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벗어날 수 없는 운명 (14/18)

14장. 벗어날 수 없는 운명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

에덤은 서류 하나를 손에 들고 팔걸이를 토독토독 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에덤의 옆을 지키고 선 빅터의 표정은 내내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틀 전, 엘리아가 갑자기 발작하며 물에 빠진 이후,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든 제 주군의 행동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끔찍한 기억이었다.

하녀 따위 하나 구하겠다고, 장차 제국을 이끌어 가야 할 주군이 그런 짓을 하다니.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을 부르지 않고 그가 스스로 뛰어들었다는 거다.

에덤도르앙 데 슈얼데르 오딧세 오스카니아.

그는 이익이 없는 것엔 절대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다. 뭐든 계획대로 움직이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키는 남자였다. 혼약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베르타른 공작가에 딸이 없다는 걸 아쉬워할 정도였으니.

그런데 그런 그가 하녀 하나 구하겠다고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그 순간엔 이익도, 계획도 안중에 없이 그저 순수한 마음이었으리라.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잠깐의 호기심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폐하께서 아시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 할 텐데. 쯧.’

“빅터.”

“네, 전하.”

“이게 다 사실인가?”

“네. 어미는 폐병으로 사망.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고는 하는데 아이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그리고 엘리아 양은 열한 살 때 공작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녀의 어미가 몸 파는 여자였단 말이지……. 하, 갈수록 가관이군.”

들고 있던 서류를 식탁 위에 던지곤 에덤이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생각보다 배경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차라리 그냥 평민이었다면 이 정도로 어이없진 않았으리라.

“정신이 나갔었군.”

자조 섞인 에덤의 말에 빅터는 희망을 보았다. 드디어 제 주군이 정신을 차린 것 같아, 그동안의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빅터는 에덤을 채근했다.

“전하, 이만 환궁하셔야 합니다. 한 도시에만 너무 오래 머무르면 폐하께서도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흐음… 그래, 가야겠지.”

말과 달리 아직도 팔걸이를 토독거리는 에덤의 행동에 빅터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확실하게 결정이 나지 않았을 때 에덤이 보이는 습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토독, 토독, 토독, 톡, 톡, 톡!

끝날 것 같지 않던 소리가 드디어 멈췄다. 빅터는 제 주인의 결정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에덤을 바라봤다.

“음, 일단 그녀를 만나봐야겠군. 궁금한 게 있어.”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보고 가야 하지 않겠나?”

“네, 전하.”

앞서 걷는 에덤의 뒷모습을 보며 빅터는 빌고 또 빌었다. 자신들이 떠날 때까지 그녀가 제발 깨어나지 않기를.

하지만 빅터의 바람은 곧, 산산이 부서졌다. 이틀 동안 정신도 못 차렸던 엘리아가 눈을 뜬 것도 모자라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나가있어라.”

“네, 전하.”

바다를 보며 생기 있게 반짝거리던 눈빛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을 보면서 그때처럼 떨지 않는다는 것뿐.

혹시 몰라 에덤은 그녀 곁이 아닌, 창가로 가서 섰다. 혹시 가까이 갔다가 그때처럼 또 발작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분명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는데 엘리아를 보는 순간, 또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가 궁금했다. 그리고 걱정됐다. 무슨 사연인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친 건지.

“몸은… 괜찮나?”

“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죠?”

“이틀. 기억은 나는가?”

“…….”

기억이 안 나는 건지, 기억하기 싫은 건지 모르겠다.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자꾸만 입을 닫는 그녀가 답답했다.

“미안하군.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

“그 정도로 충격받았을지는 생각 못 했군. 정말로 미안하다.”

“…….”

“나랑 말 섞기도 싫은 건가?”

“…….”

“후우…….”

깊은 한숨을 토해 낸 에덤이 머리칼을 헝클이며 창가를 바라봤다. 이렇게 어려운 대화는 난생처음이었다.

“그날 못 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나?”

“…네.”

마주 보지 않은 덕인지, 다행히 이번에는 그녀가 순순히 대답했다. 에덤은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묻기 시작했다.

“공작가에선 왜 도망친 거지? 아, 참고로 그대를 도와주고 싶어서 묻는 거야. 내 도움 따위 필요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혹시나 엘리아가 또 입을 닫을까, 먼저 설레발을 친 에덤은 실소를 흘렸다. 그동안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살았건만, 하녀 앞에서 쩔쩔매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살고 싶어서요.”

“……!”

엘리아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에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도 모르게 몸을 돌리려다 주먹을 움켜쥐고 꿋꿋이 창밖을 바라봤다.

“누가 그대를 죽이려고 했나?”

“아니요. 그냥 사람처럼 살고 싶어서요.”

“…흐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 알았다. 그럼 다른 걸 묻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엘리아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 말을 골랐다.

“여기는 왜 온 거지?”

“여기가 좋다고 해서요. 그리고…….”

‘공작가랑 가장 먼 곳을 택한 거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에덤은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그럼 여기에 정착할 생각인가?”

“네. 그러려고요.”

“답답하군. 하!”

왜 지금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상황이 답답하고 짜증 났다. 세 공자는 이미 본인의 턱밑까지 왔는데, 저 순진한 여자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 공자의 성격을 아직 모르는 건가? 그러니 도망칠 생각을 했겠지.’

토독, 토독, 토독, 토독.

에덤의 습관이 다시금 나왔다.

어차피 자신의 품으로 데려올 수 없는 여자다. 그렇다고 이대로 엘리아를 그들에게 넘겨줄 마음도 없었다. 차라리 안전한 곳에 그녀를 살게 하고, 가끔 와서 보는 건 어떨까? 그래, 그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에덤이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웅크린 몸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엘리아.”

“…네.”

“세 공자가 이미 이 도시에 와있다.”

“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기 잃은 눈동자가 겁에 질린 듯 파르르 떨린다. 오늘 처음 보이는 생동감 있는 모습이 공포에 휩싸인 얼굴이라니, 입이 썼다.

“그대 생각을 듣지 못해서 내 마음대로 거처를 옮겨 그들의 눈을 피했다. 그런데 곧 이곳으로 찾아올 거야.”

“아아… 죄, 죄송합니다. 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이 무서운가?”

“아, 아니,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도망쳐서, 그리고 보, 보석을, 아……? 가방!”

횡설수설하는 엘리아를 에덤이 미간을 찌푸리며 안심시켰다.

“가방은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보관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대에게 돌려줄 거고.”

“아… 그럼 지금 주세요. 얼른 이곳을 떠나야 해요.”

“그대에게 기회를 주지.”

“네……?”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녀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멍한 눈으로 에덤을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여자가 되겠다고 해. 그럼 그들도 그대를 함부로 데려갈 수 없을 거야.”

