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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 ‘Living alone‘에서 하은기의 분량은 한 주 결방되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봐서 결정하겠다는 윗선의 결정이었다. 다행히 사람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무성한 소문을 키우기는 했지만 어쨌든 남승우 쪽의 실책이라는 쪽에 무게가 더 실렸다.
일주일 만에 복귀한 은기는 긍정적인 여론이 확인되자마자 곧장 이곳저곳에서 부름을 받았고, 그의 매니저는 결과에 매우 흡족했다.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은기의 옆에서 기분이 좋아진 병수가 한껏 들떠 종알댔다.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천운이었는데, 잘됐지 뭐.”
오늘도 조용한 메이크업 아티스트 한수정의 침묵은 논외였지만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혀 메이크업 교정을 받고 있는 은기는 의외였다.
“어.”
복귀해서 좋아할 줄 알았던 은기는 영 얼굴이 좋지 않았다. 물론 복귀 직후에는 그간 뭘 먹고 돌아다녔는지 신수가 아주 훤했지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그 환함은 절반 정도 걷혔다.
떠들던 병수가 분위기를 눈치채고 이상한 듯 그의 의중을 케물었다. 방송국 안이었고, 은기에게 따로 배정된 개인 공간이라 다른 사람은 없었기에 발언은 과감했다.
“어째 떨떠름하다? 뭐가 불만이야?”
“안그래도 다니기 힘들었는데 더 다니기 힘들어 졌잖아.”
덤으로 윤수와의 데이트도 더 힘들어졌다. 그걸 생각하자니 절로 인상이 일그러지지만, 은기는 기껏 교정한 메이크업이 다시 뭉개질까봐 참았다.
얼굴을 다듬는 손길이 더욱 정교해지고, 선명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손에서 더욱 화려하게 재탄생되었다. 언제 봐도 신이 사심을 담아 몰아준 듯한 외모와 길고 번듯한 신체만큼은 예술이었다. 그런데 이를 돋워줄 관심을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저 삐뚜름한 반응은 뭐란 말인가.
“네가 다니기 힘든 만큼 인지도가 더 올라갔다는 소리잖아. 인지도 못 따서 안달인 놈들 널렸는데 고마운 줄 알아야지.”
세밀한 눈화장이 끝나고, 비교적 넓은 뺨으로 수정의 손이 옮겨갈 때 은기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고맙긴 하지. 안 고마운 것도 있어서 그렇지.”
“뭔 소리야, 이건?”
“집중 안되니까 나가줄래, 형?”
수정도 물끄러미 그를 보았고, 병수는 무안한 얼굴로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조금 뒤, 그간 말 없던 수정이 은기의 메이크업을 마무리했다. 거울 속 미남은 근심에 차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꼼꼼하게 덜 된 곳을 도구로 더 짚어주며 수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병수에게 하던 것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 관련 고민.”
“어떤 사람?”
“아주 가까워진 사람.”
“설마 그때 그….”
그녀는 은기가 패션쇼 피날레 무대를 서기 전 김석이 그에게 와서 돌기형 콘돔이 어쩌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물론 입 무거운 수정은 어디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궁금하긴 했다.
그가 슬쩍 눈을 들어 그녀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건 노코멘트.”
주황색 조명의 따사로운 빛이 침묵하는 작은 얼굴에 부딪쳐 사라졌다. 전체적으로 온화해 보이는 갈색 톤을 많이 쓴 메이크업이라 날카로워 보일 수 있는 콧대와 턱선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이번에 출연할 예능 콘셉트는 언변이 좋고 똑똑한 동시에 서글서글함을 부각시켜야 하는 뇌섹남 이미지였다. 때문에 메이크업은 지성과 부드러움을 강조했다.
해당 예능은 예상치 못한 아이돌 및 모델 출신의 하은기라는 얼굴 마담의 활약으로 고정자리까지 내놓았다. 그는 예상보다 상식이 풍부하고 머리 쓰는 법을 잘 알았다. 그리고 PD들이 반기는 것은 늘 고정된 이미지 속에 새로이 발견되는 의외의 면모였다. 은기는 이를 충족시켰고, 예능 PD들은 그런 그에게 기꺼이 성의로 보답했다.
하지만 PD들이 성의로 보답한 것을 한 순간의 가쉽으로 날릴 뻔한 장본인은 정작 다른 것에 관심이 모두 쏟았다.
그게 뭘까.
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소한 은기의 변화를 덤덤하게 넘겼다. 큰 차이는 아니었다. 다만 달라진 시선의 온도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쏠린 방향이 ’사람‘을 향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하은기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일정 온도 이상을 유지하지 않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래. 너 이렇게 누구 신경쓰는 건 처음봐서 물어본 거야. 신경쓰지마.”
꼭 답을 바라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기에 수정은 오히려 물어본 것을 미안해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녀의 미안함을 적당히 넘긴 은기가 정면으로 비치는 거울에서 제 모습 위로 보이는 그녀에게 다른 것을 말했다.
