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집요한 청혼
엘리아는 오랜만에 정원으로 나와 그네에 앉았다. 일주일 만에 침대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렇게 충격이었나?
사실 이해되질 않았다. 자신이 엘리아의 감정에 왜 그렇게 동화된 건지.
“아마도 그 꿈 때문이었겠지.”
처음 그녀의 꿈을 꾼 건 이곳에 오면서 꾸었던 엘리아와 공작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엘리아의 어린 시절을 봤던 그 꿈. 수돗가에 앉아 수건을 빨며 울음을 참던 아이. 그녀를 모질게 대하던 엄마. 그리고 가지 않겠다며 처절하게 울부짖던 엘리아.
그리고 프레드와 얘기를 나누다 쓰러진 이후 꾸었던 꿈은 엘리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그 장면이었다. 마치 책 속의 이야기를 그대로 읽은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을 반복해서 그 꿈을 계속 꾸었다. 그래서 눈을 뜨는 것도, 잠이 드는 것도 괴로웠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던 엘리아의 소원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자신이 이 몸을 차지한 거에 대한 벌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누군 오고 싶어서 왔냐고. 나도 오고 싶지 않았어!’
돌아가고 싶다고, 돌려보내 달라고 매일 밤 울부짖었다. 그렇게 점점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어젯밤,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꿈을 꾸었다. 어린 엘리아와 그녀의 엄마. 울먹이던 아이와 모질게 대하던 모녀의 모습이 아닌, 그 둘은 나란히 서서 손을 꼭 잡고 자신을 보고 방긋 웃고 있었다.
마치 이젠 괜찮다는 듯. 그리고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고 그 둘은 사라져버렸다.
눈을 뜨니 레오가 자신을 꼭 안고 잠들어 있었다. 순간, 모든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슬펐던 감정도, 괴로웠던 마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무거웠던 마음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용서한 건가…….”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더는 세 공자에 대한 분노나, 엘리아가 느꼈던 고통이 느껴지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가벼웠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하아…….”
“엘리아!”
저를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세 공자와 레오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림같이 생긴 세 남자가 저렇게 다정한 미소를 띠며 자신에게 오는 모습이 이질적이면서도 새삼 신기했다. 그들의 본색을 몰랐다면 아마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F4도 아니고, 뭐야……?
“엘리아, 안 추워?”
제법 바람이 쌀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추운 날씨까진 아니었다. 그런데도 프레드는 들고 온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덮어줬다.
멀대같이 큰 남자들이 앞에 서서 방글방글 웃는다. 물론 멋있고 잘생긴 건 알겠는데, 이런 상황이면 엘리아는 여지없이 움츠러들었다. 이 습관은 언제쯤이나 고쳐질는지.
“레오, 누나 옆으로 와.”
저 짐승들 사이에 서있는 자그마한 생명체가 왠지 위험해 보여 엘리아는 얼른 레오의 손을 잡아끌어 제 옆에 앉혔다. 잘난 세 공자 사이에서도 외모로 빠지지 않는 레오였지만, 왠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못된 성격이 물들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우리를 몹시 나쁜 놈으로 보는 모양이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아힌의 말에도 엘리아는 모른 척 레오만 쳐다봤다.
“엘리아.”
“…네.”
무슨 일인지 불러놓고 말을 안 하는 아힌을 슬쩍 올려다보자, 세 남자가 똑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왜들 이래……?
의아한 것도 잠시.
“미안하다.”
“앞으로는 다신 그러지 않으마.”
“지금은 안 믿겠지만, 보여줄게. 우리도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줄게. 악! 왜, 왜 때려!”
아론이 먼저 말을 시작하고, 아힌이 다음 말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프레드의 엉뚱한 말에 두 형제가 이죽거렸다.
“우리 원래 사람이었거든?”
“아, 이 자식은 사람 새끼가 아니었지.”
주거니 받거니, 투덕거리는 세 공자의 행동에 진지한 분위기는 이미 사라졌지만, 엘리아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누나, 울어?! 왜 울어! 이 씨……!”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엘리아 때문에 레오가 또다시 눈을 부라렸다. 흡사 벌써 기사라도 된 양,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세 공자를 사납게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힌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꺼내기 위해 그녀의 기분을 살피며 물었다.
“엘리아, 용서해 주겠나?”
“…….”
“엘리아. 정말 잘못했어. 그러니까 인제 그만 웃어주면 안 될까?”
왜 이렇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흐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은 이미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이다. 다만 엘리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인정하지 못했을 뿐. 그래서 이렇게 눈물이 나는가 보다.
누가 보면 바보라고, 또 속을 거라고 할지 몰라도 그동안 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 세 공자의 진심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만하고 싶었다.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경계하고 의심하고. 이 모든 감정이 스스로를 갉아 먹는 것 같아 힘들었다.
“용서를 강요하지 마라. 프레드. 우리가 진심을 보여주면 그때 웃겠지.”
“왜 나한테만 그래……. 아힌 형이 먼저 물어봤는데.”
아론의 따끔한 충고에 프레드는 민망한 듯 중얼거리며 콧잔등을 쓱쓱 긁었다.
“크흠! 엘리아, 네게 줄 것이 있다.”
혹시나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까 봐 아힌은 제가 준비한 선물로 화제를 전환했다. 여전히 물기 가득한 얼굴을 들어 올리는 엘리아 앞에 앉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옆으로 비켜준 레오가 여전히 경계 어린 눈빛으로 노려봤지만, 아힌은 아랑곳없이 제 손에 들린 서류를 엘리아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봐봐.”
“이게… 뭐예요……?”
차마 볼 생각도 못 하고 자신만 바라보는 엘리아의 눈앞에 그가 글씨가 적힌 고급지를 펼쳐 보였다.
“…이, 이게 대체……?!”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베르타른 공작가의 공작, 아힌이라고 하오.”
갑자기 말을 높이는 아힌. 그리고 뒤이어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엘리아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엘리아, 로아르 세인티아 남작.”
“……!”
“난 베르타른의 차남 아론이오.”
“난 프레드. 반가워, 세인티아 남작?”
미, 미친 거 아니야?! 이게 지금 무슨……?!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걸 보니, 이미 세 공자 모두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레오를 바라보자, 레오 또한 멋쩍은 듯 웃으며 수줍게 제 소개를 했다.
“레오, 아르테미 세인티아입니다……. 전 누나의 동생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정신이 아찔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어찌 된 일인지 하나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멍청한 얼굴로 손에 들린 서류를 보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만큼 서류에 쓰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어이없게도 헛웃음이 나온 건 서류의 마지막 부분에 찍힌 인장의 이름 때문이었다.
