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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기의 선언 --> 

차가운 맥주잔을 만지작대며 은기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예전에.”

“무슨 일이었는데?”

그는 말없이 안주로 나온 감자를 포크로 찍어 윤수의 입에 가까이 가져갔다. 동시에 다른 손은 무심하게 맥주를 들고 마신다. 

‘먹으라는 건가?’

다른 사람이 주목하기 전에 윤수는 얼른 눈 앞의 것을 집어 먹었다. 은기는 이번엔 다른 것을 찍어 그의 입에 들이밀었다. 새모이 주듯 한 손길에 다시 윤수가 눈을 굴리다 받아먹었다. 

밖에서는 거부하기 바쁜 그가 그나마 잘 받아 먹은 것은 무심해 보이는 은기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과일을 집어서 주는 것을 심란하게 보면서도 윤수는 긴가민가 했다. 

“그….”

그만 먹겠다고 하려고 해도 어김없이 날아오는 포크와 한 덩어리의 안주에 윤수는 고민이 되었다. 은기의 다른 손에는 계속 맥주잔이 들려 있었고, 그에게 안주를 주면서도 계속 맥주를 홀짝 댔다. 마치 주고 있다는 행위는 잊은 사람처럼, 손이 따로 움직였다. 

‘혹시 먹기 싫은 걸 주는 건가? 처리해 달라고?’ 

여러 번 하고 나자 그제야 은기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먹네.”

장난스러운 미소에 그제야 윤수는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목까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너, 또 말 돌린 거지.”

“처음엔 그랬는데, 너무 잘 받아먹어서 재미 들렸어.”

항의 실린 윤수의 눈초리가 점점 거세지자 은기는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더 놀리면 저 큰 눈에서 레이저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으므로. 

“아무튼…초기엔 알력 다툼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 자식이 도를 넘었어.”

입에 든 것을 굴리며 윤수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얼마나 많이 밀어 넣었는지 아직도 감자튀김이 절반 가량 남아 있었다. 

“큰 일이었나보네.”

“근데, 그 자식 이야기보다 난 다른 이야기가 더 하고 싶은데요.”

“어떤 이야기?”

은기가 씨익 웃으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몸으로 하는 대….”

미처 하지 못한 말은 벌떡 일어나 입을 막아 버린 윤수의 손 안에서 맴돌았다. 

“그만. 그만!”

미처 다 씹지 못한 감자 조각이 떨어졌다. 윤수는 휴지를 급히 집어 들어 테이블을 닦고 입가를 닦았다. 그 덕에 윤수의 손에서 풀려난 은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너무하네. 이젠 말도 못 하게 하고.”

윤수가 울상으로 소리 죽여 말했다. 

“밖에서 그런 소리 하면 어떡해.”

말하는 와중에도 입가에 갈색 점처럼 작은 감자 조각이 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은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입가에 묻은 것을 집어 주었고, 설상가상 뗀 것을 맛있게 먹었다. 

“제발….”

윤수는 다시 울상이 되었다. 그런 그를 달래며 은기가 넉살 좋게 웃었다. 

“여러 번 말하지만 우리 사이를 누가 그렇게 오해하는데? 농담이라고 생각한다니까.”

맥주를 급하게 들이키다 거품에 사레가 들린 윤수가 제 가슴을 퍽퍽 쳤다. 

“그래도 제발 조심하자. 나도 나지만 네가 더 큰 문제 생길 수 있잖아.”

은기는 모른 척 윤수 앞으로 물잔을 밀어주었다. 허겁지겁 앞에 놓인 냉수를 마시는 윤수를 은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바라보았다. 

“진짜 일 터지고 난리 나면 해외로 뜨죠, 뭐. 어차피 투자한 게 있어서 돈은 꾸준히 들어올 거고, 먹여 살리는데 아무 지장 없어.”

“누굴 먹여 살려? 나를?”

은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수는 입을 내밀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나도 벌 만큼은 벌어.”

“돈벌이 보고 뭐라는 게 아니라, 만일의 사태에 도 끄떡없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말하는 윤수를 은기가 귀엽다는 듯 보고는 기지개를 켰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윤수 말마따나 쓸데없는 관심이 쏠리고 있는 참이기도 했다. 

‘불과 하루 전에 그 난리를 쳐댔으니.’ 

은기가 있다는 소식이 퍼지기라도 한건지 안을 두리번대며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은기의 이름도 목소리에 간간이 섞여 들려 왔다. 

상황을 눈으로 스캔한 은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카드 지갑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또 당연한 소리 한다. 하은기 게이설 터지면 기자회견 열어서 예, 게이 맞습니다 하고 그냥 공식 인정 해버리고 당신이랑 같이 해외로 뜰 생각. 외국에 집도 있어.”

