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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추격전 (12/18)

12장. 추격전

퐁뒤르센에 도착한 엘리아의 입이 또 한 번 쩍 벌어졌다. 제도의 광장을 봤을 때보다 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이쁘다!”

“배고픈데 식사라도 같이할까요?”

“네?”

“제가 사죠.”

“……?”

“비싼 거로.”

“흠, 좋아요. 이것도 인연인데 밥은 먹고 헤어지죠. 아, 마차도 잘 얻어 탔습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탓일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예의 바른 어린이처럼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하곤 생긋 웃자, 그 또한 마주 웃었다.

그들은 곧 자리를 옮겨 가장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빅터가 도로 일어선다. 그녀가 멀뚱멀뚱 바라보자 그가 제 볼 일을 말했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몹시 급한 일이라. 음식 값은 치렀으니, 혹시 음식이 나오면 먼저 드십시오. 금방 오겠습니다.”

붙잡을 새도 없이 갑자기 자리를 뜬 빅터를 멍하게 바라보던 엘리아의 눈빛이 일순 번뜩거렸다. 마침 음식이 막 나오려는 참이라 엘리아는 다급하게 웨이트리스를 불러 음식을 포장했다. 그리고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와 마차 보관소 옆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나 빅터가 저를 보진 않았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막힌 숨을 토해 내곤 벽에 기댔다.

아이고, 내 명에 못 죽겠네.

정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툭하면 심장이 떨어지고 놀랄 일만 있으니, 이러다 찬란한 미래를 눈앞에 두고 객사할 것만 같았다.

“후!”

크게 심호흡한 엘리아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제도에서처럼 멍청하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는 어딘가 매우 수상했다. 그리고 황태자의 사람이기에 백퍼센트 믿을 수가 없었다.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던 엘리아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됐다. 후줄근한 차림에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배가 고픈지 길바닥에 주저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덟아홉 살이나 됐으려나. 어린아이들을 보니 왠지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러다 자그마한 아이 하나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저 순수한 눈이면 본능적으로 알겠지.

시선이 마주친 아이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손짓하자, 아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다시금 쳐다본다. 마치 ‘지금 저 부르는 거예요?’라는 양,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다.

그래, 너!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키곤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가 냉큼 뛰어온다.

어휴, 낯선 사람이 오라는데 그리 덥석 오면 어쩌니. 위험한 세상에. 쯧.

한껏 다정한 얼굴로 아이를 꾀어놓고 막상 꼬임에 넘어오는 아이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야 아이에게 해를 입히려고 부른 건 아니지만. 혹여나 다른 사람이 이렇게 꾀어도 또 냉큼 따라갈 수도 있는 일이니, 괜스레 걱정됐다.

가까이 다가온 아이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욱 작고 앳돼 보였다. 이 작은 아이를 이용하자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꼬마야?”

“네……?”

“누나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래?”

“…무슨 부탁이요?”

“저기 마차 보관소 가서 가장 착해 보이는 아저씨한테 서쪽으로 가는 도중 가장 큰 도시가 어딘지 물어봐 줄래?”

“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관소와 그녀를 번갈아 보던 아이가 갑자기 눈을 곱게 접어 웃는다. 저와 같은 새파란 눈이 아이와 몹시도 잘 어울렸다.

귀, 귀여워!

아이의 해맑은 미소에 따라 미소가 그려지는 찰나,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럼 뭐 주실 건데요?”

“뭐……?”

“배가 고파서……. 며칠 굶었거든요.”

일순 영악하게 눈을 빛냈던 아이가 금세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배를 쓱쓱 문질렀다. 나이답지 않게 금세 상황에 따라 얼굴이 바뀌는 아이를 보니 씁쓸했지만, 그리 나쁘게만 보인 건 아니었다. 아이도 살기 위해 터득한 방법일 테니.

“알아봐 주면 누나가 이거 줄게.”

제도에서 넉넉하게 산 빵 봉지를 쓱 들어 올리자, 아이의 눈빛이 금세 해맑게 반짝거렸다. 침을 뚝뚝 흘릴 것처럼 넋을 놓고 있던 아이가 빵 봉지를 살짝 흔드니, 쏜살같이 보관소로 내달렸다.

그러곤 다시 표정을 바꿔 애절한 얼굴로 보관소에 있는 한 사내를 불러냈다.

캬…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다.

엘리아는 일단 사내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폈다.

음, 일단 인상은 나빠 보이지 않고, 오호,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도 꽤 자상한 것 같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아이가 꾸벅 인사하자, 사내가 연한 미소를 보이며 아이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흩트렸다.

저 정도면 나쁜 놈 같지는 않은데?

재빠르게 달려오는 아이를 보며 천천히 오라고 손짓했지만, 아이는 아랑곳없이 우다다 달려오더니 과장되게 숨을 헐떡거렸다. 마치, 엄청 열심히 심부름했다고 티 내는 모양새다.

“흐응. 그래, 알아왔니?”

“헉, 헉. 네. 알아왔어요. 허억, 허억.”

얼씨구? 하!

“그럼 말해 줄래?”

연신 헉헉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은 엘리아는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꼬질꼬질한 것치곤 밝은 갈색 머리칼이 의외로 부드럽다. 손길이 어색한지 잠시 멈칫거리던 아이가 빠끔히 고개를 들어 올리고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스핑투아라는 곳이래요. 그런데 세 밤 자야 도착하는 곳이래서 중간에 작은 도시는 거쳐야 한대요.”

“음, 그래……?”

바로 가면 좋겠지만, 마부가 잠 안 자고 3일을 꼬박 달릴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기에 엘리아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출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여차하면 다른 마차를 타지, 뭐.

“혹시 너랑 얘기한 사람은 어때 보였어?”

“네……?”

“음, 착해 보인다거나, 아니면 나쁘게 보인다거나?”

“아… 데니엘 아저씨는 엄청 착해요.”

“응……? 데니엘 아저씨? 혹시 너랑 아까 얘기하던 사람이 데니엘 아저씨야?”

“네!”

아이의 표정을 보니 이번에는 연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인 것 같았다.

“아는 사이니?”

“네. 가끔 빵도 주고, 쿠키도 주셨어요!”

아이의 순수한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긴, 동물이나 아이들에겐 먹을 거 주는 사람이 최고지.

착한 사람을 고르는 아이의 잣대가 꽤 단편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로 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왠지 나쁜 맘을 먹진 않을 것 같았다.

“음,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래?”

“네……?”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걸 보니, 빵 하나로 더럽게 시켜 먹는다고 불만인 모양이다. 살짝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습을 드러낼 순 없으니.

“가서 데니엘 아저씨한테 마차 가지고 저어기 뒤에 있는 분수대 앞으로 와달라고 전해줄래? 누나가 사정이 있어서 그래.”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걸까? 아이의 눈이 대번 가늘어졌다. 그러곤 수상쩍은 눈으로 아래위를 천천히 훑는다.

엘리아는 맹랑한 그 눈빛에 처음에 했던 아이에 관한 생각을 바꿨다. 가만 보아하니 어디 가서 사기당하지는 않을 것 같은 게, 어쩌면 자신보다 더 똑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얼른 다녀오면 이거 너 다 줄게.”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볼 땐 언제고, 다시 빵 봉지를 달랑달랑 흔드니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양 아이의 표정이 헤벌쭉 풀어진다.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어차피 다 줄 생각이었는데, 하나만 주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자, 얼른 다녀오렴?”

“네!”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가 아까보다 더, 이번엔 정말로 잽싸게 와다다 뛰어갔다. 그러곤 데니엘이란 남자에게 손짓, 발짓해 가며 부탁한 말을 전해주는 듯 보였다. 그러곤 또 와다다 뛰어오다, 별안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응? 왜 저러지……?”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가 이내 자신이 있던 무리로 되돌아갔다. 그러곤 무언가를 챙기는 듯하더니 또 우다다 뛰어온다.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아이가 다시 해맑게 웃으며 말을 전해줬다.

“얼른 가보세요. 그쪽으로 가신다고 했어요.”

“그, 그래……? 음, 고마워. 네 덕에 살았구나.”

“네?”

