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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해가 가네. 반응 이상했던 거.”
하얗게 질린 윤수는 차마 입도 열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 끼었다. 은기가 행동력이 좋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말 바로 올 줄은 몰랐다.
무릎에 올린 양 손을 주먹 쥐면서도 윤수는 은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떡하지….‘
놀란 듯 하던 진기는 천천히 자신의 동생과 윤수를 번갈아 보았다.
“흐음.”
그가 상황 파악을 끝낸 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미 벌어진 일, 수습이 더 중요하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유심히 보던 은기가 테이블에 놓인 냉수를 털어놓고는 살벌하게 말했다.
“이래서 오는 거 꺼린건가.”
윤수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가만히 있던 진기도 슬쩍 거들었다.
“설명할테니 섣부른 판단 하지마라.”
새로 착석한 사람인 은기에게 세팅을 해주러 다가오던 종업원이 흉흉한 분위기에 그대로 내빼었다. 은기가 도망가는 종업원을 흘끗 보더니 기분나쁜 듯 뱉었다.
“무슨 설명?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그는 도통 풀릴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진기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한걸.‘
윤수가 이번 일에 대해 은기에게 말하지 말아달라던 부탁이 있어 더욱 그랬다.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풀 길이 없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윤수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사정을 쥐어 짰다. 이것 또한 거짓은 아니었다.
“청첩장 받으러 만난 거야.”
은기가 냉정하게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청첩장? 그런 멍청한 약속 진짜 지키러 왔을 줄은 몰랐네요.”
“친구끼린 그럴 수 있잖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자신이 없다. 나름대로 담담하게 사정 설명을 했지만 은기의 불신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가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래. 친구였지. 섹스 빼고 다 한 친구. 끝나고도 못 잊어서 계속 기다렸던 친구.”
“하은기!”
참다 못한 진기가 엄한 얼굴로 은기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은기는 그를 무시하고 벌떡 일어났다.
“갈게요. 괜한 자리 낀 것 같은데.”
놀란 윤수도 함께 일어나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어디가?”
“그걸 알아서 뭐할건데.”
절박한 손짓이 은기를 끌어당긴다.
“오늘은 우리 집에 같이 있기로 했잖아.”
배신과 상처로 얼룩진 갈색 눈이 윤수를 향해 번들거렸다. 이런 지경에서도 은기는 그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계속 자신을 통제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당신 집으로 갈까? 나 지금 돌아버릴 것 같은데. 무슨 짓 할 줄 알고.”
이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것은 역시 진기였다. 그는 차분하고도 위압적으로 동생을 을렀다.
“여기 와서 앉아. 멋대로 추측해서 뱉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해.”
하지만 은기의 조소는 멎지 않았다. 진기의 타이름도 소용 없었다.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명령은 청에서나 해. 내가 형네 사무관도 아니고.”
최대한 억누르려던 분노가 배신감이라는 연료를 맞아 더욱 타올랐다. 은기는 활활 검은 연기를 내뿜는 마음을 가감없이 내보였다.
“방금 무슨 이야기 하고 온 줄 알아?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으스대면서 잘난 척 했어.”
그가 말하면서 으스러지도록 휴대폰을 꽉 쥐었다. 전화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는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은기의 눈에 다시 불이 붙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아. 내가 질투로 미칠 수 있는 인간인 건 몰랐거든.”
그가 테이블에 놓인 선글라스를 꼈다. 밖이 어둡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추한 질투가 새겨졌을 눈을 보이기 싫었다.
“더한 꼴 보여 주기 전에 내가 사라질게요.”
정말 몸을 휙 돌려 가버리려는 그를 윤수가 다시 잡았다.
“잠깐만. 화난 거 아는데, 잠시만!”
까만 광택이 나는 알 너머 가려진 은기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알면 보내주죠? 이게 내 최대치 절제니까.”
이대로 가버리면 안 될 것 같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에 윤수는 필사적으로 은기의 팔을 붙들었다. 오해한 채로 보내버리면 되돌리기 힘들 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은 절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가지마.”
