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도망치다 (11/18)

11장. 도망치다

“엘리아? 공작가에 도착했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끔벅거렸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엘리아가 창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정말로 공작가 정문이 눈에 보였다.

“아… 가, 감사합니다!”

걱정과는 다르게 별일 없이 무사히 제도로 돌아왔다. 그제야 황slakpw태자가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황태자다운 위엄과 세 공자만큼이나 깔끔하고 준수한 외모. 그리고 그들과는 다르게 다정하기까지. 우려했던 바와는 다르게 아주 괜찮은 남자였다.

음, 앞으로의 제국이 기대되는데?

엘리아는 잽싸게 마차에서 뛰어내리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신의 거침없는 행동에 눈이 동그래진 황태자의 표정엔 아랑곳없이 그녀는 제 할 말만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제국민들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뭐?”

아, 투표권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찍어주는 건데. 하긴 뭐, 그런 거 없어도 되겠지만. 훗.

떠날 때가 돼서일까? 엘리아의 기분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처음에 봤던 기죽음도, 주눅도, 겁에 질린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고, 그저 뭔가 행복한 듯한 미소에 황태자는 멍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살펴 가세요. 황태자 전하.”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들어가려는데 황태자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네?”

엘리아가 뒤를 돌아보자, 헛기침을 하며 뜸을 들이던 남자가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흠. 에덤.”

“네?”

“내 이름은 에덤도르앙 데 슈얼데르 오딧세 오스카니아다.”

어후… 길다. 뭔 놈의 이름이 저렇게 길어?

능숙하게 표정을 감춘 엘리아는 그의 이름을 되새기듯 말하다 이내 말끝을 흐렸다.

“네, 네. 에덤 도르아앙……. 하하…….”

“쯧, 그냥 에덤만 기억해라.”

“네.”

“또 보지.”

간결하게 답하곤 그가 앞을 보자, 어제 봤던 기사가 문을 닫는다. 그러곤 그녀에게 고개만 까딱 숙이곤 마부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랴!”

마부의 우렁찬 고함과 함께 황궁의 마차는 아주 웅장하게도 출발했다. 금세 멀어지는 마차를 넋 놓고 보던 엘리아는 꼭 뭔가에 홀린 기분을 느꼈다.

정말 황태자와 저 마차를 타고 왔구나.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었다.

“하녀장님?”

“어?”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 차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린 하녀 리타가 서있었다.

“아, 리타.”

“거기서 뭐 하세요? 어? 혼자 오신 거예요?”

“아, 응. 그게, 아! 심부름이 있어서. 난 다시 얼른 가봐야 해.”

“네?”

“아니야, 일단 들어가자.”

가장 먼저 사과를 해왔던 하녀라 그런지, 엘리아는 어린 동생 보듬듯 리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심부름을 핑계로 리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대충 마차를 대여하는 법이라든지, 대여 값이라든지, 도망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알아내고 엘리아는 서둘러 제 방으로 향했다.

“후우…….”

막상 계획을 실행하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왠지 아힌이나 프레드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서두르자, 서둘러.

아쉽긴 했지만, 입고 있는 드레스를 훌렁 벗어버리고 보이는 보석 몇 개를 다급하게 떼어냈다. 속옷에 넣어뒀던 보석은 물에 한 번 헹군 후 따로 모아둔 보석 주머니에 넣었다. 얼른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매트리스 안에 숨겨두었던 전 재산을 손에 꼭 쥐고 눈을 부릅떴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챙길 거 다 챙기고 얼른 튀자.

엘리아는 목걸이와 팔찌도 주머니 속에 넣고는 빠르게 프레드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아직 입어보지 못한 옷 같지도 않은 옷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반짝거리는 보석들이 얼른 떼어달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엘리아는 서슴없이 보석을 잡아 떼기 시작했다.

반쯤이나 뗐을까? 갑자기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란 엘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의 조안나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 조안나 님.”

“오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프, 프레드 도련님이 시키셔서.”

“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저를 보는 조안나의 집요한 시선에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심장은 요동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도둑질하다 딱 걸린 상황 같아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 옷들은 대체 뭡니까?”

조안나의 질문에 엘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하녀장이야. 내가 이럴수록 더 의심만 살 거야.

엘리아의 눈빛이 다시 비장하게 바뀌었다.

“프레드 도련님이 하녀장인 제게만 따로 내린 명령이 있습니다. 조안나가 알아서는 안 되는 얘기니 가서 볼일 보세요.”

