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휘둘리고, 스며들고 (8/18)

8장. 휘둘리고, 스며들고

땀에 전 두 남자가 영지성에 발을 들였다. 밤새도록 한 번을 쉬지 않고 달린 말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지쳐있었다. 그러나 두 남자의 눈빛은 지친 몸과는 다르게 형형하게 불타올랐다.

전광석화처럼 달려온 덕인지 그들은 도착 예정 시간보다 몇 시간을 앞당겨 영지성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목적지인 공작을 찾아갔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엉망인 꼴로 제 앞에 나타난 두 아들의 모습에 공작이 혀를 내둘렀다.

“엘리아 어디 있습니까.”

아힌의 서슬 퍼런 음성에 공작은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 미친 것 같은 제 아들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른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지만, 이미 공작의 눈에도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연륜이 쌓인 공작의 음성은 제 분노를 가리고 아주 여유롭게 흘러나왔다.

“고작 하녀 따위를 찾겠다고 제도를 비우고 온 거냐?”

“고작 하녀 따위를 납치하신 아버지의 의중이 궁금해서 온 겁니다.”

“납치라……. 내 집에 있는 물건을 잠시 옮겨온 것뿐인데, 그걸 어찌 납치라고 말하는 거지?”

“아버지! 엘리아는!”

버럭 고함을 치며 나서는 프레드를 말린 아힌이 비죽 웃으며 담담하게 받아쳤다.

“지금은 제도에 있는 물건이죠. 제도의 그 무엇도 제 인장 없이는 밖으로 빼돌릴 수 없습니다.”

“그 제도의 그 무엇들도 다 내 것이 아니더냐. 거기에 기생하는 너희들도 말이다.”

선을 넘은 공작의 말에 아힌과 프레드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아버지라는 위치가 아니었다면 이미 두 공자는 벌써 피를 보고도 남았을 터였다.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엔 혈연지간이 아닌, 원수지간보다 더 못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곧 제도로 폰트레 영애가 갈 것이다. 아힌 네 짝이니 너희끼리 상의해서 좋은 날을 잡도록 해라.”

“아버지!”

“엘리아가 꽤 먹음직스럽게 자랐더군. 웬만한 자작가로 시집보내도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 아니면 프레드, 네 동생이 생기는 건 어떠하냐? 엘리아가 그렇게 좋으면 네 어미로 만들어줄까?”

으득!

공작의 말에 프레드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그에 비해 아까와는 다르게 금세 차분해진 아힌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날을 잡아보도록 하죠.”

“훗.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곧 아론과 프레드의 짝도 결정될 거니 너무 서운해하지는 말아라.”

“그래서 엘리아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흐음…….”

내내 비웃음이 가득했던 공작의 얼굴이 설핏 찡그려졌다. 그러다 그가 곧 픽 웃으며 순순히 말해 주었다.

“아론이 데려갔다. 그래도 고생은 했으니까 상은 줘야지.”

공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공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두 아들의 빈자리를 보며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체이스를 불러와.”

“네, 공작 각하.”

엘리아를 이곳으로 옮겨온 자신의 그림자 체이스를 부른 공작의 눈빛이 음험하게 번뜩였다.

* * *

새하얀 얼굴에 발갛게 물든 두 볼이 잘 익은 사과처럼 어여뻤다. 몽롱하게 취한 벽안이 천천히 깜박거릴 때마다 한입에 삼키고 싶을 만큼 욕정이 들끓었다.

아론은 점점 더 자신이 엘리아에게 빠지고 있음을 느꼈다. 단단한 바위로 막아두었던 둑에 틈이 생기기가 무섭게 둑은 금세 무너지고 가둬놓았던 물은 온 천지로 범람했다.

그녀를 괴롭히겠다 마음먹은 순간, 자신이 쌓아놓은 둑도 건드린 모양이다. 속수무책으로 흐르는 감정을 이젠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줄 줄도 모른다. 무수히도 많은 감정에서 무엇을 선물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가 가장 먼저 선택한 감정은 집착과 소유였다. 그리고 그건 그의 본능이었다. 엘리아를 향한 맹목적인 본능.

이젠 그녀를 안 보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이 차오르는 감정에 아론은 엘리아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집착욕과 소유욕을 드러냈다.

“엘리아.”

“네.”

“내 여자가 되겠나?”

“…네?”

또 시작이었다. 갈수록 아론의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재미없는데. 그새 가지고 노는 방법을 바꾼 모양이다.

입을 삐죽거리며 앞을 보자, 턱을 쥔 손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인상을 쓰며 다그친다.

“귀가 먹었어? 아니면 내 말이 듣기 싫은 건가?”

“…….”

“싫어?”

장난도 참 집요하게 치는 남자다. 평소대로 할 것만 하고 가면 그만인 것을, 왜 이제는 마음마저 떠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면 또 버럭 성질이나 낼 거면서.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대답해.”

싫어.

“제가 어찌 감히…….”

“싫은지 좋은지만 대답하라고 했다.”

싫다고!

“저는 대답할…….”

“대답.”

“싫다―!”

…억!

저도 모르게 속말이 툭 튀어나온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았다. 다른 의미로 다시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눈동자도 모자라, 이제는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아론의 이런 무시무시한 미소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젠장, 죽었네. 어떡하지!

“싫다라. 생각보다 충격이 크군.”

전혀 충격받지 않은 얼굴로, 그것도 저렇게 무섭게 웃는 얼굴로 으르렁거리자, 엘리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런데 엉덩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던 아론의 아랫도리가 남자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 꾹꾹 찔러온다.

“좋아. 네 마음은 알았으니까 일단 하던 거는 마저 하면서 다시 긴 대화를 나눠보지. 시간은 많으니까.”

“주, 주인님.”

“한 번 더 주인님이라 부르면 마수들이 있는 곳으로 던져버릴 거야.”

“……!”

여전히 무섭게 웃는 낯으로 엘리아의 몸을 달랑 든 남자가 그녀의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곤 똑바로 저를 보게 앉힌다. 그러곤 제 심기만큼이나 사나워진 자지를 거침없이 그녀의 질구 속으로 밀어 넣었다.

“흐읍!”

“소리 참지 마. 마음껏 지르라고 여기로 데려온 거잖아.”

잠깐 뻑뻑해졌던 속살이 이내 점점 물을 흘리며 남자의 자지를 오물오물 삼키기 시작했다. 금세 자궁구까지 밀고 들어온 자지가 불끈불끈 성을 낸다. 꽉 맞물린 접합부를 뭉근하게 치대자, 둥글게 내벽을 휘젓는 좆 기둥에 엘리아는 바르르 떨다 아론을 덥석 끌어안았다.

“싫은 놈한테 왜 이렇게 안기는 건지 모르겠군.”

“하으으…….”

“나는 싫은데 내 몸은 좋은 모양이야?”

잔뜩 토라진 아이처럼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통통한 엉덩이를 쥐어 잡은 굵은 손은 제 할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어디를 찌르고 치댈 때 엘리아가 반응하는지 유심히 관찰하며 그는 그녀를 괴롭히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하아, 하아, 하읏……!”

“싫은 놈한테 박히는데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이 호수가 네가 싼 물로 탁해지고 있잖아.”

“흐읏! 주, 하윽!”

“주, 뭐……? 마수들한테도 쑤셔 박히고 싶은 모양이네. 음탕한 엘리아는?”

