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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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한 편 더 올렸으니 혹 못 보신 분들은 전편을 보고 와주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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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빨리?”

저도 모르게 윤수는 큰 목소리를 냈고, 은기의 갈색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눈은 안 보여도 전반적으로 보이는 표정으로 그의 불쾌함을 알 수 있었다. 

“우리 관계, 말하기에 아직 일러 보여요? 그런 것 같으면 다음에 하고.”

“이르다는 문제가 아니라….”

혼란스러운 윤수와 달리 은기는 거침없이 짧은 생각 내에 정리한 것들을 읊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더라도 가족한테는 말해두고 싶어.”

허투루 뱉는 소리가 아니었다. 윤수가 대외적으로 보이는 일을 워낙 걱정하니, 내부 요인이라도 제거하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에서 꺼낸 제안이었다. 좀 전에 미래 계획을 쉽게 뱉은 것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생각이기도 했다. 

은기가 피식 웃더니 핸들을 쥐었다가 놓았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외계인을 데려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할테니까 괜찮을 테고.”

좀처럼 예측 불가능한 바람처럼 사는 아들을 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넓은 포용력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은기는 어릴 때부터 워낙 튀는 아이었다.

윤수가 이상한 듯 은기의 말을 되뇌었다.

“외계인?”

“오죽하면 ’사람 구실만 하는 배우자면 된다‘ 고까지 말했다니까.”

“너 망나니로 살진 않았다면서.”

“망나니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니까. 아무튼, 그래서, 어떡할 거에요? 소개 시켜줄 거야, 말거야?”

윤수는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하겠다는 은기의 으름장과 곧장 초읽기를 세며 내려가는 숫자에 당황했다. 

“자, 잠깐만.”

그가 어쩔 줄 몰라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댔다. 윤수의 목 뒤로, 등줄기로, 후끈대는 땀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은기와 어머니가 한 자리에 있다니. 상상만 해도 대혼란이다. TV에서나 나오던 연예인을 데려가면 어머니는 어떻게 반응할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윤수는 곰곰이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자 은기가 왜 이러는 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안심시키려 하는 것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도 있을 테다. 부모님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관계는 덜 불안할 테니까. 

’소개라….‘

한 번도 남자 애인을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소개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려웠다. 시도는 해볼 만하다. 

하지만 막상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버벅대는 윤수를, 은기는 가만히 보다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그의 반응은 대충 예상한 바였다. 

은기가 상체를 뻗어 윤수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입술을 떨어뜨리며 그는 낮게 속삭였다. 

“빨리 대답하라는 건 농담이고. 생각난 김에 한 말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요.”

혹시 은기가 오해할가봐 윤수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부담 되는 건 아냐. 갑자기 들은 거라….”

“어차피 일주일은 놀아야 하는 처지고, 시간 많아서 이럴 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물어봤어.”

윤수는 감탄한 듯 눈을 반짝였다. 

“넌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구나.”

“어떻게 생각을 안해? 다른 사람 일도 아니고.”

말하다 보니 은기는 불쑥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가 핸들에 얼굴을 기대곤 윤수 쪽을 보았다. 핸들과 얼굴 사이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선글라스의 딱딱한 테가 느껴져 그가 선글라스를 다시 벗으며 볼멘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 반만이라도 생각해 달라구요. 매번 나만 안달나서 이러는 것 같잖아. 자존심 버린 지 오랜데, 가끔은 인간적으로 좀 지켜줘.”

투덜대는 은기를 보며 윤수가 편안하게 웃었다. 그저 농담으로 한 말인지 아는 듯해 은기가 발끈했지만 입술에 닿는 촉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윤수가 글로브 박스를 한 손으로 잡고는 머리를 숙여 은기와 시선을 맞추더니 고개를 틀어 키스를 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은기에게는 아주 느릿한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까만 눈에 별을 박은 듯 총명한 눈빛이 가까이 다가오고, 확대되어 보이는 촉촉하고 단정한 입술이 휜다.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입술을 아주 부드럽고, 말랑했다. 남승우에게 맞은 부위로 비릿한 피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말캉한 입술이 몇 초 간 더 머물었고, 은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따뜻한 훈풍이 차 안을 훈훈하게 휘감았다. 

