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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방영일 언제였지.‘
은기의 집에서 윤수와 함께 촬영했던 예능의 방영일도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었다.
기분 좋은 예감에 웃음 지은 은기가 허리를 굽히는 찰나였다.
“방송 재개하느라 바쁜가 보네요.”
등을 휘어채는 담담한 여자의 목소리에 은기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차에 단발 머리의 커리우먼 인상인 여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남승우의 사촌 누나이자 인기 있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총괄 PD였다.
은기가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아무도 없었고 주차장은 한적했다. 그녀도 방송국에 볼 일이 있어 들른 모양이었다. 차체 위로 잘 손질된 하얀 손을 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누군 쓰레기 더미에 처박혔는데.”
은기는 아무렇지 않게 덤덤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되받아쳤다.
“원래 쓰레기는 쓰레기장에 가장 어울리죠.”
그녀가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에 악의는 없었다.
“딱히 부정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사촌 지간이니 말조심해줘요.”
말은 그리 해도 사촌이라고 감싸는 태도는 아니었다. 방송계에서도 그녀는 정에 매이지 않는 프로 정신으로 유명했다. 최근에는 시사 채널로 다소 위험한 부정 현장을 폭로해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뚝심으로 밀어붙여 유능함을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력이 어떻든, 그에게 가진 감정이 적의든 호의든 은기는 개의치 않았다. 윤수를 만나러 갈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가 한숨 쉬며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 말 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남 PD님?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남현아 PD가 화장기 옅은 얼굴로 미소짓고는 능숙하게 제 페이스로 그를 끌어들이려 했다.
“아뇨. 오해마세요. 은기 씨한테는 오히려 감사한 마음입니다. 승우가 더 큰 사고 치기 전에 막아줘서. 걔가 악명을 날릴수록 나한테도 조금 영향이 있거든요.”
다음 일정이 있다고 했음에도 자신의 할 말을 쏟아낸다. 이런 화법은 남현아 PD의 취재 시 주로 쓰는 것으로, 그녀의 전매특허였다. 은기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다른 것을 알아내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임도.
은기가 잠자코 있자 그녀는 마음에 든다는 듯 웃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하은기가 눈치 빠르고 분위기 파악이 빠르다고 들었는데, 역시였다. 대화가 편한 상대다.
“사실 승우가 요즘 우리 프로에서 새로 취재하고 있는 사건과도 이어져 있어서. 차라리 해외로 떠서 몇 년 근신하고 있는 게 걔한테도 좋을 테니까요.”
필요하면 사촌이라도 가차없이 취재하고 물어 뜯겠다는 의지도 엿보였다. 그녀의 냉정한 태도보다는 다른 것이 더 신경쓰였다. 은기가 슬쩍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 걸 왜 저한테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남 PD가 뜻밖의 말을 꺼내들었다.
“송예나 씨랑 많이 친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 때도 승우한테서 구해낸 거잖아요? 혹시 예나 씨한테 뭐 들은 거 없어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은기도 놀라 되물었다.
“예나 선배한테서요?”
“네. 예나 씨가 승우 관련으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다고 하던데…. 물론 그때 일로 앙갚음을 하려고 그러는 거겠지만, 그건 그 애가 감당할 몫이고. 내가 관심있는 건 송예나 씨가 승우와 관련된 뭔가를 알아냈을 거란 사실입니다.”
남 PD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집념이 어린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담당 및 취재하는 사건에 연관되었다 판단한 순간, 쉽게 떨치기 힘든 존재였다. 저 눈빛과 일념이 많은 것을 일구어냈다.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은기는 최대한 협조적으로 굴었다.
“그러니까…. 남승우 관련으로 예나 선배에게 뭔가 들은 것이 있다면 알려달라, 그 말씀이시군요.”
남 PD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요.”
“직접 물어보시지, 왜 굳이 저한테 물어보시는 건지?”