에덤도르앙 데 슈얼데르 오딧세 오스카니아
역시 길다, 길어. 무슨 이름이 이렇게나 길어? 그런데 황태자한테 이런 권한도 있어? 하녀 따위를 하루아침에 귀족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 하, 대단한 남자였네.
하하하… 내가 귀족이라니, 하녀만 아니기를 바랐을 뿐인데, 귀족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엘리아는 혹시 이것도 꿈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혼란스러웠다. 어이가 없어 웃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귀족이 뉘 집 개 이름인가? 이렇게 아무한테나 턱턱 내주는 게 말이 돼?
아무리 소설이라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녀의 이런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힌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세인티아’라는 남작 가문이 있어. 그런데 자식이 없었지. 세인티아 남작은 황태자를 어릴 때부터 모시던 시종이었는데 노병(老病)으로 죽었다. 황태자가 꽤 아끼던 이였지. 남작이 죽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서 그대로 가문이 없어질 위기였는데, 이참에 너희를 세인티아 남작의 자식으로 입적시켰다. 그리고 그 작위를 물려받은 건 엘리아 너고.”
“……?”
“그러니까 거절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세인티아 남작도 좋아할 거야. 제 가문을 이어줄 자식이 생겼으니까.”
“그래도…….”
“황태자도 네가 거절하지 말았으면 했다. 누구보다 남작의 가문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거든.”
하, 이러면 정말 거절할 수가 없지 않은가. 황태자에게 빚진 목숨도 있었지만, 죽은 남작이 좋아할 거란 말에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왠지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웃고 있는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아? 아직 하나 더 남았다.”
“네?”
“이건 레오 선물. 물론 네 누나를 잘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안 주려고 했는데, 평생 누나를 지키겠다는 네 기개가 마음에 들어서 주는 거다. 서류는 엘리아가 대신 봐. 레오의 보호자는 너니까.”
또 하나의 서류를 내밀며 방긋 웃는 아힌의 표정에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받아 든 걸 열어보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세상에……!”
“누, 누나. 뭔데요? 뭔데 그래요?”
자신의 선물이란 얘기를 들어서인지, 레오가 처음으로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만약 네가 거절하면 그것도 쓸모없어지게 될 거야. 거긴 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거든.”
하, 아주 완벽하게 준비했구나.
빼도 박도 못 하게 준비해 온 아힌이 으쓱 어깨를 올리며 뿌듯하게 웃는다. 엘리아는 그제야 피식 웃었다.
이걸 준비하느라 저렇게 말랐던 모양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힘들게 준비해 놓고 지금은 제가 거절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니. 이러니 어찌 미워할 수 있겠나.
가만 보니 용서고 뭐고, 그건 제 역량이 아니었다. 엘리아의 운명은 세 공자와 단단히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이들에게선 벗어날 수 없는 여주인공의 운명.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세 남자를 번갈아 보다 엘리아가 레오를 불렀다.
“레오.”
“네?”
“학교 가자.”
“네……?”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만 가는 아카데미 입학 신청서를 보여주자, 레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걱정하지 마라. 베르타른 공작가의 공작인 내가 네 후견인이니까.”
“네에?”
“그래, 처남! 가서 까부는 새끼들 있으면 일단 한 대 날려버려! 뒷일은 내가 다 알아서!”
“프레드!”
“도련님!”
“미친 새끼.”
퍽!
“으윽!”
인상을 와락 쓰며 모두 프레드를 노려봤지만, 레오만이 제 입학 신청서를 들고 헤실헤실 웃었다. 하루아침에 인생이 달라졌는데, 작은 아이는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레오와 제대로 된 얘기를 못 나눴구나. 나중에 어떻게 된 건지, 진지하게 대화 좀 해야겠네.
엘리아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래, 이젠 모르겠다. 되는 대로 살아보자. 어디든 길은 있겠지.
더는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도 충분하니까. 닥치는 대로 살다 보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겠지. 계획대로 산다고 좋은 일만 생기겠어?
“자, 오늘은 엘리아가 남작이 된 기념 파티와 레오의 입학 축하 파티가 열릴 거야. 그러니까 다들 각자 방으로 가서 준비한 옷들을 입고 나오도록 해.”
아론의 말에 레오가 엘리아의 손을 잡았다. 신난 기색이 역력한 아이의 모습에 엘리아는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그리고 세 짐승은 그녀의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누가 준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아의 방에는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화려한 드레스가 준비돼 있었다. 분명 정원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못 봤는데, 자신이 나온 후 다들 몰래몰래 움직인 모양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저택이 들썩거렸다. 사용인들은 파티 준비로 바쁘고 세 공자와 두 남매는 한껏 꾸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용인의 도움으로 치장을 마친 엘리아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떨리는 마음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받듯, 며칠 만에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일까? 레오를 잘 보살펴달라는 얘기겠지……?
“나가있어라.”
“네.”
얼마나 정신을 빼놓고 있었는지, 아론이 들어오는지도 몰랐던 엘리아는 제 뒤로 오는 아론을 거울을 통해 바라봤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공작령 연회에서도 보긴 했지만 그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볼 생각도 못 했는데, 이렇게 꾸민 아론을 보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멋있어?”
“…….”
“넌 아름답군. 여전히.”
“…….”
“치사한데? 멋있다고 한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
“멋있어요.”
“비싼 칭찬이군. 뒤로 돌아봐.”
“네?”
그녀의 몸을 조심히 돌린 아론이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본다. 오늘따라 이놈들이 왜 이렇게 무릎을 꿇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줄 게 있어.”
“또요……?”
벌써 분에 넘치는 선물을 몇 개나 받았는데, 뭘 또 준단 말인가. 예상을 뛰어넘는 놈들의 통 큰 선물에 엘리아는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눈만 끔벅거리자, 아론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러곤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상자의 뚜껑을 연다.
“허……!”
“목은 아힌이, 팔목은 프레드가 이미 가져갔다며? 그래서 난 이걸 준비했지.”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론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곧 엘리아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졌다. 엘리아는 제 손가락에 꼭 맞게 끼워진 반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엘리아.”
“…….”
“나랑 결혼할래?”
“……?!”
아무래도 오늘 세 공자가 자신의 심장을 터트려 죽일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신종 살해 방법인가.
하지만 그들의 고백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엘리아의 파란만장한 운명의 소용돌이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제 앞에 다가올 미래를 아직 예감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 짐승이 어느 정도로 미친놈들인지도 그녀는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 * *
시간은 유수와도 같았다.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 벌써 레오가 아카데미로 떠나는 날이었다. 마주 보고 선 엘리아와 레오의 눈은 벌겋다 못해 퉁퉁 부어있었다.
“뭐야? 둘이 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끼어드는 프레드의 말에도 두 남매는 애틋하게 서로만을 담고 있었다. 밤새 레오의 힘들었던 삶을 듣는 것만도 가슴이 미어졌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아이는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고 했다.