“…그게 무슨……?!”

“그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도망친 하녀를 얌전히 살려둘 위인들이 아니다.”

안다. 알기에 지금 도망치려는 거다.

“그러니까 내 핑계를 대란 말이야. 기꺼이 그대를 위해서 내가 팔려주지.”

“왜…….”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아의 바보 같은 표정이 문득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녀는 속을 숨길 줄 모르는 여자였다.

“걱정이군. 그렇게 감정이 표정으로 다 드러나면 그들이 쉬이 속지 않을 텐데.”

“…….”

“그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고 하지. 그래, 사내이다 보니 아름다운 모습에 욕정이 끓어오르기도 했다. 덕분에 물벼락을 맞긴 했지만. 그런데 난 그대를 책임질 수가 없다. 그대도 알다시피 난 황태자거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엘리아는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대를 놈들에게 주고 싶진 않아. 나도 미친놈이지만, 세 공자는 더 미친놈이거든. 그래서 날 빌려주겠다는 말이야. 아무리 미친놈들이라도 황태자의 여자까지 어쩌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 말씀은.”

“놈들이 못 찾을 만한 곳에 집을 얻어주지. 거기서 편하게 살아.”

“그럼 전 뭘 드려야 하나요……?”

그녀의 순진한 되물음에 에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이 ‘엘리아’였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갖고 싶은 거지……? 미치겠군.’

흔들리는 마음을 겨우 붙들고, 애써 냉정을 되찾은 에덤은 태연한 척 대답했다.

“간혹 내가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줬으면 좋겠군. 그대가 해준 밥을 먹고 같이 산책도 하면 좋겠고. 대신, 내 호의를 무시하고 나한테서도 도망간다면 몹시 서운할 거야.”

다정함을 가장한 협박이었다.

“어떤가? 지금 그대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

고민하는 건지,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맴돈다. 제 어장 앞에서 망설이는 그녀에게 그가 더 확실한 미끼를 던지려던 찰나였다.

쾅!

“어딜 함부로 들어오시는 겁니까?! 나가십시오.”

“비켜라. 죽고 싶지 않으면.”

“황태자 전하께서 계십니다. 이러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십니까?”

“형, 이 새끼도 죽일까? 체이스랑 같이 묻어주면 되겠는데?”

“혹시 네놈이 엘리아랑 같이 마차 타고 도망간 놈인가?”

차례차례 들려오는 서슬 퍼런 익숙한 음성. 순간 사고가 정지된 듯, 엘리아의 몸이 굳어버렸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 애처롭게 떠는 엘리아에게 다가간 에덤이 그녀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댔다.

“생각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겠어. 일단 내가 놈들을 상대할 테니, 그대는 그때까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거야.”

“…….”

빅터의 고함과 세 공자의 살기 가득한 음성이 커질 때마다 엘리아는 극도의 공포로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황태자가 나가고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엘리아는 창가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아… 어떡해!

아름답게만 보였던 바다가 지금은 왜 이리 멀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거기서 죽었다면 숨은 막혔을지언정,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역시 내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구나. 이럴 거면 마차에서 그냥 죽게 두지. 이럴 거면 바다에 빠졌을 때 그냥 죽게 두지!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그제야 뒤죽박죽이었던 정신이 점차 또렷해졌다. 끊임없이 제 목숨을 가지고 노는 운명에 화가 치솟았다. 결국, 끓어오른 분노가 욕설이 되어 튀어나왔다.

“젠장할. 씨발. 망할 놈의 책!”

나오는 대로 욕설을 내뱉은 엘리아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쾅!

“엘리아.”

새빨간 핏빛 눈동자. 언제나처럼 무감한 표정. 오랜만에 아론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혀버렸다.

역시, 황태자도 이놈들을 이길 수 없는 건가…….

아론을 보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더는 살겠다고 바동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 이판사판이다.

“가까이 오지 마. 뛰어내릴 거야.”

창가 난간에 바짝 붙은 그녀는 아론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후우… 이리 와. 위험하잖아.”

“웃기는 소리하네. 나한테 가장 위험한 건 너희야!”

엘리아의 말투는 물론이고, 처음 보는 그녀의 표독스러운 표정에 아론은 적잖이 당황했다. 가시를 잔뜩 세운 엘리아의 모습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만나면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리라 다짐했건만 이미 그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자신을 죽일 듯 보며 경계하는 건지, 아론은 당황스러웠다.

분명 마지막에 헤어질 때만 해도 저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엘리아가 왜 저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누가 화를 내야 하는데?!’

분한 마음에 화가 끓어올랐지만, 지금은 화를 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후, 엘리아. 걱정했잖아.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걸 몰라서 물어? 흥, 알면서 묻는 악취미는 고쳐지질 않나 보네?”

“하…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기다리라고 했잖아. 곧 간다고.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정말 멍청하네. 너희가 싫어서 도망 온 거잖아!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너……!”

그 아론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여유로웠던 남자가 말을 잇질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상처라도 받은 듯 일그러진 아론의 표정에 엘리아도 순간 당황스러웠다. 냉기를 흩뿌리던 남자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상처받은 짐승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아론의 얼굴에 아주 잠깐 심장이 덜커덩거렸다.

그러나.

“안 속아.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나 말고도 다른 여자 많잖아!”

“엘리아,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여자라곤 너밖에 없다.”

“엘리아, 너 왜 그래?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찾아왔는데, 넌 반갑지도 않아?”

“머저리 같은 새끼, 네 뇌는 여전히 해맑구나.”

소란을 들었는지 아힌과 프레드까지 방 안으로 들어서서 한마디씩 거들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거침없이 내뱉는 엘리아의 욕설에 두 남자의 충격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지금 나한테 말한 거야? 너… 엘리아 맞아?”

가까이 다가서려는 프레드를 막은 아론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선다.

“오지 말라고 했어!”

난간 위로 올라서려는 엘리아의 거침없는 행동에 세 공자와 황태자, 그리고 빅터까지 움직임을 멈췄다.

“알았어. 내려와. 가지 않을 테니까 내려와! 엘리아!”

“흥, 왜? 나 죽으면 그 더러운 욕정을 풀 데가 없어서 그래? 널리고 널린 게 여잔데 왜 나한테 이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난간 위에 걸터앉아 고래고래 고함치는 엘리아의 위태로운 모습에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아 그들은 죽은 듯 숨마저 참았다.

“엘…….”

“흥, 꺼져, 이 새끼들아. 지옥에나 가버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려는 찰나, 어디선가 엘리아를 부르는 앳된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누나!”

아……?

난간을 다시 잡으려던 손이 허공을 붙잡았다. 이미 몸도 허공에 붕 떴는지, 지독히도 새파란 하늘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엘리아!!”

