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 끊임없는 죽음의 손길 (13/18)

13장. 끊임없는 죽음의 손길

불그스름한 불빛.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 아래 칸마다 어두운 흑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지하인가?

쾌쾌한 곰팡내, 술과 토사물이 섞인 것 같은 역한 냄새와 남녀가 흘린 체액의 냄새까지 섞이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대체 여긴 어디지?

엘리아는 코를 틀어막고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아앙! 흐으응! 더 세게! 아이고, 나 죽네!”

“이년아! 더 조이라고! 흐억, 흐억!”

“흐아앗! 하응, 하응!”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런 음탕하고 더러운 소리가 들리는 곳이. 커튼이 드리워진 모든 곳에서 남녀의 신음이 화음을 이루듯 시끄럽게 들렸다. 문득 호기심이 생긴 엘리아는 옆에 있는 흑색 커튼을 살짝 들추었다. 그러자 웬 남녀가 뒤엉켜 몸을 섞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헉! 뭐야?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육중한 남자 아래 깔려 신음을 흘리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밝은 갈색 머리칼에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한눈에 봐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뭐에 취한 듯 생기를 잃은 동공을 보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홀린 듯 바라보자 별안간 그 여인이 씩 웃는다. 당황한 나머지 얼른 커튼을 내리자, 안에서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응, 저년이 지금 뭘 훔쳐보는 거야? 여기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얼른 가서 수건이나 빨아 와!”

“왜? 누가 봤어?”

“아니야. 하던 거나 얼른 마저 해. 힘드니까.”

하? 지금 나한테 시킨 거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는 찰나, 눈앞으로 무언가가 총총총 뛰어 나갔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밝은 갈색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무에 그리 바쁜지 짧은 다리로 다급하게 어딘가로 향했다.

아무래도 사창가 같은데. 이런 곳에 아이가 왜 있는 거지?

엘리아는 서둘러 아이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내보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아이의 뒤를 따라 나오자, 밝은 빛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찡그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좁은 마당 구석에서 아이가 무언가를 열심히 빨고 있었다.

“얘! 꼬마야.”

안 들리나?

제법 큰 소리로 불렀건만 여자아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하던 일에만 몰두했다.

“저기, 꼬마!”

“엘리아!”

다시 한번 아이를 부르는 동시에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화들짝 놀란 엘리아가 뒤를 돌자 아까 봤던 그 여인이 사납게 눈을 치켜뜨곤 성큼성큼 다가온다.

뭐, 뭐야? 아까 봤다고 따지러 온 건가?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 어……?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자신을 지나 열심히 수건을 빠는 아이에게로 다가가 우악스럽게 손목을 잡아끌어 일으켰다.

“너, 거기 왜 들어온 거니?”

“…….”

아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르르 떨기만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게 당장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무는 게 울음을 참는 것도 같았다. 한없이 작아 보이는 연약한 아이를 다그치는 여인의 모습에 불뚝 화가 끓어올랐다.

아무리 정신이 나갔더라도 그렇지, 이런 더럽고 추잡스러운 곳에 저런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은 것도 모자라 저렇게 학대하다니!

넌 오늘 뒈졌어!

씩씩거리며 소매를 걷어 올린 엘리아가 막 한 걸음 내디디려던 순간이었다.

“엄마, 배고파요.”

“흐음, 저 손님 가면 밥을 준다고 했을 텐데?”

“아니요……. 저 말고, 엄마 배 속에 있는 내 동생 말이에요.”

뭐……? 동생? 임신했다고?

아이의 말에 깜짝 놀란 엘리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아이를 위협하는 여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직 배가 안 나온 걸 보니, 아이의 말이 맞는다면 임신 초기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임신한 여자가 몸을 팔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운 눈으로 엘리아는 아이와 엄마라고 불린 여자를 번갈아 봤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인 걸까. 여인의 눈빛이 찰나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든다.