공작의 개였던 체이스에게 레오는 납치를 당했다. 아마도 레오를 앞세워 자신을 다시 공작가로 끌고 가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먼저 출발했던 세 공자가 다시 돌아왔고, 길 중간에서 체이스의 말에 매달린 레오를 발견했단다. 그들은 보는 즉시 체이스를 죽였고 그 광경을 레오는 고스란히 다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체이스가 들고 있던 종이로 레오와 엘리아의 관계를 그들도 알게 됐다고.
뭐, 나중에 다시 확인하긴 했겠지만, 워낙 닮은 구석이 많았으니 딱히 의심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남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세 공자는 역시나 아이에게 생길 트라우마 따위도 안중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한 놈도 아이의 눈을 가려줄 생각을 안 했는지.
다시 생각하니 또 화가 끓어올랐다. 구해준 건 고맙지만 너무한 건 너무한 거였으니까. 혹시라도 레오에게 안 좋은 기억이 생겼을까 봐 엘리아는 걱정스러웠다.
“레오. 누나랑 어제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응, 누나.”
“그래. 힘들면 언제든 와도 돼. 지금도 네가 원치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되고.”
“아니, 나 공부 열심히 해서 매형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될 거야. 그래서 누나 지켜줄 거야.”
“……!”
뭐? 매형들? 이 양반들이 진짜?!
눈을 희번덕거리자 세 공자가 뒤를 돌아 먼 산을 바라본다. 프레드는 아예 자신은 모르는 일인 양,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그동안 어이없는 짓을 계속하더니, 그들의 마수가 기어이 레오에게까지 뻗치고 말았다.
“후우… 이따가 나 좀 봐요! 세 분 다!”
“나, 난! 레오 데려다줘야 해.”
얄밉게 쏙 빠져나가는 프레드를 흘겨보자, 그가 다급하게 레오의 손을 잡아끌었다.
“처, 처남! 얼른 가자. 첫날부터 늦으면 안 되지. 숙소도 정해야 하고, 준비할 게 아주 많다고.”
“네? 네. 누나. 다녀올게. 그리고.”
레오가 자그마한 손을 들고 손짓한다. 아무래도 비밀 얘기인 모양이었다.
“응?”
상체를 숙여 레오에게 귀를 대주자.
“누나, 이 짐승들 조심해야 해? 방문 꼭 걸어 잠그고. 혹시 못 살게 구는 사람 있으면 나중에 나한테 얘기해. 알았지? 누나, 보고 싶을 거야.”
쪽!
“아……? 푸흡. 그래. 나도 보고 싶을… 거야, 아……?”
어?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진 기분이었다. 레오의 귀여운 말과 행동에 대답하려다, 뭔가 섬뜩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왜들… 그래요?”
세 공자의 낯이 아주 서슬 퍼렇다 못해 살기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느닷없이 프레드가 레오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간다.
“처남. 따라와.”
“어… 어……? 알았어요. 내가 갈 거라고요!”
“프레드! 애를 왜 끌고 가요!”
“다녀올게.”
왜 저래?
못 볼 꼴이라도 본 양,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린 프레드가 레오의 목덜미를 잡아채곤 거칠게 끌고 갔다. 그나마 나중엔 어깨에 들쳐 메고 가는 바람에 엘리아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일까……?
꼭 형이 막냇동생을 괴롭히는 것 같은 다정한(?) 모양새가 그리 나빠 보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거다.
“형도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가보시지?”
“크흠. 일을 미루고 싶군.”
“흥, 레오의 후견인께서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되지. 공작가가 망하면 레오는 누가 지켜줘? 돈도 꽤 많이 썼을 텐데, 채워 넣어야 하지 않겠어?”
“괜히 공작이 됐군. 몹시 후회스러워. 그냥 네가 할래?”
“…하! 정말 단단히 미쳤네.”
“후우… 다녀오지. 엘리아? 혼은 저녁에 날 테니까, 너도 혼날 각오해.”
내가 왜 혼나?
으르렁거린 것치곤 다정하게 웃어주고는 아힌은 프레드와 레오가 탄 마차로 향했다. 아힌까지 타고 나니 호화롭기 짝이 없는 마차가 소리도 없이 빠르게 사라진다.
저 화려한 마차를 보니 문득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공작령에서 제도까지 가는 동안 저 짐승들 좆을 밤새 품었던 기억이.
이젠 그마저도 추억이 된 건가.
그날 이후로 완전히 엘리아의 감정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시간이 약인 건지, 고생스러웠던 기억도, 끔찍하다고 느꼈던 일들도 이젠 그녀에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변해있었다.
“그럼 나만 남았으니 나부터 혼나 볼까? 겸사겸사, 다른 놈한테 내준 그 못된 뺨도 깨끗이 소독 좀 하고?”
“뭐라고요? 설마……!”
“응, 그 설마가 맞을 거야. 나 말고 두 놈이나 널 노리는 것도 영 못마땅한데, 아무리 네 동생이라도 더는 끼워줄 마음은 없다고.”
“미쳤어요?! 지금 레오를 어디에다가 끼워 넣는 거예요?”
“모르나 보군. 내가 아는 어떤 귀족은 남동생이 밤마다 제 누이와…….”
“그만!! 어머! 정말 미쳤나 봐? 하! 기가 막혀!”
어찌나 당황했는지, 엘리아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다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음, 서로의 비밀 얘기를 털어놓는다고 말하려던 거였는데? 대체 뭔 생각을 한 거지, 저 여자가? 흥, 앙큼한 엘리아.”
음흉하게 미소 지은 아론이 그녀가 사라진 쪽으로 잽싸게 쫓아갔다. 아론의 눈빛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사납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엘리아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는 아론이 대치 중이었다.
“나가요.”
“이따가 보자고 한 건 너였잖아.”
“그, 그건! 씨이… 그냥 나중에 봐요. 지금은 쉬고 싶으니까.”
“눈이 퉁퉁 부어도 이뻐 보이니 큰일이군. 내 품에서 쉬어.”
“뭐라고요?”
아론이 한 걸음 다가선다. 그러자 엘리아는 한 걸음 물러섰다.
“얼마 만이지? 한 몇백 년은 지난 기분이야. 이러다 곧 말라 죽겠군.”
“오, 오지 말아요?”
한 걸음 또 다가선다. 동시에 엘리아도 또 한 걸음 물러섰다. 두 남녀는 일정 거리를 두고 한 걸음씩 움직이고 있었다.
“또 도망칠 셈인가? 엘리아 남작?”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왜……? 난 네가 귀족이라 더 좋은데?”
“흥, 역시 하녀 따위는 그저 노리개였죠?”
