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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버릇? 내 거?”
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쾌하게 긍정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는 평소보다 들떠 보였다. 아니면 그 서투르고 용감한 고백 때문인가. 윤수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떤 거였는데?”
은기가 불쑥 다가와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곤 앞에서 그릇을 치워 개수대에 넣더니 돌아와 그의 앞에 양 손을 짚고 환하게 웃었다.
“우선 같이 씻으면서 이야기할까요.”
뺨에 맞닿았다가 떨어져나간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윤수가 제 볼을 쓰다듬으면서 멍하게 그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같이?”
***
윤수는 너무 오래 물을 맞아 쪼글해진 손가락으로 냉장고에서 갓 꺼낸 찬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컵을 쥔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수전증일리는 없고, 욕실에서 오래 체력소모(?)를 한 탓이었다.
그가 방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 은기를 보며 원망스럽게 말했다.
“적당히 한댔잖아.”
원망의 대상은 정작 태연했다.
“이상하네. 적당했는데.”
“…보통 3번을 적당이라고 하진 않아.”
입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과 볼멘 소리가 귀여워서 은기가 소리내어 웃었다.
“알았어요. 반응이 너무 좋아서 나도 흥분했어. 미안.”
오늘만큼은 절대 휩쓸리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뒤에서 끌어안는 체온이 더 뜨겁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모든 다짐이 무너졌다. 더불어 곧게 서서 엉덩이 사이를 찌르는 묵직하고 긴 것의 존재도.
마른침을 삼킨 윤수는 또 목이 타는 것 같아 손을 뻗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그가 뒤가 간질거리는 상념을 밀어냈다.
“같은 말인데 네가 하는 말은 뭔가 다르네.”
“미안하다는 거?”
“응.”
“글쎄, 왜 그렇지?”
은기는 피식거리며 남은 물기를 하얀 수건으로 털어냈다. 젖은 수건을 새 수건으로 바꿔 어깨에 걸치고 주방으로 가서 남은 그릇을 설거지 해서 깨끗하게 마무리까지 한 뒤에야 그가 거실로 돌아왔다.
살랑대며 다가오는 고양이 일리야의 머리를 쓰다듬은 은기가 노트북을 하나 들고 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윤수도 가지고 왔던 노트북을 챙겨와 그가 둔 노트북 맞은편에 두었다.
“자, 그럼 조금만 해요. 무리하지 말고.”
노트북 전원을 켜며 윤수가 걱정스레 말했다.
“너무 진도 못 빼서 누가 의심할까봐 겁나.”
“누가 의심해? 서로 스케줄 바쁘니까 시간 안 맞아서 못하는 거지.”
“…….”
할 말이 없어진 윤수가 조용히 켜지는 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사소한 것에도 근심 걱정을 키우는 자신이 답답했다. 많이 고쳐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윤수가 급격히 말이 없어지자 당황한 은기는 안절부절 못하며 노트북 너머로 보이는 그를 불렀다. 은기의 무릎에 있던 고양이가 뛰어내려 윤수 쪽으로 갔다.
“왜 그런 얼굴이야? 기분 상했어요? 말실수한 거 있나?”
한껏 아양을 떨며 머리를 배에 부비는 고양이를 안아들면서 윤수가 한숨 지었다.
“아니. 아직 멀었다 싶어서.”
“누가? 나?”
“나. 내 성격이 답답해서.”
“난 또. 상관 없어.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윤수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노트북 화면을 큰 손이 턱 가렸다. 일하는 시늉을 하지도 못하게 된 윤수가 고개를 들자 은기가 손을 뻗어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런 성격 포함해서 좋아하는 건데도?”
윤수는 이런 따스함에 기대어 자꾸만 변해야 할 터닝포인트를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조바심이었고, 초조함이었다. 이렇게 느릿하게, 태평하게 있다가 은기를 놓칠지도 모른다. 더 좋은 사람이 세상에 널렸고, 그와 어울리는 사람도 무수히 많다. 안일하게 있다가 뺏기는 꿈도 꾼 적이 있었다. 반복되는 밤의 악몽은 현실이 달콤할수록 그를 조바심나게 했다.
