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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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야 부탁한다 윤주 연락처 좀 알려줘 

이대로 평소처럼 넘어가는가 했더니 위기를 모면하려는 윤수의 실력(?)도 나날이 발전했다. 그는 아래를 보다 반짝대는 휴대폰 화면을 발견했다. 가까스로 손을 뻗치면서 윤수가 덮쳐 오는 은기를 막았다. 

“어디서 연락 오는 것 같은데, 잠시만.”

은기가 저 멀리 바닥에 나동그라진 자신의 휴대폰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내 거 아닌데?”

“내 건가.”

휴대폰도 비슷하게 생긴 모델이라 헷갈렸다. 취향마저 같다면서 은기가 좋아한 것이 잠깐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일의 컨디션이 결정될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 눈을 반짝이며 먹이를 도모하는 한 짐승 한 마리로부터.

“나중에 봐요. 급한 일 있나?”

“아니…. 응.”

윤수는 아니라고 하려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서둘러 땜빵한 이상한 대답 뭐에요.”

어이없다는 듯 웃은 은기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놓아 주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윤수의 손끝을 지나쳐 길고 큼직한 손이 깜박대는 휴대폰을 잡았다. 그리곤 아래에 누워 있는 윤수에게 건네 주었다. 

“여기.”

체력이 늘 부치는 사무직 연상의 애인은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얼른 빼앗듯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윤수가 상기된 얼굴로 휴대폰을 살피다가 점점 굳었다. 미간이 좁아지던 그가 황당함과 불쾌가 점철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야?”

“왜요? 누군데?”

곤란한 시선이 휴대폰 화면에 고정되었다가 떨어졌다. 

“그게….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누구냐니깐?”

반쯤 벗은 몸이 슬쩍 일어나 아래에 던져지다 시피한 옷을 집어들고 방으로 향했다. 문도 닫은 걸 보니 들리는 것을 피하는 모양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저러지?’

은기가 알만한 사람 중에서 윤수의 지인 중 저런 표정을 짓게 할 만한 사람은 없다. 생각해 보니 번역사무소 직원들 정도 아니면 윤수의 지인을 알지도 못한다. 

‘진기 형 빼고는 하나도.’

그는 평소에 윤수의 지인들과 안면을 터놓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연예인이라는 메리트가 지인끼리의 만남에서는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도 있어서 조심하던 차였는데, 미리 점수 따놓고 여기저기 안전 그물망을 확보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은기가 앉은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끝에 윤수가 방에서 찌푸린 채 나왔다. 나름대로 표정 관리한다고 한 것 같은데 전혀 반영이 되지 않았다. 저렇게 휴대폰을 던지고 싶다는 얼굴로 걸어오는데 누가 모를까. 

윤수와 달리 다시 옷을 챙겨입을 생각이 전혀 없는 현역 모델은 소파에 앉아 턱을 괴었다. 

“정 말해주기 싫으면 범위라도 말해줘요.”

“무슨 범위?”

“가족 일인지, 사무소 일인지, 지인 일인지.”

정답은 지문을 내놓고 표정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말해놓고 은기가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고 윤수의 얼굴을 낱낱이 살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지문을 던졌다. 

“아니면 개인적인 일인지.”

참, 쉽다. 

“흠. 가족 일, 개인적인 일, 둘 다라. 가족과 연관된 일이면서 개인적으로도 엮인 일이란 말이죠.”

이제 체념에 가까운 빛이 윤수의 얼굴에 동동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누구든 당신이랑 일주일만 같이 붙어 지내도 다 알 걸요.”

빙긋 웃는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얄미울 때가 없었다. 윤수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내가 그렇게 알기 쉬워?”

“응.”

올려보며 너무 간단하게 말해서 힘이 빠졌다. 옆에 풀썩 앉는 윤수를 다시 제 팔 안에 가두고 은기가 볼 가까이 입술을 붙였다. 

“그래서, 뭔데.”

흑 불어오는 뜨거운 숨이 볼과 귀까지 닿아 윤수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범위만 알려달라며.” 

피하려 할수록 은기는 더 가까이 몸을 옥죄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문제 풀 때 범위만 알고 끝내는 거 봤어요?”

“뭐?”

예민한 귓불을 도톰한 입술이 물 듯이 잘근잘근 씹는다. 

“범위 알았으면 이제 진짜 정답을 찍어야죠.”

이 정도로 했으면 술술 말할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적응과 진화의 동물이었다. 

윤수는 양 쪽 귀를 손으로 잡으며 벌떡 일어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하얀 손이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붙들고 있었다. 야무진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원래 정답은 스스로 알아내는 거야.”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며 휑하니 가방을 챙기고 나가 버렸다. 

