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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늦게 퇴근하시는 거죠?”

사무관이 부드러운 미소 뒤로 걱정스러움을 드러냈다. 정장 차림의 그녀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올백 머리로 진기가 건네는 서류를 넘겨 받았다.

진기가 피곤한 듯 안경을 빼고 이마 사이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골치 아픈 건이라 어쩔 수 없지. 난 괜찮으니까 퇴근 빨리 해요. 약속 있다면서.”

진기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녀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붙들고 놓고 있을 생각은 없기에 어서 가보라는 손짓에 그녀는 더욱 불편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저만 가면 늘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약속 취소할까 싶은데….”

“그럴 필요 없어. 그러면 내가 선미 씨한테 더 미안해 지니까. 가기 전에 라디오나 좀 틀어주고 가면 됩니다.”

적당한 거절에 유선미 사무관도 더 말을 보태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 검사님. 그럼,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봅시다.”

그녀가 라디오를 틀었다. 즐겨 듣는 채널도 익히 알고 있기에 FM 쪽으로 맞추자 진행자의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즐거운 약속을 앞두고 흥에 겨운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라디오에서 진행자의 멘트가 끝나고, 선곡된 노래가 셋팅되었다. 밤과 어울리는 느긋하고 감성적인 노래였고, 감미로운 여자 보컬의 목소리가 그의 집무실을 채웠다. 

‘잘 갔나. 아무 일 없었겠지.’

진기는 휴대폰을 꺼내 몇 번이나 확인했다. 

-괜찮아? 은기는 어때 

-응 아무 일 없어 은기는 화 풀렸고 지금 은기네 지인 쪽으로 가는 중

십년 감수했다. 진기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휴대폰을 그제야 내려두었다. 

다행히 은기와는 별 일이 없었던 듯 했다. 완전히 오해한 얼굴로 도착한 은기가 사달을 낼 것처럼 굴어서 마음이 철렁했던 것이다. 그래도 은기 성격이라면 대화로 잘 풀었으리라 믿었다. 그런 녀석이니까.

은기를 믿었기에 처음에 윤수 얼굴이 멍으로 얼룩진 것을 보고 더 놀랐다. 

‘얼굴 보고 맞은 줄 알았으니까.’

순간 할 말도 없고 화마저 치솟았다. 간신히 꺼낸 말이 고작 ‘데이트 폭력도 상담받는다’ 였다. 진기가 미간을 지긋이 찌푸린 채 데스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꾸만 아까 보았던 광경들이 머릿속에서 작은 회오리처럼 휘몰아쳤다. 

가방 속에 챙겨온 청첩장을 인식하며 당시의 진기가 윤수에게 물었다.

[이제 행복해?]

[그럼 너는?]

대답을 하지 못한 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결혼할 사람을 그 나름대로 사랑했다. 편안한 의미의 사랑이었다. 같이 있으면 오래 사귄 사람처럼 아늑한 그늘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대답을 선뜻 하지 못했을까. 

‘행복해 졌구나.’ 

기어코 은기가 해낸 것이다. 진기는 끝내 하지 못해 돌아서 버린 윤수의 무게를 성공적으로 받쳐냈다. 

윤수도 그만의 과업을 은기에게서 끝내고 정착하게 된 것 같았다. 그가 볼펜을 돌리다 피식 웃었다. 

‘대단한 녀석.’ 

은기는 어릴 때부터 그런 힘이 있었다. 가족을 웃게 하는 것도 언제나 그였다. 진기도 은기의 긍정적인 생각과 활기에 힘을 얻곤 했다. 은기도 형을 잘 따르고 아꼈다. 

그런 은기와 죽도록 다퉜던 것은 단 한 번 뿐이었다. 막내 하세윤의 장례식 장에서 이성을 잃은 은기가 대들며 했던 말 때문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은기는 이미 자신보다 키가 컸다. 그는 형의 멱살을 잡고 그 추운 날, 밖에서 진기의 가면을 산산조각냈다. 

진기는 씁쓸하게 웃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귀담아 들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갈 만한 추억의 노래들이 연달아 나왔다. 

그는 공부에, 일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가차없이 잘라 냈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그러나 은기만은 달랐다. 

가족의 걱정거리였던 최약체 하세윤도 은기를 그토록 좋아했다. 몸이 아픈데다 집에만 있다보니 우울증까지 생겨 힘들어 했는데, 은기가 사준 카메라로 차츰 밝아졌다. 세윤은 형제들의 일상을 열심히 찍고 다녔다. 

어느 날 세윤이 공부하고 있는 진기의 방으로 들어와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다. 그가 종알대며 말을 붙였다. 

