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또다른 시작 --> (40/59)

========== 작품 후기 ==========

<-- 또다른 시작 --> 

윤수는 차가운 손을 비비면서 은기가 기다리고 있는 차 안으로 빨려가듯 들어갔다. 보조석 문을 열고 닫자마자 뜨거운 손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멍자국이 많이 흐려진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은기의 손에 스쳤다. 급격한 기온차에 윤수의 안경알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천천히 맑아졌다. 

“다녀왔어.”

그는 이제 별로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그 손을 그대로 둔 채 안전벨트를 맸다. 오히려 차가워진 뺨을 감싸는 큰 손이 고마웠다. 은기가 말랑말랑한 그의 볼을 만지며 눈가를 휘었다. 

“이야기는 잘 하고 왔어요?”

윤수는 혹여 뺨에 닿은 그의 손이 떨어지기라도 할세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에 같이 보자고 하시더라.”

“잘됐네. 약속 바로 잡아도 되는데, 언제가 좋으시대요?”

“혼자 가게 하시는 거니까 너 편한 시간대로 하자고 하셨어. 가게는 그날 휴업하면 되는 거고.”

“그래도 장사 지장주기는 싫은데. 원래 장사 쉬시는 요일이 언제에요?”

“월요일.”

“그럼 다음주 월요일에 보죠.”

속전속결로 잡히는 일정에 윤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빨리? 너 그날 촬영 있는 날 아냐?”

“빠르긴 뭐가 빨라. 마음 같아선 당장 내일이라고 하고 싶은 거 늦춘 건데. 그리고 낮 촬영이라 빨리 끝날 거에요. 저녁 시간엔 돼. 혹시 마음의 준비 덜 된 거면 뭐, 좀 늦추든가.”

윤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은기의 손이 떨어질까봐 소심한 반경으로 흔들었지만.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정말 네 속도, 보통 사람이면 못 따라갈 거야.”

“원래 느긋한 사람인데, 이건 피윤수 한정.”

하긴, 은기를 알던 지인이면 그가 이토록 안달하고 서두르는 것을 신기해할 터였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윤수의 주변을 안정시키고 그의 불안 요소를 하나라도 더 잠재우고 싶었다. 그가 안정을 찾을수록 관계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은기가 윤수가 입고 온 스웨터를 살폈다. 청록색에 단출한 로고만 박힌 것이었는데 자주 보였다. 

“마음에 들어요? 이 옷 또 입고 왔네.”

“네가 준 것 중에 자주 손이 가.”

무채색으로 가득했던 그의 옷장이 은기가 준 것들로 조금씩 알록달록해졌고, 윤수도 무채색 의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무소 사람들도 훨씬 보기 좋다며 칭찬을 하곤 했다. 애인 센스가 보통이 아니라는 하 수석의 입방정도 곁들여서. 

문득 윤수가 멈칫하며 목 아래를 보았다. 

“근데 이 손은 왜 이래?”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겠죠.”

“네 손이잖아.”

“걔도 자유 의지가 있더라구요.”

“무슨 소리야?”

은기의 손이 점점 더 의도를 가지고 진득해졌다. 뺨을 녹이던 손은 어느덧 윤수의 목을 감싼 청록색 스웨터를 건드리고, 그 속에 파고들었다. 긴 손가락이 목줄기를 스치자 쾌감을 닮은 익숙한 소름이 윤수의 등을 스쳤다. 

감출 수 없는 진한 욕구로 채워진 갈색 눈이 여과없이 윤수를 담고 있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참을성도 바닥나고 있던 차였다. 게다가 모처럼 둘만 가지는 시간이 길었지만 아픈 윤수를 안지 않겠다고 선언했던지라 쌓인 것이 컸다. 

많이 회복된 얼굴을 보니 이제 금욕의 시간을 끝낼 때가 되지 않았냐는 악마의 속삭임이 그의 속을 긁었다. 

윤수는 황급히 그의 손이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은기에게 또 휩쓸려 가기 전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 차 안에서 할 것 같았다. 

“출발 안 해?”

그런데 눈을 보니 이미 틀렸다. 아까 전과 다른 선명한 온도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온 몸을 관통하는 저릿한 시선에 윤수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마주보았다. 

은기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소음 하나 없는 차체 내에서 그의 음성만 천천히 부유했다. 

“생각해 보고.”

윤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심상치 않았다. 

“무슨 생각?”

“지금 먹을까, 집에 가서 공들여 먹을까 고민 중.” 

“너 분명 오늘은 안하겠다고 했잖아.”

잡힌 손이 아닌 반대편 손이 스웨터를 밀고 올라갔다. 순식간에 드러난 메마르고 하얀 가슴에 은기가 입술을 대고 혀를 굴렸다. 윤수의 안경 뒤 까만 눈이 흥분으로 일그러졌다. 

“흐읏….”

결국 은기를 붙잡은 힘이 스르륵 풀리고 해방된 은기의 손이 이번엔 그의 바지 속을 노렸다. 너무 붙는 건 답답해 하는 성정 때문에 품이 있는 면바지라 침입은 손쉬웠다. 앞을 공략하던 그가 짧게 웃더니 얼굴을 가슴에서 떼었다. 