“참. 전부터 하고 싶다는 거 있었잖아. 일반인 상대로 메이크업 게릴라로 하고 싶다고 했던가? 시간 없어서 못하고 있다던.”
“예전에 그런 말 하긴 했지. 그게 왜?”
TV 출연에는 그다지 미련이 없는 수정이었지만 그녀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후배가 혼자 나와서 진행하는 예능에서 선보인 것은 부러워했다. 길거리 기습 게릴라로 찍은 일반인을 완전히 바꿔주는 메이크업 마법으로 실력을 인증한 것은 물론 인기도 얻었던 것이다. 수정이 관심있는 건 인기보다 새로운 도전 쪽이었다.
“한 사람만 해줘. 당연히 누나 시간 나면.”
“누군데?”
“된다고 하면 말해줄게.”
커트 머리에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수정이 조금 웃었다.
“말이 일반인이지 국빈급 아냐?”
“농담이고, 나랑 같은 예능 나오는 그 번역사.”
“아~ 이번에 너랑 같이 크게 사고 친 그분? 몸은 좀 괜찮으시대?”
역시 신경쓰이던 부분이었는지 은기의 반듯한 얼굴에 금이 갔다.
“괜찮아졌어. 아직 덜 나았지만.”
“승우 씨 손 많이 매울텐데 깜짝 놀랐어.”
그는 생각만으로도 다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한숨으로 분노를 게워냈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해줄 수 있어?”
“시간 내볼게. 네가 부탁하는 건데, 없어도 내야지.”
“고마워, 누나. 요즘 그 분이랑 많이 친해져서, 잘 맞기도 하고. 뭔가 특별한 선물이 될 만한 걸 해주고 싶었거든.”
수정이 괜찮다며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사실 연예인 중엔 네 얼굴 메이크업 하는 게 제일 재밌어. 할 때마다 정말 다르기도 하고. 다른 애들 섭섭할까봐 이야기 안했던 거야. 비밀이다?”
립서비스를 할 성격이 아닌 그녀인지라 은기는 머쓱하게 웃고는 다른 화제를 얼른 넘겼다.
그녀의 허락을 받아냈으니 다음 예능 출연 전에는 윤수를 데리고 오면 될 것 같다. 기왕 TV에 출연하는 것, 제대로 메이크업도 해서 내보내고 싶었다. 사람들이 그를 몰랐으면 하는 마음 반, 한편으론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은 마음 반이라 충동적으로 저지르고 말았다.
’머리 해도 예뻤는데, 메이크업까지 하면 얼마나 달라질지.‘
은기는 기분 좋게 미래의 그 날을 상상하며 잘 세팅되어 치솟은 앞머리를 거울 너머로 흘끗 보았다.
훤히 드러난 이마가 반짝거리고, 말끔하게 정리한 갈색 눈썹 아래 곧게 뻗은 코와 깨끗한 갈색 눈동자가 시원한 이목구비를 완성하고 있었다. 팔목까지 걷어올린 하얀 셔츠에 적당히 걸친 남색 스카프는 그를 더욱 차분하게 보이도록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연출이다. 대중이라는 거울 앞에서 진심과 과장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포장하여 선보인다. 은기 자신은 이런 삶을 선택했다. 전혀 나쁘다고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즐겼다.
하지만 피윤수만큼은 거울 속에서 숨쉴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적의와 가식에 몹시 취약했다. 이제는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역시 병수 형부터 어떻게 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 스태프 하나가 와서 그를 호출했다.
“스탠바이 해야 되는데. 메이크업은 멀었어요?”
수정은 다 되었다며 그를 밖으로 내보냈고, 밖에서 시무룩하게 기다리고 있는 병수를 은기가 불렀다. 방송국 복도에서 아는 얼굴들이 지나가고 그는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진지하게 병수의 어깨를 짚었다.
“왜 그래?”
넓은 어깨의 곰 같은 남자가 드물게 움찔하며 두려운 눈을 했다. 본능적으로 어떤 것이 다가올지 알고 있는 것이다.
병수의 착오는 철저히 바닥으로 떨어진 뒤 오래토록 날아오를 자신만의 알바트로스로 하은기를 점찍은 것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철저히 그를 감시하고 집착했지만 그 새는 지켜야 할 것이 따로 생겨버렸다.
“병수 형.”
“어, 어, 왜?”
잔뜩 긴장한 병수가 말까지 더듬었다. 은기는 고개를 숙이고 씁쓸함을 미소로 감추었다.
“형한테 할 말 있어. 촬영 끝나고 나서 할게.”
“무, 무슨 말?”
덩치 큰 사람이 우물쭈물대는 것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오래 생각하던 것이었고, 윤수를 위해서라도 조치를 취해야 한다.
“별 거 아니니까 너무 날 세우진 말고. 그럼 다녀올게.”