“네?”

“참,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지금 당장.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도련님께서 불같이 화내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뭔가 찝찝한 표정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조안나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프레드의 이름을 팔았는데 조안나라고 별수 있겠는가.

하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엘리아는 아깝지만 남은 보석은 그냥 두기로 했다. 더 있다간 또 일이 어떻게 틀어질지 모를 일이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먹고살 수는 있을 터였다. 어느새 빵빵해진 주머니 두 개를 에이프런 안쪽 주머니에 숨기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마차까지 가는 길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 건지. 매일 오가던 길이 새삼 멀게 느껴졌다.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조안나가 외출용 마차를 대기시켜 놓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문스러워하는 표정은 여전했다.

“언제 오십니까?”

“저녁쯤 올 거예요.”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엘리아는 여유로운 태도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곧, 마차는 빠른 속도로 공작가를 빠져나가 제도의 광장으로 향했다.

“하아… 나쁜 짓은 이걸로 끝내자. 진짜 못 해먹겠네.”

마차에 늘어지듯 널브러진 엘리아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막힌 숨을 토해 냈다. 그러다 곧 그녀의 입꼬리가 쭉 찢어져 올라간다. 드디어 공작가에서 해방됐다는 기분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유다! 드디어 자유다! 어떡해!! 꺄악!!

그녀는 뺨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거리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출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기회에,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아힌이 새삼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기회가 언제 올지 기약도 없었을 테니까.

빠르게 스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엘리아는 눈물을 글썽였다.

* * *

밤새 세 아들과 기 싸움을 벌인 공작은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쯤 겨우 눈을 떴다. 푹 못 잔 탓인지 눈은 뻑뻑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건방진 놈들.”

저와 쏙 빼닮은 얼굴로 덤벼드는 꼴들이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기껏 키워놨더니, 제 등에 칼을 꽂으려 했다. 남들은 부럽다지만, 부럽긴 무슨.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강하게 목줄을 죄었어야 했는데.

치뜨였던 눈꼬리가 곧, 가늘게 늘어졌다. 제 아들들이 미친 망아지들처럼 구는 이유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작가의 연회를 엉망으로 만든 엘리아. 그녀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터라, 솔직히 뒤통수가 꽤 얼얼할 정도로 충격을 받긴 했다. 무엇보다 다른 이도 아닌 아힌이 엘리아를 데리고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다. 프레드였다면 그러려니 했을지도. 그런데 아힌이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세 아들 중 가장 야망이 크고 현실을 직시하는 녀석이었는데, 고작 하녀 따위 때문에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할 줄이야.

아힌을 너무 믿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반듯하게 다물렸던 입꼬리가 못마땅한 듯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곧, 허탈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누굴 탓하겠나. 나도 빠졌었던걸. 후우…….”

뻑뻑한 눈두덩 위로 팔을 올렸다. 시야가 어두워지니 한결 나았다.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꾸 누군가가 눈앞에서 아른거려 이렇게라도 가려볼 심산이었다.

처음 봤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드레스를 입혀놓으니 웬만한 귀족 레이디들 못지않게 우아하고 고결해 보였다.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녀를 하녀라고 생각하진 못했을 터다.

차라리 다행인가.

오랜만에 가슴 떨리는 기분을 느꼈다. 며칠 전에 봤을 때만 해도 그저 농익은 여인의 느낌만 받았을 뿐, 예전 같은 감정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공작은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결국 연회장에 돌아가지도, 황태자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하! 면이 서질 않는군.”

다 늙어서 이게 무슨 추태인가 싶으면서도 오랜만에 느낀 떨림은 공작의 입꼬리를 느른하게 만들었다. 문득, 엘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래, 그때도 이렇게 떨렸었지. 내 집 하녀에게 이 내가 그런 마음마저 품었을 정도였으니.

엘리아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어여쁘게 생긴 하녀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곧 기억에서 지웠을 정도로 공작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고작 하녀 따위에게 눈길을 줄 만큼 곤궁하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날따라 무척 피곤함이 몰려와 와인을 들이켠 후 소파에 누웠다. 침대로 가기도 싫을 만큼 만사가 귀찮았다.

“하아…….”

피곤한 몸에 술이 들어간 탓일까. 문득 자신의 인생이 참 재미없게 느껴졌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메마른 벽에 갇힌 것처럼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삶. 그리고 버석하게 메말라 버린 자신의 감정.

