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진심과 결심
꽤 오랜 시간 잠들었던 엘리아는 눈을 끔벅거렸다. 어두운 걸 보니, 벌써 해가 저문 모양이다. 저를 꼭 안고 있는 남자의 품이 답답한 나머지 몸을 꿈틀거렸다.
아론도 잤나 보네.
늘어지게 기지개라도 켜고 싶은데 꽉 끌어안은 남자 때문에 답답했다. 그의 팔을 슬쩍 치우려고 하는데 뜬금없는 음성이 들렸다.
“일어났나?”
“……!”
아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깜짝 놀란 엘리아가 몸을 움츠리자, 달깍 소리와 함께 스탠드가 켜진다.
다정한 미소. 그렇지만 음욕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엘리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봤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자고 일어났더니 남자가 바뀌었다. 어안이 벙벙한 엘리아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불렀다.
“아힌?”
“많이 피곤했나 봐.”
“…잘 다녀왔어요?”
“그래. 매번 올 때마다 난 네가 자는 모습만 보는군.”
“…….”
“물론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는 남자의 행동에 가슴께가 몽글몽글했다. 다들 왜 이렇게 다정하게들 구는 건지. 붉게 물든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연한 미소를 머금은 아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밥 먹자. 앞으로 식사는 꼭 챙겨 먹어야 해.”
그러곤 종을 울려 사용인을 불렀다.
이놈은 또 왜 이러나 싶어, 엘리아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힌답지 않은 생경한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식사가 올 때까지 그는 얌전히 안고만 있었다. 그리고 식사를 할 때도 얌전하게 밥만 먹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아까 그런 상황이었다면 당장 덤벼들고도 남을 텐데, 아힌은 다 먹고 난 후에도 달려들지 않았다. 아니, 아예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달까?
늦은 저녁을 다 먹은 후 차를 마실 때까지도 별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자, 엘리아는 신기한 눈으로 아힌을 바라봤다. 아힌도 참 많이 변한 것 같았다. 틈만 나면 집무실로 불러 자신을 탐했던 남자인데, 알몸으로 누워있는 자신을 안아놓고도 순순히 놓아주다니. 요즘은 참 신기한 광경을 여러 번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한참이나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던 아힌이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엘리아.”
“네?”
“몸은 좀 어때?”
여전히 시선은 창밖에 둔 채, 아힌이 평범한 물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젠 괜찮아요.”
“다행이군.”
잠시 침묵이 흐른다. 엘리아는 오늘따라 어딘가 이상한 아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엘리아.”
“네?”
“너의 얘기가 듣고 싶다.”
“…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오늘따라 정말 많이 이상한 아힌의 행동에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다시 침묵이 시작되려는 찰나, 아힌이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다 식어버렸는지, 그의 손에 들린 찻잔에선 더 이상 김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네 미래를 그려본 적이 있나?”
“…….”
“넌 어떤 삶을 살고 싶지? 이젠 하녀도 아니고, 그리 높은 작위는 아니지만 귀족도 됐잖아. 그럼 해보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야. 네가 원하던 삶. 그런 거 없었냐고 묻는 거야.”
원하던 삶. 그래, 있었지. 하지만 그건 여기가 아닌, 원래의 내 세상에서야. 이곳에선 내 꿈을 찾을 수가 없어.
언제나처럼 입을 꾹 다문 엘리아의 모습에 아힌은 연한 미소를 보이며 체념한 듯 말했다.
“그럼 내 얘기를 해볼까?”
아힌은 다시 등을 보이고 창밖을 바라봤다. 잠시 긴 숨을 토해 낸 그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난 말이야. 여태껏 살아오면서 행복이란 걸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런 쓸데없는 감정들은 내 인생에 별 필요가 없었지.”
소파에 다리를 올려 앉고 무릎에 머리를 기댄 엘리아는 기울어진 시선으로 아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어렸을 때…….”
그의 말은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등. 아힌은 오늘따라 꽤 수다스럽게 자신의 지난날을 줄줄이 읊어댔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배부르고 등 따시니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는데도 무거운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다. 잠은 많이 잘수록 는다더니, 낮에 내내 잤는데도 또다시 잠이 쏟아졌다.
그런데 아힌의 어느 한마디에 잠시 정신이 깨었다.
“널 다시 찾은 날, 처음으로 행복이란 걸 느꼈다. 영영 못 찾을 거란 생각은 안 했는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더군. 그리고 널 다시 본 그날. 넌 우리를 끔찍한 눈으로 봤지만, 난 행복했다. 다시 만나니 미친놈처럼 그저 마냥 좋더군. 훗.”
자조 섞인 웃음. 하지만 그가 흘린 그 허탈한 웃음이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넌… 그냥 내 인생에 잠시의 여흥일 뿐이라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네가 내 안에 들어와 있더군. 그걸 확실히 깨달은 건 네가 사라지고 난 후였지만.”
“…….”
“그날, 네가 우리에게 악담을 퍼붓고 창밖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잠시간 느낀 행복이 금세 지옥으로 처박히더군. 네 말대로 난 바로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넌 내게 행복을 알려줌과 동시에 매정하게 그걸 깨뜨려버렸지.”
엘리아는 기댔던 고개를 들고 그의 등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늠름한 어깨가 잘게 떨리는 듯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날 원망한다는 건가?
