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엘리아는 정원에 있는 의자 그네에 앉아 살랑살랑 발을 흔들었다. 평화로운 나날이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느껴보는 여유로움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짐승들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며칠 바삐 움직이던 아론과 프레드의 행보가 의아할 때쯤, 갑자기 집을 옮겼다. 황태자가 구한 집엔 두지 않겠다더니, 그들은 정말로 새로운 집을 구했다. 그것도 아주 고급스러운 곳을.
넓은 정원을 갖춘 이층집. 파릇한 잔디와 색색의 예쁜 꽃들. 담장을 따라 아름드리나무들을 삥 둘러 심어놓아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따스함을 머금은 아름다운 집이었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정말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고급스럽고 화려했다.
돈지랄을 얼마나 한 건지, 엘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석을 다 털어도 이런 집은 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엔 놈들의 술수에 또 말려들 것 같아 거부하려 했지만, 집문서에 ‘엘리아’란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는 걸 본 순간, 그녀는 평소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공짜로 이런 좋은 집을 주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무엇보다 근 한 달 동안 함께하면서도 프레드와 아론은 정말로 룸메이트처럼 얌전하게 굴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였다.
물론 틈만 나면 입을 맞추고 허리를 휘감는 행동으로 유혹하긴 했지만, 엘리아가 거부하면 그들은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발정한 맹수 새끼들이 순순히 놓아줄 때면 그것 또한 신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들의 모든 행동엔 다 계획이 있다는 걸.
이를 드러낸 사나운 들짐승을 길들이는 양, 그들은 엘리아의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엘리아는 그들의 의도대로 짐승들의 달라진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놓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뭐 해……?”
“아, 프레드 님.”
“님은 무슨, 그냥 이름만 부르라고. 하여간 고집불통이라니까. 자, 이거나 마셔. 아론 형이 너 너무 약해졌다고 특별히 건강식으로 만든 거래.”
“감사합니다.”
아무리 이제는 이들의 하녀가 아니라 하더라도, 쉽게 태도가 바뀌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가 됐든 그들은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귀족이었고, 그녀는 그저 평민일 뿐이니.
거기다 한 달 전만 해도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그들인데, 어찌 이런 상황이 됐다고 쉬이 말을 놓고 함부로 대할 수가 있겠는가.
물론 그때는 죽을 작정으로 욕하고 덤벼들긴 했지만.
그런데 그 존귀한 귀족이, 그것도 가장 피가 차가울 것 같은 그 아론이, 건강을 챙겨준답시고 이런 음료를 매일 만들어 그녀에게 바쳤다.
물론 프레드는 이런 잔심부름을 해가며 레오를 공략 중이었고. 어쩌면 동생 바보가 돼버린 엘리아를 공략하는 방법으론 프레드가 가장 똑똑한 짓을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하튼.
이사 후, 고용인들을 따로 구하긴 했지만 그녀의 입에 들어가는 건 아론이 꼼꼼히 확인하고 챙겼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아론은 알면 알수록 이상한 남자였다. 몇 번이나 정말로 죽을 때가 돼서 저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로 그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처음 음식을 만들어줬을 때의 놀라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까지도 집안일은커녕 그녀에겐 손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아! 언제는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에게 그렇게 불편하면 이 집의 집사를 하라고 했던가……? 그때만 생각하면 참, 어이없고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엉뚱하면서도 모자라 보이던 아론의 행동에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하, 쯧쯧쯧.”
“응? 왜? 내가 뭐 잘못했어?”
“아, 아니요.”
“엘리아.”
“네?”
옆에 나란히 앉은 프레드가 천천히 발을 굴려 그네를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혹시 엘리아 손에 들린 음료수를 흘릴까 봐 힐끗거리며 살살 움직인다.
“이제 좀 괜찮아……?”
뭐가 괜찮냐는 거지?
하긴 그날 이후, 이런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놈들은 엘리아에게 쫓겨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고, 엘리아는 이들의 믿기지 않는 행동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시간을 보냈으니까.
“뭐가요……?”
“기분은 좀 어떻냐고.”
드물게 진지하게 묻는 프레드의 행동에 픽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을까.
“괜찮아요. 그런데 두 분은 언제 가세요……? 분명 며칠만 있다가 가실 거라고…….”
“우리가 갔으면 좋겠어?”
그네가 멈춰 섰다. 갑자기 멈춘 그네에 엘리아는 프레드를 쳐다봤다. 언제나 해맑고 제멋대로였던 남자의 얼굴엔 드물게 진지함이 서려있었다.
“가기로 했잖아요.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도 했고…….”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프레드의 표정에 엘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우리랑 있는 게 아직도 답답해? 우리가 널 구속하고 있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엘리아.”
“…….”
또 말을 바꾸려는 걸까? 아니면 다시 본색을 드러내려는 걸까?
손에 든 음료수를 힘주어 쥐며 습관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자, 프레드가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곤 다시 달랑달랑 발을 굴려 그네를 움직였다.
“우리가 그렇게 싫었어? 네 목숨을 버릴 정도로?”
“…….”
싫었냐라……. 당연한 거 아닌가?
제멋대로 행동하고 지위를 이용해 제 몸을 탐한 것이 싫었다. 이상한 옷을 입히고 창녀처럼 저를 대했던 것이 싫었다. 필요할 때만 찾고, 제 힘든 삶을 방치한 게 싫었다. 협박과 명령으로 자신을 옭아맨 게 싫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헷갈린다. 이들은 정말 나쁜 놈이기만 했을까……?
엘리아를 괴롭히던 남주들. 그리고 그 엘리아의 몸속으로 들어온 자신.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괴롭혔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원작 여주에겐 어찌했을지 몰라도, 저한테는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놈들은 다정해졌다. 무섭게 으르렁거리면서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다.
사용인들에게 당하지 말라고 하녀장까지 만들어주고, 아픈 자신을 간호해 줬던 아론. 하녀의 방을 호화롭게 꾸며주고, 하녀장으로서 처음 서는 자리에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프레드. 알게 모르게 그녀의 위치를 공고히 지켜주고, 귀족 영애처럼 만들어주었던 아힌.