이상하게 허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느끼는 외로움과 쓸쓸함이었다. 짜증스러운 기분에 다시 몸을 일으키고 와인을 병째로 들이켰다. 차갑기 그지없는 새빨간 눈동자가 음울하게 바뀔 때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점점 늘어지는 몸을 소파에 기대고 들어오는 이를 바라봤다. 가녀린 체구의 한 하녀가 들어와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건 뭐지……?”

“집사님께서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잔뜩 겁에 질린 듯 웅크린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순간 자신에게 겁을 먹는 하녀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왜 저렇게 겁을 먹는단 말인가.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앞에 두어라.”

“네.”

주춤주춤 다가와 제 앞에 음식을 내려놓는 하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새하얀 피부와 도톰한 입술에 시선이 갔다.

‘이런 아이가 있었나……?’

술기운에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그녀의 몸을 쭉 훑어 내렸다. 풋내 나는 어여쁜 얼굴과는 다르게 농염한 몸을 보니 순간 아랫도리가 묵직하게 차올랐다.

“네 이름이 뭐냐.”

“에, 엘리아입니다.”

“엘리아…….”

음미하듯 그녀의 이름을 읊조린 눈빛이 조금씩 음험하게 바뀌었다. 버석하게 말라버렸던 감정이 끈적한 음욕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술에 취했나? 그래, 취했나 보군.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럴 리가 없지.’

어느새 엘리아의 가녀린 몸은 제 무릎 위에 올라와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커다란 눈망울이 꽤 마음에 든다.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줄 알았던 욕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제 팔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떨기만 하는 작은 여체에 구미가 당겼다.

‘갖고 싶구나. 이 아이를.’

자신이 웃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공작은 잔뜩 겁에 질린 엘리아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생각보다 달콤한 향이 나는 여체에 더 취하는 기분이다.

“고, 공작 각, 흡!”

앙증맞은 입술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대답 대신 거침없이 입을 맞췄다. 생각보다 몸이 더욱 뜨겁게 달궈진다. 청년이었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저만큼이나 뜨거워진 엘리아의 숨결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제 어깨를 움켜쥐고 굳은 채로 혀를 빼앗긴 그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하얀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고, 숨을 참고 있는지 미간이 좁아 들었다. 혀를 엉길 때마다 움찔거리는 여체에 아랫도리가 금세 성이 나버렸다.

예쁘다. 몹시도 예뻤다.

감은 눈도, 오뚝한 콧방울도, 발그레한 뺨도.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꽤 오래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 당기는 맛이니 어쩌겠는가. 정말 미친놈처럼 물고 빨았던 것 같다. 부풀 만큼 접 붙어있던 입술을 떨어뜨리자, 감겼던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떠진다. 어느새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하아… 우는 여자를 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먼저 간 세 아들의 어미가 툭하면 눈물로 제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붙들고 매달렸으니까.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엘리아의 눈물을 보는 순간, 사내의 정욕은 더 미친놈처럼 발기해 버렸다.

‘내가 홀린 것인가, 이 아이가 날 홀리고 있는 것인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앞의 여자를 품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것만 정확하게 느끼고 있을 뿐.

번들거리는 새빨간 눈동자가 점을 찍으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 잇자국을 새기고 싶을 만큼 새하얀 목덜미에 한 번. 입술만큼이나 맛있어 보이는 봉긋한 가슴에 한 번. 잘록한 허리 아래로 풍만하게 열린 엉덩이에 한 번.

“저, 그, 그만 내려주세요.”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애원에 순간 정신이 들었다. 눈물을 가득 매달고 애처롭게 바라보는 여자의 새파란 눈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녀를 위한 망설임은 아니었다.

하녀만 아니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만약 엘리아가 소문이라도 낸다면 그동안 쌓아온 위신과 체면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나.’

“엘리아.”

“흐흡, …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겨우 삼키고 힘겹게 대답하는 엘리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일단은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게 먼저인 것 같았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벽안을 보니, 영악하거나 입이 가벼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공작은 혹시나 모를 상황을 아예 차단하기로 했다. 일단, 겁먹은 동물과 가까워지려면 경계심부터 없애야 하는 법. 공작은 노련하게 그녀를 조련했다.

“미안하구나. 그러나 실수는 아니었다.”

“…….”

“술기운을 빌렸다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널 우습게 여겨서 한 행동은 아니란다. 난 네가 마음에 든다.”