“…하.”

말문이 막힌 은기는 표적을 놓치고 뒷모습만을 망연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누구일까. 누가 전화했길래 그런 심란한 표정으로 있었던 거지?

은기의 모든 촉과 감각은 그 곳에 집중되었다. 가족과 개인적인 일. 두 가지가 연관되면서 윤수가 기분나빠질 만한 일은 사실 그가 알기론 하나 밖에 없었다. 

‘그 빌어먹을 종교랑 연관되는 것.’

바지와 코트만 대강 주워입고 발코니에서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잘근잘근 씹던 그가 머리를 굴렸다. (비흡연자인 윤수를 생각해서 요즘 금연을 실천 중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그의 어깨와 머리를 길게 쓸고 지나갔지만 은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엄동설한의 초입에서 불어온 바람에 솜털이 곤두섰지만 추위도 못 느꼈다. 오히려 후끈후끈 열로 솟는 머리를 식혀서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 쪽은 아닐 거고….’

친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소거법으로 남은 가능성은 그럼 하나다. 

‘역시 새아버지 쪽이겠네. 그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

윤수가 그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하은기는 그리 사람이 좋지만은 않았다. 물론 아군에겐 더할 나위없이 속 넓은 천사였다. 하지만 인과응보의 미덕을 꽤 착실히 챙기며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불 붙지도 않은 담배를 짜증스레 씹으며 그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다고 먼저 나서면 보기도 안 좋고, 너무 개입하는 꼴이잖아.’

사실 윤수가 여태 가만 있어서 아무 잡음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지, 만약 자존심 세거나 자기 일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다른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오해가 생겨도 몇 번이나 생겼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은기가 눈치가 빨라 치고 빠지기를 잘 하고, 사회적 경험치가 높은 편이라고 해도 4살이라는 연륜과 생의 짬밥은 무시 못할 분량이었다. 

게다가 윤수가 혹여 기분나빠할 만한 일은 애초에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젠장!”

은기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끙끙댔다. 이유는 고작 윤수에게 ‘미움 받을까봐’ 여서였다. 만약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이 본다면 경악할 것이다. 

복잡한 심경으로 멀찍이 펼쳐진 새까만 도시의 불빛들을 등대라도 되는 양 보고 있던 은기는 곧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불에 덴 듯 펄쩍 뛰었다. 

“뭐?! 윤수 형이 거길 갔다고?”

잘근대던 담배라 바닥으로 뚝 추락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친, 그걸 말하면 어떡해!”

***

한편, 윤수는 은기의 모델 데뷔 동기들이 있는 펍에 가 있었다. 전에 은기와 함께 그의 다른 쪽 인맥이 부른 음반 녹음실로 갔을 때, 은기와 그의 친구들이 종종 데뷔 동기가 차린 펍에 놀러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은기 친한 형이라고 하셨죠. 심심하면 놀러 오세요. 은기 뒷담화도 좀 까고.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은기만큼 키가 큰 모델이 윤수에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펍 주인이라고 했다. 은기가 구시렁대며 그들 사이를 차단하려 했지만 명함은 빠르게 윤수의 손에 안착했다. 

-내가 깔 게 어딨냐. 

-양파보다 훨씬 많으니까 걱정 말지? 

음반 녹음실에 있던 친구 중 하나가 은기의 데뷔 동기인 동시에 펍의 사장이었다. 그가 나중에 놀러오라며 연락처와 주소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금테가 둘러진 화려한 명함을 보며 윤수가 피식 웃었다. 

‘그걸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명함 받을 땐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정말 갈 데가 없구나….’

은기의 집에서 나왔을 때는 괜히 본인의 나쁜 기분을 옮기거나 전염시키기라도 할까봐 서둘렀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겸 대뜸 나와 버린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가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혼자 술을 푸기도 싫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소속감을 느끼고, 그 속에서 혼자만의 안식을 찾고 싶었다. 사무소 동료 중 그나마 친한 하 수석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하여간 꼭 필요할 때는 도움이 안되는 인간이었다. 가족이래봐야 하나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윤수는 머리를 내저었다. 

‘엄마는 더더욱 안 되고.’

-윤수야 부탁한다 윤주 연락처 좀 알려줘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윤수는 대번에 알았다. 윤수의 어머니인 서윤주와 피윤수에게 새아버지는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 대상이었다. 때문에 그는 서윤주에게 쉽게 접근할 수도 없었고, 아무리 과거의 일을 사과해도 그녀는 절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끝난 관계고, 인연이라 여겼다. 

윤수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하얗게 핏기가 사라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잖아.’