키가 작은 아이는 여인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그저 겁에 질린 듯 땅바닥만 쳐다보며 자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릴 뿐.

한번 안아주지. 왜 저렇게 모질게 대하는 거야…….

두 모녀를 보고 있자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도 아이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애틋해 보이는데.

하지만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여인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냉담한 음성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여전히 어리석구나. 이 애가 왜 네 동생이니? 너와 이 아이는 아비가 달라. 그러니까 네 앞가림이나 잘하렴.”

냉정하기 짝이 없는 말. 아이는 여전히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후우… 잘 들어, 엘리아. 오늘 넌 이곳을 나갈 거다.”

“…….”

여인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래도 엄마라고 여기에 오래 둘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서 열심히 살아. 그리고 이젠 널 안 봤으면 좋겠구나.”

“엄마……?”

여인의 말뜻을 이제야 알아들은 듯, 아이는 깜짝 놀란 눈으로 여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설마 하는 아이의 눈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엘리아, 앞만 보고 가. 너는 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다신 여길 찾아오면 안 돼. 알았니?”

“엄마… 싫어요. 저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제발, 버리지 말아요. 네? 말 잘 들을게요. 다시는 엄마 일하는 데도 안 갈게요.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요! 엄마!”

여인의 옷자락을 꼭 붙든 고사리 같은 손이 간절해 보였다. 아이를 내보내는 게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엘리아는 아이가 몹시 안쓰러웠다.

그 순간.

뭐, 뭐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한 남자. 두 모녀에게 다가간 남자가 아이를 들쳐 메곤 아이의 필사적인 버둥거림은 아랑곳없이 몸을 돌려 마차에 태웠다.

집사……? 분명 공작령 본성에서 봤던 집사였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엄마! 엄마아! 제발! 싫어! 안 갈 거야! 엄마! 엄마아!!”

필사적으로 악을 쓰는 아이의 절규가 메아리치다 이내 사라졌다. 아이가 사라지자 꼿꼿하게 서있던 여인이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엘리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거기다 여인이 불렀던 ‘엘리아’란 이름에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다.

“흐흑, 엘리아. 흐흑. 우욱! 컥!”

피를 토하는 여인. 그렇게 차갑게 굴어놓고 아이가 떠나자 가슴을 치며 우는 여인.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엘리아’라는 아이.

대체 난 뭘 보고 있는 거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힘겹게 걸음을 떼고 주저앉은 여인의 앞에 다가가 천천히 앉았다.

“저기…….”

엘리아의 부름에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피부에 밝은 갈색 머리칼. 그리고 생기는 잃었지만 맑은 벽안. 여인은 누군가와 아주 많이 닮았다.

“당신은…….”

누구…세요? 그리고 저 아이는 누구인가요……?

그리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미 머리로는 이들이 누군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눈물과 하품은 전염된다고 하더니, 아마도 두 모녀의 눈물이 옮아 온 모양이다.

투명 인간 취급당하던 좀 전과 달리, 엘리아를 빤히 쳐다보던 여인이 갑자기 빙그레 웃는다. 차갑기 그지없던 여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따스한 미소였다. 멍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자, 여인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물었다.

“행복하니……?”

…아니. 전혀 행복하지 않아.

“날 원망하니……?”

아니. 누군지도 몰랐는걸.

“미안하구나. 나같이 더러운 년 배를 빌려 나와서,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

“엘리아, 이 어미를 용서하지 말아라. 아니, 어미라고도 생각하지 마. 그러면 네 인생이 조금은 더 밝게 빛날 거야.”

아니……. 당신 아이는 이미 죽었는걸.

“얼른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

입가에 묻은 피를 아무렇지 않게 닦아낸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간다. 곧 사라질 듯 보이는 여인의 뒷모습에 엘리아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엘리아는 다급하게 뛰어가 여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엄마.”

엄마……? 왜 이 말이 이리 쉽게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부른 걸까, 아니면 엘리아가 부른 걸까.