“……!”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래졌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내렸다.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마저 일 정도로 그녀는 연약한 짐승 같았다. 그녀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주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저를 거부하지 못하는 엘리아의 모습에 묘한 희열감마저 감돌았다. 농익은 여인들만 상대하다 순수한 엘리아를 보니 다시금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과연 넌 이 순수함을 언제까지 간직할 수 있을까?’

이젠 그녀가 하녀라는 것조차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 여자를 품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다만, 이 관계는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될 일이었다.

공작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엘리아.”

“…네.”

“너를 내 품에 두고 싶구나. 너와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아.”

“……?!”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지는 엘리아가 귀여웠다. 공작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제 손길에 움찔움찔 떠는 여체 때문에 아랫도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 욕정을 억누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마. 내 것이 될 마음이 있다면 내일 밤 아무도 모르게 내 방으로 오너라.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약속하지. 널 아껴주겠다. 진심으로.”

“가, 각하.”

“그리고 오늘 일은 사과하마. 너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내가 너무 무례했구나.”

그녀의 몸을 다정하게 감싸 안은 공작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하아… 네가 올 때까지 마음 졸이며 있을 것 같구나. 이런 떨림은 처음이야.”

엘리아를 내보낸 공작은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끓어 넘치는 욕정을 홀로 가라앉히려니 영 괴로웠기 때문이다. 내일 정신 차리면 오늘 일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짓을 벌였다고 제게 욕설을 뱉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기다려졌다. 내일 그녀가 찾아올 시간이. 지금 상태론 그녀를 한 번이라도 품지 못한다면 분명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른 이에게 입을 놀린다면 죽이면 그만이다. 하녀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쯤이야, 자신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으니.

일단 그녀에 대해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여 찾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호승심에 공작의 얼굴엔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기대되는군. 과연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도톰하게 부푼 제 입술을 매만지며 공작은 그녀와 했던 키스를 곱씹었다.

* * *

광장에 도착한 엘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보는 제도의 화려함에 그녀는 잠시 넋을 놓고 두리번거렸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공작저 안에서만 생활하다가 생경한 도시의 풍경을 접하니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아… 시골 촌년이 따로 없네. 꼭 해외여행 처음 나온 기분이잖아?”

눈앞에 펼쳐진 멋스러운 건물들을 보니, 중세시대를 재현해 놓은 박물관 같았다. 넋을 놓고 이리저리 구경하던 그녀는 누군가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미쳤어, 지금 이럴 시간이 어딨어? 얼른 가야지!”

그런데 어디로 가지……? 흐음.

잠시 고민하다 엘리아는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빵집에 들어간 것은 주린 배도 채울 겸 목적지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빵을 여러 개 고른 그녀는 계산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기, 혹시 제도와 가장 먼 곳이 어디인지 아세요?”

“네……?”

빵집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너무 대놓고 물어봤나?

다짜고짜 제도와 가장 먼 곳을 물어보니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엘리아는 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제 어머니 소원이 제도를 떠나 먼 곳을 여행하시는 거라서요…….”

“…….”

에이 씨, 안 믿기나? 에라, 모르겠다.

뚱하게 쳐다보는 여자의 표정에 엘리아는 당장 눈물이라도 쥐어짜 낼 요량으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흑, 실은 어머니가 오래 못 사신대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제도에서 가장 먼 곳을 가보고 싶다 하시니, 자식 된 도리로 꼭 들어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제가 그동안 일만 해왔는지라 바깥세상을 잘 모른답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으로 어머니와 여행하고 싶은데…….”

순간,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엄마라는 이름만으로 금세 가슴이 뭉클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새삼 부른 엄마라는 호칭에 울컥했다.

“어머, 그랬군요.”

아까와는 달라진 여자의 표정에 엘리아는 마음을 추스르고 재차 물었다.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곳이 있을까요……? 달리 물어볼 곳이 없네요.”

“음…….”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하는 빵집 주인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봤다. 엘리아는 초조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르카마디오! 그곳으로 모시고 가세요.”

“네?”

“서쪽 가장 끝자락에 있는 도시예요. 작은 도시지만 예쁜 바다도 있고, 석양이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어머님이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정말요? 아……. 감사합니다!”

목적지가 생기자 엘리아는 두 손까지 모으며 활짝 웃었다.