사실 그가 윤수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후회하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새아버지가 윤수에게 갖은 여분의 감정은 오로지 사랑하는 자를 잃게한 데에 대한 분노와 일말의 도덕적인 죄책감 정도일 뿐이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는 아주 작은 양심만이 그와 윤수와의 관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연결해 준다 하더라도 절대 허락 안하실건데.’

새아버지만 모르는 진실이었다. 알면서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보기싫은 현실에서 눈 가리고 도피하면서 원하는 것만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윤수가 썼던 그 날의 일기 글귀가 그들의 관계를 대변했다. 

-그가 보인 민낯과 나의 민낯이 부딪치고, 우리는 서로를 저주했다. 새아버지의 저주는 나를 망가뜨렸고, 나의 저주는 그의 연인을 뺏었다.

하얗게 태워버린 분노가 사라지고 나니 차가운 현실이 보였다. 어둡게 잠긴 도시의 그늘에서 알록달록한 빛의 형체들이 한데 엉켜 윤수의 머리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그의 것은 없었다.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를, 그러나 누군가에게 속해 있을 빛이었다. 

휴대폰 속에 몇 명이 보였지만 윤수는 딱히 연락을 넣을 용기가 솟지 않았다. 

마음 나눌 친구가 이렇게나 없었다니. 

윤수는 멍하게 벤치에 앉아서 추위에 곱아드는 손가락을 펴며 지갑 속을 뒤졌다. 그러자 이 반짝거리는 명함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안 보일래야 안 보일 수가 없는 화려함이 이목을 끌었다. 

은기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장소이다. 거기서라면 편안해질 것 같았다. 

다행히 가자마자 잘 아는 얼굴이 그를 반겼다. 거의 단골이자 할 일 없으면 이 곳에서 뭉개고 있는 김석이 윤수를 발견하곤 손을 번쩍 들었다. 한 손에 긴 나무 큐대가 들려 있어서 맞을 뻔한 주변 사람들이 그를 노려보았으나 신경도 안 쓴 채 뻔뻔했다. 

“어? 윤수 형이네.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

바 안에서 그릇을 닦고 있던 사장이 하얗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명함 드렸어.”

김석이 큐대를 놓고 어리둥절하게 두 사람 사이를 의심스레 훑었다. 

“넌 윤수 형 어떻게 아냐?”

“접때 음반 녹음실에서 잠깐.”

“음반 녹음실?”

윤수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자 그제야 이해한 김석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사장이 바 앞으로 몸을 길게 빼고 일부러 크게 말했다. 다른 동기들도 들리게끔 말이다. 

“은기 포토 에세이 번역 해주시는 분이라면서?”

윤수의 얼굴을 보며 긴가민가 하던 모델들은 그 말에 힌트를 얻어 피윤수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다들 하던 게임이나 휴대폰 게임을 내려두고 삼삼오오 윤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 은기랑 ‘Living Alone’에 같이 나왔던 그 분?”

“그래? 저도 다음에 부탁 드려도 될까요?”

“이번에 TV 나온 거 봤어요. 은기 자식이랑 많이 친해보이시던데, 원래부터 알던 사이였어요?”

윤수는 화보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숨이 막혔다. 직업 때문인지 다들 키도 크고 각자 다른 개성이 있었다. 대충 입은 것 같은 편한 옷들도 그들이 입으니 옷태가 달랐다. 

그림과 화보 사이에 둘러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 매고 있던 윤수를 구제해 준 것도 김석이었다. 그가 보디가드처럼 그의 앞을 두 팔로 가로막고 모델 동기들 앞을 막아섰다. 김석도 키가 커서인지 윤수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야야, 질문은 하나씩. 한꺼번에 물어보면 ‘우리 형’ 헷갈리잖아.”

묘하게 친근한 호칭까지 붙여가며 줄을 세우는 그를 보고 동료 하나가 피식대며 웃었다. 

“네가 이 분 매니저라도 되냐?”

“같이 예능도 찍은 사이란다. 윤수 형, 다음 건은 저랑 하기로 하신 거 아니었어요?”

“그, 그랬나?”

언제 말했더라. 

윤수가 기억에 없는 김석과의 약속을 더듬어 보는 사이 그에게 관심 없어 보였던 모델들도 자리를 털고 다가왔다. 

다들 워낙 체격도 좋고 길죽하다 보니 윤수는 마치 거인 사이에 둘러싸인 소인국 소시민이 된 기분이었다. 다행히 김석의 바리케이트 덕분에 조금 숨통이 틔었고, 은기의 동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남승우 관련 이야기나 이번 에 사고가 난 고층 촬영 전문 카메라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오게 되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윤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번에 사고낸 감독님이…일해교 신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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