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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탁이요?”
예나는 윤수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의외라는 눈길을 던졌다. 본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덥석 타인의 호의를 물고 무언가를 요구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 어려운 듯 머뭇대던 윤수는 기합을 넣더니 간신히 말을 맺었다.
“혹시 관련해서 아시는 게 있으시면 제가 아는 사람한테 말 좀 해주실 수 있나 하고….”
그녀는 흥미로운 얼굴로 눈을 빛냈다.
“어떤 사람인데요?”
“검사요.”
“검사?”
윤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주었다. 하진기라는 검사가 아는 사람이고, 그는 일해교를 수사하는 중이라고 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열심히 듣던 예나가 씨익 웃었다.
“그런 거라면 좋은데요? 그 쪽 조지면 승우도 끈 떨어진 신세 되겠네요. 더 이상 바리케이트 쳐 줄 수도 없을 테고, 제 손에 고이 떨어지겠어요.”
다리를 반대쪽으로 꼰 예나는 손뼉을 가볍게 쳤다.
“뭐, 좋아요. 나한테도 손해볼 일 없을테니, 아니, 오히려 손 안대고 코 풀 수 있어서 좋네. 그 검사, 연락처 알려주세요. 바로 연락해볼테니까.”
그녀가 윤수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더 시원시원한 예나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윤수는 차분하게 제 폰 속에 있는 연락처를 전달해 주었다.
“이것 말고 더 도와드릴 건 없는 거죠?”
“아뇨.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은기로부터 전화가 왔다. 화면을 본 예나가 고갯짓 했다.
“안 받아요?”
“잠시만요.”
윤수는 안그래도 그의 집에서 나와 버린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던지라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이미 연이 끝난 사람이지만 은기가 알면 기분 나빠할 것 같아 서둘러 나온 것이었는데,
‘전화를 못 받을 건 뭐야. 죄 지은 것도 아니고.’
마음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자 어쩐지 숨이 거친 은기의 목소리가 빠르게 쏟아졌다.
-지금 어디에요? 도착했는데 안 보이길래. 나갔다고 하던데 대체 어디 간거에요?
“그게….”
윤수가 힐끔 눈을 굴려 예나를 보았다.
“답답해서 나왔다가 송예나 씨를 만났어.”
-예나 선배? 어쩌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
-그래서 지금 어디 있는데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식은땀이 나고, 마른침이 넘어가는 건가. 윤수가 파리한 안색으로 현재의 장소를 말했다.
“예나 씨 차 안.”
말을 뱉고 나니 그는 왜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역시 장소가 문제였다. 덥석 들어오라고 했다고 들어온 것도 문제였다.
은기도 잠깐의 침묵 끝에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제 감정을 알렸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겠죠.
“나도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란 건 잘 알거든. 근데 절대 아니야. 예나 씨 바꿔줘?”
다급한 윤수의 목소리에 은기는 작게 웃었다. 웃는 걸 보니 알면서 그런 거였다.
윤수는 조여들던 심장에 긴장이 풀리고 미간이 좁아졌다.
‘또 놀린 거야.’
생각해보니 은기가 오해하기 힘든 처지였다. 일부러 놀린 게 분명했다. 그는 게이다. 여자들에게 가장 안전한(?) 친구로 불리는 존재 아닌가.
윤수는 잠깐이나마 긴장했던 자신이 바보같기도 하고, 놀린 은기가 얄미워서 입이 부리처럼 튀어나왔다.
밝은 목소리로 건너편에서 은기가 말했다.
-그건 됐고, 그럼 위치 알려줘요.
윤수는 현재 있는 위치가 찍힌 것을 캡처하여 은기에게 보냈다. 그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예나가 휴대폰을 까딱대며 그를 의미심장하게 보았다.
“근데 은기 너무 믿지는 마요.”
“네?”
“걔 무서운 애라니까요. 남승우도 은기 주변은 절대 안 건드리잖아. 아, 예전에 사건 모르시겠구나? 방송 탄 일도 아니고, 모델 애들 몇몇만 아는 일이긴 하지만.”
이제 사건이라고 하면 무섭다. 윤수가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무슨… 사건이요?”
“승우 그 자식이 원래 뒤에서 유명했다고 하잖아요. 뚜쟁이 노릇하던 거, 잘 보이고 싶은 사람한테 살살 꼬드긴 사람 바쳐서 한 몫 챙겼다고 하던데. 사람 바뀌는 거 아니라고, 모델 되고나서도 그 짓 계속 하다가….”
“하다가?”
“은기 지인을 건드렸거든요. 그 뒤는 뭐, 알겠죠?”
그녀가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
윤수는 당시 서슬 퍼렇던 은기의 말들이 생각났다.
[경고했지. 누구 밑에서 따까리 짓 하든 내 눈에 밟히는 짓만 하지 말라고.]
[아아, 네가 건드린 게 누군지 몰랐겠지. 모르는 것도 죄니까 똑똑해지라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후배 새끼야. 기억 안나?]