“아니야. 자, 이거 다 가져가서 먹어. 사이좋게 나눠 먹어야 해? 아, 네가 두 개 더 먹고. 이건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손을 쭈뼛쭈뼛 들며 정말 이 많은 빵을 다 가져도 되는 거냐고 묻는 듯 쳐다본다. 과장되게 연기할 땐 언제고, 지금은 또 한없이 순수하다. 그 말간 얼굴에 엘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손에 빵 봉지를 건네주었다.

“고맙다. 참, 네 이름이 뭐니?”

“…레오요.”

“레오. 멋진 이름이네? 지금처럼 씩씩하게 자랐으면 좋겠구나. 훗.”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쓸어주다 구부렸던 허리를 세우고 엘리아는 몸을 돌렸다. 얼른 약속 장소로 가서 마차를 타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잡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자그마한 아이가 무언가를 쥔 손을 내민다.

“누나.”

“응……?”

“이거…….”

“이게 뭐야? 이거 나 주는 거야?”

“네. 빵 값이에요. 제가 일한 것보다 더 많이 주셨으니까……. 오늘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좋은 일이 생겼나 봐요. 그러니까 누나에게도 저처럼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도 전에 아이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꾸벅 인사하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엘리아는 잠시 제 손에 들린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를 힐끗 돌아보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얼른 마부와 약속한 장소로 달려갔다.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마치 ‘네가 날 부른 게 맞냐?’라는 눈빛이라 다급해진 엘리아는 아이의 이름인 ‘레오’를 말했다.

그러자 금세 예의 바르게 마차 문을 열어주곤 마부가 생긋 웃었다. 후다닥 마차에 몸을 실은 엘리아는 창가에 커튼을 치고 작은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곧 마부 데니엘의 음성이 들렸다.

“출발하겠습니다.”

하아…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불안정한 움직임이 그녀에겐 지금 가장 안정적인 기분을 선사했다.

마차가 출발한 지 시간이 꽤 지나자, 엘리아의 즐거운 콧노래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간혹 소리가 끊길 때는 냠냠, 쩝쩝, 음식 씹는 소리가 날 때였을 뿐.

호오… 비싼 집이라 그런지 정말 맛있네?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먹는 엘리아의 얼굴에는 후련하고 통쾌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러다 돌연 낯빛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설마, 다 싸 들고 왔다고 칼 들고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혹시 실수한 게 없었나, 아까의 상황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물론 송아지 안심스테이크는 야무지게 씹으면서 말이다.

“흐음, 네잎클로버라. 여기도 이런 게 있구나. 레오… 참 똘똘한 아이였는데.”

어느새 음식을 뚝딱 해치운 엘리아는 부른 배를 살살 문지르며 레오가 준 네잎클로버를 손에 쥐고 핑그르르 돌렸다. 정말로 정확히 잎이 네 개다. 참 찾기 힘든 건데. 아이의 선물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고작 빵 몇 개 줬을 뿐인데, 아이에겐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기분이었다. 아이의 말대로 자신에게도 행운이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가방 깊숙한 곳에 소중히 보관했다.

제도에서는 빵집 주인, 그리고 이곳에서는 순수한 아이를 만나 도움도 받고 위안도 받았다. 다음에는 어떤 사람을 만날까, 문득 기대됐다. 창문을 활짝 열고 빠르게 흩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엘리아는 히죽 웃었다. 머리칼이 정신없이 휘날리는 게 꼭 자유로운 새가 되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아주 멀리 훨훨 날아갔으면 좋겠네.”

* * *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여기 긴 로브를 입은 아가씨 한 명 오지 않았습니까?”

“아가씨요? 아니요. 그리고 여긴 아직 문도 안 열었습니다. 우린 점심이나 지나야 일을 시작하거든요.”

“아, 알겠습니다.”

낭패 서린 얼굴로 마차 보관소를 나온 빅터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털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웬 아이가 얼른 고개를 푹 숙인다.

본능적인 감이라고 해야 할까? 빅터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이들이 먹고 있는 빵과 봉지였다.

“흐음, 얘들아?”

“……?”

똘망똘망한 아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빅터를 향했다. 그러더니 곧, 들고 있던 빵을 허리춤에 숨기며 경계 어린 눈빛을 내보였다.

“후우… 뭐 하나만 물어보려고 그러는데, 솔직히 대답하는 아이에겐 더 맛있는 것을 사주마.”

빅터의 꾐에 아이들의 눈빛이 금세 반짝거렸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표정이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혹시, 여기서 긴 로브를 입고 있는 예쁘게 생긴 누나 못 봤니……?”

빅터의 물음에 잠시 벙한 표정을 짓던 아이들이 동시에 레오를 쳐다봤다. 저를 향하는 시선에 잠시 움찔한 레오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린다.

‘흠, 이 아이는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군. 이 빵 봉지는 그녀가 들고 있던 게 분명한데.’

빅터는 재촉하지 않고 아이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나 입을 열 생각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의미 모를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한다. 다시 한번 먹을 거로 유혹하려는 찰나, 그제야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 그 누나, 갔어요.”

“음?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그 누나는 왜 찾아요?”

“…아, 아저씨 애인이거든.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얘기해 주겠니?”

“정말이에요?”

“그래. 아저씨와 결혼할 사람이야.”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정말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레오가 입에 있던 빵을 꿀꺽 삼키고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고렝 마을로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어봤어요.”

“그래……?”

“네, 그런데 전 어딘지 몰라서 모른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쪽으로 뛰어갔어요.”

아이는 어느 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흐음, 그랬구나. 훗, 고맙다. 이걸 줄 테니 맛있는 거 사 먹어라.”

빅터는 동전 두 개를 레오의 손에 쥐여 주고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이가 가리킨 곳을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고랭 마을이라……. 다시 제도 쪽으로 갔다고? 왜?”

레오가 가리킨 곳은 엘리아가 나간 도시의 성문과 정반대쪽이었다.

* * *

퐁뒤르센 마을로 들어오는 흉흉한 기세의 세 남자를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서며 힐끔거렸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세 남자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한 게 누구 하나 잡히면 그대로 모가지가 날아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큰 도시인 만큼 타 지역 사람들이 많이 거쳐 가는 곳이긴 하지만, 그들의 외모나 분위기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위협적인 분위기를 폴폴 풍기면서도 말에 탄 세 남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눈을 형형하게 빛내던 세 공자가 뿔뿔이 흩어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은 각자 해야 할 일이 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프레드는 식당으로 향했고 아힌은 여관으로 갔다. 엘리아가 필연적으로 들를 수밖에 없는 곳부터 뒤지기 시작한 세 공자는 제도에서부터 그렇게 그녀의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찾아왔다.

물론 기사들을 풀어도 될 일이었지만, 세 공자는 직접 나섰다. 기동력 면에서도 그렇고 마냥 편히 앉아 기다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로 움직일까도 싶었지만, 누구 하나 엘리아를 찾으면 혹여 다른 마음이라도 품을까 싶어, 서로 감시하는 차원에 같이 다니는 중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서로를 믿으면서도 못 믿는 그들이었다.

두 형제가 각자 맡은 곳을 가는 동안에도 아론은 퐁뒤르센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곧 말에서 내려 터벅터벅 마차 보관소로 향했다. 그런데 보관소에 도착할 때쯤 작달막한 아이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가 아론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레오, 그 누나는 잘 갔을까?”

“오늘쯤이면 도착하지 않았을까?”

“그러게, 스핑투아까지 3일 걸린다고 했으니까 별일 없었으면 잘 도착했겠지.”

너무 예민한가 보군.

아이들의 시답지 않은 대화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스스로가 짜증스러웠다. 잠을 못 잔 탓이리라. 그러나 보관소로 향하려던 아론의 발은 몇 걸음도 채 못 가 다시 또 멈춰 섰다. 평소라면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들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귀에 박혔다.

“그런데 그때 그 아저씨, 애인 아닌 것 같았지?”

“응. 만약 애인이라 해도 나쁜 아저씨니까 그 누나가 그렇게 도망쳤겠지. 오죽하면 직접 마차도 못 빌리고 레오한테 부탁했겠어?”

“때렸나……?”

작은 머리통을 이리저리 갸웃거리는 마지막 아이의 말에 아론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누구 얘기인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건지.

