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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니꼬운 얼굴로 은기를 노려보았다. 윤수에 한해 공손하던 태도는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웃기네, 하은기. 어디서 선배한테. 그리고, 내가 너한테 물었니? 이 분한테 물었지.”
“이 분한테 묻는 게 곧 나한테 묻는 거라서. 됐죠?”
“유치하게 왜 그러니? 너 좀 변했다?”
잘 아는 사이인 듯 예나도 은기를 편하게 대했다. 은기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예나를 손짓으로 배웅했다.
“네, 변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시죠. 가서 쉬세요, 선배님. 오늘 큰 일도 겪을 뻔 했는데.”
“그래. 그것 때문에 보답하려고 하는 거잖아. 연락처 정도 받을 권리는 있지 않니?”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지켜보던 윤수가 나서서 말렸다.
“보답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는걸요. 괜찮습니다.”
“병원비라도 부담하고 싶어요. 그건 좀 하게 해줘요. 도의적인 차원에서라도.”
괜찮다고 하려던 것은 은기의 철벽방어로 수그러졌다.
“병원비는 ’도의적인 차원에서‘ 내가 댑니다, 선.배.님.”
“너한테 안 물었어. 제가 꼭 낼게요, 윤수 씨.”
역시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윤수가 피식 웃고, 듣고 있던 은기는 불만스럽게 팔짱을 꼈다.
“언제 봤다고 윤수 씨야?”
예나가 그를 노려보고, 다시 2차 대전이 발발하려 할 때 윤수가 끼어들었다. 이 두 사람, 내버려 두면 새벽까지 이럴 기세다.
“그것보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자상하게 물어봐 주는 윤수는 맞아서 부은 얼굴로 오히려 그녀를 걱정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이 사람은 이럴 수 있을까. 맞으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던 작은 등이 눈에 선했다.
흔들리는 눈으로 담담하게 서 있는 윤수를 바라보다가, 예나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진짜 고마워요. 그 쪽 아니었으면 정말….”
그녀는 당시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통한 줄 알았는데 돌아온 것이 너무 최악의 것이었다. 인기있는 여배우로서의 명성도 너무나 노골적인 취급 앞에 무너졌다. 허물어진 정신은 순간 판단력을 잃고, 저항을 잃도록 했다.
하지만 윤수는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들었을 겁니다.”
그 무너짐의 지점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혼란을 이해했다. 겪었기에 알 수 있다. 큰 사건 속에서 무력함이 얼마나 자신을 깎아먹고 작은 인간으로 만드는지.
“당분간 나쁜 생각 말고 병원도 꾸준히 다녀요. 예나 씨 잘못 아닌거 알죠. 운이 안 좋았던 것 뿐이니까.”
그녀를 달래면서 왠지 윤수는 자신 안의 그림자도 점점 작아짐을 느꼈다.
윤수는 그 날의 자신에게 화해를 청했다. 결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창고문을 활짝 열고 손을 내밀었다.
웅크리고 있던 마른 몸이 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본다. 눈빛이 죽은 창백한 얼굴이 현재의 윤수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한다.
’그때 빨리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던 가냘픈 소망은 시간이 지나도 항상 그 곳에 남아 있었다. 윤수는 두려움에 찬 그 날의 자신을 다독여 이끌었다.
’이제 가자.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으니까.‘
폭력에 꺾이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이 두려웠던 20살의 피윤수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창고 속에서 걸어나왔다.
그를 구하자 이제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준다.
“…고마워요.”
은기는 더 이상 끼어들지 않고 펑펑 우는 예나를 달래는 윤수만을 바라보았다. 그가 겪어야 했던 모종의 일이 약간은 보이는 듯 해서.
‘젠장.’
은기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분했다. 이런 무력함은 오랜만이다.
분명 윤수는 과거에 어떤 험한 일을 당했고, 그 일로 지금까지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하지만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든 과거라면 차라리 빨리 알아서, 그를 위로해주고 싶다.
생각하던 은기는 캡을 잡아 내려버렸다. 풍성한 눈썹 아래 아몬드형의 갈색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위로 따위로 괜찮아질 것 같으면 진작에 괜찮아졌겠지.’
윤수가 그 날의 두려운 창고로 걸어갈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는 복잡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윤수는 기어코 연락처와 계좌번호까지 받아간 예나를 배웅하고 심상치않은 은기의 눈치를 보았다. 후폭풍이 은기 쪽에 남은 듯 하여 불안해졌다. 아까부터 그가 조금 이상했다.
“아까 예나 씨 일 때문에 기분나빠서 그래?”
성큼성큼 주차한 차 쪽으로 걸어가는 은기를 따라가며 윤수가 종종걸음으로 물었다. 은기는 뚱하게 다른 말을 했다.
"혹시나 예나 선배 걱정은 하지마요. 강한 사람이니까. 이대로 당하고 끝날 사람이 아니거든."
