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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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선언을 한 은기가 밖을 흘끗 보더니 턱짓했다. 

“답답한데, 잠깐 나갈까요?”

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윤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유동 인구가 적은 곳이었고, 은기는 건물 사이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재차 확인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환풍기만 시끄럽게 돌아갔다. 

은기가 멀찍이 떨어진 윤수를 손짓으로 불렀다.

“이리 와요.”

쭈뼛대던 윤수가 겁먹은 짐승처럼 천천히 다가가자 확 안아버린다. 윤수는 대번에 어깨까지 움찔대며 눈을 굴렸다.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잡고 은기는 그의 정수리 위로 제 턱을 올려놓았다. 

“움츠리지도 말고, 어깨 펴. 나한테 거짓말한 건 잘못했지만 죽을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미안해.”

품 안에서 또 사과하는 윤수를 은기가 못마땅하게 보더니 곧 좋은 향이 나는 정수리 위를 촉, 촉, 소리나도록 키스했다. 그리곤 팔을 풀고 윤수의 얼굴을 양 손으로 잡아 올렸다. 

혈색이 좋지 않고 눈빛은 젖어 흐리다. 은기가 손가락으로 안경 너머 그의 선명한 까만 눈가를 어루만졌다. 걸리적거리는 안경테가 손에 틱틱 걸린다. 보고 있는 그의 속만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얼굴이 이게 뭐야. 다 죽어가네.”

화가 눈 녹듯 풀려버린 은기를 보니 왠지 윤수는 울컥했다. 충분히 더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 따사로움에 기댈 수 있을까.‘

지치다 떠나면 어떡하지. 불안은 가시질 않는다. 윤수가 걱정스러운 은기의 얼굴을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이해해줘서.”

“미안하다는 소리보다는 한결 낫네.”

눈을 마주치고 있던 은기가 피식 웃었다. 윤수는 그 웃음소리마저 소중하고, 다시 피워주는 그 미소가 고마웠다. 

상처 받고 화를 내는 은기는 보고 싶지 않다. 은기에게 미움받는 건 더 참을 수 없었다. 부족함 많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이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게 뭐든, 은기의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고 싶고 그가 좋아할 만한 것만 하고 싶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는 지금, 은기처럼 거리낌 없어야 할텐데. 

윤수는 아래로 눈을 내려 깔고 토해내듯 말했다. 

“너한테 미움받는 거, 진짜 못 할 짓이다.”

“내가 화내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요?”

“무섭진 않았어.”

생각하던 윤수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시멘트 바닥이 크게 흔들린다. 

“아니, 무서웠어. 지겨워서 그만보자고 할까봐.”

그는 정말 두려운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은기가 다리처럼 놓아준 따뜻한 세계가 순식간에 얼어붙고, 그 속에 자신만 홀로 떨어진 것 같았다. 혼자 맞던 쓸쓸한 바람은 잠시 은기로 인해 훈풍으로 변했다가, 그가 사라지자 다시 칼바람이 되어 날카로이 쏟아졌다. 견디기 힘든 변화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너무 힘들었어.“

진기와 자신을 번갈아 보며 일그러지는 은기를 봤을 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를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윤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 얼굴을 감싸쥐고 조용한 시선을 보내오는 은기가 너무 좋다. 그런 만큼….

“나 미워하지마.”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감각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웅얼대는 윤수를 가만히 보던 은기가 얼굴을 끌어올려 키스했다. 아니, 하려 했다. 그는 윤수의 투명한 안경에 높은 콧대가 부딪쳐 눈살을 찌푸렸다. 

“…거슬려.”

윤수가 나지막이 웃었다. 간질간질한 숨결이 안경알을 따습게 데운다. 

“네가 사준 거잖아.”

“아예 안과로 데려가서 시술로 할 걸 그랬나.”

부딪치는 안경이 거슬리는 듯 손으로 빼낸 은기는 목 부근에 걸어둔 선글라스 옆에 나란히 윤수의 안경도 걸어두었다. 그가 파투난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연신 투덜댔다. 