정말 이상한 것을 들었다는 듯 윤수가 멍하게 되물었다. 

“내 일은? 번역 사무소는 어쩌고?”

은기는 더 바짝 몸을 윤수 쪽으로 당기고 속삭였다. 가까이서 보니 보라색으로 변해가는 붉은 멍이 더 잘 보여서 속상했지만 겨우 감정을 눌렀다. 

“어차피 번역 일이라는 거, 메일로도 주고 받으면서 할 수 있는 거잖아. 면대면 필요한 건 화상 통화로 하던가. 기술 많이 좋아졌잖아요.”

황당한 얼굴로 앞으로 터질 일들을 듣던 윤수가 반문했다. 

“그럼 우리 엄마는?”

희희낙락 카드지갑을 집어 들던 은기는 움찔했다. 미처 생각 못한 변수였다. 사실 아직까지 그리 깊게 생각한 사안은 아니었다. 윤수의 조심스러운 성격상 수면 위로 드러날 일도 없어 보이고, 정말 드러나도 은기 본인은 큰 상관이 없었다. 

‘가족 문제…. 난 상관없지만.’

은기가 머리를 긁적이며 실토했다. 

“…그건 생각 못 했네. 같이 모시고 가도 상관없어요.”

윤수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양 옆으로 휘저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잘 알았다. 고집 세고, 있던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아 하는 분이다. 

“죽어도 한국 안 떠나실걸.”

은기가 얇은 가죽 지갑을 손으로 만지작대며 생각에 잠겼다. 본격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슬슬 깊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가 가슴팍에 걸린 선글라스 지지대를 손가락으로 초조한 듯 문질러 댔다. 

‘너무 빨리 말했나?’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옅은 수심이 이마 아래로 그늘 마냥 길게 걸려 있었다. 그가 손을 모아 쥐고 테이블 위로 얌전히 놓은 채 설득조로 말했다. 

“은기야. 그건 아닌 것 같아. 계획이 너무 우리 위주야. 가족들 안 보고 살 거 아니잖아.”

동그랗고 밀도 높은 까만 눈이 작게 깜박였다.

“내가 가족 형편이 썩 좋지 않지만,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가족 형편이 어떻게 썩 안 좋은 건지 묻고 싶었지만 은기는 다음으로 넘기기로 했다. 지금은 그가 슬픈 눈을 하는 것이 보기 싫었다. 

‘꼴 사납네. 입 함부로 놀리기나 하고.’

더불어 윤수가 새삼 연상이라는 것을 느낀 은기였다. 윤수의 시간은 그 사건 이후 더디게 흘러갔지만, 동시에 처절했다. 변하고 싶은 사람 특유의 발버둥이었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어떤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가족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일테고.’ 

은기는 손을 뻗어 윤수의 머리 위로 얹었다. 부드럽고 붉은 기운이 도는 머리칼이 부드럽게 은기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잔디처럼 짧게 휘감는다. 

윤수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보았다. 이대로 쥐고 당겨서 키스하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밀어내면서 은기가 밝게 말했다.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진 마요. 나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 이랬으면 좋겠다~ 정도였지.”

그는 손을 회수하고는 가슴에 꽂힌 윤수의 안경을 집어 돌려주었다. 진심으로 반성했다. 윤수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자신만의 제멋대로인 생각을 읊은 것이다. 안 그래도 과거에 겪은 일 때문에 겁이 많은 윤수다. 그가 두려워할 만한 상황은 만들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은기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디까지 한심해져야 더 이상 한심해지지 않을까. 그가 뒤로 등을 기대며 한 쪽 눈덩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중요한 미래 계획을 가볍게 말해 버렸네. 사과할게요. 밖에서 싫어하는 짓도 더 하지 않을게. 약속해.”

“싫진 않아. 네가 걱정되서 그런 거지.”

윤수가 작게 변명처럼 항의했다. 

“거기다 네 가족도 걸려 있잖아. 부모님은 괜찮아? 진기는? 특히 걘 검사라서 더 타격이 심할텐데.”

눈가를 문지르던 은기의 손이 멈칫했다. 윤수의 지적대로였다. 은기의 부모님이야 각각 대기업 상무, 전무 자리에서 물러난 지도 오래고, 현재는 한가로이 개인 투자자나 투자 설계사를 하며 살고 계신다. 하지만 진기는 경우가 다르다. 그는 대한민국의 검사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집단이기도 하다. 

은기의 암운이 끼는 얼굴을 보고 윤수도 아차 했다. 그리고 방금 전 ‘하진기 사태’를 떠올리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적이 길어지는 은기를 보니 다시 불안해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자책했다. 

