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의 그늘에 기대어 -->
‘괜한 소리는 안하셔야 할텐데.’
허겁지겁 들어가보니 다행히 별 다른 소리는 크게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둘 사이는 여전히 화목했으며 왠지 모를 공동 전선이 형성된 듯 진한 유대감이 보이기도 했다.
윤수는 기쁨 반, 의아함 반을 담아 둘을 지긋하게 번갈아 보았다.
‘느낌 탓인가?’
은기를 보는 어머니의 까만 눈에는 점점 더 신뢰가 짙게 깃들었고, 은기 또한 태도가 훨씬 편해 보였다. 서윤주는 아들에게 자랑하듯 은기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참, 우리 그 사이 연락처 교환도 했어.”
“벌써요?”
별 소리는 안 했지만 별스러운 행동은 이미 한 것 같다. 어머니가 분명 먼저 연락처 이야기를 꺼냈으리라 지레짐작한 윤수가 속으로 한탄했다.
‘이제 고작 한 번 본 사이인데….’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슬쩍 은기의 눈치를 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진실을 고했다.
“내가 먼저 드리겠다고 한거에요.”
그리곤 서윤주 여사에게 고개를 돌려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혹시 급한 일 생기시면 꼭 연락주세요.”
“그래그래. 고마워.”
왠지 모를 찜찜함이 연신 윤수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애써 외면했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윤수가 떨떠름한 심정으로 억지로 웃고는 식은 팬에 누워 있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은기가 정말 맛있는 곳을 예약했는지 다 식은 음식마저 맛이 있었다. 혀 끝으로 맴도는 맛을 느끼느라 그는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시선교환을 미처 보지 못했다. 윤수가 묘한 거슬림을 날려보내면서 이내 미소지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보다 잘 끝나서.
긴장했던 것들이 무색하게 죽이 잘 맞는 두 사람 덕에 어머니와의 첫 만남은 무사히 지나가고 있었다.
장소를 옮겨 차와 다과를 즐기는 시간을 보내고 어머니를 집까지 모셔드린 뒤 두 사람은 따로 남았다. 윤수가 자리 파하고 할 말이 있다며 은기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흘린 것이다.
달이 하늘 높게 완벽한 동그라미 형태로 떠 있었고, 바람마저 딱 좋은 날이었다. 서윤주가 빌라 입구로 들어서면서 윤수와 은기를 향해 짓궂게 웃었다.
“좋은 시간 보내렴~.”
찡긋 눈웃음을 지은 그녀가 계단 너머로 사라지자 내내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은기가 얕게 한숨 지었다. 탈력감마저 느껴지는 모습에 윤수가 피식 웃었다. 뭐든지 여유로워 보이고 한 수 앞서 볼 것만 같은 이 사람도 인간미는 있었다.
“그래도 힘들긴 힘들었나봐?”
“당연하죠. 얼마나 신경썼는데.”
진심인 듯 담배가 절실하다는 피곤한 얼굴이었다. 눈 밑이 조금 거뭇하고 빳빳하게 올렸던 머리도 조금 내려온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걸어가는 내내 참았다. 서윤주의 가시권 내에서는 피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갸륵한 마음이 엿보여서 윤수는 은기가 더욱 기특해졌다.
“예쁨 받으려니 힘들지?”
은기는 제 눈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지압하듯 눌렀다.
“그런 건 내 전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뭐 실수한 거 없죠.”
“없어. 그래서, 네 예상 점수는?”
짧은 침묵 뒤에 그가 말했다. 예상 점수를 외는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아마…90점?”
“꽤 높네.”
장난으로 한 소린데 은기가 얼굴을 벌떡 들고 따져들었다. 쓸데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신경 많이 썼다는 게 정말이었나 보다.
“꽤? 그럼 얼마라고 생각했는데요? 실수한 것도 없다면서.”
윤수는 모른 척 딴청을 피우며 말을 돌렸다.
“나는, 글쎄.”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몇 점?”
어서 말해달라는 듯 그가 절박한 얼굴로 윤수의 앞길을 막았다.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 비켜주지 않을 심산 같았다. 그제야 윤수는 장난을 그만 두고 선선히 고백했다. 그가 눈을 접어 웃었다.
“말해봐야 뭐해. 당연히 백 점이지.”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그가 잡은 식당도 완벽했으며, 어머니와 빠른 시간 안에 쌓아올린 신뢰하며, 게다가 군더더기 없었던 말솜씨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어나갔다.
윤수는 이런 사람과 함께라는 사실을 어머니 앞에서 마음껏 자랑스러워했다. 비록 말로 꺼내지 않았고 눈빛으로만 표했지만, 서윤주는 다 알아들은 듯 했다.