납치당했을 때 서슴없이 자신을 구해주고, 또 자신을 구출하러 한달음에 찾아온 그들이었다. 그 끔찍했던 괴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고, 다른 사용인들에게서나 공작으로부터 보호해 줬다.
아힌의 행동을 오해해서 이 상황이 빨리 오게 됐지만, 그에 대한 그의 진심은 이미 들었다. 그런데도 도망친 자신을 탓하기는커녕, 그 머나먼 길을 걱정하며 찾아온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었는데도 오히려 목숨을 걸고 자신을 또 한 번 구해줬다. 그리고 지금은 또 이렇게 맹목적으로 매달린다.
이런 그들을 과연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멍청한 걸까? 잠깐의 다정함에 속아 그들의 죄를 망각한 걸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다 거짓으로만 치부하기엔 그들이 그동안 보여준 행동이 그녀의 마음속에 조금은 자리 잡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는 세 공자가 불편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고? 죽어도 동등할 수 없는 사이니까. 귀족과 평민이 평등할 수는 없는 곳이니까. 무엇보다 세 남자의 마음을 다 받아줄 수는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니까.
후우…….
“아직도 우리가 싫은 거구나.”
상념이 길었는지, 마지막 엘리아의 한숨에 프레드가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실연당한 남자처럼 상처받은 표정이다.
“프레드 님.”
“…응.”
“항상 궁금했어요.”
“뭐가?”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아름답고 어여쁜 귀족 아가씨들이 넘치고 넘칠 텐데. 왜 하필 하녀인 저한테.”
“…이유는 없어. 그냥… 너니까.”
나니까……? 그냥 엘리아여서 좋다는 말인가? 맹목적으로 여주한테 끌리는 남주들, 뭐 이런 거야? 하지만 이 소설은 피폐물에 배드엔딩인데. 엘리아가 죽을 때도 이들은……. 음, 뭘 했지? 아, 뒤 내용을 안 봐서 모르지. 쩝.
소설 초반부에 죽는 여주가 짜증 나서 안 봤던 게 몇 번이나 후회됐다. 뒤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면 지금까지처럼 힘들진 않았을 텐데. 하긴, 소설 속에 들어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냐마는.
“너니까 좋았어. 너니까 갖고 싶었고, 너니까 자꾸 만지고 싶었어. 너라서 안을 수 있었고, 너라서 우리가 이렇게 미친놈이 된 거야.”
“…….”
깊이 숨겨뒀던 속마음을 처음 꺼낸 듯, 프레드는 의외로 얼굴을 붉혔다. 물론 끝에는 툴툴거리는 말투긴 했지만.
“…사실은 말이야.”
부끄러운지 말을 늘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프레드의 생경한 행동에 엘리아는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 어렸을 때 너 봤어.”
“…네?”
“공작령에 살 때, 매일 구석에 앉아 울고 있는 널 봤다고.”
설마……?
“하도 서럽게 울길래 웃어줬는데, 넌 계속 울더라.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내가 너한테 가까이 가면 네가 더 곤란해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갔지. 넌 나 기억나? 내가 정말로 활짝 웃어줬는데.”
기억날 리가. 그런데 가만 듣고 보니 엘리아의 일기장 속 천사님이 프레드였던 모양이다.
취향 참 독특할세.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뇌가 해맑아서 그렇지, 생긴 것만큼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프레드니 어릴 때도 엄청 예쁘게 생기긴 했을 것 같았다. 어린 엘리아의 눈에 천사로 보였을 수도.
눈을 까뒤집고 보면 착하고 순수한 모습도 있는 남자들이었다. 왜 이 모양으로 큰 건지는 공작을 보면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거칠고 이기적인 놈들이 자신에게만은 따뜻한 구석도 없진 않았다.
“제도에서 널 다시 봤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더라. 제도로 온 이후에도 가끔 네가 생각났었거든. 넌 어릴 때도 정말 예뻤는데. 그 어렸던 내가 밤잠을 설칠 만큼 정말 예뻤어. 그런데 널 제도에서 다시 만났을 땐,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 뭐야. 하하.”
그때를 회상하며 프레드는 멋쩍은 듯 소리 내 웃었다. 그의 표정만 보면 풋풋했던 첫사랑을 추억하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곧 그의 얼굴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그걸 봐버렸네.”
“……?”
“네가 아론 형하고 그 짓거리하는 걸 말이야. 부러우면서도 화가 나더라고. 내가 널 먼저 알았는데. 물론 아론 형에게도 네가 첫 여자였겠지만, 나한테도 네가 첫 여자였다고. 그런데 그 꼴을 봤으니 내가 얼마나 화가 났을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아니. 휴우…….
이런 식으로 엘리아의 과거를 들을 줄은 예상 못 한 터라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프레드의 원망을 받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더 충격받았던 게 뭔지 알아?”
“…….”
프레드의 질문에 일순 불안한 감정이 엄습했다. 과거의 엘리아가 어땠는지 대충 알기에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겁이 났다.
“난 네가 울고 있을 줄 알았거든. 기억나? 너 그때 아론 형 자지 품고, 좋다고 흔들면서 날 보고 웃었던 거?”
뭐?!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엘리아가 왜……?!
“날 먼저 유혹한 것도 너였잖아. 형이 가버리고 멍하게 서있는 내게 손 내민 것도 너였잖아. 네가 먼저 내가 좋다고… 잖아. 나를 남자로… 것도… 잖아…….”
“으윽!”
“그래서 내가 얼마나… 화…났는……. 어? 엘리아! …리아! …아!!”
순간 지독한 두통이 엄습했다. 투덜거리는 프레드의 말이 띄엄띄엄 들리고 목소리마저 멀게 느껴져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갑자기 알 수 없는 장면들과 감정이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며 뇌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아아악!”
“엘리아! 엘리아! 너 왜 그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치던 엘리아는 그대로 프레드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
* * *
버림받았다.
하지만 슬프진 않았다. 어차피 버림받는 것엔 익숙하니까. 믿었던 엄마에게도 버림받았는데, 남에게 버림받는 게 무에 대수라고.