…부르지 마. 난 이제 이 지긋지긋한 책 속에서 나갈 거니까.

홀가분한 미소로 눈을 감는데, 불현듯 꿈속에서의 마지막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레오.

아? 레오가 엘리아 동생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눈에 밟혔나? 그럼 지금 날 부른 게 레오인가? 불쌍한 남매. 어차피 이 소설은 배드엔딩이었네. 여주가 이미 죽었으니까. 그리고 나도 곧 죽을 거니까.

엘리아는 마지막으로 파란 하늘을 다시 한번 보려고 눈을 떴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보인 건 새빨간 하늘, 아니 새빨간 눈동자였다.

뭐야……?

* * *

아주 행복한 꿈을 꾸었다. 엄마가 해주는 밥도 먹고, 친구들과 분위기 좋은 술집에 앉아 술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몹시 행복했다.

“좋은 꿈을 꾸나 보군.”

며칠이나 지났을까. 간간이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지만, 그녀는 또다시 깊은 수마에 빠져들길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얘 괜찮은 거 맞아? 아론 형! 떨어질 때 얘 머리 부딪힌 거 아니야?”

“엘리아 몸 어디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깨어나는 건데?”

프레드의 초조한 음성에 아힌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꼴도 보기 싫은 모양이지. 어쩌면 이미 깨어났는데도 일부러 눈을 안 뜨는 걸지도 모르고.”

“정말……? 어? 그러고 보니까 눈알이 굴러가는 것 같은데?”

검은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엘리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오호……. 우리 엘리아가 왜 이렇게 안 깨어날까? 왕자님의 키스라도 받으면 일어나려나……?”

제기랄,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사실 아까부터 정신을 차린 엘리아는 깨자마자 눈앞에 벌어진 극한 상황에 미칠 노릇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는데, 죽기는커녕 긴 잠을 자다 깬 것처럼 정신이 아주 또렷했기 때문이다.

이미 걸린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짐승들 사이에 놓인 처지라, 더는 협박도 뭣도 안 먹힐 게 뻔할 테니.

미치겠네!

그때였다.

“다들 나가주세요.”

“어……? 꼬마! 너 마침 잘 왔다. 네 누나 좀 깨워봐.”

“다들 나가시라고요. 우리 누나 옆에서 떨어져요!”

앙칼지게 소리치는 레오의 말에 세 공자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세 쌍slakpwkjmdm의 시뻘건 눈동자를 마주하면서도 레오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세 공자를 노려봤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겁이 없네, 겁이.”

“네 누나를 지키고 있는 거다.”

“누나는 제가 지켜요. 그러니까 나가시라고요!”

프레드와 아힌의 으르렁거림에도 레오는 더 큰 목소리를 냈다. 그것도 모자라, 생각지도 못한 카드를 내미는 레오의 말에 세 공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태자 전하가 우리 누나 지켜준다고 했어요. 전 아저씨들보다 황태자 전하가 우리 누나 옆에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뭐?!”

“하!”

“이런.”

세 남자의 탄식에 레오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일단 나가지. 황태자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다.”

눈을 부라리고 일어난 아론이 레오를 뚫어지게 보며 황태자의 처분을 아주 쉽게 얘기했다.

“내가 황궁에 기별하지. 황태자가 여기에 이러고 있다는 걸 아시면 폐하께서 꽤 흡족해하실 거야?”

“감히 우리 엘리아를 넘봐? 처남! 그놈 믿으면 안 돼! 그놈이 황제가 돼서도 엘리아를 지켜줄 것 같아? 하여간 애들이 이렇게 순진해요.”

언제부터 저 셋이 저렇게 마음이 잘 맞았을까? 만날 때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세 남자가 이제는 찰떡궁합처럼 죽이 척척 맞았다.

그것도 모자라 처남이라니. 프레드 저 덜떨어진 놈.

앞날이 캄캄했다. 이젠 도망칠 의욕도 없었다.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는데, 놈들의 집요함에 엘리아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숨 막히게 붙어있던 묵직함이 사라지고 주위가 고요해졌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엘리아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한 앳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파란 눈동자. 그저 흔한 색이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지금 보니 레오의 파란 눈동자 색은 자신과 매우 흡사했다. 맑고 푸른 벽안.

“…안녕.”

“…….”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아이는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며 눈물을 참았다. 레오의 모습에 어린 엘리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많이 닮았다. 두 아이가.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밥은 먹었니?”

“…네.”

“고마워. 네 덕에 여기까지 잘…….”

“흐흑, 흐흐흑, 흐어어엉!”

아… 울렸네.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걸까. 내가 누나인 걸 아는 모양인데 그게 서러운 걸까? 하녀라서……?

“이리 와.”

몸을 일으킨 엘리아가 레오에게 양손을 뻗었다. 멈칫하던 아이가 주춤거리더니 이내 폭 안긴다. 그러곤 더욱 서글프게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녀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게 자신의 감정인지, 엘리아의 감정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한결 편했다. 아이의 온기 덕분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게 혈육의 정인가.

“누나.”

“응. 이제 괜찮니?”

“흑, 미안해요.”

“응……? 뭐가?”

“나 때문에, 흐흑, 나, 나 때문에 누나가……!”

하아……! 데니엘 얘기를 들었구나. 이 새끼들은 왜 애한테 그런 얘기를 전해?

“레오.”

“흐어엉. 흐흑. 흐아앙!”

“뚝!”

“히끅!”

“옳지, 착하다. 사내대장부가 그렇게 눈물이 많으면 어떡해?”

“흡! 히끅!”

앙칼졌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야 어린애다운 모습을 보이는 레오가 귀여웠다. 울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돌연 가슴이 뭉클했다.

“네 탓이 아니야. 널 속인 그놈이 나쁜 놈이지.”

“흐흑, 그래도…….”

“울지 마.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다시 품에 안자 설움이 북받치는지 레오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커졌다.

그래, 울어라, 울어. 다 토해 내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엘리아는 울음이 멈출 때까지 연신 등을 토닥이며 아이를 달랬다.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길거리의 아이로 산 걸 보면 레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어쩌면 엘리아보다 더 힘들게 살아왔을지도.

한바탕 울음을 쏟아내고는 저도 지쳤는지 이제야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사이 얼마나 운 건지, 눈이 퉁퉁 부은 모습에 엘리아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제 좀 괜찮아?”

“…네.”

“이리 앉아.”

옆자리를 팡팡 치자, 조심히 엉덩이만 걸쳐 앉는 레오의 모습에 또다시 마음이 아렸다. 아이처럼 울 때는 언제고, 금세 천덕꾸러기같이 눈치를 보는 아이의 행동이 꼭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강아지 같았다.

“레오.”