사정없이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며 끊임없이 빈정거리는 아론의 말에 엘리아는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잘못 한 것 같았다. 그냥 좋다고 말했어야 했던 건데.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아론의 여자가 될 일은 없었을 터였는데, 굳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남자의 자존심을 긁어버렸으니, 앞으로 저를 얼마나 괴롭힐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랴. 그의 심사는 이미 잔뜩 뒤틀려버렸는데.

제 성난 심기를 대변하듯 들이차는 좆질이 거세다 못해 사나웠다. 아래서부터 쿵쿵 쳐올리며 점점 더 깊숙하게 쑤셔 박는 움직임에 물결은 파도가 부서진 양 굵은 파란을 일으키며 멀리 퍼져 나갔다.

흐드러지게 풀린 여체가 퍽퍽 치받을 때마다 종잇장처럼 이리저리 나풀거린다. 숨은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어디를 자극하면 더 좋은지 아는 여체는 본능적으로 맞물린 접합부에 음핵을 비벼댔다. 울음 섞인 교성을 내지르면서도 황홀함에 젖은 몸은 그녀의 신음을 야릇하게 만들었다.

“야해 빠졌군.”

“흐윽, 흐, 으응.”

“내 좆만 떼서 줄까?”

“주, 흑, 아니, 아. 아론……. 하읏!”

“매일 이렇게 끼고 살면 좋잖아?”

“하앙!”

제 행동 하나하나에 바스러질 듯 반응하는 여자가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 번 거부당한 소유욕엔 불이 붙었다. 그리고 감히 저를 거부한 여자를 완전히 제 것으로 옭아매겠다는 광기 어린 집착까지, 아론은 넘실대는 검은 감정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의 거센 움직임에 찰박찰박 튀어 오른 물이 두 알몸을 흠뻑 적셨다. 젖은 긴 머리칼이 그녀의 몸 군데군데 달라붙어 있는 것마저도 왜 이렇게 매혹적인 건지. 붉은 꼭지를 가린 머리칼을 살짝 걷어낸 아론이 볼록 솟은 젖꼭지를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윽! 아론……! 그만요……! 흐윽! 그마안……!”

미치겠다는 듯 몸부림을 치면서도 제 입 속으로 젖을 밀어 넣고 치대는 여자의 교태에 웃음이 나온다. 입은 그만하라면서 젖을 물리다니. 아주 앙큼한 여자다. 그렇다면 바라는 대로 해주겠노라, 씩 웃고는 젖이라도 나오길 바라는 양 한 움큼 입에 문 젖을 세차게 빨아 삼켰다.

“흐아앙! 하, 하으, 흣!”

격한 교성을 내지르는 동시에 허리가 활처럼 휘는 여체를 끌어당겼다. 동시에 제 머리통을 끌어안고 스스로 쿵덕쿵덕 날뛰며 절정으로 치닫는 여자를 눈에 담았다. 젖 빠는 강도가 더욱 강해질수록 좆을 무는 속살 또한 짜릿할 만큼 거세졌다. 눈을 까뒤집고 온몸에 힘을 주며 부르르 떠는 여자의 모습에 뿌듯함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순간 자지를 쥐어짜듯 조여 무는 내벽에 아론의 눈앞에도 섬광이 스쳤다. 급격히 몰려오는 사정감에 점점 늘어지는 여체를 붙들곤 미친 듯이 허리를 들썩거렸다. 척척, 부딪히는 살결에 물결의 파동은 거세지고 찰박찰박 튀어 오른 물방울에 두 남녀의 얼굴에선 땀과 섞인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당장이라도 사출하려는 듯 폼을 잡는 불알에 힘을 잔뜩 준 아론은 온 힘을 다해 그녀의 구멍에 좆을 박았다. 온몸에 소름이 잔뜩 돋아 오르는 동시에 그녀의 좁아터진 구멍이 또 한 번 제 좆을 꽉 물자, 막힌 구멍이 뚫린 듯 뜨거운 좆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하아앙! 흐으윽! 흐읏, 으으응……!”

“큭! 엘리아……!”

“하앙, 아로온……!”

쾌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 번 휘몰아친 절정에 엘리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먹였다. 질구는 연신 뻐끔거리며 남자의 씨물을 쭉쭉 빨아 삼키고 아론을 꽉 끌어안은 몸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제가 뿌린 씨앗을 옴찔거리며 삼키는 엘리아의 행동이 기꺼워 아론은 나른하게 웃음 지었다. 제 몸을 꽉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는 여체도 만족스러웠다. 이러면서 감히 저를 거부하다니.

“네 입에서 내 여자가 되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박아주지. 잘 생각해, 엘리아. 곧 마수가 나올 시간이거든.”

“……!”

씨물을 잔뜩 쏟아내 놓고도 다시 몸집을 키우는 자지에 엘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나 거부할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이미 짐승의 갈급한 혀는 목구멍을 쑤시고 들어오고, 팽팽하게 부푼 좆 기둥은 또다시 추삽질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난 두 마리의 짐승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아론은 느긋하게 제 앞에 있는 초식동물을 맛보고 또 맛보았다. 그리고 엘리아가 흘리는 교성은 바람을 타고 온 천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아아앙! 아로오오온!!”

정신이 반 나간 엘리아는 아론의 품에서 연신 헐떡거렸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결국 아론은 제 고집대로 제가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묻고, 또 묻는 중이었다.

“그래서, 넌 누구 거라고?”

“하아… 아론 거요…….”

“누구 여자라고?”

“아론 여자요. 흐으윽……!”

아래쪽에서는 죽지도 않는 흉포한 놈을 연신 푹푹 쑤셔대고, 제 가슴팍에 눕혀놓은 상태로 젖꼭지는 희롱하듯 비틀어대면서 한 손으로는 활짝 벌어진 가랑이 사이를 마구 문질렀다.

엘리아는 몸에서 나오는 물이란 물은 죄다 호수에다 싸버렸고,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보며 살려달라는 듯 교성을 내질렀다. 아론이 이렇게 집요한 남자일 줄은 정말 몰랐다. 결국 제가 원하는 답을 들어놓고도 그는 엘리아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으으… 제발 그마안……. 흐아앙!”

“내 여자는 싸기도 잘 싸는군. 당분간 이 호수는 못 들어오겠다.”

그의 놀리는 말에도 엘리아는 그저 숨만 헐떡거릴 뿐 아론의 말에 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간절할 뿐이었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

아론의 해맑은 말에 인상이 찌푸려지던 찰나, 갑자기 말을 멈춘 남자의 행동에 습관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또 뭘 하려고 이러는 거야…….

“엘리아.”

순간, 아론의 음성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네…….”

“가야겠다.”

“네?”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일어나서 다시 이불 덮어.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하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궁금했지만, 아론의 좋지 않은 표정에 엘리아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으앗!”

달달 떨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물속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다행히 아론의 손에 잡힌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물속을 나왔다. 엘리아에게 먼저 이불을 덮어 준 아론이 주위를 살피며 다급하게 옷을 입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빛이 살기로 가득 차 보였다.

“아, 으음, 주, 크흠. 무슨… 일이에요?”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자, 그를 아론이라 불러야 할지 주인님이라 불러야 할지 헷갈렸다. 그러나 딱히 뭐라 부르기가 애매해서 호칭은 포기하고 궁금한 것만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연신 주위를 살피며 그녀를 말에 태웠다. 그러곤 또 이불을 휙 뒤집어씌운다.

대체 어제오늘 몇 번이나 보쌈을 당하는 건지. 엘리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저를 잡아먹으려는 건가 싶은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아론의 서늘한 음성이 그녀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앞에 말갈기 꽉 잡고 엎드려. 무슨 소리가 나도 절대 일어나지 말고 그냥 납작 엎드려있어. 알았지?”

