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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수의 선택 --> 

“어, 모르셨나?”

말을 한 모델은 턱수염이 골고루 난 서글서글한 인상의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근육질의 남자였다. 그가 당황한 듯 다른 이를 쳐다보자 그들이 모른다는 얼굴로 어깨를 치켜들었다. 결국 수습해야 하는 입장이 된 그가 난감한 낯빛으로 이마를 긁었다. 

“그게…. 이 바닥에서 그 쪽에 든 애들이 꽤 많아서. 말 함부로 하기가 곤란하지만, 뭐 그런 겁니다. 헐리웃에 사이톨로지 같은 거?”

모르는 것이 아니라서 윤수는 입을 꾹 다물고 경청하기만 했다. 잠자코 있자 윤수가 모른다고 판단한건지 그가 아는 것들을 풀어 놓았다. 

“아무튼 그 개…, 아니 뭣같은 감독 때문에 우리 동기 중에도 다친 애가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촬영해야 잘 된다고 ‘거기’서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거기’ 는 일해교였다. 

“은기가 그 감독이랑 촬영한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히 큰 사고까진 안 갔더군요. 중견은 입김이 세니까 신인 위주로 잡아서 여태 촬영 유지한 것 같던데 앞으론 못할 겁니다.”

“은기는 신인이 아닌데요?”

왠지 모를 반발심에 윤수가 적극 정정하자 이야기 해주던 모델이 까슬한 턱수염을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유명세 있는 감독이니 은기 매니저가 힘써서 조건 조율도 하고 시작한 거 아닌가? 낮은 건물에 밑에 안전 그물도 설치했다면서요. 보통 그렇게 조건 바꿔주지도 않습니다.”

“그랬군요….”

보이지 않는 뭔가가 그를 옥죄는 것 같았다. 어서 결정하라는 듯, 시시각각 그의 초조함을 부추겼다. 

윤수가 모델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김석이 부리나케 은기에게 연락을 넣었다.

-여기 윤수 형 와있는데 너도 올래?

평소에는 답장도 잘 없던 은기에게서 아주 빠른 답변이 날아왔다. 아니, 메시지도 아니고 바로 전화가 왔다. 김석이 입술 끝을 씰룩이며 걸려온 전화를 받자 은기의 당황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뭐?! 윤수 형이 거길 갔다고?”

“정말 와있으니까 올거면 와. 너 요새 윤수 형 껌딱지잖냐.” 

“기다려, 바로 갈테니까. 혹시 쓸데없는 소리 안했지?” 

“그냥, 이번에 너랑 촬영했던 카메라 감독님 이야기 하고 있는데?”

“설마 현장 사고낸 그 감독님?”

“어. 사이비 종교 신자라고, 모르는 눈치던데.” 

“…….”

짦은 침묵 속에 욕지거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환청이 김석의 귓잔등을 간지럽혔다. 아니나다를까, 은기가 버럭 소리질렀다. 

“미친, 그걸 말하면 어떡해!”

뚝, 끊어지는 전화를 보고 김석이 질세라 욕을 던졌다. 그가 귓속을 손가락으로 후볐다. 

“새끼, 왜 이래. 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가 이제 많이 편해진 것 같은 윤수를 불러 은기가 오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윤수가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은기가? 여기로요?”

“카메라 감독님 이야기 좀 했다고 엄청 화내던데, 이유 알아요? 왜 그러는지.”

윤수는 듣자마자 김석의 투덜거림을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은기라면 굳이 그 감독이 일해교 관련자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참고인 출두 한다고 할까봐 그러겠지.’

윤수의 미간에 새겨지는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고보니 진기한테 이번주 안으로 참고인 관련 의중을 말해주겠다고 밝힌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퍼져 있을 줄은 몰랐네.’

은기를 알면서 연예계 쪽 일에 반쯤 발을 걸치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일해교와 더 가까워졌다. 윤수가 그들의 그늘 을 떨치려 허우적대는 사이 세를 더 확장하고,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탐욕스레 집어삼키고 있었다.길거리에서 꽤 흔하게 그들의 이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윤수는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바 앞에 앉았다. 사장이 그의 얼굴을 흘끗 살피고는 아무 말 없이 칵테일 한 잔을 건넸다. 맑은 보라빛 액체가 삼각형처럼 생긴 빈 잔 속에서 찰랑댔다. 윤수가 그를 물끄러미 보며 한숨 지었다. 

“저 술 안 마십니다.”