물론 그의 말대로 예나는 벌써부터 친한 기자들에게 연락을 넣고 있었다. 그리고 남승우와 그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던 남자의 뒷소문이나 알고 있는 추문 전부를 기자들에게 전달했다.
그때 쫓아가던 윤수가 기어이 그의 팔을 잡았다.
“널 걱정하는 거야.”
“…….”
"같이 가."
팔을 잡혔지만 뿌리칠 생각은 전혀 없는 자가 한숨쉬며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결국 지는 건 언제나 은기다.
그가 단단한 캡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내가 모르고 넘어간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게 언제 터질지 몰라서 걱정돼.”
윤수가 알 수 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급히 얼굴로 손을 가져다댔다. 불안정한 발음으로 그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하진기로부터 시작해 윤수의 말못할 과거, 그리고 송예나의 등장까지. 머리가 복잡한 그였다.
'그놈이 괜한 소릴 해서.'
은기는 김석이 낮에 일부러 예능에서 송예나에 대해 언급한 것을 알고 있었다.
송예나와 하은기의 사귐은 모델들 끼리는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비밀이었던 것이다. 모델 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대선배 격이던 그녀와 짧게나마 만났지만, 서로가 너무 비슷한 부류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금방 헤어졌다.
동류는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를 밀어내기 마련이다.
‘그 사람, 취향이 나랑 겹친단 말야. 짜증나네.’
은기는 윤수를 보던 그녀의 묘한 눈길이 거슬렸다.
'아무리 봐도 그건 관심 있는 눈이던데.'
원석을 찾아 불어지면 날아갈세라 뽀득뽀득 갈고 닦고 예뻐해주고 위로하고 보듬어서 겨우 여기까지 왔다. 엄한 사람이 눈독들이는건 용납 못한다. 빛나기 시작하면 눈치채고 달려들 미래의 하이에나들이 벌써부터 걱정되는 그였다.
"화났어? 아니면 어디 안좋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눈치를 살피는 윤수를 보니 근심이 녹아 사라진다. 못난 질투를 그에게 푸는건가. 한심하다.
“더 빨리 못 막은 나한테 화난거고 남승우 그자식한테 열받은거에요. 아무튼 빨리 병원부터 가요.”
그가 윤수의 손을 휙 잡고 차가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었다. 윤수는 깍지를 끼고 더 꽉 잡아오는 손길에 선선히 미소지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윤수를 데리고 차에 태우면서 은기가 투덜댔다.
“그 자식은 복싱도 하는 놈이라구요. 어쩌자고 덤볐어요?”
윤수가 조그맣게 변명했다.
“덤빈 건 아닌데.”
“끼어든 게 덤빈거지. 그냥 붙들고만 있으라고 했지 누가 끼어들어서 맞으랬나?”
“네 메시지 못봤어. 그리고 다짜고짜 때리는 걸 어떡해.”
차에 올라타며 윤수도 지지 않고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아깐 화나서 힘이 난 거겠지만 막무가내로 덤비면 위험하잖아. 모델이 몸 상할 짓 하면 어떡하냐고.”
은기가 운전석으로 걸어가며 말도 안된다는 듯 냉소지었다.
“난 어릴때부터 이것저것 좀 했거든. 외국으로 떠돌 때 사건도 좀 많이 겪었고. 서양 애들이랑 4:1 로 맞짱뜬 적도 있다니까. 비실비실한 그쪽 이랑 애초에 비교가 안돼.“
보조석에 앉아 벨트를 매던 윤수가 작게 웃었다. 설마.
”풉, 거짓말.”
“못 믿기는. 침대에서 다시 보여줘요?”
“이야기가 왜 그 쪽으로 새?”
윤수는 당황했고 번대편의 은기가 피식거린다.
옆에 앉자마자 키스하려던 은기는 얼굴 전체에 걸쳐 하얀 솜과 붕대 테이프가 가득한 엉망진창인 윤수를 보고 안색이 달라졌다. 굳어버린 은기가 안전벨트를 매고 바로 운전대를 잡았다.
“집까지 태워줄테니까 오늘은 가요. 호텔이고 뭐고 이 상태론 아무것도 안되겠어.”
그리곤 윤수더러 고생했다며 그의 머리를 고양이한테 하듯 쓰다듬었다. 따뜻한 손이 멀어지려 하자 윤수가 그의 손을 반사적으로 잡았다.
그는 은기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한 까만 눈이 미묘하게 일렁였다.
은기도 눈썹을 모았다.
“혹시 머리도 다친 건가? 아파서 그래요? 다시 들어가서 확인하고 치료….”
다친 곳을 만진 건줄 알고 은기가 허둥지둥 병원으로 돌아가려 하자 윤수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혼자 있기 싫어.”