“…흐응, 아직도 이렇게 어리광을 피우면 어떡하니.”

“…배 속의 아이, 낳았나요……?”

“…그래.”

“…이름, 이름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잠시 흠칫 떤 여인이 천천히 뒤를 돌아 엘리아를 마주 봤다. 그러곤 자신보다 조금 더 커진 엘리아의 몸을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등을 토닥여준다.

“착한 내 딸.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떡하면 좋으니. 엘리아, 넌 행복해질 거야. 내가 받지 못한 행복까지 다 너에게 주라고 빌어볼게. 그리고 좋은 곳을 보게 해줘서 고맙구나. 석양이 참 아름다워.”

무슨 말이지? 아,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는 거야. 이것도 엘리아의 감정인가…….

심장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자꾸만 물어본다. 이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이름, 이름 알려주세요.”

“훗, 고집은 여전하구나. 후우… 아마 오래전에 죽었을 거다. 찾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름이 뭐냐고요!”

…레오.

“아……?”

신기루가 흩어지듯 여인의 모습도, 마당도, 허름한 건물도, 모든 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따스했던 체온도, 귓가를 간질이던 여인의 숨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모든 게 다 꿈이었다는 듯.

하지만 여인의 마지막 음성과 슬픈 미소는 눈앞에 선연하게 남아있었다.

* * *

짠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죽었던 감각을 하나둘씩 깨웠다. 달칵 소리와 함께 모든 감각이 다시금 사라졌다. 적막감이 흐르는 고요한 감각에 엘리아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을 꾼 건가……. 하, 또 무슨 이런 꿈을.

자면서도 울었는지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닦아내곤 손에 남은 물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래도 엘리아의 어린 시절을 보고 온 것 같았다. 요즘따라 엘리아의 과거로 보이는 꿈을 계속 꾸는 것 같았다. 내게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는 걸까?

어린 엘리아와, 딸을 사랑하면서도 매몰차게 보낸 그녀의 엄마. 그리고 여인의 배 속에 있던 아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한 이름이 가물거렸다.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다 다시 까맣게 지워졌다.

으으… 답답해.

엘리아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 다시금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복잡하고, 채 가시지 않은 감정은 마음을 어지럽혔다. 떠오를 듯 말 듯하는 기억이 짜증스러웠다.

뭐, 중요한 거면 언젠가는 기억나겠지. 하아… 어쨌든 죽지는 않았나 보네.

윽!

뺨은 물론이고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리는 통증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찌나 인정사정 두지 않고 때린 건지, 뺨에 살짝 손을 대보니 퉁퉁 부은 것 같았다.

쯧! 개새끼. 지옥까지 배웅했어야 하는 건데.

이를 으득 갈며 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목이 떨어져 나간 건 내 바람이 환영으로 보인 거였나. 하아… 모르겠다.

엘리아는 뻑뻑한 눈을 다시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아, 그러고 보니 누가 왔던 거 같은데.

다시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시선을 돌렸다. 꽉 닫힌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석양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와아… 아름답다. 모든 설움이 다 잊힐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어? 여긴… 설마?

바다가 있고, 석양이 아름다운 곳.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창문 밖으로 넓게 펼쳐진 수평선이 한눈에 보였다. 처음 와본 곳이지만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하! 나 아르카마디오에 온 거야? 대체 어떻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구해줬더라도 여길 어떻게 알고 데려온 걸까? 혹시, 이곳에 사는 사람이 구해준 걸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뭐가 어찌 됐든 그 힘들었던 여정의 종착지에 도착했다는 게 새삼 감격스러우면서도,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설움이 복받쳤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을 삼키며 노을 지는 석양을 바라봤다. 참, 어이없게도 죽다 살아났는데 저걸 보니 그저 좋다. 눈물은 주룩주룩 흐르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미쳤나 보다. 정말로 미쳤나 봐.