그래,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가 버틸 수 있을 테니.
여기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더는 외롭기 싫었으니까. 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니까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나라도 내 편이 있길 바랐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화가 났다. 버릴 거면 그냥 버리지. 내게 사랑을 속삭였던 그는 내 몸을 망가뜨렸다. 내 꿈과 희망도 모두 짓밟아 버렸다. 공작은 개새끼였다.
문득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사내새끼들을 믿지 마라. 내 꼴 나기 싫으면 마음도 주지 마. 나처럼 멍청하게 당하고 살지 말란 말이야. 너에게 다가오는 놈들은 네 몸을 바라는 거다. 그러니까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 수컷들에게 우린 그저 먹잇감에 불과하니까.”
아니, 공작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만 생기면 다 되는 거였다. 그러면 난 엄마처럼 그런 더러운 삶은 살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나 같은 게 상대하기에 귀족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악랄하고 무서운 이들이었다. 난 멍청한 년이었다.
그래서 미친년처럼 날뛰었다. 악을 쓰고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다 던지고 부숴버렸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영지성이나 여기나 지옥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내 곁에 오지 않았고, 일은 그곳보다 더 힘들었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모든 일을 나에게 몰아 줬다.
그날 난리 친 것 때문에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다. 그런데 어떻게 맨 정신일 수가 있겠는가. 더는 여자로서 가치가 없어졌다는데.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빈껍데기가 됐다는데. 더는 아무 희망도 가질 수가 없게 됐는데.
나는 그렇게 망가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아름다운 남자. 그러나 핏빛을 머금은 듯 번뜩이는 눈동자가 무서웠다. 공작과 닮은 걸 보니, 아마도 세 공자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먹잇감. 그래, 개새끼의 자식답게 저놈도 날 먹잇감으로 보고 있었다.
영혼 없는 인형처럼 무감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오라는 건가? 어차피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난 천천히 다가가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대체 어딜 가는 걸까……?
내 손을 잡은 남자가 정원 깊숙이 들어간다. 한참을 끌려가다시피 따라가니 이내 인적 드문 숲이 보였다. 영지성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넓은 공작저는 숲을 품고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난 이 아름다운 곳에서도 역시나 짐승을 마주해야 했다. 내 몸이 먹고 싶어 안달 난 굶주린 맹수를. 욕정에 잠식된 짐승을.
여전히 무감한 표정.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남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강한 욕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덮치려는 듯 끌고 와놓고 갑자기 망설이는 남자를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순진한 맹수 새끼. 아직 여자를 품어본 적 없는, 겉만 번지르르한 짐승.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아무도 없는 먼 곳까지 숨기듯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이렇게 망설이지도 않았을 테고.
순간, 비틀린 욕망이 들끓었다. 날 농락한 개새끼의 자식을 내가 가지고 놀아줘야겠다고. 이 남자가 나에게 미쳐주면 더없이 좋을 것도 같았다.
자기 자식과 내가 몸을 섞었다는 걸 알게 되면 공작은 어떤 기분일까? 화를 낼까……?
하! 생각만 해도 희열이 느껴졌다. 어차피 미래도 뭣도 없는 몸이다. 내가 지옥에 있다면, 그들도 지옥으로 끌고 내려오면 될 터.
“공자님.”
“……!”
“여기는 왜…….”
“…벗어라.”
“…네? 네.”
그의 단호한 명령에 난 스스럼없이 옷을 벗었다. 달랑 하나 입고 있던 옷이라 나체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내 몸을 쳐다보는 사내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욱 음험한 정욕으로 들끓었다.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공작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공작을 놓지 못한 걸까……? 공작과 똑같이 생긴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거칠게 팔목을 잡아당기곤 커다란 나무에 내 몸을 밀쳤다. 그러곤 마지막 이성이 끊어진 듯 거칠게 젖가슴을 베어 문다.
“흐읏!”
그의 거친 애무에 난 이를 악물었다. 뜯어먹을 듯 이로 씹어대고 젖꼭지를 빨아 삼킨다. 흥분은커녕 고통스러웠다. 거친 나무껍질에 쓸리는 등허리보다, 잘려 나갈 것 같은 젖꼭지가 더욱 아팠다.
배려도 다정함도 없는, 거칠기만 한 행동이었다. 그저 처음 보는 맛에 취해 게걸스럽게 빨고 물어뜯을 뿐, 그의 행위는 애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농염한 공작과는 다르게 풋내기 애송이의 애무는 그저 고통만 줄 뿐이었다.
“하윽! 아, 아파요!”
내 소리가 안 들리는지, 그는 우악스럽게 젖꼭지를 물어뜯고 아랫도리를 사납게 쑤셔댔다. 젖기는커녕 더 말라비틀어진 음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양껏 내 젖을 맛본 남자는 다시금 내 몸을 뒤로 돌리고 엎드리게 한 후, 한껏 발기된 자지를 마른 구멍에 그대로 쑤셔 박았다.
“아악! 그, 그만해요! 아파……! 아프다고요!”
“큭! 후우…….”
그가 잠시 멈추었다. 잇새로 앓는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그도 아픈 모양이었다.
아프겠지. 마른 구멍에 생살을 쑤셔 넣는데, 저라고 안 아플 리가.
잠시 성기를 뺀 남자의 입에서 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다시 한번 거침없이 쑤시고 들어온다. 타액이라도 발랐는지, 이번엔 그의 것이 부드럽게 속살을 가르고 들어왔다.
“흐윽.”
깊숙이 틀어박힌 자지가 잠시 멈춰 섰다. 뭔가 참기 힘든 듯, 남자의 잇새에선 거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빠듯하게 틀어박힌 살덩이가 꿈틀거리는 걸 보니, 금세 사정감이 몰려온 모양이다. 드러난 내 엉덩이를 이리저리 치대며 그는 숨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기도 잠시, 아래로 덜렁거리는 젖을 만지작거리며 슬슬 허리를 들썩였다.
