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위기는 곧, 기회
여전히 승차감 좋고, 내부 화려하고, 움직이는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공작가의 고급스러운 마차 안.
엘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다시 한번 제 모습을 아래서부터 슬쩍 훑어보곤 얼굴을 붉혔다. 난생처음 입어본 드레스라 어색하면서도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제 목을 감싸고 있는 화려한 목걸이를 조심스레 쓸어보곤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분주한 하녀들의 손길에 제 모습이 변하는 과정을 엘리아는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때 빼고 광내는 정도까진 아니었어도,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제 모습이 탈바꿈하는 광경은 몹시 신기했다.
숱 많고 풍성한 머리칼이 귀찮아 대충 땋고만 다녔는데, 오늘은 머리에 향유를 발라 부드럽게 손질하고 우아하게 틀어 올렸다. 몇 가닥 흐르도록 내린 머리칼이 그녀의 분위기를 더욱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줬다.
이곳에 온 이래 처음 얼굴에 화장도 해보고 온몸에 금가루를 뿌렸다. 그것만으로도 엘리아의 모습은 아주 아름다웠다. 시큰둥한 얼굴로 치장해 주던 하녀들마저도 엘리아의 모습에 입을 쩍 벌릴 정도였으니까.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흥분했던 엘리아는 아힌이 들고 온 드레스를 보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입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시 본 드레스는 넋을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한 하녀들의 도움으로 드레스까지 입고 거울을 보는 순간에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제일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자신의 모습이 흡사 제국의 황녀님이라도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만으로도 너무 완벽한데 마지막 정점은 아힌이 들고 왔다.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보석이 빛을 잃었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를 손수 목에 걸어주기까지 했다.
다이아몬드로만 만들어진 목걸이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발했다. 마치 아힌의 말이 기분 나쁘다는 양 아주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다. 백색의 다이아몬드들 사이에 여왕이라도 되는 양 제법 알이 큰 붉은 다이아몬드가 중간에 딱 박혀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고결해 보이는 목걸이에 엘리아의 목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제 몸값보다 비싸 보이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으려니 부담스러우면서도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때, 제 긴장을 풀어주는 아힌의 음성이 그녀의 정신을 또 한 번 쏙 빼놓았다.
“이번 일을 잘 수행하는 조건으로 네게 주는 선물이다.”
“네……?”
“흐음, 생각보다 더 아름답군.”
드러난 어깨 위로 남자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떠나간다. 아힌도 한껏 치장한 탓에 꼭 어느 나라의 왕자님 같았다. 그런 남자가 유혹하니 엘리아는 또 정신이 아찔했다. 눈 호강엔 더없이 만족스러운 세 공자였지만, 정신 건강이나 몸 건강엔 아주 해로운 남자들이었다.
옆에 하녀들이 있든 말든 상관없는지 그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결국, 조안나가 하녀들을 데리고 방을 나서는 소리에 나가있던 엘리아의 정신이 그제야 돌아왔다.
이제 곧 웨딩 로드를 걸어야 할 신부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빳빳하게 굳어있는 엘리아 앞으로 아힌이 다가섰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훑어 내린 그가 다시 가까이 다가와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말했다.
“같이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군. 프레드랑 가있어. 곧 만날 거야.”
그의 얼굴엔 아쉬움과 미안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그날 집무실 밀실에서 미친놈처럼 저를 탐하던 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그 이후로 뭔가 달라졌다.
불과 며칠이었지만, 그동안 아힌은 그녀를 찾지 않았다. 아니, 얼굴은 봤어도 탐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꼭 무언가를 다짐한 듯 다정하게 굴면서도 그녀의 몸엔 손도 대지 않았다.
무슨 꿍꿍인가 의심스러웠지만, 엘리아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곧 떠날 건데 그의 심중까지 헤아릴 필요가 뭐가 있겠나.
그런데 대체 어딜 가려는 거지?
문득, 그의 변한 행동이 오늘 가는 목적지와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엘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응?”
“어딜 가는 건가요……?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분명 이번 일을 잘 수행하는 조건으로 이 목걸이를 주는 거라고 했다. 좋게 포장해서 선물이지, 만약 일이 잘못되면 도로 빼앗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꼭 해내고 싶었다. 이 목걸이만 있으면 더는 프레드가 준비해 둔 그 기상천외한 옷을 입고 발정하지 않아도 될 뿐더러 당장이라도 이곳을 뜰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리아의 눈이 목걸이만큼이나 반짝 빛났다.
“공작령으로 갈 거다.”
“네……?”
“그리고 네가 할 일은…….”
불현듯 공작이 떠올랐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그 남자 때문에 계획을 서두른 건데 호랑이 굴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니 영 내키지 않았다.
일순 목에 걸린 목걸이가 반짝 빛을 뿜었다. 거울 속에 보이는 목걸이를 홀린 듯 바라보자 없던 용기가 샘솟는지 엘리아의 눈빛이 목걸이만큼이나 반짝거렸다.
설마 당장 죽이기야 하겠어? 이러고 간다고 당장 시집보내거나 나를 취하진 않을 거야. 그래, 아들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할 리가.
목걸이의 유혹은 실로 대단했다. 호랑이 굴이라도 잠시라면 들어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떻게든 살아 나오기만 한다면 까짓것 못 갈 것도 없었다. 그리고 제 옆에는 미친 짐승 세 마리가 저를 단단히 지키고 있을 게 분명할 테니까.
무엇보다 자신에겐 선택권이 없었기에 엘리아는 잠시 멈춘 아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만히만 있으면 돼.”
“네……?”
“그냥 내 옆에 가만히 서있으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어렵지 않지?”
무슨 말, 무슨 짓.
분명 쉬운 일이다. 그런데 저 두 단어의 의미가 그리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이런 비싼 목걸이를 주면서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목걸이의 값은 아무래도 무슨 말과 무슨 짓에 대한 것일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아힌의 말대로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또 무슨 짓을 하든 옆에 인형처럼 서있을 수밖에.
불안해하는 엘리아의 기색을 느꼈는지, 아힌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붉은 뺨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곤 상체를 숙여 조심스레 그녀의 몸을 꼭 껴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치 제 연인에게 대하는 양.
“이번 연회에서 네가 가장 아름다울 것 같군. 난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의 남자가 될 테고.”
아힌의 수그린 상체 뒤로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아힌의 말을 곱씹었다.
‘연회라…….’
그제야 하나는 알 것 같았다. 그가 말한 ‘무슨 짓’의 의미를.
자신은 아힌의 파트너로 공작령의 연회에 참가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잘하면 이번이 내 제삿날일 수도 있겠구나. 정말 호랑이 굴이었네.
대공작가의 연회다. 거기엔 수많은 귀족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런 곳에 공작가의 소공작이 하녀를 파트너로 데려간다면. 그리고 거기서 그가 예고한 ‘무슨 말’을 한다면?
아아… 하!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 저릿저릿한 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꾹 누르고 입 안 살을 질끈 깨물었다. 분명 세 공자와 공작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일을 꾸미는 건 공작을 엿 먹이기 위해서라는 건데.
…분명 알 텐데. 이러면 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아힌도 분명 알 텐데.
아힌의 뒷모습을 보는 엘리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다정한 척 굴었던 것인가 보다. 이런 화려한 옷을 입히고 목걸이로 유혹한 거였다. 결국 잡아먹을 만치 잡아먹히고 마지막엔 이용당해 버려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처음부터 이들에게 그런 존재였었는데, 새삼 뭐가 이리도 화가 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나마 이들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제 멍청한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다.