“…….”

“내가 누군지 아니?”

“…….”

조개처럼 입 다무는 건 나랑 똑같네. 훗.

“레오. 누나가 부탁이 있어.”

“뭔데요……?”

부탁이라는 말에 아이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빵 봉지로 꾀일 때 봤던 그 모습이다.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들어주고 싶은 모양이다.

귀엽긴.

“음, 그게 말이야.”

생각했던 말이 쉬이 나오질 않았다. 레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심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 내어 말했다.

“누나랑 같이 살지 않을래?”

“……!”

튀어나올 듯 커진 레오의 눈을 보며 엘리아는 생긋 웃었다. 그래, 반은 충동적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내내 외로웠었다. 긴 시간을 낯선 곳에서 혼자서 어찌 살아가나 걱정했었다. 그런데 레오가 옆에 있어준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작스러울 건 아는데 누나 받아주면 안 될까?”

“…저, 정말이에요?”

“응, 제발 누나 받아주라. 누나도 혼자 외롭단 말이야.”

“…지, 진짜예요?”

“받아줄 거지? 응?”

“…흑! 흐흑! 흐어엉!”

아이고, 또 우네. 이 울보를 어쩐담.

“뚝! 대답부터. 응?”

“네, 네. 흐흑. 좋아요. 누나랑 살래요. 흐어어엉!”

덥석 안겨서 또다시 울음보를 터트린 레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엘리아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친 혈육은 아니지만, 어쨌든 엘리아의 동생이니 자신의 동생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이 날뛰는 걸 보니, 피는 어쩔 수 없이 끌리는 것 같았다.

아, 가방! 가방이 있어야 하는데. 아니지, 일단 저 짐승들부터 해결해야 하는구나. 후우……!

“레오?”

“히끅, 네.”

“그만 울고, 나가서 밖에 있는 짐승들 좀 불러줄래?”

“네……?”

“너와 내가 편하게 살려면 저 짐승들부터 잡아 족쳐야 하거든.”

엘리아의 막말에 레오의 눈이 잘게 떨렸다. 아까는 그리도 잘 대들더니 지금은 또 겁이 나는 모양이다.

“누나, 저 아저씨들 높은 귀족이랬어요.”

“그래, 아주 높은 귀족 짐승들이시지.”

“그런데 저 아저씨들이 누나 구했어요.”

“뭐……?”

맞다. 나 어떻게 산 거지? 분명 떨어졌는데……? 높이가 절대로 살아날 수 없는 높이였는데?

“누나가 떨어지고 아저씨 한 명이 같이 뛰어내렸어요. 그리고 나머지 두 아저씨도 따라서 뛰어내렸어요.”

“뭐어……?!”

“그래서 저 아저씨들이 무섭지만, 싫지는 않아요. 그리고 날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저 아저씨들이고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인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아… 일단 알았어. 넌 가서 좀 쉬어. 누나가 알아서 해결할게.”

“…누나. 혹시 또…….”

레오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 끔찍한 광경을 레오가 본 게 확실했다. 사실, 떨어지려고 했던 것보다는 손을 놓친 거였지만, 그거나 그거나 아이에겐 충격이었을 테니.

“걱정하지 마. 다신 그럴 일 없어. 이젠 네 옆에 꼭 붙어있을 거야.”

“정말…이죠?”

“그래. 그러니 얼른 짐승, 아니 저 아저씨들 좀 불러줄래?”

“네.”

잠시 머뭇거리던 레오가 후다닥 문을 열고 나갔다. 아직 혼자 두긴 걱정인 모양이었다.

후, 이젠 확실하게 해야지. 쫄지 마. 나 구하려고 뛰어내렸다는데 설마 날 죽이겠어? 이참에 확실하게 정리해야 해. 내 삶과 레오의 삶을 위해서라도.

엘리아는 더 이상 움츠리지 않기로 했다. 이젠 끝까지 이판사판이다.

지금부터 전쟁이야!

제국의 황태자, 그리고 제국 귀족 중 공작을 제외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세 공자를 불러 모은 여인은 다름 아닌, 하녀였다. 무엇보다 정점에 있는 남자들 앞에서도 당당한 눈빛으로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여인은 더는 매번 고개 숙이고 웅크렸던 겁 많은 엘리아가 아니었다.

그녀가 변할 수 있었던 건, 이젠 죽음이 두렵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이젠 지켜야 할 사람도 생겼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운명을 다시 바꿔볼 기회.

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거지, 세 공자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를 일이니까. 혼자뿐이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자신으로 인해 레오가 다칠 수도 있기에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자, 모두 그녀만 바라보며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엘리아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남자들이 기어 다니는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자신의 눈치나 보고 있으니 말이다.

“재밌네요.”

의외의 말이었나 보다. 네 남자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하는 걸 보니.

후우…….

엘리아는 크게 심호흡하곤 눈을 부릅떴다. 제 뜻을 밝히고 한시라도 빨리 이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먼저, 황태자 전하.”

“으, 응?”

자신을 부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에덤이 당황한 듯 대답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아닌, 다른 남자를 먼저 불러서인지 여지없이 세 공자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아는 담담한 눈빛으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여러 번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 해주신 말씀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전하는 정말 성군이 되실 거예요.”

연한 미소를 짓는 엘리아의 표정에 에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성군은 무슨, 여자에 미쳐서 정무도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마 그녀가 자신의 본모습을 안다면 저렇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설마, 뭘 알고 돌려 까는 건 아니겠지?’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런데 마음은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거절이 분명한데 가슴은 미친놈처럼 뛰기 시작했다.

“대체 둘은 언제 만난 거야?”

“프레드 공자, 언행을 조심하십시오.”

“흥, 누가 뭐래? 너나 네 모가지 조심해라.”

그새를 못 참고 빅터와 으르렁거리는 프레드를 엘리아가 쓱 쳐다보자, 웬일로 그가 꼬리를 만 듯 눈썹을 축 내린다.

흥, 확실히 칼자루는 내 손에 있는 모양이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맹수 새끼들이 웬일인지 순한 양처럼 변한 게 새삼 신기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뭘 그렇게 두려워한 건지. 아등바등했던 시절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엘리아.”

“네, 전하.”

세 공자의 살기 어린 시선은 아랑곳없이 에덤이 다정한 음성으로 엘리아를 불렀다. 마치 세 공자에게 보란 듯 친근한 미소까지 머금은 채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걱정과 아쉬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괜찮겠나?”

“네.”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말했다시피 난 언제까지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끄그극.

“더는 못 들어주겠군.”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요란할 정도로 갑자기 일어나는 아론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에덤을 향한 서슬 퍼런 눈빛에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엘리아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하면 한 대 치겠군. 하!”