서툰 움직임. 거친 손길. 그 무엇 하나도 흥분될 것이 없는데, 그저 남자의 단단한 것이 배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점점 흥분에 취했다. 공작이 알려준 성교의 맛은 내 이성을 갉아먹었다.
애액이 배어 나와 물이 뚝뚝 흐를수록 남자는 힘차게 추삽질을 해댔다. 공작만큼 노련하고 완숙한 몸짓은 아니더라도, 그는 점점 내 몸을 쾌락으로 인도했다.
“하읏! 흐응! 하으읏!”
“입 다물어.”
“흐읍!”
서슬 퍼런 목소리.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지 않은 무미건조한 음성에 난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막으니 숲에는 그의 살과 내 살이 부딪치는 음란하고 질척한 소리만 가득했다.
다리를 타고 뭔가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접합부에선 찔꺽, 찔꺽, 음탕한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싫은데 너무 좋았다. 비참한데 미칠 것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의 자지가 자궁 끝까지 찌르고 들어올 때면 어미를 닮아 발정한 몸은 사내의 것을 세게 조여 물고, 좋다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버텨내기가 힘들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막 옆으로 돌린 때였다.
“……?!”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 천사다. 그분이야, 그분이 왔어.
다시 한번 꼭 만나보고 싶었던 천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지금 내 꼴이 어떤지,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천사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가 그때 내게 보여줬던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난 다른 남자의 몸을 받아들이면서 그를 향해 웃었다.
연신 뒤에서 치받는 남자의 성기를 느끼며 난 나의 천사만을 바라봤다. 그때의 앳된 얼굴이 아닌, 이젠 사내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남자를 보자 온몸이 더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음을 참으면서도 시선은 그에게서 떼질 않았다. 그리고 그도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흐으으……! 하으으응!”
그가 보고 있어서일까? 순간 짜릿한 쾌감이 아래서부터 피어올랐다. 전신을 휘감으며 몰려오는 미칠 것 같은 쾌락에 난 기어이 교성을 내질렀다.
“큭! 흐읏!”
그 순간, 뜨거운 물이 내 안을 가득 채운다. 다리가 바르르 떨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난 꿋꿋이 버티고 서서 나의 천사만 쳐다봤다. 어차피 아이는 못 가질 몸. 그가 안에다 싸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내 눈엔 그밖에 안 보였다.
단단하게 틀어박혔던 좆이 미련 없이 빠져나간다. 몸을 꿰뚫고 있던 묵직한 것이 사라지자, 힘 빠진 몸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나의 천사가 갈까 봐, 난 계속 그만 쳐다봤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나무 뒤로 숨어버렸다. 혹시 이 남자가 본 건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옷은 언제 입었는지 그는 이미 뒷모습만 보인 채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제 욕구만 채우고 그렇게 가버렸다.
역시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다.
쓰게 웃으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의 천사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날 바라본다. 난 뭐에 홀린 듯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왠지 그라면, 나의 천사라면 날 구원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윽……!”
“후우… 씨발! 네가 이런 여자일 줄은 몰랐어. 네가 어떻게 아론 형이랑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응?!”
그는 천사가 아니었다. 그 역시 악마의 자식일 뿐.
그는 하나뿐인 내 옷으로 제 형이 싸질러놓은 정액을 대충 닦아내곤 거침없이 제 자지를 밀어 넣고 개처럼 흔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날 원망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의 아래에 깔려 남자의 허릿짓에 신음을 흘리고, 볼썽사납게 흔들리는 음란한 내 가슴을 쥐어짜며 몽롱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픽 웃음만 지을 뿐.
문득, 어릴 적 우연히 봤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처럼 남자의 아래에 깔려 신음을 흘리던 여자. 배 속에 아이를 품고도 몸을 팔던 여자. 이 저주 같은 얼굴과 몸을 물려주고 날 버린 여자.
딸년에겐 어미의 팔자가 대물림된다더니, 나 역시 이런 팔자인 모양이다. 그저 수컷들의 노리개로 살 운명. 처음으로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우악스럽게 젖꼭지를 비틀며 그는 내 위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두 놈이 연달아 거칠게 박아대니 아랫도리가 아릿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놈이 빨리 싸길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고 며칠 후 나의 천사, 아니 악마는 다른 남자를 하나 더 데려왔다. 공작의 첫째 아들. 그렇게 난 공작과 세 공자의 더러운 자지를 모두 내 안에 품었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지 않은가. 대귀족의 공작과 세 공자를 품은 하녀라니. 어쩌면 난 그들보다 더 높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불행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맹수 새끼들은 제 아비보다 더한 놈들이었다.
내 삶은 더 피폐해졌다. 해야 할 일은 끝도 없이 늘어나고, 이젠 잘 시간마저 부족했다. 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그들은 날 쉬지 않고 먹어치웠다.
시도 때도 없이 찾는 세 공자의 부름에 내 몸은 남아나질 않았다. 온몸은 그들이 새겨놓은 자국으로 얼룩덜룩하고, 음부는 상처라도 났는지 따끔거렸다. 젖꼭지는 떨어져 나갈 듯 너덜거렸고, 온몸이 욱신거려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틈만 나면 숲에서, 아니면 그들의 방에서, 또는 아힌의 집무실에서. 그들은 정말 개처럼 자신들의 욕정을 수도 없이 내 안에 쏟아냈다. 하지만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래, 가장 참기 힘든 건 나였으니까.
그들의 품에서 다리를 벌리고 넣어달라 애원하는 미친 나. 끔찍하게 싫으면서도 막상 그들과 몸을 섞기 시작하면 난 발정한 암캐처럼 그들에게 매달렸다.
농락……? 그래, 농락당했다. 그들이 아닌 내가. 난 완벽하게 길들었고, 그들의 품에서 창녀가 되었다. 지독히도 외롭고 괴로웠다. 그래서 밤마다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아니면 그냥 이 구질구질한 목숨이라도 거둬가라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엄마의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제도 하녀들의 수다 속에서 엄마의 얘기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엘리아 엄마가 창녀였대!”
어떻게 알았지…….
“어머! 정말?”
“그래, 공작령에 있는 내 친구가 말해 줬어. 그런데 엘리아가 공작령에 들어가고 몇 년 안 돼서 죽었다더라?”