짐승의 자식은 그저 짐승일 뿐인 것을. 그동안 그렇게 겪어놓고선 대체 뭘 믿은 건지. 하!
싸늘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시선이 제 목에 걸린 목걸이로 향했다.
한참을 상념에 젖느라 감았던 눈을 뜨자, 잠시 시야가 뿌옇게 보였다. 그러다 곧 제게 닿아있는 눈빛에 침을 꼴깍 삼켰다. 뭔가 못마땅한 듯 프레드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았다. 입꼬리는 일자로 꾹 다물려있고 눈빛은 성난 짐승처럼 형형했다.
“엘리아.”
“네.”
“옷이 그게 뭐야?”
“…네?”
“하여간 형도 참. 이쁜 것만 추구하면 그게 옷이야? 실용성이 없잖아, 실용성이.”
희번덕거리며 아래위로 훑어 내리는 프레드의 눈빛엔 불만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가 말한 실용성이라는 건 쉽게 덮치기 어려운 옷이라는 얘기일 테지.
하긴, 풍성하게 펼쳐진 치마를 들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치마 속으로 들어가자니 지금 멋들어지게 단장한 프레드의 외모가 우스꽝스러운 꼴로 변할 것이 분명했으니. 난공불락이 돼버린 아름다운 드레스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거기다 잔뜩 조여놓은 허리 위로 탐스럽게 드러난 가슴 둔덕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니 이미 아랫도리가 묵직하게 솟아오른 프레드의 심기가 사나울 만도 했다. 눈앞에 맛있는 먹잇감을 두고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인 것도 모자라 이대로 하루를 꼬박 같이 있어야 하니, 성이 날 수밖에.
엘리아는 의도치 않게 프레드를 고문하고 있었다.
“엘리아.”
“네.”
“잠깐 맛만 보자.”
“네……?”
“가만있어.”
“도, 도련님!”
갑자기 다가오는 프레드의 손을 피해 후다닥 몸을 물리자, 프레드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허공에서 멈춘 손이 순순히 물러났다. 이대로 받아줬다간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는 산발이 될 것이 분명했고, 옷은 쭈글쭈글 구겨져 지금의 빛을 잃을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을 제대로 해내지 않으면 목에 걸린 목걸이가 제 손을 떠날 것이 분명했기에, 엘리아는 단호한 눈빛으로 프레드를 마주 봤다. 어차피 사지로 몰린 거, 기어이 살아남아 목걸이라도 들고 튈 생각이었다.
처음으로 그를 거부하자 프레드의 인상이 더욱 사나워졌다. 당장이라도 이 옷을 찢어발기면 어쩌나 걱정이 드는 찰나, 돌연 그가 피식 웃는다. 마음이 놓이기도 잠시, 하얀 연미복 재킷 속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프레드가 이내 무언가를 꺼내더니 쑥 내밀었다.
프레드의 손엔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상자와 프레드를 번갈아 보자 그가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아…….
탄성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은 엘리아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반짝반짝한 줄을 빤히 쳐다봤다.
“어때?”
“네?”
“내가 준비한 선물은 이거야.”
“선물…이요?”
“응. 그 싸구려 보석들 말고 내 마음이 담긴 진짜 보석을 준비했지.”
싸구려……? 그럼 그 보석들이 다 싸구려였단 말이야?
찌푸려지려는 인상을 겨우 수습한 엘리아는 일단 눈앞의 보석에 집중했다. 목걸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이것 또한 꽤 비싼 값을 치른 듯 빛을 뿜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줄까……?”
“…….”
침을 꼴깍 삼킨 엘리아의 시선이 도로록 굴러 프레드에게 향한다. ‘줄까?’라고 묻는 걸 보니, 이놈도 이것에 대한 값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무 대꾸가 없자 피식 웃은 프레드가 다시 상자의 뚜껑을 덮는다. 그러곤 상자의 각진 모서리를 잡곤 빙그르르 돌리며 약 올리듯 방글방글 웃었다.
속에선 짜증이 치밀었지만, 엘리아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프레드를 바라봤다. 달라고 구걸하기도 싫고, 됐다고 거절하기도 싫었다. 하나라도 더 챙겨 나가서 놈들의 뒤통수를 뻥 걷어차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속내를 감춘 엘리아는 그저 침묵으로 그의 반응을 살폈다.
“내가 말하는 거 하나만 들어줘.”
역시나.
기어이 속내를 드러내는 남자를 향해 혀를 차면서도 엘리아는 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말이에요?”
“공작령에 도착할 때까지 젖만 줘.”
“…네?”
“약속할게. 진짜 다른 데는 안 건드리고 딱 젖만 빨게. 응?”
애처로운 표정으로 애걸하는 남자가 시선을 다시금 엘리아의 풍만한 젖가슴으로 보냈다. 그러곤 연신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신다.
하……?
프레드의 어이없으면서도 놀라운 말에 엘리아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녀가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 프레드가 지금 부탁을……?
막말로 그가 마음만 먹고 덤비면 자신은 언제나처럼 그의 아래에 깔려야 했다. 목걸이를 빼앗기든, 옷이 찢어지든 프레드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니. 그런데 그가 부탁이라는 걸 하다니. 그것도 딱 젖만 빨겠다며 저렇게 애처롭게 바라본다.
얘도 죽을 때가 됐나……? 아니면 또 무슨 뒤통수를 치려고 이래?
아힌 때문에 생긴 배신감이 프레드에게까지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녀의 불신 가득한 표정에 프레드가 이번엔 또 다른 미끼를 던졌다.
“내 방에 있는 네 옷 있지? 거기에 달린 보석도 다 너 줄게. 아니, 원래 너 주려고 산 거야. 이것보다는 못하지만, 그 보석들도 열 개 정도 팔면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만큼 질 좋은 거라고.”
뭐어……?! 열 개로 집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의 보석을 싸구려라고 했단 말이야? 그럼 도대체 저 보석은 얼마라는 얘기야?
엘리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번쩍 뜨였다. 아무리 태연한 척 애를 써도 돈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제가 숨겨둔 주머니 안에 있는 보석만 열 개가 넘는다. 그리고 프레드 방에 있는 옷에 달린 보석들만 다 합해도 족히 백 개 정도는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보다 훨씬 질 좋은 보석이 하나는 자신의 목에, 또 하나는 프레드의 손에 있었다.
로또에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순식간에 재벌이 된 기분이었다. 찬란한 미래가 다시금 그려졌다. 역시 인생은 한 방이다.
그녀는 넋 나간 정신을 바로잡고 프레드를 바라봤다.
정신 차리자. 일단 챙길 거 다 챙기고 어떻게든 살아 나오면 돼. 난 할 수 있어.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고.
비장하게 다짐한 엘리아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덮칠 수 있음에도 저렇게 간절하게 애원하니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당당하게 손을 내민 엘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젖 줄 테니 보석 내놓으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입꼬리가 비죽 올라간 프레드는 제 손에 있는 상자를 다시금 열고 보석을 꺼내었다. 아름답고 영롱한, 이름 모를 보석이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그는 제 손에 들린 보석을 엘리아가 내밀고 있는 손목에 채워줬다. 프레드가 준비한 것은 팔찌였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네……. 너무 아름다워요.”
“그럼 이제 줘야지.”
“네.”
대답하기 무섭게 가까이 다가앉은 프레드가 입맛을 쩝쩝 다신다. 밝히는 거 외엔 딱히 머리를 쓸 줄 모르는 프레드를 보니 불현듯 궁금했다.