‘미쳤군.’

남의 일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자신이 고작 길거리 아이들이 떠드는 얘기에 집중했다는 게 어이없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또 한 아이의 음성이 아론의 발을 붙들었다.

“아, 그 누나가 준 빵 또 먹고 싶다. 진짜 맛있었는데. 제도는 빵도 맛, 읍!”

땅바닥에 무얼 쓰는 듯 나뭇가지로 장난치며 친구들의 얘기를 듣던 레오는 일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빠르게 지나치는 발걸음 사이에 비싸 보이는 부츠 하나가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다시 가려던 발걸음이 멈칫했다.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며 엘리아를 떠올리던 레오는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 낯선 남자의 신발을 보며 저도 모르게 친구의 입을 막아버렸다. 아무래도 친구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길한 기분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신발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론의 시선을 받은 레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저런 무서운 살기를 받아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줌이라도 지릴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영리한 꼬마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야, 그, 그거 우리 어, 엄마가 사온 거야!”

“우으웁! 파―! 후우, 후우, 야! 너 갑자기 왜 이래!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에이 씨. 퉤! 그리고 네가 엄마가 어디 있, 웁?!”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또 떠드는 친구의 입을 다시 한번 꽉 틀어막자 눈앞의 사내가 한 발 다가왔다.

“히익!”

아론이 성큼 다가서자 한 아이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부르르 떨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옆에 쪼그리고 앉자, 놀란 마음에 딸꾹질까지 해댄다. 갑자기 끼어든 아론을 본 아이들은 새파랗게 질려 달달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오만큼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똑바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꼬마.”

“…….”

“대답.”

“우,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뭘 아냐고 물은 적 없는데?”

“이익……!”

“흥! 맹랑한 놈이군.”

아론이 손을 들자 레오는 순간 기겁하고 말았다. 꼼짝없이 한 대 맞을 거라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는데 통증이 아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하찮은 너희들을 때릴 것 같나?”

“……!”

슬며시 눈을 뜨자, 남자의 미소가 보인다. 하지만 레오의 눈에는 새빨간 눈동자가 꼭 악마같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제 머리통을 터트릴 것 같은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아무한테나 그렇게 눈을 치켜뜨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 좋은 정보를 알려준 대가라고 생각해.”

다시 한번 머리를 쓱쓱 헝클인 아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번엔 아이들이 더 겁에 질린 얼굴로 바르르 떨었다.

“형, 여기서 뭐 해? 애새끼들은 왜 괴롭히고 있는 건데?”

“뭐 좀 알아냈냐?”

가까이 다가온 다른 두 쌍의 새빨간 눈동자를 본 아이들은 거의 숨넘어갈 듯 하얗게 질렸다. 아이들의 겁먹은 표정에 피식 웃은 아론이 더는 볼일 없다는 양 몸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스핑투아로 간 모양이군. 서두르는 게 좋겠어.”

“스핑투아? 얜 도대체 어디를 가고 있는 거야?”

“음, 가는 쪽이 서쪽인 걸 보니, 서쪽 끝까지 도망치려는 모양이지. 일단 가자.”

이미 확답을 얻은 듯 움직이는 세 남자 뒤로 용맹한 꼬맹이의 고함이 버럭 울렸다.

“스, 스핑투아로 안 갔어요! 고, 고렝 마을로 갔다고요!”

“쟤 뭐라는 거야? 쟤 엘리아 봤대?”

프레드의 물음에 아론이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 레오를 마주 봤다. 여전히 바르르 떨면서도 눈은 형형하게 빛내는 꼬맹이를 보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버릇없는 게 마음엔 안 드는데. 그래도 용기 하나는 가상하게 봐주지. 하지만 꼬마야?”

아론은 다시 아이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아까 내가 경고했잖아. 용기 있는 건 좋은데 목숨 아까운 줄은 알아야 한다고.”

또 한 걸음 다가서자 레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번뜩이는 눈빛만큼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를 닮은 네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더 살려주지.”

“어? 그러게? 저 꼬마 어딘가 엘리아랑 비슷한 느낌이네?”

프레드의 말에 아힌까지 레오를 바라봤다. 세 쌍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쳐다보니 결국 공포심을 이기지 못한 레오가 철퍼덕 주저앉는다.

겁먹은 것도 꼭 엘리아 같군.

처음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갈수록 그리움이 커졌다. 화난 만큼 보고 싶은 마음도 비례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를 닮은 아이를 보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씩 웃은 아론은 물끄러미 레오를 쳐다보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제 갈 길로 향했다.

그제야 겁에 질렸던 아이들이 레오 곁으로 몰려들었다.

“레, 레오! 괜찮아?”

“흐으…….”

공포에 휩싸였던 레오의 눈동자에 금세 분기가 가득 차올랐다. 마치 소중한 것을 빼앗긴 양, 아이의 눈에선 분노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제 실수로 엘리아가 저 남자들에게 잡힐까 봐 미안하면서도 불안했다. 제발 멀리멀리 도망갔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 *

그 시각, 세 공자와 겁에 질린 아이들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을 멋스럽게 넘긴 남자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하녀에게 대체 뭐가 있길래, 여자라면 돌같이 보던 저 세 공자가 저렇게 미친놈들처럼 찾아다니는 걸까?”

문득, 마차에서 보았던 엘리아가 떠올랐다. 그녀의 외모는 자신이 봤던 어떤 레이디보다 아름다웠다. 자신조차 엘리아를 처음 보는 순간 넋을 잃었을 정도였으니.

두 번째로 흥미가 간 건 세 공자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여자라면 쳐다도 안 보던 세 공자가 그녀를 귀애하는 건지 궁금했다.

거기다 수많은 귀족이 있는 앞에서 그 아론이 그녀의 입술에 입까지 맞추었으니. 그때의 놀라움은 지금 생각해도 몹시 신선했다. 황제를 대신해 참석한 그 대단한 베르타른 공작가의 연회장에서 그런 재미있는 구경을 할 줄이야.

그리고 지금 자신이 여기 있는 건 그녀가 마지막에 보여준 미소와 말 때문이었다. 심장이 빠듯하게 조일 만큼 어여쁘게 웃던 미소. 그리고 언제 봤다고 자신이 황제가 되면 제국민이 좋을 거라고 말하는 건지. 건방지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그것도 모자라 하녀였다니. 그 말을 들었을 땐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할 말을 잃었더랬다. 그런데 그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감히 하녀인 주제에 저를 평가한 그 건방진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공작저에서 떠나던 마차를 세운 건 분명 충동적이었다. 그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었던 것뿐,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될 줄은 저조차도 몰랐다.

만약 그녀를 뒤쫓는 공작의 개가 없었다면 빅터를 그녀 곁에 붙여두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빅터가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면 자신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대단하긴 하군. 제국에서 가장 높다 하는 남자들을 이리 쥐고 흔들 줄이야. 그래서 그런가?”

자꾸 욕심나는군. 그 하찮은 여자가.

“전하.”

“알아왔느냐.”

“네.”

“그럼 가자. 우리가 먼저 도착해야 한다.”

“저 혼자 가겠습니다. 전하께선 황궁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흥, 고작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 놈이 말이 많구나.”

빅터의 고개가 푹 수그러들었다. 잠깐 전보 치고 온 사이에 도망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순진해 보여서 잠깐 마음을 놓았다가 된통 당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빅터가 저지른 실수에도 황태자의 표정엔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기다리기 지루하던 차에, 놓쳤다는 말을 듣고 재미 삼아 와봤는데 정말로 재미있는 구경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서두르자. 무조건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 말고, 무조건.”

“네.”

금세 싸늘하게 바뀌는 에덤의 음성에 빅터는 눈을 부릅떴다. 두 번의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 남자다. 목숨 걸고 엘리아를 찾으리라 다짐했다.

* * *

두 번째 마을에 도착한 엘리아는 마부와 내일 만나기로 하고 적당한 여관을 골라 들어갔다. 피곤했던 그녀는 씻고 나오자마자 금세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공작의 방문 앞에 선 엘리아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러나 이건 기회였다. 제 처지를 한 방에 바꿀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공작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불안하던 눈빛이 어느새 차분해진다. 숨을 크게 몰아쉰 엘리아는 공작의 방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보며 다정하게 웃는 남자. 마치 네가 찾아올 줄 알았다는 양 그의 표정은 오만했다.