“네……?”

“그리고 우리 둘이 있을 때는 아론이라고 불러라. 네 남자라고 해도 좋고. 이랴!”

엄마야!

아직 엎드리지도 않았는데 다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아론의 가슴팍에 머리를 한 대 박고 나서야 냉큼 엎드려 말갈기를 붙들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정신없는 와중에 그의 마지막 말에 정신이 더 멍해졌다.

뭐, 뭐라고 부르라고? 내 남자아……?!

키끼기기긱!

그때, 그녀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울음과는 어딘가 다른 기괴한 소리.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리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뭔가가 따라오는 기분이다.

“아, 아론……!”

그녀의 부름이 안 들리는지 아론은 말을 모는 데만 집중했다. 말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정체 모를 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키끼기기긱! 키끼기기긱! 키에엑!

흐아……!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에 엘리아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말갈기를 목숨줄처럼 움켜쥐고 숨을 꾹 참았다. 순간 저를 잡아주던 아론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바로 몸이 휘청거렸다.

“꺄악!”

“꽉 잡아!”

아론의 고함에 힘을 바짝 주고 말 모가지에 찰싹 달라붙었다. 다행히 그가 잡아준 덕에 떨어지는 불상사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죽을힘을 다해 갈기를 붙들었지만, 방금 전까지 힘을 다 쓴 탓에 손에선 자꾸만 힘이 빠져나갔다.

섹스하다 말고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그녀가 생각했던 꿈속의 동화가 정말로 잔혹 동화로 바뀌어 버린 순간이었다.

아론의 좆에 박혀 교성을 내지르던 그곳이 마수들의 숲이란 걸 까마득하게 몰랐던 엘리아는 뒤에서 따라오는 게 마수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벌벌 떨었다. 점점 그 기괴한 소리가 온 천지를 뒤덮자, 어쩌면 오늘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원작 여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죽음. 역시 엘리아의 운명은 결국 죽는 것이었나? 이렇게 허탈할 수가.

뒤에 앉은 남자는 대체 뭘 하는 건지 연신 몸을 들썩거리고, 그의 거친 움직임 한 번에 가까이 들렸던 기괴한 소리가 비명을 지르며 멀어지길 반복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기를 다 빼앗긴 몸은 죽기 살기로 말갈기에만 매달린 채 바르르 떨었다.

철커덕!

“윽! 제기랄!”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아론의 욕설이 들렸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엘리아는 큰 소리로 아론을 불렀다.

“아론! 왜 그래요!”

그러나 그녀의 귀에 들려온 남자의 대답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못 싸서 그렇잖아! 마지막 걸 쌌어야 했는데.”

“…….”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수도 없이 싸질러놓고 뭐? 못 싸서 그렇다고?

분명 뭔가 대단히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 같은데 이 와중에 저런 헛소리를 떠나가라 고함치며 말하는 남자가 정말로 미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덕분에 손에서 힘이 쭉 풀려 나갔다.

“정신 차리고 꽉 잡아! 전속력으로 달린다!”

“흐아악!”

지금도 빠른데 더 빠르게 속도를 내는 말 위에 매달린 그녀는 꼭 달리는 기차 위에 맨몸으로 매달린 기분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소름 끼치는 정체불명의 기괴한 소리는 계속 뒤를 따르고, 아론은 엘리아의 허리를 꽉 감싸 안고 몸을 숙였다.

호숫가로 올 때까지는 이리 먼 것 같지 않았는데, 가는 길은 왜 이리도 멀게 느껴지는 건지. 차라리 섹스하는 시간이 낫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감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받아!”

아론은 아힌이 던진 칼을 손쉽게 받아내곤 제 뒤에 바짝 붙은 마수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또 한 번 섬뜩한 비명이 멀어진다.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까 넌 막사로 가!”

“됐어! 얼마 안 돼! 그냥 같이 잡고 가!”

아힌……?

“그 앞에 짐 덩어리는 뭐야? 그거 엘리아야?”

“이 짐은 신경 끄고 내 뒤 놈이나 처리해!”

프레드……?

엘리아는 저를 짐짝 취급하는 소리보단 익숙한 음성의 주인공들이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건지가 더 의아했다. 격하게 이불을 걷고 무슨 상황인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살짝 꼬물거리자.

“가만있어. 악몽 꾸고 싶지 않으면.”

“……!”

아까와는 다르게 아론의 음성이 묘하게 즐거운 듯 들렸다. 앞만 보고 달리던 말이 갑자기 휙 방향을 바꾼다. 다행히 아론이 잡아준 덕에 그녀는 안정되게 말에 매달려있을 수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세 공자의 음성은 또렷이 들렸다.

“형! 저 새끼는 내가 죽일게!”

“프레드! 장난치지 말고 그냥 모가지부터 잘라!”

“저 새끼가 오래간만에 피 맛을 보니 아주 신이 났군.”

“오랜만이구나! 죽어라! 이 새끼들아!”

이게 대체 뭔 상황인지……. 온 사방에는 기괴한 울음소리와 비명이, 그리고 뭔가 서걱서걱 잘리는 소리가 가득한데 왠지 세 공자만은 아주 신이 난 듯했다.

이리저리 바뀌는 방향에 엘리아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손바닥이 아릴 정도로 말갈기를 움켜쥐곤 얼른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드디어 끝났는지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말이 멈추자 주위가 고요해졌다.

으윽, 내 손, 내 엉덩이, 내 허리야……. 끄응.

“후! 더 없나?”

프레드의 해맑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제야 정말로 끝난 모양이다. 엘리아는 그 순간까지도 말 모가지에 매달린 채 끙끙거렸다. 그러다 곧 이불이 휙 걷어지자 태양을 등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살아있나?”

“소, 소공작님…….”

아론과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분위기는 완전히 다른 아힌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올린다. 웃는 건지, 화난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와중에도 잘생김을 덕지덕지 바른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믿긴 힘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자신을 엄청나게 걱정한 듯 보였다.

“옷을 벗고 있군.”

“윽……!”

아니었나 보다.

들었던 상체를 냉큼 숙이고 말 모가지에 바짝 매달리자.

“그래서 에드윈 자지가 이렇게 섰구만. 어쩐지 형 달리는데 뭐가 자꾸 덜렁거리더라니.”

프레드가 다가오며 헛소리를 얹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 걸 보니, 제가 매달린 말 이름이 에드윈인 모양이다. 제 앞으로 온 아힌과 프레드를 멍하게 바라보다, 엘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흐아악!”

순간 그녀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아론이 엘리아의 눈을 가려주며 여상하게 말했다.

“악몽 꾸고 싶지 않으면 보지 말랬잖아.”

엘리아는 온 사방에 수북이 쌓인, 이상하게 생긴 괴물들의 사체에 기함하다 못해 기절할 뻔했다. 잠깐 봤지만, 목과 몸이 분리된 괴물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제야 제가 모시는 주인들이 얼마나 상또라이인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죽어 널브러진 괴물보다 이들은 더한 괴물이었다. 최상위 포식자.

단 셋이서 수십 마리의 괴물들을 해치우다니.

엘리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냥 도망가자. 난 절대 이들을 이길 수가 없어. 하필 들어와도 왜 이런 개 같은 곳으로 들어온 거야!

“엘리아, 왜 이렇게 떠는 거지? 추운가?”

“그럼 덥게 해주면 되지. 마수들이 이미 활동하기 시작했으니 거긴 안 되겠고. 그냥 기사들 사냥 내보내고 아론 형 막사로 가자.”