너도 알고 있는 거니? 아론도 알고 있어? 너희 셋이 같이 계획한 거야?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동안 아론이 보여줬던 말과 행동들, 틱틱거리면서도 저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프레드의 표정들이 다 거짓이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이들에게 잠시라도 설렜던 자신이 너무 등신 같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작 몇 번 잘해 줬다고 그새 놈들을 믿었나 보다. 고달프고 힘겨운 상황에 가장 괴롭히고 힘들게 한 놈들이 조금 잘 대해줬다고 그새 마음이 헤벌쭉 풀렸던 모양이다. 그러니 지금도 이 둘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거겠지.
그래, 차라리 잘됐다. 이젠 정말 미련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도 안 보고 가리라. 절대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제 젖을 꺼내 쭙쭙 빨아대는 프레드의 머리통을 보며 엘리아는 쓰게 웃었다. 매번 발정하던 몸도 이번엔 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 걸 보니.
다음 날 정오가 돼서야 공작령에 도착한 마차는 본성 밖에 멈춰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피곤함에 전 엘리아는 눈이 퀭한 게 생기를 잃은 시든 꽃 같았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여기 와서 준비를 시키든지,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짜증이 치밀었다. 기껏 예쁘게 올린 머리가 망가질까 봐 눕지도 못하고 내내 허리와 목을 꼿꼿하게 세운 채 하루를 넘게 앉아있었더니 온 삭신이 쑤셔 죽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모자라 오는 내내 틈만 나면 젖꼭지를 물고 빠는 프레드 때문에 쓰라릴 정도로 유두가 발갛게 부어올라 신경도 예민해지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아…….”
“엘리아, 초췌한 모습이 더 꼴리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는 프레드의 말에 저도 모르게 사납게 그를 쏘아봤다. 그러자 그의 눈이 똥그래진다. 처음 보는 엘리아의 표독스러운 얼굴에 그도 당황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엘리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잠도 못 잔 탓에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그것도 하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또라이 같은 프레드에게 덤볐으니…….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엘리아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저번처럼 그가 돌변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엘리아.”
“네…….”
“날 봐야지.”
서늘하게 가라앉은 프레드의 음성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습관이 돼버린 몸은 또 잔뜩 웅크려진다. 겨우 눈을 뜨고 그를 마주 봤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목소리는 사나워졌는데 바라보는 눈빛은 어딘가 이상했다.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또 미친놈처럼 날뛰면 무척 곤란할 테니까. 엘리아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피곤해서 제정신이…….”
“엘리아.”
“네.”
“다시 해봐.”
“뭘…요?”
눈만 끔벅거리자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음성으로, 그러니까 아주 기대에 찬 음성으로 프레드가 보채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다시 화내 보라고.”
“네?”
“얼른 해봐. 너 화내는 거 보니까 내 심장이 두근거렸어. 이건 꼴리는 거랑 다른 거라고. 나 이런 감정 처음이야. 그러니까 다시 해봐. 응?”
미친 거야……?
자신보다 더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프레드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또라이 같은 짓인지.
어색하게 웃는 찰나, 느닷없이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두 남녀가 말도 없이 문을 연 남자를 쳐다보자 마차 안의 오묘한 공기를 느낀 아힌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해? 안 나오고.”
“형! 빨리 왔네? 우리보다 늦게 출발하지 않았어?”
“역시 황궁 물 먹은 말들이라 그런지 빠르긴 엄청 빠르더군. 우리도 말 좀 바꿔야겠다.”
“그래? 그럼 난 이번에 백마 하나 살래.”
남의 집 말이 조금 더 빠르다는 이유로 멀쩡한 말들을 다 갈아치우려는 아힌이나, 백마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장난감도 아닌 것을 덥석 사겠다는 프레드나, 둘 다 한심하면서도 그 재력이 부러운 엘리아는 그들만의 대화에서 슬쩍 빠졌다.
고개를 숙이자 제 목에 걸린 목걸이와 제 손에 달린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것들을 척척 살 수 있는 건지. 마치 현대의 철딱서니 없는 재벌 집 아들들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럼 난, 신데렐라인가……?
신데렐라는 개뿔. 곧 그 재벌 아들들의 아버지에게 목이 따일지도 모르는 비운의 조연이겠지. 주인공은 죽지 않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엘리아가 혹시 엑스트라가 아니었나 싶다. 안 그러면 그렇게 초반에 휙 죽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개떡 같은 소설에 빙의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엘리아.”
“…네?”
아힌의 부름에 퍼뜩 고개를 든 엘리아가 눈을 똥그랗게 뜨자, 이번에는 아힌이 피식 웃는다. 예전 같았으면 저 웃음에 또 의미를 부여했겠지. 왜 저렇게 자주 웃는 걸까? 그의 속내가 궁금했을 터였다.
그런데 호랑이 굴에 온 이상 더는 저 웃음이 곱게 보이질 않았다. 그저 자신을 이용하려는 악마의 미소처럼 보일 뿐. 최대한 마음을 숨기고 그의 미소에 배시시 웃는 거로 화답했다.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네. 조금요.”
아힌의 물음에 대답하자마자 프레드의 불만 섞인 음성이 툭 튀어나왔다.
“아, 형! 그러니까 뭐 저렇게 불편한 옷을 입혔어? 애가 눕지도 못하고 뒤로 기대지도 못하고 오는 내내 저러고 있었다고!”
“그 덕에 네 좆은 막을 수가 있었겠지.”
“…에이 씨.”
이때다 싶었는지 실용성 없는 드레스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려던 프레드가 제 형의 이죽거림에 와락 인상을 썼다. 그런 프레드를 놀리면서 아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오늘따라 연신 웃음을 보였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질수록 엘리아의 가슴엔 서늘함이 차올랐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 같아 가슴이 선득하다.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살길을 찾아야 했다. 엘리아의 작은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 * *
해가 기울고 별무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영지성의 불빛이 환하게 켜지고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다. 완벽하게 연회 준비를 마친 사용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일찍 도착한 귀족들과 황태자는 공작과 담소를 나누며 껄껄 웃었다.
초대받은 귀족들이 속속 도착하자 연회장의 분위기는 더욱 왁자지껄하고 화기애애해졌다. 그러나 2층 난간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론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공작을 둘러싼 고위 귀족들을 매섭게 바라봤다. 머리 숙여 인사하는 그들만 봐도 아직 공작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어느 나이 지긋한 귀족이 공작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한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가냘프게 생긴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유독 그 귀족과 영애에게 반가운 낯을 보이던 공작이 주위를 쓱 둘러본다. 그러다 곧, 난간에 서있는 아론과 눈이 마주쳤다. 공작이 얼른 내려오라는 무언의 눈짓을 보내더니 이내 피식 웃는다. 그러곤 다시 시선을 돌려 수줍은 듯 웃는 여자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흥, 저런 웃음도 지을 줄 아셨던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제 아비의 미소에 심사가 뒤틀렸다. 눈살을 찌푸린 아론은 어쩔 수 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 연회에 참석한 이상 일단은 제 아비의 연극에 동참해야 했다. 곧 공작 옆에 다가서니 귀족들이 길을 열어주듯 넓게 비켜섰다. 그리고 진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자한 미소를 지은 공작이 먼저 연기를 시작했다.
“어디 있었느냐. 일찍 내려와서 손님들께 인사하지 않고.”
“죄송합니다. 정리할 것이 있어서 조금 늦었습니다.”
“원, 녀석도. 오늘 같은 날까지도 일을 손에서 놓질 않는 게냐.”
“하하하! 부럽습니다. 세 공자가 이리 번듯하게 자라서 공작 각하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제대로 연기할 작정인지 다정한 아비 행세를 하며 멋쩍게 웃는 공작의 말에 한 귀족이 호탕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친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했다. 물론 한 사람만 빼고.