불경하게 살기를 쏘아대는 눈빛에도 에덤은 승리자인 양 여유롭게 아론을 올려다보며 비아냥거렸다. 물론 심기가 사나워지긴 했지만, 엘리아 앞에서 놈들과 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론을 상대했다.

“너무 오래 계시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한 대 칠지도 모르니 그만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론 공자님!”

“닥쳐라. 감히 네놈 따위가 지금 어딜 나서는 거지? 목숨이 두 개쯤 되는 모양이야?”

“윽!”

언제 칼을 빼 든 건지, 순식간에 아론의 손에 들린 칼끝이 빅터의 목을 찔렀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으면 목에 구멍이 났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아론. 지금 감히 내 앞에서 무슨 짓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감히 내 앞에서 황태자 전하가 내 여자와 무슨 밀담을 나누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하, 엘리아가 그대 여자였나……? 처음 듣는 얘기군.”

“지금이라도 아셨으면 전하의 개새끼 목숨이라도 구해서 얼른 가시죠? 지금 제 이성이 간당간당하거든요.”

“큭!”

빅터의 목에서 기어코 핏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여유로운 미소는 사라지고, 서슬 퍼렇게 변한 에덤의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칼을 들이미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엘리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시나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남자들이 아니었다. 미친놈들을 한데 모이게 했더니, 피까지 보게 될 줄이야.

“제, 제 얘기 안 들어주실 건가요?”

“들을 거야. 그런데 불청객들은 보내야지. 우리 가족끼리의 대화에 남이 끼어있는 건 별로라서 말이야.”

아직도 안 갔냐는 듯, 비소를 머금은 아론이 에덤을 보며 이죽거렸다.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에덤의 얼굴을 보며 이번에는 아힌이 일어났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도 황태자 전하신데 곧 베르타른 공작이 될 제가 배웅해 드려야 맞지 않겠습니까?”

누가 봐도 빈정거리는 행동이었다. 아힌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하……! 황가가 공작가에게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감히 네놈들이 내게 이런 모욕을 줄 줄은 몰랐는데?”

“모욕이라니요. 그저 가시는 길 배웅해 드리겠다는데 곡해가 심하십니다. 그리고 전하께 드릴 말씀도 있으니 저랑 나가시죠. 나쁜 거래는 아닐 겁니다.”

정중함을 가장한 느물거림에 황태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를 까득 갈며 아론을 노려본다.

“그 칼, 내려라. 내 호위에 칼을 겨누는 건 곧 나에게 칼을 들이미는 거나 마찬가지임을 모르는 건가?”

“…훗, 버릇없는 개새끼는 잘 못 참아주는 성격이라. 전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보란 듯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고는 아론이 이죽거렸다.

“흥, 왜 모르겠나. 제정신이 박혔다면 감히 내 앞에서 이따위 짓거리는 못 했겠지.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공작가가 너무 기세등등해졌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제야 칼을 내리고 과장되게 인사하는 아론의 뻔뻔한 태도에 에덤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자리를 떠나려다 잠시 멈추어 선다. 그러곤 엘리아를 바라봤다.

“안녕히 가시라고 했습니다.”

“전하, 나가시죠.”

잠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한 놈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한 놈은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으니 에덤은 화가 끓어 미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눈빛으로 엘리아를 바라보던 에덤은 이내 미련 없이 아힌과 자리를 떠났다.

황태자가 나가자 옥죄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다행히 상황은 마무리됐지만, 엘리아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제국의 황태자인데, 세 공자가 이리 덤벼들었으니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 나랑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말자.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자,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코앞까지 쑥 들어온다.

“……!”

“머리가 아픈 모양이군. 내가 해주지. 여기는 이렇게 꾹꾹 눌러줘야 해.”

지금 뭐 하는 건지 이해가 가기도 전에, 이미 아론의 손에 그녀는 극강의 시원함을 느끼고 있었다. 말릴 새도 없이 다가와 마사지를 해주는 남자를 엘리아는 기가 막힌 눈으로 바라봤다.

아론이 이런 남자였나? 참, 갈수록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였다.

쪽!

“……?!”

츄릅!

“읍!”

잠시 입술에 뭐가 스쳤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드러운 살덩이가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다. 관자놀이를 눌러주던 양손은 어느새 그녀의 양 볼을 꽉 잡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농익은 아론의 입맞춤에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황태자가 다가왔을 때는 그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겁이 났는데, 아론과 하는 키스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것도 모자라 절로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쯧, 또 선수 치네. 엘리아, 형 다음엔 나다.”

“흡! 후아! 뭐, 뭐예요!”

서서히 감기려던 눈이 프레드의 말에 번쩍 뜨였다. 정신이 번쩍 든 엘리아는 있는 힘껏 아론을 밀치고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닦아내며 눈을 치떴다.

거부당할 거라는 건 예상 못 했는지, 아론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에 프레드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변함없이 제멋대로고 무도한 남자들의 행동에 엘리아는 짜증이 치밀었다.

“역시 변한 게 없으시네요.”

“엘리아. 인제 그만하면 안 돼? 네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우리를 봐서라도…….”

“누가 오라고 했나요? 아니, 대체 왜 온 거예요? 도망간 거 알았으면 오지를 말았어야죠!”

“엘리아!”

“프레드.”

애들 싸움이라도 하는 듯 지지 않고 받아치는 프레드의 고함에 아론이 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그러곤 한층 가라앉은 눈빛으로 프레드에게 말했다.

“나가있어. 엘리아와 얘기는 내가 하지.”

“형!”

“얼른. 자꾸 이러면 이번엔 내가 엘리아 데리고 숨어버릴 수도 있어.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이익……! 하! 미치겠네.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인제 와서 배신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네가 자꾸 감정적으로 나오니까 말하는 거다. 그리고 뭘 약속한 게 없는데 내가 무슨 배신을 한다는 거지?”

“형!”

이번엔 프레드와 아론이 대치했다. 역시 이들과 진지한 대화를 기대한 게 잘못인 것 같았다. 엘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다들 공작가로 돌아가 주세요.”

“뭐?”

“엘리아.”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아가 두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아무 감정 없는 눈동자. 두려움도, 기대도, 바람도, 그 어느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감한 눈빛. 두 공자는 180도 달라진 엘리아의 모습에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비장하게 바라보던 엘리아가 돌연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엘리아! 너 정말 왜 그래?”

“일어나라.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두 사내를 엘리아는 대놓고 비웃었다.

“정말 웃기네요. 매번 이렇게 무릎 꿇게 해놓고 절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분들이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왜들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하……!”

“형, 아무래도 엘리아가 미친 것 같아. 어떡하지?”

