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은기의 선택 --> (58/59)

<-- 은기의 선택 --> 

이무성은 윤수의 연락에 당황하고 있었다. 대신 법정 출두를 해달라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원래 윤수가 보냈어야 할 밝은 시간과 빛을 앗아갔던 것은 용서해 줄테니, 이번에 이어질 긴 터널에는 앞장 서서 대신 들어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나? 윤수가 맞았는데.’

솔직히 ‘그’ 윤수가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연락을 받으면 겁에 질려 울면서 덜덜 떨 줄만 알았는데, 예상외의 당돌한 말이었다. 

이번 일을 해주면, 서윤주도 그를 용서해 줄까? 그것이 그가 가진 최대의 관심사였다. 무성은 서윤주를 사랑했다. 윤수 때문에 그녀와 틀어졌다고 비틀린 생각을 했고, 이후에 더욱 윤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런데 윤수가 전화온 지 얼마 안 되어 ‘하은기’ 라는 유명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윤수의 현재 애인이라고 밝히며 할 이야기가 있으니 한 번 만나자고 했다. 

장난 전화인가 생각도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며 이무성은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리고 지나가는 행인들이 한번씩 흘끔대며 지나갈 법한 잘생긴 청년을 발견했다. 무성을 보고 그가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까만 코트 안에 하늘빛 셔츠, 기본 청바지인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새였다. 일어나니 더 훤칠하고 체격이 좋아 보였다. 이런 사람이 윤수의 애인이라니 믿을 수 없어 무성은 그가 인사할 때까지 멍하게 보았다. 

“자네가…. 윤수와 만나는 사람이라고? 그 예능에서 같이 나오던 연예인 아닌가? 모델 이라고….”

은기가 순간 날카로운 웃음을 입가에 걸었지만 무성은 그의 차림새를 살피느라 보지 못했다. 

“네. 우선 앉으시죠.”

은기는 아무 말 없이 빤히 이무성을 보았다. 이 사람이 윤수의 새아버지이자 그를 빠져나오기 힘든 구렁텅이로 떠밀었던 자이다. 그 얼굴의 세세한 모양까지 모두 기억하듯 뚫어져라 응시했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 깡마른 체구, 작은 키, 자신감 없어 보이는 어깨, 영락없이 힘든 공사판에 시달린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은기는 윤수가 그를 직접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음이 약해졌을 지도 모르니까. 

무성이 쭈뻣대며 은기에게 말했다. 

“저…그래서, 할 말은?”

은기의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무성이 헛기침하며 말을 재촉했다. 

“오기 전에 형 어머니와 연락을 좀 했습니다.”

“무슨…?”

잘 모르는 커피 이름이 가득한 메뉴판을 뒤적이며 찾던 투박한 손길이 뚝 멎었다. 

“서윤주 씨요.”

“아.”

‘서윤주’ 라는 단어에 그의 눈이 낮게 반짝였다. 모든 것에 무감해진 채 그녀의 이름에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은기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고, 예상대로인 것을 확인했다. 

‘어머니 말씀대로군.’

사실 윤수가 생각해낸 것을 들었을 때는 은기도 놀랐다.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도와주고 싶었다. 아니, 안되더라도 되도록 할 것이다. 은기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윤수가 이 자 대신 법정으로 나갈 일은 곧 죽어도 없을 예정이었다. 

은기는 그가 절대로 거절 못할 함정을 팠다. 그리고 그 위를 자작한 덤불로 덮은 뒤 함정이 아닌 척 제안했다. 그가 사람 좋게 빙긋 웃어 보이며 무성에게 말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윤수 형이 말했던 대로 해주십사 부탁드리러 온 겁니다. 혹시나 해서 형 어머니께 먼저 확인도 했고요.”

“윤주가 뭐라고…?”

“만약 형 대신 그 사건 관련자 및 참고인으로 법정 출두 해주시면, 받아주신다고 하시더군요.”

그가 급기야 눈을 크게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기가 그를 진정시키며 다시 한 번 사실 확인을 해주었다. 

“저, 정말로? 윤주가 그랬단 말인가?”

은기는 직원이 메뉴 확인을 하러 오는 것을 보며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서윤주를 찾아가 나누었던 대화가 선선히 떠올랐다. 

전날 저녁, 서윤주의 가게에 은기가 찾아왔다. 넉살 좋게 손님에게 옷도 같이 팔고 하던 그는 장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윤수의 결정을 이야기해준 뒤,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윤수의 제안대로 이무성이 검찰 측에 협조해 준다면 그를 다시 받아줄 생각이 있냐고. 하지만 서윤주는 단호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 인간을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일 일은 없을 거야.]

옷 진열대 너머에 서 있던 그림같은 남자가 웃었다. 서윤주가 그리 말해주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무성 씨한테 어머니가 받아주실 거라고 할 겁니다.] 

[그 인간한테 거짓말할 생각이라고? 날 팔아서?]