“크흠. 내 정신 좀 보게. 나이가 드니 이렇게 정신이 없구만. 인사하거라. 오르벨 백작과 오르벨 영애니라.”
이미 다 계산하고 있었으면서 능청을 떠는 공작의 모습에 아론의 얼굴엔 썩은 미소가 드리웠다. 하지만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아론 또한 아주 출중한 연기로 백작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론웨일 폰 그라스 베르타른입니다.”
“반갑소, 베르타른 공자. 해롤드 오르벨이오. 아, 그리고 여기는 제 딸아이입니다.”
백작의 소개로 시선을 돌리자 아까보다 더욱 붉어진 얼굴의 영애가 다소곳이 인사를 하며 제 소개를 했다.
“이리나엔 아시스 오르벨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두 선남선녀의 인사가 끝나자 아까부터 공작에게 꼬리를 살랑거리던 한 귀족이 또 한 번 요란스레 웃으며 흥을 올렸다.
“하하하! 곧 베르타른 공작가에 식구가 늘겠군요. 이제 예쁜 꼬물이들만 나오면 공작 각하께서는 더 이상 원이 없으시겠습니다?”
“허허, 그럴지도.”
귀족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친 공작이 힐끔 아론을 쳐다보며 픽 웃었다. 제 아들의 심기가 지금 얼마나 사나운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여긴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아론 너는 오르벨 영애와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가시죠, 영애.”
“네, 공자님.”
아론은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며 이리나를 이끌었다. 마지막까지 아주 잘 어울린다고, 부러워 죽겠다고 떠들어대는 귀족의 음성에 아론은 비릿하게 웃었다.
저리도 잘 보이고 싶을까. 나름 고위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출입문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아론은 이리나에게 와인 잔을 건네며 주위를 돌아봤다. 대충 먹이고 분위기 봐서 밖으로 나갈 심산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술은…….”
“술을 못 마십니까?”
“네, 아버님께서 술은 배우지 말라 하셔서…….”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수줍은 듯 고개를 돌리는 이리나의 어여쁜 얼굴을 보며 아론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와인 한 잔을 벌컥 마셨다. 잠깐 같이 있었을 뿐인데 벌써 지겹고 짜증이 일었다.
그냥 대충 인사하고 나갈까 고민하던 차였다. 꼼지락거리던 손이 아론의 소맷부리를 슬그머니 잡아당긴다. 고개를 돌리자 뭐가 그리 수줍은지 양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저기… 공자님.”
“네.”
“제게 궁금하신 거… 없으세요……? 앞으로 같이… 살게 되면…….”
‘살게 되면?’
얼굴은 연신 붉히면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뻔뻔하게 늘어놓는 이리나의 모습에 아론은 실소를 흘렸다. 말하는 모양새도, 수줍은 듯 배배 꼬는 몸도 왜 이렇게 꼴 보기가 싫은 건지.
제 옷을 꼭 쥔 손을 짜증스럽게 쳐다봤다. 마음 같아선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많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아론은 일부러 그녀가 잡은 쪽의 손을 들어 와인 잔을 쥐었다. 그 탓에 이리나의 손이 자동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가 다시 한 잔을 쭉 들이켜고는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못 박힌 듯 저를 빤히 보던 이리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제 웃음에 뭔가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제게 뭔가 바라는 듯한 말간 얼굴을 보니 그에 화답해 주고 싶어졌다.
아론은 커다란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바싹 다가섰다. 움찔 떨면서도 꼼짝 않고 서있는 여자의 행동에 욕설이 치밀었다. 이리나의 이름을 듣는 순간은 긴가민가했는데 술을 못 마신다는 그녀의 말에 문득, 예전에 프레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형! 오르벨 영애라고 알아? 영식들이 그러는데 그 여자랑 안 자본 영식이 없대. 술만 마시면 알아서 벗고 덤빈다나 뭐라나. 그런데 그 여자가 글쎄, 큭큭큭. 형을 좋아한다던데?”
가증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상대해 주는 수밖에. 여전히 바르르 떠는 가녀린 어깨를 보며 아론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미 혼담이 오간 모양이군요.”
“네? 아… 네. 저도 오늘에서야…….”
“흐음, 그럼 한 가지 무례한 질문 좀 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성심껏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여성상이 있어서 그런데, 오르벨 영애가 맞춰줄 수 있을지 궁금해서 말이죠.”
“그게 뭔데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순진하게 물어오는 이리나의 얼굴에 그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부끄러운지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진다.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아론은 작게 속삭였다.
“잘 느끼십니까?”
“네……?”
“물이 많냐고 물은 겁니다. 만지면 금방 젖는지, 만져주는 대로 잘 느끼는지?”
아론의 적나라한 질문에 이리나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점점 몽롱하게 풀리고 있었다. 아랫도리를 쑤시면 이미 흥건하게 젖어있을지도.
누가 벌써 만지기라도 했나?
봉긋하게 드러난 가슴 둔덕이 헐떡이듯 들썩인다. 혹시나 했는데 프레드가 헛소리를 전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 볼수록 역겨운 여자였다.
아론은 이래서 귀족 레이디들이 싫었다. 겉으론 고고하고 우아한 척 내숭 떨면서 뒤로는 몸 파는 길거리 여자보다 더 난잡하게 노는 더러운 족속들.
‘나를 좋아한다고? 흥, 그럼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볼까?’
더는 거리낄 것이 없어진 아론은 태연하게 다음 질문을 했다.
“아, 그리고 나와 결혼하면 제 형하고 아우의 좆도 받아줘야 하는데 그건 괜찮겠습니까? 우리 형제가 워낙 우애가 돈독해서 좋은 건 나눠 먹거든요.”
더없이 유혹적인 미소로 묻는 남자의 말에 몽롱하게 풀렸던 이리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들파들 떨면서도 빤히 쳐다보는 여자의 눈에는 아론의 말이 진심인지 가늠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의외로 몹시 당황하는 이리나의 표정에도 아론은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다시는 들러붙지 못하도록.
“저희가 세 구멍을 동시에 뚫는 걸 즐기는 타입이라.”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막내는 종종 손찌검도 하죠. 여자는 때릴수록 더 조인다나 뭐라나.”
말로 후려쳤다.
“힘드시겠죠? 영애의 가녀린 몸을 보니 제 형제들까지 받아들였다간 어딘가 찢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점점 뒷걸음질 치는 이리나의 얼굴을 보며 아론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다시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여전히 유혹적인 얼굴로 그는 고상하게 협박했다.
“아, 영애의 입이 가볍지 않길 바랍니다. 제 아버님께서는 소문의 근원지부터 찾는 분이시라. 보셨다시피 가문에 조금이라도 흠집 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시거든요.”
“거, 걱정 마세요. 그, 그리고 제가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잠시 쉬었다가 오, 오겠습니다.”
“이런, 아쉽군요. 즐거웠는데. 걱정하지 마시고 가서 푹 쉬다 오시죠.”
“네, 네. 감사합니다.”
움켜쥐었던 팔목을 놔주자, 재빠르게 몸을 돌린 이리나가 휴게실로 향했다. 잠시 휘청거리는 꼴이 꽤 놀라 다리가 풀린 모양이다.
음탕한 여자라더니 아직 그 정도로 난잡하게 놀아본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걸 보니 말이다. 뭐, 어쨌거나 귀찮은 여자도 떼어내고 아버지에게도 엿을 먹인 것 같아 더러웠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만 빠져도 되겠군.’