“하하… 이쁘다, 정말 이뻐…….”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리고 악착같이 창밖을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저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린 건지 모르겠다. 약을 먹었나. 결국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때,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눈동자를 도로록 굴려 앞을 보자, 환하게 생긴 남자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잠시 놀란 듯하더니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다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일어났나? 몸은 좀 어떻지?”

“……?”

“흐음, 아직 안 좋은 것 같군.”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은 남자가 자신의 이마에도 손을 올리곤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멍한 얼굴로 반쯤 감긴 눈을 끔벅거리는 엘리아의 표정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상냥한 어조로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네. 그러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놈하고 이 먼 거리를 함께한 거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

“걱정하지 마. 다시는 그놈 볼 일 없을 테니까.”

“…….”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남자가 뭐라고 주절거리는 것 같긴 한데 골이 울려서인지, 데니엘한테 맞은 귀가 울려서인지 남자의 말이 웅웅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점점 심각하게 표정이 바뀌는 남자를 멍하게 바라보다 엘리아는 겨우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 * *

잠든 엘리아를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바라보던 창가에 서서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은빛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그러다 곧 인상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누구세요? 하!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 모른 척할 수가 있는 거야?”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 얼굴이라 자부하고 살았건만, 엘리아의 말 한마디에 존재감 없는 남자로 전락한 에덤은 그 말을 끝으로 잠든 엘리아를 쏘아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전하!”

때를 못 맞춰 들어오는 빅터를 사납게 흘겨보자, 다급하게 들어오던 빅터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꼴이 웃기지도 않았다.

저보다 덩치 큰 놈의 모가지도 거침없이 날린 놈이 제 앞에서만 저리 순둥하게 구는 게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나왔다.

“전하……?”

“왜.”

“그, 그게…….”

“가까이 와서 말하라.”

“네.”

쭈뼛쭈뼛 다가선 빅터가 잠든 엘리아를 힐끗 보고는 한층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세 공자가 도시로 들어왔습니다.”

“흐음, 어디 가서 헤매다 왔길래 이제들 와? 하여간 칼질만 잘했지, 머리 쓰는 놈이 없단 말이야.”

언제 냉기를 폴폴 풍겼냐는 듯 황태자의 얼굴엔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제 주군의 풀어진 기분에 빅터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어 보고했다.

“그런데 공작의 개가 보이질 않습니다.”

“음, 네가 따돌려서 못 쫓아온 거 아니야?”

“분명 저희보다 앞서서 움직인 게 포착됐는데…….”

“그럼 그놈도 다른 곳으로 샜나 보지. 하여간 베르타른 놈들이 다 그렇지.”

황태자 에덤은 몸을 돌려 죽은 듯 잠든 엘리아를 바라봤다. 돈을 처바른 게 안타까울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마저도 빛바래 보이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여자. 하녀라는 걸 알면서도 제 심장을 여러 번 철렁이게 만든 여자.

무슨 이유인지 그녀는 공작가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녀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공작과 세 공자. 거기다 자신마저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이 먼 곳까지 이 여인을 따라왔다.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여인이 아닌가? 제국에서 최고의 권위와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 지금 이 여인 하나 잡겠다고 혈안이 된 걸 보면 말이다.

상황을 곱씹을수록 기가 막히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연회 때처럼 꾸미지도, 화려한 옷을 입지도 않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인 것도 모자라 볼썽사납게 퉁퉁 부었는데도 자꾸만 홀린 듯 눈이 간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도대체 뭘까……? 저 여인은?”

“이제 어쩌실 겁니까?”

“흐음, 그러게. 어떡할까. 데리고 있으면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왜 하필 하녀인지. 폐하께서 아시면 노하시겠지?”

“절대로 안 됩니다. 폐하께서 아시면 폐위를 논하실 수도 있습니다.”

