비늘 같았다.

“그렇게 질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들 착하고 순한 놈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걸 집사가 어떻게 알아? 순한지 착한지, 날 물지 안 물지 말이야….”

비비아나는 왠지 그의 상처받은 얼굴이 마음에 걸려 우물우물하고 말았다.

“정말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그 녀석들을 보고 산 게 벌써 몇십 년인데요. 저만 믿으십시오. 그놈들은 절대로 아가씨께 해를 끼칠 놈이 아니니 혹시라도 가까이 다가오는 놈들이 있거든 너무 놀라지 마시고 대가리를 몇 번 쓸어 주시면 됩니다.”

“아으, 난 싫어. 뱀은 다 싫어. 징그럽고 소름 끼친단 말이야.”

“미물들도 상처받습니다, 아가씨….”

그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비비아나는 갑자기 침울해진 노인의 옆모습을 힐긋거리며 할 말을 골랐으나,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뱀은 다 싫어. 징그럽고 소름 끼친단 말이야.’

비비아나는 방금 집사에게 건넸던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뱀을 싫어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뱀을 기르는 게 취미라도 되는 걸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 무슨 경우라도 비비아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녀는 뱀이 싫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의 곁에 버글거리던 그 매끈하고 미끈거리는 것들이 싫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것이 제 팔다리를 타고 오르던 것을 기억하면 당장이라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비비아나는 파드드 몸을 떨며 홀로 블랙 우드 숲으로 향했다.

***

그 거대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그녀는 어김없이 사흘 동안 블랙 우드 숲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을 먹고 열두 시부터 세시까지, 태양이 가장 잘 내리쬐는 그 시간에 벌거벗고 호수에 몸을 담가야 했다.

이곳은 이상하리만치 따듯했다. 세 시간 동안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몸이 식어 덜덜 떨릴 법도 한데, 온탕에 몸을 담근 듯 노곤노곤했고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올 만큼 좋았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숨이 막혀서….”

그녀의 일상은 빈홀프 공작가의 사용인에 의해서 물 샐 틈 없이 관리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비비아나 혼자 있는 시간은 극히 드물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 극진한 시중에 마음이 설레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도가 지나쳤다.

비비아나는 가끔 혼자 침대 위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고 부스러기를 아무렇게나 흘리며 쿠키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워낙 빈한한 가문에서 나고 나라서인지 영 이런 대귀족의 삶은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

“어디 누울 만한 곳이 없나….”

이 블랙 우드 숲은 꼭 그녀 혼자만 들어올 수 있었는데, 집사의 말에 따르면 다른 이들은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빈홀프 공작이 허락하는 이만 들어갈 수 있다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공작 성에 들어와 객으로 생활한 지 벌써 1년. 비비아나는 단 한 번도 빈홀프 공작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성에 살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것도 본 적이 없었으나, 때때로 사용인들이 ‘공작님이….’하며 수군거리는 탓에 그의 존재를 희미하게 떠올릴 뿐이었다.

아, 공작이 살아 있긴 살아 있구나…, 하는 식으로.

“아, 여기.”

비비아나는 제법 평평한 잔디밭을 발견하고 팔랑팔랑 달려갔다. 미리 준비해 온 도톰한 담요를 깔고 그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그러니까 블랙 우드 숲을 구경하라는 이야기는 사실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하겠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계약서에 자유 시간이 크게 제한될 수 있다고 명시해 두었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무척 신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 좋다….”

비비아나는 두 팔과 다리를 쭉 편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러다가 자면 안 되는데…. 혹시라도 늦으면 큰일이다. 그녀의 계약은 한두 푼짜리가 아니니까 말이다.

비비아나는 어릴 적부터 제 운을 믿고 설치는 오라비와 같은 인간을 혐오했으므로, 반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결코 그 끈을 놓지는 않았다. 그녀가 호수에 몸을 담글 시간이 되면 공작 성에서 커다랗게 종을 세 번 울린다. 그 소리를 듣고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또다시 종이 한 번 울리면 알몸으로 호수에….

“꺅!”

현실과 꿈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비비아나가 눈을 번쩍 뜨고 손을 털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손등과 손목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오르던 실뱀 한 마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배, 뱀…!”

그녀는 얼른 두 다리를 잡아당기고 몸을 말았다.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지만 긴 나뭇가지 하나 없었다. 저것이 알아서 그녀를 피해 가기만을 바라든가 아니면 자신이 피해야 할 판이었다.

비비아나는 잔뜩 경계하는 눈동자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주 작고 까만 실뱀이었다. 그녀는 특히나 뱀의 비늘을 싫어했는데, 다른 이유보다도 오돌토돌한 비늘무늬가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얼룩 하나 없는 것이 그나마 봐줄 만했다.

비비아나는 그것을 향해 훠이훠이 손을 저었다.

