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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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는 그렁그렁 눈물과 의문을 단 채로 물었다. 

“직접 다친 게…, 아니라구요?”

말이 조금 이상했다. ‘직접’ 다친 게 아니라니?

-저도 자세히는 모르니까 우선 연락 넣어봐요. 지금 연락처 왔으니 바로 보낼게요. 

예나의 따뜻한 말을 들으면서 윤수는 병수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시죠? 이 쪽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아는 분한테 대충-.”

무슨 정신으로 대답했는지도 몰랐다. 윤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은기의 안부를 물었다. 

“저, 하은기는…괜찮습니까? 기사 봤는데 걱정되서요.”

-너무 정신없는데 나중에 다시….

얼마나 긴장했으면 누구인지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윤수가 다급하게 끊기려는 전화에 대고 소리를 높였다. 

“아뇨, 아뇨. 끊지 마세요! 저, 그, 번역삽니다. 은기씨와 예능 출연도 같이 했던 ‘친한’ 사이기도 하고요. 일정도 일정인데, 괜찮으신가 하고 연락드려 봤습니다. 

이 떨림이 부디 이상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윤수는 긴장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 뒤, 건너편에서 병수의 사무적인 말투가 천천히 들렸다. 

-예. 은기 무사합니다. 기사 오보에요. 지금 기사 정정 요청하느라 정신없네요. 안그래도 은기가 번역사 님한테 연락 좀 해달라고 그랬는데, 저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쭈그리고 앉아서 전화를 받던 윤수가 팔을 축 늘어뜨렸다. 아스팔트 길 위로 오르던 냉기가 이제야 피부에 와닿았다. 추위에 팔을 부비면서 윤수는 입김을 불었다. 하얀 입김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싸늘했다. 

“그럼 그 기사는 대체 왜 뜬거에요?”

-아, 촬영 때 근처 있던 사람 하나가 떨어져서 크게 다칠 뻔 했거든요. 그 사람 잡아주느라 은기도 같이 딸려서 떨어질 뻔 했고. 은기는 안 떨어졌지만 근처 있던 스태프 하나도 수정 씨랑 같이 떨어졌어요. 

깜짝 놀라 윤수가 휴대폰을 반대편으로 고쳐 쥐었다. 

“누구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한수정 씨랑 스태프요. 

그녀는 윤수도 아는 사람이었다. 은기가 몇 번이나 언급했다. 일을 잘하고, 입도 무거운데다 사람도 좋다고 칭찬을 꽤 했다. 

“아….”

병수의 설명으론 은기가 재빨리 그녀를 잡았지만 손이 미끌어졌다. 다행히 아래에 안전 그물이 있어서 무사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정의 한 쪽 팔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그 분들은 괜찮나요?”

-한수정 씨는 아무래도 손 쓰는 직업이라 당분간 쉴 것 같습니다. 은기는 아무 문제 없대요. 찰과상조차 없습니다.”

차마 다행이라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찌됐든 사람이 다쳤다는데. 초조해진 윤수가 손끝을 뜯으며 재차 물었다. 

“저, 좀 이따가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취재하려는 기자들도 많아서 혼잡할텐데, 병수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윤수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평소라면 이상함을 느꼈겠지만 윤수는 은기에게 사고가 생겼을지 노심초사하느라 앞뒤분간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시죠. 주소는 알려드리겠습니다. 

윤수는 사무소로 달려들어가 급한 업무만 끝내놓은 뒤 병수가 알려준 곳으로 서둘렀다. 병원에 도착하자 병수가 마중나와 그를 병실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사이 기자들이 들러붙었지만 병수는 능숙한 듯 매너좋게 이들을 쳐내며 선뜻 병실까지 향했다. 

“죄송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그들은 복도를 가로질러 날 듯 달려갔다. 한수정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태프가 입원한 3인 병실에 문을 열자마자 기자가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문을 닫았다. 

달려온 여파로 헉헉대던 윤수는 환자들 수발을 들고 있던 은기를 제일 먼저 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수척해 보이는 것만 빼면 평소의 그와 똑같았다. 촬영 때 입었던 하얀 셔츠와 투명 메이크업이 그대로여서 왠지 환자인 것 같은 청초한 이미지였다. 

막 물컵을 가져가서 씻으려던 은기가 병실 문 앞에 서 있는 윤수를 발견하곤 입을 딱 벌렸다. 

그 전에 윤수가 먼저 더듬대며 눈시울을 붉혔다. 

“은…, 아니, 하은기 씨?”