“그런데 꽤 오래 가셔야 해요.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천천히 다른 도시들도 구경하면서 가면 될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니 기특하게 바라보는 것도 모자라, 빵을 몇 개 더 싸주기까지 했다. 그러곤 좋은 여행이 됐으면 좋겠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매일 미움만 받다가 저를 위로해 주는 낯선 이의 따스한 말을 들으니 또다시 가슴이 뭉클해졌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은 했지만, 떠나기 전 빵집 주인의 위로가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려요.”

빵집 주인이 넉넉하게 더 챙겨준 빵을 받아 들고 엘리아는 몇 번이고 더 인사한 후 그곳을 나왔다. 가슴이 묵직하게 차오르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후… 자꾸 정신 놓지 말자.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번에는 허름해 보이는 옷가게로 들어갔다. 거기서 엘리아는 온몸을 가릴 수 있는 긴 로브와 갈아입을 간편한 원피스, 그리고 속옷 등을 사고 짐을 담을 수 있는 가방까지 구매했다.

그래도 제법 모아놓은 돈이 있어, 보석은 제도에서 멀어지면 바꿀 생각이었다. 대충 준비를 마친 엘리아는 서둘러 마차 보관소로 향했다. 처음에 너무 정신을 놓고 구경하는 바람에 시간이 꽤 흘러버렸다. 마음이 조급해진 엘리아는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조심히 보관소 문을 두드렸다.

“저기…….”

“어디 가십니까?”

“아, 그게… 혹시 서쪽, 엄마야!”

갑자기 제 팔목을 잡아끄는 낯선 힘에 엘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작가의 사람 중 누가 벌써 따라온 줄 알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처음 보는 남자였다.

“또 보는군요?”

“…네? 누, 누구세요?”

혹시 저 모르게 저택에 사용인이 새로 들어왔었나 싶어 눈앞의 남자를 유심히 뜯어봤다. 분명 낯은 익은데 도무지 모르겠다. 그녀는 발랑거리는 심장께에 손을 얹고 미간을 좁혔다.

“이런, 기억 못 하시는군요. 섭섭한데요?”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누구냐고 되묻기도 그렇고, 기억은 안 나고,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도 왠지 공작저의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평범한 옷차림에 수더분하게 내려온 머리칼. 거기다 허리춤에 있는 검을 보니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남자.

기깔나게 잘생긴 건 아닌 걸 보니 딱히 주인공급은 아닌 것 같고……. 누구더라…….

“흠, 하긴 밤중에 잠시 보고 아까도 스치듯 봤으니 기억 못 하실 수도 있겠네요.”

밤중? 아까도 봤다고?

순간, 황태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달밤에 칼을 들고 제가 탄 마차를 벌컥 열었던 남자.

“아……?”

삿대질하듯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는다.

“이제 기억나십니까?”

그래, 이제야 기억났다. 밤중에 잠깐 스치듯 본 남자를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도 아니었거니와, 그때 봤을 때는 이런 웃는 모습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신을 쏙 빼놓았던 황태자를 두고 이 남자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엘리아는 눈앞 남자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의아한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그땐 웃음이 없는 죽음의 사자처럼 서슬 퍼런 기세로 무섭게 굴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방실거리는 건지.

원래 이런 남자였나?

아침에 봤을 때와도 전혀 달라진 모습이 새삼 이상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휴가라도 받은 건지, 세상 편안한 복장으로 왜 제 앞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를 모시는 기사가 여긴 대체 왜……?

엘리아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황태자와 공작은 꽤 가까운 사이다. 그러니 연회까지 갔겠지? 그리고 분명히 아침에 자신을 내려주고 떠났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다. 그런데 돌연 황태자의 기사가 광장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날 알아봤다? 로브로 머리까지 꽁꽁 싸맸는데 뒷모습만 보고 알아봤다고?

이쯤 되니 뭔가 의심스러우면서도 불안했다. ‘설마’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빙빙 맴돈다.

설마, 진짜로 내가 도망치려는 걸 알고 따라온 거야? 설마, 그럼 처음부터 알았다는 건가?

불안한 눈을 끔벅거리며 슬슬 뒷걸음질 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마차 보관소에는 왜……?”

“아, 저는 보, 볼일이 좀 있어서……. 그런데 기사님은 여기 왜……?”

“훗, 빅터입니다. 편하게 빅터라고 부르세요.”

아니, 그건 됐고요. 왜 왔는지나 말하라고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경계하자, 빅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 발 다가선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자 갑자기 옆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거, 안 갈 거면 다른 데 가서 얘기들 나누시죠?”

“아, 아니에요. 갈 거예요. 마차 주세요!”

“푸흡!”