앞머리를 쓸어올리던 손가락이 천천히 내려와 뺨을 만지고, 입술을 쓸었다. 그 성적인 긴장감에 윤수가 눈을 질끈 감고 소망을 말했다.
“빨리 변하고 싶어.”
하은기와 어울리는 사람으로. 그의 불안을 알아챈 듯 은기는 느긋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못 박았다. 윤수 쪽으로 몸을 굽히고 손을 목 뒤로 넘겨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는 속삭였다.
“이미 많이 변했어. 너무 욕심부리지 마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탈난다니까?”
“…알았어.”
은기가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일도 마찬가지. 천천히 해도 뭐라할 사람 없어요. 개인 외주잖아. 조급해하지 말고 결과물 잘 뺄 것만 생각해요.”
은기의 기획사에서 준 일은 따로 사무소에서 해결하고 있고, 은기가 개인적으로 외주한 포토 에세이 건은 그와 단둘이 있을 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명분상이라고 해두긴 했지만 이것도 일의 일환이라 대충하고 싶지 않다는 윤수의 뜻이었다.
그 의견을 존중해서 맞춰온 것인데, 윤수가 이리 조급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타일렀음에도 여전히 어두운 표정인 윤수를 물끄러미 보던 은기가 불쑥 제안했다.
“다음 촬영 때 메이크업 받아볼래요?”
잘 나온 사진 하나를 전송해주면서 은기가 턱을 괸 채 말했다. 반대편에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던 윤수는 눈을 번쩍 들고 노트북 너머 은기를 보았다. 그가 일컫는 ’촬영‘ 이란 Living Alone 예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메이크업? 갑자기? 왜?”
은기가 보낸 사진이 메시지로 도착했다. 건물벽에서 찍은 것인데 거의 무너질 것 같은 구멍 난 콘크리트 벽이라 느낌 있어 보였다. 나른한 눈빛이 퇴폐적으로 보여서 어스름하게 비치는 인공 조명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냥. 카메라에 잡히는 게 다를걸.”
“내가 굳이 그런 것까지 할 필요 있어? 연예인도 아닌데.”
은기가 보낸 사진을 계속 뚫어져라 보면서 윤수가 대꾸했다.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 쓰고 아래로는 청바지를 입었을 뿐이다.
하지만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저 강렬한 눈빛 때문에 사진이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어느 장소처럼 보였다. 눈이 조금 붉게 보여서 이형의 존재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제목은 ’무너진 도시의 잔해‘였다. 더 자세히 보려고 얼굴을 가까이 하는데 노트북이 휙 눈 앞에서 사라졌다. 은기가 아예 손으로 들어 치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다음에 화면 보면서 직접 보라고. 나랑 만나면서 당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마음이 솔깃한 제안이었다. 윤수도 혹하는 얼굴로 반짝이는 은기의 눈을 마주했다.
“그, 그럴까?”
“장담하는데, 수정 누나 메이크업은 정말 끝내줘요. 나도 그 누나 메이크업 받으면서 일도 더 들어왔고, 이미지 정착시킬 때도 도움 받았거든. 유명 중국 여배우도 그 누나 메이크업 때문에 변했잖아.”
윤수가 머릿속의 인물들을 더듬었다.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길거리에서 게릴라 메이크업을 하던 그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여자! 프로의 느낌이 풀풀 나더니 역시 그 사람인가 보다.
“아, 그럼 ’수정 누나‘ 라는 사람이 혹시…한수정 씨?”
“맞아요. 알고 있었네? TV에서 본건가?”
“응. 본 적 있어. 그 분이구나.”
윤수는 그와 아주 예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가 생각났다.
[메이크업도 못 지우고 바로 왔는데, 괜찮아요? 이상하면 지울까? 클렌징 티슈가 있었나….]
[수정 누나 메이크업 끝내주는데 한 번 받아보든가요. 촬영장 놀러 오면 잠깐 해줄 수 있을 걸요.]
뜨거운 밤을 보냈던 두 번째 만남에서, 메이크업을 지우지도 못하고 바로 달려왔던 은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주 예전도 아닌가.‘
은기와 이런 사이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몇 달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많은 감정을 공유하게 되었다. 자주 본 편이긴 하지만, 그 빈도와 시간 이상의 감정이 쌓였다.