은기가 손을 흔들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복도를 앞질러 갔다. 병수는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넓은 어깨에 역삼각형으로 내려가는 허리 아래 탄탄한 허벅지가 스칠 때마다 방송국 복도가 런웨이가 된 것 마냥 빛이 나 보였다.
어디선가 1위를 한 아이돌 그룹이 환호성을 지르며 복도로 쏟아져 내려왔고, 매니저 병수는 멍하게 그의 별이자 희망이 사라진 곳을 보았다.
***
윤수는 오랜만에 돌아온 번역 사무소에서 사람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일을 했다. 고작 며칠인데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묵묵한 성격인 소장조차 그가 당했던 불의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고, 하 수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머리 아파….”
당한 건 윤수 자신인데 하 수석은 자신이 맞은 것처럼 하루 종일 그를 따라 다니며 남승우에 대한 온갖 험담을 쏟아부었다. 여직원들도 매번 걱정스럽고 곧 깨질 유리처럼 그를 대해서 윤수는 사무소에서 얼른 도망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책상 앞에서 기계적으로 번역을 하며 윤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간 왜 이렇게 안 가지.‘
은기와 함께 있던 시간은 그리도 야속하게 빨리 가더니, 사무소에 돌아오자마자 시간이 아예 멈춰버린 건 아닌가 싶었다.
그를 배려해서 일 안배를 직원들이 하지 않았던 지라 할 일이 별로 없기도 했다. 그나마 은기에게 맡았던 일은 며칠 바짝 밤을 새면 끝낼 수도 있었던 분량이라 한두시간 했더니 하루치가 벌써 끝나 버렸다.
몇 번이나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던 윤수는 고작 2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절망에 빠졌다. 이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
’집중이 안 돼.‘
급기야 그는 무료한 얼굴로 오랜만에 책상의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제목과 내용, 목차를 살폈다. 번역에 쓰려고 쟁여두었던 자료책들이었다. 그 사이로 빨간 노트가 하나 보였다. 집에서 급히 가져오다가 사이에 끼어서 온 모양이었다.
윤수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한참을 보다, 기어코 노트를 꺼내들었다. 파라락 펼치자 빼곡하게 채워진 글자들이 그를 반겼다. 낯익은 아픔이 글씨를 따라 스쳐 지나갔다.
-그가 보인 민낯과 나의 민낯이 부딪치고, 우리는 서로를 저주했다. 새아버지의 저주는 나를 망가뜨렸고, 나의 저주는 그의 연인을 뺏었다.
언젠가 썼던 일기장을 펼쳐 보며 윤수는 쓰게 웃었다. ’그 일‘ 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뭐든 해서 그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어야 했고, 일기를 꼬박꼬박 빠짐없이 집착하듯 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음 깊은 곳을 갈아넣을 만큼 아픈 것도 없고, 새로이 써내려갈 두근거림만 남았다.
옅게 웃으며 그는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은기가 나오는 예능을 시청 중인 직원들을 보았다. 하 수석은 성이 같다는 이유로 하은기를 아주 먼 친척쯤으로 삼은 모양인지 뇌섹남, 뇌섹녀로 유명한 예능을 보며 조카에게 하듯 훈수를 두고 있었다. 윤수가 슬쩍 미간을 구겼다.
’언제부터 친했다고.‘
처음에 분명 욕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 수석은 훈수를 할만큼 했는지 작은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고 윤수에게 관심을 돌렸다.
“은기 씨랑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야?”
“…한 번 더 물으면 열 번째인 건 알아? 설명해 줬잖아. 지나가다가 그냥 말린 거라고.”
하 수석이 음흉한 얼굴로 그에게 치근댔다.
“더 정확하고 어떤 기사에도 나오지 않았던 비하인드 스토리, 뭐 그런 게 궁금하다 이거지~. 아, 은기 씨 집엔 몇 번이나 가봤어? 좋던? Living Alone 보니까 엄청 좋아보이긴 하더만. 부럽다. 욕조도 엄청 크고 넓고, 거실도 크고, 하다 못해 현관문에서 거실까지도 멀고.”
왠지 하 수석이 짚는 곳들이 하나같이 은기와 뜨거웠던 장소들이라 듣고 있던 윤수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완전 좋겠…. 얼굴은 왜 그러냐? 어디 또 아파?”
“…아니. 좀 더워서.”
“난 추운데? 정말 어디 안 좋은 거 아니냐?”
“아니라니까.”
탈 것 같이 달아오른 것을 숨기려 윤수가 제자리로 홱 고개를 돌렸다. 오해한 하 수석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휴대폰을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아니면 아닌거지 왜 성질이야. 난 다시 일하러 간다.”
윤수도 반사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내려보았다. 아까부터 틈만 나면 연락이 오는 것이 있나 확인했는데, 때마침 은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하는 중?
*알바트로스 : 한 번 날면 10년도 난다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바닷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