뭐가 재미있는 걸까?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남자를 흘깃 째려보자, 그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인다. 그 밤에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느물거림에 기가 막혔다.

“그래서 어디 가실 거요?”

“아, 그게… 저기…….”

혹여라도 이 남자에게 목적지를 알려주면 안 될 것 같아 엘리아는 잠시 말을 늘였다. 힐끔거리며 빅터를 쳐다보자, 돌연 그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목적지는 타서 말씀드리죠. 기밀이라.”

“네……?”

“제가 조금 바빠서 그런데 일단 출발합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새치기도 아니고, 갑자기 먼저 나서서 마차를 가로채려는 남자가 어이없어 눈꼬리를 치켜 올리자 보관소 주인이 말을 흐리며 엘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이 새낀 뭐지?

제 마차를 빼앗길까 다급해진 엘리아는 빅터를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상냥하게 웃으며 보관소 주인에게 말했다.

“전 서쪽으로 가는 길에 가장 큰 도시에 내려주시면 돼요.”

“네……?”

보관소 주인의 눈빛이 난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이해 못 한 엘리아는 먼저 마차를 타기 위해, 다시금 말을 붙였다.

“금액은 얼마죠? 아, 도착해서 드려도 되나요?”

“쯧. 마차는 한 대뿐이요. 누가 탈 겁니까?”

“네?!”

갑작스러운 주인의 말에 엘리아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아니, 무슨 마차 보관소에 마차가 한 대뿐이야?

마치 모르는 남자와 숙박업소에 들어갔는데 ‘방은 하나뿐이요!’라는 소리를 들은 양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빅터가 주인에게 묵직한 주머니를 하나 건네며 쐐기를 박았다.

“바쁘니까 얼른 갑시다.”

뚱한 얼굴로 주머니 속을 확인한 주인의 표정이 금세 밝아진다.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엘리아는 휙 몸을 돌려 기본 도덕도 모르는 남자를 사납게 쏘아봤다. 당장 제도를 떠야 하는데, 어디서 개똥 같은 게 굴러와 제 마차를 가로채려 하니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저기요? 제가 먼저 왔거든요? 그리고 제가 먼저 얘기 중이었고요!”

“돈은 제가 먼저 지불했습니다.”

“그건 그쪽이 새치기한 거잖아요!”

“흐음, 그런가요?”

뭐야? 그런가요오……?!

세모꼴로 치켜뜬 눈으로 이를 까득 갈자, 그가 난처한 기색을 내보인다. 그러나 물러날 기미는 없어 보였다.

에이 씨!

“저기, 아저씨? 저도 지금 돈 드릴게요. 그러니까 저 태워주세요.”

다급하게 가방 안쪽을 뒤지며 주머니를 꺼내려는데, 난데없는 주인의 말에 엘리아의 움직임이 삐걱거리며 멈추었다.

“기사님, 혹시 가는 방향이 많이 다르십니까? 같은 방향이라면 같이 가셔도 될 것 같은데, 모르는 사이도 아닌 것 같고…….”

그가 준 돈이 꽤 아까운지 주인은 아쉬운 얼굴로 둘을 번갈아 봤다. 느낌이 싸하다. 여차하면 자신을 버리고 갈 것 같아 엘리아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그때 빅터가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음, 제가 가는 곳이 퐁뒤르센이긴 한데…….”

“……?”

“그거 잘됐군요! 어차피 아가씨가 가려는 목적지가 이 기사님 목적지랑 일치합니다. 퐁뒤르센이 서쪽으로 가는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죠.”

손뼉을 짝! 치며 환하게 웃는 주인의 얼굴에 엘리아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기밀이라며? 기밀인데 그렇게 쉽게 발설해도 되는 거야!?

“전 상관없습니다. 급하신 것 같은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뻔뻔하게 묻는 남자의 말에 엘리아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분명 먼저 온 건 자신인데, 왜 갑자기 저가 이 남자 마차에 얻어 타고 가게 된 것 같은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시죠, 아가씨! 혼자 가는 것보다 같이 가는 게 덜 적적할 겁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착착 이어지는 두 남자의 말에 엘리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어 잠시 망설이는데.

“싫으시면 먼저 가겠습니다. 전 그럼 바빠서 이만.”

“아, 아니요! 잠시만요!”

냉정하게 돌아서려는 남자를 엘리아는 다급하게 붙들었다.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제기랄.