“어머! 왜……?”
“왜는……. 온갖 남자들하고 난잡하게 뒹굴었을 텐데 병이 안 생기겠니? 흥!”
“어머, 웬일이니! 그래서 그렇게 매일 죽을상이었나?”
“얘! 그건 그게 아니야. 밤마다 주인님들 밤 시중드느라 잠을 못 자서 그런 거잖아. 그것도 모자라 남자 사용인들까지 다 홀리고 다녔더라. 피는 못 속이는 거지. 쯧쯧쯧.”
피는 못 속인다라…….
“정말……?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어휴, 넌 이렇게 사람 볼 줄을 모른다니까? 지금 엘리아 노리는 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어머! 너 조심해야겠다. 엘리아가 하온까지 꼬시면 어떡해?”
“흥, 그랬다만 봐. 아주 가만 안 둘 거니까. 그런데 하온은 엘리아 같은 애는 거들떠보지도 않을걸? 음침하고 음탕한 여자 같다고 그랬단 말이야. 호호호!”
“뭐어……? 푸핫!”
하온이 누굴까? 문득 궁금해졌다. 나를 버린 엄마가 죽었다는 얘기보다, 하온이란 남자가 누군지 더 궁금했다.
그 남자를 유혹하면 저 하녀는 어떤 기분일까?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일까……?
난 조용히 몸을 돌려 사용인들이 기거하는 숙소로 향했다. 하인들이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저들도 지금 내 얘기를 하는 거겠지? 나한테 이렇게들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네.
난 망설임 없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일순 말소리가 멈추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런데 순간 숨이 막혔다. 날 보는 그들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공작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버텨내기 바빠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몰랐는데, 날 보는 모든 남자의 시선은 하나같이 다 똑같았다. 음험하고, 욕정으로 가득 찬, 더러운 눈빛.
그 하녀들 말이 맞았다. 내가 이들을 유혹한 모양이다. 이 저주받은 얼굴과 더러운 몸뚱어리로.
살갑게 말을 걸던 하인도, 반갑게 인사했던 하인도, 말없이 내 일을 도와줬던 하인도. 그들 모두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는 게 있었던 호의였나 보다.
번들거리는 수많은 눈동자가 내 몸을 훑어 내렸다. 마치 눈으로 내 몸을 애무하듯, 질척하고 끈적하게 날 응시했다.
후우…….
“하온?”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 자리에 있다면 대답은 할 테니까.
“…네? 아니, 어?”
역시나, 한 남자가 손을 들며 일어선다.
조금은 순해 보이면서도 선한 인상의 남자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이들 중 꼭 내 선택이라도 받아 기쁜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날 보는 그의 눈빛도 놈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잠깐 나 좀 볼래요?”
“그, 그래!”
난 그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휘파람 소리와 탄식이 들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는 그들을 볼 일은 없을 테니까.
하온을 데리고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원 구석으로 향했다. 쭈뼛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남자를 보니, 하녀의 말과는 다르게 그도 날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다가서니 그가 흠칫 놀란다. 난 거리낌 없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몰래 뒤따라와 우리를 구경하는 하인들을 봤지만, 난 보란 듯 하온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유혹했다.
“날 안아줘. 지금 여기서.”
엉망이 된 몸으로 겨우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칼은 하온의 연인이었던, 베시라는 하녀에게 죄다 뜯기고 온몸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런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날아갈 듯 즐거웠다.
내 예상대로 하인들에게 소식을 들은 그녀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하필 그때 하온이 힘차게 허릿짓을 하며 내 젖을 정신없이 빨고 있을 때라 그녀의 표정이 꽤 볼만했다. 그녀의 표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기분이 어땠을까? 물어볼걸……. 아쉽네.
내일이면 이 얘기가 세 공자에게도 들어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쩌면 공작의 귀에까지 들어갈지도.
그들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다. 자신들의 노리개가 하인의 좆도 품었으니 더럽다고 생각하려나…….
허름하고 낡은 다락방. 빛이라곤 달빛 한 줌이 다인 어둡고 쓸쓸한 다락방. 이제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 난 스스로 내 운명을 바꾸기로 했다. 엄마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때를 기다리진 않으리라.
언제나처럼 무릎을 꿇고 창가를 올려다봤다. 양손을 모으고 겨우 보이는 하늘을 보며 마지막 기도를 했다.
“소원을 바꿀게요. 다시 태어나게 해주세요. 외롭지 않게, 사랑받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세요. 나도, 나도… 한 번쯤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거잖아요……. 믿을게요. 이번 한 번만 더 당신을 믿어볼게요. 내 영혼을 가엾게 여겨주세요. 제발…….”
난 그날 신에게 가엾은 내 영혼을 바쳤다.
―짓밟힌 꽃, 특별 외전 中―
* * *
제도로 돌아온 지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아힌은 그동안 공작과 담판을 짓고, 황태자와 협상하느라 제대로 쉰 날이 없었다. 보기 좋았던 얼굴이 핼쑥해지자,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제 손에 들린 두 개의 서류를 보며 아힌은 피식 웃었다. 이걸 만들기 위해 며칠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좋아하겠지? 아니, 엘리아라면 또 거부할지도 모르겠네.”
쓰게 웃으면서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 그녀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아무 의미 없었다.
이걸 만들려고 황태자에게 제 목줄을 주었다. 베르타른 공작가는 황태자의 개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크게 상관없었다. 사나운 사냥개는 여차하면 주인도 물 수 있으니까. 대신 얻은 것도 많았다. 황태자의 도움으로 쉽게 공작위를 물려받았고, 엘리아에게 줄 이 선물도 마련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그녀 곁에 있을 시간이 좀 줄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걸 주고 청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그러나 문제는 제 동생들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놈들이니까.
“하아… 죽일 수도 없고, 참. 난감하네.”
물끄러미 서류를 보던 아힌은 서둘러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가시는 겁니까?”
“그래. 이번엔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도 있어. 중요한 사안은 따로 내게 알리고, 자질구레한 건 아버지께 맡겨라.”