불편한 자세 때문인지 오래 하지는 못했지만 윤수가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은기는 붙들린 맹수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감았던 눈을 뜨자 다음에 들리는 윤수의 수줍은 고백에 그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난 이미 너랑 만난 순간부터 자존심 버렸어.”

윤수 딴에는 미안한 마음에 달래려고 한 것이었다.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고, 은기에게 받은 것들을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가 조금 더 용기 내어 은기의 던진 것을 유의미하게 되돌렸다.

“시간 내서 엄마한테 이야기 해볼게. 따로 날짜 잡아 보자.”

숨이 막힌 듯 한참 뜬 눈으로 있던 은기는 겨우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마간 핸들에서 얼굴을 차마 떼지 못했다. 

“하아….”

은기의 반응이 너무 없자 당황한 윤수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졌다.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고 은기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갔나.‘

한참 말이 없던 은기는 고개를 돌려 핸들 위로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이것 봐. 완전 여우라니까.”

그는 어쩌면 무서운 사람을 깨운 것일지도 모른다. 은기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무조건 좋으니까 날 잡으면 이야기 해줘요.”

그리고 나선 은기는 스르륵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들고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보았다. 

그가 다른 화제를 끄집어 냈다. 이대로라면 윤수를 붙들고 차 안에서 섹스를 할 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필사적이었다. 

’이건 고문이야….‘

계속 던지던 말과는 달리, 며칠간은 아픈 윤수를 쉬게 하고 싶었다. 

“오늘 며칠이지?”

그런데 처음의 느긋하던 태도와 달리 휴대폰 속 디지털 달력을 보던 그가 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보기 드물게 쩔쩔매는 모습으로 은기는 미안함을 상대방에게 전했다. 

“어, 난데. 미안하다.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 런칭 언제냐? 지금 가도 돼?”

“무슨 런칭?”

윤수가 입모양으로 작게 물었고, 은기는 통화를 하느라 눈만 까딱였다. 따가운 목소리가 윤수에게도 들려왔다. 통화 상대방이 큰 소리를 낸 통에 휴대폰을 멀찍이 떼어놓던 은기가 다시 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어, 어. 그래, 간다, 가. 성질 더러운 놈, 재촉하기는. 미안하다니까. 곧 가.”

그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윤수를 의식하고는 다시 휴대폰에 대고 물었다. 

“사람 하나 더 데려가도 되냐?”

여기서 은기가 다시 윤수를 흘끔 보았다. 갈색 눈이 고민하듯 몇 차례 굴렀다. 그러다 입장을 정한 그가 짧게 내뱉었다. 

“지인. 오케이.”

데려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본 모양이었다. ‘지인’ 라는 대답은 은기가 방금 전, 밖에선 조심하겠다는 사과를 바탕으로 한 것일테다. 

‘지인이라.’

그런데도 윤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은기도 항상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는 사람과 애인의 경계선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 그 어딘가에 애매하게 걸린 것 같았다. 

‘조심해 달라고 말한 건 나면서.’

참 이율배반적인 감정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면서도 불편한 덩어리가 먹먹하게 가슴 내에서 머물렀다. 

그때, 은기가 그를 툭툭 치더니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긍정적인 답변임을 보여 주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윤수가 궁금한 듯 물었다. 

“뭔데 그래?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딜 간다는 거야?”

“10시 밖에 안 됐는데 늦은 시각도 아니죠, 뭐. 작곡가 친구가 런칭 전에 꼭 날 부르거든. 내가 오케이 해야 꼭 대박 난다고 뮤즈니 어쩌니 하면서 불러대요.”

윤수는 생각지도 못한 은기의 취미에 놀랐다. 다방면으로 잘한다는 생각은 진작에 했지만, 음악까지 조예가 있을 줄은 몰랐다. 

