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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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겠지 생각하며 그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윤수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마음은 정했어? 할 생각 있으면 늦지 않게 연락줘]

메시지를 확인한 윤수가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은기의 눈치를 봤다. 그러고 보니 진기에게 답장을 주기로 해놓고 여태 잊고 있었다. 증인으로 법정에 서기로 한 일이었다. 

‘어떡하지.’

정신 없이 보냈던 매일에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윤수에게 또 한 번 메시지가 왔다. 

[은기 녀석이랑은 이야기 해본 건가?]

전화를 해야겠다고 판단한 윤수가 어머니와 은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나가자마자 화기애애하던 어머니와 은기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차가운 찻물로 입 안을 헹군 서윤주 여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안그래도 윤수 내보내고 할 이야기 였는데, 잘 됐네.”

어떤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 것일까. 은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윤수가 그 이야기까지는 한 지 모르겠는데…. 우선 안 좋은 일 당했다는 건 들었다고 했지?”

“네.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일 생기게 한 사람이 새아버지란 건 들었어?”

웃음을 잃지 않던 은기의 눈이 처음으로 급격히 식었다. 

“아뇨,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서윤주가 씁쓸하게 웃더니 한숨 지었다. 

“그건 말하기 싫었던 거구나…. 그럴 만도 하지.” 

“대체 무슨 일이었죠?”

은기가 심각하게 물었고, 그녀는 천천히 그 날의 일을 복기했다. 그리고 놓치는 것 없이 말해주려 빠짐없이 생각의 흐름을 짚어나갔다. 

윤수의 아버지는 일찍이 차 사고로 사망했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잘 지내왔다. 윤수는 철이 일찍 들어 힘들어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그런 것을 알았지만 생활에 바빠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그러다 서윤주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재혼하게 되었다. 윤수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새로운 가족은 윤수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첫 1년간은 여유도 생기고, 새아버지의 사업도 잘 되어 형편도 넉넉해졌다. 집에 웃음이 늘었고, 윤수도 새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하지만 윤수가 고등학교 2학년을 막 지날 무렵,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기울기 시작한 사업은 가속을 얻어 더욱 추락했고, 그럴수록 새아버지는 발버둥쳤지만 추락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좀먹히자 점점 다른 것에 의지하고, 손대었다. 본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지만 심지가 그리 굳지 못했고, 결국 지인의 권유로 사이비 종교에 휘말렸던 것이다. 

새아버지는 없는 돈을 그 곳에 퍼붓고, 하루하루 메말라 갔다. 성정도 거칠어지고, 술독에 빠져 어느덧 윤수에게 손을 올리게 되었다. 그래도 버틸만 해서 윤수는 어머니에겐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다. 상황만 좋아지면 새아버지가 다시 정신 차리고 돌아올 것이라 믿었기에. 

수험생의 막바지 때, 윤수는 어머니에게도 숨겼던 비밀을 새아버지에게 들켰다. 노크 없이 그의 방에 불쑥 들어온 새아버지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남자 둘이 알몸으로 엉켜서 신음을 뱉는 동영상이었다. 

[…지금 뭘 보는 거냐?]

너무 놀라서 윤수는 호기심에 보던 동영상을 미처 끄지 못했다. 예전의 새아버지였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머니에게 비밀로 해주며 오히려 더욱 돈독한 사이를 영위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나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만큼 무너져 있었다. 

[이, 이건….]

들켰다는 수치와 공포로 얼어붙은 윤수를 놔두고 새아버지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윤수에게 끔찍한 기억을 안겨주었던 과거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거기까지 듣던 은기가 할 말을 잃고 윤수 어머니인 서윤주 여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설마, 납치 사주를 한 사람이 그 새아버지라는 사람입니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기는 기가 막힌 얼굴로 

돈을 붓던 그 사이비 종교, 일해교에 아들을 제대로 돌려달라는 사주를 한 것이다. 새아버지는 윤수를 사람이 으슥한 곳으로 불렀고, 때맞춰 기다리던 건장한 신자들이 그를 납치해 갔다. 그리고 윤수는 알던대로 지독한 고통과 고난을 겪어야 했다. 