“알겠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아힌을 보는 집사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지금 그가 어딜 가는지 잘 알기에 말리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들을 남자가 아니었다.
세 공자가 한 여자에게 미쳐있다. 그것도 하녀한테. 진작 말렸어야 했던 건 아닐까, 한탄스러웠다.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베르타른 공작가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하녀 때문에 세 공자가 칼부림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양보하지 않을 것을 잘 알기에 집사의 이마엔 주름만 늘어갔다.
집사는 깊은숨을 토해 내며 아힌을 배웅했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갑자기 사라진 엘리아나, 두 공자의 부재를 궁금해했다. 뜬구름 같은 소문만 파다할 뿐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다시 하녀장이 된 조안나 또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엘리아가 다시는 공작저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목숨을 구원받은 건 인사라도 해서 다행인가……. 미안하구나. 나도 살아야 했다. 주인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디서든 잘 살았으면 좋겠구나.’
다급하게 출발 준비를 하는 아힌을 보며 조안나는 전하지 못한 말을 그에게 담아 보냈다. 왠지 드물게 웃는 제 주인을 보니, 그가 가려는 길에 엘리아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공작저를 떠나 아르카마디오로 출발하는 아힌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엘리아에게 줄 선물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녀를 만나려면 꽤 먼 길을 가야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제가 준비한 선물을 보고 그녀가 기뻐해 준다면 그동안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질 것 같았다.
뿌듯한 마음으로 막 출발하려던 아힌은 제 손에 들린 낡은 일기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공작이 내어준 엘리아의 일기장.
아힌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고민하며 읽어볼까 망설이다 끝끝내 보지 않았다. 공작이 이유 없이 내어주진 않았으리라. 분명히 이 안에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훗,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지.”
아힌은 주저 없이 화로에 엘리아의 일기장을 던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를 향해 출발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그깟 과거에 얽매어 괴로워하고 괴롭힐 필요가 뭐가 있으랴.
하지만 아힌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공작과 엘리아의 관계를. 그래서 더 공작이 혐오스러웠고, 아버지에게 냉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희생양일 뿐이었다. 엘리아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죄를 묻는다면, 안 그래도 미친놈들을 더 미친놈처럼 만들어버린 것일지도. 그래서 자신들의 미래를 그녀에게 바치도록 만든 죄. 그것뿐일 거다.
“흐음, 큰 죄를 지었군. 벌을 줘야겠네. 벌로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할 거야. 엘리아. 훗!”
아직 엘리아의 상태를 모르는 아힌은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 * *
조용히 엘리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아론은 잠든 엘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엘리아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온종일 멍하게 허공만 바라봤다.
그러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다가, 갑자기 표독스럽게 소리를 내지르며 자신들을 끔찍한 짐승 바라보듯 혐오스럽게 노려봤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으니까.
프레드에게 전후 사정을 듣고 아론은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되짚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과 감정.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에게 했던 행동들.
처음 깨달았다. 그것이 학대였다는 걸.
아니, 어쩌면 알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땐 그래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그녀에게 진심 어린 사과는커녕 그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또 그녀를 길들이려 했으니.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첫 시작은 저였으니.
그녀의 지옥은 자신이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도망치게 만든 것도, 그 험한 일을 당하게 한 것도,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리려 하게 했던 것도, 이렇게 정신이 망가져버린 것도. 모두 다 제 탓 같았다.
“하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죽은 듯 잠든 그녀 옆에 누워 아론은 엘리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부터였을까? 너 없인 하루도 못 살 것처럼 돼버린 것이.”
어쩌면 처음부터가 아니었을까? 제 몸에 누구의 손길도 닿는 게 끔찍하게 싫었는데, 그녀만 달랐으니까.
“엘리아. 난 지금도 너를 똑바로 보고 사과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인가 보다. 레오보다도 못한 놈이었어. 후후…….”
아론의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처량하게 울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자신의 이기심에 그녀를 볼 낯이 없었다. 이렇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상황에도 그녀를 품고 싶다는 욕망은 끊임없이 들끓고 있었으니까.
“미친놈.”
“미친놈…….”
“…하!”
“하…….”
잔뜩 쉰 목소리로 갑자기 제 말을 따라 하는 듯한 엘리아의 음성에 아론은 헛웃음을 흘렸다.
“일어난 거야? 몸은 어때.”
“끔찍해…….”
“엘리아…….”
“예나.”
“응……?”
뜬금없는 엘리아의 말에 아론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힘없이 나오는 쉰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아스라이 꺼질 것만 같았다.
“너희가 아는 엘리아는 죽었어. 그리고 그녀를 죽인 건 너희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엘리아 몸에 들어온 빙의자야. 너희가 아는 엘리아가 아니라고.”
“……!”
“그러니까 인제 그만 날 좀 내버려 둬. 너희가 그렇게 괴롭혔던 엘리아는 죽었으니까.”
“엘리아……? 눈 좀 떠봐. 아직도 머리가 많이 아픈 거야?”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아론은 벌떡 일어나 엘리아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은 듯 축 늘어진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괴롭힐 거야……? 인제 그만하면 안 돼? 이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아?”
점점 격양되는 음성을 들으니 그녀의 발작이 또 도진 것 같았다.
“엘리아!”
버럭 내지르는 아론의 고함에 감겼던 눈꺼풀이 떠지고 생기 잃은 벽안이 아론을 향했다. 그녀의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표독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원망 가득한 눈빛에 아론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엘리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나니까 너희를 볼 수가 없어. 그녀가 얼마나 간절하게 빌었는지 알 것 같아서, 내가 여기에 끌려온 것도 원망할 수가 없다고! 그래도, 그래도… 흑! 이제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내 맘대로 너희를 용서할 수도 없잖아!! 왜 그랬어! 이 새끼들아! 왜 그랬냐고! 이 나쁜 새끼들아!! 흐흑!”
“하아… 엘리아. 왜 이래? 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로 잘못했어. 제발 이러지 마. 정신 차려. 엘리아!”
아론은 또다시 발작하는 엘리아의 몸을 끌어안고 그녀를 다독였다. 이러다가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릴까 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쾅―!