“너 음악도 잘 들어?”

“좋은 리스너긴 하죠. 가끔 가사도 써주는데 망친 적은 없으니까.”

“가사도 써? 대단하다.”

겸손도, 으쓱댐도 아닌 무미건조한 대답을 던지며 은기가 다시 핸들을 쥐었다. 

“뭘. 아무튼 가는 거죠?”

“응. 가자.”

은기는 눈을 휘어 웃더니 손을 뻗어 윤수의 머리를 어린 아이 어르듯 자랑스러운 손길로 부볐다. 

“많이 용감해졌네. 낯선 사람 보는 거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윤수가 얼른 고개를 뒤로 빼 까치집으로 만들려는 은기의 손길을 피했다. 

“안 돼. 머리 망가져.”

허공에서 목표물을 잃고 붕 뜬 손이 불만스럽게 되돌아갔다.

“뭐야. 내 친구한테 잘 보이려고?”

“네 친구니까 잘 보여야지. 너 잘 봐달라는 의미로.”

말문이 막힌 은기가 피식 웃었다. 

“나랑 다녀서 그런가. 말 많이 늘었네.”

“덕분에.”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은기는 문득 윤수의 얼굴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바라보다 제 선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어쩌려고?”

“잠시만.”

은기는 윤수의 얼굴에서 안경을 빼내고 선글라스를 씌웠다. 대신 자신이 윤수의 안경을 꼈다. 윤수가 새카맣게 변한 시야로 간신히 보이는 은기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내 건 도수 안 맞아서 어지러울텐데.”

“이 정도는 괜찮아. 어지러우면 뺄게요.”

윤수가 테가 닿는 부분이 조금 쓰려서 손으로 문질렀다. 

“맞은 상처 보이는 거 싫어서 그래?”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티 내지 마요. 볼 때마다 열받아 미치겠으니까. 언젠가 남승우 그 자식은 꼭 손봐야겠어.”

이를 갈며 하는 소리에 윤수가 펄쩍 뛰었다. 

“괜찮다니까. 그 쪽은 이제 신경 쓰지도 마. 얽힐 일도 없을 텐데.”

은기는 분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안경을 써서인지 서구적이고 하얀 미형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 

“더 빨리 갔으면 됐는데, 아니면 아예 잡고 있으라 하지 말고 도망가라고 할 걸 싶다니까. 남 좋은 일만 시키고.”

“그래도 좋은 일 했잖아.”

윤수는 그 날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을 생각했다. 한 사람을 구했고, 자신마저 구했다. 은기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걸로 만족해요?”

“응.”

윤수의 까만 눈을 가만히 마주보던 은기가 딱 달라붙은 청바지 위를 손뼉치듯 양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럼 나도 됐어.”

하긴, 당한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그녀가 아니다. 남승우는 예나가 알아서 그녀의 방식으로 복수하고 자근자근 밟아줄 것이다. 

‘선배는 멘탈만 회복되면 곧장 행동 개시하겠지.’

당했던 것이 이상했을 정도로 예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윤수의 말대로 이제 그 쪽 일에는 신경을 끄기로 한 은기가 시동을 켰다. 

대리운전을 불러놓고 기다리고 있기로 했기에 잠시 시간이 남았다.

차창 쪽에 턱받이를 하고 비스듬하게 기댄 윤수가 작게 웃었다. 그가 자신의 말에 금방 수긍해 버린 것이 신기하고, 단순한 대답이 명쾌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은기가 튼 라디오에서 선곡된 노래가 흘러 나왔다. 흔한 유행가 류의 가사였지만 귀에 잘 들어와 윤수는 차 안에서 가사를 흥얼거렸다. 

-당신 앞에선 단순해져요. 갈수록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이런 내가 이상해도 받아줘요. 나도 이런 내가 낯설어. 부끄럽진 않아. 이런 나마저 사랑해주는 당신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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