“가까이 오너라.”

“…….”

주춤거리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무서웠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기는 남자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공작의 다리 위에 앉았다. 흠칫 떠는 엘리아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공작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무서운가?”

“…….”

“겁먹지 말아라. 너를 진심으로 아껴줄 것이다. 네가 나를 믿은 만큼 너를 배신하지 않으마. 그러니 너도 날 믿어주겠니?”

“…네, 공작 각하.”

“그래, 착하구나.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다오. 너와 나의 관계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너를 내 옆에 둘 수가 없어.”

“…네.”

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이 흡족했는지 공작의 얼굴엔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곤 공작이 더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에게 부탁했다. 아니, 부탁을 가장한 조련이었다.

“엘리아. 네 솔직한 마음이 알고 싶구나. 너도 진정 나를 원한다면, 너 스스로 옷을 벗어보아라.”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엘리아는 천천히 옷을 벗어 내렸다. 이윽고 새하얀 나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공작의 눈빛이 금세 음험하게 바뀌었다. 순진한 얼굴 아래 육욕적인 여체가 드러나자 정욕이 들끓기 시작했다.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그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아… 이렇게 아름다운 너를 지척에 두고도 내가 그동안 알아보질 못했구나.”

아무 말도 못 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살짝 돌리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사내의 욕정을 더욱 들끓게 했다.

탐스러운 젖가슴이 보기 좋게 봉긋 솟아있고, 잘록한 허리 아래론 풍만한 엉덩이가 곡선을 그렸다. 아직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는 것 같은 깨끗한 여체를 공작은 이미 눈빛으로 여러 번 탐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어 앉아 아름다운 여자의 알몸을 감상했다. 그러다 곧, 상체를 일으키곤 그녀의 가늘디가는 손목을 잡아끌었다. 속절없이 끌려오는 여체에 먹음직스러운 젖가슴이 살짝 출렁거렸다. 먹어달라는 듯 유혹하는 분홍색 꽃잎이 공작의 입술에 닿았다.

“엘리아.”

“…네.”

“너를 갖고 싶다. 허락해 주겠니?”

“…네, 흐읏!”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참기 힘들었다는 듯, 봉긋한 젖가슴의 절반이 공작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동안의 절제되고 점잖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굶주린 짐승으로 돌변한 공작은 마음껏 그녀의 젖을 맛보고 탐했다.

깜짝 놀란 엘리아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려 하자, 잘록한 허리를 휘감아 옭아매고는 더없이 게걸스럽게 그녀의 젖을 물고 빤다. 붉게 물든 엘리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한쪽 손으론 다른 곳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탐스러운 엉덩이를 이리저리 치대고 주물러대다 점점 은밀한 계곡으로 손을 뻗었다. 양 가슴을 번갈아 쭙쭙 빨아대며 엉덩이골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자,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게 손가락에 닿았다.

“흐윽! 흐응…….”

공작의 어깨를 짚고 파드득 떠는 엘리아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색스럽게 일그러지는 얼굴에 홀린 듯 공작의 시선은 엘리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네 어여쁜 곳을 만지고 싶구나. 다리를 벌려주겠니?”

“하아, 공작 각하…….”

달뜬 신음을 흘리며 몽롱하게 풀린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공작은 연한 미소로 그녀에게 허락을 구했다. 마치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난 네가 허락하는 만큼만 널 갖겠다’라는 양, 공작은 뭐든 시작 전에 그녀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은 엘리아에게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어느새 경계심이 사라진 그녀가 스스로 다리를 벌려주자 공작은 아주 잘했다는 양, 붉게 물든 뺨에 입을 맞췄다.

“엘리아, 정말 아름답구나. 너에게 홀린 것 같아.”

“하아… 공작 각, 흐읍.”

점점 참기가 힘들어진 공작은 엘리아의 자그마한 입 속에 혀를 쑤셔 넣고, 축축하게 젖은 가랑이 사이를 양껏 만지기 시작했다. 미끈한 속살 사이를 누비는 남자의 손길에 엘리아의 몸이 음란하게 펄떡였다.

“하아… 엘리아, 미치겠구나.”

“아아……! 공작님! 흐으응!!”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에 엘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허리를 활처럼 휘자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무덤을 공작은 또 한 번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떼어내질 않았다. 쾌락에 젖어 앙앙거리며 울먹이는 얼굴은 더 이상 순진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더없이 야하고, 또 야했다. 공작의 손길을 즐기며 엉덩이를 흔드는 엘리아의 모습은 음탕한 여신 같아 보였다.

공작의 눈빛은 음험하게 번뜩거렸고, 능수능란한 손길은 점점 더 음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길도 나지 않은 좁은 구멍 속에 공작의 손가락이 푹 쑤셔 박혔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벌떡 몸을 일으킨 엘리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어두컴컴한 방 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다.

대체 이게 지금 무슨 일인가. 분명 꿈이었는데, 왜 이리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처럼.

“하! 이게 뭐야?”

이상한 기분에 아랫도리를 쓱 만지자, 입고 있던 팬티는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거기다 진짜로 공작의 손에 만져진 것처럼 불에 덴 듯 뜨겁기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공작과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엘리아의 기억이라는 건데, 정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 걸까? 아니면 공작의 몸을 그토록 원했던 엘리아의 정신이 꾼 꿈인 걸까?

하…….

“모르겠다. 나 대체 왜 이래? 혹시 이 몸 안에 엘리아가 있는 건가? 너 지금, 이 몸에 남아있는 거니? 죽은 거 아니고 이 안에 있는 거야?”

…미쳤구나. 그래, 미친 거다. 이 몸은 제대로 남자에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면 꿈을 꾼 거니, 내 정신이 미친 건가.

“후, 대체 왜 이래. 정신 좀 차리자. 응?”

기껏 놈들 손에서 도망쳤는데, 몸은 아직 아니었나 보다. 이미 그들에게 단단히 길든 몸은 남자의 손길을 원하고 있었다. 너무 생생한 꿈을 꾼 탓일까.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꿈이었는데도 아직도 공작의 손가락이 이 몸속에 틀어박힌 기분이었다.

하으…….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팬티 위를 지분거렸다. 질척하게 젖은 팬티 속으로 도톰하게 부푼 공알이 만져지자, 몸이 움찔거린다.

“아아… 이런 건 싫은데……. 흣.”

이런 짓 그만하라고, 이건 아니라고 하면서도 어느새 손은 팬티 속으로 들어가 미끈하게 젖은 음부를 살살 문질렀다. 난생처음 스스로 제 몸을 만지며 그녀는 쾌락에 젖어버렸다.

한 번 몰아친 욕정은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엘리아의 본능인지 예나의 본능인지, 이젠 그것조차 상관없었다. 그저 황홀했던 오르가슴만을 위해 착실하게 제 손가락을 움직이며 갈라진 속살을 연신 비비고 문질렀다.

“하아, 하아…….”

또 다른 쾌감이었다. 어딜 만지면 좋은지 스스로 잘 알기에 그곳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구멍 깊이 손가락을 넣었다가 다시 음핵을 문지르길 반복했다.

“흣……! 아응…….”

얼마나 젖었었던 건지, 팬티에 닿은 손등마저도 애액으로 흥건해져 버렸다. 점점 밀려오는 쾌감에 그녀의 손동작이 빨라졌다. 머릿속엔 세 공자와 했던 음탕했던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한쪽 손은 젖을 주무르고, 한쪽 손은 쾌감을 위해 음핵을 마구 문지르며 엘리아는 황홀경으로 빠져들었다.

“흐읏, 으응, 아아… 하아앙!”

쾌락은 금세 몸집을 부풀리고 온몸을 강타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여전히 아랫도리에 딱 붙어있었다. 남은 쾌감을 느끼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또 한 번 고개를 쳐든 쾌감이 다시 한번 애액을 왈칵 쏟게 했다.

“하아, 하으… 이게 뭐야.”