“엘리아! 무슨 일이야!”
엘리아의 고함을 들었는지, 프레드가 헐레벌떡 들어오다 그녀의 살기 어린 눈빛에 그대로 멈춰 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아의 시선에 프레드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프레드의 눈에도 그녀는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것 같았다.
“너희는 악마야…….”
“엘리아!”
엘리아는 또 까무룩 정신을 놔버렸다.
그때, 앳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서슬 퍼런 음성이 들렸다.
“대체 우리 누나한테 무슨 짓들을 한 거예요?”
새파란 눈동자가 양쪽으로 살기를 쏘아대니, 새빨간 두 쌍의 눈동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허공만 바라본다.
그 시각, 시뻘건 눈동자를 가진 또 다른 한 놈이 저택 입구를 막 들어서고 있었다. 즐거운 미소를 머금은 아힌은 그녀에게 줄 선물을 들고 지옥 속으로 발을 들였다.
거실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그중에서도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달려온 아힌의 얼굴이 가장 심각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만 기대하고 쉼 없이 달려 도착했건만, 그를 반긴 건 죽상을 한 시꺼먼 두 동생이었다.
“대체 너희는 무슨 일을 이따위로 만든 거지?”
“후우…….”
“형… 그게 아니라, 난 그냥 엘리아도 다 아는 얘기니까…….”
살벌한 아힌의 음성에 아론은 그저 한숨만, 프레드는 우물쭈물하다 변명조차 제대로 늘어놓지 못했다. 저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 같아, 프레드는 제 머리칼을 사납게 헝클이곤 고개를 푹 숙였다.
“답답한 새끼들.”
“우리만 욕할 건 아니지 않아?”
“뭐야?!”
“엘리아가 저렇게 된 건 꼭 오늘 일 때문만이 아니야. 설마 우리가 엘리아한테 무슨 짓을 해왔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후우…….”
정곡을 찌르는 아론의 말에 아힌은 막힌 숨을 토해 냈다. 아힌 또한 엘리아가 얼마나 상처받았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시는 도망가지 않게 앞으로 잘해 줄 일만 생각했지, 그간 엘리아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사실 안중에도 없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부터 다독여야 했다는 아론의 말을 들었지만, 솔직히 이해되질 않았다. 한 번도 누구의 마음을 헤아려본다거나, 사과라는 것을 해본 적도, 할 필요도 없는 삶을 살았으니까.
그건 세 공자 모두 마찬가지였다.
거실에는 다시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엘리아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니, 어디서부터 이 일을 해결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그러나 아론만이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녀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나.”
“너희가 아는 엘리아는 죽었어. 그리고 그녀를 죽인 건 너희고.”
“난 엘리아 몸에 들어온 빙의자야. 너희가 아는 엘리아가 아니라고.”
“너희가 그렇게 괴롭혔던 엘리아는 죽었으니까.”
“이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아?”
“엘리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나니까 너희를 볼 수가 없어. 그녀가 얼마나 간절하게 빌었는지 알 것 같아서, 내가 여기에 끌려온 것도 원망할 수가 없다고!”
“이젠 내 맘대로 너희를 용서할 수도 없잖아!!”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었을까. 마치 다른 사람을 얘기하듯 말하던 엘리아의 모습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빙의자. 그게 대체 뭐지? 정말 정신이 완전히 이상해진 건가? 하아…….’
아론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괜한 얘기로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고, 혹시라도 제 형제들이 이상하게 반응하면 엘리아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형들… 앞으로 어떡할 거야? 엘리아가 계속 저 상태면 어떡해?”
“돌아오게 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음울한 프레드의 말에 아힌이 눈을 번뜩였다.
“일단 이것부터 정리하자.”
“뭐……?”
뜬금없는 아론의 말에 두 공자가 의아한 눈으로 아론을 바라봤다.
“엘리아랑 어디까지 생각하는 거야? 설마 지금처럼 지낼 생각은 아니겠지?”
“응……?”
“…….”
직설적인 아론의 질문에 두 형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심한 놈들을 쳐다보듯 두 형제를 노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 정말 예전처럼 행동할 생각이었던 거야? 둘이 짐승처럼 덤비고 애 잠도 안 재우고?”
“아, 아니야!”
“공작 부인은 어떨까?”
“……?!”
“……!”
놀란 토끼 눈이 된 동생들을 보며 아힌이 비죽 웃는다. 그러곤 아예 쐐기를 박듯, 제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난 엘리아를 내 아내로 맞을 생각인데?”
“뭐?!”
“형!!”
아힌의 폭탄 발언에 프레드와 아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다른 이도 아닌, 아힌이다. 명예와 지위, 그리고 제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아힌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하녀였던 엘리아를 아내로 맞이한다고 말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녀가 이젠 자유의 몸이 됐다 하더라도, 하녀였던 사실과 평민이란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공작가의 위신은 물론이고, 아힌의 명예나 지위는 땅바닥으로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어쩌면 죽어서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작가가 제국에서 그런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했다. 더 어이없는 건, 아힌의 눈빛이 이 모든 말이 진심이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힌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정신 나갔군.”
“내 정신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앞으로 엘리아를 공작 부인 대우…….”
“아니. 엘리아는 내 여자야. 난 이미 그녀에게 고백했고, 그녀도 내 마음을 받아줬어.”
마수의 숲에서 강제로 대답을 들어놓고 아론은 뻔뻔하게 그때 일을 말하고 있었다.
“우린 이미 미래를 약속한 사이야.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뭐?!”
“뭐라고?”
이번엔 아론의 폭탄 발언에 프레드와 아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곧 아힌이 피식 웃는다. 뭔 개소리냐는 듯 제 동생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아론의 정곡을 찔렀다.
“미래를 약속했는데 왜 엘리아가 이곳까지 도망친 걸까……? 그것도 다른 놈하고?”
“……!”
아론의 말문이 막혔다. 그 모습에 아힌이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물었다. 자신이 날린 강펀치가 꽤 마음에 든 표정이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형들의 치열한 싸움을 보던 프레드가 픽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쯧쯧, 빵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스튜부터 마시는 사람들이 여기 있었구만.”