모든 것이 들통날 때까지 새아버지는 윤수 어머니와 함께 애타게 아들을 찾는 척 했다. 경찰 조사로 간신히 윤수를 되돌려 받았던 날, 서윤주는 인생 처음으로 머릿속이 분노로 송두리째 불타 없어지는 경험을 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것이다. 심지어 그 남자는 한점의 뉘우침 없이 자신의 행동에 당당하기까지 했다. 

[저 놈이 호로 자식이라 내가 교정해주려 한 것 뿐인데, 왜?]

정말로 억울하다는 그 한심한 얼굴에 그녀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독기 오른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보이는 빗자루를 집어들고 그를 마구 두들기기 시작했다. 주변 경찰들이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 그리 두터운 몸도 아니건만, 장사같은 힘이 솟아서 말릴 수가 없었다. 

[네가 뭔데 내 배 아파 나은 새끼보고 호로 자식이래, 이 호로자식이?]

빗자루로도 모자란지 씩씩대며 이번엔 길고 단단한 대걸레 자루를 집어든 그녀를 경찰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잡았다. 정말 사람 하나 잡을 것 같은 기세였다. 서윤주는 경찰들 손에 잡혀 소리소리를 질렀다. 

[네가 뭔데, 내 금쪽같은 새끼 그 험한 데 끌고 가서 애를 엉망으로 만들어 놔! 이 천벌받을 놈아아아!]

어머니가 악다구니 치는 현장에서 유일하게 윤수만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은 고개가 빳빳한데, 정작 피해자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니.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라 서윤주는 다시금 이를 갈았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는 은기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잠자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은기도 침묵으로 분노를 표하고 있었다.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

그 뒤로는 재혼할 생각도 않았고, 같은 성향의 아이를 둔 어머니의 모임에 열심히 다녔다. 윤수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이해하고 싶어서. 

은기가 심호흡을 해서 감정을 억누르고 정리했다. 마음 같아선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라도 태우고 들어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전히 화가 전부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우선 윤수 어머니를 위로하는 말을 먼저 건넸다. 

“마음 고생 심하셨겠네요.”

“나보다 윤수가 더 했지, 뭐.” 

서윤주는 완전히 말을 놓고 은기에게 친밀감을 드러냈다. 이야기를 할 때 내내 들여다 봤던 은기의 눈빛은 진짜였다. 엄마라서 느낄 수 있는 것들과 사람을 판단하는 감정사 같은 본능이 빛을 발했다. 처음에 봤을 땐 너무 외모만 번쩍거려서 윤수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난 것이 맞나 의심이 되었지만, 이 정도 대화를 하고나자 확신이 서는 부분이 있었다. 

적어도 아들을 배신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배신할 놈은 절대 안 돼.’

그녀는 마음에 윤수에 대한 커다란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잘못 고른 사람 하나 때문에 윤수는 어쩌면 평생을 지고 가야 할 어두움을 짊어지게 생겼다. 

물론 윤수의 새아버지도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가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이 약했고, 그의 약함은 견딜 수 없는 세상의 풍파를 만나자 서서히 무너져 내렸을 뿐. 

‘마음 약한 놈도 안되고.’

그런 면에서 은기는 아주 흡족한 합격자였다. 서윤주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적절한 감정을 드러내되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중함은 물론, 들으면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믿는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겼다. 

서윤주의 빈 잔에 차가운 물을 채워주면서 은기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됐죠?”

“어떻게 됐긴. 여기저기 사기친거랑 납치 사주 및 방조죄 얹어서 좀 살다 나왔지. 그래봤자 변호사까지 딸려보내준 그 사이비 종굔지 뭔지에서 도와줘서 오래는 안 살았어요.”

일해교 관련으로 입을 다무는 댓가로 얼마를 받았을지 짐작도 안간다며 그녀는 분개했다. 잠시 생각하던 은기가 차분하게 물었다. 