원하던 곳까지 오르고 나니 그제야 허탈함이 밀려왔다. 신나게 아랫도리를 농락하던 손을 들어 올리자, 멀건 애액이 치덕치덕 묻어났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굳이 힘들이지 않고 이렇게 느끼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불현듯 스쳤다. 어차피 그곳에 가서 누구를 만날 것도 결혼할 것도 아니었기에 가끔 외로울 땐 이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어휴… 모르겠다. 뭐 이딴 꿈을 꿔서는. 쩝.”

엘리아는 대충 손만 씻고 아래는 쓱쓱 닦은 후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내일 또 종일 마차를 타려면 많이 자두는 게 좋을 테니까. 기분은 찝찝한데 몸은 한결 가벼워진 탓인지 금세 또 잠이 온다. 이번엔 제발 이상한 꿈은 꾸지 않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 * *

3일째 되는 날 스핑투아에 도착한 엘리아는 방을 잡고 가장 먼저 보석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 보석상에서 나온 엘리아의 표정은 혼이 나간 듯 멍해져 있었다. 그러던 그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쏜살같이 여관으로 내달렸다. 가방은 품속에 꼭 안은 채였다.

방에 돌아온 엘리아는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며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을 보곤 실소를 흘렸다.

“허! 세상에, 이런 게 어디 있어……?”

하녀 월급이 한 달에 약 50페로. 그리고 엘리아가 그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이 약 400페로 정도. 그리고 가방 안에는…….

이곳저곳 귀동냥으로 알아보니, 5천에서 8천 페로 정도면 제국에 있는 아담한 집 한 채 정도는 살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크기에 따라 다를 거고, 제도가 아닌 작은 마을에 있는 집이겠지만.

그래서 일단 큰 도시로 들어온 김에 엘리아는 보석 감정을 받았다. 한 번에 다 팔면 표적이 될 것 같아, 일단 프레드가 준 보석 중 작은 것 한 알을 팔았다. 대충이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 얼마인지 알아야 돈을 알뜰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조금 기대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 열 개 정도면 집 한 채 산다며. 프레드는 대체 얼마짜리 집을 얘기한 거야? 아니, 도대체 그놈의 집구석은 돈이 얼마나 많은 거지?”

가방을 가득 채운 돈다발에 엘리아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 작은 보석 한 알에 천 페로가 넘는다니. 달랑 하나 바꿨을 뿐인데, 엘리아는 제가 공작저에서 일해서 모아온 월급의 두 배가 넘는 돈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아직 수중에는 작은 보석들이 차고 넘쳤고 거기다 값을 가늠할 수 없는 보석도 두 개나 더 있었다. 이 정도면 가히 인생역전이라 할 수 있었다.

“푸흡, 풉. 푸흐흡! 푸핫! 푸하하하!”

도저히 참기 힘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찌 웃음이 안 나오겠나. 돈벼락을 맞았는데. 엘리아는 허리를 꺾어가며 한참 동안 웃었다. 그동안의 개고생이 한 방에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후… 후아, 후아! 좋았어. 이제 정말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거야!”

잠도 오지 않을 것 같다. 혹시 몰라 방문 걸이를 다시 한번 확인한 그녀는 침대 위로 몸을 올렸다. 밖에 나가 새로운 도시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제 수중에 있는 보석과 돈을 두고 나가기가 두려웠다. 그렇다고 이 많은 돈을 들고 다닐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그냥 이참에 푹 쉬잔 생각으로 엘리아는 종일 방에서 뒹굴었다. 미래도 꿈꾸어 보다가 세 공자를 떠올리기도 했다.

“잘 지내고 있겠지?”

지금쯤이면 자신이 사라진 걸 알고도 남을 것이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상상하니,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화가 났을까? 프레드는 아마 없어진 보석들을 보고 열불을 터트리며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 분명했다.

“푸흡! 통쾌하다, 통쾌해!”

침대를 팡팡 치고 다리를 동동 구르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웃던 그녀는 어느새 시무룩해졌다.

후우…….

“외롭나? 뭐라도 옆에 있었다가 없으니 외로운 거야?”

처음 그곳에서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게 끔찍했고, 벗어나고 싶어 미칠 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느 정도는 적응했지만, 그래도 힘들고 제 처지가 비참했었다.

그런데 그거 조금 잘해 줬다고 마음이라도 줘버린 걸까? 도망치고 싶어서 안달 났을 때는 언제고, 막상 혼자가 되니 왠지 외로운 기분이다.

이렇게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하는 거겠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그동안 못 잔 잠이나 푹 잘 생각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한 번 뿌리박힌 상념은 온종일 그녀를 괴롭혔다. 더는 웃음이 나오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이건 뭐, 조울증도 아니고.

때맞춰 식사를 주문해서 먹고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기분이 우울해지면 돈 가방을 보고 보석을 꺼내 세어봤다. 그렇게 지루하고 심심한 하루를 방에서만 보낸 엘리아는 일찍 잠들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자고 일어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왜 갑자기 기분이 바닥으로 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이어지진 않아 다행이었다.

얼른 새로운 터전으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방을 닫으려다 빼꼼히 보이는 초록색 풀잎을 꺼냈다. 네잎클로버. 그 아이 말대로 정말 행운이 찾아왔다.

“복덩이를 만났네. 다시 만나면 고기나 실컷 먹여줘야지. 훗.”

레오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건지, 데니엘이라는 마부는 그녀가 가는 종착지까지 함께해 주기로 했다. 그날도 아직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레오의 부탁으로 흔쾌히 온 거라고도 했다. 물론 자신도 멀리 가는 만큼 돈을 버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나섰다고는 하지만, 엘리아 입장에선 레오가 정말로 행운의 신이나 진배없었다.

앞으로 7일. 7일이면 아르카마디오에 도착한다. 중간중간 쉬었다 가긴 하겠지만, 그마저도 여행으로 생각하니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새로 구매한 로브로 갈아입고 엘리아는 제 모습을 다시 꽁꽁 가렸다. 돈이 있는 만큼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테니까. 여관을 나서는 엘리아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 서렸다. 지금부터가 시작인 것 같았다.

* * *

그 시각, 가장 먼저 출발했는데 가장 늦게 퐁뒤르센에 도착한 체이스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찾는 건 엘리아가 아니었다. 엘리아를 잡을 미끼. 그녀가 순순히 공작의 손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미끼를 찾은 체이스는 손에 든 그림을 들고 광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한곳에 그의 시선이 멈추었다.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 거기에 한 소년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체이스는 제 손에 들린 그림을 한 번 보고 다시 한번 아이를 바라봤다. 그 순간 언제나 일자였던 체이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드디어 찾았다. 엘리아의 동생.

너무 오래돼서 혹시나 죽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녀와 닮은 아이가 제 앞에 있었다. 엘리아의 어미를 찾으려다 그녀 대신 엘리아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를 찾았다. 하늘이 저를 돕는 모양이다.

체이스의 검은 그림자가 아이들을 덮었다. 처음으로 체이스는 입꼬리를 쭉 찢어 올려 웃었다.

* * *

허름한 여관.

방에 들어온 엘리아는 방 안 풍경에 절로 한숨을 흘렸다. 나무로 만들어진 여관은 얼마나 오래된 건지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물론이고, 갈라진 나무 틈 사이로 옆방이 어스름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필 이 마을에서 딱 하나 있는 여관이라 선택권이 없었기에 엘리아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방을 잡았다. 다행히 옆방엔 아무도 없는지 불도 꺼져 있고, 사람의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힘들다. 대충 씻고 얼른 자자. 이틀만 잘 버티면 돼.”

오랜 시간 마차를 탔더니 피곤은 금세 몰려왔다. 엘리아는 작은 욕조에 몸을 담근 후 대충 씻고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끔벅거리며 돌아누웠다가 벽 틈새로 보이는 옆방의 모습에 벌떡 일어나 불을 껐다. 지금은 비어있더라도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니 아예 아무도 없는 척을 하려는 의도였다. 혹시 여자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누구라도 훔쳐보면 어쩌나 걱정됐기 때문이다.

시야가 어둠으로 물드니 상념이 짙어진다. 생각보다 꽤 오랜 여정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되짚어 보자, 신기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예상치 못하게, 그리고 다급하게 시작된 탈출 여정은 생각보다는 꽤 순조로웠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도 받고, 빅터가 말한 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생각지도 못한 재력이 생기니 마음이 풍요롭다 못해 온 세상이 제 것 같았다.