안 마시지는 않지만 오늘은 취하면 안되는 날이다. 솔직히 취하고 싶었지만, 그는 취해 있어야 할 때와 아닌 때를 알았다. 지금은 아닐 때였다. 

사장이 그윽하게 웃으며 잔을 더욱 윤수 앞으로 가까이 밀었다. 

“노 알코올 칵테일입니다만.”

윤수는 떨떠름하게 그가 내민 잔을 받았다. 

“아…. 감사합니다.”

그가 바에 팔을 기대고 잔과 함께 윤수에게 가까이 얼굴을 대었다. 숨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칵테일은 술이 아니에요. 백 잔 마셔도 안 취할 걸요.”

이 사람도 게이인 걸까. 이상한 기분에 윤수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작업걸 때 입에 바르는 소리 아니신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바로 맞받아치는 사장의 말에 윤수가 멍하게 그를 보았다. 

“…네?”

사장은 빈 잔을 닦다가 모른 척 말을 흘렸다. 

“은기한테는 비밀입니다.”

잔을 입술 아래로 내리며 윤수가 목 너머로 흘러 들어가는 칵테일을 한 모금 삼켰다. 달았다. 

“아, 예….”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지는 사장이 윤수를 마주보며 빙긋 웃고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까만색 패션 두건을 써서 머리를 모두 올린 모습인데도 훤칠한 키나 분위기에서 은기와 같은 직업 특유의 여유가 느껴졌다. 

윤수는 얼떨떨하게 그가 넘긴 잔을 조금씩 비웠다. 

‘방금 작업 받은 건가? 착각이지?’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낸 윤수가 바에서 눈을 떼고 각양각색의 개성이 있는 모델들을 둘러보았다. 이 곳이 하은기가 속해 있었던 공간이다. 

공간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 윤수는 그들의 그릇 속에 함께 잠겨서 어둡게 내려앉은 밤을 뚫어져라 보았다. 달그락대는 작은 소음이 규칙적으로 들려 좋았다. 

유리벽 너머 세계는 그들의 무대이고, 이 곳은 휴식이자 무대로 나가기 전의 뒷세계이다. 그들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은기가 저 사람들과 섞여 웃고 떠드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이 쪽 세계가 잘 어울리는, 무대 위의 인간. 

그들은, 은기는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 익숙했고 사랑을 받는 것에도 익숙했다.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이다. 

‘자연스럽게….’

윤수가 바로 길게 팔을 뻗어 한 쪽 볼을 기대었다. 차가운 감촉에 이 쪽 공간이 ‘그들’의 그릇 속이었음을 화들짝 다시 깨닫게 되었다. 자신만 자연스럽지 않았다. 청정한 호수 위에서 혼자만 부유하는 기름 한 점 같았다. 

은기가 도착하면 한데 섞일 수 있을까? 

같은 열과 빛을 받아도 혼자만 끓는점이 다를 것이다. 결국 어느 때든 부유하는 건 마찬가지다. 은기의 세계에 굳이 맞출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릇 속에서 잠시라도 섞여있었다는 착각이나마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이 곳에 왔을지도 모른다. 

뺨을 바에 붙인 채로 그가 얕게 바닥만 남긴 유리잔을 만지작댔다. 잔 위에 하얗게 지문이 남았다. 입김이 닿았다 떨어지면서 지문도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너무 욕심내면 안되는데.’

사람마다 담을 수 있는 행복의 크기가 다르다고 했다. 바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면 꼭 탈이 난다고, 윤수의 어머니 서윤주 여사는 그가 어릴적부터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다. 그래서 아버지도 서둘러 가신 거라고. 

그런데 은기가 하는 말은 달랐다. 잡을 수 있는 거라면 닥치는 대로 잡으라고 했다. 정해진 행복의 크기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 정해진 역할마저 제멋대로 정하고 (그의 인생에서 악역을 해주겠다고 하질 않나), 전애인의 동생이라는 정해진 입장도 바꾸었다. 

윤수는 자꾸 욕심이 났다. 다른 걸 아는데, 그의 세계에서 한자락이라도 더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더 많이 은기로 채워넣고 싶다. 그러려면 윤수의 중심이 더욱 단단하게 서서 더 많은 것을 정리하고 비워야 했다. 

윤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지금 취하면 안돼요….”

취하지 않아야 그의 세계에서 비틀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뒤돌아서서 찬장을 정리하고 있던 사장이 흠칫 반응하는 듯 했지만 용케 돌아보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정리. 이제 완전히 악연을 끊고, 명료하게 살아야 할 시기가 왔다. 