“그날 널 구하려고 우리가 동시에 몸을 날리는 순간, 알았다. 나만큼이나 그 멍청한 놈들도 널 진심으로 마음에 두었다는 걸. 빌어먹을 베르타른의 피는 엘리아 너한테만 반응하는 모양이야.”
아힌의 두서없는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잘게 떨리는 그의 음성을 들으니 그가 지금 얼마나 용기 내서 제 속마음을 꺼내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힌.”
“엘리아.”
동시에 서로를 부른 두 남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내 피식 웃은 아힌이 식은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곤 그녀의 아래 무릎 꿇고 앉아 애끓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던 말 마저 끝내도 될까?”
“…네.”
“엘리아. 난 네가 준 행복의 맛을 이미 알아버렸다. 그게 얼마나 달콤하고 가슴 뜨거워지는 기분인지 알아버렸어.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한테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도.”
“…….”
“그래서 이젠 정말로 널 놓지 못해. 내가 숨 쉬려면 네가 있어야 해. 그러니 대답해 줘. 넌 아직도 내가 그렇게 싫은 건가?”
간절한 눈빛, 애절한 음성. 처음 보는 아힌의 모습에 엘리아는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이젠 그가 싫지 않았다. 아힌뿐만 아니라, 아론과 프레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싫지 않을 뿐.
그저 싫지 않을 뿐…인가……? 정말 그것뿐인 거 맞아?
마음속에서 누군가 묻는 것 같았다. 정말로 이 세 남자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엘리아. 네가 날 선택해 줘. 더는 너를 공유하고 싶지 않아. 내 품에서 편하게 살게 해줄게. 네가 공작 부인이 되면 이젠 그 누구도…….”
“아힌.”
“…….”
“전 돌아가지 않아요.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공작 부인 같은 것도 되고 싶지 않아요. 전 여기서 이대로 살래요.”
“하아… 그럼.”
잠시 긴 숨을 토해 낸 남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뭔가 대단한 각오를 다진 듯, 눈빛이 이글거렸다.
“내가 모든 걸 다 버리면 날 받아줄 건가? 오롯이 너의 남편만 되겠다면 날 받아줄 거야?”
“아힌.”
“그만큼 난 네가 간절해. 진심이야. 너에게 한 모든 잘못은 살면서 갚을게. 그러니 날 선택해 주면 안 되겠나?”
“대체 왜…….”
“너라서. 너니까. 너여야만 하니까. 다른 이유는 묻지 마. 그냥 네 존재가 내 이유니까.”
문득 예전에 프레드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너니까 좋았어. 너니까 갖고 싶었고, 너니까 자꾸 만지고 싶었어. 너라서 안을 수 있었고, 너라서 우리가 이렇게 미친놈이 된 거야.”
아… 정말이었나. 정말로 나라서. 아니, 엘리아라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짐승이 자신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제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까지 말하는데 거기다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엘리아였으니까. 정예나가 아닌, 엘리아.
“난…….”
그녀의 음성에 아힌이 눈을 반짝였다. 혹여나 자신을 받아주려는 건가 하는, 한껏 기대에 부푼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답은 아힌의 바람을 무참히 깨부수는 말이었다.
“이제 편히 살고 싶어요. 레오와 편하게 살고 싶다고요. 그래요, 살다 보면 언젠가는 평범한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아주 나중 일이 될 거예요. 그러니 공자님들도 좋은 여자 만나서…….”
“내가 평범한 남자가 된다잖아. 그래서 너 편히 살 수 있게 해준다니까?”
제 바람이 산산이 부서진 탓일까? 아힌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그러나 목소리가 높아진 건 엘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안 되잖아요. 당신이 왜 저 때문에 모든 걸 버리나요? 그러면 내 마음은 편할까요? 그리고 전 아론과 프레드와도 몸을 섞은 여자라고요. 그것도 모자라 그들도 저에게 청혼했고요. 그런데 그들과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나요? 세 형제와 몸을 섞은 내가 어떻게 당신들 중 한 사람의 여자가 될 수 있냐고요!”
“그럼 내 동생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살면……? 그러면 되겠어?”
“아힌!”
“내가 괜찮다잖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고 우리 잘못이잖아. 엘리아.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 난 다 괜찮다고!”
일그러진 아힌의 처절한 표정에 엘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괴로움을 토해 내듯 소리치는 남자와 더 대화해 봤자 분위기만 나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힌이 벌떡 일어나 제 머리칼을 사납게 헝클이며 욕설을 뱉었다.
“빌어먹을!”
“…….”
“후… 네 앞에서는 왜 이렇게 감정 조절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점점 미친놈이 돼가는 것 같아.”
원래도 미친놈이었거든요.
엘리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삐죽 튀어나온 입 속으로 차마 뱉지 못한 말을 꿀꺽 삼켰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조급하게 굴지 않을 거라 다짐하면서도, 여유롭게 굴다 놈들에게 널 빼앗길까 봐 자꾸만 조급해져. 널 영영 놓쳐버릴까 봐. 그러니 이번만큼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후우…….”
“…이만 나가줘요. 피곤해요.”