상쾌한 기분으로 비죽 웃으며 시선을 돌리는 찰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늦었습니다. 아버지.”
당당하고도 우렁찬 아힌의 음성에 주변에 있던 귀족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도는 공작의 표정도 아론과 마찬가지로 차게 식었다.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뒤를 잇는 프레드의 해맑은 음성.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두 공자가 아닌, 그들이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는 가녀리고도 아름다운 한 여인에게 쏠려 있었다.
아론은 헛것을 본 줄 알았다. 왜 엘리아가 저기 서있는 건지, 잠시 정신이 멍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없는 더러운 기분이 휘몰아쳤다.
화기애애하던 연회 분위기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여자라면 돌같이 보는 것도 모자라 손만 닿아도 벌레를 만진 것처럼 살기를 뿜던 세 공자 중 두 공자가 한 여인을 가운데 끼고 등장했다.
당장 제국 신문에 실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광경에 연회에 참여한 영식들이나 영애들은 눈을 비비고 그들을 바라봤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어 내린 얼굴로 서있는 공작과 상반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공자들의 모습에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귀족들은 얘깃거리라도 잡은 듯 속닥거렸다.
모든 시선이 제게로 향하자 엘리아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싸늘한 분위기에 공작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시선을 옆으로 돌렸는데, 하필 그곳에는 더 싸늘하게 식은 아론의 눈길이 저를 향하고 있었다.
아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엘리아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몰랐던 걸까? 이 모든 상황을 전혀 몰랐던 걸까?
알고 있었다면 저런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진 않았을 거다. 그도 꽤 많이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이 와중에도 그를 믿으려는 마음이 불쑥 들자, 이내 헛웃음이 흘렀다.
“엘리아, 고개 들어야지.”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차갑기 그지없는 명령. 엘리아는 아힌의 말에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공작과 아론이 서있던 가운데 어디쯤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또 한 번 흠칫 놀라고 말았다.
사나운 기세로 저를 노려보는 한 영애와 눈이 마주쳐버렸기 때문이다.
아아… 어떡해.
아힌의 집무실에서 봤던, 저를 걱정해 주었던 우아하고 정숙해 보이던 여인. 아힌과 혼담이 오가는 영애의 표독스러운 눈빛에 엘리아의 몸이 슬슬 떨려오기 시작했다.
욕심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대충 프레드가 준 보석만 가지고 도망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더 큰 욕심에 눈이 멀어 엘리아는 지금 사지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공작의 싸늘한 기세도 폰트레 영애의 원망 섞인 눈빛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자신을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에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르르 떠는 엘리아를 본 아론이 한 발 내디디려는데 누군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사나운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언제 온 건지 아론의 팔을 붙든 이리나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더 이상 아까 같은 연기는 필요 없었다. 그녀가 돌아와 제 팔을 잡았다는 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보였으니까.
정말 소름 끼치는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아론은 제 팔을 쥔 이리나의 손을 매섭게 치우고는 작지만 살기 섞인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손 잘리고 싶지 않으면 건들지 마라. 네가 만질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새빨간 눈동자가 번뜩거리자, 이리나는 얼른 제 손을 물리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냉정하게 몸을 돌린 아론이 성큼성큼 엘리아가 있는 곳으로 향하자 이리나는 그제야 막힌 숨을 토해 냈다. 그러곤 아론이 향하는 곳을 사납게 노려봤다.
공작의 시야를 가리고 엘리아 앞에 선 아론이 무감하게 내려다보자, 겁에 질린 엘리아 대신 프레드가 반갑다는 양 인사를 건넸다.
“형, 잘 지냈어?”
“흠, 엘리아. 대체 이 꼴이 뭐지? 그리고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프레드의 인사는 가볍게 무시하고 아론은 엘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엘리아의 겁먹은 눈빛에 아론은 피식 웃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아힌에게 물었다.
“미친 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속셈이야?”
“원하면 끼워줄게. 너도 나만큼 미친놈이잖아?”
“흠, 일단 안 낄 수는 없겠군. 내 여자가 이리 벌벌 떠니 지켜줘야지.”
“개소리.”
“형, 엘리아는 누구의 여자도 아니거든?”
아힌의 욕설과 프레드의 핀잔에도 아론은 그저 피식 웃으며 엘리아만 바라봤다. 잔뜩 겁먹은 듯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다, 보란 듯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허억!”
“어머!”
“와……!”
“꺅!”
주변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경악과 놀라움, 부러움과 짜증 섞인 탄식들이 이곳저곳에서 퍼져 나왔다.
그중 가장 놀란 건 엘리아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딸꾹질이 나올 정도로 뻣뻣하게 굳은 엘리아는 저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는 아론을 넋 놓고 바라봤다. 이제는 아예 막 나가기로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아론은 서슴없이 행동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정중히 인사하며 세 공자를 불렀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각하께서 집무실로 모두 오시랍니다.”
엘리아는 힐끗 집사를 보고는 그 뒤를 쳐다봤다. 이미 공작은 자리를 뜨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웬 귀티 나 보이는 남자가 피식 웃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선물도 못 드렸는데, 벌써 가시다니 서운하군.”
“일단 가야지. 형?”
“그럼 가야지. 아버지가 부르시는데. 집사, 엘리아를 내 방에 데려다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엘리아는 삐걱거리며 겨우 발을 뗐다. 안 그래도 레이디의 예법과는 거리가 먼 그녀인데 몸까지 덜그럭거리니 걷는 자세가 퍽 우스꽝스러웠다.
눈동자만 힐끔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저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과 마주 닿았다. 누가 봐도 귀태가 줄줄 흐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의미 모를 웃음을 지으며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나 지금 가는 길이 제 목숨줄의 끝자락 같아 그를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연회는 시작부터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주인들이 다 사라진 연회장엔 초대받은 귀족들만 삼삼오오 모여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입방아만 찧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는 공작가의 연회였다. 그리고 이 망한 연회의 주인공은 당연 엘리아였다.
* * *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는 세 공자의 표정은 연회장에서와는 다르게 굳어있었다. 뭔가 굳게 다짐한 듯한 표정들이 사뭇 비장해 보일 정도다. 그렇게 말없이 걷다가 공작의 집무실에 다다랐을 때쯤, 프레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형. 엘리아 혼자 둔 게 영 불안한데?”
“그러니까 엘리아는 왜 데리고 온 건데?”
프레드의 말에 아론이 답답하다는 양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엘리아를 데리고 온 건 아힌인데 제게 화살이 날아오자 억울하다는 듯 프레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턱짓으로 앞서 걷는 아힌을 가리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엘리아가 여기 오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그새 까먹은 거야? 아니면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거야?”
이번엔 아힌에게 화살을 겨눈 아론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이 아론의 손에 의해 멈춰졌다. 잠시 뜸을 들인 아힌이 드물게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 제 동생들을 바라본다. 그러곤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다. 사리 분별을 못 하시는 것 보니까. 그래서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으려고 하는데, 어때? 너희가 좀 도와줄래?”
평소와는 전혀 다른 아힌의 표정에 프레드는 흠칫 놀라고, 아힌은 눈을 부릅떴다.
“설마, 아버지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그거랑 엘리아를 데리고 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
“후… 아론, 무슨 소리야. 누가 들을까 겁나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를 죽인다니.”
“그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음, 부탁해야지, 그 자리 달라고. 뭐, 어떻게 말하든 아버지는 협박으로 들으시겠지만.”
“허!”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아힌의 행동에 프레드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 아론은 여전히 싸늘하게 제 형을 바라봤다.