“넌 빠져라.”
“프레드,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완전히 저만 배제하는 형들의 태도에도 프레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히죽 웃었다. 시선이 제게로 모이자 허리에 양손을 얹고 아주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이거 왜 이래? 엘리아는 우리 중에 내가 제일 좋다고 말했거든? 자지도 내게 제일 맛있다고 말…….”
“미친 새끼.”
“언제 정신 차릴래?”
“이익!”
쓰레기 보듯 저를 쳐다보는 형들의 시선에 프레드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닌 척했지만, 솔직히 불안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제 형들은 어디 내놔도 눈에 띄는 남자들이었다. 물론 얼굴로 따지자면 자신이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하지만, 형들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했던 말이 프레드에겐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었다.
“아힌 공자님은 고고한 늑대 같아. 한 여인만 바라보고 사랑해 줄 것 같은 멋진 늑대님!”
“아론 공자님은 범접할 수 없는 흑표범 같아. 그의 냉기에 얼어도 좋아. 키스 한 번이면 다 녹아버릴 테니.”
“프레드 공자님은 강아지 같아. 너무 귀여워. 매일 안고 자고 싶다니까?”
그땐 그게 좋은 말인 줄 알았다. 안고 자고 싶다는 말만 귀에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조금 큰 후에야 알았다. 자신은 형들만큼 남자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더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게 남자다운 건지 알았으니까.
‘혹시 엘리아도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초조해진 프레드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자신은 쳐다도 안 보고 서로만 노려보는 두 형제를 성마르게 바라봤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은 엘리아 옆에서 영영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그녀도 여자니까 자신보다는 제 형 중 하나를 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론, 엘리아를 위해서라도 네가 포기해라. 넌 작위도 뭣도 없잖아?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웃기는 소리. 그깟 작위가 뭔 대수라고. 엘리아가 공작저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몰라? 여기까지 도망 온 거 보면 모르겠어? 엘리아를 그곳에 다시 데려가는 건, 그녀를 다시 지옥의 구렁텅이로 처넣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엘리아가 과연 공작 부인 자리를 원할 것 같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형을 노심초사 바라보던 프레드가 순간 눈을 반짝 빛냈다.
“나한테 좋은 수가 있어. 우리가 이렇게 싸울 필요도 없는 아주 좋은 수.”
“뭐?”
“그게 뭔데?”
짜증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저를 무시하는 형들을 보면서도 프레드는 히죽 웃었다. 그러곤 아주 해맑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다 같이 살자!”
…….
“하!”
“하?”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아주 똑같이 혀를 차는 두 형을 설득하기 위해 프레드는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어차피 우리 셋 다 엘리아랑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의 여자가 될 수 있어? 그리고 형들은 엘리아가 한 사람의 여자만 되면 쉽게 포기할 수 있어? 엘리아의 그 예쁜 몸을 포기할 수 있냐고! 난 엘리아 없이는 못 살아! 엘리아가 공작 부인이 돼도 난 엘리아랑 할 거야! 괜찮겠어?”
“미친놈.”
“미친 새끼.”
“아, 왜! 내 말이 틀렸냐고? 솔직하게 얘기해 봐! 모두 엘리아가 첫 여자이자, 첫사랑 아니었나? 그래서 이렇게 지위고 명예고 다 버리고 지금 여기들 있는 거 아냐? 엘리아 없으면 안 되니까!”
그동안 못 한 말문이라도 트였는지, 두 형의 입을 딱 다물게 만든 프레드는 속사포처럼 속마음을 쏟아냈다. 누구도 알지 못한 세 공자의 민낯을 프레드가 대표로 까발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엘리아가 우리 다 싫다면 어쩔 건데? 그땐 어떡할 건데?! 우리끼리 이러고 싸우는 게 의미가 있나 모르겠네? 어차피 선택은 엘리아가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왜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 거냐고! 엘리아가 지금 우리를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 몰라?”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는 프레드의 말에 아론과 아힌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평소엔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 같던 동생이 오늘따라 구구절절 맞는 말만 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선택은 엘리아의 몫. 그래, 지금 자신들의 생각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엘리아는 지금 자신들을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일단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게 우선이었다.
“후, 좋아. 일단 엘리아 상태부터 진정시키고 다시 얘기하자.”
“형, 제도로 안 갈 거야?”
프레드가 또 한 번 아힌의 정곡을 쿡 찌르자 아론이 빙긋 웃었다. 그런데 당황할 줄 알았던 아힌도 싱긋 웃는다.
“내가 미쳤어? 짐승 새끼들한테 저 여린 여자를 맡겨두고 가게?”
“미친 게 맞는 거 같은데? 이젠 공작 작위에는 관심 없나 보지?”
“그건 걱정하지 마. 아버지랑 이미 얘기 끝냈으니까. 이미 공작위에 내 이름도 올라갔고.”
음흉스러운 아힌의 미소에 아론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아힌의 표정을 보니, 뭔가 확실한 카드를 쥐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일단은 어쩔 수 없이 동맹을 맺었지만, 세 형제는 서로를 경계하며 각자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피 터지는 구둣발 싸움을 예고하듯, 세 공자의 얼굴엔 비장함이 서려있었다.
그때 엘리아의 방문이 열리고 레오가 눈을 부라리며 세 공자를 노려봤다.
“어……? 처남. 안 잤어? 왜 나와? 엘리아도 깼어?”
프레드의 살가운 말에도 레오는 눈을 치뜨고 으르렁거렸다.
“조용히들 좀 해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누나가 편히 쉴 수 있겠어요?!”
“…….”
“…….”
“…….”
잔인하고 무섭기로 유명한 세 공자가 어린 소년의 말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레오의 말에 세 공자는 몸을 흠칫 떨었다.
“이제부터 누나 옆에는 얼씬도 하지 마세요. 내가 죽을 때까지 누나 옆에서 딱 지키고 있을 거니까.”
세 공자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듯 시선을 교환했다.
죽일까……?
언제 싸웠냐는 듯 금세 한마음 한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