한 발짝 또 움직이려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내내 장난스럽게 생글거리던 아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아는 순간 말실수를 한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조금 변한 게 있다면, 예전 같았으면 겁부터 집어먹고 몸이 자동으로 움츠러들었을 텐데, 지금은 아론의 저런 표정에도 그를 똑바로 볼 수 있게 됐다는 거다.
“분위기 잡지 말아요. 그리고 다가오지도 말고요.”
“흥, 안 먹히는군. 다가가면 어쩌게? 그때처럼 매력적으로 욕을 하고 뛰어내릴 건가?”
변태들이야……? 욕먹은 걸 왜 이렇게들 좋아해?
“좀팽이.”
“뭐?”
“지난 일이나 들먹이니까 좀팽이죠! 남자가 치사하게.”
“지난 일은 엘리아 남작이 먼저 꺼낸 것 같은데?”
“…….”
굳었던 얼굴이 이내 픽 웃으며 풀렸다. 아론은 여전히 일정 거리를 둔 채로 서서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엘리아.”
“왜요.”
“결혼하자.”
“후우… 그만 좀 해요. 정말 다들 왜 그래요? 왜 틈만 나면 그 말들을 하냐고요. 이제는 괴롭히는 방법을 바꿨어요? 하여간 정말 못됐어!”
‘흥, 뒤에서들 작업 중이었군.’
아론의 눈썹 머리가 꿈틀거렸다.
“그래, 그럼. 조금 더 기다리지,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런데 언제든 선택할 거면 기왕이면 날 고르는 게 좋을 거야.”
“왜요……?”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내가.”
잠시 멈췄던 걸음이 다시 또 움직였다. 뒤로 물러나려던 엘리아는 창가 난간에 다다라 더 이상 달아나지 못했다.
“널.”
또 한 걸음. 그리고 곧.
뚜벅, 뚜벅, 뚜벅.
“제일 먼저 사랑했으니까.”
“읍!”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가 엘리아의 허리를 휘어 감고 뒤통수를 고정한 뒤, 가차 없이 입을 맞췄다. 질척하게 맞닿은 입술에 정신이 아찔해질 때쯤, 아론이 입을 떼고 속삭였다.
“내가 널 제일 먼저 가졌고.”
“……!”
다시금 깊게 키스를 하고는.
“청혼도 가장 먼저 했으니까.”
또 한 번 혀를 넣어 입 안 살을 헤집다가 빼낸다.
“하아…….”
“그러니까 날 선택해. 내 여자.”
“으읍!”
조금 전까지는 맛보기였다는 듯, 아예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고는 목구멍 깊숙이 혀를 넣어 정신을 쏙 빼놨다.
아론의 기상천외한 키스 공격에 아찔했던 정신이 결국 휘리릭 날아가 버렸다. 부드럽게 닿아오는 아론의 입술. 소중한 것을 아껴 먹는 양, 조심스럽게 물고 빨다 다시금 농밀하게 휘젓는 살덩이에 더는 거부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사기적으로 잘생긴 외모를 이용해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어찌 제정신일 수가 있겠는가.
솔직히, 그동안 틈만 나면 유혹하는 세 공자의 끈적한 행동에 엘리아도 몇 번이고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집에는 레오가 있었고 불행히, 아니 다행히 레오가 항상 같이 자는 바람에 이 짐승들은 자신의 침실까지는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읍! 하! 자, 잠깐만요.”
“흠, 자꾸 자극하지 말라니까. 이런 행동이 날 더 조급하게 만든다고.”
“그, 그게 아니라요. 혹시 이 방 열쇠, 가지고 있는 거 아니죠?”
“열쇠? 그딴 게 왜 필요하지?”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순진한 엘리아의 표정에 아론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러곤 그녀가 몰랐던 진실을 아주 떳떳하게 말해 줬다.
“이렇게 순진해서 어떡하지? 이미 이 방문은 안 잠기는 문이었어. 소리만 날 뿐, 밖에서 열면 그냥 열린다고.”
“뭐라고요……?”
“그리고 하나 더. 넌 아힌이 어떤 놈인지 아직 몰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힌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 특히 어린아이에게 인정을 베풀 정도로 마음이 따뜻한 놈은 아니라는 얘기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지 못한 엘리아는 아론의 품에 갇힌 채 눈만 끔벅거렸다.
“레오를 왜 아카데미로 보냈을까? 그 이기적인 아힌이 후견인까지 자처하면서 말이야?”
“그, 그건……. 헉! 설마?!”
“빙고! 내 여자는 참 눈치가 빠른 것 같으면서도 없다니까? 레오가 매일 밤 네 옆에 찰싹 붙어있으니, 어떡해야겠어? 눈엣가시를 치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면서도 너에게 점수 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 기숙사가 딸린 아카데미.”
엘리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도 제국에서 준귀족 이상이 아니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도 레오를 보냈다는 거지. 공작가를 이용해서 말이야. 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걸까?”
“하……! 이, 이것 좀 놔봐요.”
저 하나 갖겠다고 일을 벌인 아힌의 스케일에 한 번 놀라고, 상상을 뛰어넘는 놈들의 추진력에 엘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엘리아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은 아론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날 선택하라는 거야. 아힌은 음흉하다고. 그렇다고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내 동생을 선택할 것도 아니잖아?”
“다 똑같아. 당신도 알고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당연하지. 이 좋은 기회를 아힌이 알아서 총대 메주겠다는데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 덕에 지금 난 너와 이렇게 단둘이 있을 기회를 가장 먼저 부여받았는데?”
“이 나쁜…….”
“그래, 그러니까 이 나쁜 새끼부터 좀 살려주지? 앙칼진 너를 볼 때마다 아주 죽겠단 말이야.”
“흐익!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려놔요!”
순식간에 엘리아의 몸을 어깨에 걸쳐 멘 아론이 침대로 다가가 그녀를 눕히곤 양팔을 잡아 올린다. 그러곤 제 아래 깔려 씩씩거리는 엘리아의 입술에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지 말라면서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어떻게 멈춰.”
“아론! 흐읍!”
반항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말투였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손짓, 그리고 떨림에 지금 그도 얼마나 긴장한 건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잘난 맛에 살고 제멋대로인 남자가 자신을 품에 가두고 긴장하는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뭔가 모를 고양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아론의 품에 안긴 그녀의 심장도 쿵쾅거렸다. 그리고 묘한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다른 건 변했어도 이들의 손길에 반응하는 몸은 여전했다.
