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납치 (7/18)

7장. 납치

눈을 뜬 엘리아는 낯선 감각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윽!’

머리가 지끈거리고 지독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뭐야……?

분명히 제 방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잤는데, 딱딱한 나무 바닥이 느껴졌다. 축축하고 퀴퀴한 공기, 높이 달린 창문으로 조금 들어오는 달빛 사이로 뿌연 먼지가 보였다.

다락방……?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공간. 분명 자신이 지냈던 다락방과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구조는 달랐다. 그리고 이곳은 꽤 오래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듯, 먼지와 곰팡내가 진동했다.

“대체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유 모를 어지러움에 잠시 숨을 고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달빛을 통해 주위를 살폈다. 낡은 나무로 만든 침대는 오래된 듯 삐걱거렸고, 곳곳에는 뽀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어리둥절한 엘리아는 연신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다, 살짝 열려 있는 협탁 서랍을 발견했다. 조심히 다가가 서랍을 열어보자 그 안에는 쓰다 남은 초와 빛바랜 일기장 한 권이 하얀 먼지에 뒤덮인 채로 놓여 있었다.

“이 방에 있던 사람 건가?”

남의 일기장을 보는 게 께름칙하긴 했지만, 엘리아는 뭐에 홀린 듯 그것을 꺼내 먼지부터 탈탈 털었다.

“콜록콜록! 어휴, 얼마나 오래된 거야? 이 방은 아예 청소를 안 했나?”

일단 어두운 방에 초를 켜고 다시 한번 방 분위기를 살폈다. 주위가 환해지자 꽤 오래 방치된 방의 모습이 더욱 훤히 보였다. 방은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아무리 봐도 처음 온 곳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오래 지냈던 곳처럼. 그녀는 자신이 다락방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익숙한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크게 숨을 들이켜다 내뱉으며 일기장을 펼쳤다. 첫 장을 넘기니 그 안에는 어린아이가 쓴 듯한, 삐뚤빼뚤한 글씨가 그날그날의 기분을 담아 놓은 메모처럼 적혀 있었다.

비가 온다. 하늘이 뚫렸나 보다. 왜 이렇게 퍼붓는 건지. 무서워.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음 장을 넘겼다.

왜 다들 날 싫어하는 걸까.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배고파…….

별 내용 없는 일기였다. 그냥 하루하루가 힘들어 제 처지를 한탄하는 글일 뿐. 이 다락방에서 살았다면 자신과 같은 하녀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는 글귀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엘리아는 일기장을 파르르 넘기며 대충 훑어보았다. 그러다 뭔가 다른 느낌의 문장이 보여 넘기던 책장을 멈췄다.

오늘 그분을 처음 봤다. 무섭지만 너무 예쁜 얼굴. 그런데 날 보고 웃어주셨다. 그분은 분명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 거야.

“그분?”

신기했다. 글만으로도 이걸 쓴 이의 반짝거리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남의 일기장이라는 것도 까먹고,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완전히 잊은 엘리아는 다른 이의 연애편지라도 몰래 훔쳐보는 양, 일기장의 주인이 ‘그분’이라는 이를 생각하며 쓴 글에 푹 빠져버렸다.

그분이 오늘 제도로 가신다고 했다. 이제 다시는 그분을 못 보겠지.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난 또 혼자가 돼버렸다.

이 글 다음 장이 빈 걸 보니, 일기는 여기서 끝인 것 같았다.

“이게 다야? 에이, 짝사랑으로 끝났나 보네.”

엘리아는 다시 일기장을 파라락 넘기다 어느 한 부분에서 또 멈췄다.

“또 있네? 어, 글씨체가 달라졌는데?”

삐뚤빼뚤 아이가 쓴 것 같았던 글씨체가 이번에는 정갈하고 곧게 바뀌었다. 그런데 특정 글자에서 보이는 같은 모양을 보니, 아이가 조금 커서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인 모양이었다.

그분을 믿어도 되는 걸까? 난 어떡하면 좋지…….

아프다. 이렇게 아픈 건지 몰랐다. 그래도 괜찮다. 그분이 날 아껴주시니까.

그분의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난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겠지? 이 더러운 다락방이 아닌, 화려하고 예쁜 방으로.

아… 이제 나의 천사님은 잊어야 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분의 아이와 잊어야 하는 천사.

“음, 그럼 그분이 둘이란 얘긴가?”

아무래도 처음에 썼던 그분과 지금의 그분이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이름을 쓰지 않고 그분이라고 칭한 걸 보니,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 내용에 엘리아는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드문드문 빈 장이 있는 걸 보니, 매일 쓴 건 아닌 모양이다. 무엇보다 글마다 감정 변화도 다르게 느껴졌다.

그분과 몸을 섞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그분을 사랑하게 됐나 보다.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보고 싶고 달아오르는 걸 보면. 매일 그분께 사랑받으면서 같이 잠들고 싶다. 내가 먼저 찾아가면 싫어하실까?

요즘 그분이 날 자주 안 찾으신다. 벌써 내가 싫어진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냥 바빠서일 거다. 그래, 그분이 날 버릴 리가 없어. 날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데.

그분이 이제는 내 몸에 흥미가 없어졌나 보다. 이대로 난 또 버려지는 걸까. 아이가 생겼어야 했는데. 쓸모없는 몸. 아니야. 조금 더 잘하면 날 다시 안아주실 거야.

오늘은 그분이 날 찾으셨다. 역시 그분은 날 버린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분의 손길이 너무 좋았다. 내일은 그분의 씨를 더 가득 품어야겠다. 이번에는 꼭 아이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날 무시한 것들은 가만 안 둘 거야.

떠나라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내게 했던 약속들은 다 거짓이었던 거야? 난 이제 어떡해야 하지. 정말 버려졌구나. 나쁜 놈…….

드디어 이 무서운 다락방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제도로 가면 그분도 만날 수 있겠지? 아… 떨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와 내가 이런 사이였다는 걸 알면 날 경멸할지도……. 그래도 보고 싶다.

나의 천사. 잘 계신가요? 당신의 따스한 미소를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전 다 괜찮습니다. 그게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이 여자 대체 뭐야?

이 글을 마지막으로 일기는 끝이었다. 아무래도 다음날 이곳을 떠난 모양이다.

그런데 천사의 아버지와 그런 사이였다고?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아들한테 마음이 있는데, 아버지랑 잔 거야? 허……!”

또 남은 글이 없나 끝까지 넘겨보고는 더는 아무것도 없는 빈 종이에 허탈하게 책장을 덮었다. 뭔가 찜찜하면서도 뒤가 구린 느낌에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일기장을 다시 제자리에 넣었다.

흥미로워서 본 글에 기분만 나빠졌다. 서랍을 닫으려는 찰나, 일기장 맨 뒤에 작게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꺼내 들어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lia

엘…리…아?!

“허, 이게 뭐야? 엘리아? 이거 엘리아 일기장이었어?”

다시 일기장을 꺼내 든 그녀는 뒤에 쓰인 이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나 보고 또 봐도 ‘엘리아’란 이름이었다.

“말도 안 돼! 에이, 아니겠지, 엘리아란 이름이 또 있었겠지. 그 이름이 어디 얘 하나뿐이겠어?”

아무리 부정해도 쿵쾅거리는 심장은 ‘네가 생각한 그것이 맞다’라고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엘리아가 이런 여자였다고? 그 연약하고 가녀렸던 엘리아가?

저를 탐하는 남자들을 못 견뎌서 스스로 목숨까지 끊어버린 그 엘리아가 좋아하는 남자의 아버지랑 잔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바랐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은 진정되질 않았다.

“가만. 그럼 천사는 누구고, 아버지는 누구지? 아, 여긴 대체 어디야? 엘리아가 있던 곳이라면… 설마?!”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얼른 일기장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그런데 너무 높아 밖을 볼 수가 없었다. 침대 위로 올라가 고개를 쭉 뺐지만, 그래도 밖은 보이질 않았다.

그때 똑똑, 짧은 노크 소리와 동시에 누군가 문을 벌컥 열었다.

“엘리아, 오랜만이구나.”

“……?!”