“예나 씨는 날 믿지 않아요. 승우의 사촌이라는 것 때문에 더더욱.”
은기는 그가 아는 예나의 성격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들은 건 없습니다만, 나중에 알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겁니까?”
“아주, 중요한 거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어서 가봐요. 귀한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한마디 한마디에 시사 PD 특유의 내공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먼저 자리를 떠나고, 은기는 차에 올라타며 남 PD가 한 말을 되새겼다.
’남승우 관련해서 예나 선배가 한 말이라….‘
시동을 걸고 출발하던 중, 그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참, 승우 관련해서 좀 이상한 거 들었어.]
[이상한 거? 뭔데.]
[걔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더라구.]
[믿는 구석? 재벌가 스폰이라도 물었어?]
[아니. 그것보다….]
예나에게 다음에 따로 이야기를 넣어봐야 할 것 같다. 그녀가 말하려다 만 것이 분명 있었다. 은기는 진지해진 얼굴로 차를 몰고 윤수의 사무소로 곧장 향했다.
***
사무소 건물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해두고 조금 기다린 끝에 윤수가 퇴근하여 내려왔다. 은기는 그가 차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끌어당기고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왜, 왜?”
은기가 그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신중한 얼굴로 유심히 살폈다.
“많이 나았네.”
멍이 대부분 사라진 매끈한 피부로 돌아왔다. 아직 노랗게 물든 부분도 있었지만 전보다는 훨씬 괜찮아 보였다. 윤수가 손가락을 꿈틀대다 옆으로 손을 뻗었다.
“시간 꽤 지났으니까. 잠깐, 문 아직 다 안 닫았어.”
윤수는 늘 그렇듯 조심스러운 태도로 덜 닫힌 문을 당겼다. 잠기는 소리가 제대로 나서야 그가 안심하고 뻣뻣하던 어깨를 이완시켰다.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 보던 은기가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대고 윤수의 목에 손을 감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 윤수를 가볍게 당겨 도드라진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겨우 떨어져 나간 은기가 놀리듯 말했다.
“아까 박력 넘치는 건 어디갔어요?”
윤수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잠깐의 만용이었다. 아깐 무슨 용기로 그런 말을 대뜸 던진 걸까. 내가 더 사랑한다니.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게…왔다갔다 해.”
은기는 피식 웃으며 그를 놓아주곤 핸들을 잡았다.
“우리 앞으론 좀 더 편하게 만날 수 있을 거야.”
“무슨 소리야? 편하게? 어떻게?”
“전보다 눈치볼 일 줄 거라는 이야기.”
“음?”
상세한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눈치 볼 일이 줄었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송예나도 눈치챘고, 매니저에게는 물론 윤수가 상대라는 것까지는 밝히지 않을 것이지만 대략적으로는 통보해 놨다. 예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사람이고, 매니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윤수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사이 차는 어느 새 은기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푸른 빛이 도는 자켓을 벗어두면서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드는 고양이들을 안아들었다.
“뭐 좀 먹을래요?”
“간단한 거면 먹을게. 네가 힘들지 않은 걸로.”
“기다려 봐요.”
그의 품안에서 기분 좋게 골골대는 러시안 블루 고양이들을 내려놓고 은기는 주방으로 향했다. 하얀 셔츠를 팔목까지 걷고 능숙한 솜씨로 프라이팬을 들고 오전에 미리 해감해둔 바지락을 꺼내들었다.
예전에 요리 예능에도 나가서 전문가에게 배운 적도 있었기에 웍질을 하는 손목 스냅이 예사롭지 않았다. 불이 붙어서 거세게 달아오르는 바람에 멀리서 지켜보던 윤수가 놀라 달려오는 사태도 벌어졌지만 요리는 빠르게, 무사히 끝이 났다.
[내가 관심있는 건 송예나 씨가 승우와 관련된 뭔가를 알아냈을 거란 사실입니다.]