아힌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답을 내놓은 프레드 탓에 엘리아는 다시 한번 몸을 흠칫 떨었다.

“일단 가자. 피범벅이라 씻어야겠다.”

가렸던 아론의 손이 치워지고, 엘리아의 머리 위엔 다시 이불이 덮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세 공자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막사로 끌려갔다.

그다음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이젠 아예 제 말인 양, 다시 말 모가지를 붙들고 엎어져 버렸다. 말의 좆이 서든 말든 제 알 바는 아니니까.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쉴 새 없이 종알대는 프레드의 해맑은 음성이 다시 한번 뇌리에 꽂혔다.

“아론 형? 오늘은 형도 같이 할 거야? 우리 셋이 같이하는 건 처음이지 않나?”

뭘?! 뭘 셋이 한다는 건데!!

엘리아의 성난 아우성은 그저 그녀의 가슴 속에서만 메아리칠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막사로 돌아온 엘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한 벌뿐인 메이드복을 호숫가에 두고 와버렸기 때문이다. 당장 어디서 옷을 구해올 수도 없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저만 바라보는 세 공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엘리아는 이불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당장 셋이 덤벼드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들은 아직까진 얌전했다.

씻는다며……! 왜들 저러고 있는 건데?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저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오니 피 냄새가 진동해서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저… 얼른 가서 씻고들 오세요.”

오실 때 제 옷도 하나만 얻어다 주시면 참 좋겠는데…….

뒷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엘리아는 땅바닥만 보며 웅얼거렸다. 한 놈도 버거운데 저 무시무시한 세 놈이 저만 보고 있으니 숨이 턱턱 막혔다.

이때다 싶었는지, 프레드가 냉큼 제 형들에게 말했다.

“형들 씻는다며? 얼른 다녀와. 누가 또 얘 데리고 튀면 안 되니까 내가 지키고 있을게.”

“프레드, 지금 제일 더러운 게 너다. 그리고 그 피 좀 빨리 닦아. 밤새 피 냄새 때문에 잠도 못 자겠군.”

“아론, 너는 얼른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라. 네 팔에서도 프레드 만만치 않게 피가 떨어지고 있거든? 여기는 내가 있을 테니 둘 다 어서 다녀와.”

말은 그럴싸하게 서로를 위해주는 척했지만, 본심은 따로 있었다. 서로 가라고 옥신각신하는 세 공자의 말을 대충 흘려듣던 엘리아는 아힌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론을 쳐다보자 저만 보고 있었는지, 새빨간 눈과 마주쳤다. 그런데 멀쩡해 보이던 남자가 갑자기 와락 인상을 찡그린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멀쩡해 보였는데, 입술까지 질끈 깨물며 팔이 부러지기라도 한 듯 끙, 신음을 흘린다.

“형……? 왜 그래? 미친 거야?”

“크흠.”

프레드의 직설적인 말에 아론이 헛기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가만 보아하니 연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것도 프레드가 아닌, 저 아론이 말이다.

이러니 죽을 고비를 넘겼지. 쯧.

이러다간 밤새도록 피 칠갑한 괴물들과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엘리아는 다시 한번 용기 내 말했다.

“저기… 제 걱정은 마시고 세 분 다 가셔서 씻고, 좀 쉬었다 오세요.”

“엘리아.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거야?”

“네……?”

프레드의 싸늘한 말에 엘리아는 또다시 몸을 웅크렸다. 감히 건방지게 하녀 따위가 주인들에게 가라 마라 하는 게 기분 나빠서 그러는 줄 알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프레드의 말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때문에 우리가 장가가게 생겼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요, 그게 왜 저 때문인가요……?

이번에는 아론이 엘리아 대신 프레드에게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물었다. 그러자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헝클인 프레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곧 제도에 아힌 형하고 결혼할 여자가 올 거래. 그리고 그다음은 우리라던데? 아무래도 엘리아를 이용해서 우리 목에 목줄을 걸 생각인가 봐.”

“뭐?”

아론이 기가 찬다는 듯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아힌을 바라봤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나보고 내 동생 만들어주겠대. 엘리아를 어미로 만들어준다나? 아무래도 우리가 자기 뜻에 따르지 않으면 엘리아를 아버지가 먹어치우든, 아니면 어디 자작가로 팔아넘길 모양이야.”

“노망이 나셨군. 죽을 때가 됐나?”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세 공자와 공작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는 듯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공작도 세 공자도 부자지간에 저런 말은 하지 못할 테니.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세 공자의 엄마라니……. 문득 일기장에서 본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의 천사님은 이제 내 아들이 되는 건가……?

말도 안 돼. 내가 이 미친 괴물들의 엄마가 될 수도 있다고? 아니면 다른 놈한테 팔려갈 수도 있다는 거야?

이것도 저것도 다 그녀에겐 좋은 방향이 아니었다. 원래의 엘리아였다면 좋아했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다. 점점 더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 누군가 제 손을 잡았다.

제 앞에 선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자, 아힌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손톱이 이게 뭐냐. 다 뜯어먹을 기세군. 밥을 먹어, 이딴 거 먹지 말고.”

아힌의 퉁명스러우면서도 애정 어린 말에 엘리아는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씹어댔는지, 그 짧은 시간에 붉은 속살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엉망이 돼버렸다.

“걱정하지 마라. 넌 예전처럼 그냥 제도에서 지내게 될 거다.”

“그래, 엘리아. 너무 겁내지 마. 내가 네 옷도 많이 사놨어. 그러니까 얼른 돌아가서 입어보자.”

아힌의 말에 숟가락을 얹은 프레드가 해맑게 말하자, 아론이 인상을 찌푸리며 프레드를 쳐다봤다. 저게 지금 무슨 말인가 싶은 모양이다.

혹시라도 프레드가 헛소리를 나불거릴까 봐 엘리아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만약에 그동안 그 옷 같지도 않은 옷을 입고, 이 두 남자와 질펀하게 즐겼다는 걸 아론이 알게 된다면……! 으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저! 배가 고픈데, 그리고 옷도 필요…해요…….”

자신 있게 시작한 말이 점점 기어들어 가는 것도 모자라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려는데, 아론과 프레드가 동시에 일어나 아힌 옆으로 섰다. 멀대같이 큰 세 남자가 피를 뚝뚝 흘리며 저를 내려다보니 이제는 더 죽을 맛이었다.

“나랑 같이 가지. 내 방에 가서 씻어라. 옷은…….”

“엘리아, 조금만 참고 바로 제도로 가자. 성으론 안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아버지가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몰라.”

“나도 아힌 형 말에 찬성! 얼른 돌아가자. 엘리아.”

말허리가 잘린 아론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러다 곧, 어쩔 수 없다는 양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엘리아. 지금 바로 제도로 돌아가. 분명 아버지는 널 또 노리실 거다.”

드물게 풀이 잔뜩 죽은 아론의 음성에 엘리아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 고집스럽고 집요한 남자가 저를 순순히 내어주는 게 신기하면서도, 그가 왜 그러는지 아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장승같이 앞에 선 남자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끄덕였다.

“내가 엘리아랑 잠시 있을 테니, 둘은 대충이라도 씻고 마차 가져와.”

“그래. 그런데 설마 그 꼴로 애 또 잡을 건 아니지?”

아론의 말에 아힌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의 말에 부응이라도 한다는 양, 아론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좆은 깨끗해. 그러니까 얼른 가. 천천히 오면 더 좋고.”

“형! 그럼 먼저 가. 내가 엘리아랑 아론 형 지키고 있을게.”