깜짝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낯선 사내가 자신을 보며 빙긋 웃는다. 저택의 집사가 입었던 옷과 거의 흡사한 의복을 입은 걸 보니, 이곳의 집사인 모양이었다. 뻣뻣하게 경직된 몸으로 침대를 내려온 엘리아가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라도 의심을 받을까, 아는 척 인사하면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영지성이었어? 그런데 내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건데?

베르타른 공작령에 있는 공작가의 본성. 현재 베르타른 공작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공작을 본 적도 없고,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제도의 공작저에서는 자신이 읽었던 내용이라 그랬는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알아봤지만, 여기는 그녀가 읽지 못한 부분이어서 그런지 집사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큰일이네. 분명 티가 날 텐데.

거기다 자신이 알고 있던 엘리아가 이곳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아, 어떻게 행동을 해야 좋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사면초가인 상황에 엘리아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더 예뻐졌구나. 이젠 제법 여인의 태가 나.”

“…….”

“각하께서 찾으신다. 따라오려무나.”

“네?”

“으음? 오랜만에 찾으시니 놀란 모양이구나.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래도 각하께서 널 아끼신 건 진심이셨다.”

이게 뭔 소리야?! 설마……?!

“얼른 따라오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아, 네.”

자꾸만 불쑥불쑥 치미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까 본 일기장의 내용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그분, 그분이 혹시?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빠른 걸음의 집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말릴 새도 없이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각하, 데려왔습니다.”

“들여라.”

쿵쿵쿵쿵, 쿵쿵쿵쿵!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손발이 저릿거렸다.

엘리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방 주인의 음성만큼이나 묵직한 문이 열리고 엘리아는 쭈뼛쭈뼛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리고 낯선 사내의 새빨간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휘청거렸다.

“오랜만이구나. 엘리아.”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의 음흉한 미소에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려던 차, 몸이 급속도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반응으로 엘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치 첫 몸정의 주인을 알아본 것처럼 몸은 그의 눈빛에 화답하고 있었다.

미쳤어! 일기장의 그분이 정말 공작이었다고? 천사의 아버지가 공작이었어? 엘리아, 너 대체 뭐야?!

“집사, 차를 내오게.”

“네, 각하.”

순간 불현듯 무언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그 목소리가 분명했다. 아론과 별관에서 몸을 섞고 있을 때 들었던 목소리.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음성이 그날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세 짐승도 모자라 그들의 아버지와 몸을 섞은 엘리아.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온몸을 훑어 내리는 공작의 시선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진다. 제어가 안 되는 몸뚱어리가 더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미친 거야? 몸이 미친 거야?

이성과는 다르게 자꾸만 반응을 보이는 몸에 엘리아는 미칠 것 같았다. 옭아매려는 듯 집요하게 닿아오는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덜덜 떨면서도 아랫도리에선 뜨거운 물을 질금거렸다.

“잘 지냈느냐.”

“…네.”

“더 예뻐졌구나. 하긴, 어렸을 때부터 네 외모는 하녀로 있기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긴 했지.”

세 공자를 섞어놓은 듯한 중후한 외모와 위엄 있는 목소리. 날카로움 안에 스민 다정한 저 말투와 미소는 여자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남자. 일기장에서 잠시 엿본 엘리아의 야망을 생각하니 그녀가 충분히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 아들들보다도 어린 여자에게 손을 댄 남자를 보니 엘리아는 공작의 낯짝이 역겨웠다. 저 미소도, 저 말투도 다 거짓으로 점철된 가면 같았다.

그 아비에 그 아들들인가? 하여간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분위기가 그리 좋은 쪽으로 흐를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을 이곳으로 납치까지 한 남자가 저를 안 건드릴 거란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내게 서운한 것이냐?”

“아니, 아닙니다. 그런데 절 왜…….”

“후후, 보고 싶어서 데려왔다면 믿어주겠니?”

아니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며 소리 내 웃는 공작의 얼굴이 역겨웠다. 어쨌든 그는 엘리아를 이용했고, 제 욕정만 채운 후 그녀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결국 제도까지 내쫓아 제 아들들에게 또 같은 일을 당하게 한 장본인을 어찌 좋게 볼 수 있겠나.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든, 무슨 짓을 했든, 결국 그녀는 죽었고 지금은 자신이 엘리아였다. 결국 그녀를 죽음까지 몰아간 남자가 또다시 이 몸을 노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설마 여기서 벗으라는 건 아니겠지?

제 처지에 공작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에게 안길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을 세 공자가 알게 되면……?

난 죽은 목숨이야.

공작은 이미 엘리아를 한 번 버렸다. 그런 그가 두 번은 버리지 못할 리가. 기껏 쫓아 보낸 엘리아를 다시 제 옆에 두겠다고 데려오지는 않았을 테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변했구나. 나를 그런 눈으로 볼 줄은 몰랐는데. 많이 섭섭하긴 했던 모양이군.”

“섭섭한 거 없습니다. 제도에서 나름 잘 지내고 있었구요. 그래서 다들 걱정하실 겁니다.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까요. 특별히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줄줄이 제 할 말을 늘어놓던 엘리아는 고개를 기울이는 공작의 모습에 말끝을 흐렸다. 연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엘리아와 너무 다른 모습을 드러내 버렸다.

공작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혹시 그가 눈치챈 건 아닐까 초조해졌다. 그런데 공작은 예상과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많이 변했구나.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을까?”

“…….”

“즐거웠나?”

“…네?”

“내 품보다 내 자식들 품이 더 좋았냐고 묻는 거다.”

“……?!”

알고 있었어?

생각도 못 했던 공작의 말에 엘리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공작의 눈빛이 바뀌었다.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라가는 게 ‘넌 원래 그런 애였다’라고 단정 짓는 듯한 표정 같았다. 엘리아는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권력과 공포를 이용해 엘리아를 탐한 건 자신들이면서, 그녀를 뒷골목의 몸 파는 여자처럼 취급하다니. 엘리아의 새로운 모습에도 어이없긴 했지만, 눈앞에 있는 뻔뻔한 남자의 모습에도 슬슬 화가 끓었다.

그렇다고 ‘엘리아는 당신한테 진심이었어!’라고 말해 봤자 코웃음이나 칠 것이 분명하고, ‘엘리아를 강제로 취한 건 당신하고 당신 아들들이잖아!’라고 말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 같아 그녀는 평소대로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뭐, 안 죽인다 해도 못 할 말이었겠지만.

“오랜만에 나와 함께 자겠느냐? 싫으면 거절해도 좋다.”

기어코 본색을 드러낸 공작의 뻔뻔한 말에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그러면서도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거절이란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가 명령하면 자신은 군말 없이 그의 품에 안겨야 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뛴다. 이놈의 심장이 공작의 말에 기뻐서 요동치는 것인지, 이성이 겁을 먹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그녀의 아랫도리는 공작의 시선만으로도 축축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엘리아! 널 버린 놈한테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니?!

속에선 천불이 나는데도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뭐라 말해야 할지 대답을 골랐다. 안절부절못하는 엘리아를 보며 공작이 피식 웃는다. 그러고는 대단한 아량이라도 베푸는 양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을 따로 내어주마. 오는 길이 고단했을 테니, 일단 가서 푹 쉬어라. 그동안 세 놈을 상대하느라 많이 야위었구나. 집사에게 말해 놓을 테니 식사부터 하고 몸 좀 추슬러. 그리고 이따가 부르면 내 방으로 오너라. 네가 싫다면 강제로 널 취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헛소리.

속내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데도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의 엘리아였다면 모를까, 자신은 저 뻔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버린 것도 모자라, 제 아들들과 몸을 섞은 하녀에게 또다시 욕정을 드러내는 놈을 어찌 믿겠는가. 지겨워질 때까지 또 실컷 잡아먹고서는 버릴 거면서. 그리고 또 방치할 거면서. 아비나 아들들이나 똑같은 놈들이었다.

때마침 찻잔을 들고 들어오던 집사를 불러 세운 공작이 엘리아를 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집사.”

“네, 공작 각하.”

“엘리아에게 방을 내주어라.”

“알겠습니다.”