“네, 저 미쳤어요. 그래서 더 이상 공자님들이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아요. 절 가지고 싶으시면 그냥 죽여서 몸뚱이만 가지세요. 전 이제 죽음도 두렵지 않으니까요.”

엘리아의 단호한 말에 프레드는 뒤로 넘어갈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나마 침착한 척했지만, 아론의 눈동자도 지진 난 듯 파르르 떨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후…….”

길게 숨을 토해 낸 아론이 체념한 듯 물었다.

“좋아.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자유요.”

“자유? 엘리아! 언제 우리가 널 구속…….”

“프레드!”

버럭 내지르는 아론의 성난 음성에 프레드는 물론 엘리아마저 화들짝 놀랐다. 매번 깐족대던 프레드도 아론의 서늘한 분위기에 이번만큼은 대들기가 힘들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아… 겁먹지 마. 겁먹을 필요 없어.

“무슨 자유를 말하는 거지?”

“말 그대로 자유요. 더는 공자님들의 성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사람대접 받으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요.”

“우리가 언…….”

“그렇게 해줄 생각 없으면 그냥 죽이세요. 그렇게라도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고분고분하던 순종적인 하녀가 주인의 말허리까지 잘라가며 눈을 똑바로 뜨고 제 할 말을 따박따박 하니, 프레드와 아론은 다시금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면도 있었나? 넌 대체 어떤 여자였던 거야?’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아론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살다 살다 이런 충격은 또 처음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엘리아의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임이 느껴졌다.

아론은 초조해졌다.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한 터라, 엘리아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어떡하실래요?”

“엘리아, 너 진심이야?”

“네.”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건지, 프레드의 눈빛도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럼 넌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이곳에서 레오랑 살고 싶어요.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요.”

“…그거면 되겠나?”

“네……?”

“구속하지 않고 여기서 그 꼬맹이랑 살게 해주면 되겠냐고.”

“아… 네.”

웬일로 차분하게 대답하는 아론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순순히 들어줄 것 같은 분위기에 이번에는 엘리아가 당황했다.

“좋아. 그렇게 해.”

“네……?”

“그렇게 하라고. 그럼 된 거지?”

“아… 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내내 서늘하게 굳어있던 아론이 피식 웃는다. 마치 짠 듯 프레드도 빙그레 웃는다. 두 공자의 의미 모를 미소에 엘리아의 온몸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침대 위에 앉은 엘리아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는 가방을 보니 더 큰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미치겠네.”

그럼 그렇지, 쉽게 물러날 놈들이 아니었다니까!

너무도 쉽게 제 뜻을 받아들여 주는 아론의 말에 잠깐 방심했다. 더 확실하게 못을 박았어야 했는데, 너무 순순히 대답해 버리는 바람에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이 바보! 멍청이! 어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제 행동에 엘리아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나 그거나 달라진 게 뭐가 있냐고! 집만 바뀌었지, 같이 사는 건 똑같잖아!”

그 아론이 그런 표정과 말투로 애원할 줄 누가 알았던가.

“우리도 여기 있을 거야.”

“구속만 안 하면 되잖아. 그리고 집은 내가 더 좋은 집으로 옮겨줄게. 황태자 새끼 집에 널 두고 싶진 않아.”

“잠시 아는 친구가 놀러 왔다고 생각해. 그리고 낯선 곳에서 젊은 여자 혼자 아이 데리고 정착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아무나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이미 한 번 경험했다고 들었는데……?”

“무엇보다 여기까지 오느라 제대로 쉬질 못했어. 너무 피곤하다고. 그러니까 며칠만 봐줘. 있는 동안 너희가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친구?! 친구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으으으……!”

데니엘 사건을 이미 세 공자도 들었는지, 그 얘기를 할 때 아론의 표정은 정말로 무서웠다.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마지막 말에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세 남자의 몰골이 너무 초췌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린아이와 젊은 여자가 낯선 곳에서 정착하기 힘들다는 말이 영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잠시 고민하는 사이, 하필 그때 들어온 레오를 데리고 두 남자가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결국 그들은 여기에 눌러앉겠다고 선언하고 얼렁뚱땅 상황을 마무리한 후, 귀신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며칠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걸 어찌 믿겠나.

“흥, 영악한 놈. 제대로 당했네. 후… 정신 똑바로 차려. 이러다간 또 원점으로 되돌아간다고. 하여간 보통 놈들이 아니라니까.”

주먹을 불끈 쥐고 열의를 다지던 엘리아는 제 옆에 있는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돈과 보석이 그대로 있는 가방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뻔히 들고 도망친 걸 알면서도 프레드와 아론은 이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녀의 것인 양 순순히 돌려주기까지 했으니, 어찌 불편하지 않을 수가.

“후우! 미치겠네, 정말.”

꼬르륵.

윽!

며칠 새 별별 일을 겪느라 잠만 잤더니, 밥다운 밥을 먹어본 지가 언젠지도 모르겠다.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찾아보려고 거실로 나오던 참이었다.

“엘리아.”

“헉……!”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아힌을 마주한 순간 전신의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모골이 송연해지고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온다. 아론과 프레드와 있을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아힌은 다른 두 공자들보다 항상 더 어려웠다. 첫째라서? 소공작이라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론은 친구 같고 프레드는 동생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다면, 아힌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선생님 같은 기분이랄까?

거기다 이번 계획 전에 아힌과 연관됐던 일이 많아서 그런지, 그를 보기가 더욱 민망했다.

드레스 봤겠지……? 하, 보석 떼 간 거 봤으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황태자와 함께 나갔던 아힌은 지금의 상황을 알 리가 없었기에 그와 또다시 반복해야 하는 이 상황에 속이 쓰렸다.

“앉아.”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금세 도망가 버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아힌과 단둘이 있으려니 자꾸만 몸이 웅크려진다. 막아줄 놈들이 없다는 것에 대번 겁이 났다. 쭈뼛쭈뼛 아힌의 맞은편에 앉은 엘리아는 시선을 어디에다 둘 줄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내가 무섭나?”

네, 엄청 무섭네요. 흑.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엘리아는 눈에 힘을 팍 주고 부릅떴다.

“…아니요.”

“그런데 왜 똑바로 못 보는 거지? 이러면 다시 널 휘두르고 싶어지잖아.”

뭐?!

분명 무서운 말인데, 아힌의 음성엔 어딘가 힘이 없었다.

“…얘기 들었다. 다들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자고 하더군. 그래서 나도 그럴 생각이야.”

“…….”

“엘리아.”

“…….”

그녀는 또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냥 입 다물고 추이를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론보다 더 영악한 아힌의 말발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이 뻔할 테니 아까보다 더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무슨 말을 하든 동요하지 마. 자유! 그것만 생각해.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바라봤다. 어떤 말을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난 잠시 제도에 다녀올 거다.”