눈을 반짝 빛내는 프레드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 아힌이 그의 귓불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악! 아파! 이것 좀 놔!”

“우린 마차에서 하면 되잖아. 저 새끼는 당분간 또 엘리아 맛도 못 볼 거라고. 그러니까 얼른 따라 나와!”

“으악!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

쓸데없는 데서 형제애를 드러내는 아힌의 말에 엘리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프레드의 음성이 멀어지자 엘리아는 그제야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언제부터 아론이 편해진 건지, 둘만 남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다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가깝게 닿아오는 새빨간 눈동자에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정말로 좆만 꺼내 또 덤비는 건 아닌가,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좆이 아닌, 그의 손이 다가왔다. 뺨에 대려던 손이 잠시 멈칫거리다 뒤로 물러난다. 의외의 행동에 아론을 마주 보다 그의 팔로 시선을 돌렸다. 찢긴 갑옷 사이로 흐르는 피의 양을 보니 생각보다 상처가 심한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그럼 얼른 가서 상처를…….”

“널 보내는 게 안 괜찮다고.”

“…….”

이상하게 아론과 시선만 맞추면 고갤 돌리기가 어려웠다. 꼭 옭아매진 듯 시선이 피해지질 않는다. 그의 말에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입술만 달싹거리자, 그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곧, 말랑한 입술이 제 입술을 머금는다.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았다.

더운 숨이 입 안을 가득 채우며 남자의 부드러운 살덩이가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왔다. 엘리아는 거부하지 않고, 제 입 안을 휘젓는 살덩이를 상냥하게 받아주었다. 딱히 거부할 마음도, 이유도 없었다. 더는 그가 싫지 않았고, 거부한다고 그가 안 할 이도 아니었으니.

곧 아론과 다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하루 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행동과 말들에 조금은 흔들린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이들과 자신은 같은 길을 갈 수 없을 테니.

어쩌면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키스일지도.

엘리아는 최대한 빠르게 공작저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이제는 이 세 공자보다 공작이 더 무서워졌다. 더는 자신이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걸 자각한 엘리아는 이들에게서 빨리 벗어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복수고 나발이고 이젠 다 필요 없다. 공작 부인이나 자작 부인이 될 바에야 얼른 튀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자신이 없어져야 세 공자가 더는 공작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쁜 놈들이었던 건 분명했지만, 정이 든 것도 사실이니. 어쨌든 저만 사라진다면 모든 이가 다 행복할 터였다.

그중에 내가 제일 행복해지겠지. 그러려면 돈 좀 털어야겠다. 퇴직금 대신이라 생각하지, 뭐.

“엘리아.”

번들거리는 입술로 그가 나지막이 부른다. 이 와중에도 색기를 줄줄 흘리는 아론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네.”

“가서 얌전히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네.”

“문 잘 잠그고.”

“네.”

“밥도 더 챙겨 먹고.”

“네.”

“보고 싶을 거다.”

“네. 네……?”

“네가 내 여자인 거 잊지 말고.”

“…….”

분위기가 또 묘해지려는 찰나, 얼마나 서두른 건지 밖에서 프레드의 음성이 들렸다.

“엘리아, 집에 가자!”

“조심히 가.”

“네.”

마지막 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엘리아는 언제나처럼 단답으로 대답했다. 굳이 쓸데없는 미련은 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론을 뒤로하고 엘리아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다 곧 입을 쩍 벌렸다. 역시 돈 많은 집 자제들은 다른 건지, 호화롭다 못해 화려하고 널찍한 마차 내부에 엘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힌의 에스코트를 받아 이런 마차에 올라타니 꼭 자신도 돈 많은 가문의 레이디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제 처지를 다시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프레드의 행동에 그녀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어젯밤부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아론에게 시달렸는데, 이젠 다른 두 짐승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로 복상사로 죽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옆을 힐끔 보니 그나마 아힌은 얌전히 누운 상태로 가만히 웃고만 있었다.

무슨 마차에 침대가 있냐고!

옛날 왕이 타고 다니던 가마도 아니고, 달리는 마차에 어울리지도 않는 침대를 보며 엘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형 뭐 해? 안 벗어? 그럼 나 혼자 한다?”

“멍청한 놈. 엘리아.”

“네?”

“벗겨.”

“…네.”

“아 씨, 그럼 나도 다시 입을 테니까 엘리아가 벗겨줘.”

옷을 다시 주섬주섬 입으려는 프레드를 보며 엘리아는 그냥 모든 걸 내려놨다.

그래, 얼마 안 남은 시간 실컷 벌려주마.

어차피 시작하면 제 몸도 좋아할 터. 차라리 마지막까지 놈들을 홀릴 수 있을 만큼 홀려놓고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기왕이면 마음마저 챙겼으면 좋겠네. 실연의 아픔이라도 줘야 좀 속이 후련할 것 같은데.

힘든 기색을 지우고 엘리아는 생긋 웃으며 두 짐승의 옷을 벗겨주었다. 하지만 제도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욱 고되었다.

* * *

제도로 돌아온 후 며칠은 생각보다 잔잔하게 흘러갔다. 물론 매일 밤 두 짐승의 아래 깔려 울부짖는 건 여전했지만, 그건 이제 일상처럼 돼버린 거고 마음만은 편하다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이랬다면 아마 도망칠 생각은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엘리아는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며 앞으로를 준비했다. 하지만 도망 자금을 모으기가 녹록지 않았다. 하녀장이 된 후 월급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이걸로 집이라도 구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제도 밖으로 나가본 건 며칠 전 납치당해 영지성에 간 게 다인 터라,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아… 일단 부딪쳐보면 알겠지. 그런데 지금 얼마 모은 거지?”

자금을 확인하기 위해 매트리스 안에 숨겨둔 주머니를 꺼내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엘리아는 치웠던 이불로 침대 위를 가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세요?”

“조안나입니다. 아힌 도련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네. 금방 갈게요.”

“주방에 내려와서 차를 준비해 가십시오.”

차……? 웬 차?

“네, 알겠습니다.”

여전히 차가운 음성이었지만, 깍듯하게 말하는 조안나에게 쉽사리 하대가 나오지 않아 엘리아는 그냥 존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은 존대고 반말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다정하게 굴어도 그건 몸을 섞을 때나 그런 거지, 평소에 아힌은 기다리는 걸 아주 싫어했다.

급하게 옷을 입고 대충 머리를 땋은 엘리아는 다급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조안나가 트롤리를 내밀며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거 가져가십시오.”

“아, 네, 고마워요.”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요?”

“얼른 가세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네, 고마워요. 조안나.”

미세하게 눈빛이 흔들리긴 했지만, 조안나는 여전히 싸늘함을 고수했다. 마음이 급해지자, 엘리아는 대충 눈인사로 마무리하고 서둘러 아힌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집무실 앞에 다다라 가쁜 숨을 고르고 차분히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아힌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음성. 엘리아는 침을 꼴깍 한 번 삼킨 후 굳게 닫힌 문을 천천히 열고 들어갔다.

“소공작님, 차 가지고 왔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일어나려던 엘리아는 멈칫했다. 화려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아힌의 앞에 다소곳이 앉아 수줍은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와 마주 보고 있는 아힌도 드물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아는 아힌의 웃음이 거짓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가장 아힌의 미소를 많이 본 그녀였기에 그가 진심으로 웃을 땐 어떤 표정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손님께 차를 내드려라.”

“네.”

“영애의 옷에 찻물이 튀면 안 되니, 이쪽으로 와서 해라.”

“네.”