자신을 쳐다보는 동생들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아힌은 여전히 어울리지도 않는 미소를 머금고 아론의 어깨에 척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론, 엘리아는 널 위해 데려왔어.”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네가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역시나 보자마자 입부터 맞추는 걸 보니 잘 데리고 온 것 같네.”
“대체 무슨 꿍꿍인데?”
서로를 마주 보는 형제의 눈빛이 싸늘하기 그지없다. 아힌은 여전히 연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아론 못지않게 서늘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감지한 프레드가 안절부절못했다. 이 미친놈들이 여기서 날뛰면 아무리 저라도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 아힌이 푸념하듯 제 속내를 꺼내놨다.
“난 다른 영애와 결혼할 마음이 없다. 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엘리아가 날 이렇게 만들어버렸거든.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여간 그래서 더는 아버지 밑에서 개 노릇은 안 하려고.”
“그 말은… 엘리아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더욱 서슬 퍼레진 아론의 질문에 아힌이 픽 콧방귀를 뀌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순순히 물러나 줄래?”
“형!”
대화 내내 얌전히 있던 프레드가 버럭 고함을 치며 아힌을 노려본다. 아힌이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제 형의 말이 진심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힌이 이성을 잃고 기어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치려는 것 같아 불안한 건지, 아니면 이대로 엘리아를 영영 빼앗길 것 같아 불안한 건지, 그건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꾸 머릿속에 엘리아가 떠오르는 걸 보니 불안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녀 때문인 것 같다. 제 형제들과 엘리아를 같이 품었을 때는 몰랐는데, 어느 한 사람의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힌이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우스갯소리로 넘길 일이 아니었다. 아힌은 원하는 건 꼭 차지하고야 마는 성격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아론뿐만 아니라 프레드의 눈빛도 서슬 퍼렇게 변했다.
“진정들 해.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지금은 아버지에게 잡혀 있는 목줄부터 찾아오는 게 급선무야. 그러려면 아버지 자리를 내가 차지해야 하고.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다. 엉뚱한 년들하고 살 거 아니면 일단 날 도와.”
“아버지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거라고 생각해?”
“아론, 여기 있더니 그새 아버지랑 정이라도 든 거야?”
“무슨 그런 헛소리를.”
“그러니까 일단 날 도우라고. 이것만큼은 약속하지. 너희의 미래만큼은 너희가 알아서 하도록 간섭 안 하마.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아무 여자나 갖다 붙이지는 않겠다는 말이야.”
아힌의 호언장담에 아론과 프레드의 입이 꾹 다물렸다. 뭔가 갈등하는 눈빛이다. 어차피 공작위는 아힌이 이을 것이 기정사실이었기에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아론 입장에선 예전엔 그 사실이 뼈아프게 화가 났지만, 이젠 별로 관심도 없었으니.
아힌이 조금 일찍 공작위를 물려받아 자신들의 생활이 편해진다면야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아힌의 욕심을 알기에 아론은 선뜻 돕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작이란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면 지금처럼 대화로 해결되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 다른 생각은 나중에 하고, 아버지 압박할 생각이나 해. 여차하면 정말로 검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형. 아무리 그래도 그건.”
“프레드, 아버지한테 칼을 겨누겠다는 말이 아니잖아. 아버지가 그냥 계시겠니? 또 개떼들을 보낼 텐데, 그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일단 가.”
아론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백날 자신들끼리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일단 눈앞의 일을 먼저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기는 세 공자의 눈빛이 다시 결연하게 바뀌었다. 다른 이도 아닌 그 대단한 공작, 자신들의 아버지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서렸다. 어쩌면 오늘, 정말 큰 사달이 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프레드.”
“응?”
“만약 들어가자마자 내가 사인을 주면 넌 바로 엘리아에게 가라.”
“응……?”
뜬금없는 아힌의 말에 뭔 소리냐는 듯 프레드는 제 형을 쳐다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더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마차에 태워서 제도로 먼저 보내.”
“뭐……? 엘리아 혼자 보내라고? 왜?”
말귀를 못 알아먹고 자꾸만 되묻는 프레드에 아힌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러게 왜 데리고 왔냐는 듯 아론이 빈정거렸다.
“이렇게 될 줄 몰랐나 보지?”
“흠, 하여간 프레드, 내 말 명심해.”
아론의 빈정거림에도 아힌은 굳은 얼굴로 프레드에게 재차 명령했다.
“아, 알았어.”
정확한 속내까진 이해 못 했지만, 일단 엘리아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자신도 느끼고 있었기에 프레드는 아힌의 말에 순순히 답했다.
그리고 곧,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세 공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빠르게 안을 확인한 아힌이 낮은 음성으로 읊조리듯 말했다.
“프레드, 가라.”
“알았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집무실엔 공작의 충견인 체이스가 없었다. 그가 없다는 건 체이스가 지금 공작의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가장 높은 확률로 엘리아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고.
프레드가 재빠르게 내달리자, 공작이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문 닫아라. 바람 들어오는구나.”
제 아버지의 태연함에 남은 두 공자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 * *
홀로 아힌의 방에 들어선 엘리아는 맨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벌벌 떨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적의 어린 시선들에 엘리아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더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하아… 젠장. 그냥 마차에서 도망쳤어야 했나.
턱도 없는 얘기라는 걸 알면서도 상황이 이리 되니 헛된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무엇보다 저를 바래다준 집사의 말이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왜 목숨을 재촉하는지 모르겠구나. 공작 각하의 성정이 얼마나 불같은지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면서. 쯧쯧.”
집사의 말, 그리고 공작의 살기 가득한 시선, 영애들의 질투 어린 눈빛, 그리고 저를 보는 끈적하고도 음흉한 귀족들의 눈길까지 떠올리니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우웁! 하아, 하아… 짜증 나.”
막힌 속을 뚫으려는 듯 가슴을 퍽퍽 치는데 팔목에 걸린 팔찌와 주먹에 닿은 목걸이가 짤랑거렸다. 엘리아는 이 와중에도 보석에 흠집이 갈까 봐 하던 짓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더 시간을 끌어선 안 되겠어. 제도에 돌아가면 바로 기회를 보자. 후우…….”
엉금엉금 기다시피 겨우 소파로 몸을 옮긴 엘리아는 테이블에 마련된 물을 벌컥 들이켜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 보니 아론과 프레드는 이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아힌이 혼자 벌인 일인가?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까 봐 마음이 초조했다. 이런 상황이 되니 막연하게 세 공자만 기다리게 된다. 뭐가 어찌 됐든 지금 이 상황에 믿을 사람이라곤 그들밖에 없었다. 죽이든 살리든, 그들이 있어야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다.
아직도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걸 보니 연회는 여전히 한창인 것 같았다. 밖의 상황을 모르니 답답한 마음에 연신 한숨만 흘러나왔다. 그러길 한참.
갑자기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엘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들어온 이가 프레드라는 것을 확인하자 금세 마음을 놓았다.
“도련님.”
“엘리아, 일어나.”
“네?”
뜬금없는 프레드의 말에 엘리아는 눈만 끔벅거리며 그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설명 대신 프레드는 다짜고짜 엘리아의 손목을 이끌며 재촉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드물게 진지했다.
“서둘러. 살고 싶으면.”
“네……?”
살고 싶으면? 기어이 일이 터진 거야?
파들파들 떨기만 할 뿐 꼼짝을 안 하는 엘리아의 손을 이끈 프레드가 혀를 쯧 차며 그녀를 데리고 본관 뒷문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뭔가 일이 터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제도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프레드의 검이 그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걸 보는 순간 엘리아는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됐음을 확신했다.