은기가 물컵을 거의 내팽개칠 듯 테이블에 놓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윤수의 팔을 붙들었다. 허리를 낮추고 누가 들을새라 은기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병수는 이미 환자들에게 가서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걱정 가득한 눈길에 윤수는 말문이 막혔다. 누가 누굴 걱정해야 하는데. 

“네가 연락이 안되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내 히끅대는 못난 소리로 치환되어 흘러나왔다. 붉어진 눈가가 그의 걱정과 마음고생을 대변하는 듯해서 은기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윤수를 안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눈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애꿎은 손가락만 움찔댔다. 

“미안. 아깐 너무 경황이 없어서 휴대폰 보지도 못했어. 병수 형한테 대신 연락해달라고 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윤수가 더 아픈 줄 알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 그보다 넌 정말 다친 데 없는 거지?”

은기의 안부를 알기 전, 아니 알고 나서도 다른 사람보다 은기를 우선시하는 이기심이 고개 들었다. 윤수는 충분히 자신의 이기심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마찬가지일 거라 확신했다.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니 윤수는 또 울컥 목울대가 잠겼다. 은기만 무사하면 된다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 자책했다. 비록 그렇기에 인간이었지만. 

‘네가 없으면 안되잖아. 정말, 말도 안되는 거잖아.’

복잡한 심경으로 은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환한 얼굴로 한수정이 마주 인사했다. 그 옆에 있던 마른 체형의 스태프도 쑥스러운 듯 꾸벅 앉아서 허리 인사를 했다. 

그들에게 윤수의 소개를 간략히 해준 은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상황을 전달했다. 그 사이 병수는 일처리 할 것이 더 있다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수정 누나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인대 파열도 아니고 늘어난 정도로 그쳐서 복귀도 빠를 것 같아요.”

“이 분은 괜찮으시구요?”

“문제 없댔습니다. 찰과상만 입어서 그것만 치료하면 바로 퇴원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 정말 다행이다….”

은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컵을 다시 들고 개수대로 갔다. 

쏴아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은기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들려왔다. 

“병수 형이 우겨서 안전그물 설치 안했으면 큰일날 뻔 했네. 그래도 그게 밑에 있으니까 안심 됐지.”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윤수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수정이 민망한 듯 입에 주먹을 댄 채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제가 빈혈기가 심해서 어지러운 상태였는데 옥상 끝에서 은기 메이크업 수정해주다가….”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듯 말을 끊고 진절머리를 쳤다. 깜박 정신이 까맣게 멀어진 것이다. 

“그대로 옥상 너머로 넘어갔어요. 담도 높지 않았거든요.”

“예?”

“그거 붙들어주려다가 은기가 떨어질 뻔 하고, 같이 붙들어주려다가 여기 정한기 씨가 발 헛디뎌서 떨어진 거에요.”

“하필 바람도 세게 불 때였으니까요, 뭐. 천운이죠.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물컵을 제자리에 놓고 은기가 수건에 닦으며 다가왔다. 

“누나는 그 와중에 계속 손 놓으라고 하질 않나. 진짜 아찔했다니까.”

수정이 멋쩍게 대꾸했다. 

“괜찮다고 했잖아. 어차피 밑에 그물 있었어.”

“그래도 어떻게 그래.”

수정에게 괜찮으니까 손 절대 놓지 말라고 소리지르는 은기의 모습이 이미 스태프 중 누군가의 휴대폰 동영상 촬영본으로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옥상 난간에 매달린 세 사람의 모습도 함께. 직후 손바닥에 난 식은땀 때문에 수정이 미끄러져 떨어지긴 했지만 사람들은 은기와 스태프의 행동을 벌써 영웅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수정이 둘에게 손 놓으라고 외치던 장면도 회자되고, 이는 카메라 감독 신외진의 도 넘는 갑질에 도화선을 붙였다. 

미안한 얼굴로 수정이 다친 팔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난 빚지는 거 싫다구.”

“참 나.”

은기가 어이 없다는 얼굴로 웃어버리고 촬영 스태프인 정한기도 황당한 듯 함께 웃었다. 말은 그리 해도 모두 수정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떨어질 때조차 다른 사람들이 다칠까봐 혼자 떨어지겠다고 한 그녀였다. 

그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수정이 뭔가 생각난 듯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는 윤수를 홱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피윤수 씨라고 했죠?”

“아, 네.”

“많이 들어봤다 했는데 메이크업 은기가 매번 해달라던 그 일반인 아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윤수가 어리둥절해서 설명을 요하는 얼굴로 은기를 보자 그도 놀란 눈치였다. 

“이름까진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 나 모르는 사이 신 내렸어?”