조심히 아힌의 옆으로 가 찻잔을 내려놨다. 그러곤 차를 우려내기 위해 상체를 숙이고 찻잎을 넣을 때였다.

“사용인들한테도 다정하시군요.”

“제 가족들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다들 저와 이 저택에서 오래 지낸 이들이죠.”

“소문과는 전혀 다른 분이신 것 같네요.”

“제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그러시는지 궁금한데요?”

“음… 안 들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제가 본 소공작께서는 다정하고 점잖은 분이신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인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군요.”

점잖긴 개뿔. 너 속고 있는 거야. 이 밥통아. 아마 네가 들은 그 소문이 맞을, 헉!!

순간 깜짝 놀란 엘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잎을 테이블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몸은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수건 좀.”

“그냥 하던 거 마저 하고 닦아. 영애께서 오래 기다리셨다.”

“아, 네…….”

미, 미쳤나 봐?!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엘리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덩이에만 힘을 바짝 준 채, 이를 악물었다. 넓은 치마폭 아래로 불쑥 침입한 손이 엉덩이를 주물럭거렸기 때문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프레드도 안 하는 짓을 아힌이 하니 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살살 어루만지던 손이 슬슬 엉덩이골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당황한 엘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혹여라도 이 상황을 앞에 있는 귀족 영애가 눈치라도 챌까 봐 꼼짝도 못 하고 아힌의 난잡한 손길을 그대로 받아내며 버텼다.

“음, 괜찮은가요?”

“네?! 아, 네. 흑! 크흠……!”

엘리아의 불안한 행동을 감지한 영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갈 곳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다 애원하듯 아힌을 힐끔 쳐다봤다. 왜 그러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뜨거운 찻물을 확 끼얹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그런데 아힌은 한술 더 뜨며 엘리아를 타박했다.

“하녀장이 돼서 차도 제대로 못 끓이면 어쩌자는 거지? 손님 앞에서 면이 안 서는군,”

“죄, 죄송합니다. 윽!”

“어디 아픈가……?”

이 개새끼……! 흣!

이젠 아예 팬티 옆으로 손가락을 찔러놓고 속살을 문질거린다. 손가락을 밀어내려고 양다리에 힘을 바짝 줬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소음순 속에 숨은 속살부터 구멍 주변을 샅샅이 훑어가며 쑤석거리자, 어느새 몸은 미끈한 물을 흘리며 그의 흥을 돋우었다. 흥분에 볼록 솟은 음핵을 쓱 비비고 지나갈 때면 여지없이 다리가 파드득 떨렸다.

그제야 제 옷이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깨달은 엘리아는 이를 까득 갈았다. 그날 제도에 도착한 후, 특별제작이라고 만들어준 메이드복. 유난히 치마폭이 넓다 싶었는데 이런 짓거리를 하려고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아주 가지가지 알차게 써먹는 놈들이었다.

한참을 쑤셔대고 긁어대던 손가락이 찻잎을 다 우린 후에야 빠져나갔다. 음핵을 건드릴 땐 또 한 번 흠칫 떨었지만, 극한 상황이 끝난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도망치듯 후다닥 몸을 물렸다.

“얼른 차를 따르고 나가보아라.”

“네, 네.”

자연스럽게 손수건으로 제 손을 쓱쓱 닦는 남자를 피해 엉덩이를 옆으로 돌리고 겨우 제 할 일을 마쳤다. 다급하게 꾸벅 인사를 한 뒤 트롤리를 끌고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주방으로 향하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온 엘리아는 그제야 문에 기대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여전히 두방망이질 쳤다.

“후우… 미친 거 아냐?”

그 와중에 착실하게 반응한 몸은 그사이 물을 얼마나 흘린 건지, 속옷이 회음부에 쩍 달라붙어 미끈거렸다. 거기다 야한 냄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제 몸이었지만, 정말 어이가 없었다.

무릎에 얼굴을 처박고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몹시 당황스러우면서도 몹시 흥분됐다. 미친 남자의 행동에 기가 차면서도 제 아랫도리는 그의 손길을 원하고 있었다.

“하아… 안 되겠다.”

정말로 이러다간 도망이고 뭐고, 스스로 옷을 벗고 그들의 침대에 기어 올라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만큼 몸의 발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양, 제 머리통을 몇 번이나 더 쥐어박은 뒤 엘리아는 욕실로 들어가 그가 헤집어놓은 속살을 닦아냈다. 미끈거리는 애액이 느껴질 때마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손님이 가셨다는 말에 무거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찻잔을 치우러 아힌의 집무실로 가는 발걸음이 어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듯 질질 끌렸다.

곧 이 방을 들어가면 아까 저를 농락한 놈과 분명 몸을 섞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덤빌까 봐 이러는 건 아니었다. 뭐, 어차피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닌데 새삼 그게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문제는 자신이었다. 그들의 손길에 하루가 다르게 발정하는 몸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문득, 그날 영지성에서 제도로 돌아올 때 마차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두 짐승의 좆에 꿰여 좋다고 제가 지껄였던 말들이 떠오르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리아는 한숨을 폭 내쉬곤 눈을 부릅떴다.

그래, 그날처럼 미친 소리만 하지 말자.

그날의 기억을 치워버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힌은 손님과 마주 앉았던 그 자리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질 않는다. 좋지 않은 분위기에 엘리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문을 닫았다.

“찻잔…….”

“문 잠가.”

“…….”

말허리가 잘린 엘리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나 그는 자신을 그냥 돌려보낼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티 나지 않게 한숨을 폭 내쉬고는 문을 달칵 걸어 잠갔다. 그러곤 제자리에서 쭈뼛거리자, 아힌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닿아온다.

한참을 집요하게 보던 남자가 짜증스럽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곤 중얼거렸다.

“엘리아, 이리 와서 앉아봐.”

“네…….”

잔뜩 웅크린 몸으로 주춤주춤 걸어 아까 손님이 앉았던 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 남자의 시선이 다시금 닿아왔다.

“어땠나?”

“네……?”

뭐가 어땠냐는 말인지. 아까 그 상황을 묻는 건가……? 기분이 어땠냐고 묻는 거야?

질문의 요점을 몰라 눈만 끔벅거리자 대답 없는 그녀가 답답했는지, 그가 이번엔 조금 더 자세하게 질문했다.

“나랑 결혼할 여자라는데.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냐고.”

허……! 결혼할 여자를 앞에다 두고 그런 짓거리를 벌인 거야?

상식을 뛰어넘는 놈의 행태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되레 뻔뻔하게 되묻는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얼른 눈을 내리깐 엘리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으레 찾아오는 손님인 줄 알았건만 막사에서 프레드가 말한 그 여자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공작의 추진력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어땠냐고, 모실 만한 영애 같던가?”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요. 내가 아닌 것 같다면 결혼 안 할 거야?

별 쓸데없는 걸 집요하게 묻는 남자가 짜증스러웠지만, 대답은 해야 했다. 하녀니까. 윗사람이 묻는데 무시할 순 없는 처지니까.

쯧.

엘리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름다운 분이시던데요. 저 같은 사용인도 걱정해 주시는 걸 보니 마음도 따뜻한 분이신 것 같고요. 소공작님과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윗사람들의 물음엔 언제나 정해진 대답이 있었다. 맞고 틀리고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야 그게 정답인 거다. 엘리아는 제가 생각한 정답을 말하곤 시선을 내리깔았다.