그렇게 간절하게 매달려놓고 금세 소리치는 남자에게 기분이 상한 엘리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그러곤 이불을 머리까지 홱 뒤집어쓰고 등을 돌려 누운 채로 씨근덕거렸다.
잠시간 또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남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가는 줄 알았는데, 침대가 꿀렁거리는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탄탄한 무언가가 찰싹 달라붙는다. 배를 감싸 안고 그녀의 뒤통수에 입을 맞춘 남자가 또 한 번 깊은 숨을 토해 냈다.
“미안해.”
“…나가라고 했는데요.”
“그건 안 돼.”
“뭐라고요?”
“오늘은 내 시간이야. 그리고 이제 막 열두 시가 지나서 내겐 네 밤을 함께할 자격이 생겼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미 모를 말에 엘리아가 고개를 홱 돌리자,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아힌의 입술이었다. 끈적하고 농염한 입맞춤. 한순간에 정신을 앗아갈 만큼 더운 숨결이 그녀의 전신을 순식간에 달아오르게 했다.
울분을 토해 내는 듯 점점 더 깊고 거칠게 입을 맞추는 아힌의 행동에 엘리아는 숨이 막혀 바동거렸다. 한참을 갈급하게 키스했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아는 고개를 얼른 앞으로 휙 돌렸다. 여전히 남자의 품에 갇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보고 있어 홧홧해진 제 얼굴은 들키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빌어먹을 몸이 그새 또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엘리아. 우리끼리 약속했다.”
“뭘요.”
“매일 하루씩 널 가질 수 있게 시간을 나누었지. 그리고 오늘 하루는 온전히 나만 널 가질 수 있는 시간이고.”
“뭐라고요?”
엘리아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 각자 너에게 진심을 보여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그래서 네가 날 선택하도록 난 오늘 하루 동안 최선을 다해 널 유혹할 생각이야.”
“정말 웃기네요, 당신들은. 여전히 제멋대로고, 여전히 짐승이야.”
“네가 날 선택하면 더는 이럴 일도 없어.”
“내 선택을 강요하지 말아요. 자꾸 이러면 정말로 아무 놈이나 붙잡아서 결혼해 버릴 거니까!”
“음, 그건 위험한 생각이야. 괜히 애먼 놈 명줄 당기지 말라고.”
“아힌! 읏!”
벌떡 일어나려는 엘리아의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뒤에서 끌어안은 아힌은 그녀의 목덜미를 잘근 씹으며 옭아맸다. 그러곤 더없이 다정하지만 음험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선택은 네 자유야. 하지만 그 선택을 받아들이고 못 받아들이고는 내 마음이지. 물론, 난 죽어도 널 놓아줄 마음이 없어. 혹시 아론과 프레드가 마음 쓰이는 거라면 차라리 우리 셋 다 선택해. 프레드는 처음부터 그러길 원했으니까 별문제 되지 않을 거야. 네가 그러겠다면 아론 그놈도 별수 없을 테고. 나 역시 어쩔 수 없을 테지. 그렇게 해서라도 네 옆에 있고 싶으니까.”
“다들 미쳤어.”
“그래, 우린 너한테 미쳤어. 내 모든 것을 버려도 상관없을 만큼 너한테 미쳤다고. 그러니까 버리지만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나도 태연하게 주절거리는 아힌의 모습에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문제는 그것이 그냥 떠보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들린다는 거였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아… 이거 봐. 널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잖아. 쓰읍, 후우…….”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인다. 부드럽게 닿아오는 아힌의 입술에 전율인지 소름인지 모를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배를 안고 있던 커다란 손이 가슴을 움켜쥐고 부드럽게 주물럭거리자 미친 몸뚱어리는 그새 반응하며 아랫배가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널 갖고 싶다. 내가 정말로 싫은 게 아니라면 거부하지 마.”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껴안고는 아힌은 온몸으로 유혹했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남자의 손에 온몸이 만져지는 느낌에 엘리아의 정신은 점점 아득해졌다. 엘리아의 몸은 이들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 * *
아힌의 말대로 정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하루씩 돌아가며 엘리아를 찾았다. 그녀의 마음을 갖기 위해 각자의 방법대로 노력하고 유혹했다. 함께 식사하고, 낮엔 산책하고, 가끔은 데리고 나가 온갖 옷과 보석을 한 아름씩 안겨주기도 했다.
낮엔 그렇게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밤엔 역시나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화도 내고 달래도 보았지만, 그들의 집요한 구애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세뇌라도 된 걸까……?
처음에는 세 남자의 구애를 받으면서 매일 밤 돌아가며 몸을 섞는 현실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이미 꽤 오랫동안 그들과 관계를 맺어온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아 자신도 이 미친 관계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마음먹고 유혹하는 짐승들을 떨쳐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더 문제는 자신도 그들과의 격정적인 밤이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몸에 먼저 취하는 것은 매번 자신이었다.
“하아… 완전히 미쳐버렸어. 그놈들보다 내가 더 미친 것 같다고! 어휴…….”
며칠 만에 처음으로 홀로 정원에 나온 엘리아는 그네 위에 앉아 그동안의 일을 되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주어진 하루를 조금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각오를 내보이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짐승들에게 오늘 저녁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핑계로 겨우 반나절 자유를 얻었다. 물론 오늘 차례인 프레드가 툴툴거리긴 했지만.