이 와중에 은기도 그를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지만 차마 다칠까봐 크게 떨쳐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기가 막힌 은기였다.
’젠장…. 전애인이나 만나는 사람이 뭐가 예쁘다고.‘
이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진기가 낑낑대는 윤수를 안쓰럽게 보았다. 결국 그가 일어서더니 은기가 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윤수의 팔을 잡았다.
윤수를 잡자마자 빤히 보는 은기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는 게 느껴져 얼른 놓아야 했지만 말이다. 육식 동물처럼 사나운 살기로 윤수를 건드리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가 곧장 날아왔던 것이다.
그는 동생인 하은기가 이리도 감정적인 생물인지 미처 몰랐다.
’완전히 빠져있군.‘
진기가 눈에 띄게 큰 한숨을 내쉬더니 턱짓으로 윤수를 가리켰다.
“너 윤수 얼굴은 보고 있어? 저게 안 보여?”
은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윤수를 제대로 보았다. 마르고 작은 체격의 그가 울상으로 전력을 다해 자신의 팔을 끌어 당기고 있었다.
곧 울 것 같은 하얀 얼굴이 두려움을 감추고 억지로 없는 용기를 쥐어짜고 있다. 까맣고 큰 눈이 떨리고 있었다.
은기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지금 우리 뭐하고 있는 거야….‘
윤수가 이야기했던 충격적인 과거도 패키지처럼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 이야기를 듣던 당시 은기는 단단히 각오했다. 다시는 윤수에게 끔찍한 경험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새겨진 그의 얼룩을 함께 지워나가기로 말이다.
’그랬는데, 이게 뭐냐고.‘
가출했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온다. 힘이 들어갔던 은기의 팔에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들끓던 배신감도 머리를 차갑게 식히기 시작하자 조금은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느낀 윤수도 한결 나아진 얼굴로 은기를 올려보았다. 그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윤수에게 말했다.
“…알았어요. 안갈테니까 놔요.”
얼마나 간절하게 잡았는지 윤수가 잡은 곳이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은기가 기가 막힌 듯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힘 침대에서 발휘해주면 얼마나 좋아.”
팔을 주무르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뒤따르던 윤수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워낙 한적한 곳이기도 했고 직원들 조차 이런 판에 끼기 싫은지 멀찍이 서 있어서 이런 희극을 만천하에 보이지는 않았다.
상황이 얼추 정리된 것 같자 윤수는 식은땀이 맺힌 얼굴로 진기에게 권했다.
“넌 가. 내가 알아서 할게.”
진기가 여전히 선글라스를 빼지 않고 있는 은기를 흘끔 보았다. 그리곤 그가 없는 사람인 양 윤수와 대화했다.
“이대로 괜찮겠어?”
“괜찮아. 그리고 청첩장 지금이라도 줘.”
진기가 마지못해 서류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내 윤수에게 내밀었다. 윤수는 꽃이 박힌 청첩장 마치 그 날의 꽃 같았다. 캠퍼스 안에서 비처럼 쏟아지던 꽃잎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 꽃잎들은 아스라이 멀어졌다. 하얀 봉투 위에 박혀, 영원히.
속을 열어 보니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인상 좋아보이는 단아한 여성이 눈부신 백색 드레스를 입은 채 턱시도를 입은 진기와 팔짱을 끼고 있다. 아주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다.
윤수는 망설임 없이 봉투를 닫았다. 이미 흘려 버린 미련과 그로 인해 빛날 수 있었던 과거의 연도 닫힌 봉투 속에 고이 접어 넣었다.
“…….”
은기가 안 보는 척 하면서도 윤수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슬퍼하지는 않을까, 아직 진기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경계하는 듯 했다.
’걱정마.‘
윤수는 은기에게 속으로 작게 화답했다. 이제 안다. 누구보다 세심하게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 주는 다정한 연인이 있다는 것을.
설령 자신이 상처 받고 화가 나도 그런 마음을 눌러가면서까지 상대를 지키려 하는 것이 하은기다.
힘든 시간을 건너 드디어 사랑하게 된 사람이다.