[형은 매일 공부만 해. 연애는 더 안 해? 은기 형은 자주 하는 것 같던데.]

얼마 전에도 귀찮게 하던 애인을 잘라낸 참이었다. 곧 기말고사였고, 진기는 알짱대는 세윤마저 귀찮았다. 

[시간 없다. 사진 찍고 빨리 가. 집중 안 돼.]

[…알았어. 조용히 찍고 갈게.]

시무룩해진 세윤이 몇 장 찍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줬더라면. 

동생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도 진기는 현실 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아끼던 동생이 죽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덤덤했다. 슬펐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에 반해 은기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거의 폐인이 되어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결국 진기가 그를 붙들고 머리를 식히라며 밖으로 끌어 나와야 했다. 

눈이 벌겋게 변한 은기는 괴로워하며 울부짖었다. 

[내가, 내가 카메라만 안 사줬어도…! 세윤이는 안 죽었어.]

진기는 은기가 날뛸수록 더욱 냉정해졌다. 

[꼴사납게 굴지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어. 그건 아무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야. 그냥 받아들이고 세윤이 편하게 해줘.] 

은기의 눈빛이 변한다 싶더니 그가 냉소를 지었다. 참기 힘든 고통을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되돌릴 기회를 찾은 짐승의 날 선 눈이었다. 

[그래서 형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살아? 사람들 기대 미치려고 아등바둥 모범생으로? 자신까지 버리면서? 좋아해 주는 사람들 다 버리면서까지?]

은기는 검은 옷을 입은 사자 같았다. 그는 가슴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갑자기 돌아온 반격은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깊은 곳까지 닿아 있었다. 평소에 은기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그러고 보면 그는 자신이 버렸던 사람들을 가끔 챙겨주곤 했다. 

진기는 변명하듯 작게 말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항상 그 말로 자신을 다독여 왔다. 부모님의 끝없는 기대, 친척 어른들의 넘치는 관심, 좋은 집안에서 공부까지 뛰어나게 잘하는 모범생 하진기는 집안의 자랑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 새 다 커버린 그의 동생은 위선을 꿰뚫어보고 날카롭게 비수를 꽂았다. 

[그렇게 희생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살면 누가 고마워해 줄 줄 알았어? 하나도 안 고마워. 오히려 기분 더럽다고.]

정곡을 찔렸다. 그래서 참을 수 없어 주먹이 먼저 날아갔다. 처음으로 동생을 때렸던 날이었다. 아니, 누군가를 때려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진기는 넘어진 은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말했지. 우리 중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라고. 네 말처럼 희생이라 생각한 적도 없고, 내 삶이니 최선을 다해 살 뿐이야. 주제 넘게 훈수 두지마.]

은기는 피 묻은 입술을 닦더니 벌떡 일어나 진기의 멱살을 다시 꽉 잡았다. 얼굴을 치려는 듯 제법 단단하게 여문 은기의 주먹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차마 때리지 못하고 그는 진기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은기는 낮게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 평생 그렇게 재수 없게 살아. 가족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고, 이성적인 말만 하고 살라고.]

그 후로 은기는 혼자만의 여행을 떠났다. 그 몇 년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은기는 다시 귀국해서는 제일 먼저 진기에게 찾아왔고, 그 날의 일을 사과했다. 

[그땐 내가 너무 심한 말 했던 것 같아. 사과할게.]

한층 어른스러워진 얼굴로 은기가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고생 꽤나 했는지 더 마르고, 그 사이 키도 더 컸다. 수염도 다 깎지 못한 몰골로 동생은 큼직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어찌 모든 게 이리도 쉬울까. 질투가 치밀었다. 추악한 감정이었다. 숨기려 해도 자꾸만 드러나서 화해를 한 이후로도 은기를 보지 않으려 할 때도 있었다. 자꾸만 그가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형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살아? 사람들 기대 미치려고 아등바둥 모범생으로? 자신까지 버리면서? 좋아해 주는 사람들 다 버리면서까지?]

진기도 이를 떨쳐 내보려고 노력을 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뿐. 새로 사귀는 인연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하면 진기의 냉정함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자신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윤수에게는 묘하게 정이 갔다. 자신의 손으로 구해냈다는 것 때문일까. 잠시 쉬러 나가던 찰나, 으슥한 법대 건물 쪽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남자가 남자를 덮치려고 하는 파렴치한 현장이었다. 

‘더러운 새끼들.’

두터운 법전으로 때려 눕힌 놈을 걷어 내고 나니 그 밑에서는 하얀 얼굴의 덩치 작은 남자애가 덜덜 떨고 있었다. 안색이 너무 백지장 같아서 몸에 이상이 있나 의심될 정도였다. 