끄응, 결국 생각지도 못한 동행자가 생겼다. 혼자 편하게 자면서 가고 싶었는데 하룻밤을 꼬박 앉아서 가게 생겼으니, 고문도 이런 고문이 따로 없었다.

뭔 놈의 마차만 타면 꼬박 앉아 가든, 누웠다 하면 뭘 꼽고 가든 한 번을 편하게 못 가는 건지.

엘리아는 죽을상을 쓰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나마 한 가지를 위안으로 삼자면 마차에 오른 후 남자가 한 말이었다.

“레이디 혼자 마차를 타고 다니는 건 위험합니다. 특히나 이런 먼 거리는 더더욱 말이죠. 마차를 노리는 못된 무리도 많고, 또 마부가 중간에 어떻게 돌변할지도 모르거든요.”

하아… 그래,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세상인데, 여자 몸으로 겁도 없이 나왔으니. 어쩌면… 정말로 중간에 몹쓸 짓을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음이었다.

뭐, 이 남자도 딱히 믿음이 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태자를 모시는 기사가 뭐 어쩌진 않을 거란 막연한 믿음은 있었다.

여유롭게 눈을 감고 앉아있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다음 이동할 곳을 자세히 알아보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안 했으니, 거기서 헤어지면 더는 자신의 행적이 노출될 일은 없을 터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제는 돌아가지도 못해. 걸리면 그냥 죽는 거라고. 후우…….

위험천만한 여행길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안색이 굳어졌다. 어쩌면 세 공자의 품이 가장 안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러다 곧 고개를 털고 빵집 주인이 말한 곳을 떠올렸다.

바다가 있고, 석양이 아름다운 곳. 그곳에 아담한 집을 구해 혼자 살면 정말로 행복할 것 같았다.

작은 카페를 하나 차릴까? 혹시 보석을 다 팔면 일 안 해도 평생 먹고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승차감이 좋지는 않았지만, 공작가의 마차를 탔을 때보다 마음만큼은 훨씬 편했다.

그렇게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며칠을 제대로 못 잤으니 피곤할 수밖에. 얼굴은 초췌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잠든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빅터의 얼굴엔 그날 밤처럼 서슬 퍼런 기색이 맴돌았다.

* * *

엘리아가 퐁뒤르센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선 체이스가 낭패 서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체이스의 표정만으로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챈 공작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죄송합니다.”

공작의 날카로운 눈매가 치켜 올라가자, 흠칫 몸을 떤 체이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이내 보고를 시작했다.

“하녀가 도망쳤습니다.”

“뭐?”

“그래서 바로 뒤따라갔는데… 놓쳤습니다.”

드물게 말을 늘이고 자조 섞인 표정을 짓는 체이스의 모습에 공작은 혀를 내둘렀다. 그것보다 엘리아가 도망쳤다는 말이 더 어이가 없었다.

“누구냐.”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네가 당했을 정도면 보통 놈은 아닌 모양이군. 그런데 왜 널 공격한 거지?”

“…….”

“쯧!”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차곤 담배에 불을 붙이는 공작의 냉랭함에 체이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서도 남은 보고를 마저 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후… 뭐냐.”

“광장에 내려줬다는 마부의 말을 듣고 알아봤는데, 웬 남자와 함께 마차를 탄 것 같습니다.”

“남자……? 그게 누구지?”

“죄송합니다.”

그동안 무슨 일을 맡기든 실수 없이 임무를 마쳤던 체이스의 입에서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자, 공작의 표정이 더욱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실수는 용납 안 하겠다.”

“네.”

“잡아와.”

“네.”

재빠르게 집무실을 나온 체이스는 채 몇 걸음도 옮기지 못한 채 다시 발이 묶였다.

자신의 목에 닿은 서슬 퍼런 칼날에 체이스는 칼의 주인을 쳐다봤다. 그러나 공작 앞에서와는 다르게 그의 표정은 전혀 동요 없이 무감하고 태연했다.

“이대로 네 목구멍에 쑤셔 넣고 싶구나.”

“…….”

아힌의 서늘한 말에도 체이스는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서, 아직은 죽이면 안 되겠지?”

“드릴 말씀 없습니다.”

“그래, 그래. 그냥 묻는 말에나 대답해.”

“…….”

여전히 칼날은 목을 당장이라도 벨 듯 박아놓고 아힌은 친근하게 체이스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서, 엘리아가 어떤 새끼랑 마차를 타고 어디를 갔다고?”

“후… 들으신 대로입니다. 이만 보내주십시오.”