[네. 윤수 형을 그 사람 많은 곳에 세워서 떨게 할 생각, 전혀 없거든요. 전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잘 알고 있고, 최대한 이용할 생각입니다.]

서윤주가 황당하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론 그의 패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이 사람은 윤수를 아프지 않게 할 거라는 확신도 생겼다. 철저히 피윤수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으니까. 다소 이기적인 결정이 될지라도 말이다. 

[그걸 나한테 직접 말할 정도로 자신 있다는 말이지? 그 정도로 윤수 생각해준다는 거고.]

[예.]

서윤주는 어머니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깃들었다. 이 잘생긴 청년이 몹시 든든해졌다. 사실 그의 사회적 지위나 외모 등 여러가지를 고려했을 때 진심인지 의심할 때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은기를 향해 활짝 웃었고,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고맙다. 그래, 마음대로 하렴. 거짓말을 하든, 뭘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앨 지켜줘. 혹시 그 사람이 너희에게 피해갈만한 짓은 하지 않도록 바로 거절하지는 않을 생각이니 걱정하지 말고.] 

은기는 미리 그녀의 의중을 물어서 확인한 뒤 이무성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 나중에, 마음이 바뀌실지도 모르지만.’

은기가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서윤주의 마음이 이후에 바뀌어 그를 받아줄 지 아닐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리 들었습니다. 받아주실 거라고요.”

그는 무성이 절대 거절하지 못할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거짓말을 함으로써, 윤수의 지독했던 과거에 대한 복수를 끝마쳤다. 

창고에 갇혀 윤수가 겪어야 했을 처절한 두려움과 끝없는 절망을, 그 곳에 밀어넣은 그도 아주 약간은, 자락 정도는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수의 어머니, 서윤주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검찰 측에 협조를 해주어도 얻을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일해교의 보복만이 남을 것이다. 

어두운 눈 속에 빛나는 작은 희망을 보면서 은기는 조용히 메뉴를 주문했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반면 무성은 달달한 핫초코를 시켰다. 그가 꿈꿀 달디단 미래일 것이다. 은기에 대한 긴장이나 경계가 풀렸는지, 무성이 누렸던 과거의 영광이 끝도 없이 새어나왔다. 물론 윤수에 대한 미안함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애인이라는 자를 앞에 두고서도 말이다. 

“뛰어난 사업가셨군요. 대단합니다.”

은기는 그의 복수를 닮은 차가운 쓴맛을 목구멍으로 기꺼이 넘기며 무성의 길고 긴 허세와 수다를 받아주었다. 적절한 리액션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한껏 부푼 그의 헛된 꿈을 응원했다. 

언젠가 후회하고 진심으로 윤수에 대한 일을 사과하고 미안함을 느낀다면 그의 꿈도 마냥 헛된 것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이 티타임이 끝나면 은기가 떠맡은 ‘악역’도 끝이었다.

***

며칠 뒤, 윤수가 긍정적인 답변을 보낸 이무성의 메시지를 은기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봐!”

방금 전까지 침실이 떠나갈 새라 신음을 뱉은 직후라서 목소리가 많이 쉬어 있었다. 은기가 말아준 하얀 이불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윤수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기뻐했다. 

“해주신다고 하셨어! 사실 안될지도 모른다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게 정말 되는 구나.”

슬쩍 무성의 메시지를 눈으로 훑은 은기가 씨익 웃었다. 역시 윤수에 대한 미안함이나 사과는 눈곱만큼도 읽을 수 없었다. 아직도 그는 이것만 해주면 서윤주가 받아줄 것이란 헛된 망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가 얻고 싶어하는 보상을 받으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어쩌면 영영 못 받을지도 모르고.’

직접 찾아가서 거짓말까지 해가며 판을 깔아놓은 주제에 은기는 모른 척 잡아뗐다. 

“잘됐다. 해주실 것 같았어요.”

“네가 옆에서 좋은 소리 많이 해줘서 그래.”

“내가 뭘 했다고.”

침대 위에서 비스듬하게 옆으로 누워 은기가 피식거렸다. 윤수는 관계 직후 몸이 안 좋은 지 기침을 해대서 은기가 통째로 둘둘 말아놓은 이불 속에 말려 있었다. 그런데 이불에서 반쯤 튀어 나올 만큼 한껏 흥분해 있었다. 하얀 얼굴에 홍조가 맺혀 있고, 작고 까만 강아지 같은 두 눈이 연신 반짝댔다. 

‘귀여워….’

윤수를 다시 잡아 이불 속으로 둘둘 말아넣자 윤수가 숨막힌다며 투덜댔다. 간신히 얼굴만 내민 윤수는 붉어진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진기도 이 정도면 잘 풀릴 거래. 나는 구두 녹취 정도면 해주면 된다고 하던걸.”

흐뭇하게 윤수의 재잘댐을 듣고 있던 은기가 살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 정도 해줬는데 줘도 못 먹으면 검사직 내려놔야지.”