순간, 안 그래도 서늘한 온기를 머금은 집무실이 일순 싸늘한 정적으로 얼어붙었다. 오싹 소름이 돋은 엘리아가 얼굴을 빼꼼히 들자, 사납게 일그러진 아힌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뭘 잘못 말했나 싶어 엘리아는 빠르게 제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정답이었다. 칭찬 잔뜩 해주고 너랑 잘 어울린다, 까지 해줬는데 왜 저렇게 똥 씹은 표정도 모자라 죽일 듯 쳐다보냔 말이다.

그 먼 곳까지 구하러 와주고, 마차 안에서는 그렇게 녹일 듯 웃어주고 상냥하게 굴던 인간이 집에 돌아오니 원래의 개차반으로 바뀐 것도 모자라 별 미친 짓으로 사람을 기함시키더니, 이제는 잡아먹을 듯 무섭게 노려본다.

며칠 편하게 해준다 싶었다. 그러나 그 본성이 어디 갈까?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본능은 두려움에 떨었다. 자연히 시선은 아래로 떨어지고, 목은 자라처럼 어깨 안으로 파고들었다. 숨 막히는 정적에 엘리아의 몸은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괴물들을 잔혹하게 죽였던 세 공자의 본모습을 본 탓일까. 아힌의 싸늘함이 그전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랬군. 엘리아 마음에 쏙 든 모양이야.”

다행히도 표정과는 다르게 아힌의 목소리는 덜 차가웠다. 그러나 그의 말투에 가시가 돋친 건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저렇게 화가 났단 말인가. 몇 번을 곱씹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엘리아.”

“…네.”

“내가 말이야.”

말을 하다 멈춘 남자가 느른하게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여유롭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양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쭙 빨아 삼켰다가 후,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행동은 몹시 여유롭고 나른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그는 담배 한 모금을 더 빨아 삼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왜 그 여자 앞에서 네 몸을 만졌는지 알아?”

“…….”

“확인해 보고 싶어서.”

무슨 개소리를 얼마나 정성껏 하려고 저러나 싶어 엘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담배 한 모금을 더 쭉 빨아 삼킨 남자가.

“네 말대로 아름답긴 하더군. 그런데 꼴리지가 않더라고.”

“……!”

라고 말하며 연기를 후― 내뿜었다.

엘리아는 제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귀족들은 원래 정치적 결합 뭐 이런 거로 결혼하는 게 아니었나? 물론 연애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가문에 이익이 될 가문과 합치는 거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힌의 말은 그저 아까 그 영애에게 욕정이 끓지 않아 마음에 안 든다는 것 같았다.

어차피 결혼하면 자연히 하게 될 거고, 해봐야 속궁합이 잘 맞는지 아닌지 아는 거지, 어떻게 처음 보는 여자의 외모만 가지고 꼴리네 마네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건지.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안 꼴리면 안 꼴린 거지, 내 몸은 왜 만진 건데? 그것도 다른 사람도 있는 데서?

그녀의 궁금증을 알았는지, 아힌은 여전히 담배를 꼬나물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널 보는 순간, 이놈이 불끈하지 뭐야? 역시 난 너한테만 꼴리나 봐.”

“…….”

뭐라 답할 말이 없어 그녀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엘리아.”

“…네.”

“나랑 결혼할래?”

“……?!”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아론도 모자라 이젠 아힌까지. 엘리아는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순간 불길했다. 공작과 세 공자의 싸움에 자신의 등이 터질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싫어?”

고개를 삐뚜름하게 내리며 담배 연기를 후, 내뿜는 남자의 모습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엘리아의 눈엔 그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짐승일 뿐이었다. 차라리 얼른 욕정이나 풀고 보내주지, 왜 이런 난감한 질문을 하는 건지.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그 여자를 안느니, 차라리 하녀인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럼 내가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거 아냐.”

“소공…….”

“이리 와.”

짜증이 담겼던 눈빛이 음욕으로 물든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괴로움도 담긴 듯 보였다. 그는 마치 당장 숨 쉴 곳이 필요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주인의 명령에 다소곳이 일어난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주었다. 그러자 자그마한 손을 훅 잡아끈 남자가 제 다리 위에 그녀를 앉히곤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숨을 들이마시다 내뱉는다.

풀잎 향이 나는 담배 냄새가 콧속으로 훅 끼쳤다. 그러나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은 냄새는 아니었다.

“엘리아.”

“…네.”

“네가 책임져.”

“…….”

“다른 년들이 눈에 안 들어오게 만들었으면 네가 책임져야지. 안 그래?”

무섭게만 보이던 새빨간 눈이 곱게 접히자, 엘리아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제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도, 제 턱을 쥐고 입술을 겹쳐오는 남자의 시선에 엘리아는 홀린 듯 입을 벌렸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새 몸은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방으로 돌아온 엘리아는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그렇게 다짐했건만, 그의 손이 닿는 순간부터 이성은 날아가고 본능은 또 미친 짓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아힌의 자지를 잡고 제 안에 끼우고는 좋아 죽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도 모자라, 엉덩이를 흔들고 젖을 빨아달라 애원까지 했다. 쾌락에 몸부림치면서도 더 박아달라고 소리쳤다.

가장 어이없는 건 다 끝난 후 그의 목덜미에 자신이 새겨놓은 붉은 자국이었다. 쾌락에 중독된 몸은 갈수록 더 미쳐 날뛰었다.

“으아악!! 죽어! 그냥 죽어!!”

침대에 연신 머리를 받으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몸이 문제인지, 자신이 문제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왜 그 상황만 되면 발정한 암캐처럼 환장해서 즐기는 건지. 이번엔 아힌이 자신을 탐한 게 아니라, 자신이 아힌을 싹싹 발라먹고 온 거나 다름없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한참 동안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엘리아는 무감한 표정으로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곤 매트리스 아래 숨겨둔 제 전 재산을 꺼냈다. 낡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돈을 침대 위에 다 쏟아붓곤 얼만지 세어보기 시작했다.

“하아… 이거로 집이나 구할 수 있을까.”

이곳의 물가를 전혀 모르는 엘리아는 꼬깃꼬깃한 지폐를 아련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깥의 시세를 모르니 그저 모자라게만 느껴졌다.

처량한 제 신세에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일순 뭔가 머릿속을 반짝 스쳐갔다.

“그래! 그거야!”

절망으로 어두워졌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하게 바뀌었다. 한몫 단단히 챙겨 얼른 이 저택을 나갈 좋은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신 그러려면 놈들의 비위를 잘 맞춰야 했다. 그러나 그건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매일 하던 짓이니까.

엘리아의 눈빛이 음험하게 바뀌었다. 이젠 그들과 함께할 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까짓것 미친 짓 좀 하면 어떤가.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그 미친 짓이 그들을 유혹하기에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음, 일단 목적지부터 정하는 게 좋겠네. 제도와 공작령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딜까?”

엘리아는 앞으로의 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도망쳐야겠다고 생각만 했지, 어디로 어떻게 달아날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확실히 계획을 짜고 조금씩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매번 당장 도망치고 싶었어도 쉽게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뭐가 있어야 도망을 가든 할 게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공작과 여주였던 엘리아의 관계, 그리고 현재 공작의 속내를 알게 된 이상,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못했다. 한 번 납치까지 당하고 나니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무엇보다 돈을 빠르게 모을 방법이 생겼으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어차피 이리 된 몸, 아예 확실하게 바치고 최대한 박박 긁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리라.

그리고 몇 년만 잘 숨어있으면 된다. 저들도 각자 결혼하고 욕정을 풀 여자가 생기면 그때는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가 생기고 가정이 꾸려지면 저 같은 건 금방 잊을 것이 분명했다. 엘리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보지.”