솔직히 진기는 윤수를 처음 봤을 때, 때려눕힌 놈과 별 다를 바 없는 놈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진기는 윤수의 어두움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가 걸핏하면 상담을 하며 법적인 지식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직 법을 공부하던 학생의 신분이었고, 윤수의 끔찍한 일을 알아도 해결해 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인간적인 분노와 무력함마저 느꼈다. 

상담을 하는 윤수는 항상 하얀 목을 접고 겁먹은 거북이처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그 연약함과 자신만을 향해 매달리는 까만 눈빛에 거짓말처럼 두근거림을 느꼈다. 

남자를 좋아하는 놈이라는 걸 아는데도, 가끔 박혀 드는 강아지같은 눈빛을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캠퍼스에서 날이 화창하던 어느 날, 꽃잎이 윤수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하얀 손등에 떨어진 분홍 꽃잎이 수채화 같았다. 

제법 예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윤수가 먼저 가까이 다가왔다. 긴장한 것이 역력했고 벽이 막힌 곳인데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윤수의 심장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남자와 키스라.’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어색하게 닿은 입술이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오히려 이상했다. 섹스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윤수가 먼저 계약 연애를 제안했다. 진기도 윤수가 그다지 학업에 지장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승낙했다. 

[난 상관 없어. 대신 절대 남에게 들키면 안 돼. 끝내는 건 한 쪽이 질리면.]

사법고시 합격 뒤에도 갈증은 멎지 않았다. 그의 욕망은 더 높은 곳을 향하기만 했다. 

윤수는 점점 더 그에게 매달렸고, 급기야 처음의 약속을 깨고 삽입 섹스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진기는 알고 있었다. 그의 커져 가는 마음을. 

음악이 끝나가고, 책상을 두들기던 손길도 멎어 있었다. 

‘네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던 건지 알아.’

하지만 진기는 그의 용기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가 가진 어두운 무게를 바쁜 그가 감당할 수 없었다. 윤수만의 트라우마, 금기를 깬다면 진기는 더욱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몰랐다. 윤수와 진지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는 사회적으로 큰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진기는 그를 버렸다. 

하지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윤수가 계속 찾아오는 걸 알면서도 끊지도 못 했다. 여느 때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단호하게 관계를 끊어냈을 것이다. 

같은 남자와의 관계는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매우 위험했는데도. 

진기는 그때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은 달랐다. 죄책감으로는 설명이 안 됐다. 

뒤늦게야 진기는 윤수가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달랐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둘의 시간은 많이 비껴가 있었다. 다른 궤도로 흐르기 시작한 시간은 걷잡을 수 없었다. 

진기는 최연소 서울지검 발령이라는 타이틀을 달았고, 그 사이 만난 여자는 부장 판사의 딸이었다. 소개로 만났지만 오래 만난 사이처럼 편안했다. 그래서 결혼까지 결심했다. 

진기의 손에서 서류가 바스락댔다. 정신을 차린 그가 아래를 내려 보았다. 볼 것들이 많았다. 라디오에서는 어느덧 클로징 멘트가 흘러나왔다. 

-끝으로 ‘이별’을 주제로 한 노래를 들으며 끝맺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내일 또 만나요!

이별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진기는 서로 떨어질 줄 모르는 두 사람의 시선을 확인하고서야 그의 가슴을 옥죄는 무엇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후련해졌다. 그리고 안심이 되었다. 

잔뜩 화가 난 은기를 앞에 두고 윤수가 청첩장을 달라 독촉했다. 

[넌 가. 내가 알아서 할게.]

[이대로 괜찮겠어?]

[괜찮아. 그리고 청첩장 지금이라도 줘.]

윤수에게 내민 청첩장 위에는 그 날 캠퍼스의 꽃과 비슷한 것들이 박혀 있었다. 아내가 될 사람이 직접 제작한 것이었다. 

사랑한 방식은 달랐지만, 은기는 윤수에게 꼭 맞는 사랑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바로 행복을 일구어 낼 생각이었다. 

‘이것만 마무리 짓고 나면.’

진기의 손에 들린 서류 앞에는 ‘일해교 (사이비 종교) 사건 피해자’란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해당 문서 밑으로는 이리저리 멍이 든 사람 여럿이 있었다.

진기의 눈이 한 앳된 남자의 증명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다시 시작해 볼까.”

그가 따뜻한 커피를 가져온 뒤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아래에 놓인 앳된 남자 사진 옆에는 ‘피윤수’라는 이름과 나이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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