“엘리아, 그럼 이따가 보자꾸나.”

“…네.”

엘리아는 일단 순순히 대답하고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제도를 막 빠져나와 푸른 들판을 달리기 시작한 두 마리 말은 제 주인들의 사나운 발길질에 속도를 더욱 올렸다.

저녁이 다 되도록 엘리아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조안나가 아힌에게 보고하면서 그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온 저택을 이 잡듯 뒤졌으나, 어디에서도 엘리아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도망간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곧 제이든이 보내온 전서구를 통해 그녀의 행방을 알아냈다. 그리고 소식을 듣자마자 프레드와 아힌은 늦은 저녁인데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타고 베르타른 영지로 향했다.

꽤 오랜만에 가는 베르타른 공작성이다. 그런데 그들의 눈빛은 차가운 밤바람보다 더욱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제도에서 영지성까지는 마차를 타고 하루나 걸릴 정도로 꽤 먼 거리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뭐에 미친놈처럼 주저 없이 말을 달렸다.

이렇게 서둘러 가도 내일 오후쯤이나 돼야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에, 그가 엘리아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고작 하녀 하나 때문에 이리 미친놈처럼 구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자신들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간 남자. 그 남자에게 엘리아마저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유일한 숨구멍이었으니까.

프레드와 아힌은 자신들의 장난감을 되찾기 위해 밤새 달리고 또 달렸다.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되찾아야 했다.

* * *

새로이 받았던 자신의 방보다 더 호화롭고 예쁜 방. 엘리아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방이 이런 곳이었을까?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공작에게 다 걸었던 걸까?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했다. 새로 알게 된 엘리아의 과거. 그리고 상상도 못 했던 그녀의 실체가 아직도 어이없고 황당했다. 꼭 오래 알고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살인자였더라, 뭐 이런 느낌? 오랜 친우에게 배신당한 그런 느낌이었다.

“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작가한테 완전히 속았잖아? 글을 끝까지 읽지 않은 내 탓인가? 참 나.”

이래저래 생각해도 어이없는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조금 있으면 공작을 만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은 그의 품에 안겨야 했다. 하녀니까. 감히 제국의 대공작 각하의 말을 어찌 거역할 수가 있겠나.

무엇보다 제 몸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공작의 눈빛만으로도 그렇게 젖을 정도였으니. 이 상태라면 공작의 손끝만 닿아도 스스로 벗고 다리를 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리아의 몸은 공작을 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발정한 몸이 또 날뛰는 건지도.

“후우, 정말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하다 하다 납치를 당하질 않나, 엘리아의 과거를 알게 되질 않나, 거기다 바로 공작까지? 이게 다 우연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치곤 너무 이상했다. 어떻게 기다렸다는 듯 딱딱 아귀가 맞는 건지.

“흐음,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부터 생각하자. 그렇지 않으면 공작한테든, 세 공자한테든 죽을 게 분명해.”

조용히 몸을 일으킨 엘리아는 침대에 있는 이불보를 죄다 긁어모아 둘둘 말았다. 그러곤 빨래인 것처럼 품 안에 가득 안고 얼굴을 가렸다.

분명 집사처럼 누군가는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빨래하러 가는 것처럼 얼굴을 가리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잽싸게 1층으로 내려갔다. 몇몇 지나가는 사람들과 마주치긴 했지만, 다행히도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고 누군가 제 뒷덜미를 붙잡을까 봐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겨우 본관을 나오자마자 건물 뒤로 향했다. 연신 두리번거리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일단 사람들이 없는 곳만 찾아 어두운 곳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젠장. 제일 구석진 곳으로 숨긴 숨었는데, 막다른 곳이었다. 거기다 담은 왜 이렇게 높은 건지.

영지성은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해 방어 거점으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성벽 위에는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고, 성문에도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이 높은 성벽을 기어 올라갈 수도 없고, 성문으로 가면 제 발로 자수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니, 말 그대로 그녀는 독 안에 든 쥐였다.

“미치겠네. 어떡하지.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들고 있던 이불을 안은 상태로 그녀는 담벼락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제 운명은 이것으로 끝인 모양이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나 체념하고 있는데, 익숙하면서도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

한겨울 북풍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화들짝 놀란 엘리아는 눈만 빼꼼히 들고 저를 덮고 있는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다.”

“주, 주인님!”

눈앞에 서있는 아론의 모습에 엘리아의 심장이 또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다간 조만간에 심장마비로 먼저 죽을 것 같았다.

아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지금 여기서 이 남자를 만날 거라 생각도 못 했던 터라,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지금 그를 만난 게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몹시 당황스러웠다.

“빨래하려고 원정이라도 온 건가?”

“…….”

“흐음, 일어나.”

하여간 말본새하고는. 설마 빨래하러 여길 왔을까?

오랜만에 본 남자는 마지막 봤을 때와는 다르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간 양 차갑고 싸늘했다.

반가울 새도 없이 남자의 명령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자신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했다. 벗으라면 벗고, 누우라면 누워야 하는 하찮은 처지. 공작을 피해 달아났더니, 더 무시무시한 놈을 맞닥뜨렸다.

아론의 서늘한 시선에 엘리아는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부피가 큰 이불을 꼭 끌어안고 주춤주춤 일어섰다. 어휴, 한숨은 나오면서도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뻔뻔한 공작보다는 그래도 살 맞대고 산 이놈을 따라가는 게 백번 나을 것 같았다.

메마른 눈으로 바라보던 아론이 엘리아의 손에 들린 이불을 홱 빼앗아 옆으로 던지고는 얇은 이불 하나만 달랑 들어 그녀의 머리 위에 푹 뒤집어씌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온몸을 돌돌 말아 보쌈 해가듯 제 어깨 위에 털썩 얹고는 짧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찍 소리도 내지 마.”

“주, 주인님.”

“질문은 내가 한다. 넌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

잔뜩 성난 목소리에,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이 제 배를 찌르는 아픔에도 엘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이곳을 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죽은 듯 축 늘어졌다.

성큼성큼 걷는 남자의 어깨 위에 달랑 매달려 덜렁덜렁 시체처럼 흔들리던 몸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몸이 어딘가에 또다시 옮겨져 턱 걸쳐진다. 타닥타닥, 소리가 날 때마다 몸이 또 덜렁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말 위에 얹힌 모양이었다.

그렇게 몇 걸음 걷던 말이 또 멈춰 섰다. 그러곤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아예 몸에 힘을 쭉 빼고 완전히 늘어져 버렸다.

“공자님. 그건 뭡니까?”

“내가 네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하나? 성문이나 열어라.”

“아, 네. 죄송합니다.”

성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말이 다시 움직였다. 그제야 한숨을 놓은 엘리아의 눈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조금 후 늘어진 몸이 휙 들어 올려진다. 그러곤 앉은 자세로 어딘가 기대졌다. 심장 소리가 들리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의 앞에 앉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까? 남자의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날뛰었다. 꼭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이불에 둘둘 말린 채로 이리저리 옮겨지던 몸이 그제야 어느 한곳에 내려졌다. 여전히 이불에 갇힌 채로 멀뚱멀뚱 앉아있자, 아론이 이불을 휙휙 걷어 머리만 꺼내주었다.

“푸하! 하아, 하아. 여긴… 어디예요?”

촛불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어둠침침한 공간을 두리번거리다 집요하게 닿아오는 시선에 엘리아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가 궁금해할 때가 아니었다. 눈앞의 짐승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하지? 자고 일어나니 여기였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공작한테 납치당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랬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

이것도 저것도 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 같아 엘리아는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그가 무슨 말을 물어올까 조마조마하며 침을 꼴깍 넘기는데.

“벗어.”

놈은 허를 찔렀다.

“…네?”

“내 몸이 그리워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 아니었나? 일단 급한 불부터 꺼주지.”

뭐래, 이 미친놈이? 그거 아닌데요? 불 안 났는데요? 하나도 안 급한데요?!

이 짐승 같은 놈이 또 제멋대로 해석하곤 갑옷을 척척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금세 드러난 남자의 성난 아랫도리에 엘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인간은 쉬이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남자가 여태껏 살아있는 걸지도.