요리를 하면서도 남PD에게 들었던 말이나 여러 가지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 깔끔한 모양으로 파스타가 두 그릇 나와 식탁을 장식했다.
말한대로 솜씨좋게 간단한 파스타를 한 그가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는 윤수를 불렀다. 좋은 올리브향이 집 안에 곧 가득해졌고, 윤수는 주린 배를 움켜잡으며 식탐을 뽐내러 갔다.
확실히 은기가 한 파스타는 모양도 완벽했지만 정말 맛있어서,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파스타면에서 깊은 풍미마저 느껴져서, 그는 연신 포크질을 하며 감탄했다.
“밖에서 사먹는 것 같다. 진짜 맛있어.”
포크까지 먹을 기세로 달려드는 윤수를 맞은편에서 그가 흐뭇하게 보았다. 먹일 생각에 촬영 나가기 전에 미리 재료도 준비해 놨는데, 노고가 헛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식당 차려도 되려나.”
“응. 차리면 내가 단골 할게.”
바로 앞에서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미남이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윤수는 이제 적응이 되었….
’아, 심장 아파.‘
…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미남이 눈가를 휠 정도로 활짝 웃고 있다면. 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매번 봐도 도무지 떨리는 행복감은 사라질 생각을 않았다.
윤수의 두근거림에 아랑곳 없이 몸은 정직하게 맛있는 요리를 흡수했다.
“일 그만둬도 굶어죽지는 않겠네요. 단골 덕분에.”
은기의 농담에 하얀 접시에 거의 코를 박고 있던 윤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은기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일 그만둘 거야?”
“언젠가는.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업이 아니니까.”
말하던 은기가 멈칫하고는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왜요. 나 실업자 될까봐 겁나?”
“아니. 네가 그 일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더라도, 청춘을 오롯이 바친 일을 직업 기대 수명 때문에 그만둬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비극일 수도 있다.
윤수는 그만둔 뒤에 밀려올 허무감이나 공허를 걱정했다. 은기가 마음 아플 일이나 방황할 일은 없었으면 했다.
그때 빈 그릇 위를 아쉬운 얼굴로 포크로 긁던 윤수에게 은기가 자신 몫의 파스타를 덜어 주었다.
“아, 아니. 괜찮아. 너 먹어. 난 배불러.”
“거짓말한다, 또. 아까부터 포크 빨고 있었으면서.”
괜찮다며 돌려주려던 것을 체중 조절을 핑계로 기어이 넘겨준 은기는 태연하게 말했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별개로 직업 수명이 있으니까. 특히 모델계는 더 하고. 그래서 예능도 부지런히 나가잖아.”
그걸로 괜찮은 건가. 윤수는 버릇처럼 어둡게 물드는 상념을 떨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걱정 많은 성격이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절로 드는 생각을 물리기란 불가능하니까.
은기가 밝은 표정으로 그의 염려를 간단하게 불식시켰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좋아하는 일 발전시켜서 앞으로 도전해볼 방향도 대충 생각해 놓고 있어. 걱정마요.”
하긴, 은기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할텐데,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윤수가 헛기침을 하고는 하얀 그릇을 자신 쪽으로 가까이 잡아당겼다.
“그러게. 알아서 잘 할텐데, 미안.”
’미안‘ 이라고 뱉어놓고 윤수가 눈을 굴렸다. 초반에 ’미안‘ 이라고 습관대로 여러 번 말했다가 당한 수난(?)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귀여워서 은기가 크게 웃었다.
“그만큼 나한테 신경쓰고 있다는 반증이니까, 미안할 거 없어.”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짓던 은기는 다시 고개를 박고 파스타를 흡입하고 있는 윤수에게 말을 걸었다.
“참, 그거 알아요?”
“뭐?”
“나도 말버릇 닮아가고 있던데. 은근 중독성 있나.”
“무슨 말버릇? 내 거?”
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쾌하게 긍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