“흠, 잘못 들은 게 아니란 얘기네? 그래서 넌 지금 엘리아를 잡으러 가는 건가?”

“…….”

“고지식한 새끼. 체이스?”

“네.”

아힌이 체이스의 어깨를 더욱 끌어당겼다. 누가 보면 꽤 다정한 사이라고 오해할 법한 장면이었다. 목에 댄 칼만 없었다면 말이다.

“만약 엘리아와 네가 함께 있는 꼴을 내가 보게 된다면 말이야.”

마치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목소리가 다정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그날 너의 목을 베어 내 친히 아버지의 침실에 놓아드리지. 그래도 아끼는 부하가 죽었는데, 얼굴은 보셔야 하지 않겠나?”

“……!”

매번 감정 없는 동물처럼 태연하게 굴던 체이스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걸 느낀 아힌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내 꽉 잡았던 체이스의 어깨를 놔주곤 칼을 거둬 제 어깨에 턱 걸치며 여상하게 말한다.

“흐음, 엘리아랑 함께 간 놈 목부터 따와야겠군. 부디 내 눈에 띄지 않길 바라. 체이스.”

“이만 가보겠습니다.”

체이스가 재빠르게 사라지자, 이를 드러내고 웃던 아힌의 얼굴이 금세 서늘하게 바뀌었다. 문득 며칠 전 엘리아가 했던 말kjmdm이 떠올랐다. 그는 끓어오르는 살기를 그대로 드러낸 채 제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앙큼한 엘리아. 정말로 도망갈 줄은 몰랐는데? 그래, 어디 한번 꼭꼭 숨어봐. 그 탐스러운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잡히는 순간, 다시는 도망칠 생각 따윈 못 하게 만들어주지.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시작된 양, 아힌의 얼굴에는 음산한 미소까지 드리워졌다. 만약 엘리아가 이 표정을 먼저 봤다면 도망칠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못했을지도.

손에 쥔 칼날이 날카롭게 번뜩거린다. 이 칼날에 누구의 피가 가장 먼저 스밀까 생각하니 오랜만에 설레기까지 했다. 서둘러 아론과 프레드를 부른 아힌은 옷을 챙겨 입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엘리아가 우리랑 색다른 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힌의 뜬금없는 소리에 프레드와 아론의 인상이 똑같이 찌푸려졌다. 오늘 저택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러 나갔던 형이 난데없이 칼을 뽑아 들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웬 엘리아 타령인지.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다고 혀를 내두르려다.

“엘리아가 도망쳤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뒤이어 나온 아힌의 말에 두 형제도 바삐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옷을 챙겨 입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정보를 주고받았다.

“체이스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웬 남자랑 함께 갔다는군.”

“뭐?!”

“하……!”

각자 칼을 챙겨 들던 프레드와 아론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남자’란 말에 두 남자의 미간이 살벌하게 구겨진다. 그러다 의아한 듯 프레드가 물었다.

“엘리아가 돈이 어디 있다고? 아니면 돈 많은 남자를 문 건가? 아니, 언제? 걔가 밖에 나간 적이 있었나?”

“돈 될 만한 게 있었겠지. 월급도 꼬박꼬박 모아뒀을 거고.”

“돈 될 만한… 거? 아, 씨발!”

별안간 프레드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무언가 번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 머리털을 쥐어 잡고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그러다 아힌을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럴 줄 알았나. 알았다면 목걸이는 안 줬겠지.”

“뭐?”

이번엔 아론이 눈을 치뜨곤 대체 무슨 말이냐고 두 형제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만만한 게 동생이라고 프레드를 더 죽일 듯 노려보자, 아론의 살벌한 기세에 한숨을 폭 내쉰 프레드가 이실직고했다.

“보석을 챙겨갔을 거야. 내가 좀 많이 줬거든. 아, 팔찌도 줬지. 하! 씨이발! 엘리아 이거 안 되겠네? 내가 준 걸 가지고 남자 하나 물어서 튀었다고?”

엘리아 수중에 꽤 많은 돈이 있다는 것까지 파악하자, 더 다급해진 세 공자는 서둘러 마구간으로 향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일단 공작보다 자신들이 먼저 찾아야 했다.

“쉬지 않고 바로 간다.”

“알았어!”

“이랴!”

공작에게 인사 따윈 깔끔하게 무시하고 세 공자는 서둘러 영지성을 빠져나왔다. 달리는 속도만 보면 반나절이면 제도에 도착할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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