“흥, 그러고도 남겠지.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아들인데. 우리 폐하께선 왜 이리 오래 사시는지 모르겠군.”

“전하!”

눈빛만으로 빅터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든 에덤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목소리 낮춰라. 깨면 어쩌려고 그래.”

“죄송합니다.”

“알아보라는 건.”

“내일쯤 연락이 올 것 같습니다. 연락 오는 대로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에덤이 나직한 음성으로 제 부하를 불렀다.

“빅터.”

“네, 전하.”

“정부로 숨겨둬도 폐하께서 아실까?”

“…….”

에덤의 말에 빅터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갖고자 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야 마는 주군이다. 만약 엘리아를 갖겠다 마음먹으면 세 공자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길일 것이고, 황태자라는 자리마저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빅터는 이 난다 긴다 하는 남자들을 이리 미친놈처럼 만든 엘리아를 힐끗 쳐다봤다. 아름다운 꽃엔 가시가 있는 법. 빅터의 눈엔 엘리아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놈들을 잘 감시해라. 그리고 다른 곳에 거처를 하나 더 마련해 놔.”

“네.”

“이번에는 늦지 않고 잘 찾아올 수 있을까? 너무 늦으면 내 인내심이 바닥날 텐데 말이야.”

몸을 돌려 창가에 기대선 에덤의 시선이 또다시 잠든 엘리아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는 묘한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하는 양, 비죽 웃는 에덤의 모습에 빅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여긴 또 어디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제 눈떴던 곳이 고급 호텔 스위트룸 같은 분위기였다면, 여긴 누군가 사는 평범한 가정집인 것 같았다.

잠시 눈을 떴다가 잠들길 반복했다. 얼마나 잤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만져보니 부기가 가라앉았다. 몸의 통증도 없고, 시야도 또렷하게 보이는 걸 보니 꽤 오래 잠들었던 모양이다.

엘리아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까딱까딱 움직여 몸의 상태를 파악했다. 발가락부터 하나하나 움직이며 몸 풀기를 반복하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번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잠시 다리가 풀렸지만, 곧 제대로 설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움직여 창가로 다가갔다. 난간을 붙들고 아무 생각 없이 앞을 본 엘리아는 눈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에 입을 쩍 벌렸다.

우와… 예쁘다.

하늘과 맞닿은 선이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에메랄드 바다 빛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배가 지나가며 큰 너울을 만들고, 그 아래로 굼실굼실 물이랑이 보석 가루처럼 부서져 내렸다.

여태껏 봤던 도시와는 전혀 다른,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전경에 엘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설렜다.

“정말 아르카마디오인가 봐. 내가, 내가 꿈꾸던 그런 도시야. 정말 너무 예쁘잖아!”

“알고 온 게 아니었나 보군.”

“……?!”

느닷없이 들린 남자의 음성에 엘리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선 은발 미남자의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때 그 남자다. 그런데 낯이 익은데. 분명히 봤는데, 어디서……. 어? 황태자?

“에덤.”

“…….”

엘리아의 머리통 위에 뜬 물음표를 본 걸까? 그가 먼저 제 소개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물음표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떠오른 게 아니었다. 간발의 차로 그를 알아본 것도 잠시, 지금 그가 왜 여기 있는지가 의아했다.

“에덤도르앙 데 슈얼데르 오딧세 오스카니아.”

여전히 긴 이름. 그렇게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되는데.

무감한 표정으로 제 이름을 줄줄이 읊는 남자를 쳐다보던 그녀가 돌연 사색이 되었다.

“어떡해!”

“왜 그러는 거지?”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경악하는 엘리아의 행동에 에덤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황태자인 자신이 먼저 제 소개를 했는데도 그녀는 인사는커녕 또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전하, 혹시 같이 오신 분 계신가요?”

“뭐?”

“그, 그…….”

문득 떠오른 남자에 어찌나 당황했는지, 제 앞에 황태자가 왜 있는 건지 의아해하던 의구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차마 다시 묻지도 못하고 주저하는데, 그녀가 궁금해하던 남자가 때마침 들어왔다.