그러나 전혀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차 타는 시간이 힘들었고, 들고 있는 돈은 때론 기쁨을 주었지만 반면에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방에 둘 수도, 그렇다고 들고 나갈 수도 없어서 오는 내내 도시 구경은커녕 매번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있으면 도착할 종착지에 가슴이 떨려 피곤한데도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꼭 소풍 가기 전날 아이처럼 설렜다.

“하아… 역시 죽으란 법은 없구나. 이렇게 되면 짓밟힌 꽃이 아니라 토낀 꽃이 되는 건가? 히힛!”

끝이 보이는 여정을 눈앞에 두고 설레는 마음에 몸은 피곤한데도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어떤 집을 고를지, 어떤 가구를 들일지, 정원에는 무얼 심을지, 상상만 해도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이불을 꼭 끌어안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엘리아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처음엔 그렇게 두렵고 무서웠던 여행길이었는데, 끝이 보여서일까? 정말로 그들에게서 완전히 해방된 것 같아, 그동안 쌓인 체증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물론 오는 내내 조울증 환자처럼 기분이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이젠 괜찮았다. 잠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도록 히죽거리며 미래를 꿈꾸던 그녀는 어느새 깊은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하악!”

“씨발, 조용히 안 해?”

으음, 시끄러워…….

찰싹! 퍽퍽!

“아악! 사, 살려줘, 제발……! 하윽!”

헉! 뭐지? 옆방인가……?

이상한 소리에 엘리아의 눈이 금세 번쩍 뜨였다. 분명 이건 누군가 때리는 소리와 여자의 비명이었다. 겁에 질린 엘리아는 조용히 일어나 까치발로 살며시 움직여 문이 잠겼나 확인하곤 다시 조용히 침대로 돌아와 몸을 웅크렸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큰 도시만 있는 게 아니라서 작은 마을에도 여러 번 들르곤 했지만, 이번 마을은 유독 외지고 작았다. 조금 께름칙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룻밤만 버텼다가 아침 일찍 출발하면 됐기에 대충 방을 잡고 올라온 건데,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하앙, 하앙! 그, 그만해……!”

“몸 파는 년이 왜 이렇게 앙탈이야?”

“끄윽… 제발 그만 좀……. 하아악!”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얌전히 좀 굴란 말이야! 알았어?”

“하악, 하응, 하응……!”

퍽퍽퍽, 살결이 맞부딪치는 소리. 찰싹찰싹, 어딘가 때리는 소리. 그리고 여자의 신음과 비명이 또렷하게 들리자, 엘리아는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흐르자 반항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녹진하게 풀린다. 신음도 야릇하게 들리고, 두 남녀의 음란한 행위로 인한 야한 소리가 나무 벽의 틈을 타고 고스란히 엘리아의 방으로 들어왔다.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썼는데도 바로 옆에서 관계하는 양,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씨발, 야들야들한 게 속살이 아주 쫀득하구만! 여기 만져주니까 좋아?”

“하아앙… 조, 좋아요.”

“큭큭, 그러니까 왜 그렇게 앙탈을 부려서 매를 맞고 그래. 이렇게 복종하니까 얼마나 좋아.”

“흐응, 흐응. 거, 거기, 거기 좋아요.”

“어디? 젖? 아니면 보지? 허허, 아주 폭포수가 흐르는구만. 몸 파는 년이라 그런지 조이는 게 정말 다른데?”

제기랄.

옆방에서 들리는 난잡한 소리에 이미 잠은 저 멀리 사라졌다. 거기다 들리는 말소리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찰싹!

“엉덩이 더 올려, 아주 깊숙이 쑤셔 박아줄 테니까! 크으… 씨발, 좋다.”

“하윽! 하아앙!”

퍽퍽퍽!

“하앙, 하앙, 하아앙!”

난잡한 남자의 말과 쾌락에 젖은 여자의 교성이 고스란히 엘리아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살결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남자가 하나하나 생중계하는 소리에 지금 그들이 어떤 상황인지 눈앞에 그려졌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꼭 감았지만, 그 소리는 더 강렬하게 귀에 박히는 것 같았다. 놈들의 아래에 깔려 울부짖던 자신의 음성이 귓가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랫배가 욱신거리고, 가랑이 사이가 불에 덴 듯 저릿거렸다.

하아… 또 시작이네. 정말 제대로 미쳤어!

당기듯 뻐근한 가랑이 사이로 손을 대자, 이미 흥건하게 젖은 뜨거운 음부가 만져졌다. 어이없어하면서도 엘리아는 천천히 제 비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숨은 가빠오고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기분이다. 점점 달아오른 몸은 단 하나를 원했다.

흑, 느끼고 싶어, 하아… 어, 어떡해……! 흐응…….

한 번 경험해 봤다고 손놀림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어딜 만져야 좋은지 너무 잘 아는 손은 도톰하게 부푼 음핵을 살살 비벼댔다.

퍽퍽퍽퍽!

“캬아! 애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젖에서 꿀이 흐르는구나.”

쭙쭙쭙!

“흐으응! 하으응!”

여자의 교성이 높아질수록 엘리아가 느끼는 흥분도 점점 올라갔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이 벽 뒤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걷어내고 나무 벽 틈 사이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러다 곧 보이는 장면에 엘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헉. 저, 저게 뭐야?!

엘리아는 숨을 홉 들이켰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장면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온몸이 꽁꽁 묶인 여자. 굵은 밧줄은 여성의 중요 부위가 더 도드라지게 드러나 보이도록 그녀의 몸을 음란하게 묶고 있었다. 거기다 쫙 벌어진 여자의 다리 사이로 남자의 자지가 힘차게 왕복 운동한다. 양손은 뒤로 묶여 꼼짝도 못 하는 여자의 몸을 붙들고 남자는 그녀의 젖을 물고 빨며 사정없이 허릿짓을 가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엘리아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은 이미 까맣게 잊은 채, 생경한 장면에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잠시 잊었을지언정,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황홀하고 뜨거웠던 행위를.

남자의 맛을 아는 몸, 그리고 그 끝에 어떤 황홀함이 오는지 아는 본능은 두 남녀의 음탕한 행위를 보며 스스로 쾌락을 찾기 시작했다. 두려웠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언가에 홀린 듯 엘리아는 두 남녀의 정사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달아오른 몸을 부추겼다.

“하아앙, 흐으응, 하아악!”

하아, 하아, 흐읍.

“좋아 죽는구나! 보지에 힘을 더 줘야지! 꽉 물란 말이다! 옳지, 옳지, 크… 그럼 다시 달려보자꾸나. 달려라!”

쿵! 찰싹!

“하악! 하응, 하응.”

흐윽! 흐으응. 으읍!

마치 저 무도한 남자에게 당하는 이가 자신인 것처럼 엘리아는 남자의 말과 움직임에 따라 몸을 움찔거렸다.

손가락으로 제 구멍을 사정없이 쑤석거리다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마구 문지른다. 마치 벽 너머에 있는 남자가 자신의 것을 만져주는 양, 온몸이 저릿거리고 아랫배에서부터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흐아앙! 그만! 그마안……! 나, 나 갈 것 같아!”

“크헉, 크윽, 크으으으!”

흐응, 흐응, 흐으응! 흐읍! 아아……! 흐윽.

몸이 부르르 떨렸다. 뭔가 왈칵 쏟아짐과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입술을 악물었지만, 황홀경에 다다른 숨소리까지는 채 막지 못했다.

온 사방이 헐떡이는 숨소리로 가득했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자신이 내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제 손으로 절정을 느낀 엘리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몸을 웅크리고 채 가시지 않은 절정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아직도 여운이 남은 몸이 간헐적으로 부르르 떨렸다.

너무 늦게 일어났다. 평소보다 늦잠을 잔 엘리아는 부랴부랴 출발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막 문을 닫고 몸을 돌리는 순간, 옆방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온다. 순간 엘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을 보는 순간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

사람 좋은 미소. 언제나 친절한 인사. 꽤 오래라면 오래 함께한 남자를 보는 순간 엘리아는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데니엘이 왜 저기서 나와? 마차에서 잔다고 했잖아?