돌아가면 아무도 없는, 사람의 온기 하나 없는 냉막한 집에서 혼자 밤을 버텨야 한다. 따스함에 익숙해진 몸이 이제 어둠을 거부하고 있었다. 고독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윤수는 놀라움이 가득한 은기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천천히 소망을 발음했다. 그라면 알아들을 것이다. 의미불명의 텔레파시라도, 그 이면을 재치있게 알아차려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집에, 혼자 있기 싫어.”
마주보던 은기의 눈이 잔잔하게 요동쳤다. 윤수는 직감했다. 닿았다는 것을. 남승우 일이 있고부터 살벌히 얼어붙어 한 번도 제대로 펴지지 않았던 은기의 눈이 부드럽게 녹고 있었다.
“내가 호텔에서 좋아하는 이유, 다 못 말한것같은데.”
“응?”“가끔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질러주는 과감함도 좋아해.”
은기는 반사적으로 윤수의 어깨를 잡았다가 만신창이가 된 몰골을 재확인하고는 끙끙대며 운전대에 이마를 박았다.
‘빌어먹을….’
보면 키스하고 싶기에 차라리 안보는 게 마음 편하다. 저 아픈 얼굴에 대고 키스하면 윤수가 지옥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가 운전대에 얼굴을 박은 채 입만 열었다.
“가고 싶은 곳 따로 있어요? 아니면 아까 그 호텔방? 우리 집?”
펼쳐진 다양한 선택지에도 윤수는 고민하지 않았다.
“네 집. 거기가 제일 마음 편해.”
안전하고 따뜻한 느낌 가득한, 고양이 두 마리가 평온하고 나른하게 돌아다니는 그 집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윤수의 빠른 대답에 은기는 기대하는 얼굴로 슬그머니 운전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소리가 더 나올까 기대했다.
"일리야랑 투투도 보고싶고."
들어가자마자 달려와 반길 러시안블루종의 호기심 많은 고양이들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져서 윤수의 입가가 즐거이 곡선을 그렸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은기가 엑셀레이터를 밟더니 또 길게 한숨을 지었다.
‘나보다 그녀석들인가….‘
하다못해 키우는 고양이들에게까지 질투해야한다. 피윤수의 애인으로 살기 참 힘들다.
***
은기는 밤새 그를 간호해 주었다. 부은 얼굴에 냉찜질을 하고, 멍투성이인 배나 어깨 등 같은 곳에도 찜질을 해주었다. 아야, 하고 작게 소리를 지르자 은기가 으르렁대며 화를 냈다.
“그때 아예 죽여놨어야 했는데.”
“내버려둬. 경찰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 걸론 분이 안 풀려요. 무슨 일을 써서라도 다음에 꼭 응징하겠어.”
“그러다 철창 들어가면 너 못만나잖아. 안 돼. 난 밖에서 너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아.”
차가운 찜질기가 그의 볼 위에서 덜컥 멈췄다. 윤수가 물음표를 단 채 은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어쩐지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이었다.
“어디서 말 예쁘게 하는 거라도 배우고 와요? 사람 번번이 미치게 하네. 지금 유혹하는 건가?”
윤수가 황당한 듯 그를 쏘아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얼굴로 유혹 하겠어? 오다가도 도망치겠다.”
“왜요? 난 이미 섰는데.”
진심인가 의심하던 눈길은 은기의 사타구니로 향하곤 놀람으로 바뀌었다.
“…취향 참 독특하다.”
“내 취향 모욕하지마요. 이게 피윤수를 발견한 놈이니까. 아, 물론 안경도 잘 고르고.”
은기의 농담에 그제야 안경 생각이 난 윤수가 두리번대며 찾았다. 은기가 일어나서 안경집을 들고와 그에게 건넨다.
“이거 찾아?”
“어! 언제 챙겨둔 거야?”
“호텔에서 미리.”
그는 은기로부터 안경을 받자 크게 안도했다. 없어진 줄 알고 심장이 철렁거렸다.
“안쓰고 나가서 다행이야. 깨질 뻔 했네.”
은기가 어이없다는 듯 안경을 들고 좋아하는 사람을 보았다. 얼굴은 이제 멍이 들어 퍼렇게 변해가는데 좋다고 헤헤 거린다.
“지금 안경이 문제야?”
“문제지. 네가 사준 건데.”
“안경 따위 몇 백개도 사줄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하긴, 썼으면 더 다칠 수도…. 아, 남승우 그새끼 진짜.”
다시 열이 오르는 듯 은기의 손에 들려있던 냉찜질기가 부서질 듯 부들부들 떨렸다. 윤수가 그를 다독였다.
“이제 끝났어. 화내지마.”
“그런 자리 함부로 끼어들지마. 위험하잖아요. 평소엔 얌전하더니 그런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난 거야?”
“그냥, 모른 척 할 수 없었어.”