“눈 떠.”

서슬 퍼런 명령에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곤 그의 몸을 힐끔거렸다. 촛불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남자의 탄탄한 나신을 더욱 색정적으로 보이게 휘감았다.

그동안 무슨 일을 했던 건지, 남자의 몸은 자잘한 상흔들로 가득했다. 원래도 좋았던 몸이었지만, 며칠 만에 본 그의 몸은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조각상처럼 제대로 각이 섰다.

성격만큼이나 자신만만하게 헐벗은 몸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남자의 시선에 엘리아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그의 몸을 힐끔거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아름다운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원초적인 본능.

“뭐 하고 있는 거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새 까먹은 건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마지막에 보였던 자상함은 정말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론은 처음처럼 무섭게 일갈했다. 뭔가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에 입이 쓰면서도 엘리아는 쭈뼛쭈뼛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남자를 여기서 만난 게 그다지 행운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동안 해이해진 정신을 바짝 차린 엘리아는 천천히 단추를 풀어 내리며 아론의 눈치를 살폈다. 왜 이 남자 앞에만 서면 몸도 마음도 쪼그라드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 길들이지 못한 짐승은 여전히 사나웠다.

새하얀 여체에도 검은 음영이 드리우자, 아론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안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사이 엘리아의 분위기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더 농염해지고, 더 아름다워졌다. 수줍게 내리깔린 긴 속눈썹 아래에 청초해 보이던 벽안이 요염하게 빛났다.

고요한 달빛 아래 옆 막사에는 수많은 기사가 취침 중이다. 그리고 불침번을 서느라 제정신으로 돌아다니는 놈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 떡하니 서있는 제 막사 안에 여자를 들였다.

예전 같았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하 중에 한 놈이 몰래 막사로 여자를 데려와 잠자리하다 걸려 쫓겨난 게 불과 며칠 전 일이다. 그리고 그 벌을 내린 것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신이 여자를 들였다. 부하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그러나 그게 엘리아였기에 아론은 또 한 번 안 하던 짓을 하고야 말았다. 허상처럼 제 앞에 나타난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이 세웠던 철칙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무조건 그녀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오는 내내 그녀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절대 그녀 혼자선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데리고 왔다는 얘긴데, 과연 그게 누굴까……? 답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 형제들이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을 리는 절대로 없을 테니까.

‘아버지. 이젠 엘리아입니까?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저는 이제 그 어리석고 약했던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제 것을 또다시 빼앗아 가려고 한다면 그땐, 정말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제 아비를 향해 이를 바득 간 아론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러곤 가녀린 팔목을 당겨 제 품 안에 가둔다. 예전처럼 좆이나 빨라고 시키든지 다짜고짜 꼽기부터 할 줄 알았건만 느닷없는 포옹에 엘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는 남자의 힘에 숨이 막혔지만, 엘리아는 언제나처럼 꾹 참았다. 도망갈 곳도, 도망칠 마음도 없었기에 엘리아는 아론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안아.”

“네, 주인님.”

아무 감정 없는 포옹. 거기다 오랜만에 듣는 기계 같은 엘리아의 음성을 듣는 순간 들끓었던 기분이 폭삭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자신이 안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순간 불끈 열이 끓어올랐다.

자신은 매일 밤 지친 몸을 이끌고 기절하듯 자면서도 잠 끝엔 항상 엘리아를 떠올렸다. 그녀와 마지막에 함께했던 그 시간이 뇌리에 박혀 밤마다 고달팠다.

언제부턴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제 머릿속을 미친놈처럼 만든 게.

밤마다 제 아래에 깔려 울부짖던 얼굴과 황홀할 정도로 음란한 몸이 떠올라 불끈거리는 아랫도리를 애써 재워가며 버텼건만, 이 여자는 자기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한 것 같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딴 곳에서 구르고 있는데. 그새 날 잊었단 말이야?’

잔뜩 약이 오른 아론은 다짜고짜 그녀의 젖가슴을 터뜨릴 듯 쥐어 잡았다.

“흣!”

“쉿, 조용해. 여긴 굶주린 짐승 새끼들밖에 없다고.”

아프게 움켜쥐고 조용히 하라니. 억울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저 입 닥치고 얌전히 있을 수밖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버티자, 다행히 손아귀에 힘이 풀린다. 참았던 숨을 내쉬려는 찰나, 놈의 무도한 손이 다른 곳을 헤집고 들어왔다.

“하읏, 읍!”

아까 공작 때문에 젖었던 음부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남자의 굵은 손가락이 푹 쑤시고 들어왔다. 자신 때문에 젖은 거라 착각한 건지 그가 피식 웃으며 이죽거린다.

“여전히 음탕하군.”

젖었다 마르길 반복한 아랫도리가 남자의 손에 또다시 금세 젖어들었다. 내벽을 꾹꾹 눌렀다 휘젓길 반복하자, 음란해진 몸은 그의 의도대로 착실히 반응했다.

“하읏! 주인님……!”

“조용. 한 번만 더 소리 내봐. 막사 밖으로 던져버릴 테니까.”

“흐읍!”

나쁜 새끼.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가락을 거칠게 쑤셔 넣은 것도 모자라 질 주름을 잔뜩 휘저으면서 조용히 하라니. 엘리아는 그의 모순적인 요구에 기막혀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놈은 정말로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처음처럼 거칠게 휘젓기만 하니 흥분보다는 아프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아파요.”

그녀의 애절한 속삭임에 아론이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고는 사납게 굴던 손가락을 쑥 빼고는 느닷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아론은 제 어이없는 행동에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잔뜩 토라진 아이처럼 심술부린 거랑 뭐가 다른가. 언제나 냉정함을 잃지 않는 자신이건만, 왜 매번 엘리아 앞에서는 이리도 감정적으로 변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네?”

아론이 사과를 하다니. 혹시… 죽은 영혼인가……?

여태껏 그의 품에 안겨서 따끔한 손맛을 봐놓고도, 엘리아는 안 하던 짓만 하고 떠난 남자가 기어이 죽어서 귀신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의심했다.

아까는 안 변한 거 같더니,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건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그녀를 놓아주곤 간이침대에 몸을 누였다. 이게 지금 뭔 상황인가 이해가 안 된 엘리아는 눈만 끔벅거리며 누운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홀랑 벗겨놓고 저 혼자 누워 눈을 감은 남자가 어이없을 무렵, 여전히 눈은 감은 채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리 와. 자자.”

한쪽 팔은 베개처럼 쭉 뻗고 얼른 들어와 안기라는 남자의 행동에 그녀의 눈이 또 한 번 휘둥그레졌다. 애인끼리나 할 법한 행동을 무심하게 하는 아론이 이상하게 보였다.

“또 한 번 말해야 하나?”

“아, 아니요.”

여전히 음성은 싸늘하기 짝이 없으면서 행동은 왜 저렇게 사람 설레게 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쭈뼛거리며 그의 품속으로 자리 잡고 누웠다. 아론의 팔베개를 하고 마주 본 상태로 꼭 껴안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하다. 옷이라도 입고 있었다면 좀 나았으려나. 헐벗은 나신이 고스란히 맞닿으니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남자는 자신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로 미동도 없었다. 정말로 잠든 건지 점차 숨소리도 고르게 느껴졌다. 그가 깰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같은 자세로 있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뱉다 다시 홉 들이켰다. 제 숨결에 아론의 긴 속눈썹이 움찔거렸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냥 자려는 건가? 그럼 나도 그냥 자면 되는 건가……? 에이 씨, 잠이 와야 말이지. 밤새 뜬눈으로 있게 생겼네. 어휴…….

자세도 불편한데, 성격도 지랄 맞은 짐승 새끼한테 갇힌 것도 모자라, 이 상태로 밤샐 생각을 하니 설렜던 마음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벌써부터 불편하기 시작했다.

숨도 편하게 못 쉬고 한 자세로 계속 있다 보니 슬슬 다리가 저렸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굳은 몸을 살짝살짝 움직였다. 아론이 완전히 잠들면 빠져나올 생각으로 겨우겨우 버텼다. 그러다 잠든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네. 그나저나 엘리아가 말한 천사는 누굴까……?