아는 사이다 싶긴 했는데, 그런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윤수는 멍한 얼굴로 ‘아’ 를 연발했다. 은기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제 범위 안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니까. 윤수가 남승우에게 맞은 모습을 은기가 봤을 때, 분노로 무섭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새삼 상기되었다. 그를 만나고 처음 보던 생경한 광경이자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조각이었다.
그 날만 떠올리면 연쇄적으로 호텔에서의 그 밤이 윤수의 속을 뜨겁게 어지럽혔다. 은기에게 사랑을 말했다. 힘든 고백이었다. 은기는 그답지 않게 버벅대고 매끄럽지 못한 제 혀를 탓하며 그 고백을 돌려주었다.
아름다운 밤이었….
“얼굴 벌개졌네요. 무슨 생각해요?”
“아, 아닙니다. 아무튼 부탁드릴게요.”
윤수는 인사를 한 뒤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은기가 올 때까지 안에서 편히 기다리라는 그녀의 말도 뒤로하고, 억지로 예나를 보냈다. 어둑한 밤 속에서 그 속에 녹아든 까만 예나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윤수가 걱정스러워했다.
‘잘한 걸까….’
겨울 초입에 들어선 가로수의 나무들이 그의 키 이상으로 길게 뻗어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어두운 길 위에서 조명등이 띄엄띄엄 떠서 작은 달이 여러 개 뜬 것처럼 보였다.
잘 한 걸까. 몇 번을 되뇌어도 이 것 밖에 없다.
윤수는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꽉 쥐었다. 그리고 진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기는 전화를 받고 선뜻 말을 꺼내지 않는 윤수를 기다려 주었다. 조금 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정했어? 참고인, 해줄 생각 있어?
“물어볼 게 있는데.”
-뭐.
“일해교 관련해서 아는 게 좀 있는 분이 너한테 연락해주시기로 했거든.”
-그래? 잘됐군.
이게 핵심이다. 윤수가 눈을 반짝이며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꼭 진술을 법정에 나가서 해야 하는 거야?”
-구두 녹취나 문서로도 할 수 있지. 근데 역시 직접 법정 출두해서 진술하는 게 가장 효력있긴 해. 그래서 너한테 부탁한 거고.
“그럼….”
윤수는 오래도록 긴 터널을 걷게 한 자를 떠올렸다. 처음부터 그랬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어려움에 짓눌려 패배한 채 제 삶과 새로운 가족의 삶까지 망가뜨린 자.
차가 몇 대 윤수의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밝은 헤드라이트 몇 개가 빛의 길을 내면서 스쳐 지나갔다.
“이건 내 사건 한정해서 묻는 말이야.”
-무슨 말 하려고 이렇게 뜸이 길어? 뭔데.
“피해자인 내가 아닌, 가해자인 이무성이 직접 증거 인정해주고 진술해주면? 그게 더 효력있지 않아?”
-…….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는지 진기는 말이 없었다. 윤수의 새아버지였던 이무성.
그 자는 일해교로부터 입막음의 대가로 많은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이를 확증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일해교에 대한 불리한 진술 자체를 거부하고, 이를 두려워했다. 아마 교단 측의 사람들이 그를 협박했을 거란 예측도 나오고 있던 상태였다.
진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 사람이 해준다고 했나?
“아니. 물어볼 거야.”
-그렇게만 되면 사실 좋지. 그 사건에서도 더 나오지 못한 정황이 있는데, 이무성 씨가 인정하지 않았잖아.
윤수의 눈에 조명등이 비춰 반짝였다.
“설득해볼게. 내 진술은 녹취와 문서로 대체하고, 그 분을 법정에 세울 생각이야. 만약 실패하면 내가 직접 참고인 자격으로 법정에 나갈 거고. 그게 내 대답이야.”
건너편에서 말이 없었다. 진기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피윤수가 이런 결론을 낼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그는 새아버지를 두려워 했다. 만나는 것도, 혹 연락이 올까봐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 윤수가 직접 그와 연락해서 법정 출두를 부탁해 보겠다니?
-…많이 달라 졌네.
진기는 피식 웃었다. 윤수가 고민했을 시간들이 헛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은기와 함께 이루어낸 것일 테지. 두려움에 떨던 소년은 영원히 사라졌다. 약간은 씁쓸하지만 정말 다행스러웠다. 윤수가 있어야 할 곳은 처음부터 그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진기는 쓰고 있던 안경을 책상에 내려 놓고 의자에 등을 길게 기대었다. 집무실 탁자 이곳저곳에 꽂힌 책들 앞에 윤수에게 선물 받은 작은 화분이 보였다. 그와 헤어지기 전에 받은 것이었다. 공기 정화에 좋다고 했던가.
작게 웃은 그가 휴대폰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래, 멋진 답이다. 내 입장에선 양 쪽 다 매력적이니까. 너 마음 가는대로, 편한대로 해. 잘되면 은기도 좋아하겠군.
“알고…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말투에 윤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은기가 직접 출두해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걸 알았던 걸까.
진기는 의자에 누운 채 천장을 보며 말했다.
-내가 모르겠어? 그 놈 성격 뻔히 아는데.
그제야 납득한 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넌 형이니까.”