“야, 얼른 가. 나 멍하니 쉬고 싶단 말이야. 네가 그나마 작고 귀여워서 봐줄 만하긴 한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니야.”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왠지 신나서 대가리를 치켜든 것 같던 실뱀이 다시 축 몸을 늘어뜨렸다.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다가 조그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슬며시 다가왔다. 비비아나는 기겁하며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훠이훠이! 나 어떡해, 진짜…. 울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리자 실뱀의 대가리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그것은 똬리를 틀고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비비아나가 그렇게 겁을 낸다면 다가오지는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 아쉽다는 듯 입을 쩝쩝거렸다.

“뱀이 많다더니 사실인가 봐.”

순간 집사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그것들을 겁내실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아무도 아가씨를 해치지 않을 테니까요.’

아무렴, 그 대단한 빈홀프의 집사라는 이가 그녀에게 거짓을 고하겠는가.

비비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에 턱을 괴었다. 가는 검지로 제 앞을 툭툭 몇 번 두드렸다.

“여기 봐, 여기.”

작은 대가리가 금방 그녀의 손가락을 향해 움직였다.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 그녀를 향했다.

비비아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으나, 그녀는 다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너, 나 물 거야?”

실뱀은 똬리를 틀고 있던 것을 스르르 풀고 마구 8자로 몸을 꼬았다. 마치 그것은 자신의 억울함을 터뜨리는 몸짓과 닮아서, 그녀가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실뱀이 대가리를 치켜들고 꼿꼿이 허리를 세웠다.

“정말 나한테 무슨 냄새라도 나나. 피리 불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순간 비비아나의 기색을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던 검은 실뱀이 스르르 미끄러져 다가왔다. 제법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마음먹고 다가오자 눈 깜짝할 새였다.

비비아나는 순식간에 제 앞에서 대가리를 치켜들고 있는 뱀의 조그만 눈동자를 마주하고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좌우로 흔들며 단호한 목소리로 을렀다.

“무는 건 안 돼. 정말이야. 약속해.”

알아들을 리도 없건만 비비아나는 제법 진지했다. 그녀가 이러는 까닭은 몇 번 대가리를 문질러 주라던 집사의 말 때문이었다. 공작 성에서 나오는 뱀은 절대로 비비아나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며.

그 말이 그녀의 객기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사실 노인네의 침울한 목소리가 괜히 마음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어! 가만히…. 아니면 안 만져 준다?”

비비아나는 자신에게로 다가올 듯 대가리를 들이미는 실뱀의 눈동자 앞에 다시 검지를 세웠다. 만져 주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자, 그것은 정말로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세웠다.

비비아나는 잠시 감탄했다.

“진짜 알아듣는 거야, 뭐야….”

새하얀 손가락이 조심스레 다가가기 시작했다.

뱀은 자신이 다가가면 비비아나가 파드득 멀어지리라는 것을 잘 아는 것처럼 대가리를 꼿꼿이 세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 앞에서 검지 끝이 잠시 망설였다. 주춤주춤 다가갔다가 쓱 멀어지고, 또 다가왔다가 우물쭈물하기를 반복했다.

“그래 너도나도 똑같은 미물인데….”

비비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납작한 뱀의 대가리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혹시나 손가락을 물어뜯고 도망가더라도 할 말 없는 일이었다. 집사의 말만 믿고 멍청하게 손을 들이민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으니까.

“으, 음…?”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검은 뱀은 따듯하고 건조한 그녀의 손끝에 제 대가리를 이리 비비고 저리 비비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정말이네…?”

비비아나는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슥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을 비비며 정신없이 취해 있던 작은 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리를 길게 세워 그녀의 손가락을 돌돌 감기 시작했다.

“어, 어머…!”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집어 던지기 전에, 그것은 얼른 가는 손가락과 손바닥, 손목과 팔뚝을 타고 오르며 제 몸을 비벼 댔다.

비비아나는 긴장으로 숨을 쉬지 못했으나, 그것은 천천히 그녀의 손목과 팔뚝을 죄며 눈을 감았다. 열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팔뚝에 미끈하고 서늘한 제 비늘을 붙이고 대가리를 이따금 치대기만 했다. 깨물지도 않았고 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녀의 긴장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집사의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빈홀프 공작가는 사용인뿐만 아니라 하찮은 뱀 또한 그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니 말이다.

손바닥만 한 놈이니 이렇게 용기라도 내 보지. 그녀의 다리, 아니 팔뚝만 한 놈이어도 이렇게는 못 했으리라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뱀과 장난을 치던 무렵이었다.

“아가씨…, 길 좀 여쭈어도 될까요?”

흐릿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비비아나는 어깨를 움찔 떤 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것이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대가리를 움직이고 있던 실뱀이 갑자기 스르르 몸에 힘을 풀고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비아나의 앞을 지키고 서듯이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조그만 혓바닥을 쉭쉭 거리며 날름거렸다.

“누, 누구세요?”

비비아나는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꼬부랑 할멈을 바라보다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공작가의 사유지인 블랙 우드 숲이었다. 갑자기 외부인이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 수 있었다.

검은 뱀은 마치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커다랗게 아가리를 찢으며 이빨을 내밀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노파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아, 이런. 놀라셨군요.”