“아니. 느낌이 그래서. 너 그리고 메이크업 할 때마다 이야기하는 사람, 피윤수 씨잖아. 얼마나 입이 닳도록 칭찬하든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윤수가 은기와 웃는 수정을 번갈아 보았다. 

“하은기 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은기가 다급히 수정을 말리고는 제 입을 채우는 시늉을 했다. 

“누나, 지퍼 잠그는데 얼마 필요해? 말만 하세요.”

“돈은 됐고, 나 윤수 씨 메이크업 해볼래. 네말대로 마스크가 좋네.”

메이크업 아티스트 특유의 도전 정신이 솟는 얼굴이었다. 백지 같은, 하지만 뭐든 그리면 어떤 영감을 담아낼 것 같은 묘하고 단정한 얼굴 말이다. 

반짝거리는 수정의 눈빛을 부담스러워하며 은기가 윤수의 눈치를 보았다. 

“그건 번역사 님한테 의사 물어봐야….”

은기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윤수가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전 좋습니다.”

“…지.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이 없고.”

머쓱하게 중얼거리는 은기를 뒤로 하고 수정이 윤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손등을 슬슬 만지면서 손을 조건반사적으로 살폈다. 

손도 하얗고, 가늘고, 고왔다. 네일 아트해도 잘 먹을 것 같다. 이미 수정은 프로의 눈빛으로 돌변했다. 

“저는 몇 군데 더 검사해보고 내일쯤 퇴원할 예정이거든요. 다음 예능 촬영이 언제인가요?”

처음의 수줍은 모습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적극적으로 변한 수정의 변화에 윤수의 눈이 갈데없이 방황했다. 

“3일 뒤요.”

물론 은기는 못마땅하게 그들이 손 잡은 것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때면 괜찮을 것 같으니까 제가 출장갈게요. 예능 촬영장으로.”

스태프 힘들면 하지 말라고 말려 보았지만 수정은 이미 직업 의식을 오픈한 뒤였다. 후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민간인 길거리 게릴라 메이크업으로 뜨자 경쟁 의식을 불태우던 그녀였다. 

“그,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감사합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윤수가 슬그머니 잡혔던 손을 뺐다. 많이 고쳐졌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사람은 좀 무섭다. 

둘의 스킨십이 길어질수록 세모꼴로 변했던 은기의 눈이 하회탈처럼 흐뭇하게 휜 것은 스태프 정한기만 보았다. 끈끈한 집착의 눈길이 수정과 대화하는 윤수에게 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팔을 비볐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저 한없이 다정한 남자에게 살짝 오한이 들었다.

‘잘못 느낀 거겠지.’ 

저 웃음을 만면에 띤 잘생기고 모든 걸 가진 남자에게 묘한 위화감을 느낄 이유가 없지 않은가. 

***

“그래서, 수정 씨한테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한 건데?”

“집중해요, 집중. 곧 시작하잖아.”

은기가 손 안에서 리모컨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탁 붙들었다. 민망한 질문을 넘기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윤수가 은기 쪽으로 더 바짝 다가갔다. 숨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조금 있으면 두 사람이 이 집에서 함께 찍은 예능이 시작된다. 

“이 예능 인기 많아서 CF 많이 해. 시간 많아.”

“벌써 잊었다니까요?”

둘은 은기의 집에서 소파에서 나란히 앉아 커다란 TV 앞에 죽치고 있었다. 은기가 망부석처럼 입을 닫고 앉아 말해주지 않자 윤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말 안해주려는 모양인가 보다. 서운하기보다는 그저 웃겼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천하의 하은기가 귀까지 빨개져서 전면 부정하는 건지.

윤수는 슬쩍 미끼를 던졌다. 

“내 욕한건 아니지?”

“아니라니깐.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욕을 할 리가…!”

벌떡 일어날 기세로 은기가 흥분했다. 그러다 빤히 바라보는 윤수의 웃음 담긴 시선에 다시 얌전해졌다. 

“…없지.”

“알았어. 그만 물어볼게.”

뭐, 다음에 수정을 만났을 때 물어보면 될 일이다. 윤수가 속으로 즐거이 웃었다.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은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피윤수가 이토록 성장(?) 한 것을 이후에는 땅을 치고 후회할 지도 모른다. 곰 한 마리가 잠정적인 여우로 성장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윤수가 은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물었다. 

“근데 예나 씨 말야.”

왠지 진 기분에 은기가 툴툴댔다. 

“선배가 왜요?”

“전화했을 때 뭔가 이상했어. 그러고 보면 병수 씨도 이상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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