-아무튼 고민하느라 고생했을텐데, 고맙다. 잘 지내고, 결과는 나중에 천천히.
멀리서 은기가 걸어오고 있었다. 편한 셔츠에 바지 차림인데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얼마간 뛴 모양인지 넓은 어깨가 작게 들썩거렸다. 윤수를 발견하고 속도를 늦추고, 그는 천천히 걸었다. 다가오는 은기를 마주 보며 윤수가 눈웃음 지었다.
“응. 곧 다시 연락할게.”
통화가 끊어졌다. 열 걸음도 넘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은기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차 몇 대가 또 조급하게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두 사람의 얼굴이 헤드라이트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은기가 윤수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여전히 차가운 손끝을 은기가 감싸쥐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심란해서 집 나간 거죠? 아까 전화 온 사람 때문에. 새아버지, 그 사람인가?”
“…….”
일렁이는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윤수는 경이로움에 잠겼다. 너무 정확해서 더 덧댈 말도 없었다. 은기는 언제나 날 선 진실의 창으로 사람들을 찔렀다.
하지만 윤수는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그가 쥔 창은 아끼는 사람은 해하지 않는 신묘한 마법이 깃든 것이었으니까. 안전한 테두리에서, 그를 보호하려는 사랑스러운 창이었다.
처음으로 행인들을 신경쓰지 않고, 윤수는 어둠 속에 잠긴 까만 눈을 빛냈다.
“나, 결정했어.”
대번에 알아들은 은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역시, 출두를 생각하는 건가.
“…나가려고요?”
“아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어.”
그런데 윤수의 대답이 조금 달랐다. 은기가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그게 뭔데?”
“너도, 나도, 보다 많은 사람이 좋은 거.”
잔뜩 상기되어 있는 윤수의 붉은 얼굴을 보던 은기가 픽 웃었다. 재밌는 것을 알았다며 흥분해서 알리는 아이 같았다.
“풉, 그렇게 볼 빵빵하게 부풀리고 자랑스러워 할 일인가?”
“내가 언제.”
은기가 웃음을 환하게 띄우고 윤수의 볼 하나를 검지로 꾹 눌렀다.
“귀여운 찐빵 같아. 누르면 터지나?”
“하은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장난치는 은기를 윤수가 지긋이 노려보았다. 웃음이 터진 은기가 한동안 웃음을 수습하는 동안, 윤수는 차분하게 그가 생각한 것과 진기, 예나와 나눈 대화를 들려 주었다.
모두 들은 은기가 윤수의 귓볼을 만지작대면서 (물론 눈치를 보던 윤수가 손을 쳐냈지만 다시 올라왔다.) 빙긋 미소지었다.
“기억 안나요? 내가 당신 인생에서 악역되주겠다고 한 거.”
윤수는 물론 잊지 않았다.
[내가 당신 인생에서 기꺼이 악역 해주겠다잖아.]
그가 황당한 듯 피식대며 제 귓볼을 만지작대는 은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아 내리고 볼에 대었다. 윤수는 조금 놀란 듯한 은기의 얼굴에 대고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무슨 악역이야. 히어로지.”
“오, 영광이네. 히어로. 어감 좋다.”
히죽대던 은기가 손을 거창하게 아래로 그어 내리면서 마치 옛 귀족들이 하는 인사처럼 행동했다.
“마지막까지 기꺼이 악역이 되어 드리죠.”
윤수가 슬몃 미간을 구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흑막이 하는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만.”
은기는 잽싸게 윤수의 손을 잡고 끌고 온 차로 이끌었다. 멀리서 행인 몇이 힐긋대며 쳐다봤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은기가 윤수에게 어깨를 붙이고 작게 속삭였다.
“집에 가요. 괜히 시간만 낭비했잖아. 아깝게.”
“응. 아깝게.”
윤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정말 아까운 시간이었다. 1분 1초, 그와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차에 들어가서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턱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격렬한 키스였다. 헤드라이트가 따뜻한 조명처럼 반짝대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윤수의 선택.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하진기 검사에게 말해서 당시 제 사건 참고인으로 법정 서주세요. 당신이 직접 그 입으로 제게 한 짓들, 전부 사람들한테 말해주세요. 보상받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당신이 부순 내 삶, 다 지났고 보상받아 봐야 돌아오지도 않으니까. 대신, 최근에서야 어렵게 되찾았어요. 빛을 찾았습니다. 다신 잃고 싶지도 않고, 계속 끝까지 붙들고 갈 거에요. 난 법정에 서지 않을 겁니다.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아요. 난 행복해질 거니까.]
새아버지는 윤수에게 물었다. 이걸 하면, 서윤주, 윤수의 어머니인 서윤주를 되찾을 수 있는 거냐고.
그는 몹시 간절했지만 윤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어머니를 중간에 두고 딜 하자는 게 아니니까. 제가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어머니는 어머니 삶 사셔야죠. 법정에 나설 지, 안 나설지는 스스로 선택하세요. 결과에 책임지는 것도, 당신이 모두 알아서 결정하세요. 저는 다만 제안을 드리는 것 뿐이니까. 이틀 뒤까지 생각해 보시고 연락 다시 주세요,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