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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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모델이라 그런가, 보는 눈이 좋네. 호호호!”

은기는 깔끔한 복색으로 너무 정장스럽지 않게, 회색이 약간 섞어 톤다운된 셔츠를 입고 그 밑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는 연갈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윤수 형 옷장을 좀 본 적이 있는데 어울리는 옷들이 많다 했어요. 역시 어머니의 센스셨구나.”

언제부터 윤수의 어머니가 그의 어머니가 된 건지 몰라도 섞어서 말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녀도 기분 좋은 얼굴로 은기의 널찍한 등을 훈훈하게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내 반만큼, 아니 조금만 더 센스를 따라왔어도 그렇게 칙칙한 옷만 입고 다니진 않을텐…. 윤수, 왔니?”

그제야 윤수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그의 어머니가 윤수를 불렀다. 

“아, 예에….”

대화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더 말씀나누시라 하고 빠져도 될 것 같았다. 윤수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은기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긴장한 거 맞아?‘

긴장은 무슨, 눈웃음과 활짝 드러난 건치에 긴장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긴장한 쪽은 윤수였다. 그는 쭈뻣대며 두 사람 사이에 끼었고, 공통 화제가 되어 대화 중간에 끼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매의 눈으로 윤수의 패션을 훑었다. 늘 어두운 무채색 계열만 입고 다니던 그가 웬일로 원색 계열의 주황색 니트를 입고 그 안에 어울리는 셔츠까지 레이어드로 입었다. 

“오늘 입고 나온 옷은 평소랑 다르네? 혹시?”

때맞춰 은기가 끼어들어서 적절하게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제가 선물해 준 옷이네요.” 

본인의 착의 센스를 시험받는 장이었음에도 그는 여유로웠다. 선물했음을 은근히 어필하면서 윤수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편 사소한 것도 신경쓴다는 암시였다. 역시나 윤수 어머니, 서윤주 여사는 방긋 미소지으며 그의 마음씀씀이를 칭찬했다. 

“역시. 윤수가 이런 옷 입을 애가 아니거든. 어쩜 이렇게 때깔 맞는 옷을 딱 맞게 줬대? 사이즈도 잰 것 같이 맞고.”

윤수는 그가 인정받는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은기가 인정받는 건데 자신이 함께 인정받는 듯했다. 

‘왜 내가 뿌듯하지?’

그런 윤수를 눈여겨 보던 서윤주 여사가 말했다.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갈까? 슬슬 배고프네.”

은기가 손에 들고 있는 셔츠 몇 개 값을 빠르게 계산했다. 

“그냥 가져가요. 뭘 또 계산해. 아들 애인한테 돈 못 받아요.”

“저는 마음에 드는 옷은 꼭 제 값주고 사야해서요. 대신 다음 번에 또 오면 저한테 어울리는 옷 한벌만 주세요.”

“호호, 알았어요, 알았어.”

“뭘 골라주실지 기대되네요. 워낙 센스가 좋으셔서.”

옷을 주겠다는 그녀와의 밀당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애교를 섞어 능숙하게 처리했다. 

‘내가 굳이 안 와도 되지 않았을까.’

지켜보던 윤수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고집스럽게 옷 값을 치르고 주겠다는 선의를 끝까지 거절하면 자칫 기분이 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의 어머니도 어른인지라 기분 나빠할 수도 있을텐데, 저걸 저렇게 받다니. 

‘대단한 녀석.’

그녀가 빠르게 가게 정리를 하고 문을 닫고는 기분 좋게 웃으며 두 남자를 각자 양 팔에 꼈다. 와르륵 앞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윤수를 어머니가 꽉 잡아 당겼다. 그리곤 반대편의 은기를 보며 생긋 웃었다. 

“이러니까 아들 둘 생긴 것 같아서 너무너무 좋다. 든든하고.”

“…엄마도 참.”

민망한 듯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윤수와 달리 은기는 그녀를 에스코트 해주며 천천히 걸었다. 더도 덜도 아닌 적당한 대화가 오가고, 은기의 차로 식당으로 이동할 때까지 은기는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서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말주변이 없어서 걱정했던 윤수는 생각보다 즐거운 분위기에 안심했다. 

은기의 넘치지 않는 말솜씨가 이리도 도움이 될 줄이야. 

식당 앞에 내려 사이 좋게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스피커를 손에 들고 외치며 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는 남자가 보였다. 넥타이까지 맨 직장인 같은 모습이었는데,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 

식당 앞을 지키는 경비들이 달려와 그 사람을 몰아냈지만,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다가올 재앙을 모르는 이 불~쌍하고, 불~쌍한 인간들! 일해교를 믿으면 살 길이 열려! 무지몽매함이 내 가족을 죽인다!”