“전하!”

“헉!”

“어? 일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빅터의 물음에도 당황한 엘리아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오래전 헤어진 연인과 마주해 충격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아니, 감격인가? 에덤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이건 도대체 뭔 상황인 건지. 기껏 이름까지 얘기해 줬건만, 대답은커녕 딴 놈을 찾는다? 그것도 모자라 빅터를 보고 얼굴까지 붉히면서?

에덤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리고 그 살기 가득한 눈빛은 빅터를 향했다.

급한 보고차 다급하게 들어온 빅터는 저를 보며 당황한 엘리아나, 저를 향해 냉기를 흩뿌리는 황태자의 표정에 또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은 기사의 감으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죄, 죄송해요!”

“네, 네?”

뜬금없이 허리를 반 접어 사과하는 엘리아. 그 모습에 에덤의 표정이 더욱 살기등등해진다. 당황한 빅터는 제 주군의 눈치를 살피며 엘리아에게 물었다.

“뭐, 뭐가 말입니까……?”

“그날 꼭 기다리라고, 금방 돌아오시겠다고,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씀하고 가셨는데, 제가 먼저 가버려서요. 혹시 많이 찾으신 건 아니죠?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셨는데, 제가 사정이 있어서……. 흑, 정말 죄송합니다.”

“네에?”

엘리아의 두서없는 말에 빅터는 당황했고, 에덤의 입꼬리는 비죽 올라갔다. 그러나 눈빛은 더욱 형형하게 번뜩거렸다.

“흠,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빛이라. 어떤 눈빛이었는지 궁금한데?”

“아, 아닙니다. 전하!”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줄 줄도 아는 남자였군. 내가 너를 잘 모르고 있었나 봐.”

“저, 전하!”

에덤의 입이 열릴수록 빅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다시 한번 엘리아가 위험한 여자라는 걸 실감한 빅터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푹 숙이는 빅터의 행동에 그가 아직도 많이 화난 거라 생각한 엘리아는 더욱 간절한 얼굴로 빅터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듯 애처로운 표정으로 두 손 모아 빅터를 바라보면서도 엘리아의 머릿속은 팽팽 돌아갔다. 다시는 안 볼 줄 알았건만, 여기서 빅터를 딱 마주칠 줄이야. 이젠 혼자 살아가야 하는데 최대한 적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음식까지 죄 싸 들고 도망쳤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엘리아는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것도 정말 아주 괜찮다는 말을. 그래야 또다시 자신을 잡으러 오지 않을 테니. 엘리아는 오해하고 있었다. 그 일로 빅터가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이라고.

“절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같이 밥도 먹고 대화도 하고 웃으면서 헤어지고 싶었지만, 제가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이…….”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그, 음, 그러니까 지, 진심이 아니었고, 전 그저 전하의 명령으로…….”

찰싹!

“읍!”

아, 분명 괜찮다고 했지? 용서한 게 맞는 거지? 그런데 왜 황태자는 입을 막고 저래?

완벽하게 용서받을 타이밍이었는데, 황태자가 느닷없이 빅터의 입을 치는 바람에 뭔가 찜찜하게 돼버렸다. 다시 묻기는 그렇고, 그냥 용서받은 셈 치기로 했다. 괜히 되물어서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뭐 좋은 일이라고.

그런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서릿발같이 차가워진 황태자의 분위기나 한 대 맞고 눈치를 보는 빅터나 뭔가 숨기는 듯한 기분이랄까?

엘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곧, 언제 냉기를 폴폴 풍겼냐는 듯 황태자가 생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오래 누워있었으니 바람이라도 쐬지 않겠나? 바닷바람을 쐬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야. 그대도 궁금한 게 많을 테고, 나도 궁금한 게 많으니 나가서 얘기 좀 하지. 걸을 수 있겠나?”