더는 이렇게 살 순 없었다. 자유는커녕 자신조차도 점점 이 미친 관계를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이 그때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와 마음가짐만 달라졌을 뿐,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이제는 확실하게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았다. 평생 이렇게 살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엘리아의 선택지에 그들과의 이별은 없었다. 매일 밤 그녀를 품에 안고 자신들에게선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세뇌를 끊임없이 시켰으니. 어차피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면 차라리 어떻게든 결론을 내서 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굴 선택하지……?
과연 한 명을 선택한다고 나머지 두 명이 순순히 물러날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혹시 칼부림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엘리아는 덜컥 겁이 났다.
그렇다고 정말로 세 남자와 결혼할 순 없지 않은가. 남들이 알면 뭐라 하겠냔 말이다. 무엇보다 레오가 이 사실을 알면 아마 미친 누나라고 욕하며 떠날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점점 해는 저물고 있는데, 엘리아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어떡하지…….”
저녁달이 뜰 때까지 아무것도 결정짓지 못한 엘리아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질질 끌렸다.
온종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이 상황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기가 무척 곤란했다. 이제 곧, 놈들과의 대화의 장에서 이 상황을 결론지어야 하는데 아직도 복잡하기만 할 뿐, 어떠한 결정도 선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의 추가 자꾸 한쪽으로 기우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엔 자신의 행복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망설여졌다.
셋이 다 같이 사는 게 어떻게 가능해?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하아…….
계단을 오르던 엘리아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 섰다. 뭔가 이상했다. 오늘따라 저택에 사용인들이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분명 아침까지는 봤는데,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양, 고요했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엘리아.”
“프레드?”
“얼른 와. 다들 기다리고 있어.”
“네. 그런데 사용인들은 다 어디 갔어요?”
“응, 앞으론 다들 출퇴근할 거야.”
“네? 왜 갑자기…….”
“일단 가서 얘기하자.”
마중 나온 프레드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가끔 돌아보는 프레드의 눈빛이 음울해 보였다. 자신이 버려질까 두려운 걸까……?
며칠 전, 레오를 데려다주고 다음 날 온 프레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레드는 그날 엘리아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제 형들은 어떻게든 유혹해서 그녀를 가졌다면, 프레드는 그녀를 그저 품에 안고 잤을 뿐, 정말로 다른 짓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대신 프레드와도 긴 대화를 나눴다. 프레드도 아힌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꺼내놨다. 그녀가 발작하며 힘들어했던 시간이 모두 제 탓이라고 생각한 건지, 그는 대화 내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말에 엘리아는 정말 놀랐었다.
“엘리아. 그냥 우리 넷이 같이 살면 안 될까……? 매일 밤 나를 안 찾아줘도 괜찮아. 그러니까 네 옆에만 있게 해줘. 네 남자가 될 수만 있게 해줘. 응……?”
그날 프레드의 모습에서 그녀는 어린 엘리아를 겹쳐 보았다. 말 잘 들을 테니 버리지만 말라고 애원하던 엘리아의 모습을.
프레드는 아무래도 자신에겐 승산이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기가 죽은 프레드의 모습에 엘리아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안쓰러웠다. 그 당당하고 제멋대로였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렇게 가엽게 보일 정도로 매달리는 건지.
대체 내가 뭐라고.
마치 세 짐승은 세상에 처음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본 게 엘리아였던 것처럼 맹목적으로 그녀를 원하고 매달렸다.
셋의 첫 여자가 ‘엘리아’라더니 그래서 그러는 건가. 후… 역시, 그것밖엔 길이 없는 건가.
그날처럼 처연한 눈빛을 보이는 프레드의 모습에 또다시 엘리아의 마음이 흔들렸다. 누가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딱 자신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프레드를 따라 2층 거실로 올라가니, 아론과 아힌이 자신을 바라본다. 닮은 듯 다른 두 형제가 빙긋 웃었지만, 그들의 눈빛도 프레드만큼이나 애달파 보였다.
참 나, 세 짐승의 이런 눈빛을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매너 있게 그녀를 자리에 앉혀주곤 프레드도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자신만을 집요하게 쳐다보는 세 공자의 시선에 엘리아는 벌써부터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함을 느꼈다.
그냥 할 얘기가 있다고만 했을 뿐인데. 이 눈치 빠른 세 짐승은 오늘이 심판의 날인 줄 알아차렸는지 각오를 다지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순간, 세 공자의 눈빛을 보니 문득 겁이 났다. 누구 한 명 선택했다가 정말로 피바람이 부는 건 아닌지. 미친 거로 따지자면 누구 하나 빠지는 놈이 없으니 겁이 날 수밖에.
“엘리아.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 뭐든 들어줄게.”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세 공자 때문에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눈이라도 풀어야 편하게 말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엘리아?”
“후… 알았어요. 재촉하지 말아요.”
“기대돼서 말이야. 심장이 이렇게 뛰다간 네 선택을 받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눈빛과는 다르게 농담과 웃음을 내보이는 아론의 모습에 더 이상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치맛자락을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단 세 분께 물어볼 게 있어요.”
“그래, 편히 물어봐.”
불편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뭘 자꾸만 편히 말하라는 건지.