“네……? 아, 네.”

그가 간다는 말에 잠깐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긴장을 놓지 않았다.

“널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어주려고 가는 거야.”

“…네?”

자유롭게 해준다고……?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하던 엘리아의 표정이 또다시 멍하게 바뀌었다.

“넌 이제 베르타른 공작가의 하녀가 아니다. 네 서류를 없애고 올 거야. 겸사겸사 내 자리도 찾고.”

“정말…이에요?”

“그래. 자유롭게 해주기로 했으니, 확실하게 해주는 게 낫겠지.”

운명이 정말 바뀐 것일까? 생각지도 못한 아힌의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찰나.

“대신.”

에이 씨… 이럴 줄 알았어.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저놈의 ‘대신’ 소리만 들으면 이제는 경기를 할 지경이다. 하녀 서류를 없애는 ‘대신’이라면 뭘 더 얼마나 큰 걸 원하려는 걸까. 그 크기를 알 수가 없어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김이 팍 새버려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려는 순간, 뒤이어 나온 아힌의 말에 표정은 또다시 멍청하게 바뀌었다.

“이젠 도망치지 마라.”

“……?”

“처음엔 화가 나더군. 너무 괘씸해서 용서할 수가 없었지.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라 생각했다. 저 아힌이 떨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니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더군. 네가 간 길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 알기에 내 평생 처음으로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우는 건 아니지? 눈동자가 시뻘게서 그런가, 오늘따라 그의 흰자위도 붉게 보이는 것이 꼭 울기 직전의 모습 같았다.

“낯선 남자와 함께 떠났다는 말, 그리고 널 잡으려고 혈안이 된 아버지, 거기다 황태자까지. 네 흔적을 쫓는 길에 눈에 보이는 새끼들은 다 죽여버리고 싶더군.”

서글퍼 보이던 아힌의 눈빛에 돌연 살기가 깃들었다. 그의 표정과 음성만으로도 그 순간 그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결국 사달이 났더군. 만약 꼬마를 데리러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 순간 널 구한 건 우리였을 거다. 아니, 그런 일을 겪게 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황태자 따위가 너와 함께 있도록 두지도 않았을 거고. 하아! 그 마부 새끼를 내 손으로 못 죽인 게 화가 끓어 미치겠다.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

“후우… 소리 지른 건 미안하다,”

긴 숨을 토해 내며 마른세수를 하는 아힌의 모습에 엘리아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는 정말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거기다 고작 소리 한 번 질렀다고 사과를 했어? 이 아힌이?

오랜만에 만난 놈들은 또 이상하게 변해있었다. 정말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엘리아.”

“…네?”

“부탁이 있다.”

부탁……? 명령이 아니고?

“뭔데…요?”

“네 옆에서 숨만 쉴 수 있게 해다오.”

“…….”

“다시는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치지 말아달란 얘기야.”

“…….”

엘리아는 입을 꼭 다문 채 아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제 앞에는 상처받은 짐승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가 한 모든 말들이 진심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이미 변했다. 그런데 자신이 변하고 나니 세 공자도 바뀌었다. 자신이야 살기 위해, 그리고 자유롭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변한 거였지만, 세 공자는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그게 왜 궁금했을까.

엘리아는 내내 담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저를…….”

엘리아의 음성에 고개를 숙였던 아힌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수척해 보이는 모습이 왠지 안쓰러웠다.

“거기에 왜 데리고 가신 거예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아힌의 표정에 엘리아의 음성이 조금 뾰족해졌다.

“공작령 연회에 말이에요. 저를 왜 그 위험한 곳에 데려가신 거냐고 묻는 거예요. 절 이용하신 건가요?”

살짝 흔들리는 아힌의 눈빛을 놓치지 않은 엘리아는 가슴이 선득해지는 걸 느꼈다.

정말로 이용하려고 했던 거였나.

“이용이라……. 그래, 이용이라면 이용이겠지. 널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이용.”

“……?”

이어 나오는 그의 말에 이번에는 엘리아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그 연회는 수많은 귀족이 모이는 자리였다. 그리고 원래는 황태자가 아닌, 황제가 참석하려고 했을 만큼 중요한 자리였지. 물론, 나와 혼담이 오가던 영애도 와 있었다. 난 거기서 선전포고한 거야. 아버지와 나 스스로한테. 다시 되돌릴 수 없도록. 널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 방법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단념시킬 방법도, 저택에 왔던 그 영애에게 확실하게 거절할 방법도. 또 다른 가문을 내게 들이대지 못하게 할 방법도.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엘리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제일 중요한 진심을 얘기했다.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할 방법도 그것뿐이었다. 저지르고 나면 주워 담지 못할 테니까. 또 다른 것으로 아버지가 날 협박하려 들면 널 두고 또 타협하게 될까 봐 겁이 났거든.”

“대체 왜…….”

혼란스러웠다. 아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자면 그는 엘리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런 무모한 행동을 했다는 얘기였다.

말도 안 돼! 아힌이 왜?

“안 믿기나?”

“네. 말이 안 되잖아요. 소공작님이 왜 저 같은 하녀에게.”

“그러니까 말이야. 그 말이 안 되는 감정이 지금 내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데 어쩌겠나. 이번에 널 잃을 뻔한 후, 더 절실하게 깨달았다. 난 너 없으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걸.”

“…….”

그의 표정이 정말로 절실해서, 그의 눈빛이 정말로 진심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널 위험하지 않게 할 자신이 있어서 데려간 거였어. 이용한 건 맞지만 널 버리려던 게 아닌, 가지려고 한 거였다. 이렇게 네가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지만.”

“…….”

피식 웃으며 원망 섞인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의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마치 제 진심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신기했다. 그 오만하고 거리낄 거 하나 없던 놈들이 지금 제게 매달리는 꼴이. 고양감이 들 줄 알았는데, 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말 몸정도 정이라고,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그가 안쓰러워 보였다.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니 더는 따지지도 거절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아… 언제부터 이렇게 물러 터졌을까.

자조 섞인 한숨을 쉬면서도 엘리아는 체념한 듯 말했다.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절 온전하게 두신다면 도망치지 않을게요. 저와의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감사해요.”

“…뭐가.”

“저를 공작가에서 놓아주셔서요. 그리고 레오를 데려와 주신 것도요.”

“훗, 그래야 네가 우리를 믿고 마음 편히 있을 테니까.”

“…….”

“너한테 완전히 빠지긴 했나 봐. 내가 이럴 줄은 나도 몰랐거든.”

“…….”

아힌은 이제 제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곤 그녀가 앉은 의자 팔걸이에 양손을 짚고는 상체를 숙이고 눈높이를 맞춘다.