공작의 아들이라 했으니, 이 세 놈 중 한 놈이 그녀의 천사일 것이 분명했다. 참, 보는 눈 없다 싶었다. 어딜 봐서 이놈들이 천사로 보일 수가 있는 건지. 악마라면 또 모를까.

웃었다는 걸 보니 프레드인가?

아힌과 아론은 잘 웃지 않는 편이다. 아론은 거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그나마 아힌은 자신과 몸을 섞을 때나 웃는 편이었다. 그런데 해맑은 프레드는 언제 어느 때나 잘 웃는 남자였다. 아무래도 엘리아의 첫사랑은 프레드였던 것 같았다.

공자들이 어렸을 때는 영지성에 살았었나 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을 끝까지 읽어볼걸. 후우… 내가 뭐 이럴 줄 알았나. 쩝.

일기장을 떠올리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있는데 문득 아론의 머리칼이 거슬렸다. 그의 눈꺼풀을 찌를 듯 내려온 한 가닥이 자꾸만 자신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제 손은 아론의 허리께에 걸쳐져 있는 상태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머리칼을 향해 호호,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

넘어갈 듯하면서 다시 내려와 제 이마를 콕콕 찌르는 머리칼에 슬슬 오기가 발동했다. 너무 심취한 나머지 이번에는 후! 하고 세게 불어버렸다. 그러자 아론의 반듯한 이마 옆쪽으로 걸쳐진 머리카락이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엘리아가 묘한 승리욕에 히죽 웃었다.

헉!

그러나 곧 웃음기는 사라져버렸다. 짐승의 시뻘건 눈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퀭하게 움푹 팬 눈꺼풀 위로 덧씌워진 음영이 이토록 무섭게 보일 줄이야.

“죄, 죄송합니다. 머리칼이 자꾸……. 흐읍!”

아까부터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던 붉은 입술이 이 사달을 만든 눈치 없는 입술을 한입에 삼켜 물었다. 깜짝 놀란 입술이 꾹 다물리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찌릿한 통증에 아, 소리를 내뱉자 벌어진 입 속으로 기다렸다는 듯 두툼한 살덩이가 밀려들어 왔다.

바람 한 번 세차게 불었다가 짐승을 깨워버린 엘리아는 당황할 새도 없이 남자의 농밀한 키스에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제집인 양, 말캉한 살덩이는 온 입 안을 휘젓고 다녔다. 혀뿌리까지 쭙 빨아 삼켰다가 야살스럽게 혀를 엉긴다. 점막 곳곳을 꾹꾹 찌르고 다니다 흐르는 타액을 츄르릅 빨아 마셨다.

격렬한 것 같으면서도 몹시 부드러운 키스였다. 입을 떼기 싫을 만큼 야릇하고 질척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남자와의 키스에 엘리아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한참을 물고 빨던 혀가 빠져나가고 입술이 떨어졌다. 참았던 숨을 후, 내쉬며 감았던 눈을 뜨자 도톰하게 부풀어 번들거리는 남자의 입술이 가장 먼저 보였다. 촉촉해진 시선을 위로 올리자, 여전히 아론의 새빨간 눈동자가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 엘리아는 습관적으로 사과부터 했다.

“죄송…….”

“잠이 안 오나?”

“…….”

끝이 갈라진 아론의 낮은 음성이 지나치게 섹시하게 들린다. 그의 목소리마저 제 몸을 녹이는 것만 같았다.

분위기 때문이야. 분위기가 너무 야릇하잖아.

“하아… 날 기어이 짐승 새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지. 넌.”

말과는 다르게 갑자기 머리통을 끌어안고 제 품에 가두는 남자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것도 모자라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앓는 소리를 내는 남자의 행동이 낯설면서도 생경했다.

그런데 가슴은 왜 이렇게 뛰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심장 소리라고 우기고 싶을 정도로 눈치 없는 심장은 요란하게 날뛰었다.

프레드와 아힌에게 이렇게 설렜던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겐 왜 이렇게 설레는 거지?

분위기 때문이라고! 분위기!

“엘리아.”

“네? 네. 주인님.”

“궁금한 게 있다.”

“네.”

궁금한 게 있다던 남자가 잠시 침묵했다. 그런데 이번엔 각기 다른 박자의 심장이 요란하게 울린다. 그도 분위기에 취한 걸까? 하긴, 이 분위기라면 천 년의 욕정이 식은 사람이라도 설렐 것이 분명했다.

“너.”

“네.”

“내가 말이다.”

“네.”

“조금이라도…….”

“…….”

그의 끊어진 음성이 머리 위에서 윙윙 맴도는 기분이었다. 뭐가 궁금하길래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지.

“보고… 싶었나……?”

“……?”

이런 걸 왜 묻지……? 자신이 물어놓고 움찔 떨리는 남자의 몸짓에 아론의 가슴팍에 파묻혔던 얼굴을 힘주어 빼내곤 그를 마주 봤다.

불빛 때문일까? 아론의 얼굴이 발갛게 물든 것 같았다. 언제나 오만하게 저를 내려다보던 눈빛이 잘게 떨린다. 무에 그리 긴장한 건지, 아론의 목울대가 꿀렁거린다. 낯선 그의 모습에 엘리아 또한 문득 궁금해졌다.

“주인님은요……? 제가, 보고 싶으셨나요……?”

“……!”

제 눈동자 색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에 엘리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대체 그게 왜 궁금했을까?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거기다 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왜 빨개진 건지. 그래서 되돌려줬다. 네 마음은 어떤지, 네가 먼저 말해 보라고.

그리고 주고받은 질문에 말문이 막힌 건 엘리아였다. 그냥 생각 없이 질문을 되돌려줬을 뿐인데, 부메랑처럼 날아온 대답은 그녀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보고 싶었다. 미치게.”

“……!”

얌전히 있던 촛불이 그녀의 마음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안 그래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막사 안이 붉은 기운으로 가득 찬 느낌이다. 생각지도 못한 아론의 대답에 그녀의 심장도 연신 붉은 피를 뿜어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심장이 뛰고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리고 한 단어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미치게, 미치게, 미치게……?!

새파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놀란 표정에 아론이 피식 웃는다.

웃었어. 웃었다고……! 이놈 정말 살아있는 놈 맞아?!

정신이 반쯤 나간 엘리아는 양손으로 아론의 양 뺨을 덥석 잡았다. 한쪽으로 누워있는 터라 한 손은 거의 아론의 코를 덮은 꼴이 되었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동안에 보여왔던 표정에 비하면 아주 유한 얼굴이었다.

“주인님! 정말 살아있는 거 맞죠? 귀신 아니죠?”

“제발 조용히 좀 해. 나랑 이러고 있다고 소문이라도 내고 싶은 거야?”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왜 자꾸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거지? 그렇게나 내가 죽었으면 좋겠나?”

“그게 아니라…….”

네가 자꾸 미친 소리만 하잖아요.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세요?

“아직도 못 믿는 모양이군. 안타깝게도 난 멀쩡히 살아있어. 그리고 널 당장 덮치고 싶어 죽겠는데도 꾹 참고 있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라고.”

키스 때문이었을까, 얌전히 늘어져 있던 아랫도리가 언제 발딱 치솟았는지 엘리아의 가랑이 사이를 꾹꾹 찔러댔다. 그의 진심에 힘이라도 실어주려는 양, 제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러니까 이상하다고요! 주인님이 언제부터 제 사정을 봐주셨다고 참고 그러세요? 하고 싶을 때마다 마음대로 해놓……. 합!”

순간 머리통을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모양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건 아론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저도 모르게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다가 점점 짙게 물드는 새빨간 눈동자에 엘리아는 입을 합 다물었다.

“그랬군. 내가 미친놈이 맞았네. 언제부터 내가 네 사정을 봐줬다고. 먹고 싶으면 그냥 먹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렇지, 엘리아?”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읍!”

순식간에 아론의 입술이 다시금 겹쳐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키스였다. 더는 참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히 느껴지는, 거칠고 농밀하고 갈급한.