“세 분 모두, 꼭 저 아니면 안 되나요?”
“응.”
“그래.”
“당연하지.”
동시에 대답한 세 남자가 서로를 번갈아 보며 소슬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엔 분명히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은 착각이 아니리라.
미치겠네. 어떡해야 하냐고!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말을 꺼낼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선택은 해야 했다. 더는 뒤로 돌아갈 수 없었다.
“후우… 좋아요. 그럼 제가 누굴 선택하든 나머지 두 분은 순순히 물러나실 건가요?”
“아니.”
“미쳤나?”
“그렇게는 못 해.”
이번에도 동시에 대답하는 세 남자. 엘리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뭐든 다 들어준다며? 이게 다 들어주는 거야?!
순간 울컥 짜증이 치민 엘리아는 홧김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럼 싸워서 이기는 놈 오세요!”
스릉, 스릉, 스릉.
아……?
기다렸다는 듯, 칼을 꺼내 드는 세 남자. 시뻘건 세 쌍의 눈동자가 살기로 일렁인다. 정말로 당장이라도 서로의 목에 검을 겨눌 듯,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엘리아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다들 그거 치워요!!”
“걱정하지 마, 엘리아. 금방 끝날 테니까.”
혀를 날름거리며 말하는 아힌의 눈에는 앞에 선 두 남자가 더는 제 동생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엘리아. 1분도 안 걸릴 거야.”
그리고 아론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아. 만약 내가 죽으면 너와 내 목숨을 맞바꾼 거라…….”
“됐으니까 닥치고 좀 앉으라고요! 셋 다!”
말허리가 잘린 프레드가 당황한 듯 엘리아를 쳐다봤다. 그러곤 제일 먼저 검을 거두고 자리에 앉는다. 그나마 프레드는 내심 망설인 것 같았다. 제일 뇌가 해맑았던 놈이 오늘은 그나마 제일 정상처럼 보였다.
“두 분은 안 앉을 거예요?”
싸늘한 엘리아의 말에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던 아힌과 아론도 시퍼런 칼날을 갈무리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냥 해본 말인데, 바로 저렇게 반응을 보일 줄이야. 엘리아는 점을 찍듯 미친 짐승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씨근덕거렸다.
“정말 보통 미친놈들이 아니야. 어휴! 정말, 이게 무슨 개떡 같은 팔자냐고!”
“…….”
“…….”
“…….”
엘리아의 욕설에 세 공자는 각자 시선을 허공으로 보내고 눈동자를 굴렸다. 이것들이 지금 쇼한 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그걸 확인하겠다고 다시 그런 살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어쩔 수 없구나.
“후……! 잘 들어요.”
세 남자가 입을 꾹 다문 채 엘리아를 바라본다. 뭔가 결심이 선 듯한 엘리아의 표정에 세 짐승의 목울대가 꿀렁 넘어갔다.
“첫째! 결혼식은 안 할 거예요. 이런 미친 관계를 소문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으니까. 둘째! 난 아직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게 당장 사랑을 바라지는 말아요.”
세 남자의 동공이 조금씩 커지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아는 자신의 조건을 이어 말했다.
“셋째! 난!”
…….
엘리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뭔가 망설이는 듯 입술만 달싹이던 그녀는 좀 전과는 다른, 조금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그러니 내게 아이는 바라지 말아요.”
“뭐?!”
셋 다 똑같은 표정으로 놀란 듯 보였지만, 되물은 건 아론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해 줄 말은 없었다. 공작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동안 공작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아힌이 공작이 된 건지, 그는 지금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잘못 말을 꺼냈다가 공작과 원작 엘리아의 사연이 밝혀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뭐, 그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었기도 했고.
“넷째.”
엘리아의 음성이 한풀 꺾였다. 그러곤 이내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든 제가 싫어지면 떠나도 좋아요. 붙잡지 않을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뭔가 좋아진 게 처음이라 싫어지는 게 뭔지 몰라.”
“난 네 옆에서 죽어도 안 떨어져.”
아힌부터 차례로 여상하게 대답하는 남자들의 말에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곤 마지막 말을 했다.
“어차피 내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네요. 나는 그 누구의 피도 볼 수 없으니까. 후… 어차피 내게 선택권은 없었네요. 이걸 바랐던 건가요?”
“내가 바랐던 건 엘리아 너뿐이야. 하지만 네 옆에 있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 이 상황을 딱히 바란 건 아니야.”
아힌의 담담한 대답에 엘리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섯째.”
엘리아는 고개 숙인 채로 문득 떠오른 생각을 조건으로 말했다.
“날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해줘요. 제국에서 가장 귀한 세 공자를 홀린 마녀로 손가락질받고 싶진 않으니까. 레오를 또 힘들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는 우리만 아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우린 대체 어떤 사이지? 지금과 다를 바가 없잖아.”
“이 조건을 모두 지킬 자신이 있는 분만 말하세요. 그럼 그분의 아내가 되도록 하죠.”
아힌의 물음에도 엘리아는 제 할 말을 마쳤다. 고개 숙인 엘리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자신이라고 이런 삶을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아내가 될 거라면 누구보다 떳떳하게 이들 옆에 서고 싶었고, 당당하게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관계는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었다.
“엘리아.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군.”
“…네?”