“아저씨, 여기서 왜 이러세요. 가세요, 가.”

“영업 방해하지 마시고, 가요, 네?”

무심결에 그들의 눈이 남자가 뿌린 노란 전단지에 닿았다. 

“…….”

“…….”

“…….”

세 사람은 차례대로 굳었다. 그나마 제일 먼저 은기가 분위기를 전환하여 윤수와 그의 어머니인 서윤주 여사를 이끌었다. 

“신경쓰지 마시고 들어가시죠. 별 사람 다 있네요.”

은기가 예약한 곳은 그녀의 입맛에 맞춘 한정식 식당이었다. 방으로 나뉘어진 공간에 세 사람이 들어가자 널찍한 곳임에도 꽉 찬 것 같았다. 서윤주는 들어가자마자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솔직히 스파게티나 느끼한 음식 있는 곳으로 예약할까봐 조금 걱정됐는데, 고맙네. 그런 음식 잘 못 먹거든요.”

“그러실 것 같아서 여기로 예약했어요.”

미리 윤수가 말해준 것도 있지만 은기는 처음부터 고려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모르게 윤수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고, 은기는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마이너스 점수는 받지 않았다. 

음식을 주문한 뒤 어색하지 않은 화기애애함이 얼마간 더 이어지다가, 서윤주 여사가 찻물을 짧게 들이켰다. 그리곤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은기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물론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 처음 본 게 언제라구요?”

은기는 움찔했지만 티내지 않게 표정 관리를 했다. 그녀는 이미 은기에게 마음을 다 열고 빠진 것처럼 행동했지만, 역시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은기와 윤수의 관계를 살폈다. 두 사람 사이의 세밀한 반응까지 전부 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아니시네.’

어떤 말을 해야 기껏 쌓아올린 플러스 점수를 마이너스로 떨어뜨리지 않을까. 잠깐 고민한 은기가 천천히 말을 풀어 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제가 먼저 윤수 형을 알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윤수는 본인이 더 긴장되어서 연거푸 찬물만 들이켰다. 첫만남은 뜨거웠고, 정신 없었다. 심지어 사귀던 전 애인의 동생이다. 윤수가 속으로 그에게 열띤 응원을 보냈다. 

‘잘 해.’

조마조마한 얼굴로 찻잔만 만지고 있던 윤수의 손을 그가 흘끗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서윤주 여사의 얼굴은 몹시 진지하고도 흥미로워 보였다. 

“형네 직장 앞에서 자주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봤고, 그러다 처음 그 건물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서윤주 여사가 침묵했다. 은기가 말한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 맹렬히 머리를 굴리는 듯 했다. 

‘형네 건물 앞에서 윤수가 기다렸다니.’ 

윤수가 사귀던 전애인은 분명 검사가 된 하진기였다. 지금 이 남자의 이름은 하은기다. 그와 성이 같았다. 이어지는 연상에 서윤주가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진기 동생이었어요? 세상에.”

이건 그녀도 생각지 못한 바였는지 놀란 눈이었다. 윤수가 현재 사귀고 있는 애인에 대해 거의 말한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윤수 쪽으로 휙 소리나게 고개를 돌리더니 혼란스러운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기 동생이랑 사귀고 있었니?”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은 안해도 진기와 헤어진 것이 속상했던 그녀였다. 윤수가 그를 많이 좋아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동생인 은기와 사귀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크게 걱정이 되었다. 

“엄마.”

윤수가 짧고 강하게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들을 보고 그녀는 실례였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 그리곤 은기에게 사과했다. 정작 그는 별 반응 없이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방금 건 사과할게요. 근데 저기, 미안한데…. 우리 아들 정말 많이 힘들었던 애거든요.”

은기는 그녀를 마주보며 말없이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할 일을 겪었고, 많이 아팠어요.”

“왜 그런 이야기를 갑자기 하고 그래.”

참다 못한 윤수가 끼어들었지만 서윤주 여사는 아들의 말을 막고는 은기를 똑바로 마주보며 할 말을 뱉었다. 

“난 그래서 정말 이 애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과거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혹시 윤수 이야기,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경직된 분위기긴 하지만 윤수를 제외한 두 사람 다 미소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은기가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알 건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윤수가 믿고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인거, 맞아요?”

조심스럽고 근심 많은 서윤주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긴장을 읽은 은기가 최대한 신뢰 가는 목소리로 평소 하던 생각을 내뱉었다. 안그래도 윤수와 사귀면서 그의 과거를 알게 되고, 고통을 알게 되면서 어느 정도 앞으로의 일도 차근차근 준비해두고 있던 터였다. 

“걱정마세요. 그럴 각오도 없으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현실적인 대비, 미래에 대한 생각, 전부 다 포함해서요.”