굶주린 맹수의 욕정을 그냥 건드린 것도 아니라 불알을 툭툭 쳐대며 약 올린 꼴이 됐으니 할 말이 없었다. 말뜻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결론은 ‘왜 참는데?! 네가 언제부터 그런 놈이었다고? 그냥 덤벼!’라는 뉘앙스가 돼버렸으니.

거칠게 밀고 들어온 살덩이가 단번에 목구멍까지 치고 들어왔다. 진작에 꿰매버렸어야 할 입은 욕정으로 똘똘 뭉친 살덩이를 받아내며 끙끙거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제 몸에 안달 난 남자의 조급한 욕정을 느끼며 물색없는 아래가 그새 물을 질금거렸다.

그녀의 몸을 감싸 안고 있던 손이 날갯죽지를 타고 등허리를 쓸었다. 부드럽게 쓸고 내려오는 움직임과는 다르게 굳은살이 가득 박인 아론의 거친 손 때문에 척추를 따라 찌르르 전율이 흘렀다.

가녀린 알몸이 바르작거리자, 아론은 그녀의 허리를 바짝 잡아 끌어안았다. 탄탄한 가슴팍에 부드러운 젖가슴이 뭉개지듯 닿는다. 그것만으로도 두 남녀의 숨소리가 한층 거칠게 흐르기 시작했다.

본능에 잠식된 짐승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엉덩이를 찰지게 주무르던 손이 그녀의 한쪽 다리를 제 허리 위로 올리고는 활짝 벌어진 엉덩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친 손이 이번에는 부드러운 속살을 살살 비벼댔다.

“으읍, 흐응.”

입술이 잡아먹힌 상태라 비음 섞인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굳은살이 여린 속살을 문질거릴 때마다 짜릿하게 오는 쾌감에 몸이 배배 꼬였다. 그의 손길을 피하려고 들썩거릴 때마다 의도치 않게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말랑한 젖을 치대게 되었다. 그녀는 오늘 여러 번의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아론의 이성을 완전히 앗아갔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접 붙은 격렬한 키스에 조용했던 막사 안은 음란한 소리로 가득 찼다. 거기다 흥건하게 젖은 가랑이 사이를 쑤석거릴 때마다 쯔걱, 쯔걱, 음탕한 소리가 화음을 얹는다. 이 감미로운 소리 위로 그녀의 참지 못한 비음이 흥을 돋웠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황홀한 소리가 아론은 꿈만 같았다. 매번 찬 서리가 내려앉았던 이 삭막했던 막사 안이 그녀의 온기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양, 한참을 붙어있던 입술이 그녀의 격렬한 신음에 떨어졌다. 아론의 가장 굵은 손가락 하나가 엘리아의 질구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검을 잡는 손이라 그런가? 유난히 굵고 거친 손가락이 내벽을 휘저으며 드나들자, 좁아터진 질구멍이 살려달라는 듯 벌름거렸다. 고개를 젖히고 몸을 활처럼 휘며 바르르 떨자, 이번에는 새하얀 목덜미가 그를 유혹했다.

핏줄이 도드라진 목덜미를 덥석 문 아론은 향기로운 여체의 체향을 맡으며 쭙쭙 힘주어 빨기 시작했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도장을 찍고 혀로 살결을 빨아 삼켜 자국을 남겼다.

아론의 애무에 미칠 것 같은 엘리아는 상체를 뒤로 빼며 지분거리는 입술을 피해 달아났다. 그럴수록 몸은 점점 위로 올라가고 아론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곧 흥분으로 가득 찬 젖가슴이 보이자, 아론은 참지 않고 덥석 입 속으로 삼켜버렸다.

“흐읏! 흡!”

짜릿한 쾌감에 신음이 크게 터져 나오자 엘리아는 얼른 제 손으로 입을 막고 가까스로 참아냈다. 주체할 수 없는 몸은 줄기차게 젖을 빨아대는 남자의 머리통을 끌어안으며 버둥거렸다.

다 먹어치우려는 듯 가슴의 절반을 삼켜 문 것도 모자라 어찌나 힘주어 빨아대는지 젖꼭지가 남자의 입천장에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흡사 가슴에 흡착기를 달아놓은 것 같았다.

젖 빠는 힘이 거세질수록 질 안을 휘젓는 손가락 또한 거세졌다. 넣다 빼길 반복하다 손가락 뿌리까지 깊게 쑤셔 박은 후에는 둥글게 원을 그리며 질구를 넓혔다.

휙휙 휘저을 때마다 굳은살이 여린 속살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그러나 아프긴커녕 황홀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아래서부터 뜨겁게 올라오는 감각에 엘리아의 엉덩이가 앞뒤로 들썩인다. 무도하게 자궁 목을 휘젓는 손가락을 응징이라도 하는 양, 오물오물 씹어대고 남자의 입 속에 처박힌 젖을 흔들며 절정으로 치달았다.

“흐읍. 으응… 으으응……! 흐읏, 흐으으…….”

다행히도 조금 남은 이성이 그녀의 입을 더 꽉 틀어막았지만, 채 막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신음은 숨소리로 바뀌어 헐떡거렸다.

그녀의 절정을 느낀 아론이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그러곤 벌려놓은 구멍에 불뚝거리는 자지를 잡아 단박에 쑤셔 넣는다. 예고도 없이 쑤시고 들어온 흉포한 좆 기둥에 엘리아는 또 한 번 입을 틀어막고 가까스로 신음을 참아냈다.

“으읍!!”

탄력 좋은 내벽이 오므려지기 전에 쑤셔 박은 터라, 아론의 성난 자지는 손쉽게 자궁구까지 치고 들어갔다. 정상 체위가 아닌, 옆으로 누워 마주 본 상태라 그의 선단이 생소한 곳을 꾹 찌르며 틀어박혔다.

도망간 엘리아의 상체를 바짝 끌어당긴 아론이 입을 막고 있는 손을 치우곤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놔주며 빤히 바라본다. 남자의 눈빛에서는 더 이상 싸늘함이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듯 아론의 눈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묵직한 자지가 꿈틀거릴 때마다 엘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좆을 품은 채 이상한 감정을 담은 눈빛을 마주하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없이 몰아쳤던 전희가 끝나고 궁극의 목적이었던 삽입 과정까지 끝마치자, 이제야 평화가 찾아온 듯 심장 박동이 잔잔해졌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인 듯 틀어박힌 좆도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마주 닿은 시선만큼은 아직 진정되질 않았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저 눈빛의 의미는 대체 뭐지……?

오늘 아론은 정말 이상했다.

그가 갑자기 피식 웃는다. 그러곤 부드럽게 입을 맞추다 쳐다보길 반복했다. 아론의 저런 웃음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혹시 엘리아가 말한 천사가 이 남자인가 싶을 만큼 매혹적인 미소였다.

그녀는 반쯤 풀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새빨간 눈동자를 이쪽저쪽 번갈아 보았다. 아름다웠다. 남자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원래도 잘난 남자였지만, 분위기에 취하니 남자의 매혹에 완전히 홀린 기분이었다.

“반한 것 같군.”

“네…….”

그녀의 주저 없는 대답에 먼저 농을 던진 아론의 얼굴이 또 붉게 물들었다. 그러곤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 같아. 언제부턴가. 꼭 그 몸의 주인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네… 그런 것 같네요.”

당신도 당신이 아닌 거 같아. 정말 아론이 맞는 건가?

꼭 아론의 몸속에 다른 이가 들어온 것 같았다. 자신도 들어왔는데, 아론의 몸이라고 바뀌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정신 좀 차리지?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 이렇게 넋을 놓으면 어떡해?”

“흐읏.”

굵은 좆 기둥이 천천히 빠져나간다. 반도 안 나갔던 굵은 자지가 다시금 힘차게 밀고 들어와 쿵 치받자, 엘리아는 제 손가락을 악물고 끙끙거렸다. 잇자국이 선명한 그녀의 손가락을 뺏어 안쓰럽다는 듯 살살 핥아준 남자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엘리아.”

“하아, 네, 주인님.”

“왜 아직까지 주인님이야?”

“…흣, 네?”

“분명히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 했던 것 같은데, 머리가 나쁜가?”