윤수가 최선을 다해 진기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결혼, 다시 한 번 축하해. 꼭 갈게.”
할 일은 모두 끝냈고, 진기는 떠나야 할 때를 알았다. 후련해 보이는 윤수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가 피식 웃는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진기가 걸어가면서 윤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격려하듯 토닥인 손길이 금방 멀어지고, 걱정스러운 듯 진기는 몇 번이나 은기와 윤수가 함께 있는 테이블 쪽을 흘끔댔다.
“…….”
“…….”
폭풍같던 시간이 지나갔다. 둘만 남은 테이블에 진한 침묵이 흘렀다. 지옥보다 더한 침묵이었다.
윤수는 둘 사이에 넘지 못할 긴 강이 놓인 것 같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고민했다. 분명 오해할 여지를 준 것인 윤수 본인이었다. 사과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은기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무겁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며 움직인 것이다.
“청첩장 주러 따로 만난 건, 뭐 그렇다고 쳐. 이해할 수 있어.”
그가 테이블 위로 선글라스를 다시 내려 두었다. 날이 서 있던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활화산처럼 자리잡았던 분노는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식을대로 식어 있었다.
“내 상식선에선 아직도 이해가 안가지만 헤어지기 전에 그런 약속을 했다고 하니까.”
속상한 것을 담배로 달래려 꺼내들던 은기는 금연 표식을 보고는 흠칫 다시 집어넣었다. 덕분에 속만 더 답답해졌다.
“근데 왜 거짓말 했어요?”
죄인의 심정으로 윤수는 고개를 숙여 은기의 눈길을 피했다. 갈색 테이블의 나무 물결 모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가 작게 말했다.
“…네가 싫어하는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말해.”
“물론 싫어할 수 있지. 그래도 보내줬을 거에요. 좀 화는 났겠지만 어떻게든 가라앉혔을 거야. 나도 인간이니까.”
윤수는 할 말이 없었다. 은기의 말이 다 맞다. 차라리 처음부터 청첩장 때문에 만났다고 했더라면 이 지경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발력 부족이었다. 염치 없는 고개가 더더욱 밑으로 수그러 들었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쪼그라드는 목소리는 펴질 생각을 않는다. 은기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튕겨 딱딱,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이끌리듯 윤수가 고개를 들었다.
거의 평소처럼 돌아온 은기가 손을 뻗어 윤수의 짓물러 벌겋게 된 눈가를 매만졌다.
’조금 화냈다고 이렇게 되다니.‘
이제 화날 일이 있어도 화도 제대로 못 내게 생겼다. 괜히 그의 마음만 쿡쿡 아프게 찔려 왔다.
은기는 다정하게, 하지만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얼굴로 물었다.
“형 더 만날 일 없는 거죠?”
참고인으로 검찰에 소환된다면 진기를 볼 일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할 수는 없었다. 윤수가 입을 다물었다가 머뭇댐을 버리고 말했다. 눈가를 만지는 손길이 부드럽고 기분 좋아 눈을 감을 뻔 했다.
“없어.”
눈가를 더듬던 긴 손가락이 이제 옆으로 이동한다. 솜털처럼 난 머리칼이 내려와 있는 관자놀이 부근을 은기가 손바닥으로 넓게 덮었다.
그는 담담하게 격랑이 일던 자신의 감정을 윤수에게 설명했다.
“나도 화내서 미안해요. 근데 진짜, 보는 순간 머리에 피가 거꾸로 흘렀어. 거짓말까지 하고 형을 만났어야 했나 싶어서.”
윤수의 시선이 흔들렸다. 상처 받은 듯한 은기의 눈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도 빛나는 사람이 마음 아파 해야 한단 말인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떨굴 수 없도록 은근히 얼굴에 힘을 가하고 있는 은기의 손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고개 숙이지도 못하게 한다.
“…정말 미안.”
익숙한 사과에 은기의 눈이 불만스럽게 조여들었다.
“그 미안하다는 소리 싫다니까. 기 죽은 모습 보려고 만나는 것도 아니고.”
투덜대던 은기가 결국 항복 선언을 했다. 윤수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내가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