어딘지 아련한 눈으로 윤수의 뺨을 만지던 손길이 휴대폰의 진동 소리에 떨어져 나갔다. 윤수도 아쉬운 눈으로 끈끈하게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보았다.
“잠시만. 병수 형한테 연락 왔어요.”
“병수 형이라면, 네 매니저?”
곰같이 생긴 그 덩치 큰 매니저를 일컫는 말일테다. 윤수가 눈만 깜박대며 전화를 받는 은기를 맞은편에서 지켜보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연락한건지 두려웠다. 매번 안 좋은 타이밍에 전화가 걸려오거나 불쑥 찾아오던 터라, 불안하기도 했다.
은기가 흘끗 윤수의 눈치를 보았다. 아직 윤수에게는 병수에게 한 이야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 형. 생각해 봤어? 너무 빠른 거 아냐? 하하. 아니. 집이지.”
그에게 더 좋은 다른 사람을 연결시켜 줄테니 앞으로의 거취를 정해달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에 대한 답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연락이 와 은기도 그가 무슨 답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형 대답은 뭔데.”
-…내가 정말 두개골 빠개지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병수는 술을 마시고 있던 중인지 혀도 약간 꼬여 있었다. 은기는 차갑게 입술 끝을 올렸다. 역시, 이런 대답인가.
“그래. 아닌 것 같은 동앗줄은 빨리 끊는 게 맞지. 여태 고생했어, 형.”
사람들에게 말할 때 은기가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본 적이 없었기에, 윤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통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니, 아니! 내 말 끝까지 들어봐. 우선 어…너 누구랑 사귀는지 이야기 안해줄거지?
“해줄 생각은 없어. 형한테 말하는 날은 아마 들킬 때일거야. 그 사람 노출시키지 않을 거고, 그래서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라고 한 거지.”
-그럴 줄 알았다. 알려주지도 않을거면서 너무하네, 정말.
뭐라 더 꿍얼대던 병수가 긴 한숨 끝에 드디어 본심을 고했다.
-나 그냥 너랑 쭉 가려고.
노트북 마우스 패드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던 것이 덜컥 멎었다.
“…진심이야? 누구랑 사귀는지도 못 말해주는데?”
병수를 아주 끝까지 믿지는 못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인데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놀란 건 은기였다.
-넌 원래부터 너 말고는 다른 사람 잘 안 믿잖아. 나한테만 그런 거면 섭섭하겠는데, 모두에게 그러니까 괜찮아. 아마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그 사람은 믿겠지?
은기가 눈을 들어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윤수를 마주보았다. ’무슨 일이야?‘ 하고 까만 눈빛으로 묻고 있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흔들었다.
“그건 당연하고. 그래서, 정말 내 매니저 더 하겠다고?”
-그래, 인마! 더 고민해봤자 같은 대답일 것 같아서 빨리 전화했다.
“김형규 씨 매니저 될 기회는 지금 뿐인데. 갈아탈 마지막 기회야. 잘 생각해, 형. 후회할거야. 나중에 나 원망해도 답 없어.”
-아, 몰라! 더 묻지마. 후회해도 내가 할거고, 선택 내가 한거니까 너한테 뭐라고 하지도 않을게. 약속한다. 그리고 비밀은 지킨다. 앞으로 네 연애 고려해서 스케줄 맞춰줄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내가 그동안 너무 빡빡하게 굴긴 했지.
그는 나름대로 정말 고심한 것인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말도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들을수록 은기는 미안한 마음도 커져갔다.
당연히 병수가 그만둘 줄 알았던 은기는 놀란 마음을 차차 가라앉히고 미소지었다. 병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경솔했고 오판이었다.
“고마워. 몰랐는데, 나 사람 복 있었구나. 설마, 술김에 한 말은 아니지?”
-소주 딱 두 잔 마셨다! 아무튼 내일 일몰 시간 맞춰서 촬영장에나 잘 오고. 야외 촬영인거 알지?
“알지. 내일 저녁에 봐.”
전화를 끊은 은기는 맞은편에서 뚫어질 것처럼 다가온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윤수의 까만 눈이 오늘따라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나한테는 말 안해줄 거야?”