“할 때마다 방해 돼.”

윤수는 나란히 은기의 셔츠에 걸린 선글라스와 자신의 안경을 번갈아 보았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걸린 듯 자연스러웠다. 

“다음에 렌즈 맞출게.”

“좋은 병원 알아볼테니까 시술 해요. 그게 나을 건데.”

“그건 생각해 보고.”

잘게 떨리던 것이 멎을 때, 은기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고 말랑하고 뜨거운 혀가 열어달라는 듯 그의 입술을 두들겼다. 

입을 열자 거칠게 꽉 채우는 질량감에 윤수는 본능적으로 두 팔을 은기의 목에 감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혀가 뜨겁고 작은 동굴 속에서 뒹군다. 

키 차이 때문에 윤수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를 눈치챈 은기가 더욱 깊이 혀를 밀어 넣더니 손을 내려 엉덩이를 받쳤다. 손가락이 청바지 위를 훑다가 구멍 쪽을 배회하며 쿡쿡 찌르는 것에 윤수가 작게 입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으응….” 

그러자 은기는 못 참겠다는 듯 그를 벽으로 더욱 몰아붙였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윤수의 등이 붉고 녹슨 벽돌벽에 닿자 은기는 자세를 바꿔 자신이 벽 쪽에 섰다. 

길게 머물던 키스를 끝낸 그가 윤수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를 품에 안은 채 은기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하고 싶다.”

“여기서?”

“바로 집으로 갈 걸 그랬어.”

불만스럽게 투덜댄 은기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해? 미치지 않고서야.”

살랑대는 숨결이 이마 위로 닿아 간지러웠다. 윤수가 작게 웃었지만 상처 난 얼굴 부위를 보는 은기의 시선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 보니까 화도 못 내겠더라고요. 멍 투성이에 여기저기 찢어지고 난리도 아닌데. 거기 대고 어떻게 화 내. 보기만 해도 힘들어.”

“금방 나을 거야. 이래뵈도 회복 속도는 꽤 빨라.”

은기의 걱정을 덜려는 그의 노력은 콧바람에 가벼이 날아갔다. 

“뻥 치시네. 그냥 봐도 면역력 제로, 회복력은 마이너스인데.”

“점수 너무 짜.”

윤수가 항의했지만 그는 정정하지 않았다. 작은 실랑이와 투닥거림이 오가고, 윤수는 내려놓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넌 참 어른스러워. 나보다 어린 주제에.”

“그래서 화 나?”

피식 웃은 은기가 담배를 물고 그에게도 권했다. 불을 건네받은 윤수가 제 것에도 붙이며 연기를 뿜었다. 스멀스멀 폐로 스며드는 것이 따뜻하다. 그가 작게 타오르는 불빛을 보며 끄덕였다. 

“조금. 내가 감수해야 할 것까지 끌어안고 가는 것 같아서 싫다.”

“난 더 기대줬으면 좋겠는데. 이걸론 어림도 없어요.”

언젠가 그에게도 한계가 올지도 모른다. 일방적인 쏠림은 모두에게 좋지 않다. 윤수가 걱정되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그는 진심을 담아 은기에게 청했다. 끝을 빨자 달아오르는 불이 조금씩 입술로 가까워진다. 

“너도 나한테 기대줘. 나만 그러는 건 억울해.”

“혼자서도 잘 살아와서. 나보단 당신이 걱정이야. 그런 일 겪고도 잘 살아오긴 했지만.”

“괜찮아. 그건 내 몫이니까.”

“알아. 근데 신경 쓰이는걸.”

과거의 일로 더 이상 은기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을 알고 나자 그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쓰려 하고 있다.

윤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내 건 내가 알아서 해.”

예전에도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쳤고, 은기를 만난 계기도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한 대가였다. 윤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했는지 은기는 서운한 듯 말했다. 