“그래놓고 이렇게 깨끗하게 씻고 온 건 뭔데요?”

“그, 그건….”

“설득력 떨어져. 속으론 기대한 거 아니야?”

발끈한 윤수는 변명처럼 그에게 항의했다. 

“혹시 모르니 대비한 거라고. 이럴 것 같아서.”

“알았어요, 알았어.”

윤수가 거듭 강조했다. 

“정말이야.”

“그렇다고 치죠.”

“진짜라니….”

이미 입술을 점령한 뜨거움 때문에 그는 말을 온전히 맺기 힘들었다. 언제나 이렇다. 차 안이 보일 리는 없겠지만 긴장하는 윤수에 비해 은기는 거침없었다. 자신이 받을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은 채, 관계에 충실했다. 윤수는 그런 그를 걱정했다. 

‘근신 처분 받은 거, 괜찮을까.’

의도가 좋았다 하더라도 좋지 않은 사건에 엮인 것으로 은기는 소속사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았다. 활동도 일주일 가량 전면 중단이었고, 방송 촬영분도 여파가 좀 가라앉으면 내보내겠다는 연락도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태연했다. 암운이 가득한 병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은기가 씨익 웃었다. 

[근신? 더 잘됐네. 나 얼마간 찾지도 말고 부르지도 마. 그럼.]

매니저 병수는 근신 처분에 오히려 기뻐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이러나 싶은 일말의 불안감으로 병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분명 뭔가 있어.’

우선 그의 행동 범위는 일정했다. 집, 혹은 일정에 바빠서 소홀했던 친구들과의 약속에 소소히 참가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다른 것은 분명 있었다. 

‘저 번역사랑 왜 저렇게 친한 거야?’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윤수는 누가 보면 은기와 오래된 절친인 줄 알 정도로 그와 친근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그것도 업무의 연장선으로 만난 것인데 저 정도로 친해지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은기 성격이 누구와도 잘 친해지는 과이기는 해도 이렇게 단기간에 집까지 데리고 다니며 지극정성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매니저 병수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폭력 사건에 엮인 사람 또한 윤수였다. 은기가 직접적으로 때리지는 않았지만 그가 화낸 이유는 윤수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속사에서 매스컴에 둘러댄 핑계는 친한 사이였던 배우 송예나가 위험해 보여서라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병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그는 왕년에 작은 소속사긴 했지만 한 기업을 운영한 적도 있었던 대표 출신이었다. 사람에 대한 예감은 좋은 편이라 자부했다. 

은기를 발판으로 재기에 성공하고 싶은 욕망 반, 진심으로 그를 보석이라 여기고 키우고 싶은 제작자 특유의 욕심 반에 휩싸여 더욱 엄하게 관리해 왔다. 은기가 매번 매니저 권한 이상으로 참견한다며 툴툴댔지만 그도 병수의 진심을 알기에 잘 따라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너질 순 없지.’

작은 것 하나라도 문제가 되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은기의 이상 행동에는 분명 원인이 있을 거라 판단하여 병수는 그의 행적을 쫓았다. 

워낙 눈치 빠른 은기기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대신 윤수네 사무소에 연락을 해볼 수는 있었다. 소장이 받았고, 그는 시원시원하게 윤수의 근황을 전했다. 

-윤수요? 며칠 병가 냈습니다. 듣기로 질 나쁜 연예인한테 맞았다면서. 안그래도 비실대던 사람이라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 푹 쉬고 오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 한 사람은 쉬게 해줘야지요. 

은기의 근신 기간과 맞물려 윤수까지 병가를 냈다. 다음 연락은 같은 모델인 김석이었다. 집도 가까이 살기에 물어보기 더 좋은 상대였다. 하지만 그는 병수의 전화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은기요? 몰라요. 그 자식 요새 우리 쪽엔 코빼기도 안 비치는데, 왜요, 형? 

사귀는 애인이 있는 것 같냐며 물었지만 이 또한 회의적이었다. 

-애인? 모르죠. 몰래 사귀는지 어떤지. 예나 누나랑은 완전히 쫑낸 것 같더니 왜 그렇게 화냈나 몰라? 많이 위험한 상황이었나? 

김석이 워낙 능글대는 성격이라 은기에게 들었어도 입 닫아줄 거라는 생각을 했기에 그는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대체 뭐냐고, 이 찜찜함은.’

그의 촉은 뭔가 있다고 외치고 있었건만, 털어도 나오는 게 하나도 없었다. 윤수를 싸고도는 걸 보면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다. 

혼자 괴로워하며 온갖 추측을 난무하고 더욱 의심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있던 병수를 구제해 줄 이는 없었다. 

한편, 병수의 전화를 받고 난 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앞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고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바에 앉아 바텐더와 대화하던 남자가 그를 돌아 보았다. 작고 반듯한 얼굴에 비해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은기. 병수 형 전화.]