맛을 보듯 천천히, 그리고 샅샅이 입 안 살을 휘젓는 아론의 혀에 엘리아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어차피 그에게 양손이 다 잡힌 터라 반항은 무의미했다. 물론 그럴 마음도 이미 사라져버렸지만. 서로의 혀를 얽고 빨아 삼키는 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점점 흥분에 취하는 두 남녀의 온도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꽤 오랜 키스로 흥분을 돋우어놓고, 아론이 갑자기 입술을 뗀다.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아쉬움을 드러내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엘리아. 널 갖고 싶다. 허락해 주겠어?”
“……!”
허락……?
처음으로 자신에게 의견을 묻는 남자. 눈빛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먹어치우고 싶어 안달이 난 듯 조바심을 내보이면서도 아론은 진지하게 제 허락을 구했다.
이미 멋대로 시작하고 분위기를 끈적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허락을 구하다니, 여전히 제멋대로인 남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속에선 왠지 뿌듯함이 차올랐다. 정말로 그가 변했다. 아니, 진심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이 망나니가 노력이라는 걸 하고 있다는 거니까.
거절하면 순순히 물러날까? 아닐 수도 있겠지만, 왠지 오늘의 아론은 순순히 물러나 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가 처음 보인 변화에 재를 뿌리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녀 자신도 지금 이 상황이 싫진 않았으니.
“…좋아요. 대신 소중하게 대해주세요.”
“당연하지. 이제 내게 가장 소중한 건 너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고. 그러니까 나 좀 그만 밀어내.”
“어……?”
우드득! 쫘악―!
“꺄악!”
이 미친놈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엘리아가 입고 있던 원피스가 우악스러운 짐승의 손에 의해 사정없이 찢어 발겨졌다. 정중하게 물을 땐 언제고, 오래 굶주린 맹수의 눈빛이 이성을 잃은 듯 번뜩거린다. 엘리아는 금세 후회했다.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았다.
힘없이 찢어진 옷 사이로 엘리아의 뽀얀 나체와 풍만한 젖가슴이 온전히 드러났다. 얼마 만에 이 아름다운 몸을 보는 건지, 아론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와 몸을 섞는 게 처음도 아니건만, 마치 처음 그녀를 품기 전인 것처럼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리고 그, 그만 봐요.”
당황한 얼굴로 부끄러운지 은밀한 두 곳을 가리느라 애를 쓰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뭉개져 비죽 튀어나온 통통한 젖가슴이나,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 음모에 아론의 눈빛이 더욱 음험한 욕정으로 일렁였다.
“생각할수록 짜증 난단 말이야.”
“네……?”
“이 탐스러운 몸을 나만 보고 싶은데.”
“읏……!”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에서부터 부드러운 살결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까끌까끌한 것이 온몸을 스치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만 만지고 나만 보고 싶은데.”
그녀의 손에 다 숨지 못한 살덩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배꼽까지 내려왔다. 그의 여유로운 행동은 야릇하면서도, 무척 흥분됐다.
“어떡해야 널 나만의 여자로 만들 수 있을까?”
“하아…….”
“이 미치게 야한 몸을 나만 보고 싶은데. 가르쳐주지 않겠어?”
“흐응……!”
위아래를 가리던 손이 남자의 손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삐져나온 틈으로 손을 넣어 젖가슴을 움켜쥐고, 잠시 몸을 움찔거리는 틈을 이용해 나머지 손은 재빠르게 그녀의 미끄덩한 음부 속으로 여유롭게 진입했다.
흥분에 찬 통통한 젖가슴은 반죽 치대듯 주물럭거리고, 질척하게 젖은 아랫도리는 손에 양념이라도 바르는 듯 부드러운 속살을 이리저리 비벼댔다. 이 모든 행위도 흥분돼 미치겠는데, 가장 미치겠는 건 아론의 진득한 시선이 제 눈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아… 아론, 잠깐, 하읏! 잠깐만요…….”
“왜?”
“흐응, 그게, 너무, 너무……. 흐읏!”
“그러게 너무 예쁘잖아. 내 손에 느끼는 네 얼굴이 너무 예뻐서 미치겠다.”
“아앙… 하아읏!”
젖꼭지를 튕기는 동시에, 민감하게 부푼 음핵까지 톡 건들자 울 듯 일그러진 얼굴에서 색스러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바르르 떨며 바르작거리는 몸짓이 왜 이렇게 예쁜 건지.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고 있었지만, 엘리아의 반응에 아론의 아랫도리는 여유롭지 못했다. 꾸물거리며 고개를 빳빳이 드는 제 물건에 아론은 끙, 신음을 흘렸다.
엘리아의 이런 음탕한 모습을 더 보고 싶다는 마음과 당장이라도 그녀를 맛보고 싶은 욕정이 아론의 이성을 헤집어놨다.
말랑한 젖가슴도, 제 손길이 닿을 때마다 흥건하게 젖어 드는 미끈한 보지 살도 아론에게는 놓칠 수 없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가장 원하는 것은 당연히 그녀의 몸 안에 제 것을 넣고 미친 듯이 흔들고 싶다는 욕정이었다.
“하아… 정말 미치게 하는 여자라니까.”
더는 참기 힘든지, 일단 가슴을 포기하고 아론은 그녀의 배 위로 제 몸을 겹쳐 올렸다. 연신 흥건하게 물을 쏟아내는 질척한 가랑이 사이를 이리저리 비벼대며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손에 닿는 촉감과 제 손에 신음을 흘리는 여자를 보고 있으려니,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이렇게라도 잠시 제 음욕을 식히고 그녀의 몸을 더 느끼고 싶었다.
대낮부터 엘리아의 방에선 남녀의 타액이 섞이는 음란한 소리와 아론이 그녀의 구멍을 쑤셔대는 질척한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화음이라도 얹듯, 엘리아의 신음은 아론의 흥분을 더욱 끌어 올렸다.
“하아, 하아… 흐응!”
“좋아?”
“으으응… 하아, 하아.”
대답을 회피하는 엘리아의 행동에 아론의 눈빛이 짓궂게 변했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자꾸만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진다. 고집스러운 이 앙증맞은 입에서 자신을 원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좋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빨아주지. 네 입으로 넣어달라고 하기 전까지 절대로 안 넣어줄 거야.”
“흐앗! 흐으……! 흑!”
덥석 젖가슴을 베어 물자, 엘리아의 몸이 들썩거렸다. 동시에 녹진하게 풀린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푹 쑤셔 넣자, 엘리아가 울음 섞인 신음을 내지르며 아론의 손가락을 꽉 조여 물었다.
이미 아론의 손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르고 민감해진 몸은 제 안에 침범한 굵은 손가락에 당장이라도 갈 것처럼 예민해졌다. 가장 두꺼운 중지가 구멍을 넓히며 쑤석거리는 감각에 엘리아는 아론의 결 좋은 머리칼을 움켜쥐며 바르르 떨었다.