“너무 남처럼 구분하지 마요. 섭섭해 지잖아.”

“섭섭할 일이 아니라….” 

그때 은기가 벽에 기대 서서 윤수를 당겼다. 그리곤 물고 있는 담배에 제 것을 가까이 가져갔다. 붉게 타오르던 담배 끝이 서로 맞닿는다. 

동시에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윤수의 셔츠를 끌어 올리고 가슴을 더듬댔다. 

갑자기 가슴으로 닥친 한기에 윤수가 깜짝 놀라 걸음을 뒤로 떼려 했지만 은기가 뒷머리를 잡아 당겨서 불가능했다. 

”읏!“

솟아오른 가슴 돌기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더욱 단단하게 굳어 은기의 손가락 아래 희롱당했다. 발갛게 달아올라 양 옆으로 빠르게 옮겨붙던 불길이 재로 화하고 잿덩어리가 되어 당으로 툭 떨어진다. 윤수가 헐떡대다 담배를 꽉 문 잇새로 겨우 말했다. 

”그만….“

연결된 부분이 회색 이음매가 되어 사라지자 은기는 아쉬운 듯 고개를 뒤로 빼어 연기를 뱉었다. 

“이것도 키스하는 기분이네. 영화에서 보고 해봐야지 생각했는데.”

“뭘 봤는데?”

“몰라. 기억 안 나요. 본 게 너무 많아서.”

“다음에 나랑 같이 보자. ”

“오늘 봐도 돼요. 시간 많아.”

“일주일 정도 쉰댔나?”

“스케줄 다 취소되서 강제 휴식이긴 하지만. 이럴 때 놀아야지 언제 놀아요.”

은기가 불쑥 장난스럽게 제안했다. 

“우리 오늘은 둘 다 죽자고 마셔볼까요? 기분도 별론데.”

“나 내일 복귀야.”

정색하는 윤수를 은기가 아쉬운 듯 바라본다. 

“연차 하루 더 내. 어차피 급한 것도 없다면서. 상관없잖아요.”

“그, 그래도….”

윤수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은기의 말없는 시선에 몹시 약해졌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알았어.”

대답해 놓고 나니 은기가 슬쩍 말을 돌린 것을 깨달은 윤수였다. 그가 수완 좋게 넘어간 화제를 다시 끄집어 내며 은기를 노려보았다. 

“아무튼 내 일은 알아서 할테니까 더 이상 신경쓰지마. 섭섭하라고 한 말은 아니니까 오해 말고.”

“알았어요, 알았어.”

정말 알아들은 건지 대답만 하는 건지 모를 모호한 대꾸가 돌아오고, 윤수는 은기의 큰 손에 떠밀려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술이 넘치게 들어가다보니 은기와의 첫술자리가 생각나고, 윤수의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그 날, 은기가 취한 그를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던진 말 뒤의 상황이었다. 

[가요. 섹스하러.] 

호텔로 가면서 차로 이동한 것까지는 기억났다. 앞좌석과 뒷좌석이 구분되고 벽이 쳐진 특이한 택시였다. 그때 은기가 거의 반쯤 정신을 잃은 윤수에게 재차 물었다.

[정말 나랑 자 볼 생각 있는 거 맞아?]

[뭐어, 왜?]

은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먼저 유혹해 놓고 발 빼네.]

차시트에 머리를 대고 누워 숨만 색색 내쉬는 그를 은기가 옆에서 가만히 보았다. 

[당신이 궁금해.]

[뭐어가?]

뭐라 웅얼대는 윤수를 귀여운 듯 바라보며 은기가 피식 웃었다. 

[궁금한데 이유가 필요한가.]

번개같이 스친 기억에 윤수가 술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 차 대체 뭐였어?”

“무슨 차?”

“너랑 처음에 만나고 호텔까지 타고 갔던 차. 앞자리랑 뒷좌석 사이 완전히 막아놓은 이상한 택시.”

“아아, 그거.”