예전의 윤수라면 망설일 것 없이 참고인 출두에 응했을 것이다. 그가 망설이게 된 것은 은기가 그 사이에 걸려 있어서였고, 지금 다시 참고인으로 진술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은기 때문이었다. 

은기가 슬퍼하거나 바라지 않는 것은 하기 싫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등 돌리고 손 놓고 있는 사이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독버섯마냥 커져 은기까지 삼키는 것은 더더욱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윤수는 모두에게 걸맞는 해피엔딩을 반드시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짐을 이어나갈 참이었다. 

‘생각을 해, 생각을….’

분명 방법이 있다. 모두가, 아니 모두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가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방법이, 결정이, 존재할 것이다. 

그때, 김석이 윤수의 옆자리에 앉아 갸우뚱 허리를 숙이고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뭐해요?”

갑자기 시야 안에 아는 얼굴이 들어왔지만 윤수는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석과는 이야기도 좀 나누고 면식 있는 사이라고 꽤 친근해졌다. 

“어? 생각이요.”

“무슨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심플 이즈 더 베스트! 너무 어렵게 짱돌 굴리지 말고, 쉽게 쉽게~ 해요.”

씨익 웃는 모습에서 그는 작은 힌트를 얻었다. 

‘간단한 게 최고라.’

가장 먼저 그를 괴롭게 했던 원인을 떠올렸다.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누군가가 생각났다. 

“아!”

윤수가 짧은 외마디 같은 감탄을 뱉으며 벌떡 일어났다. 길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잠시, 아니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어떤 그림이 흐릿하게나마 윤곽을 그리며 윤수의 머릿속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 그림이 사라지기 전에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벌써 가시게요? 은기 여기로 온다고 했는데?!”

윤수는 그의 말을 다 듣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연식도 없었던 일해교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건 모두 새아버지 때문이었다. 그가 윤수를 ‘고쳐주겠다며’ 그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모든 사태를 야기시켰다. 

윤수는 밤길을 미친 사람처럼 걸으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었다. 

‘내 연락처는 어떻게 알아내신 걸까.’

두 사람 앞으로 새아버지는 접근금지가처분신청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연락처를 알아낸 건지 모른다. 하지만 없는 처지에 벌금 무는 것도 감수하고 윤수에게 연락한 것은 그만큼 절실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마 번역 사무소에 연락하셨겠지. 인터넷에 주소나 간단한 연락처 정도는 다 있으니까.’

대충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이러했지만 사무소 직원들은 아무것도 모를테니 탓할 근거도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길을 걷는데, 누군가가 클락션을 울렸다. 

빵빵!

정신 차리고 소리가 들린 곳을 보니 인적 드문 도로변에 견고해 보이는 까맣고 클래식한 차 한대가 서 있었다. 진한 선텐 차유리가 지이잉- 밑으로 내려갔다. 낯익은 얼굴이 그에게 반가운듯 말을 걸었다. 

“어! 윤수 씨? 어디 가세요? 저 지금 바에 피윤수 씨 왔대서 놀러가는 중이었는데?”

예나가 말하는 바는 아마 은기네 동기들이 있는 바를 일컫는 것일 테다. 윤수가 그녀에게 반듯하게 인사했다. 

“송예나 씨? 안녕하세요.”

예나는 막 운동을 다녀온 듯 붉게 상기된 얼굴에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간단한 차림이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요?”

“딱히 어딜 가는 건 아니고, 생각 정리 겸 걷고 있었습니다.”

막상 나와보니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던 차였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로드 매니저가 윤수에게도 인사를 했고, 예나를 윤수를 우선 차 안으로 들였다. 

“갈 데 없으면 잠깐 들어와서 이야기나 해요.”

“아니, 전 괜찮….”

“제가 안 괜찮거든요? 사실 윤수 씨 없음 거기 가는 의미도 없어서. 잠깐이면 돼요.”

주변을 휙 둘러본 윤수는 행인들이 그녀가 송예나임을 알아보기 전에 서둘러 차 안으로 들어갔다. 예나는 엉덩이 두어개 정도로 멀직이 거리를 둔 윤수를 피식거리며 보았다. 

“얼굴 한 번 보기 참 힘드네. 어떻게 나보다 더 바쁜 것 같죠? 윤수 씨는 정말 어려운 남자네요.”

“하하….”

“저 안 잡아먹어요. 경계 푸세요.”