머리채를 잡혀놓고도 아론은 히죽 웃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예전보다 더 물을 흘리고 제 손가락을 꽉 조이는 미끈한 속살의 느낌이 너무나도 황홀했다. 입 안에서 살살 굴러다니는 젖꼭지는 그녀의 달큼한 체향이 더해져 말랑한 젤리를 맛보는 것 같았다.
아… 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이 맛 좋은 여체를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 너무 오래 걸린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지만, 참은 만큼 제게 돌아온 보상은 너무나도 달았다. 마음 같아선 며칠을 제 품에 가둬두고 그녀의 몸을 탐하고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제 짐승 같은 형제들이 있는 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기랄, 다 죽일 수도 없고.’
“흐윽! 깨물지 말아요!”
“흐음, 이런 미안. 너무 맛있어서 제어가 안 됐군. 그럼 이제 다시 좁아진 이 구멍을 더 넓혀볼까?”
“하윽! 아론, 아아… 자, 잠시만요. 지금 그러면……! 아흣!”
“그때보다 구멍이 더 좁아진 것 같은데?”
그녀의 애끓는 신음에 아론은 화답이라도 하듯, 손가락 하나를 더 끼워 넣었다. 제 좆의 크기에라도 맞추려는 듯, 구멍을 넓히려고 손가락을 둥글게 돌린다. 다시금 젖꼭지는 혀끝을 세워 파다닥 털어대고 휘젓던 손가락을 살짝 빼낸 후, 다시금 푹 쑤셔 넣었다.
“하악! 흑! 흐으… 하읏!”
파드닥대던 엘리아의 몸이 허공에 붕 뜬 채, 얼음이라도 된 듯 멈추었다. 아론의 손바닥까지 축축해질 정도로 왈칵 애액을 쏟아내고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뱉어내며 몸을 내렸다.
“흐음, 벌써 간 거야? 하여간 잘 느낀다니까.”
“하아, 하아…….”
“참, 혹시… 황태자 그 새끼가.”
“하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아… 하지 말아요.”
“하긴, 내 여자가 그딴 놈한테 몸을 줄 여잔 아니지.”
그딴 놈이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의 황태자를 졸지에 그딴 놈으로 만든 아론은 기분 좋다는 듯 히죽 웃었다. 참 낯선 모습이었다.
“인제 그, 그만해요.”
“또 혼자 즐기고 말겠다는 거야?”
“아, 아니이. 아로온! 흐아앙!”
그는 괘씸하다는 듯 다시금 손가락을 깊게 쑤셔 박아 넣고는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입술을 쭙 빨아 삼켰다가 귓불을 집어삼키고, 귓속으로 혀를 넣어 쑤석거리다, 목덜미를 쭐쭐 빨아댄다. 갑자기 정신없이 몰아치는 남자의 공격에 엘리아의 민감한 몸은 또 한 번 쾌락으로 물들고 있었다.
“흐흑……! 그, 그만! 안 돼요……! 모, 못 참겠다고!”
“하아… 엘리아.”
‘나야말로 정말 못 참겠다. 그딴 소리는 왜 해서는.’
괜한 오기를 부려서는 하지도 못하고,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아, 으응, 핫! 하아앙! 아흑! 하아…….”
아론의 애끓는 소리에 엘리아가 또 한 번 절정으로 치달았다. 손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애액을 왈칵 흘리며 헐떡이는 여자를 보니 제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럼 빨리 애원하게 만드는 수밖에.’
아주 정신 못 차리게 몰아붙이리라. 빨리 넣어달라고 애원하게 만들리라. 아론의 눈빛이 비장하게 번뜩였다.
“자, 이제 두 번. 손으로 두 번 느끼게 해줬으니까 이젠 입으로 느끼게 해주지.”
“아론!”
“응?”
“제발, 그만해요…….”
그녀의 애원에 입꼬리가 부들거렸다.
“뭘 자꾸 그만하라는 거야?”
“그, 그러니까 인제 그만…….”
눈가는 촉촉하게 젖은 상태로 우물쭈물 말을 늘이는 엘리아의 표정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아론은 힘겹게 진지한 표정을 고수한 채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말을 해야 알지. 나랑 하기 싫은 거야?”
“그, 그게 아니고…….”
“엘리아. 당당하게 말해도 돼. 넌 이제 그래도 되는 여자라고. 그리고 난 네 의견을 우선으로 할 거야.”
“정말요……?”
순진한 눈망울로 되물어 오는 여자를 보니 터지기 직전인 아랫도리에 또 한 번 피가 몰렸다. 이젠 정말 한계였다.
‘젠장, 도저히 못 참겠군.’
그래도 이를 드러낼 순 없었다. 이제야 서서히 마음을 여는 엘리아를 다시 도망치게 할 순 없으니. 그리고 그녀도 한계인 것 같았다.
“그래, 말해 봐. 네가 원하는 걸.”
“…인제 그만…….”
“그만……?”
“하, 하고 싶어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엘리아의 얼굴이 금세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그러곤 얼굴을 홱 돌리는 게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아론은 실룩대는 입꼬리를 잡아 내리느라 죽을 맛이었다.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그렇군. 크흠! 알았어. 네가 그렇게 내 자지를 원하니 맛은 조금 있다가 보는 거로 하지.”
“네?”
겨우 웃음을 참아내고는 아론은 그녀의 아래로 내려가 양다리를 활짝 벌렸다. 엉망으로 젖은 붉은 속살이 퍽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더럽다고 생각한 곳인데, 왜 엘리아의 보지만 보면 이리 맛을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예쁘다. 엘리아 네 몸은 어디 하나 안 이쁜 구석이 없어.”
제 말에 또다시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는 여자를 보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 번 열린 마음은 그녀가 보이는 모든 행동에 반응했다. 그리고 그 크기는 갈수록 더 커지고 있었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론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벌어지는 셔츠 사이로 탄탄해 보이는 근육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유로운 척 움직였지만, 아론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조급했다.
마지막 바지까지 벗어 내리자, 이제야 살겠다는 듯 커다란 좆 몽둥이가 퉁 튕겨 오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선단 끝이 번들거리는 걸 보니, 이미 그도 흥분에 못 이겨 쿠퍼액을 잔뜩 흘린 모양이었다.
엘리아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왠지 저번보다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우람한 자지가 지금 제 안에 들어올 거라 생각하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새삼 왜 겁이 나는 걸까? 처음도 아닌데. 오랜만에 본 아론의 성기 크기에 압도된 엘리아의 머릿속에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녀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제 마른 입술을 핥은 아론은 자지를 잡고 흥건하게 젖은 보지 살에 쓱쓱 문지르다 좁은 구멍에 선단 끝을 맞췄다.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간다. 마치 처음 그녀의 몸을 탐하는 기분이었다.