문제는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아직도 저를 불편하게 대하는 사용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공자들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주위에 마음 터놓고 말할 동료 하나 없다는 게 새삼 쓰게 느껴졌다.

“됐어. 언제부터 친구가 있었다고.”

일단 계획을 잡았으니, 뭐라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아는 다시 제 전 재산을 매트리스 안에 숨겨두고 방을 나섰다. 가만히 있느니, 어슬렁어슬렁 다니면서 귀동냥이라도 해볼 심산이었다.

온 저택을 누비며 어슬렁거리자, 사용인들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자신들을 감독하는 듯 힐끔거리는 엘리아의 행동에 그들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예전처럼 대놓고 덤비진 못했다.

별관에서 호위 기사인 양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세 공자의 모습이나, 엘리아가 사라진 후 정신 나간 놈들처럼 저택을 뛰쳐나간 제 주인들을 보았기에, 세 공자가 엘리아를 얼마나 특별히 여기는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도란도란 수다를 떨던 사용인들이 저만 나타나면 조개 입 다물 듯 조용해지자 엘리아는 쯧, 혀를 찼다. 이래선 정보는커녕, 괜히 그들의 미움만 더 살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렸다.

“밖을 나가볼까? 그런데 안 보내주면 어쩌지……?”

직접 밖에 나가 이것저것 알아보고 싶었지만, 이 짐승들이 보내줄지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여태껏 혼자 저택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서 막상 나가도 막막하긴 할 것 같았다.

“하아… 어쩌면 좋지.”

정원 구석까지 들어온 그녀는 빈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갑자기 들리는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고민이 있나 보군요?”

“……?!”

익숙한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리자, ‘오랜만입니다?’라며 제이든이 반갑게 인사했다. 너무 깊은 생각에 빠졌었는지, 그가 따라오는지도 몰랐던 엘리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제이든 님.”

“잘 지냈습니까?”

“네……. 그런데 어쩐 일로.”

혹시나 또 그 이상한 검진을 하러 온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왠지 이 남자slakpwkjmdm는 볼 때마다 꺼려졌다. 악의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웃음 뒤에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몸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그의 말에 냉큼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걱정 있습니까?”

“아니요?”

엘리아가 저를 경계하는 게 느껴지자, 제이든은 멀찍이 거리를 두고 그녀가 앉아있던 벤치 옆, 또 다른 벤치에 앉았다. 겁이 많은 동물은 가까이 갈수록 줄행랑치기 마련이니까.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제이든은 그녀의 경계 안에 천천히 들어갈 생각이었다.

역시나 엘리아는 그가 앉은 벤치 옆에 떨어져 앉았다. 생긋 웃은 남자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아쉬운 게 있어서 일단 앉긴 했는데, 엘리아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와 대화를 하다 그때처럼 또 말려들지도 모르기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뭐라고 물어봐야 의심을 사지 않을까, 머리를 팽팽 굴렸다.

혹시라도 제 질문에 머리 좋은 제이든이 눈치라도 챈다면, 그래서 공자들에게 모두 일러바친다면 도망이고 뭐고, 망하는 지름길이었다.

뭐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먼저 말을 꺼낸 건 제이든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마치 엘리아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뭘 알고 물어본 걸까?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움켜쥐고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색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양 안절부절 어찌할 줄을 몰랐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그가 이번에는 아예 돌직구를 날렸다.

“난 당신이 이곳에서 이렇게 사느니, 이곳을 떠나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엘리아는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재우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을 떠보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가늠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표정만으로 어찌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이렇게 살고 있지도 않았겠지.

일단 저 말에 속지 않기로 했다.

“전 지금도 자유로운데요? 그리고 전 이곳에서 사는 게 그리 나쁘지도 않고요. 설사 제가 이곳을 나간다고 해도 기다리는 사람도, 머물 집도 없는데 어딜 가나요. 제가 있을 곳은 이곳뿐이에요.”

“머물 곳이 있다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나갈 마음은 있는 겁니까?”

“아니요!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이 남자가 왜 이러는 거지? 혹시 공자들이 날 떠보라고 했나?

“이렇게 사는 게 좋습니까?”

“네?”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몸을 주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지는 게 즐겁냐는 말입니다. 혹, 당신도 즐기고 있는 겁니까?”

“그게 무슨……!”

그의 노골적인 말에 기가 막히다 못해 열불이 끓어올랐다. 그걸 즐기는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죽지 못해 사는 제 처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비아냥거리는 말에 남자의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홧홧하게 얼굴이 달아오른 건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어느 정도 즐겼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여기 오기 전 마음먹었던 일이 내심 찔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건 아닌 모양이군요.”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을 본 탓인지 피식 웃으며 쉽게 답을 내리는 남자에 기가 막혔다. 더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해요. 도와줄 테니까.”

그의 말에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제이든을 믿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론 믿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도와준다면 이곳을 나가기는 더 쉬울 테니.

그러나 그를 믿기엔 그에 대한 믿음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도 저런 음흉한 눈빛을 보이는 그를 어찌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럴 생각 없어요. 못 들은 거로 할게요.”

“흐음,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얘기해요. 그리고 전 도련님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도우려는 거고. 아, 혹시 이 말을 전하면 전 그날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믿어도 되겠죠?”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미소. 매사 진지한 것 같으면서도 장난기 섞인 음성. 오늘따라 아주 편하게 제 속을 드러내는 남자가 의심스러우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나갈 수만 있다면, 일단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가 나쁜 맘을 먹었더라도 믿고 싶었다. 나쁜 맘이라고 해봐야, 고작 자신의 몸을 원하는 걸 테니. 원래의 제 몸도 아니고 어차피 세 공자에게 매일 바치는 몸, 거기다 저 남자와도 이미 반쯤은 관계를 한 경험이 있는데 한 번 더 준다고 뭐가 문제일까.

그러나 제가 생각한 나쁜 맘이 그게 다가 아니라면 큰일이라는 얘기다. 그의 속뜻을 모르니 마냥 믿을 수도 없었다. 이건 조금 더 고심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

먼저 본인의 약점을 드러내며 저를 꾀는 남자의 의도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자신을 믿어달라는 소리겠지. 하지만 저 말을 어찌 믿을까. 지금은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몸도 못 믿는 판국에 널 어떻게 믿니.

일단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직 그가 한 말이 호의인지 계략인지 알 수 없기에 여기서 더 흔들렸다가는 제 마음이 티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다 잠깐 멈춰 선 엘리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만남 자체를 지울 거니까요. 참, 그런데 요즘 집값이 얼만가요?”

“적당한 집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이런 저택을 살 게 아니라면 말이죠. 그리고 집 정도는 제가 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지랄. 수작 부리고 있네.

“그냥 오늘 사용인들끼리 집 얘기가 나와서 물어본 거예요. 제가 구할 게 아니고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엘리아는 건성으로 꾸벅 인사하곤 걸음을 서둘렀다. 자꾸만 아쉬워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일단 돈부터 마련하기로 했다. 뭐가 됐든, 돈이 우선이었다.

모르면 일단 나가서 부딪쳐보는 거지, 뭐.

제 방에 들러 깔끔하게 샤워를 마친 엘리아는 돈줄이 원하는 대로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울을 뚫어지게 봤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리 비싸지 않다는 게 대체 어느 정도일까? 딱 원룸 정도면 좋겠는데. 여기도 그런 곳이 있으려나……?”

제이든의 말을 곱씹던 엘리아는 이내 상념을 털어내고 제 돈줄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는 내내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오늘 입을 옷엔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기를……!

-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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