“데, 데니엘 씨.”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피곤이 쌓인 모양이네요. 허허, 얼른 가시죠. 서둘러야 저녁 전에는 도착할 겁니다.”

“…….”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내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주춤주춤 옆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데니엘이 나온 방을 조심히 열었다.

끼이익.

“윽!”

여자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지만,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만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와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엘리아는 이미 사라진 남자를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하, 어이없어. 데니엘이 그런 사람이었다니.

물론 여자를 품을 수도 있고, 욕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소에 봐왔던 것과는 너무도 상반된 모습에 왠지 모를 찝찝함과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불길함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도착할 때까지 모르면 몰랐을까, 숨겨진 본색을 보고 나니 그가 두려워졌다.

“후… 괜찮을 거야. 나쁜 짓하려면 벌써 했겠지. 왜 여기까지 왔겠어. 그래,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그녀는 애써 자신을 달래며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데니엘의 도움으로 마차에 오른 후, 창문을 열고 어젯밤을 떠올렸다.

미쳤어, 데니엘의 그 추잡한 짓을 보면서 난 대체 뭘 한 거야? 어휴.

어느새 마차는 출발하고, 엘리아는 제 머리통을 콩 쥐어박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통과하는 마차는 밤새 달려 아르카마디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아… 이제 이 짓도 정말 끝이구나. 이젠 정말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

푹 눌러썼던 로브 두건을 벗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마차가 달릴수록 녹음은 싱그러운 공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눈을 감고 빙그레 웃으며 엘리아는 덜커덩거리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한참을 달릴 때였다.

히이이잉!

“워워!”

“응……?”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창밖을 바라보니 숲길 한가운데였다.

무슨 일이지?

똑똑!

“네?”

“아가씨, 잠시만 쉬었다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마차 바퀴가 헐거워진 게 조금 손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장거리는 또 오랜만이라, 하하.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얼른 일 보세요.”

“그런데 공구가 마차 안에 있어서,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네?”

왜 그 순간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는지 모르겠다. 본능은 문을 열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괜한 의심으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보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엘리아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러세요.”

“크흠,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데니엘의 얼굴은 여전히 사람 좋아 보였다. 그러나 최대한 담담한 척하려고 해도 표정이 굳는 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엇차! 깊이도 있었군. 하하.”

바닥 아래서 힘겹게 공구를 꺼낸 데니엘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러고는 제법 기다란 해머를 쓱 꺼내곤 피식 웃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안 그래도 안 되던 표정 관리가 더 안 되는 것 같았다.

달칵!

“……!”

“하하, 아가씨.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왜, 왜 문을……. 아, 아니에요. 얼른 바퀴를…….”

이젠 모든 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사색이 된 낯빛도, 볼썽사납게 떨리는 음성도. 그리고 결국 데니엘의 마지막 말에 여지없이 심장은 쿵, 떨어져 내렸다.

“좋으셨습니까?”

“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좋았냐니?

사람 좋아 보였던 미소가 점차 음산하게 바뀌었다.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에 들린 해머를 붕붕 돌렸다.

“데, 데니엘 씨. 왜 이러세요.”

“그러게, 왜 훔쳐보고 그러셨습니까.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참았는데.”

“…….”

엘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입술만 달싹거리자, 쓱 가까이 다가앉은 데니엘이 속삭이듯 말했다.

“신음이 어찌나 간드러지던지, 그년 버리고 네 방으로 가고 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오는 내내 박아줬을 텐데. 그럼 돈도 아끼고 꽤 즐거운 여행이 됐을 거 아니야?”

“……!!”

마차 구석에 갇힌 엘리아는 도망칠 생각 따위도 하지 못할 만큼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거칠게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꺄악!”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미치광이 같은 눈을 번뜩이며 혀를 날름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엘리아는 좌절감을 느꼈다. 꽤 먼 거리를 함께하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데니엘의 음험한 표정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눈앞에 살인자를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곧 들고 있는 저 해머가 머리통을 내려칠 것 같은 공포에 심장이 어지럽게 날뛰었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겁에 질렸는데도, 엘리아는 우악스럽게 제 머리채를 잡은 남자의 눈을 마주 봐야 했다.

“큭큭, 레오 그 녀석이 부탁할 때 뭔가 있겠거니 했는데, 역시나 행운의 여신이 내게 왔네?”

“데, 데니엘. 대, 대체 왜 이래요.”

“왜 이러긴. 네가 날 원했으니까 네 소원을 들어주려는 거잖아.”

“아, 아니에, 아악!”

고개가 홱 젖혀질 정도로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잡아당긴 데니엘이 빙긋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에 멈춰 선 남자가 혀를 날름거리며 제 입술을 적시고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엘리아? 넌 대체 뭐 때문에 서쪽으로 가는 걸까……? 혹시 남편 몰래 집이라도 나온 거야? 아니면, 혹시 이 밝히는 몸으로 딴 새끼랑 자빠져 자다 걸렸나?”

“흐윽, 데, 데니엘. 제발……! 흡!”

느닷없이 밀고 들어오는 살덩이를 속수무책으로 받아 삼키며 엘리아는 끙끙거렸다. 게걸스럽다 못해 우악스럽게 덤벼드는 남자의 힘에 온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목구멍을 뚫을 듯 쑤셔 넣는 혀에 구역질을 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남자의 몸을 밀어내려 바동거려 봐도 미친놈처럼 돌변한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컥! 하아, 하아…….”

“흐음, 어제 그년보다 확실히 느낌이 좋은데? 그렇겠지, 몸 파는 년이랑 똑같으면 안 되지. 하아… 입술만 먹었는데도 벌써 자지가 쑤시고 싶다고 난리가 났군.”

“우웁!!”

머리채를 움켜쥔 손이 강제로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기고는 제 아랫도리에 사정없이 비빈다. 딱딱하게 솟아오른 사내의 거근에 엘리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뭉개졌다.

그 순간, 엘리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남자에게 몸을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를. 어젯밤 서슴없이 여자를 때리던 데니엘이 자신을 곱게 보내줄 리 없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었다.

이렇게 끝인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하아… 좋구나.”

무언가를 음미하듯 신음을 뱉은 남자가 다시금 엘리아의 머리를 들어 올리곤 또 한 번 우악스럽게 입을 맞췄다. 목구멍까지 쑤시고 들어오는 살덩이에 엘리아는 또 한 번 구역질이 치밀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후우…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그럼 행복할 수 있어.”

“그, 그만해. 제발. 이러지 마!”

“포기하면 인생이 편해질 거야. 괜히 쓸데없는 반항으로 명줄 당기지 말라고.”

“이 더러운 새끼야! 이거 놓으라고!”

“이런 썅!”

퍽!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데니엘의 주먹이 사정없이 엘리아의 배를 강타했다. 순간, 숨이 멈춘 엘리아의 몸이 엿가락처럼 축 늘어진다.

“컥! 콜록콜록, 끄륵…….”

“하여간 계집년들은 꼭 맞아야 고분고분해진다니까? 어휴, 답답하기는. 쯧. 널 때리고 싶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자꾸 성질 긁지 말라고. 알았지? 자, 이제 네가 꺼내서 맛있게 빨아봐.”

다시금 엘리아의 얼굴을 제 아랫도리에 처박고 사정없이 비벼대며 데니엘은 흥을 돋우었다.

“허억, 허억, 시, 싫으… 으읍!”

하지만 엘리아의 반항에 잠시 살기를 머금었던 그가 소슬한 웃음을 내보이며 엘리아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흐음, 그래? 그럼 언제까지 버티나 볼까? 네년 입에서 어젯밤처럼 헐떡이는 소리가 나오게 해주지. 곧 있으면 스스로 박아달라고 하는 너를 보게 될 거야. 큭큭.”