“겁먹지 마.”
자신에게 한 말이나 다름없었다.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그런데 뭐가 불안한 건지, 제 손가락을 오물거리며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아의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그녀의 행동, 표정 하나하나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렇게 귀여운 면도 있는 줄 몰랐는데. 대체 어디까지 홀릴 셈인 건지.”
“아론.”
“응.”
“아프지 않게 해줘요.”
“…그래. 황홀하게만 해줄게. 그동안 나랑 했던 기억은 다 잊어, 엘리아. 난 지금 이 순간부터 너와 다시 시작하고 싶으니까. 오늘부터 네게 좋은 기억만 줄게. 그러니까 이제 그 지옥에서 나와.”
“아론…….”
아론의 진심 어린 말에 엘리아는 순간 울컥했다. 저 아론이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당신도 어디까지 변할지 궁금해지네요…….”
“난 변한 게 아니야. 이젠 네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지려고 할 뿐이지.”
“…….”
진지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는 사이, 아론의 자지가 슬슬 그녀의 질구를 뚫기 시작했다. 좁은 문이 흉포한 살덩이를 맞이하느라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엘리아는 아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점점 더 부피를 키우는 좆 기둥에 엘리아의 숨소리가 달뜨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위로 상체를 기울인 아론이 발그레한 뺨에 다정스레 입을 맞춘다. 점점 더 굵은 몽둥이가 들어올 때마다 엘리아는 아론을 꽉 끌어안았다.
“흐으응…….”
“엘리아.”
“읏, 네.”
“결혼하자.”
“아……! 하읏!”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또 청혼한 남자가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가녀린 몸을 꼭 끌어안고는 뿌리까지 그녀의 몸 안에 가득 채워 넣었다.
대낮부터 엘리아의 달뜬 신음이 온 저택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부드러운 움직임에도 몇 번을 느끼고 쌌는지 모를 정도로 그녀는 그와의 섹스에 완전히 취해있었다.
남자의 넓은 등이 붉은 손톱자국으로 가득 물들었을 정도로 그녀는 오랜만에 아론의 품에서 제대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어디에 가서 연습이라도 하고 온 건지 아론의 몸짓은 너무나도 유혹적이었고, 그가 주는 쾌락은 더없이 황홀했다. 이쯤 되니 엘리아의 몸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원래 밝혔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아… 엘리아.”
“하읏, 아론……! 나, 나 미칠 것 같, 아앙……!”
“나도 너 때문에 미치겠다. 왜 이렇게 좋은 거지?”
“흐으으… 하앙……!”
아론의 엉덩이가 들썩거릴 때마다, 살결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퍽퍽 신나게 박아대다, 뿌리까지 깊숙이 박아놓고는 사정없이 엉덩이를 비벼댔다. 빳빳한 좆이 이리저리 휘청일 때마다, 좁은 내벽이 넓혀지길 거부하듯 아론의 좆을 꽉꽉 물어 재꼈다.
시작한 순간부터 꼭 끌어안긴 남자의 품속에서 엘리아는 쉼 없이 헐떡였다. 눈물이 맺히면 혀로 핥아주고, 교성을 내지를 때면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 속에 혀를 넣고 질척하게 키스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격렬한데도 만족스러운 섹스는.
아론은 정말로 소중하게 안아주었다. 거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이고, 연신 핥아주며 보듬었다. 문득 이런 아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의 끝없는 청혼에 엘리아의 마음도 솔직히 흔들렸다.
물론 지금 당장 아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든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무슨 생각하는 거야.
흔들리는 제 마음을 쓸데없다 치부하고 엘리아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아힌과 프레드의 청혼까지 받은 터라, 솔직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부드럽게만 움직였나 보군.”
“…네?”
“내 여자가 다른 생각할 틈이 생겼다는 건, 그만큼 내가 만족을 못 시켜주고 있다는 거잖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아론의 투덜거림에 엘리아는 민망하면서도 미안했다.
“그럼 지금부터 쉴 시간을 안 주지. 다른 생각 따윈 아예 못 할 거야.”
“……?”
“죽여주겠다는 얘기야. 훗.”
“아… 아론!”
잠시도 떨어지지 않던 아론의 상체가 비켜나자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가슴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대체 뭘 하려고 저러는지 아론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간다. 한쪽만 올라간 걸 보니, 뭔가 짓궂은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잠시.”
“미안하기는.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내 여자는 거칠게 박아주는 걸 참 좋아하는데 내가 깜박했네.”
“아니라니까요!”
“그럼 맞는지 아닌지, 어디 볼까?”
“아, 히윽! 아로온! 하으응!”
다리를 한계까지 양옆으로 쫙 찢어놓고는 서서히 허릿짓에 속도를 올린다. 굵은 좆이 드나들 때마다 일부러 누르는 건지, 질구 아래쪽이 아론의 좆 기둥에 쓱쓱 비벼졌다.
속도가 빨라졌다. 그럴 때마다 교접부에선 찔꺽, 찔꺽, 음란한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씩 박을 때마다 뿌리까지 완전히 쑤시고 들어오는 통에 엘리아는 참을 수 없는 교성을 내질렀다. 활짝 벌어진 다리 탓에 구멍도 활짝 벌어진 느낌이다. 그 속을 굵은 자지가 빠르게 넘나드니, 금세 쾌감이 아랫배를 간질였다.
쉬지 않고 달리던 남자가 벌어진 다리 하나를 제 어깨 위에 턱 걸쳐 올린다. 그러고는 더욱 추삽질에 열을 올렸다. 그 탓에 좁아 든 구멍을 쑤시고 들어오는, 핏줄이 도드라진 자지의 기둥이 온 전신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퍽퍽 치받을 때마다 속절없이 몸은 아래위로 팔랑거리고, 한곳을 집중적으로 찔러대는 통에 여지없이 쾌감이 몰아닥쳤다.
“하응, 하응……! 아론! 어, 어떡해요……!”
“어떡하긴, 가면 되지. 더 환상적으로 갈 수 있게 젖도 빨아주지.”
“하아앙!”
아론이 상체를 숙이자, 그의 어깨에 걸쳐진 다리 때문에 엘리아의 몸이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그러자 또다시 질구가 활짝 열린다. 이상한 자세로 젖을 빨리고, 넓어진 구멍으론 아론의 자지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꽂히듯 쿵쿵 찧어대니, 엘리아는 아론의 말대로 환상적인 쾌감을 맞이하며 교성을 내질렀다.
“흐으으읏……! 하응……! 하아아앙! 아론, 아로온……!”
“크읏! 젠장, 왜 이렇게 잘 조이는 거야!”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동시에 질구가 꽉 오므려지니, 엘리아는 본의 아니게 아론의 좆을 잘라먹을 듯 조여버렸다.