너무 빠르지도 않게, 천천히 뱉는 말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그녀도 느꼈다.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사실 윤수 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을 하면서 은기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윤수를 빤히 보았다. 농담처럼 던진 것에 그제야 딱딱하던 분위기가 아까처럼 풀어졌다.

윤수가 울컥하여 저도 모르게 은기에게 반박했다. 

“나, 나도 그래. 당연한 걸 의심하지마.”

본의 아니게 어머니 앞에서 고백을 한 셈이 된 윤수가 곧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어머니가 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반대편으로 돌리고 미리 나온 야채를 젓가락으로 휘적였다. 숨기지 못한 귓바퀴가 아주 붉었다. 

은기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더니 제 몫의 야채를 수북하게 집어 윤수 쪽으로 내미는 시늉을 했다. 

“내 것도 줘요?”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여서 윤수가 입을 삐죽였다. 

“…됐어.” 

그녀는 다소 놀란 듯 두 사람의 대화를 보았다. 윤수가 저런 사소한 투정도 부릴 줄 알았나? 너무 일찍 철이 들었고, 그 뒤로는 한 번도 힘들다, 아프다 말 한 적 없던 아이였다. 

알듯말듯 미묘하던 서윤주의 표정이 차차 환하게 밝아졌다. 

그 순간, 음식이 차례차례 들어왔다. 이걸 어찌 수습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하던 윤수는 평온해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은기가 뭔가 중요한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함께 큰 산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 

서윤주 여사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번갈아 보며 권했다. 

“이야기는 먹고 나서 마저해요. 갑자기 이것저것 물어서 기분 나빴으려나. 미안해요. 나이 드니까 걱정만 늘어서….”

“괜찮습니다. 오히려 빨리 터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네요. 저도 언제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됐거든요.”

그녀가 은기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힐끗 보더니 한숨 지었다. 다행이라는 안도에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어린 사람 답지 않게 생각도 깊고, 진중한 사람이라 정말 안심되네요. 진기랑은 너무 달라서 형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진기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은기한테도 실례잖아.”

윤수의 눈치를 보는 둥 마는 둥 은기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던 그녀가 알았다는 듯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조금 이목구비가 닮았네요. 얼굴도 왜 이렇게 작아?”

말끔하게 머리를 위로 올려 반듯한 이마가 훤히 보였다. 서구적으로 크게 자리잡은 이목구비와 코와 눈 사이의 높낮이 차이로 눈가는 옴폭 들어갔다. 하지만 밝아보이는 인상 때문에 음영은 오히려 어둡다기 보다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은기도 그녀가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 미소가 한결 더 진해졌다. 이제 어느 정도 합격한 모양이었다. 

“어릴 때는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말 놓으셔도 돼요. 편하게 말씀 주셔야 저도 편해지죠.”

연장자를 대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서윤주 여사는 재밌다는 얼굴로 웃고는 불고기를 한 점 집어 먹었다. 은기는 자신에게 너무 지나치게 거리를 두며 깎듯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친근감을 준다. 그 적당한 선을 알기가 힘든 법인데, 줄타기마저 잘했다. 

‘보통 아니네, 정말. 어쩌다 이런 애를 만난 거지?’

수많은 고객들을 대하며 사람 대하는 것에 여유가 많은 그녀임에도 은기는 녹록치 않았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육질의 식감을 즐기며 그녀가 은기를 보며 말했다. 

“윤수가 불도저 타입에 굉장히 약한 편인데, 이런 식으로 한거니?”

그녀의 속뜻에는 ‘이런 밀고나가는 방식으로 윤수의 철벽을 무너뜨렸냐’가 함축되어 있었다. 

윤수는 이제 대화에 낄 생각을 않고 야채 쪽만 열심히 젓가락을 깨작거렸으며, 그녀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은기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넘겼다. 

“네. 안 넘어올까봐 엄청 걱정됐는데, 다행히 먹히더라고요.”

그녀가 안도의 눈웃음을 지었다. 눈가의 주름이 길게 잡혔다. 

“진기보다 훨씬, 아니 아예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네. 난 이 쪽이 훨씬 마음에 들어. 아까 미안했고, 고마워.”

“고맙긴요. 윤수 형을 낳아주신 게 더 감사하고, 고마울 일이죠.” 

옆에서는 하하호호 웃음과 덕담이 오가는데, 윤수가 들리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귀를 막고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었다. 아예 둘이서 작당을 하고 자신을 닭으로 만들고 있다. 

‘그만 좀….’

팔에 돋는 오한을 조용히 문지르며 그는 어서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 지 목으로 들어가는 지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한편, 검찰청에서 일하고 있던 진기는 문득 귀가 간지러워 제 귀를 만졌다. 미신은 잘 믿지 않지만 왠지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음….’

기우겠지 생각하며 그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윤수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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