“…….”

궁금한 것… 나한테 뭐가 궁금한 거지? 난 뭘 궁금해해야 하고? 설마… 나를 잡으러 온 게 아니고 쫓아온 건가? 아니, 왜?

그제야 뭔가 이상했다. 밥 한 끼 들고 도망갔다고 빅터가 황태자에게 일렀을 리는 없고… 그러고 보니 빅터는 처음부터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준비를 도울 하녀를 올려 보낼 테니 준비하고 나오도록 해.”

“…….”

하녀에게 하녀를 붙여준다니. 참 웃기지도 않은 얘기였다.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가 또 말했다.

“혹시 배 타봤나?”

“배요……?”

“바다에 왔으면 배도 타봐야지. 기분 전환이 될 거야. 황태자인 나와 단둘이 있는 영광을 주도록 하지. 물론 에스코트도 직접 해줄 거야. 그러니까 평생 잊지 말도록.”

순간, 엘리아의 눈빛이 흠칫 떨렸다.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얘기했지만, 엘리아는 그의 말이 장난으로 들리질 않았다.

트라우마라도 된 걸까? 어디도 도망칠 수 없는 곳에 남자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게 문득 두렵게 느껴졌다.

배는 정말로 타보고 싶었지만, 크게 한 번 당하고 나니 쉽사리 응하기가 어려웠다.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빅터를 쳐다봤다. 마치 함께 가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차도 공짜로 태워주고, 밥도 사주고,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조금의 음흉한 눈빛도 보이지 않았던 남자라 그런지 눈앞의 황태자보단 그가 더 의지가 되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미심쩍은 구석이야 있었지만, 어쨌거나 둘보다는 셋이 있는 게 안심될 것 같았다.

“하, 빅터하고 그새 정이 많이 든 모양이야?”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정이라니요! 전하! 억울합니다!”

갑자기 소리를 버럭 내지르는 빅터의 얼굴엔 사뭇 비장함마저 서려있었다. 살고 싶다는 갈망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흐음, 좋아. 나와 단둘이 있는 영광이 불편한 모양이니 빅터도 함께 타지.”

“전하! 전 정말!”

“나가. 가서 배나 준비해.”

일순 낮게 가라앉은 황태자의 싸늘한 음성에 빅터는 울상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크흑, 네. 알겠습니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빅터의 뒷모습을 보며 엘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 * *

볼 때와는 다르게 바다 위에 뜬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나중에 집을 구하고 여유가 있으면 이런 고급스러운 배 한 척도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엘리아는 히죽 웃었다.

그런데 왜 뭔가 허전하지……?

“…흐억! 맞다. 내 가방!”

이제야 생각난 가방의 행방에 엘리아는 난간 위에 걸치고 있던 몸을 다급하게 돌리다, 너울에 휘청이는 배의 움직임에 덩달아 비틀거렸다.

“꺄악!”

“흠, 손이 많이 가는 여인이군.”

“헉! 가, 감사합니다.”

기우뚱한 몸이 난간 밖으로 반쯤 기울어지는 순간, 에덤의 손에 이끌려 그녀는 물고기 밥 신세를 겨우 면했다. 하지만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녀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본의 아니게 에덤의 품에 안기게 된 엘리아는 뻣뻣해진 몸을 삐거덕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일수록 에덤은 더욱 힘주어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제 놔주셔도…….”

“두 번이나 그대의 목숨을 구했군. 이 정도면 인연인가? 혹시 일부러 위험을 만드는 타입은 아니지?”

“…….”

두 번? 아, 황태자가 날 구해준 거였나?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도 엘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현실로 돌아왔다. 맞닿은 가슴에서 요동치는 그의 심장 박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참,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도 못 들었군. 빅터한테는 그리 절절하게 사과까지 했으면서 말이야?”