등잔불이 어두운 법이라고, 은기는 바로 김석과 함께 있었다. 은기와 같은 기수인 모델들이 자주 모이는 클럽 안이었다. 동기 중 하나가 모델을 그만두고 작은 술집을 차린 것인데 어느 새 이 곳은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파티와 시끌벅적한 것들이 지겨워지면 다들 이 곳에 와서 마음의 안식을 찾았다. 

딱! 따악-!

몇은 길게 늘어진 당구대에서 큐를 잡고 공을 치고 있었고, 높은 건물 위의 짜릿한 도시 야경이 대형 유리창 너머 적나라하게 보였다. 바텐더 겸 이 곳 주인이기도 한 남자가 흰색 셔츠 위로 입은 검은색 홀복 차림으로 팔짱을 낀 채 그들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은기가 피식 웃으며 공범에게 말했다. 

[잘 말했어?]

김석이 멀리서 청량하게 퍼지는 큐대 소리를 들으며 바에 착석했다. 여유롭게 바텐더와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은기를 보며 김석이 혀를 찼다. 

[당근. 병수 형도 불쌍하다니까. 이런 개날라리 두고 지극정성이야, 아주. 근신까지 받은 주제에 비밀 연애나 쳐하는 새끼 두고.]

[병수 형도 언젠간 현실을 알겠지.]

은기는 이미 병수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름대로 조심하며 동선까지 고려해서 윤수와 만나고 있었다. 

‘그 형 성격에 지금에야 의심하는 게 느린 거지.’

윤수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보러 간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일거리가 없어 놀게 되자 윤수의 부재가 몹시도 지겨웠다. 예전에는 못 느꼈던 지루함이었다. 그전에는 쉴 때 무얼 하며 지냈는지도 이제 까마득했다. 

‘이틀 후면 근신 풀리는데.’

은기는 점점 마음이 초조해졌다. 곧 화보 촬영과 동시에 CF 촬영 일정도 있었다. 이럴 때 쉼없이 봐둬야 갈증이 덜 할텐데 말이다. 그가 계속 손목시계를 내려보며 가는 시간을 체크했다. 이 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윤수를 픽업하러 가기로 했기에.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

의자를 바싹 당겨 앉은 김석이 가장 좋아하던 럼주도 입도 대지 않은 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래서, 어떤 여자? 누구길래 이렇게 열심히 병수 형 눈까지 피해 가면서 만나?]

[비밀.]

[여신급인가 보지?]

알 듯 말 듯 한 미소만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은은한 조명이 특이한 구조물 모양으로 천장에 달려 제각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조각 같은 사람들을 비춰냈다. 

시간만 확인하던 은기는 이윽고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김석에게 고민거리를 투척했다. 

[연세 있고 옷가게 하시는 어르신께 선물할 만한 게 뭐 있지?]

[그게 뭐냐. 연세 있고 옷가게 하시는 어르신께 선물….]

은기의 말을 곱씹으며 되뇌던 김석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 설마 그 어르신이 미래의 장인 어른은 아니겠지? 미쳤냐? 진짜 사고 쳤냐? 몇 개월이야?]

병수가 알면 최소 친절한 멱살잡이와 함께 그 곰 같은 덩치에 걸맞는 포효는 덤으로 뒤집어 쓸 내용이었다. 

휴대폰 게임을 하며 놀던 모델 하나가 큰 소리에 고개를 들고 흥미롭게 이 쪽을 보았다. 그래봤자 얼마 못 갈 관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은기는 한숨 쉬며 그의 망상을 정정해 주었다. 

[막장 드라마 그만 좀 보지? 나 미치지 않았고, 네 가설만 흥미롭게 받겠어.] 

은기의 차가운 얼굴에 흥분이 싹 가라앉았다. 김석은 주섬주섬 자리에 앉으며 뻘쭘하게 럼을 들이켰다. 독한 액체가 식도를 긁어 내렸지만 이 느낌이 좋았다. 

[난 또…. 그럼 그런 선물은 왜 하는 건데?]

[생각하는 거 하곤. 친척 어른분께 하려고. 오래 못 보던 분인데 뭔가 해드리고 싶어서.]

그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변명을 자연스럽게 풀었다. 그러자 제가 생각해도 너무 간 설정 같았는지 김석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별 것도 아닌걸 너무 진지하게 물으니까 그랬지.]

다행히 그의 머쓱함을 구해 줄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은기는 만지작대던 휴대폰을 전광석화처럼 받고는 즐거워했다. 

[끝났어요? 지금 갈까?]

방금 전까지 싸늘해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화색이 돌면서 활짝 웃는 얼굴에 훈훈한 훈풍마저 감돌았다. 차키를 챙기면서 그가 황급히 자리를 털었다. 그리곤 통화를 하면서 끊지도 않고 남은 이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곤 휑하니 떠났다. 

바텐더가 새로운 술을 따라주며 김석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상대 누구야?]

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그냥 어디 사는 꿀단지겠지.]

보여주기도 아까워서 꼭꼭 숨겨두고 혼자 먹는 꿀단지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