아힌의 서슬 퍼런 음성에 엘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놈들의 얼굴이 이상했다. 또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짐승들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대체 우릴 얼마나 능력 없는 놈들로 본 거지? 베르타른 공작가의 공작이 그렇게 하찮게 보였나?”
“…….”
“물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들까지 다 막진 못하겠지. 하지만 네 앞에서만큼은 널 손가락질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그게 황제라 해도 말이야. 그러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마. 당당하게 네 남편은 셋이라고 자랑하고 다녀도 돼. 물론 베르타른 공작가의 멋있는 세 남자라고kjmdm도 꼭 말하고.”
장난스레 윙크한 아힌이 빙긋 웃는다.
뭐가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의아하면서도, 아힌의 저 당당한 말에 엘리아는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첫째.”
갑자기 들린 음성에 엘리아의 시선이 스르륵 아론에게 향했다.
“네 마음속에 우리에 대한 사랑이 생기는 날, 결혼식을 올리는 거로 하지.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꼭 보고 싶어서 말이야. 대신 재촉하진 않을게. 네 감정을 숨기지만 말아줘.”
“아… 엘리아가 드레스 입은 모습 보면 못 참을 것 같은데.”
“그럼 첫날밤은 드레스 입혀놓고 하면 되겠군.”
허……!
아론의 말에 프레드가 초를 치고, 아힌이 추임새를 넣는다.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아론이 ‘미친놈들’이라고 중얼거리는 말에 그나마 한 놈이라도 정상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러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해결됐고. 그럼 세 번째. 아이는 무슨 근거로 네가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몸 관리 잘하면 문제없을 거야. 꼭 애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너 닮은 딸 하나는 꼭 있었으면 좋겠거든. 그건 내가 알아서 노력할게. 내 씨앗들은 씩씩하니까 잘 파고들 거야.”
이런, 미친놈.
1분도 채 안 돼 미친놈의 진가를 드러내는 아론의 말에 엘리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역시 그들은 물보다 진한 피를 나눈 짐승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네 번째. 아까 말했듯, 난 싫어지는 게 뭔지 모르는 놈이니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고… 둘은 싫어지면 언제든 가도 좋아. 기왕이면 조금 더 빨리 싫어지면 좋겠고.”
아론의 도발에.
“미안하지만, 공작위도 포기하려고 했던 나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론.”
“어쩔 수 없나? 형들이 늙으면 나보다 일찍 죽을 테니, 그때 몇 년이라도 혼자 엘리아를 차지하는 수밖에.”
세 짐승의 대화는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뭐, 그렇다네? 다섯 번째는 이미 얘기 끝난 거니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럼 이제 된 건가?”
“하……! 정말 대단들 하시네요.”
뭔가 이미 계획이 짜인 듯 착착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뒷골이 싸한 게 그들이 쳐놓은 덫에 스스로 들어가 앉은 것 같았다.
“그걸 이제야 알아주다니. 섭섭한걸? 엘리아. 네가 생각한 것보다 우린 더 대단해.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네 뒤에는 능력 있는 세 남편이 있으니까.”
가슴을 팡팡 치며 해맑게 웃는 프레드의 미소에 헛웃음이 나왔다. 분명 사기당한 게 맞는 거 같은데, 저 말이 또 왜 이렇게 위안이 되는 건지.
“엘리아. 그럼 이제 넌 우리의 아내인가?”
우리의 아내. 이렇게 낯선 단어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엘리아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에 눈살을 찌푸리며 저를 보고 방긋 웃는 세 짐승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첫날밤을 치러볼까?”
“켁! 콜록, 콜록, 네, 네?!”
“결혼식 하는 날, 그땐 제대로 첫날밤을 치르도록 하고, 오늘은 약식으로 하지. 이젠 부부인데 합방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아, 아니! 잠깐만요! 흐악!”
아힌의 품에 달랑 들어 올려진 엘리아는 저를 에워싸는 세 짐승의 늠름한(?) 모습에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 * *
2년 후.
그들의 미래를 축복이라도 해주는 양, 하늘은 더없이 화창하고 따스한 빛을 내뿜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네에 앉아있는 엘리아에게 한 아이가 다가왔다.
“누나!”
“레오. 왔니?”
“우와… 누나 정말 예쁘다.”
“그래……? 후후, 고마워.”
“그런데 짐승들은 어디 갔어? 한시도 안 떨어지려고 난리를 치더니, 오늘 같은 날은 왜 안 보이는 건데?”
“글쎄, 맨날 셋이 몰려다니면서 뭐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연회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민 넓은 정원을 두리번거리며 두 남매는 혀를 끌끌 찼다. 제도에 있는 공작저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집으로 옮겼지만 엘리아는 이곳이 부담스러웠다.
하여간 돈지랄은 고쳐지지가 않는단 말이야. 쯧.
“그런데 밖에 황실 마차가 있는 것 같던데?”
“뭐……? 잘못 봤겠지. 황실 마차가 여기에 왜 있겠니.”
“아닌가. 분명 황실 문양이었던 것 같은데.”
“잘못 봤을 거야. 그나저나 넌, 아카데미 생활은 괜찮아?”
“당연하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다 좋아. 그런데.”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는 레오의 모습에 엘리아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왜? 무슨 일 있어?”