은기가 헛기침을 하고 천천히 서두를 꺼내들었다.
“이제부터 하려고 했어요.”
그때부터 병수에게 했던 이야기나 그가 했던 생각들을 윤수에게도 말해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윤수는 어느새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생각이 많아졌다. 은기가 한 발 앞서나갈수록 초조해지는 마음을 그는 알까. 서로를 위해 전진하지만, 벌어지는 격차가 커지면 그 틈새로 불안이 계속 스며들어 관계에 녹을 슬게 한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많은 일들이 진행되었네. 네 일이긴 하지만.”
윤수는 말하면서도 스스로를 검열했다. 은기에게 투정부리듯 말하고 있지만, 자신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나?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적인 일이라며 혼자 은밀히 진행하고 있는 일도 있지 않은가. 은기가 싫어하고 걱정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니 혼자 모든 걸 처리하고 결정한다며 은기에게 뭐라고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윤수는 속으로 결심했다.
’어머니부터 만나고 나서 이야기할 건 하자.‘
함께할 사이라면, 말하기 싫은 것도 해야할 때가 있다. 가볍게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은기가 하는 행동이나 태도들은 명백히 ’미래‘에 맞춰져 있었다. 그에 부응해야 한다. 어차피 바로 쫓지 못할 것이라면, 보다 느긋해지자. 그리 마음 먹었다.
은기가 보냈던 화보 사진을 다시 눈에 담은 윤수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고양이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메이크업 받아볼게. 그리고 내일 어머니 만날 것도, 또 미리 너 혼자 생각하지 말고 같이 상의해. 좋아하시는 거 뭔지 다 이야기해줄테니까.”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한결 편해진 윤수의 인상에 은기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가 윤수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은근슬쩍 몸을 붙였다. 적극적인 윤수는 언제나 옳다.
“그래 주면 나야 좋죠.”
자고 있는 고양이를 들어 옆으로 옮겨두고 은기는 손을 윤수의 다리 사이로 옮겼다.
“그 전에 ’적당히‘ 한 판만?”
들어서 옮긴 덕에 잠이 깬 고양이가 부르르 몸을 떨며 소파 아래로 뛰어내렸다. 투투와 함께 멀리 가버리는 일리야의 까만 뒤꽁무니를 안타깝게(?) 보며 윤수가 침입자의 손을 냉큼 잡았다.
“…네가 말하는 적당히는 못 믿겠어.”
가랑이 사이와 뒤로 향하던 은기의 손을 잡아서 빼내자 그 손은 포기 않고 니트 사이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무방비한 윤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이면서 은기가 유혹하는 세이렌처럼 속삭였다.
“그럼 ’적당히‘의 선을 정해요, 지금.”
은기가 먼저 말했다.
“세 번?”
“한 번.”
“내가 더 사랑한다면서. 두 번.”
여기서 왜 그 말이 또 나온단 말인가. 윤수의 얼굴이 가차없이 붉어졌다. 그렇게 또 은기에게 말렸다.
“…알았어, 두 번.”
극적으로 타협한 ’적당히‘의 개념은 이후에 자세히 새로 타협해야 했다. ’두 번‘은 맞지만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밤도 몹시 길었다.
***
다음 날 점심 시간.
윤수는 대체 어쩌다 어머니와 은기가 이리 급속도로 친해진 지 알 길이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어머니네 옷가게에 먼저 들렀다는 메시지에 헐레벌떡 뛰어 갔다.
-엄청 긴장되네 빨리 와요
워낙 윤수의 (남자) 애인에 대해 경계심이 많은 어머니인지라 은기가 기가 죽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이게 무슨….‘
시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그녀의 옷가게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윤수는 멍해졌다.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고 두 사람에게 머물렀다. 세로로 옷들을 길게 걸어놓은 매대 사이로 앞머리를 세팅해 위로 올린 장신의 미남이 그의 어머니에게 친근히 말을 걸고 있었다.
“여기 마음에 드는 옷이 너무 많은데요? 다 사가도 되죠?”
넉살 좋은 은기의 말에 그의 어머니는 보기 드문 하이톤의 웃음을 선보였다. 홍조마저 띈 얼굴에 경계심이라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역시 모델이라 그런가, 보는 눈이 좋네.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