“제가 만날 일이 있을까요?”

“아니. 혹시나 해서 접근 금지 명령 가처분 신청도 해놓은 것도 있지만, 아예 연을 끊어서 더 볼 일 없는 인간이야.”

은기가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그건 다행입니다.”

금방 지나간 표정이긴 했지만, 서윤주는 왠지 그의 한 쪽 이면을 본 것 같았다. 따뜻함 속에 존재하는 어떤 서늘함이 칼날처럼 날카로이 그의 옅은 갈색 눈을 스쳐 지나갔다. 

***

윤수는 곱아드는 손가락을 비비면서 진기의 전화를 받았다. 식당 밖에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식당 옆 흡연 구역 근처를 돌아가니 한적하고 작은 산책 코스가 나왔다. 

“미안. 생각해 본다는 게 요즘 정신 없어서 잊고 있었네.”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아깐 급한 것처럼 굴어놓곤.”

-안 급해. 참, 은기한테는 이야기 했고? 

윤수는 뜨끔한 얼굴로 은기가 앞에 있기라도 한 양 딴청을 피웠다. 

“…아직.”

긴 한숨 소리가 건너편에서 나직하게 들려 왔다. 

-은기 성격 알지. 걔가 말한다고 안 들을 애도 아니고, 충분히 이야기하고 네 생각 밝히는 게 좋을텐데. 

윤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의 말에 동의했다. 진기의 말이 맞다. 만약 증거인으로 출두한다고 할 경우 반대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말을 아예 안하고 멋대로 일을 진행시킨다면 차후 파장이 더 클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서, 은기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있는데 자신에게 말을 안하고 진행시키면 섭섭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은기가 전에도 말한 바가 있지만 윤수의 생각보다 그는 더욱 먼 곳을 보고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는 듯 했다. 행동력이나 실행력이 좋은 사람이니 필시 다양한 가능성을 미리 점쳐두고 있을 것이다. 

윤수가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이야기해야지. 기회 봐서.”

-흠, 그래. 알아서 하겠지. 네 일이니까 최종 결정은 네가 할 일이지만.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어?”

-절대 강요하는 거 아니다. 싫으면 확실히 거절해. 나도 오랫동안 신경쓰고 있던 사안이고, 검사로서 나름대로 자존심이 걸린 문제기도 하지만….

건너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걸려 넘어왔다. 

-내가 기억 떠올리기도 힘든 사람 붙들고 해결해야 할 정도로 능력 없지도 않거든. 

윤수가 피식 웃었다. 진지한 얼굴로 농담이랍시고 던지고 있을 모습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잘났어.”

그런데 뜬금없이 진기가 경고 같은 말을 남겼다. 

-은기 조심해라. 언제 어디서 사람 파고들지 알 수 없는 녀석이라. 나도 당한 적 있어. 

고저없는 목소리 덕에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의외의 말에 윤수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천하의 하진기가 동생에게 당했다니? 

“네가? 어떻게?”

-그것까지 알 건 없고. 아무튼 결정되면 연락해. 

옆에서 진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서둘러 용건을 마무리지었다. 여전히 바쁜 모양인지 통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저렇게 바쁜데 결혼 준비는 잘 하고 있으려나.’

얼굴 밖에 못 본 진기의 아내가 윤수의 머릿속을 스쳤다. 일 때문에 집에도 거의 잠만 자고 오는 수준이라 전에 얼핏 들었는데 말이다. 윤수는 그의 예비 아내가 조금 가엾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듬뿍 받아 편안해지고 넉넉해지니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그 입장마저 고려해 볼 여유가 생겼다. 그런 변화를 준 사람에게 섭섭하거나 실망할 일은 안겨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어머니와 단 둘이….’

급격히 표정이 사라진 윤수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서윤주 여사가 둘 만 남은 자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윤수가 남자 애인을 정식으로 소개시켜 준 적도 한 번도 없었고, 이번은 아주 이례적인 상황이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서 그는 당황한 얼굴로 서둘렀다. 

‘괜한 소리는 안하셔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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