늘어진 엘리아를 마차 구석에 밀어놓고 데니엘은 바지를 벗으며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렸다.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예쁜 얼굴에, 펑퍼짐한 로브 위로도 제 존재감을 뽐내는, 굴곡지고도 육감적인 몸은 데니엘의 욕정을 더욱 끓게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데니엘은 끓어오르는 욕정을 숨기느라 꽤 애를 먹었었다. 엘리아 몰래 다른 여자를 사다 욕정을 해소하며 마지막 계획까지 잘 버텼다. 그런데 어젯밤 그녀에게 들켜버렸다. 아니, 일부러 보여줬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그런데 다른 여자를 가학하는 모습에 엘리아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스스로 제 몸을 만지며 헐떡거리기까지 하다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엘리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경계했다. 물론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예쁜 얼굴을 가리고 무언가에 쫓기듯 주위를 살피는 여자. 아무리 봐도 그녀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친절한 모습으로 꽤 오랜 시간 한결같이 대했다. 그랬더니 역시나 그녀의 경계심이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레오의 말을 전하니 웃기도 했다. 예뻤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봤다.

천천히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다 보면 엘리아가 자신에게 기댈 것 같았다. 위태로운 여자일수록 안정된 삶을 원할 테니. 만약 그렇게 안 돼도 별 상관은 없었다. 안 되면, 되게 하면 그만이니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행히 그녀는 어느 정도 자신을 믿는 것 같았다. 다른 남자들은 여전히 경계하면서 자신에게는 다정했으니까. 그녀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더욱 엘리아가 욕심났다. 그래서 제 과거를 숨기고 엘리아와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제 아내로 만들고, 마음껏 품에 안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그것을 보기 전까지는.

마치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듯 가방을 놓지 않는 엘리아의 행동에 궁금증이 일었다. 저 가방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길래 한시도 품에서 떨어뜨려 놓지를 않는 걸까……?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그녀를 보았다. 보석상에서 나오는 멍한 눈빛의 엘리아를. 그리고 더욱 가방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헐레벌떡 달리는 그녀를. 데니엘은 확신했다. 도망치는 이유가 저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빌미가 생겼다. 그녀를 완전히 옭아맬 빌미가. 더는 친절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졌다. 그저 가지면 그만이다. 자신에겐 그럴 힘이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갈 길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그녀 옆에 있는 가방을 들어 올리자, 축 늘어졌던 엘리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애처롭게 손을 뻗는 그녀의 뺨을 다시 한번 후려치자, 허공을 맴돌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훗, 대체 이건 어디서 훔쳐 온 거야? 너 도둑년이었냐?”

“줘……. 얼른 줘……. 내놔……!”

“그래, 줄게. 누가 안 준다고 했어? 일단 이것부터 먹어.”

“흐웁!”

빳빳하게 치솟은 자지를 거침없이 그녀의 입 속으로 처넣곤 목구멍까지 깊숙이 찔러 넣었다. 숨이 막히는지 구역질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엘리아를 빤히 보다, 데니엘은 다시 가방 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꽤 많은 돈. 그리고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번쩍거리는 보석에 데니엘의 입꼬리가 쭉 찢어져 올라갔다. 이것만 있으면 이따위 마부 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상한 빵과 과자를 아이들에게 몇 번 줬을 뿐인데, 이런 행운이 굴러들어 올 줄이야.

역시 사람은 베풀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어느 눈먼 신이라도 도와주는 법이니까.

데니엘은 끓어오르는 희열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 좆을 힘겹게 물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엘리아의 모습이 그의 환희를 한껏 더 북돋웠다.

“하아… 엘리아. 넌 내 행운의 여신이야. 말만 잘 들으면, 너와 난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큭큭큭.”

“흐웁!”

산발이 된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사정없이 허릿짓을 가하는 남자의 과격함에 그녀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자지를 받아냈다. 눈물이 흐르고, 침이 흐를 정도로 숨이 막혔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더는 무의미한 반항은 하지 않았다.

하하하……. 짓밟힌 꽃이라더니. 정말로 엘리아의 운명은 이렇게 가는 건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거야? 제기랄, 지옥에나 가버려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신이 있다면 제발 살려주세요’가 아닌, 제발 지옥으로 떨어져 자신이 당한 만큼 당했으면 좋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돈도 빼앗겼고, 곧 몸도 빼앗긴다. 죽을지 살지도 모르겠다. 이 숲길에서 누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는 희망도 없었다. 만약 산다 해도 이제는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자, 헛웃음만 흘렀다.

“크윽! 후우… 장난 아닌데……? 역시, 보통 년이 아니었어. 큭큭큭.”

“커헉, 우욱! 하아, 하아.”

“어때? 맛있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냥 공작가에 얌전히 있었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럴 리가. 어차피 이 소설은 엘리아가 죽어야 끝나니 어떻게든 스스로 죽어버리도록 극한으로 몰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래, 죽자, 죽어. 이런 새끼한테 평생 시달리느니 그냥 죽는 게 낫겠네.

정신없이 남자의 손에 휘둘려 거친 키스와 남자의 좆을 물기를 반복하면서 엘리아는 점점 삶의 의욕을 놔버렸다.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제야 조금 고분고분해졌네? 흐흐, 그럼 이제 입보지 맛을 실컷 봤으니, 요 음탕한 속살도 맛 좀 볼까……? 어제 혼자 하느라 아쉬웠지? 응?”

데니엘의 손길이 바빠졌다. 그녀가 입고 있는 로브를 찢어발기고 다급하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다. 터질 듯이 부푼 흉포한 거근이 신났다는 듯 꺼덕거린다. 정신을 놔버린 듯 엘리아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남자의 거센 손길에도 미동도 안 했다.

흐르는 눈물이 그녀가 인형이 아님을 알려줄 뿐, 엘리아는 더 이상 아무 반항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금세 속옷까지 벗겨낸 데니엘이 그녀의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비틀어 잡고는 입을 맞추듯 자지의 선단을 젖은 속살에 쓱쓱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크으… 역시 음탕한 년이었어. 이 와중에도 이렇게나 흥건하게 젖다니. 내가 앞으로 많이 예뻐해 줄게. 넌 나만 믿으면 돼. 알았지?”

“윽!”

점점 벌어지려는 구멍에 고통이 느껴지자 엘리아는 이를 악물고 온몸에 힘을 줬다. 의미 없는 반항임을 알지만, 본능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려 애를 썼다.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지자, 조금이나마 정신이 돌아온 엘리아는 바락 소리를 내지르며 밀고 들어오려는 데니엘의 배를 밀어냈다.

“하지 마! 그만하란 말이야……!”

하찮은 반항 따위는 한입에 삼켜주겠다는 듯 데니엘은 다시 한번 거칠게 입을 맞추며 두툼한 살덩이로 온 입 안 살을 헤집었다. 구멍에 제대로 맞춰진 좆 대가리가 기어이 뚫고 들어오려는 동시에 엘리아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까득!

“흐악!”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놈의 혓바닥을 물어버리자, 역겹고 비릿한 혈향이 입에 맴돌았다. 고통스러운지 화들짝 몸을 물린 놈이 입을 틀어막고 눈을 부라린다. 또 한 대 치려는 듯 높이 손을 들어 올리는 놈을 향해 퉤! 침을 뱉은 엘리아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깝네, 완전히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킥.”

“이 미친?! 어?”

얼굴을 향해 사납게 내려오는 손을 보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둔중한 타격음 대신 데니엘의 멍청한 목소리가 들리고, 뭔가 뒤로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쿠당탕!

“뭐, 뭐야?!”

“흐윽.”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찢어먹을 듯 들어오던 살덩이의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남자의 육중한 몸도 사라졌다. 들리는 거라곤 당황한 데니엘의 음성뿐이었다.

또 무슨 일이지.

엘리아는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고 뿌옇게 변한 시야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멍하게 바라봤다. 놀란 데니엘이 벌떡 일어난다. 그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번쩍 빛을 발했다.

동시에 시뻘건 핏방울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데니엘의 머리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육중한 몸이 쓰러지면서 낸 쿵, 하는 소리가 엘리아의 귓속을 쩡하게 울렸다.

아아… 죽은 건가. 흥, 개자식. 그래, 너도 지옥에나 가버려라.

누군가 급하게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흐릿하게 보이던 시야도 점점 어둠 속으로 잠겼다.

난 이대로 죽는 건가……. 그래, 이제 그만하자. 지겹다.

무언가 제 몸을 덮고 번쩍 안아 드는 감각을 마지막으로, 엘리아는 겨우 잡고 있던 정신을 놔버렸다.

차라리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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