허리가 잔뜩 굽은 노파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검은 뱀이 대가리를 앞뒤로 흔들며 위협했다.

비비아나는 손을 휘저으며 그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그만! 다가오지 마세요!”

“아이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무래도 제가 많이 놀라게 해 드렸나 봅니다. 저, 저는 바느질하는 사람입니다.”

노파는 들고 있던 바구니 안을 비비아나의 깨끗한 은빛 눈동자 앞에서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천과 색색의 실, 그리고 주전부리할 만한 것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바구니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비비아나는 머쓱한 목소리로 괜히 머리칼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 길을 잃었나요?”

“아유, 아가씨. 존대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노파는 잔뜩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손사래를 쳤다. 땅에 떨어진 것을 힘겹게 주워 바구니 안에 도로 담고 나서야 겨우 굽은 허리를 폈다. 허리를 콩콩 두드리며 숨을 골랐다.

“제가 보통 직접 오지 않는데…. 오늘 심부름하는 녀석이 보이질 않아서 익숙하지 않은 길을 방문하다가 보니 이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공작 성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가씨?”

그래도 블랙 우드 숲은 공작 성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문과도 너무 동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비비아나는 왠지 찝찝한 기분을 완전히 가실 수는 없었다.

“아가씨.”

나직한 목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노파의 눈을 마주했다. 순간 그이의 매끄러운 적갈색 눈동자에서 기이한 빛이 흘렀다. 그것은 비비아나의 투명한 눈빛을 사로잡고 그녀의 몸을 꽁꽁 옭아맸다. 생각이 점점 뭉툭해졌다. 하품이 나왔다.

검은 뱀이 밑에서 발광을 하듯 몸을 떨고 비명을 질러댔으나 비비아나는 안개가 낀 듯 희미한 정신에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

비비아나는 왠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정면으로 보이는 곳…. 여기서 직선으로 계속 걷기만 하면….”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노파는 허리를 숙이며 바구니를 뒤져 붉은 앵두를 하나 내밀었다. 왠지 노파의 것 같지 않은 낮고 두꺼운 목소리로 느긋하게 속삭였다.

“뱀 비린내가 온몸에서 풀풀 진동합니다, 아가씨.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동해요.”

“배, 뱀 냄새라니…. 그, 그게 무슨….”

그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노파의 발에 작은 뱀은 와드득 목이 꺾여 죽었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슬그머니 돌아왔으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죽어 있는 작은 뱀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파는 어쩐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동공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검은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가 다시 제 모양을 되찾았다. 혀를 날름거리듯 입술을 적시는 모습이 마치 무엇을 닮았다.

차갑고 서늘한….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비비아나의 은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노파의 음성은 덜덜 떨었던 첫 대면과는 다르게 또렷하고 분명했다. 음산하고 으스스했다.

“뭐, 뭐가….”

“그 밤 말입니다.”

“그, 그걸 어떻게….”

노파는 ‘그 밤’에 관해 뭔가 알고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동자를 빛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적갈색 눈동자에 짙은 고동색 머리칼이었다. 빈홀프 공작가는 집사부터 청소부까지 모두 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작가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것을 깨달은 비비아나가 의심의 눈길을 보냈을 무렵, 또다시 눈동자에서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비비아나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궁금하시지요?”

“으응….”

그녀의 말끝이 물을 잔뜩 머금은 것처럼 축축 밑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예쁜 눈꼬리도, 둥근 어깨도 스르르 밑으로 처졌다.

“이 앵두를 먹고 그 밤을 한번 보내 보십시오, 아가씨.”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노파가 앵두가 든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이는 생각보다 키도 덩치도 컸다. 비비아나는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이 내미는 주먹보다 작은 과일을 슬쩍 받았다.

“이, 이걸…?”

“차를 드시기 전에 꼭 이걸 드세요. 그러면 모든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쯧쯧, 불쌍하신 분….”

노인은 멍한 그녀의 손바닥 위에 조그만 앵두를 꼭 쥐여 주었다. 그것이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비비아나의 손을 도르르 말아 주며 다시 한번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에게서 악취라도 나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말이다.

“이 뱀 비늘 냄새가 무엇 때문인지, 그날 모두 다 밝혀지게 될 겁니다.”

비비아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자신의 손바닥 위에 얹힌 예쁜 앵두를 멀거니 바라보다 눈을 들었는데, 제 앞에 서 있던 노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투명한 은안이 다시 한번 앵두를 향했다.

“아….”

비비아나의 이성을 가리고 있던 희미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앞을 지키던 뱀은 차가운 흙바닥에 이상한 각도로 뒤틀린 채 혀를 내밀고 죽어 있었다. 척추를 타고 소름이 흘러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핀 뒤 작은 앵두 한 알을 꽉 쥐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낮고 육중한 종이 세 번 울렸다.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가 뾰족하게 솟은 공작 성의 첨탑으로 향했다.

이제 호수에 몸을 담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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