“휴… 제발 아힌 매형 좀 말려줘.”
“뭐……?”
“자꾸 학장님한테 편지 보내서 협박 좀 하지 말라고 해. 대체 뭐라고 협박한 건지, 학장님이 나만 보면 90도로 인사하잖아.”
“뭐라고? 이런 미친……!”
미친놈들과 2년을 살았더니, 엘리아의 입엔 욕이 딱 붙어버렸다. 정신 나간 세 아들을 키우는 어미의 마음으로 살았더니 절로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어휴, 그렇게나 하지 말랬더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제발 누나만 사랑하라고 해. 나는 충분히 사랑받았으니까, 이젠 그만 받고 싶다고 전해줘.”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는 레오의 모습에 엘리아는 눈을 희번덕대며 문제의 원흉을 찾느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침 저 멀리서 세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걸어온다. 화려한 연미복을 입은 놈들은 무에 그리 기분 좋은지 아주 싱글벙글이었다.
“누나가 나중에 따끔하게 말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너무 뭐라고 하진 말고. 어쨌든 날 위해서 그런 걸 테니까.”
“하여간 착해 빠져서는.”
“뭐, 어떡해? 도가 좀 지나쳐서 그렇지, 그래도 난 매형들이 다 좋은데?”
“그럼 네가 좀 데리고 살아라.”
“그런 악담은 사양할게.”
어느새 다가온 세 남자가 레오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우리 꼬맹이 언제 왔어?”
“프레드 매형. 이젠 제 키가 매형보다 크거든요?”
“크흠!”
레오의 가차 없는 말에 프레드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레오의 성장 발육이 어찌나 남다른지 어느새 프레드를 훌쩍 따라잡았다.
“여보! 처남이 자꾸만 날 놀리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프레드는 2년 전, 첫날밤을 치른 후부터 저런 이상한 말투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소름 돋을 정도로 싫었지만, 그 말투가 귀엽게 느껴진 순간부터가 아마도 프레드를 사랑하게 된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소리 없이 찾아오는 게 맞았다. 각기 찾아온 시기는 달랐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을 사랑하게 됐다는 걸 느꼈다. 물론 계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사랑이라고 인지한 건 나중이었기에 누굴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된 건지는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세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아무래도 엘리아, 아니면 예나의 DNA에 바람둥이 기질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다행 아닌가. 하나라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곤란했을 테니.
어쨌든 그동안 분에 넘치게 세 사람에게 사랑받았으니. 이젠 받기만 하는 사랑이 아닌, 자신도 그들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고백은 엘리아가 먼저 세 남자에게 동시에 했다.
‘저와 결혼해 주실래요……?’라고.
그날 프레드는 펑펑 울었더랬다. 물론 두 남자도 눈시울을 붉히긴 했지만, 기쁨이 더 컸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작 고백할걸. 그들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망설였던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고백 후 바로 오늘,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치르게 됐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누굴 초대하거나 하객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 누구도 부르고 싶지 않다는 엘리아의 말을 세 공자는 흔쾌히 들어주었다.
“엘리아. 이제 갈까?”
“네.”
셋이라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게 아옹다옹할 때는 언제고, 그들은 규칙을 만들어 그녀가 곤란하지 않게 배려했다. 예를 들어, 오늘 한 명이 그녀의 곁을 양보하면, 양보한 이는 내일 그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는 그런 순서라고나 할까?
처음엔 서로 옆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투덕거리더니, 불편해하는 엘리아의 표정에 세 남자는 알아서 규칙을 정하고 더는 그녀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기특하던지.
단상 위에 레오가 증인으로 서고 그 앞에 엘리아가 보석이 알알이 박힌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섰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세 남자가 각자의 예물을 들고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올려봤다.
“사랑해, 엘리아.”
“사랑한다. 내 여자.”
“사랑하오. 내 아내.”
각자의 스타일대로 고백하는 남자들을 보며 엘리아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진심으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나도 사랑해요. 내 짐승들.”
아힌은 그때보다 더 화려한 목걸이를, 아론은 굵은 알이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리고 팔찌가 약했다고 느낀 건지 프레드는 예쁜 티아라를 준비했다. 그녀의 뺨에 살포시 입을 맞춘 아론이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오늘 밤 제대로 발정한 짐승의 울음을 듣게 될 거야.”
이에 질세라 아힌이 다른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때는 약식이었으니, 오늘은 정식으로 첫날밤을 즐기게 해주지.”
그리고 프레드는.
“여보, 그대의 맛있는 뒷구멍은 내 것…….”
찰싹―!
“악!”
“미쳤어요?!”
정신 나간 프레드의 헛소리에 깜짝 놀란 엘리아는 여전히 뇌가 해맑은 남편의 입술을 세차게 때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뒤통수에서 서슬 퍼런 음성이 들렸다.
“이 결혼은 없던 거로.”
“처남!”
“저 새끼 입 막아.”
“아카데미에서 다시는 못 나오게 해야겠군. 학장한테 편지 좀 쓸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새 레오는 세 남자에게 들려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고, 홀로 덩그러니 남은 엘리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아… 이 결혼 정말 괜찮은 건가……?