“응? 진기한테 뭘 줬는데?”

“그런 게 있어요.” 

진기한테 남PD도 연결시켜 주었다. 윤수에게선 예나를, 은기에게선 남PD를 소개받은 검사 하진기는 무뚝뚝한 그답지 않게 대놓고 기쁨을 표시했다. 물론 동생인 은기는 그 정도로 증거 확보 해놓고 제대로 일처리 못하면 앞으로 윤수 얼굴은 절대 못 볼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결혼식에도 못 가게 할 거라고 협박하는 동생을 보며 진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은기가 문득 생각난 듯 화제를 바꾸었다. 

“피디님이 촬영 한 번 더 가자고 하시던데, 연락 받았어요?”

“Living Alone 피디님? 응. 받았어.”

“재출연한다고 했어?”

“고민 중. 아직.”

“뭘 고민해요. 해야지.”

저 웃는 얼굴에 늘 약했다. 윤수는 이불 속에 말려 있었지만 최대한 움직여 그를 외면했다. 

“이번엔 너한테 안 말릴 거야. 어차피 내 단골 손님들은 꾸준히 있었고, 굳이 얼굴까지 안 팔아도 내 커리어에 별로 큰 도움도 안 돼. 지금 너 때문에 네 동기들한테도 포토에세이며 화보며 번역건으로 연락오고 있단 말이다.”

고개를 갸웃하던 은기가 아, 하고 금세 이해했다. 윤수가 모델 데뷔 동기들이 있는 바에 간 적도 있었다. 그 때 이야기 좀 했다고 하더니, 그 새를 못참고 윤수를 공략했나 보다. 은기는 이불 속 작은 애벌레(?) 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빙긋 웃었다. 

“한 번 가더니, 그새 친해졌나 보죠?”

동기들 중 은기가 제일 잘 나가다 보니 다들 은기가 하는 거면 따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건은 잘못 손댄 것이었다. 

‘나 없는 사이 청탁을 넣어? 이 자식들….’

윤수는 왠지 이불에 말려 따뜻해야 할 등줄기가 서늘했다. 특히 그 바의 사장이 몹시 친한 척을 했지만 은기에게는 함구하기로 했다. 

“걔들 말은 다 무시해요. 그래도 돼. 어차피 무시하면 금방 흥미 잃을 거니까. 다들 인내심 없고 바쁘기도 해서 관심사가 그리 오래 못가요.”

“그래도….”

은기의 지인들이라 너무 대놓고 거절하는 것도 그랬다. 윤수가 끙끙대자 은기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단체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윤수 형한테 번역 건 넣는 새끼들 당장 다 철회해 누가 마음대로 청탁 넣으래 내것만 해도 바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였지만 효과는 강력했다. 다들 침묵하는 사이, 그나마 은기와 가장 허울 없는 김석이 대표로 ‘네 건 끝나면 넣겠다’ 고 답장이 왔지만 바로 다음 회신이 이어졌다. 

-미래에도 영원히 바쁠 예정이니까 넣지마 

여기저기서 이건 횡포요, 독재요, 비겁한 놈이라며 항의가 왔지만 모조리 무시한 은기는 급기야 휴대폰을 꺼버렸다. 

이불에 감싸여 은기가 하던 것을 지켜보던 윤수가 소리내어 웃었다. 

“너무하는 거 아냐? 나중에 원망 듣겠다.”

누가 정말 격렬하게 욕을 하는지 귀가 간지러웠다. 은기가 귀를 긁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원망하라고 해요. 어차피 앞에선 별소리 못할테니까.”

“뒤에서 뭐라고 하는게 더 안 좋은 거 아닌가?”

“나만 모르면 그만이지.”

윤수는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며 혀를 찼다.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오래 살겠어.”

은기가 작은 사람을 하나 품고 김밥처럼 돌돌 말린 이불을 통째로 껴안았다. 그리고 하얀 김밥(?) 위로 삐죽 솟은 하얀 얼굴을 마주보았다. 

“오래 살아야죠. 그래야 같이 오래 살지.”

처음부터 변하지 않은 연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윤수만을 보고 있었다. 그와 마음 편하게 마주보게 될 때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같이’ 라는 울림이 더욱 깊게 마음 속에서 메아리 칠 때까지, 더 많이 고통스러워야 했고 울어야 했다. 미처 꺼내기도 힘들었던 고백이 마침내 닿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쉬울 때가 없었다. 그래도 해냈다. 

왠지 목울대가 꽉 잠겼다. 윤수가 작게 긍정의 대답을 했다. 

“응.”

은기의 코가 마주 닿았다. 입술이 달싹였다. 윤수는 눈을 감았고, 은기가 말했다. 그 날의 고백을 되돌려주면서.

“사랑해요.”

당시 은기가 했던 대답을, 이번엔 윤수가 대신했다. 

“응. 나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