아까 전 바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윤수는 살아있는 인형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목구비도 비현실적이고 마네킹보다 더 균형잡힌 몸도 그러했다. 물론 여자에게는 반응하지 않는 성벽이었지만, 그도 객관적인 눈 정도는 있었다. 

“은기도 온다고 하던데 어떻게 혼자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혹시, 은기랑 싸웠나?”

“아뇨. 안 싸웠습니다.”

“쳇.”

방금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게 저 인형 같은 여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게 맞는가. 윤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그녀의 말을 무심코 따라했다. 

“쳇?”

“아, 그것보다 혼자 왜 그러고 있었냐니까요? 일 있는 거면 나한테 털어놔요. 풀다 보면 마음이라도 시원해지지 않겠어요?”

왜 별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개인사를 털어놔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윤수가 핑계 겸 빤히 운전석 쪽을 보자 예나는 쿨하게 그를 내보냈다.

“나가요.”

“네?”

로드 매니저가 뒤를 휙 돌아보며 반응하자 그녀는 냉정하게 다시 말했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던 윤수가 오히려 당황했다. 

“나가요. 이야기 끝날 동안만.”

“아, 알겠습니다.”

그가 허둥지둥 문을 열고 나갔다. 예나는 로드 매니저가 오늘 실수를 너무 많이 한 탓에 스케줄도 다 늦고 망쳤다며 하소연을 짧게 하다가 윤수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은기 매니저 팀은 병수 오빠가 실장이라 그런지 팀이 아주 효율 좋게 잘 돌아가는데 전 인복이 없나봐요. 아무튼, 저와 달리 인복이 아~주 많은 은기가 뭔가 실수라도 한건가요? 윤수 씨한테?”

인복 대목에서 윤수를 노골적으로 보던 예나는 왠지 은기가 윤수에게 실수를 하길 바랐다는 눈치였다. 

“그런 건 아닙니다. 실수는 제가 했으면 했지 은기가 할 애는 아니잖아요.”

“…쳇.”

또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윤수는 신경쓰지 않고 은기를 두둔하는 데만 힘썼다. 그럴 수록 혀 차는 소리만 묘하게 높아졌지만. 

그녀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예나와는 같은 사건을 겪은 동지 의식 같은 것도 있었기에, 윤수는 저도 모르게 예나에게 크고 작은 것을 털어놓게 되었다. 

암울한 과거 이야기는 빼고, 윤수는 자신이 일해교와 연관하여 진술할 것이 있는 중요 참고인 이라고 했다. 하지만 은기가 반대하여 나서지 않는 쪽으로 하려다가, 이번에 은기가 다칠 뻔한 원인을 제공한 카메라 감독이 일해교 관련자라 고민하고 있었다는 내용까지 말했다. 

팔짱을 끼고 조용히 윤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예나가 불쑥 이를 갈았다.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었다. 

“남승우, 그 놈도 그 망할 사이비 종교 관련자라는 거 아시려나 모르겠네.”

“그랬습니까? 의외네요.”

“요즘 난리잖아요. 어떻게 교세를 그렇게까지 넓힌 지는 저도 의문이지만 모 대기업을 등에 업었느니, 힘있는 여당 정치인에게 줄을 댔니 별 소리들이 많아요. 어쨌든 그동안 남승우 그 새끼 족치려고 동분서주 해왔는데, 그 망할 사이비 때문에 손도 못 대고 있었잖아요. 열받게.”

고상하고 우아하게 생긴 여배우의 입에서 걸죽한 욕이 몇 개 튀어나갔다. 윤수는 순간 잘못 들었나 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의문을 제기할 틈도 놓쳤다. 

뭔진 잘 몰라도 남승우도 일해교 관련자이고, 송예나가 하나의 히든 키가 될 것 같았다. 윤수는 뜻밖의 기회에 눈을 번쩍 떴다. 

‘어쩌면….’

더욱이 예나는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먼저 그에게 도움을 제안하고 있었다. 

“뭐든 제가 도와줄 것이 있다면 말씀주세요. 두 팔 걷어부치고 도와드릴게요. 개의치 마시구요.”

잠깐 고민했지만 윤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이제 주어진 행복에 만족하지 못했다. 욕심을 내더라도 더 큰 것을 원했고, 은기와 함께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싶었다. 그의 삶을 담은 그릇 속에서도 오점 같은 기름이 아닌, 청아한 물이 되어 섞이고 싶었다. 

“저….”

윤수가 정좌로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는 예나를 마주 보았다. 예나가 말해보라는 듯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혹시,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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