오자마자 겨우 물 한 모금 마시고 또 곧장 어딘가로 끌려가는 제 신세가 처량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프레드의 손에 이끌려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곳은 공작가의 마차가 있는 곳이었다.
“얼른 타.”
“네? 저 혼자요?”
“응. 잠도 제대로 못 잤잖아. 가는 동안 머리 풀어 헤치고 편하게 자라. 미련하게 또 앉아서 졸지 말고.”
“도련님들은요?”
“우리?”
엘리아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별일 아니라는 듯 프레드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오늘따라 프레드의 해맑은 미소가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프레드는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곤 그녀의 몸을 마차에 올렸다.
“도련님!”
다급하게 마차의 창문을 열자 프레드가 피식 웃으며 “가서 기다려. 금방 갈게.”라고 말하고는 마부에게로 향했다.
엘리아와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마부에게 무언가를 신신당부한 프레드가 아까와는 다른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마차는 프레드를 뒤로하고 서둘러 출발했다.
멀어지는 프레드를 보며 엘리아는 저리는 손을 주무르면서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밤새 달려온 길을 또 밤새 가게 생겼다.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칼은 왜 차고 있었던 거지? 설마, 공작하고 칼싸움이라도 하려는 거야?”
설마.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 하더라도 부자지간에 칼부림은 좀 너무 간 것 같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양, 그녀는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손목에 걸린 팔찌를 눈에 담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번뜩 스치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이 주신 기횐가?
마음이 조금 놓이자 슬그머니 딴생각이 든다. 그쪽에서 칼부림이 나든, 뭘 하든 제 알 바는 아니었다. 세 공자가 없는 지금. 그래,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그들에게서 도망칠 기회.
“내 목숨이 파리 목숨인데, 지금 누굴 걱정해? 괴물도 막 죽이는 놈들인데 뭐 별일 있겠어?”
올 때는 그렇게 이를 박박 갈아놓고 셋이 같이 짜고 친 판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자 또 은근히 걱정됐다. 그러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법.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엘리아의 새파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복수야 애초에 포기했고,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까. 그나마 도망 자금이라도 마련해 놔서 얼마나 다행인지. 위기가 기회로 바뀐 이 상황을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자 눈꺼풀이 무거웠다. 몸은 축 처지고, 온종일 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벌 받은 기분이었다. 이젠 머리가 망가지든 말든 그대로 철퍼덕 누웠다.
그렇게 얼마쯤 가는데, 마차가 덜커덩거린다. 승차감 좋던 마차가 조금씩 흔들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프레드가 전속력으로 달리라고 한 모양이었다. 엘리아는 흔들리는 몸에 힘을 주고 지금부터 해야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제도에 도착한 후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동선이라도 짜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후…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정예나, 겁먹지 마.”
그녀는 자신의 원래 이름을 부르며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엘리아의 삶이 소설 속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는 그녀의 인생은 다를 것이니까.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정말 머리를 풀어버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이 드레스도 좀 벗어버리면 좋겠는데.
엘리아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놀렸다. 치맛자락에 붙은 보석을 하나하나 뜯어내며 입꼬리를 실룩거린다. 눈은 반쯤 감긴 상태로 찬란할 미래를 상상하니, 나른한 몸과는 다르게 손가락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래, 이거라도 챙기자. 뭐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지, 뭐.”
무거운 눈꺼풀을 감고 연신 손가락에 힘을 주어 보석을 하나둘 뜯어냈다. 그러다 서서히 잠이 들려는 찰나.
히이이이잉! 푸르르!
거친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마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아악!”
웅크린 몸이 데굴데굴 굴러 그대로 마차 벽에 쿵 부딪혔다. 어찌나 아픈지 잠이 홀랑 깨버렸다.
“으으… 대체 또 뭔데……?”
부딪힌 어깨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다 벌컥 열리는 마차 문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곳엔 서늘한 기세로 검을 든 한 사내가 그녀를 무감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떡해, 혹시 공작이 보낸 자인가?
엘리아는 점점 창백하게 질려가는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몸을 물리면서도 몰래 치마를 들춰 손에 쥔 보석을 얼른 팬티 속으로 숨겨 넣었다. 서슬 퍼런 칼날을 보니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설마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살고 싶었다. 그러나 저 칼날을 피해 도망갈 자신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순간 자신을 사지로 내몬 아힌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가만히 응시하던 남자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무감하게 말했다.
“내리십시오. 영애를 찾는 분이 계십니다.”
“…누, 누가요? 호, 혹시… 공…….”
“얼른 내리십시오. 가보시면 압니다.”
말허리를 자른 남자가 손에 들린 칼을 허리춤에 있는 칼자루로 자연스럽게 꽂아 넣었다.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미 공포에 질린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린 건지 남자가 손을 내민다. 어색하게 그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고분고분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겨우 몸을 내렸다.
찬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간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새까만 어둠 속에 화려한 두 마차가 보였다. 옆을 쳐다보니 엘리아만큼이나 사색이 된 마부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포로라도 된 양 엘리아는 자신을 데리러 온 사내를 따라 공작가의 마차 앞을 가로막은, 호화롭기 짝이 없는 마차로 향했다. 그러나 지금 정신에 그 마차가 호화로운지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공작이 보낸 사람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죽음을 눈앞에 둔 양, 엘리아는 거의 포기 상태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차 앞에 도착하자 그 사내가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모시고 왔습니다.”
“태워.”
짧고 간단한 한 마디. 그러나 엘리아는 제 옆에 있는 사내가 말한 호칭에 의아함을 느꼈다.
전하……? 전하가 누구지? 무슨 전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엔 고요한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발의 한 사내가 그녀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어? 저 남자는?
분명 아까 연회장에서 본 남자였다. 가만히 있어도 귀태가 줄줄 흐르던 남자. 그 많은 사람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던 이였다.
그런데 전하라니? 이 소설에 전하도 있었어?
공작가의 마차만큼이나 화려한 마차에 올라탄 엘리아는 제 앞에 있는 남자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저를 빤히 보며 의미 모를 웃음을 흘리는 남자 때문에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난감했다. 차라리 두 짐승에게 몸을 바치면서 가는 게 더 편했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이 공간이 숨 막히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기껏 납치하듯 잡아 태워놓고 눈앞의 남자는 한마디도 안 했다. 엘리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몰라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관찰하듯 쳐다보기만 하던 남자가 나른하게 다리를 꼬고는 이상한 말투로 명령했다.
“고개를 들라.”
작지만 위엄 있는 음성에 엘리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대관절 누구길래 이리 잘생긴 얼굴로 오밤중에 아녀자를 납치한 건지. 거기다 저 오만방자한 말투는 또 뭐고?
“내가 누군지 아는가?”
그러게요. 넌 대체 누구십니까…….
모른다고 말했다간 왠지 죽을 것만 같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냥 누군지 말해 주지, 묻긴 왜 묻는 거야.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나도 영애를 처음 봤으니…….”
잠시 뜸을 들인 남자가 집요하게 쳐다보다 툭 한마디 내던졌다.
“난 이 제국의 황태자다.”
“히끅!”
너무도 뜬금없는 등장인물에 놀라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엘리아가 입을 틀어막고 눈을 땡그랗게 뜨자, 그가 피식 웃는다.
가만 보니 황태자와 딱 어울리는 외모였다. 소설 속 높은 인물을 맡은 캐릭터답게 참 화려하고 잘생긴 남자였다.
그런데 황태자라니? 아니, 여기서 황태자를 대체 왜 만나는 건데?