아… 그랬었구나. 그렇게 스치듯 얘기한 걸 어찌 기억한단 말인가. 거기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는 바람에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게 진심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변덕이 좀 죽 끓듯 해야지. 흥!

머리가 나쁘다는 말에 엘리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름 불러봐.”

“…네?”

“내 이름 불러보라고.”

“아론.”

그동안 아힌과 프레드의 반복 학습 덕분인지 엘리아는 서슴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아론의 눈꼬리가 곱게 휜다.

뭐야… 왜 또 저렇게 웃는 건데? 정말 미치겠네!

부르래서 그냥 불렀을 뿐인데 뭐가 그리 좋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오랜만에 본 남자는 정말 이상하게 변해있었다.

자꾸만 홀리는 저 요망한 얼굴을 피하려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자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굵은 몽둥이가 또 한 번 나갔다가 사정없이 짓쳐 박는다.

“흐읍!”

아랫배가 울울할 만큼 치고 들어온 자지에 감은 두 눈이 저절로 번쩍 뜨였다.

“날 봐. 눈 감지 말고. 키스할 때도, 느낄 때도, 눈 감지 말고 나만 봐.”

오늘따라 아론의 한마디 한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까딱 잘못하다간 아론이 자신에게 푹 빠졌다고 착각할 만큼 그의 말에 설랬다.

“그 새끼들하곤 얼마나 했어?”

“……!”

갑자기 허를 찌르는 공격에 엘리아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다행히 ‘시도 때도 없이요.’라는 말을 뱉지 않을 만큼의 정신은 남아있었기에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치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솔직한 눈동자에 아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 내가 널 못 지켰으니 뭐라 할 말은 없는데 기분은 더럽군. 대신 그놈들의 좆이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늘은 나로 가득 채울 거니까 각오해, 엘리아.”

엉덩이를 바짝 잡아당기자 아랫도리가 더욱 가깝게 붙었다. 그 상태로 허리를 돌리자, 굵은 자지가 내벽을 잔뜩 벌리며 원을 그린다. 그녀는 엉망으로 벌어지는 속살에 입술을 깨물고 다시 시작되는 은밀한 남자의 몸짓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부드럽게 피스톤질을 하던 남자가 잠시 멈추고는 성기를 쑥 빼냈다. 그러더니 그녀의 몸을 똑바로 눕히곤 덮칠 듯 여체의 위를 점령했다. 서로에게 잔뜩 취한 남녀의 눈빛이 욕정으로 들끓었다.

“조금 세게 할 거야. 참을 수 있지?”

아론의 말에 엘리아는 대답 대신 남자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아론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했다.

“네, 아론…….”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녹을 듯한 음성에 아론의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곧게 폈던 팔을 구부리고 상체를 숙이자 그녀의 입술이 먼저 닿아왔다. 부드럽게 밀고 들어오는 자그마한 혀를 달게 삼키며 아론은 곧게 뻗은 제 아랫도리도 그녀의 몸속으로 채워 넣었다.

그녀의 입 안 살만큼이나 부드러운 속살이 잔뜩 벌어지다 다시 오므라든다. 오도 가도 못 하고 자궁목에 끼인 좆을 조였다 풀기를 반복하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겉살이나 속살이나 그녀의 몸은 부드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일 밤 꿈속에서 저를 괴롭히던 여자의 실체를 직접 느끼려니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감각이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제 좆에 맛이 간 그녀의 얼굴을 감상했다. 입을 벌리고 헐떡거릴 때마다 두툼한 살덩이를 집어넣어 휘저으면 그녀의 달뜬 신음이 제 입 속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세게 치받고 싶었지만, 혹여라도 그녀가 괴로울까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제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화답하는 그녀의 교태스러운 몸짓이 미칠 만큼 좋았다.

조금 전에도 그녀의 몸을 맛봤지만, 꼭 처음 삽입한 것처럼 기분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엘리아. 지금 넌 내 꿈속에 있는 건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묻는 아론의 말에 엘리아는 그가 전하는 아랫도리의 짜릿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이상하게 변한 남자와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분위기에 취하자 저도 이상해진 기분이었다.

“아니요… 제 꿈속인 것 같아요. 하아…….”

“누구의 꿈이든, 꿈은 맞다는 얘기군.”

“그래서 싫으신가요……?”

“아니, 좋아. 꿈인데도 네 몸은 여전히 날 미치게 하잖아. 내가 헛소리를 뱉을 만큼.”

“하읏, 아론……!”

그녀의 부름이 도화선이 된 듯 아론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아래서부터 깊게 쳐올리는 단단한 살덩이에 숨이 턱 막혔다. 더는 갈 곳 없는 곳까지 닿아온 자지가 아예 뚫고 나가고 싶다는 양 더 깊숙이 찔러온다.

“흐윽, 하아, 흐으응!”

“후우… 미치겠군.”

아론은 미간을 좁힌 채 제 아래 깔린 여자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그녀의 뜨거운 속살에 좆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제 심장을 조인 만큼 성난 놈을 꽉 조여 무니 움직이기가 버거웠다. 거기다 얼른 움직여달라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오물거리는 좁은 속살에 아론은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녀인 걸 알면서도 아론은 정말로 제 품에 있는 엘리아가 허상이 아닌지 확인하듯, 연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뺨을 어루만졌다. 매번 당연하게 소리를 참으라 명령했는데, 오늘따라 신음을 참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동안은 당연하던 것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공작저를 떠나올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리움이 길었던 탓일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는데, 그녀는 눈에서 멀어지니 더 애타게 그리웠다. 분명 제 계획은 엘리아를 자신에게 푹 빠지도록 만드는 거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저 없이 못 살도록 만들어놓고 그녀를 괴롭힐 작정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입장이 바뀌어버린 제 마음에 아론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미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린 마음을 다시 되돌리기엔 늦어버린 것 같았다. 아론은 저를 멍청한 얼간이로 만든 엘리아를 바라보며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기적처럼 제 앞에 나타난 그녀. 이곳에 온 이후로 첫날 빼곤 발도 들이지 않았던 성에 잠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던 게 행운이었을까.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걸어가는 이상한 여자의 뒷모습을 한 번에 알아본 제 눈썰미가 대단한 것이었을까.

못 알아볼 턱이 있나. 엘리아만큼 육감적인 몸을 가진 하녀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 분명한데. 잘록한 허리 아래로 유려한 곡선을 그린 탐스러운 엉덩이는 그녀가 백 미터 밖에 있어도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꼴리게 만드는 엉덩이니까.

‘내가 빠진 만큼 너도 내게 빠져줘야겠다. 엘리아. 나는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거든.’

상체를 일으키고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러곤 번쩍 들어 제 자지의 위치와 나란하게 맞춘다. 조금 더 허리를 디밀자, 뿌리까지 덥석 삼킨 구멍이 말간 물을 흘리며 뻐끔뻐끔 잘도 물어댄다.

“하아읍!”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이 터지자 그녀는 얼른 다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음란한 소리를 듣고 싶기도 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오밤중에 취침 중인 부하들을 죄다 깨울 순 없으니.

울상을 지으며 헐떡이는 여자를 보니 더는 얌전히 굴 수가 없었다. 얼른 움직여달라는 듯 빠끔대는 구멍이 제 자지를 쭉쭉 빨아 삼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런 순진한 얼굴을 하다니. 저 순진한 얼굴을 밤새 음탕하게 물들이고 싶었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이따가 그리로 가야겠군.’

2차전은 다른 곳을 염두에 두곤 아론이 다시 추삽질을 시작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질구를 뚫고 들어가는 순간, 아론의 자지는 요사스럽게 치대며 쑤셔 박혔다.

두툼한 좆 대가리가 빠르게 길을 뚫고 들어갈 때마다 사정액을 담뿍 머금은 불알이 말랑한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린다. 한 대 맞을 때마다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대는 꼴이 몹시 야해 빠졌다.

“흐읍! 으읍, 으읍!”

그녀의 안쓰러운 신음에도 아론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엘리아의 몸 안에 제 씨를 가득 뿌리고 싶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군. 엘리아도 완전한 내 여자가 될 것이고, 아버지한테도 아주 좋은 선물이 될 테니. 흥.’