난장판이 돼버린 결혼식에 눈꼬리를 축 내렸다가 이내 푸스스 웃으며 허기진 배를 달래려 음식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밤새 저 짐승들을 상대하려면 기력 보충은 필수니까.
어차피 격식 없는 결혼식이었고, 자신들에게만 의미 있는 결혼식이니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저 멀리서 투덕거리는 네 남자를 힐끗 보면서 엘리아는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갈수록 애가 되는 남편들의 모습에 미간이 좁아 든다.
“흐음, 어째 갈수록 레오가 더 어른스럽단 말이지.”
그래도 싫지 않았다. 예전과 다르게 세 짐승의 귀여운 구석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니까.
“음, 맛있네? 이거?”
엘리아는 자꾸 당기는 입맛에 연신 음식을 오물거리며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네 남자를 보며 히죽거렸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건가 싶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야릇한 신혼 방.
2년 전 했던 말을 까먹지도 않은 세 남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엘리아의 손을 침대에 묶어놓고 기분 좋게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미친놈들’이라고 했던 아론마저도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꼼짝없이 잡혀 짐승들의 음험한 눈빛을 온몸으로 느끼던 엘리아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변태들.”
“역시 아름답군.”
“내 여자의 황홀한 모습에 내 자지는 벌써 난리가 났어.”
“여보, 내가 준비한 의상이 마음에 드오?”
어쩐지 드레스가 뭔가 이상하다 싶은 느낌은 있었다. 한 번에 입혀줘서 몰랐는데, 치마가 분리될 줄이야.
이미 가슴 반을 드러냈던 앞섶은 조금 아래로 당겼을 뿐인데 풍만한 젖가슴을 음란하게 내보이고 있었고, 풍성한 치마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짧은 치마가 그녀의 붉은 속살을 보일 듯 말 듯 가리고 있었다. 거기다 하얀 스타킹에 가터벨트까지 착용한 엘리아의 모습은 아주 아름답고, 몹시 음탕해 보였다.
“대체 이런 옷은 어디서 구한 거예요?”
“에이, 알면서 그러오. 이런 옷을 입고도 이토록 성스러워 보이는 여인은 그대밖에 없을 듯?”
“정말 못 살아! 이런 데 돈 쓰지 말라고 했죠!”
음탕한 꼴을 하고도 자신들에게 호통 치는 엘리아의 모습에 세 공자는 더욱 발정하기 시작했다.
세 남자가 동시에 옷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 내리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부끄러우면서도 엘리아의 눈동자는 세 남자를 번갈아 보느라 연신 굴러다녔다.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탄탄한 몸매. 제국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세 남자의 나신 아래쪽에선 흉포한 그것들이 힘차게 발기된 채로 꺼덕거렸다. 누가 누가 더 커지나 내기라도 하는 듯, 그 와중에도 아주 쑥쑥 자라났다.
그 모습에 엘리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때 누군가 중얼거렸다.
“더는 못 참겠다.”
그 말이 마치 이 밤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라도 된 듯 세 남자가 동시에 엘리아의 몸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 구역이 정해져 있는 듯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후, 그녀의 온몸이 짐승들의 타액으로 물드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으으… 하아…….”
세 짐승의 혀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피하지도 못하고 묶인 손을 바르작거리며 엘리아는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그때처럼 3일 내내, 하읏……! 이럴 건 아니죠……? 흐응…….”
“당연하지. 그때는 약식이었고, 오늘은 정식으로 치르는 첫날밤이니까 일주일은 해줘야지. 걱정하지 마.”
“하읏! 뭐, 뭐라고요?! 흐으응!”
가랑이 사이에 자리 잡은 아론이 그녀의 붉은 속살을 게걸스럽게 빨아대다, 질문에 아주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는 기절초풍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후, 자연스럽게 다시 얼굴을 묻었다.
“흐아아앙!”
양쪽 젖을 사정없이 빨아 삼키는 것도 미치겠는데, 아래에선 손가락으로 구멍을 쑤시고 음핵을 혀로 탈탈 털어대자, 엘리아는 시작부터 거하게 가버렸다. 뿌듯한 얼굴로 저를 보는 세 남자의 미소에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망은 결국 실패했지만, 세 짐승을 유혹하는 데는 어찌 됐든 성공했으니 복수는 성공한 건가? 레오가 준 네잎클로버가 정말 행운을 가져다준 걸까?
“또 딴생각하는군. 우리가 너무 살살 다뤄준 모양이야.”
아론의 말에 엘리아는 부르르 떨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매 순간 행복하다. 그래, 그거면 된 거잖아. 그러니까 난 성공한 거야.
“행복해요. 이 삶이 간절해질 만큼.”
“더 행복하게 해주지. 우릴 선택한 것이 한순간도 후회되지 않도록.”
처음으로 이 세계에 온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다면 이 짐승들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이젠 이 세 짐승 중 누구도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배드엔딩이었던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바뀌었다. 이것도 다 정해졌던 걸까? 그러나 이젠 상관없었다. 원작이 어떠했든 무슨 상관이랴. 지금 행복하면 그만이지.
이젠 공작저의 짐승들이 저를 모시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짓밟힌 꽃은 화려하게 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온실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받으며 예쁘게 필 것이다.
소설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엔딩을 맞이했다. 그리고 현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세 짐승의 따스한 품에서.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