아론에게 한 번 당한 터라, 엘리아는 슬슬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손이 제 볼을 감싸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대신 이다음 뭘 할지는 뻔했기에 얼굴을 돌리고 거부하려던 참이었다.

“이, 이러지…….”

“욕 잘하는 여자가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뭐……?

“내 취향은 순종적인 여자보다 거친 여자였나 봐. 너처럼.”

“흡!”

능숙하게 들어온 혀가 부드럽게 입 속으로 침범했다. 잔뜩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 잠깐 정신이 쏙 빠지는 바람에 엘리아는 또 한 번 아힌에게도 입술을 내주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두렵지가 않았다. 세 공자에게 길든 몸이라 그런지 놈들이 다가오는 건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다. 두렵긴커녕 이 와중에 반응하려는 몸에 당황한 엘리아는 얼른 그를 밀어냈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군.”

처음 보는 아힌의 다정한 미소. 아쉬운 듯하면서도 뭔가 다 내려놓은 듯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에 물색없는 심장은 또 콩닥거렸다.

쾅!

“형! 뭐 해?!”

“그새를 못 참고 또 들이대는군.”

별안간 들이닥친 제 형제들은 아랑곳없이 아힌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것도 모자라.

“서두르길 잘했네. 다녀올게. 엘리아.”

쪽!

다시 한번 입을 맞추기까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엘리아는 얼굴만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형! 처남 보는데!”

프레드의 핀잔에도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아힌은 가뿐하게 몸을 돌려 나가려다 제 앞에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레오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흥, 이제야 좀 사람답게 보이는군. 꼬맹아. 이 짐승들한테서 네 누나 잘 지키고 있어라. 내가 올 때까지 잘 지키고 있는다면 좋은 선물을 하나 주지.”

레오의 포슬한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헝클인 아힌은 ‘다녀오마.’라고 말하곤 집을 나섰다.

그의 고백을 들은 탓일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그 먼 길을 가는 뒷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오늘따라 아힌은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했다.

“누나!”

“어……? 어머, 너 레오 맞니?”

꾀죄죄하던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어디 귀족 가문의 막내 공자처럼 변신하고 돌아온 레오의 모습에 엘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외모만큼은 잘난 유전자를 받은 탓인지, 레오도 이렇게 꾸며놓으니 나중에 어떤 남자로 자라게 될지 몹시 기대됐다.

“우리 레오, 엄청 잘생겼네?”

“헤헷!”

“아이고, 힘들다. 애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잠시 나가서 쇼핑이나 하고 온 주제에 애늙은이 같은 말을 하고 철퍼덕 드러눕는 프레드의 모습에 엘리아는 실소를 흘렸다.

“배 안 고파?”

“네……?”

“잠시만 기다려. 금방 밥 줄 테니까.”

“네?!”

밥을 차리라는 것도 아니고, 밥을 차려준다는 아론의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이들을 만난 중 가장 놀라운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말 미쳤나 봐?

들고 온 장바구니를 들고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하는 아론의 뒷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죽을 때가 다 된 게 확실했다.

“그럼 난 처남하고 대화를 좀 나눠야겠네? 처남, 따라와.”

저건 또 뭐지?

갑자기 가버린 아힌만 보느라 자세히 못 봤는데, 프레드의 손에도 무언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누나…….”

“응?”

레오도 적응이 안 되는 건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울상을 지었다.

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처남. 안 잡아먹어! 걱정하지 마. 난 네 누나만 잡아 먹, 아, 아니 이건 아니고, 크흠! 얼른 가자. 장난감 산 것도 봐야지?”

얼렁뚱땅 말을 돌린 프레드가 요망하게 찡긋 윙크를 날리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레오를 질질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따져 묻기엔 세 공자의 행동이 너무 충격적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레오를 신경 써주는 게 고맙기도 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프레드와 레오가 방으로 들어가고 혼자 남은 엘리아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갑자기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상황이 썩 내키지 않았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엘리아는 주방에서 들리는 덜그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말 아론이 음식을 한다고?

믿기지 않는 현실에 조용히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아론이 뭘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곤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엘리아는 또 한 번 입을 떡 벌렸다.

허! 저 아론이 앞치마를?! 진짜 죽으려나 봐. 어떡해?

어디서 난 건지 어울리지도 않은 꽃무늬 앞치마를 한 남자가 다소곳이 서서 스튜의 간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만든 음식이 맘에 드는지 피식 웃기까지. 더 웃긴 건 그 모습이 또 그렇게나 잘 어울린다는 거다.

“왔으면 이리 와서 맛 좀 봐. 오랜만에 하니까 영 맛을 모르겠네.”

천연덕스럽게 행동하는 남자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음식도 할 줄 알았어?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아론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주춤주춤 다가갔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스튜가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한 숟갈 조심히 떠서 그릇에 담아 호호 부는 낯선 모습에 혹시 아론도 영혼이 바뀐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자, 먹어봐.”

“…혹시 이거 먹으면 저 바로 죽나요……?”

“무슨 그런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얼른 먹어보기나 해. 맛없어도 맛있다고 말하고.”

“피이…….”

하도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놓고는 제 웃음에 놀란 엘리아가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정말 다른 사람 같네. 화내던 모습도, 욕하던 모습도, 지금처럼 편하게 웃는 모습도 다 처음 보는 거야.”

다른 사람. 그게 이제야 티가 나는가 보다. 그래, 상상도 못 하겠지. 다른 영혼이 이 몸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너도 다른 사람 같거든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빤히 보자, 그가 그녀의 콧방울을 톡 치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알아야겠다. 너에 대해서. 평생이 걸리더라도 말이야.”

“대,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주인님은 이런 분 아니시잖아요.”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평생 내 품에 있을 줄 알았는데, 네가 날 버렸잖아.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내가 싫다는데 어떡하나? 아쉬운 놈이 기어야지.”

충격을 연달아 받은 탓인지 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나, 꿈꾸는 건가……? 혹시 창문에서 떨어졌을 때 죽었던 거 아니야?

“그런데 머리 나쁜 건 맞나보네.”

“네……?”

“언제까지 그 주인님 소리를 계속할 건데?”

“아… 습관이 돼서…….”

“마지막이야. 이름 불러. 한 번만 더 주인님 소리하면 그땐.”

“……?!”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이 남자는 언제부터 이렇게 웃음이 헤퍼진 걸까.

“덮쳐버릴 거야. 지금도 힘들게 참고 있으니까 자꾸 자극하지 말라고. 알았어?”

유들유들한 음성으로 온갖 퇴폐미를 줄줄 흘리며 유혹한다. 그리고 역시나 그는 틈을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쪽!

가벼운 버드키스일 뿐인데 엘리아의 얼굴이 펑 터질 듯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이놈들이 심장을 터뜨려 죽이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