물론 황태자가 어떻게 자신을 구하게 된 건지, 여기는 어떻게 데려온 건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로 대화가 길어져 봤자 불편한 건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감사 인사로 마무리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음, 별로 진정성이 느껴지질 않는데.”

“…네? 진심인데요?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한데…….”

“그런 거 말고, 난 다른 감사의 인사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말뿐인 사과는 별로 믿지 않는 편이라서 말이야.”

“그, 그럼 뭘 어떻게…….”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에덤의 팔에 아까보다 더 힘이 실렸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 엘리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가 뭘 원하는 건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리아를 본 남자들은 모두 똑같았다. 그녀의 몸을 탐하고 싶어 하고, 갖고 싶어 한다. 아직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쫓아온 걸 보면 황태자도 분명 음험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날 봐.”

“…전하. 제발…….”

“제발? 여기서 ‘제발’이란 말이 왜 나오는 거지? 내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

“놔주세요. 제발…….”

“…하! 하하하!”

뭐야? 갑자기 왜 웃는 건데?

엘리아의 간절한 음성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에덤이 갑자기 호탕하게 웃었다.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는 남자의 머리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미친놈 같긴 한데 잘난 것 또한 세 공자 못지않은 남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에덤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힘들게 세 공자한테서 벗어났는데, 또 다른 무시무시한 놈의 노리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거기다 황궁이라면 공작가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을 테니까. 남자 얼굴에 팔려 제 팔자 꼬기에는 너무 많은 경험을 한 그녀였다.

웃음이 뚝 끊기고 가까이 닿아온 얼굴에 엘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마주 봤다간 선을 넘을지도 모를 일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아직 제 몸을 믿을 수가 없었기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런 매력이었군. 홀려놓고 아닌 척. 이런 얼굴로 아니라고 하니, 믿음이 안 가는데? 세 공자도 이렇게 홀린 건가?”

색기 흐르는 얼굴, 아니라고 하면서도 막상 입을 맞추면 순종적으로 변할 것 같은 엘리아의 이상한 매력에 에덤의 정복욕이 더더욱 들끓었다.

“전하.”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다른 이도 아니고, 공작가의 하녀와 제국의 황태자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런가?”

“네. 전하께서는 고귀하신 분과…….”

“그래. 그게 맞는 건데, 그대가 날 거부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말이야.”

“…네?”

어느새 에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서늘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짜증스러운 눈빛이다. 그의 변한 모습에 엘리아의 심장이 불안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태자가 하녀에게 흔들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그대가 거부할수록 내가 더 미치겠으니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

유혹적인 눈빛으로 다가오는 황태자의 얼굴에 엘리아는 숨을 홉 들이켰다.

“그대.”

“…….”

“감사 인사는 그대의 입술로 받고 싶군.”

지나치게 가까워진 남자의 은빛 머리칼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조금이라도 센 바람이 불어 몸이 휘청인다면 바로 닿을 거리에 멈춰 선 남자의 입술이 지나치게 유혹적이다.

시원한 바닷바람보다 제 입술을 간질이는 남자의 숨결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심장은 더욱 빠르게 요동쳤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불안한 떨림이었다.

무서워.

유혹적이었지만, 두렵다. 반항하면 또 때리는 건 아닌가, 겁이 났다. 점점 몸의 떨림이 거세진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아…….

그의 손이 뺨에 닿았다. 순간, 귓가에 이명이 들렸다. 온몸이 달달 떨리고 시야가 뿌옇게 물든다. 일순, 황태자의 얼굴이 데니엘로 보였다.

무서워. 또 때릴 거야. 도망쳐야 해.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오는 그의 붉은 입술이 아랫입술에 닿는 순간.

“싫어!”

엘리아의 손이 에덤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동시에 파도가 출렁이고, 휘청이는 뱃머리에 그녀의 몸이 다시 갑판 위 난간 밖으로 기울어졌다.

“엘리아!”

“꺄아악!”

풍덩!

-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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