대공작가의 둘째 공자가 하녀와 눈이 맞아 아이라도 낳는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아론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아론은 제 아버지도, 자신의 가문인 베르타른도, 자신이 그 핏줄인 것도 이가 갈리게 싫었기 때문이다.

“흡, 흡, 흐읏, 흐읍!”

퍽퍽퍽퍽, 치받는 속도가 더욱 거세졌다. 제 안에 쌓인 분노를 그녀의 몸속에 다 쏟아부으려는 양, 아론의 추삽질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거친 허릿짓에 참기 힘들었는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녀의 팔에 풍만한 젖이 잔뜩 모였다. 두 개의 볼록 솟은 젖무덤이 덜렁거리는 게 자꾸만 눈길을 끈다. 아론은 그녀의 표정부터 온몸을 훑어 내리며 엘리아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이 아름다운 여체가 제 것이라는 게 몹시 흡족했다.

갑자기 허리를 비틀며 내벽을 꽉 조여 무는 것도 모자라, 부들부들 떨며 눈을 까뒤집는 엘리아의 음란한 모습에 모든 감각이 자지 끝으로 몰린 기분이었다. 땡땡하게 올라붙은 불알이 움찔거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크윽!”

“흐읍, 흐읍! 흐으읍!!”

갑자기 몰아닥친 사정감에 신나게 내달리던 성기가 쿵, 한 번 쳐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접합부가 꽉 맞물렸다. 뜨거운 씨물이 꿀럭꿀럭 나오자, 아론은 조금의 틈도 없이 그녀의 질구를 제 자지로 꽉 틀어막았다.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그녀가 모조리 삼켜주길 바랐다. 그래서 아이까지 생기면 몹시 기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론은 엘리아의 몸 상태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언제 잠든 건지 기억조차 없었다. 얼마나 오래 싸는지 골반을 틀어쥐고 끝도 없이 교접부를 맞대고 있던 남자의 모습을 끝으로 기절하듯 잠이 든 모양이다.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아 피곤해 죽겠는데 촙촙 입을 맞추며 깨우는 남자의 음성에 감긴 눈을 겨우 들어 올렸다.

“엘리아, 일어나,”

“으음… 주인님.”

“어서 일어나. 갈 데가 있어.”

언제 일어난 건지 혼자만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론의 모습에 엘리아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가 옷을 내밀자 비몽사몽 옷을 입고 멍하니 앉았다.

“어디 가요……?”

“좋은 데.”

“네……?”

“답답해도 잠깐 어제처럼 이불 좀 뒤집어쓰고 있어.”

“네…….”

어제 뒤집어썼던 이불 속으로 다시 몸을 숨긴 엘리아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상태로 그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이번에는 일부러 늘어뜨리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축 늘어졌다.

잠시 싸늘한 공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또다시 말 위에 얹어졌다. 그 와중에도 엘리아는 비몽사몽 눈을 끔벅거리며 졸기 일쑤였다.

한참을 터덜터덜 걷던 말이 멈추어 선다. 그러곤 그녀의 몸이 붕 떠올라 이제는 말 위에 앉혀졌다. 아론이 또 이불을 휙휙 걷어내 주자, 쏟아지는 눈부신 태양 빛에 엘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른 그의 품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론이 피식 웃는다.

“꽉 잡아.”

“네? 흐익!”

갑자기 내달리는 말에 깜짝 놀란 엘리아는 아론을 덥석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다행히 단단한 팔뚝이 안전벨트인 양 그녀의 몸을 꽉 옭아매고 그가 능숙하게 말을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한참이나 달리던 말이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멈춰 섰다. 처음 말을 타본지라 잔뜩 겁에 질린 엘리아는 눈도 못 뜨고 그의 품에 안겨 헐떡거렸다.

“앞에 봐봐.”

“하아, 하아…….”

“정말로 여길 네게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군.”

드물게 다정한 아론의 음성에 엘리아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밤새 이상하던 놈은 여전히 이상했다. 눈물이 찔끔 난 두 눈을 쓱쓱 비비고 아론이 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이내 입을 쩍 벌렸다.

우와……! 이게 다 뭐야……?

눈앞에 펼쳐진 신비로운 광경에 엘리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넓은 호숫가 같은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 보니 따뜻한 물인 모양이다.

온천도 있었어……?

그녀가 원래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지만, 엘리아의 눈엔 그저 온천으로만 보였다. 호숫가 가장자리에는 하얀 나무들이 가득해서 꼭 한겨울 눈으로 덮인 나무들 안에 숨은 노천탕 같은 느낌이었다.

분위기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아론이 먼저 말에서 내리고 그녀를 안아 조심히 내려주었다. 땅에 발이 닿자마자 쪼르르 물가로 달려간 그녀는 물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연신 탄성을 흘렸다.

“들어가 볼래?”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지, 여기서는 마음껏 소리쳐도 돼.”

“…네? 흐앗!”

뭔가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던 엘리아는 언제 벗었는지 금세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 남자의 알몸에 얼른 물가로 고개를 처박았다. 물론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방이 뻥 뚫린 야외에서 흉물스러운 놈을 덜렁거리며 서있는 남자를 빤히 볼 정도의 뻔뻔함은 갖추질 못했다.

뻣뻣하게 굳은 엘리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아론은 거침없이 물속으로 발을 들이고 그녀 앞에 턱하니 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제 앞에 지금 뭐가 꺼덕거리고 있는지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또 입 속에 처넣으려나 생각하는 찰나, 그녀의 몸이 덜렁 일으켜진다.

“벗자.”

“네?”

웬일인지 옷을 손수 벗겨주는 남자의 행동에 엘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택에서 본 남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나 행동이 낯설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런 남자가 아니었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놈이었는데.

덜렁 들어 올려진 몸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잠시 넋을 놓았을 뿐인데, 어느새 제 몸도 알몸인 상태로 아론의 손에 들려 물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 주인님. 자, 잠깐만요!”

“이런 소리를 마음껏 쳐도 된다고 한 건 아닌데?”

알몸인 여체를 안고 주저 없이 물속으로 몸을 들이는 아론의 거침없는 행동에 엘리아는 경악하며 버둥거렸다. 뜨거운 물에 데쳐서 잡아먹을 요량인지 그는 그대로 물속으로 주저앉았다.

“으앗! 아, 뜨뜨!”

“하나도 안 뜨겁다.”

…네, 그러네요.

찬 몸이 더운물을 만나자 일순 뜨겁게 느껴졌는데, 물은 생각보다 그리 뜨겁진 않았다. 따뜻하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일지도. 제 오두방정에 멋쩍어진 엘리아가 먼 곳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러려고 꼭두새벽부터 깨워서 보쌈 해온 거야? 쩝.

무슨 말이 필요할까. 주인이 하겠다는데. 엘리아는 이내 체념하고 분위기 좋은 노천탕에서 몸이나 노곤하게 녹이다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다른 의미로 더 노곤해지겠지만.

어느새 물속에 몸을 담근 아론은 엘리아를 제 다리 사이에 앉히고 뒤에서 꼭 껴안았다. 등 뒤에 앉은 남자의 탄탄한 가슴팍이 묘하게 신경 쓰여 꼼지락거리는데 그는 아주 제 것인 양, 그녀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린다.

동이 트는 붉은 하늘 아래, 동화 같은 하얀 숲속에서 따뜻한 물속에 들어와, 남자 품에 안겨 몸이 만져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꼭 애인하고 야릇한 온천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러나 상대가 아론이었기에 절대로 아름다운 동화가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잔혹 동화라면 또 모를까.

그래도 이 남자와 이런 시간을 갖게 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틀 새 정신없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언제 잔혹 동화가 될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묘하게 설레는 꿈이었다.

“어때?”

“설레요.”

“다행이군. 나만 설레는 거면 어떡하나 했는데.”

“……!”

또 이상한 아론의 헛소리에 깜짝 놀란 엘리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마중 나온 것은 그의 입술이었다. 부드러운 혀가 이 은밀하고 야릇한 시간의 시작을 알렸고, 아론의 손은 천천히 엘리아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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