움직이기 버거울 정도로 자지를 물어오는 내벽에 아론 또한 더는 참지 못하고 뜨거운 물을 시원하게 쏟아냈다. 그동안 꽤 오래 참은 탓인지, 싸도 싸도 쉴 새 없이 나오는 좆물에 아론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그녀의 젖을 주물럭거리며 쾌감을 만끽했다.
폭풍 같은 정사가 끝나자, 방 안에는 두 남녀의 헐떡이는 숨소slakpw리만 울려 퍼졌다. 죽을 힘도 없을 정도로 기운이 쭉 빠진 몸에 엘리아가 아론의 어깨에 걸쳐진 다리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흐응… 다리 좀 내리게 나와봐요. 하아, 하아.”
“안 돼.”
“…네?”
“기다려.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해.”
“그게 무슨…….”
끝물까지 쏟아낸 자지가 점점 흐물거리는데도 빼낼 생각은커녕,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아의 엉덩이를 더 들어 올리곤 아론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힘내라. 무조건 끝까지 가서 뚫고 들어가.”
“하아… 아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나 힘들다고요.”
“잠깐만. 아직 애들이 헤엄치는 중일 거라고.”
“뭐라고요……?”
“최대한 많이 싸긴 했는데, 몇 놈이나 들어갔을까? 한 열 놈쯤 들어가서 짝을 이루면 좋겠는데. 흐음.”
이런 미친놈.
“놔, 놔요!”
이제야 아론의 말뜻을 알아차린 엘리아는 있는 힘껏 버둥거려 몸을 내렸다.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린 아론이 그녀의 질구에서 쪼르륵 흘러나오는 제 씨물을 보며 혀를 찬다.
“한심한 놈들. 그걸 못 가서 이리 많이 나오다니. 그래도 한두 놈은 꼭 짝을 이루어야 할…….”
“아론.”
“…응?”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다가 나온 듯, 아론은 멍한 표정으로 엘리아를 바라봤다. 아론의 멍청한 표정에 엘리아는 이내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퇴폐미가 줄줄 흐르던 농염한 남자. 탄탄한 근육질 몸매와 얼굴은 말해 무엇 할 정도로 잘난 공자. 거기다 잔인하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남자가 제 가랑이 사이를 보고 자기가 싸질러 놓은 정액과 대화하는 모습을 볼 줄이야.
이 와중에 이 미친놈이 귀엽게 보이는 걸 보니, 자신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엘리아는 혀를 차며 제 취향도 만만치 않다고, 저까지 미친년이라 싸잡아 욕했다.
해가 질 무렵까지 몸을 섞었던 터라, 엘리아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씻고 나온 사이 아론이 챙겨 온 늦은 점심을 먹자, 잠이 쏟아졌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론이 그녀의 머리칼을 만져주고 등을 쓸어내리며 보듬어주는 탓에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론은 잠든 엘리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연신 히죽거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더욱 끌리는 여자였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여린 것 같으면서도 거친 매력도 있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막상 몸을 섞을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몹시 적극적으로 매달린다. 아론은 그런 엘리아가 갈수록 더 좋아졌다.
“엘리아, 나랑 결혼하자.”
이젠 습관이 된 듯, 아론은 잠든 그녀의 귓속에 또 한 번 제 진심을 고백했다. 그러곤 그녀의 얼굴 곳곳에 조심히 입을 맞췄다.
똑똑.
“빨리도 왔군.”
노크 소리에 아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누가 온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문이 열리고 보기 싫은 얼굴이 당당하게 들어온다. 아힌 또한 두 남녀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는 안 재웠다고 난리를 치더니, 넌 애 밥도 안 먹이고 그렇게 잡아먹은 거야? 아주 애를 반 죽여놨나 보던데? 사용인들 표정이 볼만하더군.”
“흠, 생각보다 일찍 왔네.”
“네 손에 엘리아가 죽을 것 같아서 부랴부랴 왔지.”
“약속은 알지?”
“걱정하지 마. 엘리아를 위한 약속인데 설마 내가 어기겠어?”
“흥, 믿을 수가 있어야지.”
콧방귀를 뀌며 보란 듯이 엘리아의 얼굴에 입술 도장을 찍은 아론이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언뜻 봐도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은 모양새다.
“엘리아는…….”
“……?”
뜬금없이 말을 멈추는 아힌을 바라보자,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리아를 응시했다.
“괜찮았어?”
“뭐가 괜찮냐는 거야?”
“흐음. 그 마부 새끼 일로 엘리아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모양이다.”
“뭐? 무슨 트라우마?”
“그때 당한 일이 꽤 충격이 컸나 봐. 지난번에 황태자가 엘리아에게 다가갔는데 엘리아가 갑자기 발작하는 바람에 물에 빠졌다더군.”
“뭐?!”
아힌의 말에 아론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개새끼들을 어떻게 죽이지?”
“뭐, 한 놈이야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황태자는 어쩔까 고민이긴 해.”
“어쩌긴 뭘 어째?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면 그만이지. 어차피 에드앙 그 새끼도 있잖아. 분명 에덤 그 새끼가 엘리아한테 이상한 짓하려다 빠뜨린 거겠지. 하! 어이없네?”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던 아론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곤 곧 엄청난 얘기를 아주 태연하게 한다.
“황제 갈아치우자. 이렇게 된 거, 전쟁해. 그 새끼 저번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감히 엘리아에게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뭐?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씨발. 그때 죽였어야 하는 건데.”
“미친놈. 전쟁이 무슨 애들 장난이냐?”
“왜? 우리가 이젠 황제 하나 못 갈아치울 정도로 그렇게 약해진 거야?”
“이럴 때 보면 너도 참, 프레드랑 형제가 맞는 것 같다.”
“흥, 누가 들으면 형은 남인 줄 알겠군.”
엘리아와 연관된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막 나가는 제 동생이 신기하면서도 한심스러웠다. 저렇게까지 변할 줄이야. 그렇다고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었다. 자신도 별반 다른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그만 나가. 엘리아는 내가 재울 테니까.”
“약속 꼭 지켜. 엘리아 지금 많이 지쳤으니까.”
“참, 너.”
“왜.”
“안에다 쌌냐?”
아힌의 물음에 아힌의 입꼬리가 이를 드러낼 정도로 올라간다.
“당연한 거 아닌가? 아주 꾹꾹 눌러 담았는데?”
“더러운 새끼.”
“흥, 그럼 형은 밖에다 싸든가.”
“꺼져.”
“살살 해. 이미 내 아이가 엘리아의 몸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친놈.”
아론은 제 팔을 베고 누운 엘리아의 머리를 조심히 내려놓곤, 아쉬운 듯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정말 싫은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아론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며 엘리아의 방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