‘바보 같이. 오늘만큼은 진기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이윽고 은기가 허리를 바로 세우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아무튼 커밍아웃은 보류할게요. 최대한 숨기는 쪽으로. 밖에서도 너무 티나는 행동은 안 하는 걸로.”

“…미안.”

“내 생각이 모자랐던 거니까 사과할 일 아냐.”

“그래도 나 때문에 네 계획이 다 어그러졌잖아.”

은기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카드 지갑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까딱대면서 그는 가볍게 웃었다. 고른 치열이 하얗게 드러나며 어두운 조명 사이에서도 반짝였다. 

“내 계획? 애초에 당신이 있어야 성립되는 계획인걸. 해외 에이전시로 몇 년 일 나가는 정도 아니면 해외로 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거고.”

윤수는 전에 매니저가 해외 에이전시 이야기 하던 것을 떠올렸다. 

“참, 그거 언제가? 해외 에이전시 말 나오던 거.”

넓은 등판이 도로 빙글 윤수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간다. 은기는 셔츠에 걸려 있는 선글라스를 빼서 꼈다. 그 덕에 그가 찌푸린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윤수는 알지 못했다. 

“꼭 안 가도 돼. 매니저 형이 밀고 있는 거라서. 전에 대표했던 것 때문인지 아예 내 스케줄까지 자기 멋대로 잡아버린다니까. 소속사에 항의해 버릴테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은기가 매니저와 유대감이 깊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계산대 쪽으로 가려는 은기를 윤수가 얼른 붙들었다. 

“가면 어느 쪽으로 알아보고 있는 거야?”

“안 간다니까. 관심 끄고, 술 다 마셨으면 일어나요.”

“어디 가게?”

“어디 가긴. 집에 가야지. 안 갈거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은기가 능청맞게 말했다. 

“아니면 그 택시 부를까요?”

윤수의 얼굴이 말없이 벌겋게 익었다. 

“다음에.”

“마음의 준비가 된 다음에?”

“놀리지 마.”

키득거리던 은기가 계산을 하러 떠나고, 그 사이 윤수에게 한 통의 메시지와 전화가 왔다. 휴대폰 화면에 떠오르는 발신자를 보자 윤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진동이 받으라는 듯 계속 울렸지만 결국 전화는 받지 않았고, 메시지만 확인한 윤수가 한숨을 내쉰다.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돌아온 은기는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무슨 일 있어?”

“엄마 전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안그래도 윤수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은기가 놀라움을 감추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잡지에서 본 게 진짠가.’

학계에서 연구한 바에 의하면,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아주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뇌파가 불안정해진다고 했다. 잡지에서 읽은 것을 떠올리며 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뉴스로 나갔을 테니까 보셨으면 걱정하시겠죠. 근데 왜 안 받고 끊어?”

이야기 하는 사이 다시 전화가 왔지만 윤수는 받지 않고 휴대폰 화면을 뒤로 돌려 버렸다. 은기가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그는 멋쩍게 아픈 얼굴을 살살 문질렀다. 

“너무 과하게 걱정하시니까. 메시지만 한 통 넣어드리고 조금 있다가 전화하려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은기는 우두커니 서서 턱을 매만졌다. 수염이 없는 매끈한 턱에 아주 조금, 갈색에 가까운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로 가는 내내 그는 침묵했다. 이번엔 어떤 종류의 침묵일까. 윤수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핸들을 잡은 은기가 다른 손으로 선글라스를 치켜 올리곤 윤수를 돌아보았다. 살집 없는 날렵한 턱 사이로 자리 잡은 붉고 적당히 살이 오른 도톰한 입술이 매혹적으로 동선을 그렸다. 

“혹시 어머니, 당신 성향 알아? 남자 좋아하는 거?”

윤수는 번개를 맞은 듯 크게 움찔했다. 그의 어머니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진기와의 관계를 알만큼, 그의 애인도 일부 알았다. 

그녀는 사건 이후, 아들의 동성 연애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윤수는 그녀가 몹시 짠했다. 어머니가 ‘같은 성별의 사람을 사랑하는 자녀를 둔 어버이 모임‘ 에도 꾸준히 나간다는 것도 알았다. 쉬운 결정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 죄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심호흡을 한 윤수가 온도차 때문에 뿌옇게 김이 서린 안경을 빼내어 소매로 닦아냈다. 

“…알고 계셔. 그건 왜?”

“그럼 나 정식으로 어머니한테 소개 시켜줘요.”

“…….”

말문이 막힌 윤수는 물끄러미 그와 마주보았다. 까만 알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모를 은기가 흐리게 보였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아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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