또 한 번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꼬여가는 건지, 가는 길마다 진창에 발이 빠지는 기분이다.
피곤함도 싹 가셨다. 아니, 피곤할 틈이 없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눈앞의 황태자가 저를 왜 이곳에 태웠는지, 아니 그것보다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건지, 아니면 자신을 따라온 건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제국의 황태자라는 사람이 굳이 자신을 따라올 이유도, 그렇다고 지나가는 마차를 세워 저를 옮겨 태울 일도 없을 테니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아 그녀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미치겠네.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 거지?
엘리아는 내내 땅바닥만 쳐다보며 불안한 마음에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손바닥에 벌건 자국이 생길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정신 차리려 애를 썼다. 그때 위엄 있으면서도 고운 음성이 또 말을 건넸다.
“그대는 누구인가?”
“…….”
아니, 누군지도 모르고 납치했다는 거야? 왜?
그의 물음에 엘리아는 제가 더 궁금했다. 도대체 황태자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를 왜 납치한 건지.
“혹시, 귀가 먹었나?”
뒤이어 나오는 황태자의 촉촉한 음성엔 왠지 동정심이 가득 담긴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귀가 안 들리는 척할까? 그럼 말 안 해도 되잖아?
“자꾸 그렇게 숙이고 있으니 난감하군. 시선이 자꾸…….”
“……!”
황태자의 말에 슬쩍 고개를 든 엘리아는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한 후 화들짝 놀라 상체를 곧추세우고 가슴골을 가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마주친 형형한 금안에 또 한 번 히끅, 딸꾹질을 해버렸다.
“으…….”
“음, 다행이군. 귀는 안 먹은 모양이야.”
“죄, 죄송합니다. 저, 저는 베르타른 공작가의…….”
제 소개를 하려던 엘리아의 입이 돌연 꾹 다물렸다.
어떡해……? 하녀라고 말해도 되나? 아, 안 돼. 하녀를 데려간 걸 알면…….
처음에 대답 안 했다고 혹여 벌이라도 받을까 봐 급하게 제 소개를 하려던 엘리아는 제 처지를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떠날 마당에 굳이 세 공자를 망신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밉든, 곱든 같은 집에서 산 세월도 있고, 뭐가 됐든 황태자는 남이고, 가족…까지는 아니어도, 굳이 따지자면 눈앞에 남자보다는 그들이 더 가까운 사이인 건 맞으니까.
그래서 그들의 면을 깎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베르타른 공작가의……?”
“아… 에, 엘리아라고 합니다.”
“엘리아?”
“네, 네.”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를 보며 황태자, 에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이름을 되새기듯 읊조렸다.
“엘리아라…….”
높은 분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에 엘리아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뭐든 높은 사람과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저 세상이나 이 세상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황태자는 말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엘리아는 더욱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갑자기 마차가 휘청거렸다. 몸이 옆으로 휙 쏠려 또 한 번 마차 벽에 부딪히려는 순간 귓가에 쩌렁하게 울리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날짐승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조심하겠습니다!”
“흠.”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감은 눈을 슬며시 뜨자, 샛노란 금안이 눈앞에 보였다. 다행히 마차 벽에 부딪히진 않았는데 그 대신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헉!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몸이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설핏 인상을 찌푸렸던 그가 피식 웃는다.
“죄송하긴. 내 마차에 초대해 놓고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으니 내가 미안하지.”
초대라니……. 엄연히 납치해 놓고 초대로 포장하는 황태자의 말에 순간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 세 공자야. 그런데 주인공급 외모와 주인공급 위치를 가진 이 남자가 갑자기 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소설 뒷부분에선 엘리아랑 이 남자랑 무슨 연관이 있었나? 아니면 나 때문에 소설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거야?
이거든 저거든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도망치려는 상황에 갑자기 만나게 된 황태자란 인물,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나?”
“…네? 아,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지? 혹시 내가 무서운가?”
“아, 아닙니다.”
그럼 안 무섭겠냐? 무려 황태자인데……!
겨우 대답을 마친 엘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엘리아?”
“네, 네?”
떨리는 눈빛으로 황태자를 마주 보자, 그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진다. 그런데 왠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만히 쳐다보던 황태자가 느닷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
깜짝 놀란 엘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후다닥 몸을 물렸다.
아, 이런 분위기 좋지 않다. 그도 역시 엘리아의 외모에 반한 건가?
“흠, 입술이 벌겋게 부었다. 그대를 어찌하려고 데려온 건 아니니 그리 겁먹지 말아라.”
“아… 네.”
겁을 먹었다기보단 경계심이었다. 처음 본 남자가, 그것도 무려 황태자란 남자가 제 입술을 야릇하게 만지며 걱정하는 말을 하는데 어찌 태연할 수가 있을까.
그동안 저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눈빛 또한 평범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권위적인 놈 같지는 않아 당장은 안도할 수 있었다.
설마 처음 보는 여자를 다짜고짜 덮칠 만큼 미친놈은 아니겠지.
반신반의하면서도 엘리아는 제일 궁금한 질문 한 가지를 꺼냈다.
“저기…….”
“으음?”
“그런데 저를 왜…….”
“음? 아… 그대를 왜 데려왔냐고 묻는 건가?”
“네.”
그녀의 질문에 한쪽 입꼬리만 씩 올린 남자가 다시금 몸을 뒤로 물리고 다리를 꼬아 앉는다. 그저 일상적인 행동일 뿐인데 그가 하니 뭔가 묘하게 달라 보였다.
“궁금해서. 대체 어떤 여자길래 여자 보기를 돌 같이 보는 공자들이 공작의 얼굴에 먹칠까지 하면서 그대를 데려온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웃는 걸 보니 그는 마냥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 보였다.
“음, 처음에는 그냥 그대를 이용해서 공작을 망신 주려고 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아론이 그대의 입술에 입을 맞추질 않나, 그대를 지키겠다고 빼돌리지를 않나. 내가 아는 그놈들은 그럴 놈들이 아니거든.”
맞아요. 그럴 놈들이 아니죠. 그냥 전 이용당한 거랍니다. 목걸이와 팔찌에 팔려서요.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꿀꺽 삼키고 엘리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황태자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그러곤 아까보다 더 끈적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 그럼 절 어디로 데려…….”
“어디로 데려갈 거냐고?”
“…….”
“아, 그렇군. 어디로 데려다줘야 하지? 그대의 가문을 말해 주게. 그럼 그리로 데려다주지.”
“네……? 아, 아닙니다. 전 그러니까… 음. 아! 그냥 제도의 공작가로 데려다주시면…….”
너무 뻔뻔하게 데려다 달라고 한 건 아닌가 싶어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닿아오는 시선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혹시 세 공자 중 아론의 정부인가?”
“네에? 아, 아니요! 전 누구의 정부도 아닙니다.”
“그래?”
일순 황태자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간다. 왜 저렇게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뉘 집 자식인지 참 잘생겼다 싶었다.
“그렇군.”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자가 이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지. 무슨 사연인 줄은 모르겠지만, 일단 공작가로 데려다주겠다.”
“아, 감사합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엘리아가 또 한 번 배시시 웃었다. 그 순간 황태자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깃들었다. 하얀 얼굴에 붉은 기가 맴도니 생기 있어 보이는 게 정말 고귀하게 자란 듯 보였다.
엘리아는 조금 더 일찍 제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레기 시작했다. 문득 아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궁의 마차는 빠르다고 했으니까 잘하면 오전 중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금 차근차근 계획을 되짚었다.
황태자가 저를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생각에만 빠진 엘리아는 연신 헤벌쭉 웃으며 얼른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