딴청 피우듯 다른 곳을 보던 은기가 빤히 쳐다보는 윤수의 시선을 못 이기고 실토했다. 

“아는 형이 운영하는 업첸데, 연예인들이나 유명인 대상으로 운영하는 특별한 택시에요. 방음 장치도 되어 있고, 비밀 유지도 돼.”

“써본 거, 그때가 처음이었어?”

윤수가 커다랗고 까만 눈을 굴리며 물었다. 새삼 떠올리지만 그는 인기 많은 연예인이다. 잘생긴 탑모델이 다른 사람과 밀폐된 곳에서 정신없이 서로를 더듬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어떤 멋진, 혹은 예쁜 사람과 함께 그 차를 타고 누군가의 눈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 그런 괴로운 상상에 윤수는 숨이 막혔다. 

지나간 인연은 서로 묻지 않기로 했지만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상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은기는 어두워지는 윤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처음…은 아니고.”

역시. 암울한 먹구름이 번져가는 윤수의 변화 무쌍한 표정에 은기가 기어코 웃었다. 

“혼자 촬영 끝나고 집에 갈 때 시범차 타봤어요. 누구랑 같이 타본 적은 없었어. 못 믿겠으면 업체 운영하는 그 형한테 확인시켜 줘요?”

이런 일로 거짓말하지 않는 은기를 잘 알기에 윤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기가 순간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나도 그 술자리만 생각하면 좀 그래.”

“뭐가?”

“그 날 당신이 여태껏 사귄 놈들 이야기만 내가 몇 개나 들었는지 알아요? 우리 형은 그렇다고 쳐도, 학교까지 쫓아와서 행패 부렸다는 놈 이야기도 그렇고.”

은기가 테이블로 맥주잔을 소리내어 내려놓았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기에 윤수는 술기운을 머금고도 휙휙 주변을 살폈다. 

“구차해 지기 싫으니까 말 안하고 있는 것 뿐이지. 나도 당신을 지나쳤던 사람들 생각하면서 열받는 거 삭힐 때 많아.”

혼자만 좀생이가 되는 것 같아 차마 말 못하고 있던 것을 놀랍게도 은기도 언급한다. 윤수는 신기한 마음 반, 통한 것이 기분 좋은 마음 반으로 맥주를 홀짝댔다. 

“그런 생각하는 지 전혀 몰랐어.”

“당연히 몰라야죠.”

분명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은기는 제 입으로 말했다. 꼬냑 향이 가득한 뜨거운 밤을 보냈던 그 곳에서,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아, 섬세한 성격이었지. 과거지사 다 알아야 하고 궁금하고 뭐 그런 건가. 그건 좀 피곤한데.]

은기가 이마를 짚으며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피곤한 인간 되게 생겼는데 어떻게 말해. 쪽팔리게.”

윤수는 맥주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물었다. 외국 맥주에 도수가 센 것이라 술기운이 세게 오르는 지 머리가 핑핑 돈다. 

“방금 못 들었어. 뭐라고 한 거야?”

“아무것도 아냐.”

얼버무리는 은기를 수상하게 보던 윤수가 궁금하던 것을 끄집어 내었다. 

“근데 남승우라는 그 사람한테 했던 말, 뭐였어?”

분명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꽤 잘. 윤수는 당시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남승우를 패대기 치던 은기가 새삼 떠올랐다. 그토록 이성을 잃은 모습은 처음 봤다. 

‘날 걱정했으니까 그랬겠지만.’ 

다시는 그런 은기를 보고 싶지 않다. 싫거나 무서운 게 아니라, 그가 기쁘고 행복해하는 모습만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경고했지. 누구 밑에서 따까리 짓 하든 내 눈에 밟히는 짓만 하지 말라고.]

[아아, 네가 건드린 게 누군지 몰랐겠지. 모르는 것도 죄니까 똑똑해지라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후배 새끼야. 기억 안나?]

차가운 맥주잔을 만지작대며 은기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예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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