목을대로 고통의 기억이 쓴물마냥 올라와도 제 어미 앞에서는 꾹꾹 삼키기만 하던 윤수가 어느덧 달라졌다. 사시사철 겨울일 것 같던 얼굴에 다양한 계절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건 그의 어머니인 서윤주가 제일 잘 알았다. 은기가 몰고 온 바람이 다음 계절을 데리고 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 인정 받았다. 윤수도 뺨에 열이 올라 작은 흥분을 드러냈다.
“내가 더 떨렸는데 나보다 잘하던걸. 그럼 말 다했지, 뭐.”
“다행이네. 내색은 안했어도 실수할까봐 얼마나 떨었는데.”
은기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그제야 온건하게 웃었다. 잘 해나가긴 했지만 그도 내심 걱정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생활권에 들어갈 때 부대낌 없이 물감처럼 섞이는 건 해외로 오래 떠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로 버틴 은기의 특기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처음으로 두려웠다. 혹시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윤수의 울타리는커녕 짐이 되어 버릴까봐.
“아.”
윤수는 문득 생각난 듯 그가 부재일 때 있었던 일을 물었다.
“나 나갔을 때 어머니가 무슨 이야기 했어?”
짧게 멈칫한 은기가 긴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하더니 뒷머리에 대었다.
그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슬리퍼 차림으로 슈퍼 쪽으로 가던 어린 남학생이 은기를 알아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을 붙이고 싶은지 입술을 몇 차례나 달싹대다가 그냥 휑하니 슈퍼로 뛰어가 버렸다.
윤수가 그를 보고 작게 웃었고,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은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별 이야기 안 했어요. 그냥 소소한 취미 나눔?”
윤수가 나갔을 때 그의 새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함구하기로 했다. 그녀도 윤수가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을 꺼내는 것에 대해 조금은 부담스러워 했고, 그래서 은기는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
듣고 있던 윤수는 싱겁게 웃었다.
“그게 뭐야.”
은기가 걸어가다가 한적한 곳에 있는 어린이용 놀이터를 발견하고 그 곳으로 흘끗 눈길을 주었다. 사람수가 많지 않은 빌라 쪽 놀이터인데다 밤이 늦어서인지 인적이 없었다.
윤수는 오늘의 하은기를 생각하며 엄살이라 여기고 눈을 흘겼다. 정말 긴장한 줄 알고 걱정 많이 했는데 다 기우로 만들어 놓고는.
“거짓말. 하나도 긴장 안했잖아.”
“정말이라니까. 속고만 살았나.”‘
아웅다웅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는 웃어 버렸다.
“근데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있어.”
“어디서 하려고? 딱히 정해둔 곳 없으면 저 쪽에 놀이터 가서 할까요? 마침 사람도 없고.”
“좋네. 저기로 가자.”
눈썰미 좋은 은기 덕에 그들은 쉽게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도 대화하기 좋은 은밀한 장소를 거닐었다.
모종의 이유로 놀이터에 아직 흙이 있었다. 요즘은 다들 바닥에 고무매트나 뛰다가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을 바닥재를 깔곤 하는데 이런 곳은 오랜만이었다. 은기가 흙바닥을 발뒤꿈치로 찍어 균형을 뒤로 넘기더니 그네에 털썩 앉았다. 아이들이 어찌나 옆으로 늘려놓았는지 성인 남자가 타도 공간이 넉넉했다. 은기가 개구지게 웃더니 옆 그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타요. 여기 앉아서 이야기하면 되겠네.”
“그네도 정말 오랜만이다.”
윤수도 슬금슬금 그의 옆에서 혼자 덩그러니 놓인 그네에 앉았다. 은기와는 달리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네 언제 타 본 게 마지막이에요?”
“중학생 때였나? 그랬을걸. 너는?”
윤수가 바닥에 발을 대었다가 떼었다. 은기는 고민하고 있는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고, 답을 기다리면서 윤수가 발끝으로 흙을 푹푹 패였다.
“나는 시기로 치면 고등학생 때. 외국 가서.”
“그 때 좀 방황했다고 했지.”
“그랬죠.”
앞 말은 생략하고 윤수가 물었다.
“…끝내고 왔어?”
“어느 정도는. 그땐 완전히 다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는 아닌 것 같아.”
방황이라기보다 오히려 무언가를 잊기 위한 시간이었다. 죄책감으로부터, 끝없이 이어져야 했던 무의미한 가정들로부터. 이랬으면 더 결과가 좋지 않았을까, 저랬다면 지금쯤 그는 저 춥고 어두운 땅 속이 아닌 햇살을 받으며 두 발을 땅 위로 딛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헛된 망상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만 되풀이했다.
은기가 드디어 참고 참았던 담배를 꺼내들었다.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은 절대 안하기로 마음 먹고 돌아왔는데, 요즘도 종종 해. 별로 그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고.”
그의 단단하고 긴 다리가 윤수보다 더 멀리 떨어져 지상에 착륙해 있었다. 은기는 다리만큼이나 길죽한 손으로 바람막이를 하고 불씨를 담배 끝으로 옮겼다. 노란 달 하나만 병풍처럼 떠 있는 까만 장막 속에서 발간 불빛이 달아올랏다.
“방금 전만 해도 이런 말 하면 더 좋아하시지 않았을까, 저런 말 하면 더 분위기 나았을 텐데 그런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어머니 만났을 때 이야기야?”
은기는 앞만 보면서 연기를 뿜었다. 무탈히 끝난 것을 자축하기도 아까운 시간에 왜 이런 궁상을 떨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지금은 뭐라도 풀어내고 싶었다. 작은 마음의 소리라도 흘려보내지 않고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어. 맞아요. 쿨한 척 하는데 알고 보면 좀 이따위야. 나도 어쩔 수 없나보죠.”
그 말을 마지막처럼 던진 뒤 은기는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물었다. 까만 허공에 몽글거리는 하얀 연기가 뭉쳐졌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도 자신감이 떨어질 때가 있다. 천상 하늘만 보고 빳빳한 고개를 유지할 줄 알았던 사람이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은기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윤수는 그 일을 자신을 위해 해줬다는 사실이 못내 기뻤다. 이기적이지만 은기가 가끔은 힘듦을 자신에게 기대어 줬으면 좋겠다. 받은 것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으면 했다.
그는 은기처럼 길게 폈던 다리를 주섬주섬 모았다. 그의 그림같은 옆모습에 윤수의 눈길이 길게 머물렀다.
“난 그래서 좋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종종 삐걱대던 옆 그네가 완전히 멈췄다. 목이 타는 듯한 은기의 목소리가 천천히 건너왔다.
“…혹시 이 놀이터 저 빌라에서 보일까요?”
은기가 윤수의 어머니가 있을 빌라 쪽을 고갯짓했다. 따뜻한 은기의 손이 소리소문없이 건너와 윤수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의미를 알아들은 윤수가 미간을 슬쩍 좁히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귀가 뜨거웠다.
“무슨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넣어둬.”
“하하.”
은기가 웃고는 짧아진 담배를 떨어뜨려 비벼 껐다. 편견없이 모든 곳에 골고루 닿는 노란 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고, 달빛보다 긴 시선이 윤수에게 머물렀다.
그의 그네가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 말 있는 거, 아직 예열 덜 됐어요? 내 이야기 더 풀어야 슬슬 나오려나.”
윤수는 멍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 여태 그걸 기다리느라 평소 하지 않던 자신의 이야기도 길게 꺼낸 건가. 그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지 가늠도 되지 않아 윤수가 그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못 당하겠어.’
저번에는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터라 이후 더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워진 화제였다. 차라리 그 때 속시원히 말했더라면 지금까지 전전긍긍하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은기가 말한 것처럼, 선택의 순간은 짧고 후회는 길었다.
윤수가 한숨처럼 드디어 꺼림칙하던 주제를 입에 올렸다.
“사실은 진기랑 저번에 만난 거, 이유가 있었어.”
장난스럽게 휘었던 은기의 눈이 잠잠해졌다. 점점 속도를 더해가던 그네도 바닥에 발을 대어 금방 정지했다.
“이유? 무슨 이유.”
윤수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농과 장난이 사라진 은기는 제법 무게감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무게와 상관없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 무게는 방패가 될지언정 칼이 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한 점의 두려움 없이 과거의 그늘을 펼쳐놓을 수 있었다.
“진기가 제안한 게 있거든.”
“…….”
은기는 그게 뭐냐고 묻지도 않았다. 진기가 사이비 종교 단체를 오래전부터 조사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윤수가 피해자인 것도 알았다. 그 둘 사이에 겹쳐질 접점은 그 망할 사이비일 것이고, 그렇다면 진기가 그에게 제안할 만한 것이란 별로 없었다.
’설마….‘
은기가 침음성을 내며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언제나 그렇듯 좋지 않은 예감은 늘 들어맞았다.
삐걱-
윤수가 그네에서 일어나 은기의 앞에 와서 섰다. 달을 등진 윤수의 그림자가 길게 은기의 머리까지 송두리째 덮었다.
그는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은기에게 말했다.
“나더러 참고인 자격으로 와줄 수 있냐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